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스튜디오 비긴의 가장 큰 고객이자 물주인 피치 엔터의 최고 인기 그룹은 두말할 것 없이 ‘트라이엄프(triumph)’였다. 그리고 해당 그룹에서 제일 인지도가 높은 멤버가 바로 선승현이었다.
그런데 3년 차 아이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찍고도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던 그가, 무슨 이유에선지 돌연 탈퇴 선언을 했다. 그것도 본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팬 미팅 현장에서.
“진짜 미쳤나? 회사랑 상의한 게 아니라고요?”
“완전 비상인가 봐. 실장님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당분간 연락이 힘들 것 같다고 하시네.”
“작업은 그대로 진행하라는 거 보면 엎어질 것 같진 않은데…….”
팬 미팅 현장에서 무계획 탈퇴 선언을 한 아이돌이 받을 비난 중에선 제법 유할 말들이 오고 갔다. 사건 사고가 많은 연예계와 퍽 가까운 탓에 떠들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스튜디오에서 이틀째 같은 화제로 열을 내고 있는 풍경은 흔치 않았다. 보통은 그 화제의 인물이 업무와 관련된 사람이거나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킨 경우에나 있는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선승현은 그들 업무와 몹시 밀접한 사람이었고, 그의 기행은 오늘 아침 뉴스에도 보도될 만큼 많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요즘 애들 진짜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
“그러니까요. 아니 그냥 연습생 거쳐서 데뷔한 것도 아니고 서바이벌 오디션 방송으로 뽑힌 거잖아요! 막말로 팬들이 길 닦아 주고 레드카펫 깔아 주고 꽃잎도 뿌려 줬는데, 멋대로 경로 이탈하면 도리가 아니지 않나요?”
트라이엄프의 오랜 팬이던 혜리가 씩씩대며 분개했다. 혜리의 무서운 기세에 재민과 지원은 말을 아꼈다.
‘트라이엄프(triumph)’는 케이블 방송사 SSTV에서 기획 및 방영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인 ‘Winner Takes All’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일곱 명으로 결성된 남자 아이돌 그룹으로, 방송 당시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상승세를 타며 매일같이 전성기를 갱신했다. 그리고 절정의 인기가 무엇인지 보여 주듯 브라운관과 번화가를 점령한 그들의 가장 큰 동력원이 바로 프로그램의 최종 우승자이자 리더인 선승현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요. 선승현이 데뷔 전부터 욕을 좀 먹었어요? 데뷔 때부터 딱 3년 만 죽은 듯이 참고 그 뒤로는 다 때려치운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혜리 씨 팬치고는 냉정하네.”
“팬이어서 보이는 것도 있으니까요. 에휴…….”
퇴근할 무렵이 되어서야 조금 진정이 됐는지 혜리가 탄식하며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승현은 트라이엄프라는 그룹에게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첫 방송부터 인성 논란으로 존재를 각인시키더니 매주 새로운 논란거리를 만들어 냈다. 턱 하니 다리를 꼬고 앉아 제작진에게 게임의 룰을 수정해 달라고 요구했을 땐 내일 없이 사는 선승현이라는 말이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를 도배했고, 어느 곳에선 ‘승현하다’가 곧 내일 없이 산다는 은어로 정착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일화는 팬과 안티, 양쪽에 의해 아주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이슈가 되었던 소문이자 이진이 승현을 결정적으로 싫어하게 된 사건은 바로 ‘선훤 그룹 오너 일가설’이다. ‘설’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증거가 명확한 사실이었다.
당시, 이 일이 큰 화제가 되었던 건 승현이 프로그램 방영 당시나 데뷔 이후 예능에서 종종 어려운 시절의 추억을 꺼내며 어머니, 어린 동생과의 끈끈한 유대를 짐작케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뚜껑을 까고 보니 대기업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의 오너 일가였던 것이다.
그의 이미지 메이킹이 얼마나 효과 만점이었는지는 그 사건 이전, 선승현을 향한 팬들의 간증에 꼭 ‘가정적인’, ‘속이 깊은’ 등의 수식어가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가난을 직접 겪은 이진은 누군가는 감추기 바쁜 불행을 단순히 방송 내에서의 동정표를 위해 가볍게 이용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게다가 결국 흐지부지 묻히긴 했지만, 소문의 시작은 선승현에게 학교 폭력을 당했다는 익명의 글이었다. ‘선승현의 아버지가 재벌이라 사건이 묻혔다.’, ‘돈을 써서 입을 막았다.’는 등의 뜬금없는 주장을 들고 오자 네티즌들이 선승현의 뒤를 조금씩 파 보게 되었다. 그들은 선승현의 얄팍한 거짓말 밑에 숨은 진실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익명의 글이 올라온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선훤 그룹 현 회장의 막내 조카가 아내와 사별한 뒤 마찬가지로 남편과 사별한 연상의 비서 실장과 비밀리에 혼인을 했으며, 그 비서실장 아들의 이름이 ‘승현’과 ‘재현’인 것까지 밝혀졌다. 그들 일가의 성이 ‘선’인 건 굳이 누가 짚고 넘어가지 않아도 유명했다.
선승현이 선훤 그룹 일가인 것을 안 사람들은 한순간에 태도를 달리했다. 그를 두고 다소 까칠하지만 내면엔 가정적이고 부드러운 남자가 숨어 있다던 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물 한 잔도 제 손으로 떠 마시지 않는 재벌’이라며 고상하고 우아하단 수식어를 갖다 붙이며 그를 떠받들었다. ‘내일 없이’ 살던 건 선승현이 아니라 감히 선승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PD였다는 우스갯소리도 유행했다.
