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블랑 쿠퍼 교수의 성장과 성찰 수업은 나와 친한 동무들이 모두 함께 듣는 수업이었다.
블랑 쿠퍼는 키가 훌쩍 크고 맵시 있는 몸을 가진 사내였다.
무늬가 일절 없는 새하얀 옷을 곱게 차려입었는데, 여인네 치마처럼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옷자락이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신기했다. 시어런에 와서 처음 보는 옷차림이었다.
아해들에게 이게 무슨 옷이냐 물어볼까 싶어 옆을 돌아보았다가, 은은한 웃음을 매달고 있는 마리앤의 상체가 온통 앞으로 쏠린 것을 보았다. 실없는 웃음이 샜다. 저 치가 마리앤의 취향에 걸맞게 잘생긴 모양이지.
그리 생각하며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려 이반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게 무슨 옷입니까?”
“사제복입니다. 신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검증된 사람들은 늘 저 옷을 입고 다녀요.”
소림의 고승들이 모두 가사를 갖춰 입는 것과 흡사한 방식인 듯했다. 내게 낯선 형태의 옷인 이유가 있었다. 에른하르트와 발렌티아는 신의 힘보다 인간의 힘을 더 많이 믿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첫 번째 신의 사도, 블랑 쿠퍼입니다.”
첫 번째 신의 사도라니. 신도 첫째가 있고 둘째가 있는가? 의아하게 앉아 있었더니, 블랑 교수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곧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 신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겠지요.”
이 땅의 신화에는 아홉 신이 있었다.
첫 번째 신, 두 번째 신⋯. 그 모든 신들이 이름이 없었다. 어떤 신과 다른 신의 업적이 겹치기도 했다.
모든 신이 힘을 합쳐 이 세상을 만든 탓이었다.
다만 일곱 번째 신과 여덟 번째 신을 죽이고 저 또한 영면에 든 사나운 신이 아홉 번째 신이라고 불렸다.
때문에 이 땅의 모든 사제는 자신을 첫 번째 신의 사도라고 부른다는 설명이었다.
“이 수업에서는 매 수업의 시작 시간마다 간단히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이 또한 낯선 일이었다. 멀찍이에서 아이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기도를 할 때엔 무슨 생각을 하면 되나요?”
“자신이 가장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죠.”
블랑 쿠퍼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노래하듯 은밀하고 자상하고 고요했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신 아니겠어요? 자신이 바라는 것을 꾸준히 고민하고 생각하다 보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사내가 일러주는 대로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주변의 이들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머릿속으로 되뇌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바른 말을 떠올리고 나니 심신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꾸준히 생각하면 이룰 수 있다고.
⋯어쩐지 미하엘이 신학서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여러분의 바람이 모두 이루어질 것입니다. 라 프리라 엣-사.”
말끝에 따라붙는 낯선 기도문이 의아한 것은 나뿐인 듯 했다. 몇몇 아이들이 후렴구를 따라했다. 이반이 귀엣말로 해당 후렴구가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는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기도를 마치고 난 뒤 블랑 쿠퍼는 아홉 신 창세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홉 신이 힘을 합쳐 만든 세상의 여섯 번째 날에 만들어진 인간을 세 명의 신이 사랑해서 자기들끼리 싸워 둘을 죽이고⋯.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이야기였다.
미하엘이 좋아하는 이야기였고, 블랑 쿠퍼의 목소리가 다정하고 찬찬하여 듣기 좋았기에 딴짓 않고 들었다.
* * *
수요일. 오랜만에 보는 칼립스 교수는 나를 보고 무척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와 있었던 여러 일들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계보 수업만큼 내게 이 세상의 흐름을 쉽고 명확히 알려주는 수업이 또 없었다.
초급 검술과 중급 검술 수업을 반복해서 듣는 것을 저어하던 쉐이든도 제국의 계보 수업만큼은 놓치지 않고 들으려 하는 것만 보아도 해당 수업은 아주 중한 수업이었다.
나는 칼립스 교수의 몸을 위아래로 한 차례 훑어보았다. 건강해 보이는 모습을 확인한 뒤 마음을 놓았다. 그래, 발터 그놈도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지. 마음이 기뻤다.
“⋯오늘은 키아드리스 공작가에 대해 한 번 더 짚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번 여름에 1황자와 헤스티아 옐디더스 영애의 약혼식이 예정되어 있다가 미루어진 일에 대하여 부정확한 정보가 번지고 있더군요.”
아카데미 학생들이 부정확한 정보에 휘청이지 않게 하는 것도 칼립스 아그리젠트의 일이라 하였다. 나는 얌전히 노트를 펼쳤다.
현 키아드리스 공작의 이름은 델피니아 키아드리스였다. 그녀는 총 세 명의 남자를 가지고 있었다. 공작 부군은 남작 출신의 사내로, 열여덟 살 나이로 스무 살 델피니아와 혼인을 올렸다. 그때 웨슬리 키아드리스가 태어났다.
델피니아는 당시 공작 부군이 새침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혼인 이듬해에 곧바로 첩을 들였다. 두 번째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것이 험버트 키아드리스였다.
그 일로 공작은 공작 부군과 사이가 틀어져 오래 소원한 관계를 이어가다가, 자신을 호위하던 기사를 세 번째 첩으로 들였다. 그 사이에서 이번 사건의 문제가 되는 포플라 키아드리스가 태어났다.
이 일로 공작 부군이 크게 상심하여 눈물을 보이고 화를 내는 것을 달래 주다가, 어찌어찌 태어난 것이 넷째 아들 에드윈 키아드리스였다.
