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목요일 오후.
여름 방학 이전에 두고 갔던 골렘 셋은 확연히 눈에 띄는 결과물을 보였다.
더글라스의 방식대로 호흡한 골렘은 제일 큰 마석을 품고, 볼더의 방식으로 호흡한 골렘은 제일 작은 마석을 품었다. 그리고 내가 고르고 고른 혈도를 따라 운기한 골렘의 마석은 그 가운데에 약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흐르는 마나를 속에 품어 놓은 것을 눈으로 보니 무척 신기했다. 중원 무인들의 단전이 이렇게 생겼을까? 괜히 내 아랫배를 한 번 쓸어보게 되었다.
“여기 날개 뼈 사이에서 꼬리뼈로 흐르는 길 말예요. 이게 유독 다른 흐름을 보이는데, 왜 이렇게 설정했어요?”
“⋯음. 의지가 담기지 않은 것이 문제인 것 같아, 의지를 담으려 하였는데⋯그것이.”
볼더의 물음에는 언제나처럼 말로 답하기 어려웠다. 한참을 고민하여 겨우 답했으나 더글라스와 볼더 모두 내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한 말이다. 나도 왜 그리 정했는지 온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볼더가 땅을 치고 아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골렘은 볼더의 신체를 본 따 만든 것이었다. 이치를 완전히 깨닫고 이미 막혀있는 몇 개의 혈도를 뚫으면 볼더도 직접 단전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자신의 평생의 연구를 제 몸에 적용할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더글라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결론을 지었다.
“에른하르트 영식 몫으로 둔 골렘이 어찌 성장할지 기대가 되니 이대로 좀 더 두고 살펴보죠.”
“그럼 나머지 둘은⋯.”
“같은 실험 방식이고, 이 골렘들이 필요한 다른 사용처도 없으니 비교급부로 남겨두려고 해요.”
“⋯예.”
내가 영 떨떠름해 보였던지, 더글라스가 내 어깨를 다정하게 도닥였다.
“그래도 꾸준히 무언가 진행되고 있네요. 무척 고무적인 성과예요. 에른하르트 영식이 짚어 준 방식의 골렘이 마나를 끌어오는 방법과 방향이 대강은 보여요.”
“음.”
“이제 어떤 방식으로 업그레이드를 하고 싶은지, 목표 설정을 해야 할 때인데. 혹시 염두에 둔 목표가 있나요?”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일전에 마엘로 샌슨의 수업을 접하게 된 초반에, 천뢰제왕신공의 결을 짚어 본 적이 있었다.
대 남궁세가의 심법은 둘로 나뉜다. 직계가 이어받는 천뢰제왕신공, 나와 같은 방계무인도 배울 수 있는 창궁대연신공.
그 둘은 같은 남궁의 무공이라 초반 흐름이 같지만 후로 갈수록 큰 격차를 보였다.
그러나 모든 무공은 깨우치고 깨달으면 같은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창궁대연신공의 격이 오른다면 천뢰제왕신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구결은 전혀 모르고 형식과 겉모습만 매양 보았으나, 윗단계를 떠올리면 역시⋯. 탐이 났다.
“지금 제가 기운을 사용하는 방식이, 하단전의 내공을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말로 설명할 자신이 없어 기운을 끌어내 보이거나 온몸으로 방향을 덧그려가며 어찌어찌 알렸다. 그럼에도 더글라스와 볼더는 내 서툰 손짓발짓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요. 우측 방향으로 신체의 모든 부위를 향해 내달렸다가 돌아오죠.”
“그걸 좀 더 이렇게⋯. 이쪽으로 해서.”
“예?”
“⋯이렇⋯게?”
“아! 빠른 방향 전환이 하고 싶은 건가요?”
“⋯! 예, 맞습니다.”
“음, 좋아요. 일단 기의 흐름과 방향성 전환에 염두를 두고 좀 더 연구해보도록 할게요.”
“예.”
과연 더글라스의 말대로,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더글라스와 볼더가 종잇장에 무언가를 그리고 쓰는 것을 넘겨다보았다. 완전히 같지 않아도, 천뢰제왕신공과 흡사한 공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정리된 뒤에는 다 같이 둘러앉아 사담을 나누었다.