이 소문에 대해 소속사는 제대로 된 피드백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그 이후 선승현은 선훤 그룹 계열사의 광고를 보란 듯이 독식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선승현이 그 자리를 꿰차는 것이 몹시도 당연하게 여겼다. 정작 선승현의 과거를 고발한 익명의 글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근데 선승현 진짜로 어땠어요? 오빠는 회의하면서 몇 번 본 적 있잖아요.”
혜리가 이진에게 물었다. 이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실물을 떠올렸다. 조각 같은 외모는 사실이었지만 그 외에는 잘 모르겠다.
선승현은 회의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다가 대화가 끝나면 회의실을 쏜살같이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기억나는 인상이 없었다. 차라리 선승현에 비해 인지도는 조금 떨어질지라도 백미열이나 한찬우 같이 싹싹한 타입이 더 기억에 남았다. 애초에 이진은 선승현을 향한 개인적인 악감정이 가득하기에 무슨 행동을 해도 좋게 보지 않았겠지만.
한 가지 기억나는 일화가 있기는 했다. 첫 미팅 날 선승현이 이진을 길 잃은 연습생으로 오해해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인데, 그 일로 재민에게 몇 번이고 놀림을 받았던 터라 생략하기로 했다.
“바쁜 사람이라……. 난 녹음 참여도 안 하니 아는 것도 없지.”
“그래도 데뷔 초부터 봤으면 좀 친해질 법도 한데. 아, 오빠한테 할 말이 아니긴 하죠.”
혜리가 이진의 부족한 사교성을 꼬집으며 말했다.
“난 또 오빠가 선승현 싫어하는 이유가 있는 줄 알았죠, 뭐.”
“싫어하는 거 아니래도.”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선승현에 대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모두들, 좋아하던 스타로부터 배신을 당해도 단단히 당한 혜리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프로젝트가 팬들의 여론에 따라 캔슬당할지 모르는 위기에 처한 재민의 기분을 배려해 맡은 일에만 집중했다.
결국 프로젝트가 당분간 중단되어 이른 퇴근을 했다. 이진은 익숙하게 편의점에 들러 캔 맥주 코너로 향했다. 자주 마시던 맥주는 몇 달 전 선승현이 광고를 찍은 이후 그의 사진이 가격표 옆에 붙어 있었기에 손이 가지 않게 됐다. 요새는 새로운 브랜드를 도전 중이었다. 맥주 캔을 입가에 대고 정면을 응시한 선승현의 사진과 눈이 마주친 이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가 광고하는 제품은 구매하지 않고 어쩌다 광고판의 사진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인상을 찌푸리지만, 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이 얼마나 모순된 감정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진은 그를 향한 분노와 혐오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진도 자신의 열등감이 건강하지 못한 감정임을 알았다. 솔직히 어른스럽지 못하게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에 아직까지도 얽매여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쉽게 떨쳐 버리기에는 혼자 쌓아 올린 감정의 골이 깊었다. 그래서 명백히 그의 안에 실존하는 감정이었지만 이진으로서는 덮어 두고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편의점 봉투를 들고 돌아가는 길목이 유달리 외로웠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이진은 늘 외로웠다. 이진에게 외로움은 오랫동안 닦지 않아 빼낼 수도 없이 슬어 버린 녹 같은 것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고 감성적이게 되는 날이면 종종 영혼마저 녹슬어 감을 느꼈다.
여섯 자리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면 언제나처럼 어둡고 서늘한 집이 그를 반겼다. 이진은 혼자 사는 집이 어두운 게 싫어 언제나 작은 전등을 켜고 나갔다. 그래도 집 한구석에 깔린 어둠을 모두 걷어 낼 수는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텅 빈 칸에 맥주를 채워 넣었다. 자주 마시진 않아도 네 캔부터 할인이 되어서 한 번에 여러 캔씩 사 냉장고 구석에 쟁여 놓았다. 이진은 결국 원래 마시던 맥주를 구입했다. 캔에 그의 얼굴이 프린트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씻고, 술을 마시고, 누워 있다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가고, 돌아와 침대에 눕기까지 이진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침대에도 자야 할 시간이 되어 누웠을 뿐 잠이 오지는 않았다. 알딸딸한 기분이 된 이진은 또다시 습관적인 후회를 이어 갔다.
‘그때 차라리 자존심이라도 꺾을 걸. 이제 남은 건 자존심뿐이네.’
만약 과거로 돌아가 그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안간 힘을 써서 인기를 얻으리라. 무대에 올라 내 최선을 보여 주고 서러웠던 어린 시절의 노력을 모두에게 인정받으리라. 그리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지 못하도록,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어.’
타고난 성격이 소심하고 얌전한 이진치고는 대담한 생각이었다. 술기운을 빌린 비장한 맹세가 끝날 무렵 이진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조차 꾸지 않을 만큼 아주 깊은 잠이었다.
***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특이점 하나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살았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얼굴 하나는 반반한데, 그쪽도 관심 있으면 연락하던가.”
3년 전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옜다, 그렇게 억울하면 어디 다시 살아 보던가.’ 하고 시간을 돌린 것처럼 캐스팅을 당했던 바로 그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