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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6화 (6/173)

6화

‘어?’

이진은 순간 당황했다. 그가 데뷔한 프로그램이니 그가 출연하는 게 당연한 건데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이름을 듣고도 미래의 선승현과 단번에 연결시키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이런 사람이었나?’

이진의 기억 속 선승현은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사람이었다. 트라이엄프에 아무리 관심을 끄고 살았어도 서울 시내 한복판에 살며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당장 이진의 원룸 앞 버스 정류장에도 그의 광고판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선승현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이진은 자연스럽게 그의 오만한 표정과 당당한 자세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은…….

“얘만 너무 빤히 보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 죄송해요. 제가 아는 사람이랑 닮은 것 같아서…….”

이진은 반사적으로 변명하며 황급히 시선을 수습했다. 비록 과거의 모습이긴 하나 기억대로 승현은 훤칠하면서 섬세하게 잘생겼다. 사실은 혼혈인가 싶을 정도로 서구적인 골격과 수채화의 대가가 섬세하게 그린 듯한 이목구비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뒤돌아볼 정도로 조화롭고 보기 좋았다. 연예인이 아니라 다른 직업을 갖겠다고 하면 그런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아깝게 왜 그런 짓을 하냐며 타박을 받을 만한 외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승현은 미래의 슈퍼스타가 아니라 평범한 대학생처럼 느껴졌다. 뭐라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풍기는 위기부터가 전혀 달랐다.

이진을 바라보는 눈빛엔 그 나이다운 약간의 긴장과 호기심이 어려 있었고 머리는 어딘지 부스스한 게 멋 내는 요령이 없어 보였다. 남이 말을 걸어 주길 기다리는 걸 보니 숫기도 없고 내성적인 성격이 아닐까 추측했다.

‘아직 데뷔를 안 했으니까 당연한 건가…….

승현은 길쭉한 손가락을 올려 뺨을 긁적거렸다. 그 동작에서도 이진을 향한 어색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이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노력했다. 선승현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정보다. 어차피 선승현은 1위로 데뷔한 뒤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릴 것이고, 결국 동료와 팬을 저버리고 최악의 방법으로 그룹을 떠날 사람이었다. 당장 그가 가져올 화제성을 이용해 얼굴을 알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끝까지 함께할 인물은 아니었다.

이진이 평소에 자신이 그들에게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는 묻어 두고 그냥 두 사람을 이용하면 되는 거였다.

합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부터 내려놓을 줄 알았는데, 방 배정은 오리엔테이션 이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진은 큰 짐을 입구 한구석, 스태프가 지키고 있는 곳에 놓아두고 집합 장소에 먼저 모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명단을 체크하는 스태프의 뒤에는 아직 캐리어 두세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미열은 이진의 가방을 받아 제 캐리어 위에 툭 올려놨다.

“저기 바닥에 빨간 선 보여요? 저기부터 카메라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둘은 쫄보라 사람들 더 모일 때까지 기다리려고 여기에 서 있었어요.”

“조금 일찍 도착했나 봐요?”

이진이 미열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게 아니라…… 집합 시간을 조금씩 다르게 알려 줬어요. 연습생인 친구가 있어서 아는데 걔는 집합 시간이 30분 늦더라고요. 일찍 오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하고.”

제작진이 무슨 속셈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진이 아, 하는 대꾸 외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미열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봤을 때, 우리는 일반인조로 묶인 것 같거든요. 이렇게 한 조로 묶어 두고 다른 조랑 경쟁 붙이는 거 아닌가 싶어서…….”

나름 타당한 추측이었다. 소비자들의 취향은 각양각색 천차만별이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하는 패턴은 꽤 명확했다. 어느 정도는 사회적 학습의 결과이기도 했으며 전략적으로 파고들 만큼 충분한 샘플들도 있었다.

이제 그 타입을 어떻게 사용하고 대중들에게 어필하느냐는 제작진 손에 달린 문제인데, 미열의 말대로라면 제작진들은 이미 이진을 비롯한 참가자들의 캐릭터를 대략적으로 잡아 놨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집합 시간이 다르다고 해도 고작 30분 차이인 데다 세 명은 일반인조라고 묶이기에는 너무 적은 수 아닌가요?”

이진이 그럴싸한 지적을 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미열과 승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미열은 다소 비장한 표정을 하고 두 사람을 향해 들어가자고 말했다.

“결국 들어가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니까요.”

“……왠지 여기에도 카메라 숨겨져 있을 것 같으니까 빨리 들어가요.”

비장한 표정만 짓고 막상 앞장서지는 않는 미열의 등을 밀며 이진이 재촉했다. 승현이 두 사람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빨간 선을 간신히 넘은 세 사람은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유심히 살피거나 경계해 가며 조심조심 강당으로 향했다. 제일 앞장선 미열은 뭔가 불안한 듯 연신 승현을 바라봤지만 승현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인지, 아까의 어색한 공기는 어디로 가고 이진의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무슨 일 있어요?”

“…….”

“…….”

두 사람이 동시에 침묵했다. 이진이 어리둥절해하며 멈춰 서자 승현과 미열도 멈춰 눈치 게임을 하듯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결국 승현에 비해 말이 훨씬 많은 미열이 입을 열게 되었다.

“사실, 어제 우리끼리 한 말이 있는데…… 그거랑 너무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아서 걱정돼서 그래요.”

이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뭔데요?”

미열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대답을 미루다가 이진이 ‘말하기 싫으면 말아요.’ 하고는 다시 걸으려고 하자 급하게 그를 멈춰 세웠다.

