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60)화 (160/176)

160.

루베르의 방에 발을 들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간 아해와 가깝게 지내기는 했으나 굳이 루베르의 기숙사 방에 들를 만한 일이 없었던 탓이다.

나는 황족의 방은 그 문의 모양새부터 다르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휘황찬란한 금과 은으로 문 위에 새겨진 시어런의 증표가 대단했다. 나를 마중 나왔던 루베르가 익숙한 태도로 그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이런 커다란 문은 시종 둘이 달라붙어 열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나마 무인이라 힘이 좋은 루베르와 루실라니 제 손으로 문을 여닫고 다니는 것일 터였다. 1황자 리차드는 어찌 이런 문을 왕래하고 살았을지가 하릴없이 궁금하였다.

“연습하려고 응접실을 좀 정리해뒀어. 그, 이쪽에 앉아.”

“예.”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과연 본래 응접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야 했을 테이블과 소파가 벽에 가깝게 밀려나 있었다.

벽마다 걸린 태피스트리의 장엄한 모양과 화려한 빛을 어른어른 흩뿌리는 마법 촛대가 시야에 걸렸다.

푹신한 일인용 소파에 앉아 루베르가 왔다 갔다 분주하게 구는 것을 보았다.

참 어여쁘게 차려입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밖으로 나들이를 나가는 것도 아닌데, 큰 행사가 있을 적에나 입을 법한 드레스 셔츠에 금실로 수놓은 베스트를 갖추어 입었다.

그 태를 눈으로 훑다가 문득 물었다.

“혹시, 연습하다가 밖으로 나갈 일이라도 있습니까.”

“어⋯아니⋯? 왜?”

“옷을 갖춰 입으셨기에.”

“아. ⋯그, 아무래도 오늘 연습할 것이 사교댄스다 보니까⋯.”

“그럼 저도 맞춰 입고 올 것을 그랬습니다.”

“아냐, 아니. 그⋯. 에른하르트 영식은 지금으로도 괜찮아.”

“음.”

괜히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침음했다.

내가 가곡에 맞추어 춤을 춘다는 것을 알렸더라면 중원의 모든 친우들이 웃느라 정신을 못 차렸을 것을, 어찌 옷까지 맞춰 입겠다 괜한 소리를 내 입으로 꺼낸 것인가 하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객쩍은 마음에 내 얼굴이나 쓸어 만지며 얌전히 있었다. 내가 잠잠해진 후로도 루베르는 바쁘게 움직였으나 영 실속이 없었다. 대개 손님을 응접실에 초대하면 차부터 내 오는 것이 시어런의 법도였으나, 오늘은 춤 연습을 위한 것이고 차를 얹을 다탁도 멀리 치워둔 채였다.

그런데도 뭔가 내어 주고 싶은 것인지 찻잔이 들어있는 장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모습이 하도 부산스러워 우습기까지 했다.

“선배.”

“어! ⋯어?”

“춤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맞아. 노래⋯노래부터 틀게.”

“예.”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도, 노래를 듣는 것은 좋아했다.

한켠으로 치워 둔 테이블 위에 얹혀있는 나팔 모양의 도구는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도 몇 개나 엇비슷한 아티팩트가 있었다.

곧 간드러진 춤곡이 응접실 안을 그득 채웠다. 루베르가 조금 긴장한 낯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루베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기본 스텝을 알려줄게.”

“예.”

“데뷔탕트에서는 보통 네 가지 춤을 추거든. 순서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노래라고 불러. 그 중에 첫 춤곡이랑 두 번째 춤곡이 다 같이 추는 춤이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둘이서 추는 춤이야.”

“음.”

“그래서 앞의 둘은 단순하고, 뒤의 둘은 좀 더 까다로운 편이야. 일단 첫 번째부터 보여줄게.”

“예.”

어여쁘게 차려입은 루베르가 차분히 발을 움직여 재롱을 부렸다.

밝고 명랑한 춤곡을 틀어두고 양팔을 벌려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은 척하며 타박타박 발재간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기꺼웠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

살랑살랑 움직이다가, 옆으로 크게 걸음을 옮겼다가, 몸을 빙글 돌리더니 손으로 손뼉 치는 소리까지 냈다.

웃음을 참으려 한 손으로 하관을 덮어 가렸다. 푹신한 소파가 몸을 떠받들었다. 자리가 편안하고 노래가 귀에 달고 눈앞에 어여쁜 것이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한참 보고 있으려니 루베르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았다. 아이가 머뭇거리며 멈춰 서서 양손으로 제 얼굴을 덮어 가렸다. 절로 피식 웃음소리가 샜다.

“⋯왜 멈추십니까?”

“아니, 그⋯. 너무 그렇게 보니까.”

“그렇게?”

“⋯아니, 아니⋯. 나, 이번에도 귀여웠어?”

아, 결국 터지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흐 웃었다가, 아이가 손가락 사이로 빼꼼 이쪽을 건너다 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아하하 웃었다.

민망해서 벌건 낯을 하고도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여서 순순히 답해주었다.

“예, 조금.”

“⋯그렇구나⋯. 그, 그럼 이제⋯같이 해 볼까?”

“예.”

귀엽기만 할까. 귀엽고 어여쁘고 혼자 다 하는 모습이 눈에 달게 스몄다.

