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쉐이든, 벤자민, 제니, 마리앤, 데미안, 이반, 그리고 나. 일곱은 한참을 입씨름을 했다.
지난 여러 학기 동안 가장 가까운 동무였으니 한 과목은 다 같이 수업을 듣고자 하였는데, 영 괜찮은 수업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급 연금술 수업에서 내가 배움을 기대했던 것은 다친 것을 치료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지난 학기 내내 미용 크림이나 머리에 바르는 향유 따위를 만들었기에 더 이상 연금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수업은 이 친구가 못 듣고, 저 수업은 저 친구의 전공 수업과 시간이 겹치고⋯ 하나하나 덜어내다 보니 들을만한 것이 없었다.
제니가 아까부터 열심히 주장하던 강의계획서를 들어 다시 내게 내밀었다.
“효과적인 사교계 데뷔를 위한 사교댄스 기초. 정말 안 되겠어요, 미카엘?”
“내 부모도 내게 춤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아니이⋯. 그렇지만 이제 미카엘도 내년이면 열다섯 살인데.”
웃음을 꾹 눌러 참은 데미안이 다른 강의계획서를 내밀었다.
“춤이 별로면 이건 어때요. 대륙 미식 여행. 온 대륙의 특이한 식생활을 배우고 직접 경험해보는 수업이래요.”
“그 수업, 그⋯. 벌레 먹어본다는 그거 아니에요? 전 무리입니다.”
“아아아, 벌레도 맛있을 수 있어요. 저는 이반을 믿어요.”
“제가 못 믿습니다, 제가. 안 돼요.”
쉐이든은 회계 수업을 끌고 와서 마리앤의 원성을 샀고, 마리앤은 정령학이 궁금하지 않냐고 물었다가 아이들의 야유를 받았다.
그러던 중에 이반이 가장 밑바닥에 깔린 강의계획서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건 어때요? 블랑 쿠퍼 교수의 성장과 성찰.”
“⋯무슨 과목이에요? 아니, 이름부터 이상한데.”
마리앤이 벌써부터 질색하는 태를 냈다. 이반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내게 강의계획서를 내밀기에 일단 받아들었다.
“그게, 갑자기 미하엘 생각이 나서요.”
“미하엘?”
“네. 미하엘이 신학 좋아한다면서요. 그럼 미카엘도 좋아할 것 같고⋯. 신학적 성찰로 내면의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는 과목이래요.”
“아니, 이 무슨.”
“와⋯. 대체 어디서 이런 수업을 알아 오는 거예요?”
“신앙 관련 과목은 점수 받기도 좋아요. 일단 교수님들이 학생들의 성적보다 태도를 더 중요시하고, 출석점수가 가장 중요하고.”
강의계획서를 가지고 가서 한참을 살펴보던 데미안이 호응했다.
“게다가 이 수업, 시험도 없네요. 출석이랑 과제로 성적 냅니다.”
“그걸로 하죠.”
“동의.”
“저도 찬성합니다.”
시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미하엘과 나눌 신학 이야기가 좀 더 풍부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 또한 해당 수업을 듣기로 했다. 절대로 시험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전에는 여전히 마엘로 샌슨의 수업을 들었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엔 중급검술을 듣고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고급 검술을 듣는 것 또한 지난 학기와 같았다.
화요일 오후 첫 수업은 쉐이든, 데미안과 함께 영지경영 기초 수업을 듣고, 화요일 오후 두 번째 수업은 다른 아해들까지 어울려 성장과 성찰 수업을 듣게 되었다.
수요일 오후에는 제국의 계보 수업을, 목요일에는 더글라스와 일대일 수업을, 금요일에는 에드윈과 듣는 마법생물 수업을 끼워 넣고 나니 일주일이 빠듯하게 찼다.
데미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 시간표를 확인했다.
“어어, 이번에는 수요일 오후에 제국의 계보만 넣으려고요?”
“미카엘이 수업 일곱 개로 만족할 리가 없는데.”
“아, 이 날은⋯. 윌턴 로버츠 교수님이 수요일과 목요일에만 아카데미에 오시니까, 수요일 늦게 따로 개인 수업을 청해 두었습니다. 혹여 늦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요.”
“언제요? 이 시간에? 어어⋯. 이거 너무 특혜 아닌가?”
“아뇨, 일곱 시 이후로. 교수님의 정규 수업이 끝난 뒤에 시간을 내 주시기로 했습니다.”
“정규 수업 이후로요? 그럼 학점 인정 안 되잖아요.”
“예.”
마리앤이 입을 떡 벌리고 내 시간표를 한 번,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특혜는 아니고 특이네요⋯. 와, 내 인생의 특이점, 미카엘 에른하르트.”
“음.”
“⋯진짜 신기해서 물어보는 건데, 일대일로 뭘 배우려구요?”
“은신술과 보법을 조금. 윌턴 로버츠 교수님께서 은밀하게 이동하는 법이 신기하기에⋯.”
쉐이든과 벤자민까지도 혀를 내둘렀다. 같은 검술부의 학생이니 같이 듣고 싶다 하면 어쩔까 내심 고민했건만,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어 도리어 서운했다.
“아니, ⋯흥미가 없습니까? 왜?”
“으음⋯. 일단 기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보니까⋯. 아무래도 은신술보다는 앞에 나서는 것에 더 익숙해서요.”
“학점 인정이 안 되는 것도 수업이라고 부를 수 있나⋯? 일단 난 그래⋯.”
나 말고 다른 아해들이 시간표를 짜는 것도 전부 보아주고 도와준 뒤, 주말 내내 한 학기 동안 필요한 준비물과 기타 물건들을 구입하러 다녔다. 친한 동무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웃고 떠들어대는 시간들이 전부 흡족했다.
