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월요일.
제국검법의 식이 단조로워 우습게 보았는데, 정작 배우면서 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방어적이면서도 격조 높은 검법이었다. 공격에 치중된 검은 멀리 가고, 방어를 위한 검은 짧게 간다.
나는 표표하고 가벼운 검을 주로 쓰는 검수였기 때문에 멈춰야 할 곳에서 멈추고 나가야 할 만큼만 나아가는 것이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다른 아이들과 같은 모양의 검을 들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서, 동일한 검법을 동일한 순서로 펼치고 있자니 중원에서 창천무애검을 처음 배우던 시절이 떠올랐다.
제멋이 든 검을 손질하는 과정이었다. 내게 가장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미카엘, 집중.”
“예!”
앗차,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눈을 부릅떴다.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루베르와 루실라를 헷갈릴 만큼 진이 쪽 빠졌다. 루베르를 어르려다가 실수로 루실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크게 웃음을 샀다.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루실라의 머리는 먼지가 끼어 보슬보슬했다.
월요일은 중급 연금 수업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지난번 수업에서는 인편으로 물건을 주문하기 위해 목록을 규격에 맞추어 작성하는 방법을 배웠다.
오늘은 그렇게 작성한 주문서를 각자 손에 들고 직접 재료 도매상과 소매상에 찾아가는 날이었다.
세드릭의 인도를 따라 조별로 마차에 올랐다.
익숙한 얼굴들과 마차에 마주보고 앉아있자니 어쩐지 데미안이 다쳐 돌아온 그 날의 시린 저녁 공기가 떠올라 속이 쓰렸다.
그러나 그날의 일을 신경 쓰는 것은 나뿐인 모양으로, 아이들은 저들끼리 재잘재잘 웃음꽃을 피웠다.
나 또한 금세 아이들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무슨 말을 하려다 말지 않았습니까?”
“응? 어떤 얘기요? 하다 만 이야기가 하도 많아서.”
“세르벨 남매와 무슨 일이 있었다고.”
“아! 맞다, 미카엘. 고맙다는 인사 하려고 했었어요.”
지난 여름 방학에 세르벨 남매와 함께 휴일을 보내면서, 내 동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같은 학술부이니 우연히 만나게 되면 잘해주면 좋겠다 언질을 한 일이 있었는데, 레일라 세르벨이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곧장 제니를 찾아간 줄은 모르고 있었다.
이번 겨울 방학에는 제 사촌 언니를 또 데려다가 소개를 시켜주고, 제니와 데미안을 저와 친구들 무리에 끼워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어울린 모양이었다.
“사촌 언니를?”
“네. 안 그래도 슬슬 샤프롱이 필요했거든요. 막 데뷔탕트를 한 해에는 아이들끼리만 몰려다녀도 되지만, 2학년부터는 아니니까.”
“⋯샤프롱⋯이 뭡니까?”
“어어. 물론 미카엘에게는 필요 없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갓 데뷔탕트를 치른 젊은 여성을, 혼인한 나이 든 여성이 챙기는 문화라는 말이 신기했다. 사교계에서 겪어야 할 풍파를 옆에서 도와주고, 제 권위로 눌러 주는 여인이라⋯.
나는 의아하여 눈을 끔벅거렸다.
“사내도 그런 것이 필요합니까?”
“⋯어? 그러게. 남자는 샤프롱이 필요하단 이야기를 못 들어봤네.”
“고쳐야 할 관습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저는.”
마리앤이 새침하게 끼어들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많지 않지만, 옛날 옛적에는 무도하게 구는 사내가 종종 있었다고 해요. 어린 여자애가 혼자 있다가 냉큼 잡혀갈까 봐 안전한 사람이 지켜주기 시작한 거죠. 아무리 잘 지키면 뭐 해요? 미친놈을 막고 혼내야지.”
“안전한⋯사람이라면.”
“이미 혼인을 한, 일정 권력을 쥔 성인 여성이요. 그런 사람만이 어린 여자애를 홀랑 잡아먹을 생각을 않을 것이라고 다들 믿고 있거든요.”
