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안 그래도 종종 생각나던 아해였다.
에드윈 키아드리스는 키아드리스 공작의 막내아들이었다. 5서클 마법사이기도 했다.
처음 아카데미에 와서 녀석의 시비를 받아주다가 무척 즐거운 대련을 한 일과, 의외로 깍듯했던 녀석의 사과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추후 시간을 내어 대련을 한 번 더 하기로 했었지. 녀석이 졸업하기 전에 시간을 내야하는데, 여유가 없어 아쉬웠다. 어찌 되었건 오랜만에 본 놈이었다. 반갑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키아드리스 선배.”
“너는.”
“예?”
“너는 안녕해? 나는 안녕 못 한데.”
이건 또 난데없이 무슨 시비란 말인가? 나는 당혹하여 잠시 얼이 빠졌다.
뾰로통하게 서 있는 녀석은 내 곁에 있는 빌 브라운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는 일단 빌을 툭 떠밀었다.
“먼저 들어가 있어.”
“⋯어어, 형님. 그렇지만⋯.”
“괜찮으니까, 내일 보자.”
에드윈이 아무리 노려본다고 해도 무서울 리 없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빌에게 손짓하여 멀리 보낸 뒤 에드윈에게 다가섰다.
제사상 향로처럼 우뚝 서서 숨을 훅훅 불어내는 녀석을 보며 오늘도 참 곱게 차려입었다는 생각이나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들어가서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내해.”
턱짓으로 사람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으나, 나이 많은 것이 벼슬인 아카데미인지라 수긍하여 내 방으로 데리고 갔다. 응접실에 앉혀놓고 찬찬히 얘기를 들어 볼 생각이었다.
방문을 탁 닫자마자 녀석이 볼멘소리를 냈다.
“너, 마법사랑 친해지고 싶었던 거 아니야?”
“⋯예?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번을 안 찾아 와?”
아.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손으로 막았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리고 자리를 권했다. 에드윈은 온몸으로 분한 티를 내느라고 팔꿈치와 무릎에 힘을 가득 주고 걸었다. 양탄자를 깔아두지 않았더라면 쿵쿵 묵직한 발소리가 났겠다.
깃털 같은 생김에 맞지 않게, 응접실 소파가 푹 꺼지도록 털푸덕 주저앉는 소년을 보고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화가 나면 다리에 힘을 주어 걷는 습관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응석 부리는 데에는 재주가 있다 싶었다.
“학기 중에 좀 바빴습니다.”
“아니, 아무리 바빠도!”
“기다렸습니까?”
“아니! 전혀!”
사납게 딱 잘라 대답하는 에드윈의 얼굴을 보고 다시 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나 웃는 것을 알아챈 녀석이 또 분을 터뜨리며 입술을 앙 다물길래, 서둘러 차를 대접하겠다 일어나 물을 데워 왔다.
뾰로통하게 앉은 녀석의 앞에 평안과 진정을 위한 옅은 녹색의 차를 내밀어 대접하며 사과했다. 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일단 달래고 볼 일이다.
“죄송합니다.”
“당연히 죄송해야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소리 내어 웃자 저 딴에는 민망했던 모양인지, 에드윈이 각 잡힌 태도로 찻잔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뿔난 에드윈을 달래기 위하여 내 아카데미 수첩을 꺼내 왔다. 일학년 초반부터 사용한 수첩은 손을 많이 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귀퉁이마다 낡아 있었으나, 그 내용을 살펴보는 데엔 조금도 문제가 없었다.
지난 학기와 지지난 학기 시간표를 꺼내 에드윈에게 보여주었다.
“제가 수업을 좀 많이 들어서,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요.”
“⋯너⋯.”
“말씀하세요.”
“⋯아니, 너 이러고 어떻게 살았어? 잠은 자?”
그렇게 사납게 씩씩거려놓고, 내 걱정을 하는 것인가. 하여간 속내는 순한 놈이다.
“예. 잘 자고, 잘 먹었습니다. 다만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시험공부를 하느라.”
“⋯그래, 수업이 겹쳐야 한다 이거지.”
아이가 착착 내 수첩을 넘기더니 어느 교수의 이름을 딱 짚었다.
“앨런 라게르, 마법 생물의 성장과 이해. 매주 금요일 오후 두 시부터 여섯 시까지 네 시간. 신청해. 네 자리 있을 테니까.”
“⋯예?”
“딱 봐도 네가 좋아할 만한 수업 아니야? 너 마법이라면 환장하잖아. 내가 졸업 전에 학점 떠먹여 주고 갈 테니까 신청하라고.”
“음.”
에드윈이 작년에도 이렇게 쨍알거리며 말을 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더 새침한 놈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나 하면서 과목명과 교수명을 수첩에 적어두었다.
“염두에 두겠습니다.”
“염두에 두지만 말고, 신청하라고.”
“예.”
다시 웃었더니, 차 한 잔 더 따르라고 성을 부리기에 아이의 응석을 들어 주었다.
에드윈이 한숨을 몰아내며 더 말을 않았다.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녀석의 흐린 보랏빛 머리칼이 어깨 너머로 사르르 흩어지는 모습을 멀거니 구경했다.
침묵을 이겨내지 못한 내가 먼저 안부를 물었다.
“그간 어찌 지내셨습니까?”
“⋯나 6서클 됐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더니, 녀석이 미간을 구기고 설명을 덧붙였다.
“소드 마스터라고, 이제.”
