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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화 (1/173)

1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숨죽여 무대를 바라본다. 드디어 지난 반년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바로 오늘 태양이 저문 밤하늘 아래,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새로이 떠오를 별이 결정된다. 그들의 손으로 뽑은 최대 다수가 바라는 사람.

푸른빛의 하이라이트가 무대 위를 이리저리 오가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스피커에서는 몇 번째 반복되는지 모를 음산하고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 아무런 말없이 뜸을 들이자 현장에 모인 관객들도, TV로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절로 애달픈 소리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투표가 마감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시청자 여러분과 참가자분들의 길고도 짧은 여정이 막을 내립니다.”

무대 위에는 스물한 명의 어리고 잘생긴 청년들이 순백색의 옷을 입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처분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고개를 푹 떨구거나 꼭 맞잡은 두 손을 벌벌 떤다. 간신히 태연한 척을 한 이들 역시 미세한 근육의 떨림까지 잡아내는 카메라를 피할 수는 없었다.

“무대에 계신 모든 분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노력하는 여러분이 맞이할 길은 분명 아름다운 꽃길일 거라, 감히 예상해 봅니다.”

축복의 말에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무대 위의 소년들은 모두 웃음기 하나 없이 초조해 보였다. 이다음, 사회자의 입이 열리면 일곱 명의 탈락자가 발표된다.

간신히 마지막 무대까지 올랐지만 최종 관문 바로 앞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이들. 현저히 낮은 투표수에 자신의 탈락을 예감한 이들은 아직 이름이 불리기 전에도 표정이 어두운 반면, 상위권 진출이 확실한 이들은 덤덤한 표정으로 마네킹처럼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안타깝게도 데뷔 후보에 들지 못한 일곱 명의 탈락자, 발표해 주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광판에 탈락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거나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응원해 준 팬들을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윽고 탈락자들이 모두 무대 밑으로 사라지고, 열네 명의 참가자만이 남았다.

지금부터가 대본 없는 연극의 시작이었다.

시청자 투표수와 오늘 무대의 심사 위원 평가 점수를 합산하여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 붉은 보석이 박힌 화려한 왕관과 금사로 수놓은 붉은 망토를 수여받을 승자는, 모습 그대로 왕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된다.

데뷔 후 그룹명과 첫 활동곡은 물론이고 첫 앨범의 이름과 타이틀곡, 자신의 그룹을 관리할 소속사까지 결정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승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지막 라운드까지 생존한 열세 명의 참가자 중 자신과 함께할 멤버 여섯 명을 고를 수 있었다. 그전까지의 투표 성적은 선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단 한 끗 차이로 우승하지 못한 사람이 탈락하고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부지한 꼴등이 데뷔의 영광을 거머쥘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참가자와 시청자 모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규칙이었다.

“여러분의 손으로 피워 낸 단 한 명의 승자! 모든 걸 거머쥐고 영광의 자리에 오를 하나의 별.”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거대한 전광판에 두 사람의 프로필 사진이 띄워지더니 이내 현장 카메라 영상으로 바뀐다. 담담한 표정의 두 사람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자 흥분에 찬 관객들의 함성 소리가 거대한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대형 기획사 6년 차 연습생 정하늘과 일반인 오디션 합격자 선승현. 이 둘의 대결 구조가 시청자들이 가장 고대하던 것이었다. 실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어리고 매력 있는 멤버들을 선호하는 정하늘과 실력과 성실도를 가장 중요하게 보는 선승현이 만들어 나갈 그룹의 성향은 전혀 달랐다. 이 말은 즉, 남아 있는 다른 참가자들도 순위가 아무리 높다한들 긴장을 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끊이지 않을 것 같던 환호가 잠잠해지고, 다시 장내가 침묵에 휩싸였다. 두 우승 후보는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서로에게 한마디씩 말을 건네고, 각자의 각오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드디어 1등 발표가 시작됐다.

첫 무대부터 눈에 띄는 실력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고 타고난 재능에도 노력을 등한시 하지 않아 심사 위원의 마음을 사로잡은 참가자. 또한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다정해 같은 참가자들에게마저 사랑받은 사람.