샤프롱에 대해서도 처음 알고, 반박 의견도 처음 들은 나로서는 무어라 더할 말이 없어 멀거니 고개만 끄덕였다. 내 얼빠진 태도에 데미안이 웃는 낯으로 첨언했다.
“지금은 그냥 예쁘고 고귀한 매너 중 하나가 되어버렸지만, 슬슬 사라지는 추세이긴 합니다. 그래서 제니가 소개받은 샤프롱도 젊은 편이에요.”
“그건 어째서입니까?”
“샤프롱의 형식은 챙기되, 본연의 기능과 겸해 사교계 인맥에게 보증인이 되어주는 거예요. 저는 황궁에 취직하기를 소망하고 있으니까, 미리 직장 상사가 될 수 있는 인연들에게 안면을 익힐 수 있게요.”
“아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제니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충분히요.”
아이가 까르르 웃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세르벨 남매라면 현명하고 다정하게 처신할 것을 믿고 있어 안심할 수 있었다.
도착한 연금 재료 도매상은 묘하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묘하게 쿰쿰한 냄새가 풍겼으나, 또한 정갈하게 가게 안팎을 쓸고 닦은 흔적이 보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가게마다 설치한 차양 아래로 주렁주렁 매달린 재료들이 바람이 불 적마다 풍경처럼 흔들거렸다.
시어런의 시장은 모두 말끔하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만 보았던 나였다.
줄에 꿰인 개구리나, 바구니로 퍼서 파는 전갈 따위를 보고 있자니 이곳이 중원인지 시어런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벌레를 가장 싫어한다고 말한 적 있던 이반이 펄쩍 뛰었다. 잘 말린 개구리를 약으로 고아 먹이던 중원에서 온 나는 개의치 않았다. 가장 담담한 것은 마리앤과 데미안이었다.
“마법과 연금은 유사한 것이 정말 많아요. 재료도 비슷하게 쓰고⋯. 여기도 자주 왔어요.”
“저는 그냥 이런 것에 흥미가 좀 있습니다.”
“전에 아티팩트에도 흥미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것도.”
마차가 하나 둘 도착하자, 세드릭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조별로 돈주머니를 하나씩 쥐여 주기에 받았다. 주머니 안에는 금화 네 개가 들어있었는데, 나는 아직 금화를 직접 사용해 본 일이 없어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바로 알지 못했다.
속으로 헤아리며 셈을 더했다. 식물원을 사십 번은 넘게 들락거릴 수 있는 돈이었다. 연금술 재료들이 값비싼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세드릭이 괄괄한 목소리로 시선을 끌었다.
“자, 내 고향에 온 걸 환영해. 그럼 이제 재료를 구하러 가기 전에 주의사항 세 가지.”
세드릭이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더니 손가락을 세 개 들었다.
“첫째, 여기는 가게마다 가격이 달라. 정찰제가 아니니까 꼼꼼하게 비교해서, 품질과 가격을 따져서 구입할 것. 둘째, 예산을 오버하면 점수도 깎인다. 흥정해서라도 맞는 값에 구할 것. 셋째.”
세드릭이 씩 웃고, 박수를 짝 쳤다.
“오늘 하루만 여기 오고 말 것이 아니니 상인분들께 예의를 차려서, 매너 있게 굴 것. 이상!”
“네에!”
싹싹한 아이 몇이 재깍 대답했다.
다들 수업시간에 아카데미 밖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들뜬 것이 빤히 보였다.
물건을 사서 모일 장소를 일러 준 세드릭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었다.
나 또한 동무들과 함께 사야 할 물건의 목록을 훑어보며 거리를 걸었다. 간판들마다 사람 이름만 적혀 있고 무엇을 파는지가 적혀있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데미안은 막힘없이 걸었다.
“어어,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가는 거예요?”
“햇빛 차단 연고를 만든다면서요. 그럼 슬라임을 먼저 사야죠.”
“⋯슬라임? 그거 몬스터 아닙니까?”