루베르를 잠깐 만나 시간표에 대한 것을 다시 한번 알렸다.
루베르는 몬스터와 철학의 만남 수업을 월요일에 듣자 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이번 학기에도 중급 검술 수업을 듣겠다고 알려왔다. 또 매일 보게 되겠다 싶어 머쓱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바쁘지 않느냐 물었더니, 괜찮다 하는 말을 그저 믿기로 했다.
* * *
8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여름이었다. 지난 학기와 꼭 같이 월요일 첫 수업을 중급 검술로 시작했다. 쉐이든과 벤자민, 빌과 루베르가 모두 함께 듣는 수업이었다.
마엘로 샌슨은 이름값이 높은 교수였다. 학점 인정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1학기와 2학기의 수업을 연이어 듣는 아이들이 많았다.
덕분에 지난 학기에 제국검법의 기초를 잘 다져 둔 아이들은 첫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잊지 않았는지 검사부터 받았다.
샌슨의 구령에 맞춰 제국검법의 제 1식부터 마지막 식까지 순차적으로 전개했다. 막히는 곳은 없었다. 모든 검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 마땅하니, 지난 생에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던 내가 반년을 꼬박 익힌 새 검식에 서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주 잘했다, 미카엘. 모든 동작이 정확했어.”
“예.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칭찬 한 마디가 그리 달게 들리는 것은, 마엘로 샌슨이 화경의 무인인 탓일 터였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쉐이든은 검식을 거둘 때에 힘이 빠지는 것을 지적받았고, 빌은 그 반대로 모든 검식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벤자민은 나와 엇비슷한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루베르는 마엘로 샌슨의 뜨뜻미지근한 시선을 받았다.
“어어⋯. 이번 학기에도 들으려고? 중급 검술을 또?”
“⋯예, 교수님.”
“아니, 뭐. 안 될 건 없는데⋯. 그래. 열심히 해라.”
지난 학기뿐만 아니라, 그전에도 중급 검술을 이미 한 번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하기야 그런 수준급의 제국검법을 구사하는 루베르가 마엘로 샌슨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을 리 없었다. 내 시선에 루베르가 괜히 딴청을 피웠다.
몇 번 자세를 고친 뒤 괜찮은 칭찬을 받은 빌이 으스대며 내게 와 귀염을 떨었다.
“아무래도 형님이 잘 가르쳐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
“내가?”
“네, 특히 12식의 이 동작이요.”
“아, 그것.”
휙 뻗은 팔을 당겨 거두는 동작을 해 보인 빌이 제 머리를 또 냉큼 숙여왔다. 얼른 저를 칭찬하라는 것이다. 그 동그란 머리통이 땀에 젖어있는 것을 보고, 어르고 쓰다듬는 대신 빌의 뺨을 꼬집어 흔들어주고 치웠다.
아야아야 엄살을 부리는 녀석이 귀여워 픽 웃다가, 루베르가 이쪽을 가만히 보고 서 있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
“선배도 잘하셨습니다.”
어째서 이런 것으로 뜨끔한 기분이 드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가까이 오라 손짓하니 쪼르르 코앞에 다가선 루베르의 어깨를 두어 번 도닥여주었다.
어쩐지 낯선 기분이 들어 찬찬히 살폈다.
“⋯왜, 왜 그렇게 봐?”
“아뇨, 키가 좀 큰 것 같아서.”
방학 동안 나도 조금 더 자랐는데, 그새 아이도 훌쩍 자란 모양이었다.
하여간 이맘때의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비 맞은 죽순처럼 자라나고는 했다. 흐뭇한 기분으로 루베르와 내 어깨의 높이를 견주어보았다. 루베르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히 물었다.
“⋯키가 작은 편이 좋아?”
“그럴 리가요. 선배는 지금도 사내답고⋯.”
잘생겼다 말하려다가 목이 콱 틀어 막혔다. 말문이 막혔다.
이전에 긴 머리가 좋느냐 물었을 때에도 딱 이런 투였다. 아이가 머리를 길러 그 꽁지를 묶은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불그레하게 수줍어하는 낯이 아닌 것을.
루베르의 하얗고 얌전한 낯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 묻기에 별일 아니다 하고 웃어주었다.
벌써 마음을 접은 것인가?
아니, 아니다. 이런 것을 궁금해 해서 무엇에 쓰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각기 씻고 나서 다시 만나기로 말을 해 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월요일 오후 수업을 하필 루베르와 단둘이 듣는 것으로 잡아두어 어쩐지 싱숭생숭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 마음을 굳게 먹었다.
몬스터와 철학의 만남 수업을 가르치는 스티븐 맥클리프 교수는 지난 학기와 엇비슷한 시점에 근로 장학생을 시켜 책을 나누어 주었다.
이번에 받은 책의 장정은 이전보다 좀 더 푸른빛을 띠는 가죽이었다. 스티븐은 이 교과서는 오우거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소리를 하여 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소란스럽게 책을 던지고 놀라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을 보며 스티븐이 은은하게 웃었다.
“비싼 책이라 그런지, 멀리 날아가네요. 얼른 자기 책 찾아서 주워 가세요. 다시 사려면 그것도 골치 아플 테니까요. 이번 학기에 시험 안 볼 거에요?”
“아, 교수니임.”
“자, 자. 첫 장에는 이름부터 씁시다. 다들 진정하시고⋯.”
⋯설마 저 치가 아이들의 비명 소리를 즐겨서 부러 이런 짓을 하는 것인가? 그 얼굴 생김에 맞지 않게 짓궂은 일이었다. 새삼 그를 다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