역시 춤을 직접 추는 것보다는 얌전히 앉아 보는 것이 더 맞게 느껴졌다. 일전에 연극에서 보았던 춤사위는 먼 거리에서 흔드는 것이라 더 장엄한 맛이 있었는데, 이 아해가 하는 것은 왜 이리 귀여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루베르의 춤사위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었으니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방금까지 보여준 게 남자 쪽 스텝이거든. 이대로 따라 해 보자.”

“예.”

객쩍고 민망한 짓이기는 했으나, 애초에 몸을 사용해서 하는 일이다. 서툴 리 없었다. 단순하고 간단한 동작을 여러 차례 변주를 주어 반복하는 것은 보법을 익히는 것보다 훌쩍 쉬웠다.

루베르의 한 손을 잡은 채로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왼쪽으로 움직이고, 한 방향으로 돌고, 손을 맞잡고 마주 보았다가 등을 돌리고⋯.

두어 번 엇비슷한 동작을 하자마자 곧잘 해냈다. 내심 왜 그렇게까지 춤을 꺼렸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앞의 두 곡에 내가 충분히 익숙해지자, 루베르는 성큼성큼 가서 노래를 바꾸어 틀었다.

“가을의⋯노래는. 한 손은 잡고, 한 손은 남자 측이 여자 측의 허리에 손을 얹어.”

“음.”

루베르가 내 오른손을 잡아끌어 제 허리 위에 얹었다.

이것이 종종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의 어미와 아비가 기분 좋을 적에 추던 춤인 것을 알았다. 서로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니.

베스트를 갖춰 입어 평소보다 얄쌍하게 보이는 허리를 고쳐 쥐자, 몸이 바짝 붙었다. 아이가 흠칫 굳었다.

“그.”

“예?”

“⋯그, 렇게 잡으면 안 되고. 여기, 그, 엄지 바깥 부분으로⋯. 떠받치듯이.”

“아.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냐⋯. 괜찮아.”

윌리엄과 세이른이 하는 것을 보고 친근하기만 한 춤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것을 조금 뒤에 알았다.

그가 알려주는 대로 반걸음을 물러서서 손바닥이 깊게 닿지 않도록 루베르를 안았다.

괜히 민망한 일을 치를 뻔했다. 루베르에게 배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루베르는 내가 그의 허리를 다시 고쳐 떠받치기를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한 손은 내 어깨 위에, 다른 손은 내 손 위에 얹고 눈을 깜박였다.

이쪽을 조심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까맣고 반드르르했다. 귀한 보석인 양 보았다. 아이는 민망한 기색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발이 움직이는 법을 다시 가르쳤다.

“이렇게⋯잡으면. 상대가 네 어깨에 손을 얹을 거야. 이런 식으로.”

“예.”

얼굴이 가까웠다. 처음 아이를 봤을 때보다 키 차이가 좀 줄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내뱉는 숨이 서로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가 눈을 깜빡일 적마다 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노래가 끝났다.

“⋯선배?”

“헉, 아니, 아. 미안⋯. 미안해.”

화들짝 놀란 루베르가 내 품에서 호다닥 빠져나가 다시 노래를 틀었다. 그 하는 모양새가 우습고 귀엽고, 또 가여웠다.

다시 내 쪽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는 아해를 보다가, 다정히 달래는 목소리를 내어 주었다.

“미안할 일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려주시는데 감사해야지요.”

“⋯응.”

허나 끌어안고만 있었는데 노래 한 곡이 끝난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다음번에는 아이가 놓치지 않고 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어 손쉽게 익혔다. 빙글빙글 돌거나 고개를 틀거나 손짓을 하거나 하는 것들 모두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정해져 있었다.

“하나둘 셋, 하나둘 셋, 하나둘 셋 넷. 하고 잠시 쉬었다가⋯. 턴. 잡고, 다시⋯.”

아이가 입말로 알려주는 박자에 맞춰 걸음을 옮기고, 손을 맞잡고, 허리를 잡아끌었다. 감미로운 선율이 귓가에 감겼다.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인지 영 모르겠다 여겼는데, 이렇게 노닐다 보니 재미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루베르가 속삭이는 소리가 찬찬히 잦아들었다. 이제 아이가 입으로 박자를 헤아려주지 않아도 몸이 자연스럽게 따라 걸었다.

스치듯 가슴팍이 맞닿을 적마다 아이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제가 지적할 주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말을 더하지 않았다.

네 가지의 춤곡을 전부 몸에 익히는 데에는 세 시진이면 충분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가기 전, 루베르가 다시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다. 정말로 춤을 출 적에만 보여줄 생각으로 입은 옷이었다니. 시어런 사람이 춤을 정말 중하게 여기나보다 하고 적잖이 놀랐다.

함께 식사하는 동안에 춤을 알려주어 감사하다 인사를 했더니, 어쩐지 평소보다 많은 양의 고기를 씹어 삼키던 루베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성실한 말을 했다.

“응, 오늘⋯. 정말 잘하긴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방학이 오기 전에 두어 번 더 연습할까?”

“예, 좋습니다.”

“응.”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내일은 다시 공부를 해야 하니 도서관에서 만나자, 하고 말을 꺼냈다.

루베르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 기말고사 시험공부에 필요한 노트들을 준비해 두었다는 말을 했다.

귀한 아해가 귀한 짓만 한다 싶어 내 몫의 고기를 루베르의 접시에 옮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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