“아직 정식으로 촬영 시작된 것도 아니라 방심하고 있는 참가자들 놀래 준다고…… 귀신이라도 등장하는 거 아닌가 했거든요.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웃어넘기긴 했지만. 근데 이상하게 복도가 유난히 길고 아무것도 없어서…….”

‘귀신’ 소리에 이진도 덜컥 긴장이 됐다. 어쩐지 바짝 붙어 오더라니. 선승현이 고작 귀신 분장한 스태프 따위에 겁을 먹는다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인식하고 나니 길고 끝이 없는 복도와 깜빡거리는 형광등이 수상해 보이고 분위기도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발소리는 또 어찌나 크게 울리는지 터벅대는 발소리가 세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려왔다.

터벅, 터벅. 터벅…….

“…….”

세 사람은 잔뜩 긴장한 채로 카메라가 잔뜩 달린 복도를 지나갔다. 다행히 강당에 도착할 때까지 귀신은 나오지 않았다. 강당 문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긴장이 급격히 풀려 입도 같이 풀어진 미열은 조잘조잘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안 그래 보여도 선승현이 얼마나 겁이 많은지, 도대체 귀신도 없는데 이렇게 길고 먼 복도를 굳이 걸어오게 만든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 떠들어 댔다.

미열처럼 긴장이 풀려 나불대진 않았지만, 이진의 옆구리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붙어 있던 승현도 다시 두 발자국쯤 떨어진 거리로 돌아갔다. 이진은 승현과 닿을 뻔한 자리에 그의 체온이 남은 듯해 괜히 팔을 비볐다.

“안녕하세요.”

끼익, 미열이 강당 문을 열자 작은 영화관 같은 공간이 나왔다. 정면의 스크린과 벽에 달린 어두운 촬영용 조명만이 유일한 광원이라 더 영화관 같았다. 공연용으로도 쓰이는지 스크린 앞에는 작은 단이 올라와 있었다. 이진이 눈을 부비며 어둠에 적응을 하는데 앞에 선 미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스크린에는 방금 세 사람이 지나온 복도를 걸어오는 두 남자의 영상이 띄워져 있었다. ‘와 새 건물인가 보네.’, ‘투자 많이 받았나 보다.’ 하고 도란도란 떠드는 목소리도 들렸다. 스크린에 가까운 자리엔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는지 의자 위로 튀어나온 머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몇은 뒤돌아보며 세 사람을 향해 어서 오라는 인사를 하기도 했다.

“우리도 나왔나 본데?”

“음…….”

유난히 긴 복도가 참가자들간의 일상적인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였음을 알게 되었다. 화면 속 두 남자는 그들의 대화가 편집도 없이 고스란히 송출되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한 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불과 몇 분 전의 이진과 마찬가지로.

예상 이상으로 제대로 된 설명도 경고도 없이 출연자가 당황하게끔 의도된 진행은 실력을 증명해 데뷔시키는 게 아닌, 티끌 같은 흠을 찾아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프로그램 같았다. 참가자들의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낸 뒤 해당 영상을 방송에 내보내지 않는 조건으로 참가자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지도 몰랐다.

제작진은 보안상의 문제니 뭐니 하며 정확한 프로그램의 일정과 시스템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참가자들도 오늘 집합한 뒤 자세한 내용을 들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다 모이기도 전에 이렇게 공개적으로 신고식을 치룰 줄은 몰랐을 것이다.

출연자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태도가 이런 사소한 곳에서도 드러나니 이제는 프로그램을 성공시킬 자신감이 어지간히 대단한가 보다 하는 삐뚤어진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윈올은 아주 가열 찬 성공을 거두긴 한다.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는 물론이고 매회 차마다 자체적으로도 시청률 신기록을 갈아 치우는 대단한 행보를 보였다. 윈올을 통해 데뷔한 트라이엄프도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뛰어넘어 연예계에 확고하게 자리 매김을 하고 정상의 자리를 거머쥔다. 이진의 뒤에 선 승현을 필두로, 일곱 명의 승리자들은 이런 대접을 견뎌 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낸 것이다.

분명 처음 명함을 받으며 각오를 했는데도, 이진은 도무지 이런 상황들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이진을 지탱해 온 것은 자아를 꽁꽁 둘러싼 자존심과 성공하겠다는 오기, 그리고 어느 정도의 체념이었다. 궁지에 몰리는 기분은 아주 익숙하면서도 거부감이 들었다. 이렇게 작은 굴욕에 익숙해지는 순간 이진을 지탱하던 것들이 무너져 버린다.

마음 같아서는 제작진에게 달려가 사람이 우습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아마 이 인원들 속에는 이진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도 모두 침묵을 지키며 제작진에 순응했다. 암묵적으로 감내해야 할 무례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작은 소용돌이가 사고 회로를 잠식했다. 외면하고 싶었던 감정들이 다시금 피어오르고 있었다.

“형, 우리도 가서 앉아요.”

다행히 이진을 잡아끄는 미열의 목소리와 승현의 손길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강당 안이 어두워 표정을 어렵게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위안이 되었다. 미열과 승현은 이진을 가운데에 두고 중간 자리쯤에 나란히 앉았다.

“실컷 보여진 만큼 우리도 즐기자고요.”

미열이 가볍게 말했으나 이진은 곧 만나고 관계를 쌓을 사람들의 대화를 굳이 관음하고 싶지 않았다. TV를 보지 않은지 오래되어 이런 식의 시선이 유행하는지 몰랐고, 익숙하지도 못했다. 화면은 어느새 이분할 되어 왼쪽에는 아까의 두 사람을, 오른쪽에는 후문에서 새로 들어오는 세 사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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