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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7화 (7/173)

7화

이런 식으로 백 명이 넘는 참가자들을 모두 보여 주려면 이곳에서 한참 대기해야 했다. 연습생들에게 늦게 오라는 얘기를 한 것도 나름의 위계가 작용했기 때문이겠지.

이진은 의자에 깊게 기대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왼편에 앉은 승현이 이진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그저 눈을 감고 감각을 차단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우선 우승부터 하고 생각하는 거야. 성공하지 못하면 평생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사는 거야. 익숙해질 수 있어.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해.’

이진은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이다. 선승현과 백미열은 제작진의 시련을 모두 이겨 내지 않았던가. 곁에서 그들의 대처법을 적당히 모방한다면 큰 문제없이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를 박아 넣을 때마다 반대편 머리에서 대답도 같이 들려왔다.

‘이런다고 우승 할 수 있는 건 맞아? 애초에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으면 이런 대접을 받을 일도 없었어. 날 우습게 여기는 데에 익숙해지기 싫어. 잘난 놈들한테 묻어가려는 건 비겁해. 이렇게 성공해서 나한테 남는 게 뭔데?’

이렇게 성공해서 남는 게 무엇일까. 우선 이진을 늘 비참하게 만들었던 돈 문제가 해결된다. 조금만 굽히면 부모님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명예를, 부당한 일에 침묵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원 없이 무대에 설 수 있게 된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목적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에 정리가 되자 이진은 심호흡을 하며 서서히 눈을 떴다. 정확히는 눈을 반쯤 뜨는 중에 누군가에게 왼쪽 팔이 강하게 붙잡히고, 오른쪽 귀 가까이에서 요란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아악!”

“으악!”

“으아악!”

미열의 비명을 시작으로 깜짝 놀란 이진이 소리를 질렀고, 그에 호응하듯 승현도 억눌린 소리를 내질렀다. 승현은 이진의 팔을 잡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몸을 바짝 붙여 다가왔다. 그리고 이진이 승현을 인식하려던 찰나, 귀신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이진은 놀라 다시 한번 소리를 꽥 질렀다.

“으아아악!”

어느 쪽 참가자인지는 몰라도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던 귀신─분장을 한 스태프─이 장난을 친다고 카메라 앞에 얼굴을 들이민 모양이었다. 미열은 비명 같은 한숨을 연신 지르며 진정하려고 들었고, 승현은 이진의 등과 의자 사이에 얼굴을 숨기며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풉…….”

저 멀리로 출타한 이진의 정신을 도로 끌고 온 것은 앞좌석에서 조용히 시작된 포복절도였다. 요란한 반응에 실소를 내뱉었다가 그게 전염이 됐는지 강당에 모인 사람들이 다 같이 웃기 시작했다. 때맞춰 스크린에서는 귀신을 발견한 세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하는 장면이 송출되었고, 그 세 사람은 강당 문 앞에서 느긋하게 걷던 선발 주자 두 사람을 놀라게 했다. 결국 총 다섯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강당 문을 열었다.

“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아아악!”

이들 다섯 명은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들의 뒤통수를 비추는 스크린을 발견했다. 그들은 방금 전 자신들의 우스운 꼴을 모두에게 고스란히 보이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놀람을 분노로 바꿔 ‘뭐야!’, ‘장난해?’와 같은 소리를 지르며 하나둘 좌석에 앉았다. 다들 씩씩대긴 하지만 진심으로 화가 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이진은 그때쯤이 되어서야 여태껏 옆구리에 찰싹 붙어 있던 승현을 발견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것도 그렇고 심장 소리가 불안한 듯 쿵쾅대는 걸 보니 승현은 아직도 자기가 뭔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악! 선승현아, 너 또 누구한테 민폐 짓이냐.”

뒷좌석을 돌아보던 미열이 이진에게 찰싹 붙은 승현을 발견하고 타박했다. 승현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슬그머니 팔을 풀었다. 이진은 괜히 제가 더 민망해지는 것 같아 슬쩍슬쩍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렸다. 하지만 왼쪽에서 여전히 당황한 듯한 기척이 스멀스멀 느껴졌다.

“저…… 형.”

“네?”

승현이 이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그가 차마 이진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눈을 껌뻑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에요.”

그는 무언가 말하려 시도했으나 초면인 이진에게 이것저것 부탁하기 미안했던 모양인지 고개를 떨구고 몸을 뒤로 뺐다.

‘음?’

보아하니 선승현은 놀랄 때면 다른 사람에게 달라붙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심약한 놈인가? 미열이 ‘또 민폐 짓’이라고 표현한 걸 보아 자주 이러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아까 놀란 여파가 남아 있는 듯했다.

‘타인의 존재가 때로는 안정을 가져다주기도 하지.’

제 경험을 떠올린 이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승현의 팔을 끌고 와 손을 찾아 그 위에 제 손을 턱 덮었다. 그러자 한결 밝아진 승현이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마주하게 다시 고쳐 잡았다. 손을 잡고 나서야 큼직한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진이 승현을 다시 바라보자 그가 작게 감사 인사를 해 왔다.

“……감사합니다.”

그 목소리는 이진이 알던 ‘선승현’의 것이리라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유약하게 들렸다. 이토록 불안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 정말 내가 아는 이가 맞는 걸까? 타고난 힘으로 파워풀한 춤과 컨셉을 소화하며 자신을 1위로 올려 준 팬들에게도 쉬이 웃어 주지 않고, 눈이 높아 연예계에서도 지인을 가려 사귄다던 그 선승현.

이진은 어쩌면 그 모든 이미지가, 지금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악의적인 편집과 루머로 인한 결과가 아닐지 조금은 의심하게 되었다.