“아. 축하드립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다. 말이 쉽지, 나이 스물도 되기 전에 초절정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나는 물론이고 중원 살던 때 오룡삼봉들도 그리 대단치 못했다. 에드윈 이 아이가 지난해 내내 얼마나 고생하였을까 하고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대련 한 번 더 할까요?”
“이제 넌 상대도 안 될 텐데.”
“저도 실력이 좀 늘었습니다.”
“어느 정도나?”
“글쎄요⋯.”
나는 전생에 초절정의 경지 말석에 올랐었다. 시어런 말로 하자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게 일류와 절정, 초절정의 간격은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이룬 경지를 펼쳐내기에 내가 아직 어릴 뿐이다. 지금 이대로 근골이 자라고 내공이 늘기만 한다면 소드 마스터라 불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에서 말을 않았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숨을 폭 내쉰 녀석이 말을 돌렸다.
“너는 어떻게 지냈는데.”
“잘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잘, 어떻게?”
“으음⋯. 수업을 듣고.”
내가 말재간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아는 놈이 갑갑해하기에 또 웃고 말았다. 웃지 말라 하기에 알겠다 대답은 했으나, 녀석도 슬쩍 웃는 꼴이 빤히 보였다. 문득 궁금하여 물었다.
“아카데미 정문에 서 있던 것이, 혹시 저를 기다리신⋯.”
“왜. 그러면 안 돼?”
“아뇨,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시지 그러셨나 싶어서.”
“어떻게?”
생각해보니 그가 언질을 줄 방법이 없긴 했다. 내가 방학 동안 어디에 있을지 그가 어떻게 알고 있겠는가.
잠시 생각하다 모르겠다 답하니, 녀석이 다리를 꼬아 불량한 자세로 앉으며 짜증스럽게 제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화가 난 채로도 그 손짓이 퍽 곱다 싶었다.
“저는 또 괜히.”
“괜히 뭐?”
“겁을 주시는 줄 알고, 아이를 먼저 보냈는데.”
“아이? 누구⋯. 아, 그 옆에 덩치?”
고개를 주억였더니 아이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너보다 열 살은 더 먹은 것 같던데.”
“한 살 터울이긴 합니다.”
“⋯.”
“왜요.”
“아니, 아니다. 어쨌든 됐어. 그 말 하러 왔으니까.”
에드윈이 내 시선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을 눈치챘다. 저도 민망했던 모양이지. 아이를 어르기 위해 나 또한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됐어.”
여전히 툴툴대면서도 한 풀 기세가 꺾인 에드윈을 보다 보니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녀석을 볼 적마다 모용 아무개가 겹쳐 보이는 것은 내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고⋯.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편안했다.
처음에는 툴툴대기만 하던 녀석도 제 마법의 경지에 대해 물었을 때에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런저런 풀이를 덧대어 알려주었다.
나는 일전의 대련에서 그가 실드 대신에 속박 술식을 쓴 것이 그 자리에서 곧장 고안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고 크게 감탄했다.
마중 나오지 말라는 아이를 배웅하기 위해 2학년 기숙사 문 앞까지 따라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뚝 서서 놀란 다른 아해를 보았다. 루베르 안티 시어런, 그 가엾고 어여쁜 놈이 희게 질린 얼굴로 나와 에드윈을 번갈아 보았다.
이 녀석도 나를 찾아 온 것이 분명했다.
구태여 설명을 더할 일도 아니었다. 에드윈은 루베르에게 깍듯하게 묵례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인사를 곱게 받아 준 루베르가 잠자코 있기에, 그 손목을 잡아끌었다.
“들어갑시다.”
이 녀석들이 오늘 아예 날을 잡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학이 끝나자마자 쉐이든과 시간표를 맞춰 보기로 약속해 두었는데, 쉐이든 그놈은 또 언제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루베르에게도 에드윈에게 내어 준 것과 같은 차를 내 주었다. 루베르는 나를 위해 신경 써서 챙겨온 것이라며 쿠키 꾸러미를 내밀어 나를 기쁘게 했다.
떽떽대며 쏘아붙이듯 말하는 에드윈과 달리, 조곤조곤 얌전히 목소리를 내는 루베르와 앉으니 몸이 노곤했다.
루베르 역시 나와 같이 듣고 싶은 수업을 꼽아 왔다고 했다. 스티븐 맥클리프 교수의 몬스터와 철학의 만남 수업이었다. 스티븐 교수도 좋고, 그의 수업 내용이나 시험 보는 방식이 꽤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다만 해당 수업이 월요일과 수요일에 각각 있어, 요일을 고민해보고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 * *
도서관 소회의실. 익숙한 면면을 보며 간단히 안부를 나누고 있으려니, 먼저 와 있던 쉐이든이 강의계획서를 흩트려 놓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인기남 왔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카데미 오자마자 키아드리스 영식이랑 황자 전하를 번갈아 만났다며.”
그게 벌써 소문이 났단 말인가? 기가 막혔다.
어디에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물었더니, 빌 브라운 그놈이 당황하여 허둥지둥 쉐이든에게 가서 일렀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하긴, 그 녀석은 놀랐을 만도 했다. 다음 중급 검술 수업도 함께 들을 테니 그때에 아이를 달래 주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허허 웃고 있자니 제니가 나 앉을 자리를 권해 주어 일단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 놓인 스무 개의 강의계획서 중 괜찮은 것을 골라내야 할 차례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들어야 할 수업을 골랐다. 마리앤이 이번에도 레이 깁슨의 수업을 듣고 싶다 하기에, 혼자 들으라고 야멸차게 내쳤다가 큰 웃음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