방송 후반에 이르러서 과거에 대한 안 좋은 소문과 연이은 태도 논란, 자신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돈으로 무마했다는 오명을 쓰며 이슈 메이커로 자리 잡았으나, 끝까지 태연함을 잃지 않고 방송을 완주해 우승 후보로 우뚝 자리한 사람.

우승자를 수식하는 문장에 관객들이 조금씩 웅성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술렁임으로 변했다.

“여러분의 스타, 밤하늘을 첫 번째로 수놓을 별. 영광의 주인공은…… 바로, 선승현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우승자 발표가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폭죽 소리와 함께 종이 꽃가루가 터져 나왔다. 색색의 꽃가루가 팔랑이며 무대 위를 날아다니고 참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치며 우승자를 축하해 주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 듯, 혹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 듯 기쁜 내색 하나 않고 무표정으로 허공을 떠다니는 꽃가루와 눈앞의 조명을 응시하던 우승자는 곧 달려온 동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우승자를 끌어안고 머리와 등을 마구 쓰다듬었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밝고 경쾌한 음악과 어우러져 한 편의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카메라 감독은 이를 TV를 통해 소식을 접하는 시청자들에게 생생히 전했다.

인생 역전의 주인공, 선승현은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돌출 무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여전히 꿈을 꾸는 듯 어딘지 멍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를 이끌어 준 팀 멘토가 길의 끝에서 왕관과 망토를 들고 오늘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곧 그의 머리 위에 빛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왕관이 씌워지고, 어깨에는 때마침 바람이 불어 흩날리는 망토가 둘러졌다. 선승현은 곧바로 뒤를 돌아 자신과 함께할 멤버들을 호명하기 시작한다.

모든 차례가 끝나자 새로이 결성된 그룹이 팬들을 향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동안 고생한 동료와 스태프에게 작별 인사도 전했다.

팬들의 환호와 아쉬움, 선택받은 이들의 기쁨과 한계에 부딪힌 이들의 슬픔. 이들이 그려 낸 훌륭한 서사에 대한 감동과 주인공을 향한 질투. 오만 감정이 뒤섞인 혼잡한 현장은 그래서 더 극적이었다.

빛 아래에 선 승자와 그림자에 갇힌 패자.

그리고 방구석에서 TV를 보며 뒤늦은 후회에 괴로워하는 자신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보지도 못한 진정한 패배자였다.

***

올 해로 스물일곱이 되는 3년 차 작곡가 유이진은 지금도 후회하는 과거가 하나 있었다.

3년 전, 어느 날 가수 지망생이었던 그는 길거리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로 캐스팅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딱히 아이돌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캐스팅이랍시고 말을 거는 꼬락서니가 상당히 무례했기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를 거절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방송은 대박이 나고 방송을 통해 데뷔한 그룹은 초대박이 났다.

생활고로 일찍이 가수의 꿈을 접고 작곡가가 된 이진은 결국 꿈을 이룬 그들을 부러워하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감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되었다.

처음에 느낀 순수한 부러움은 그들의 실력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밀려오자 어느새 질투로 변모했다. 그리고 데뷔 전부터 인성 논란이 있었던 프로그램의 우승자 선승현이 온갖 추문을 집안의 돈으로 무마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분노가 되었다.

자격 없는 사람에게 과분한 자리가 주어졌다. 만약 자신이 그 기회를 얻었더라면 결코 그렇게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열등감이 되어 이진을 좀먹었다.

이진의 세계는 늘 흑백이 명확했다. 어른과 아이, 부와 가난, 승자와 패자. 경쟁 사회에서 가난이란 패널티를 안고서도 치열하게 맞부딪혀 살아남은 이진은 특히 승패에 민감했다. 그는 얼마나 많은 경쟁에서 승리했느냐가 곧 그 사람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오래 전 이진의 말을 들은 누군가 ‘그런 건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나 따지는 거야.’라고 말했지만, 늘 당장 내일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 같은 태도로 매일을 사는 이진에겐 별 와닿지 않는 대화였다.