출연자가 모두 강당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스크린에는 비슷한 몰래 카메라가 인물만 바뀌어서 계속 송출되었다. 귀신이 나타나거나 길을 잃게 만들거나 하는 소동이 열 번쯤 반복되자 보고 있기만 해도 지겹고 반응도 절로 시들해졌다. 이 많은 영상들이 최종 편집되면 방송에는 5분쯤 나오려나……. 그렇게 생각할 무렵, 마지막 그룹이 강당으로 들어오고 텅 빈 복도를 비추던 스크린에도 드디어 변화가 생겼다.

“안녕하세요, 도전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Winner Takes All’을 시작하겠습니다.”

화려한 이펙트가 가득한 로고와 함께 남성의 목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웠다. 강당 이곳저곳에서 와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이 프로그램에서 여러분은 승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펼치게 됩니다. 먼저 순위 선정 방식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합숙소에서 진행되는 개별 미션과 첫 방송 직후부터 시작되는 시청자들의 투표를 합쳐서 여러분에게는 각각 순위가 매겨집니다.”

모션 그래픽이 간단히 설명을 도왔다. Winner라는 글자 위로 왕관 아이콘이 반짝거렸다. 명예와 권력의 상징. 이진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왕관을 바라봤다.

“투표 순위는 홈페이지에서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최종적으로 등수가 공개되는 건 탈락자들과 1등뿐입니다. 이 룰은 마지막 경연인 생방송 무대까지 적용되며 1등의 자리를 거머쥔 자는 데뷔 멤버와 소속사, 타이틀곡까지 결정할 권한을 얻습니다.”

그 말에 강당이 술렁였다. 이진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1등에게 돌아가는 어마어마한 혜택에 승현과 미열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누가 1등이 되느냐에 따라 데뷔할 멤버가 극과 극으로 갈릴 수도 있었다. 홈페이지에 실시간 투표 등수가 공개된다고 하니 알력 다툼이 심할 건 물론이고, 줄타기 게임처럼 데뷔를 약속받고 미리 1등에게 점수를 몰아주는 사람들도 분명 나올 터였다.

더 나아가 이런 이익 관계는 참가자들 사이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팬덤에까지 영향을 미칠게 뻔했다. 애초에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데뷔한 아이돌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팬덤 내부적으로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점인데, 상위권 참가자의 눈치를 보고 일종의 정치질을 해야 한다면 응원하는 참가자의 등수에 따라 미묘한 권력 관계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었다.

이진은 대체 선승현이 어떤 방식으로 1등을 거머쥐었는지는 몰라도 그 이면에는 꽤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리라 짐작했다. 백미열도 마냥 지금처럼 쾌활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 아침부터 여러분은 스케줄에 맞춰 첫 번째 곡을 연습하게 됩니다. 최종 라운드까지 가게 된다면 여러분에겐 총 다섯 번의 무대를 경험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번 첫 번째 무대는 시청자분들을 처음으로 만나 뵙게 되는 영광적인 자리이므로, 각 포지션 당 한 명씩 가장 큰 성취를 이룬 일곱 명을 선발하여 음악 방송 출연권을 드릴 예정입니다. 이번 라운드에서 여러분의 포지션은 오디션 심사 위원들에 의해 임의로 배정되었으며 다음 라운드에서는 순차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벌써부터 경쟁을 유도하며 압박해 오는 시스템은 악랄하고도 잔인했지만 한편으로는 호승심이 샘솟았다. 드디어 제대로 실력을 증명할 시간이 온 것이다. 이진은 사람을 소모품 취급하는 제작진에게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의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대학에 실기 시험을 치러 들어갔을 때, 얼굴 믿고 온 거면 차라리 연기과를 가라고 말하던 교수가 이진의 노래를 듣고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럼 지금부터 포지션을 일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스크린에 ‘1. 메인 보컬, 2. 리드 보컬, 3. 메인 댄서(센터), 4. 서브 보컬, 5. 서브 보컬(2), 6. 서브 보컬(3), 7. 메인 랩퍼’라는 글씨가 주르륵 나타나더니 그 밑으로 열댓 명의 이름들이 펼쳐졌다.

이진은 메인 보컬부터 차근히 자신의 이름을 찾아봤다. 1번엔 이름이 없었다. 2번에도 이름이 없었다. 4번부터 찾아봐도 이진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1번과 2번이 아닌 곳에서 유 씨가 보일 때마다 흠칫거리게 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진은 다시 한번 첫 번째 줄로 돌아가 제 이름을 꼼꼼히 훑었다. 그러다 보니 1, 2번에 미열이나 승현의 이름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

허탈하게도 이진의 이름은 3번, 승현의 이름은 5번, 미열의 이름은 7번에서 발견되었다.

“형 춤도 잘 췄어요?”

“춰 본 적도 없는데요……. 그보다 랩 좀 하시나 봐요.”

“저 경찰청 쇠창살, 그것도 못 해요.”

미열이 보컬 포지션인 걸 알았지만 괜히 모르 는척 장난을 쳤더니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승현은 제일 무난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파트에 배정됐지만, 이렇다 하는 반응이 없었다. 미열이나 이진의 경우보단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럼, 오다가다 만날 수 있으면 그때 다시 만나요.”

“아, 맞다! 형 번호 좀…….”

이진은 미열에게 번호를 찍어 주며 그가 자신을 잊지 않길 바랐다. 지금으로써는 실수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상위권 내정자와의 친분을 돈독히 쌓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그때 승현이 자연스럽게 제 핸드폰을 삐쭉이 내밀었다. 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라 번호 교환이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님에도 승현은 미열에게 번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굳이 이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이진은 아마도 1위 내정자에게 잘 보인 것 같다는 생각에 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그 뒤를 이어 오래된 자괴감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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