“공격성이 없는 몬스터죠.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라서, 아예 유일 산맥에서 데려다가 양식하는 상인이 있어요. 신선한 슬라임을 얻으려면 그쪽으로 가는 게 좋아요.”
“공격성이 없는데 왜 몬스터라고 불러요?”
“뭐, 유일 산맥의 최하층을 담당하고 있어서⋯? 마나가 없는 곳에서는 못 산다고 들었어요. 죽은 동물의 사체 위에 덮여서 소화될 때까지 가만히 있기 때문에 주워오기는 쉬운데, 슬라임 서식지까지 들어가는 것도 일이고, 유지비용도 엄청나요.”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얌전히 듣다가 문득 의아해졌다.
“⋯연고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동물의 사체를 녹이는 몬스터를 피부에 펴서 바른단 말입니까?”
“슬라임의 소화 기관을 제거해야죠. 이건 나중에 알려줄게요.”
데미안은 제가 선배라도 된 것처럼 으쓱거렸다. 그러나 그의 지식이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 아이들 모두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처음에는 종종 칭찬을 사양하던 데미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칭찬을 들을 적마다 신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저도 제가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더 박수 쳐도 괜찮아요.”
“아니,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요.”
“괜찮습니다. 다 이해한다니까요.”
“와, 저 표정 봐. 데미안 많이 뻔뻔해졌네요.”
아이들 노는 모습이 하도 귀여워 뻑뻑 소리가 나도록 박수를 쳐 주었다.
데미안이 익히 알고 있다는 상점에서 살아 있는 슬라임을 뚜껑 달린 통에 넣어 주어, 괜찮은 가격에 구매했다.
본래 어느 정도로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흥정하는 마리앤과 데미안을 응원이나 했다.
생각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편이라 슬라임도 내가 들었다. 간혹 뚜껑이 열릴 듯 들썩거리는 것이 꺼림칙했다.
나머지 재료를 사는 일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빠르게 끝이 났다. 슬라임을 구입하고 나오자마자 그 앞에 서 있던 중년 여성이 아이들에게 손짓한 덕분이었다.
“시어런 아카데미에서 나왔지요?”
“예? 네.”
“첫 달 수업이니까, 햇빛 차단 연고 만들지? 재료 전부 해서 2골드 3실버.”
“⋯헉, 설마 그거.”
“과제 돈주머니에서 슬라임 가격 빼고, 2실버 잔돈 남기고 딱. 어때요? 이 가격에 이렇게 맞춰주는 데 없어. 혹시 실수하면 다시 만들 수도 있게 여유분도 넉넉해요.”
데미안이 넋 나간 표정으로 상인이 내미는 바구니를 살펴보았다. 마리앤이 웬 잘 마른 잎사귀 하나를 손으로 집어 올렸다가, 냄새를 맡고 내려다보았다. 그녀도 넋이 나가 있었다.
“⋯어어⋯진짜 상등품이에요. 괜찮은데⋯?”
“아니, 교수님이 일부러 좀 빠듯하게 예산을 잡으시는 편이라⋯. 엄청 힘들 줄 알았는데.”
“어휴, 앞으로 매달 올 친구들인데 뭐. 이번 학기도 잘 부탁해요. 친구들한테 소개도 좀 시켜주고. 알았지?”
“어어⋯. 네에⋯.”
“그럼 사는 거지? 얼른 포장해줄게요. 궁금하면 와서 포장하는 거 보든가. 지금 보여준 거랑 완전 같은 재료야.”
아이들이 서로 마주보았다. 허. 웃음이 터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네, 주세요.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
“그래, 그래. 이 중에 검술부 친구가 누구야? 친구가 들고 갈 거지?”
“⋯어어. 예.”
“어휴, 보니까 몸집이 아직 작네. 들고 가기 편하게 가방에 넣어 줄게. 등에 메고 가.”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집결 장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든 조 아이들이 똑같은 가방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드릭이 깔깔 웃다가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한참 웃던 그녀가 다음 달에는 지난해와 다른 약을 만들어야겠다고 선언했다.
그래도 특출나게 잘난 조가 없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