세간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진은 제법 성공한 인생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타인보다 출발선이 뒤에 있었음에도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해 냈다. 지금의 이진은 예전처럼 작은 단칸방에 살지도 않았고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식사 메뉴를 결정할 수 있으며 동종 업계 평균보다 높은 연봉을 지급하는 직장이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여전히 궁상맞다 여겨질지도 모르는 평범한 삶. 지금의 일상이 이진이 거머쥔 승리의 대가였다.

‘하지만…….’

이진은 종종 과거를 돌이켜보며 상념에 잠겼다. 과연 이게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일까. 고작 이게? 그 치열한 삶이 겨우 이까짓 걸 위해서라고?

“선승현 탈퇴한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평화로운 오후의 점심시간, 멍하니 도시락을 헤집던 이진의 손이 멈칫했다. 원형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같은 도시락을 먹던 동료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던졌다. 그에 옆자리에 앉은 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블을 쿵 내려치며 대답했다.

“개인 팬이 제일 많으니까 그룹 활동이 손해였던 거지.”

“그래도 그렇죠! 재계약 시기 되자마자 발 빼는 건 완전 벼르고 있던 거 아니에요? 다들 벌써 다음 앨범 준비에 들어가고 있는데 다 같이 엿 먹으라는 거야, 뭐야?”

“그러게……. 어쩐지 이진 씨가 싫어하더라니. 인성이 별로였구만?”

듣지 못한 척 넘어가려고 해도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상, 대화가 자신에게 향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이진은 괜히 먹지도 않을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걸 멈추고 살짝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동료들을 마주 봤다. 은근한 눈빛을 보아하니 이진이 선승현에 가진 불쾌감을 들춰내고 싶어 안달인 듯했다.

“싫어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어머? 오빠, 그 정도면 싫어하는 거예요!”

스튜디오 막내이자 이진의 학교 후배인 강혜리가 즐거운 표정으로 그를 공격했다. 늘 시큰둥한 이진을 놀릴 건수를 잡아 제법 신난 모양이었다. 스튜디오 창립 멤버이자 이진의 학교 선배인 김지원은 혜리의 말에 기계적으로 동의하며, 이진이 뒤적거리던 샐러드를 뺏어 먹었다.

“그나저나 설마 컴백이 아예 엎어지진 않겠죠? 우리 대표님 좋아하던 게 눈에 선한데…….”

“계약 만료가 아슬아슬하게 컴백 일정이랑 맞물리는 것 같기는 하네. 그래도 이게 정규인데 아무리 짧게 활동해도 한 달은 해야 할 거 아냐?”

지원이 컴백 예정일과 계약 만료일을 어림짐작할 무렵, 한참 건물 비상구에서 전화를 하던 대표가 컵라면과 함께 돌아왔다. 고재민은 스튜디오 대표이자 이진의 학교 선배로 학부 시절부터 싹싹한 태도로 인맥을 갈고 닦아 현재의 스튜디오를 창업했다. 학교 위 기수와 아래 기수 통틀어서 가장 안정적으로 회사를 운영 중이기도 했다.

“파토 나진 않는단다.”

“대표님, 이거 내부자 정보 맞죠?”

“응. 아직 언론에 뿌려지진 않았고……. 뭐, 그래도 알 사람은 다 알지.”

재민이 의자를 끌고 와 원형 테이블에 합류했다. 컵라면만 드실 거냐는 혜리의 걱정 섞인 잔소리를 입맛이 없다는 말로 그치게 한 재민은 후루룩 라면을 들이켜다가 이진과 눈을 맞췄다.

“이진아, 실장님이 네가 작업한 곡들 다 좋다고 하시더라. 아직 멜로디만 있는 것도 수록 가능하게 작업해 달라고 하셨어. 트랙은 내가 만들 테니까 목록 보낸 것들 적당히 다듬어서 업로드 부탁해.”

“네.”

무대의 주연이 관둔다고 사표 내고 떠난 마당이지만, 뒤에 남은 소시민들은 여전히 계약서에 종속되어 남은 뒤처리를 끝내야 했다. 이진은 자기가 대체 뭘 보냈는지 떠올려 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재민이 대뜸 젓가락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는 이진을 바라봤다.

