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61)화 (161/176)

161.

“⋯이 대륙에 은혜와 은총과 은덕이 흘러넘치기를 바라옵나이다. 라 프리라 엣-사.”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10월 셋째 주 화요일, 블랑 쿠퍼 교수의 성장과 성찰 시간이었다. 나는 이제 수업이 시작되기 전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기도 덕분에 내가 바라는 것, 앞으로 해야 할 것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고 정리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중원에서의 나도, 지금의 나도 어떠한 인격신을 따르고 추앙하는 법을 몰랐다.

막연하고 거대하며 모호한 개념은 나를 자주 혼란스럽게 했다. 나를 이 땅에 내린 것이 상제의 일인가 싶었다가도, 아무 뜻 없이 벌어진 일이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블랑 쿠퍼는 참 나긋한 사내였다. 대부분의 강연을 판서하는 일 없이 책 하나를 앞에 두고 옛이야기 하듯 흘려보냈다. 덕분에 나를 포함한 아이들 모두가 펜을 들지 않은 채 얌전히 앉아 들었다.

그가 팔을 들어 올리자 손목을 따라 소매가 사그락 흘러내렸다.

“오늘은 신성력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여기 시어런에서는 신성력을 가진 사제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신성력은 학습으로 깨우치는 힘이 아니라, 오랜 수양으로 빚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쿠퍼는 양손을 어깨너비로 들어 손바닥을 보였다. 텅 빈 손바닥에 모두 시선을 집중했다. 그가 양손을 모아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가슴에 모은 손을 그대로 끌어올려 턱 끝에, 코끝에, 그리고 이마에 한 차례씩 대었다가 떼었다.

그러자 빛이 나타났다.

‘나타났다’ 외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빛의 구체가 블랑 쿠퍼의 이마에서 손으로, 손에서 손바닥으로 굴렀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았다.

마나보다 순하고 고운 성질의 힘이었다. 오러보다 연약하고 다정한 빛이었다.

이미 마나와 오러에 대해 배우며 이 땅의 기운의 갖가지 모습과 형태에 익숙해졌다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 순정한 힘이 내공을 닮아 있었다.

매번 마나, 오러, 내공을 비교하고 살펴보지 않았다면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볼더와 더글라스가 내공의 기원을 캐묻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악한 기운은 아니리라 생각한 모양이지.

새삼스럽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집중하여 블랑 쿠퍼의 손끝에 시선을 두었다.

“저번 수업에서 사제의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라’의 칭호를 받은 사제와 성기사들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 함께 사라지는 고귀한 기운은 축복과 치유의 힘을 지닙니다.”

블랑 쿠퍼는 신실한 믿음의 공능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히 늘어놓았다.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는 굳건한 믿음과 자신이 모시는 신에 대한 찬양이 그득하게 배어있었다.

내가 보기에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제들은 상단전을 먼저 깨운 사람으로 보였다.

하단전 없이 중단전을 일깨운 마법사를 보았을 때에도 무척 놀랍고 신기했는데, 하단전과 중단전을 통하지 않고 상단전을 바로 일깨운 성직자는 더욱더 대단해 보였다.

이제 겨우 중단전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 나였다. 나는 아직도 내공과 오러를 함께 쓰지 못했다.

내공과 오러를 따로 사용하는 것은 되어도, 오러를 사용하는 쪽이 확연히 몸에 무리가 되었다. 몇 차례 거듭해서 실험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해결책이 이 신성에 있지 않나 싶었다.

흐린 빛을 입술에 대어 삼키는 방법으로 흩어낸 블랑 쿠퍼가 다정히 말을 이었다.

“종교의 근원은 대륙의 중심, 필릭스에 있다고 하죠. 필릭스의 대신전에는 수백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존재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직접 성지를 밟고 신의 은총을 느껴보세요.”

필릭스.

섀턴 사막과 가장 가깝다던 그 왕국에 언제 한 번 들러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빌 브라운이 여행을 가자 졸라댔던 일이 생각이 났다. 마음을 느긋하게 갖기로 했다.

성장과 성찰 수업은 친한 동무들이 모두 함께 듣는 수업이기도 했다.

덕분에 화요일 수업이 끝나면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떠들고 웃기를 예사로 했다. 오늘도 그랬다. 단골 식당의 둥그런 원탁에 둘러앉아 목소리를 높여 웃고 떠들었다.

“내가 어, 6서클만 되어도 백작 정도는 어!”

“마리앤, 그러다 넘어지겠어요.”

“이 원수는 기필코 여덟 배로 갚고야 말 거라구요!”

“여덟 배로 되겠어요? 스무 배로 갚아 줘 버립시다. 앉아요, 앉아.”

다른 아이들도 모두 마리앤에게 있었던 일을 알고 있었다. 마리앤이 졸업하자마자 유일 산맥에 가겠다는데 말리는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

마리앤은 오 년 안에 대마법사가 되겠다 거창한 꿈을 늘어놓았다.

이제 2학년이 거의 다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아이들 모두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겠다 구체적으로 정해둔 꿈이 있었다. 시어런 아카데미의 아이들 중 대부분이 그랬다.

아주 어릴 적부터 무엇을 좋아하느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것에 익숙해진 아이들이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제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여섯 가지 학부 중 하나를 택일하고, 그 안에서도 꾸준히 이어지는 갈림길을 살피는 아이들이다.

그 생각이 깊고 자세한 것은 당연했다. 나이 어린 아해들이어도 배울 점이 참 많았다.