나는 감사의 의미로 더글라스와 볼더에게 각기 작은 종이 가방을 안겼다.
지난번에 방학이 끝나고 더글라스에게 선물을 전한 이력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오기 저어하여 고민했더니 부친이 손에 들려 준 것이었다.
에른하르트 가의 포도로 만든 잼을 예쁜 병에 담아 포장한 것이었다.
메이지 볼더가 에른하르트 백작가의 포도와 잼이 참 유명하여 기쁘다고 수선을 떨었다. 가문의 칭찬을 듣는 일은 언제나 귀에 달았다. 흡족하게 웃으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 * *
금요일.
중급 검술 시간, 동무들에게 오늘 오후 에드윈과 함께 수업을 듣기로 한 것을 알렸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쉐이든과 벤자민은 묵묵했으나 빌 브라운이 저도 함께 수업을 듣고 싶다며 칭얼댔다.
빌이 많이 얌전해지긴 했으나 함께 수업을 듣기에는 허술한 성격이 걸림돌이 되어, 많이 챙겨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꺼려졌다. 다음에 때가 되면 함께 다른 수업을 듣자 아이를 달랬다.
그러나 빈 말을 한 것이 금방 들켜 괜히 빌 녀석이 칭얼거리는 소리를 배로 얹어 들었다. 민망한 마음에 그저 웃었다.
루베르 그 아이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묵묵하게 곁에 서 있었다.
내가 자꾸만 루베르를 신경 쓰고 의식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몇 번이나 했다.
괜한 짓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 싶기도 했다. 아이가 내게 그러지 않겠다 말한 것이 벌써 저번 학기의 일이었다. 나 또한 잊는 것이 옳았다.
허나 루베르의 동그랗고 어여쁜 머리통 뒤에 작게 묶인, 조금 길어진 머리터럭을 볼 때마다 심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내가 긴 머리가 좋다고 해서 기르고 있는 것이냐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오후 수업을 듣기 위해 에드윈과 나란히 걷는 중에, 에드윈의 길고 결 좋은 머리가 사르락 흩어지는 모양새를 보니 루베르가 떠올랐다.
궁금한 마음이 들어 불쑥 물었다.
“선배도 아침마다 머리에 장미 기름을 바릅니까?”
“뭐? 아니, 자연산인데.”
“⋯그래요?”
하긴 시어런 사내들이 죄다 발터 그놈처럼 굴 리는 없을 터였다. 그럼 루베르 또한 그저 별 뜻 없이 머리를 묶고 다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고 말을 더하지 않았더니, 에드윈이 금방 볼멘소리를 냈다.
“⋯향유 정도는 다들 쓰잖아. 장미는 아니야, 장미는.”
“예?”
“아니, 근데 그런 건 왜 물어?”
“그냥 몰라서 물었습니다.”
다들 쓰나 보다. 나는 그런 것을 신경 써 본 일이 없어 몰랐다. 적당히 대답하고 넘겼다.
에드윈이 씩씩거리는 꼴이야 매양 보는 것이니 마음에 걸리지도 않았다.
마법생물의 성장과 이해는 마법부 수업이었다. 마법동까지 걸어가는 도중, 내 걸음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에드윈이 또 분한 태를 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어이가 없어 물었다.
“선배는 마법 쓰면 더 빠르게 걸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전에 그 블링크인가 뭔가.”
“흐, 아카데미 내에서 마법을 함부로 쓰면 벌점을 받으니까 그렇지.”
“아.”
하긴 아무 데서나 불과 물을 뻥뻥 쏘면 사람이 상할 수 있었다. 쉽게 수긍했다. 에드윈은 이어 말했다.
“매 학기 마법동 뒤 연무장에 불을 지르는 놈들이 워낙 많아서, 마법 한 번 잘못 썼다가는 그 학기 성적이 반토막이 나.”
“예?”
“뭐야, 너도 봤잖아.”
“예? 언제⋯?”
“전에 우리 대련하자 얘기할 때.”
에드윈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에드윈과 독대하기 위해 찾았던 마법부 건물 뒤편의 공터에 여기저기 있던 그을음 자국을 이르는 말이었다.