“……유이진 씨. 넌 좋지도 않냐? 혜리는 막내니까 그렇다 치고. 지원이랑 내 작업물 싹 제치고 대부분 니 이름 달고 나가게 생겼다니까?”

이진은 닭강정을 깨작이다 재민의 낮아진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스튜디오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에 혜리가 나섰다.

“작곡가 유이진 아니고 ‘스튜디오 비긴’으로 나가잖아요, 대표니임.”

“그게 아니라…… 다른 곳도 아니고 피치 엔터에서 니 곡을 좋게 봤다고 하는데 조금 더 기뻐할 만한 일 아니야?”

재민이 답답하다는 듯 말하고는 괜히 흥분한 게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컵라면 국물을 홀짝였다.

피치 엔터테인먼트는 바비, 루키와 함께 연예계를 장악한 대형 연예 기획사다. 가수들이 딴따라라고 폄하당하던 시절부터 대중 음악계의 뒤를 지키던 오래된 대기업으로, 음악 좀 한다는 사람들이 아이돌을 가수로 인정하지 않고, 아이돌들조차 자연스럽게 무대는 하나의 수단일 뿐 개인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나서는 요즘 같은 때에도 꿋꿋이 소신을 지켜 왔다. 그들은 아이돌의 이름을 달고도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든 인정받을 수 있는 후예들을 키워 냈다. 고지식하긴 하지만 업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철학이었다.

그런 피치 엔터가 이진의 곡을 대거 채택한 것은 커리어적으로 굉장히 좋은 신호였다. 소식을 접한 세 사람은 당장 내일 이진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이진은 살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할 뿐이었지만.

“그냥 이번 컨셉이랑 제 느낌이 맞았나 보죠.”

지원과 혜리는 익숙하게 이진의 겸손한 대답을 흘려들었다. 이진은 자신의 실력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한 고집이 있었다. 그러나 재민은 방금보다 더 신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유이진 씨, 조금 더 의기양양해도 괜찮아요. 아무리 내가 지금은 트랙 메이커고 지원이가 작사가라 해도 작곡만 10년째거든. 작곡이 영감이 전부인 게 아닌 건 알잖아. 이제 고작 3년 차인 이진 씨가 우리를 제치고 인정받았다? 이건 진짜 대단한 거예요. 가만 보면 앞으로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사람다운 태도인 것 같다가도, 그냥 아무 미련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그래.”

“형.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요. 이진 씨가 그냥 우리 기분 나쁘지 말라고 배려해 준 거지.”

이번에도 이진이 말을 하기도 전에 지원이 나서서 이진을 옹호했다. 재민도 너무 대단한 일이라 자신이 흥분했다며 적당히 방금 전 대화를 웃어넘겼다. 이진은 재민의 표정을 관찰하다 다시 도시락으로 눈을 돌렸다.

예고 출신의 두 사람이 작곡과도 아닌 이진에게 뒤쳐진 것 같아 열등감을 느끼는 걸까 확인해 봤지만, 방금 재민의 표정은 진심으로 이진을 걱정하는 걸로 보였다. 미래를 촉망받는 후배를 향한 진심 어린 충고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열등감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 습성이 혐오스러웠다.

물론, 이진도 대중음악 업계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k-pop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기획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작곡이 아니라 노래로. 시간이 흐를수록 욕심은 커져 갔다. 이진의 열정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이들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그래서 이진은 늘 그렇듯 별다른 대꾸 없이 제 할 일을 이어 갔다. 방금 전 대화에 참가했었다는 것도 모를 만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들 중 그 속에 어떤 마음을 숨기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일찍이 마음을 굳게 걸어 잠근 이진을 간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이진은 작곡가로서의 성취에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 작곡은 자신의 억눌린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그 자체가 이진의 본질을 꿰뚫지는 못했다. 이진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폭발적인 감각을 알았다.

무대에 서는 것. 공연자로서,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 모두가 나만을 바라보는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의 환호성에 전신이 짜릿해지는 순간을 단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적이 있다면, 그 감각을 결코 잊을 수 없을 터였다.

이진의 열망은 한결같이 무대 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대 위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쳐 버렸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게 기회가 주어졌던 날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젠 습관으로 굳어져 버린 후회를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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