시어런 제국은 사랑을 중요시하고 일부일처를 숭상하기 때문에 키아드리스 공작의 이러한 행실은 많은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마땅할 그녀의 친부모는 델피니아가 열다섯 되던 해에 마차 사고로 죽었다. 그녀 본인도 검의 키아드리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초절정의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성격이 독하고 난폭한데 일신의 무위마저 갖추었으니 그녀의 행실을 눈앞에서 지적할 겁 없는 이가 없었다.
1황자 리차드 플로 시어런이 이제 스무 살이었다. 포플라 키아드리스가 열아홉 살이고 헤스티아 옐디더스가 현재 열여덟이니 둘 모두 연배가 맞기는 했다.
“현재 포플라 키아드리스에 대해 이야기가 도는 성격적 결함이나 외모에 대한 평가는 모두 헛소리입니다. 포플라 키아드리스는 키아드리스 공작을 그대로 닮아 붉은 머리에 자주색 눈을 가졌고, 사교계에 얼굴을 보인 적이 없어 그 성격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헛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언제나처럼 칼립스 아그리젠트는 수업을 마치고 칠판의 오른쪽 아래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가 서류철을 헤아려 넘기는 것을 말끄럼 보고 있자니 쉐이든이 내 팔뚝을 제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웨슬리 키아드리스 말이야. 성격이 어떨지가 궁금해서.”
“어?”
나는 필기 노트의 여백에 선을 죽 긋고 순서를 가늠해 보았다.
“웨슬리가 열여섯 나이로 졸업할 적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이르렀고, 곧장 유일 산맥에 올라서 소드 마스터가 되었지. 그리고 스물하나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자마자 황궁 기사단이 되어 이제 서른이잖아.”
“응, 그렇지?”
“그럼 웨슬리는 1황자가 열한 살일 적에 황궁 기사단이 되었다는 것인데.”
“⋯어, 그런데?”
“왜 루베르가 아니라 1황자를 선택했을까?”
쉐이든은 대답 대신 내 노트를 함께 내려다보았다. 웨슬리와 리차드의 이름이 적혀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긴가민가하며 말을 이었다.
“⋯1황자는 성격이 어떻다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데, 포플라 키아드리스처럼 숨겨서 키워진 것도 아니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웨슬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소문이 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그러게⋯. 웨슬리가 황제도 아니고, 어떤 성격이다 정도는 소문이 날 만도 한데. 친하게 지내는 인물들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고⋯.”
나는 아카데미에 와서 웨슬리 키아드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무척 많이 들었다. 그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훈련을 했다, 어떤 검식을 꾸준히 연습했다 하는 이야기를 하도 들어 그가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성격에 대한 말은 조금도 듣지 못했다.
선후배를 막론하고 곁에 가까이 둔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마엘로 샌슨과는 그나마 자주 얼굴을 맞댄 모양이었으나, 샌슨도 그는 검술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내라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한참 내 노트를 내려다보던 쉐이든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사람을 가리나 봐. 너처럼 검에 푹 빠져가지고.”
“⋯그런가.”
1황자가 소문처럼 싸늘한 인물이라면, 보다 귀염성 있는 루베르가 더 쉬이 마음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여겼다. 허나 또 잘 생각해보면 황후가 싸고도는 루베르보다는 1황자가 더 쉽게 다룰 수 있을 테니, 야망이 있다면 1황자를 지지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이런 식의 정치적인 고민을 하게 된 나 자신의 성장에 감격하여 흐뭇한 마음이 드는 것을 애써 눌렀다.
어찌 되었든 간에,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제 윗형제들과 기싸움을 할만도 했다.
아비가 같은 형제는 일찍이 집을 떠나고, 아비가 다른 형제만 둘이 있는데 그 둘이 모두 아이보다 나이가 많으니 어린놈을 얼마나 구박했을까 싶어 속으로 안쓰러이 여겼다.
저녁나절에는 홀로 거닐었다.
그간 낮 시간의 대부분은 수업을 듣느라 바빠, 해 뜬 교정을 둘러보는 일은 두 해가 거의 다 지나도록 처음이었다. 여러 개의 연무장을 돌아보고, 도서관과 카페테리아에 들렀다가, 익숙한 연못에도 잠시 들렀다. 밝은 낮에 보니 밤과는 또 다른 운치가 있어 좋았다.
노을이 자박자박 발끝에 채일 무렵 익숙한 작은 연무장에서 윌턴 로버츠를 만났다.
윌턴은 가장 먼저 나의 비도술이 방학 동안 녹슬지는 않았는지 보아주었다. 이제 비도를 날랜 솜씨로 던지거나, 몇 가지 호선을 그리도록 던지거나 할 수 있게 된 나였다. 꾸준한 연습을 통해 빚어진 솜씨를 알아본 윌턴이 흐뭇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대로 경지에 오르게 되어 허공섭물이나 이기어검이 가능하게 된다면 던진 비도를 회수하는 일도 할 수 있을 터였다. 벌써 이런저런 공상으로 마음이 들떴다.
윌턴은 이제 몸의 소근육을 섬세하게 조절하는 법을 알려주겠다 선언했다.
손을 사용할 때에, 손을 사용한다 생각지 않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함께 움직이거나 따로 움직이는 법에 대한 집요한 학습이었다.
손톱 바로 아래의 살갗과 손가락 둘째 마디 아래의 살갗이 각기 어떤 감각을 느끼는지에 대해 처음 궁리하게 되어 흥이 났다.
남다른 시각이었다. 크게 경탄하고 감읍하여 윌턴을 받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