뜬금없이 불놀이를 한 것처럼 군데군데 화기가 묻어 있더라니, 그것들이 마법의 흔적이었다니. 생각지 못한 일이라 아연했다.
“그래서 마법부 근처에는 비싼 수목이 없어. 다들 제정신인 놈이 없어서⋯.”
“⋯.”
“왜 그렇게 봐? 난 아니야!”
“예. 압니다.”
내가 무어라 했나. 계속 걸었다.
앨런 라게르 교수는 낯빛이 푸르스름하고 키가 훌쩍 큰 사내였다. 거의 2m에 근접한 키를 지녔다. 수염만 있었다면 관우처럼 보였으련만, 그는 수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남색 머리칼을 무척 짧게 잘라 두었다.
중원에서야 중이 아니면 사내든 여인이든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시어런에 와서야 목이 드러나도록 짧게 머리를 다듬은 이를 보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이렇게 짧게 깎은 머리는 처음 보았다.
적색 눈을 한 사내는 일견 마른 듯 보였으나, 손목의 굵기나 모양새를 보니 힘도 깨나 쓰는 모양이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마법 생물의 성장과 이해 수업을 가르치는 앨런 라게르입니다.”
근로 장학생 하나가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동그랗고 작은 것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내 한 손에도 쏙 들어오는 작은 것은 새알을 닮았다. 일전에 에드윈이 수작을 부린 정화 마법구슬을 받고 난리를 친 기억이 도로 되살아나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라넌큘러스의 알입니다. 꽃 이름 중에도 같은 것이 있죠. 라넌큘러스는 마법생물 중에서도 아주 대표적인 것으로, 날개가 한 쌍인 새와 닮은 형상을 갖추고 있습니다. 마나를 입력하여 주인을 설정하며, 음성언어 형태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데 사용합니다.”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새라고? 화들짝 놀라 알을 다시 보는 것은 나뿐이었다. 자리에 앉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저 얌전히 알을 손에 얹은 채 앨런의 말을 들었다.
“라넌큘러스는 보통 한 달이면 알에서 깨어나고, 깨어난 직후부터 언어의 학습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받은 알은 이번 학기 과제입니다. 알을 부화시키고, 성장시켜서, 학기가 끝나면 제출하면 됩니다. 라넌큘라스의 형태와 모양, 성장 정도에 따라 점수를 주겠습니다.”
알은 미적지근했다. 온기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작고 동그란 알이 메추리알처럼 얼룩덜룩했다. 이 안에서 태어나는 것도 메추리를 닮았을까 궁금했다.
앨런이 마법생물에 대해 부연설명을 좀 더 해 주었다.
“마법생물은 생물과 무생물의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심장이 뛰지도 않고, 섭식 활동을 하지도, 생식 활동을 하지도 않아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입니다. 마치 정령처럼요.”
정령이라니, 동화책에서나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신기하고 궁금했으나 이렇게 소소한 것은 나중에 에드윈에게 들으면 되는 것이라 굳이 묻지 않았다.
“마법생물의 알은 특정 조건을 만족하였을 때, 공기 중에서 생겨납니다. 라넌큘러스의 경우에는 30mp의 마나가 대기 중에 존재할 때 라넌큘러스 꽃의 꽃가루를 흩뿌리면 씨앗처럼 맺혀, 세 달이 지나면 지금 여러분의 손에 들린 크기로 자라납니다.”
“mp⋯?"
"마나 퍼센트. 일정 공간 내에 마나가 얼마나 존재하는지 헤아리는 단위야.“
모르는 말을 들어 의아한 소리를 흘렸더니, 에드윈이 제깍 대답해 주었다.
도대체 그런 것을 어찌 알아냈단 말인가. 꽃가루에서 태어나는 짐승의 알이라니, 신기하고 즐거워서 기분이 들떴다. 옆에서 에드윈이 뿌듯한 표정을 한 것을 보고, 이 녀석이 자랑스레 나를 끌고 온 이유를 알았다. 과연 흥미롭고 신기한 일이었다.
앨런은 라넌큘러스를 기르는 법에 대해 꼼꼼히 알려주었다. 열심히 받아 적었다. 에드윈이 저만 믿으라며 다시 한번 뽐냈다. 의외로 제법 믿음직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