마리앤을 달래 앉히는 데 성공한 이반이 마음 약한 소리를 꺼냈다.

“우리 중 세 명이나 유일 산맥에 간다니, 조금 쓸쓸하네요.”

“맞아요. 졸업하면 정말 얼굴 보기 힘들어지겠네요⋯.”

“그래도 한 해에 한 번은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신년제는 매해 수도에서 치르잖아요.”

“몬스터 토벌하면서 신년제 챙기는 게 쉬울까요⋯? 차라리 휴가철을 맞추는 게 낫겠는데.”

제니도, 데미안도, 쉐이든도 아쉬운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서운해하는 것은 제니였다. 하기야 마리앤과 좀 가까이 지냈나. 제니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습을 보고, 한껏 녹아내린 표정을 한 마리앤이 제니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사근사근한 소리를 냈다.

“아직 일 년은 더 남은 얘기인걸요.”

“그래도요.”

“자주 보러 올게요. 수도 놀러 오면 같이 놀아줘야 해요.”

아해들이 서로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하는 모습이 다정하여 보기 좋았다. 나 또한 익숙하게 내 손가락을 내어주었다.

* * *

목요일 새벽. 한 달을 꼬박 훈련한 마리앤은 체력이 많이 늘었다.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매일 아침 나보다 먼저 연무장에 나와서, 내가 시킨 것을 꾸준히 한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연무장 몇 바퀴 도는 것으로도 내장을 토해낼 듯 헐떡이던 녀석이었는데 이제 다섯 바퀴는 단숨에 뛰었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나는 마리앤이 숨이 찰 때까지 함께 달리고, 근력을 기르기 위해 기마자세나 팔굽혀펴기 등의 간단한 운동을 하는 것을 돌봐주었다.

어린아이에게 기초체력 훈련을 시키는 일은 전생에서는 이미 십여 년을 넘게 한 일이었다. 호흡과 자세만 보아도 아이가 열심히 하는지, 꾀를 부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마리앤을 응원하게 되었다. 이제 이달 말부터는 무거운 것을 들게 시켜도 되겠다. 무척 기특하여 아이에게 더 살갑게 대하게 되었다.

아침 훈련이 끝날 즈음에는 짤막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처음 일주일은 힘들어서 숨소리 내는 것도 버거워하던 마리앤이었다. 이제 조금 익숙해졌다고 금방 종알거리는 것을 보니,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뜨겠다 싶어 아이를 대할 적마다 웃음이 났다.

대개 마리앤이 화두로 삼는 것은 갑자기 휴학하고 사라진 글로틴 테너에 대한 이야기나, 컴바인 백작가와 올리버 컴바인에 대한 욕설이었다.

그러나 종종 흥미로운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오늘의 화두는 자신이 먼저 겪은 데뷔탕트에 대한 것이었다.

내 데뷔탕트가 가까워져 오면서 마리앤은 저가 더 들떠서 옷은 어떤 것을 입어라, 태도를 공손히 해라 하며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나도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다 함께 춤을 추는 순서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어, 맞아요. 알긴 알아요? 그 해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와 영식들 중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춤을 못 추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봄과 여름의 춤은 모두가 추게 되어있어요.”

“흐음.”

“미카엘은 안 출 거죠? 전에 춤 싫다고 했으니까.”

“빠져도 되는 행사입니까?”

“어어. 뭐⋯. 본인이 싫다면 어쩌겠어요. 보통은 다들 추긴 하는데⋯.”

과연 루베르의 말이 맞았다. 어쩐지 열심히 내 앞에서 재롱을 떨던 녀석이 떠올라 웃음을 물었다.

“저도 아마⋯. 함께 어울릴 것 같기는 합니다.”

“어? 춤을 배웠어요? 아니, 언제?”

“예. 루베르 선배가 알려주기에.”

“예에?”

마리앤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마리앤이 배시시 웃으며 콧대를 세워 뽐내는 표정을 해 보였다.

“와, 역시. 그럴 것 같았어요.”

“음?”

“뭐, 이런저런 이유야 많겠지만, 아무래도 미카엘은 웨슬리 키아드리스의 대척점이기도 하고요.”

“흠.”

“평소에도 그 선배가 미카엘 많이 챙겨주잖아요. 미카엘이 싫은 것을 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2황자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고⋯.”

루베르가 나를 챙겨주는 일을 숨어서 한 적이 없었으니, 앞의 말은 쉽게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황자 정도는 되어야 싫은 일을 시킨다니, 내가 권력에 약할 것처럼 보인다는 말인가? 의아하여 다시 물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야⋯. 아, 이거 말해도 되나.”

마리앤이 고민하다가 제 양 뺨에 양손을 턱 얹었다. 수줍어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잔망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모습으로 나를 빤히 들여다보더니 히 웃었다.

“그 선배가 미카엘 좋아하잖아요.”

“⋯아.”

이 아이는 그것을 또 어찌 알았을까.

아득하여 대답하지 못하고 얌전히 있자, 마리앤이 내 표정을 살피다가 다시 손을 바로 하고 모래가 희게 고인 연무장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뭐, 그냥 그렇다구요.”

“마리앤이 보기에도, 그가 저를 좋아⋯ 하는 것 같습니까?”

“아, 뭐. 사실 그전에는 몰랐는데.”

“⋯몰랐는데?”

“전에 미카엘이 한동안 한숨 폭폭 쉬고 다니던 적이 있었잖아요. 그때 알았어요.”

“⋯어떻게?”

마리앤이 이제는 아예 먼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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