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중원에서는 맨땅에 엎드리거나 눕는 일을 개방(*거지들이 모여 만든 방파)이나 하는 일이라며 하찮게 여겼다.
앉을 자리가 없어 바닥에 앉아도 허리를 곧게 펴고 정좌하는 것이 옳다 여겼다.
남궁의 무공은 권각이 아니라 검에 특화되어 있었다. 자연히 남궁의 신법은 구름 위를 걷듯 표표했다.
상대를 타격하기 위해 멀리 뻗기보다는 보폭을 좁혀 날렵하게 피하거나 높이 뛰어오르는 데 중점을 두었다. 굳이 유연할 필요가 없었다.
맨바닥에 앉아 몸을 늘리고 펴는 것이 무공에 도움이 된다니. 곰곰 생각해 보니 아주 낯선 것은 아니었다.
이 해괴한 짓을 어디에서 보았는가 했더니, 권각술(*주먹과 다리를 사용하는 맨손 무술)을 처음 배울 때 다리를 멀리 뻗기 위해 벽에 발을 얹어 두고 잠을 잤다며 소림의 중놈이 자랑하듯 선보인 것과 익숙했다.
하여간 몸 쓰는 일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의욕에 한껏 차 있던 무림초출 시절의 일이었다.
어쨌든 무공에 도움이 된다면 피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냉큼 루실라의 손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몸 다스리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다고 여겼는데 착각이었다.
“윽. 선배⋯! 더는 안, 됩니다.”
“너어는 아직 사교계 데뷔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뻣뻣해?”
“루실, 그만해. 제발 우리 사람답게⋯.”
“내가 뭘 했다고? 에른하르트 영식, 경지에 오르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다른 아해들은 다 웃으며 구경만 하는데, 루베르만 홀로 루실라를 말리기 위해 애를 썼다.
순박하고 참한 루베르의 눈에 나 하는 것이 나쁘게 보이는가 싶어 고개를 들었으나, 웃으며 고개를 흔드는 샌슨과 눈이 마주쳐서 다시 자리에 엎드렸다.
시어런의 무술이 중원의 것과 크게 달라 이것 또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다리를 쩍 벌리고 몸을 앞으로 굽히는 동작이 보기 추하여 달갑지 않았으나, 아직 내 나이가 어리니 이 정도 추태는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속도 있었다.
멀찍이서 웃는 낯으로 구경하던 마엘로 샌슨이 이제 훈련을 할 시간이라며 루실라를 말릴 때까지 한참 바닥을 구른 탓에 옷가지에 흙먼지가 잔뜩 묻었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게 온몸이 뻐근하여 손아귀가 저리도록 검을 꽉 쥐고 휘둘렀다.
수업이 끝나고 마엘로 샌슨에게 루실라의 방법이 정말 소용이 있느냐 물었다.
관절의 가동 범위를 넓히는 것은 언젠가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정진하라 하기에, 샌슨도 그러한 것을 할 수 있느냐 물었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속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점심 식사를 하는 중에 내가 실전 비도술 수업을 혼자 듣는다는 말이 나왔다.
지난 학기에 루베르가 홀로 수업을 들은 이유도 나와 같다고 했다.
매번 실전 비도술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학생이 서른은 되는데,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인원은 더도 덜도 않고 열 명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한 모양이었다.
작년의 두 학기에도, 올해의 지난 학기에도 윌턴 로버츠의 실전 비도술은 수요일과 목요일 오후에만 했다는 말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로버츠 교수도 비반 오티프 교수처럼 겸임 교수인 까닭입니까?”
“비반 오티프? 누구지⋯ 내가 수업을 들어 본 교수님은 아닌 모양인데. 글쎄, 잘 모르겠어. 윌턴 로버츠 교수님은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으시거든.”
“명마 예찬론을 담당하고 계신 교수님입니다.”
“아, 아아. 승마 수업이면 내가 안 들어서 모르겠지만⋯. 사실 전임 교수라고 해서 아카데미에 머무르는 시간이 유난히 길지는 않을 거야. 그냥 그 사람의 성향이지. 교수 숙소를 사용하지 않고 외부에 있는 자택에서 출퇴근하는 교수님들은 일부러 수업 일자를 조정하기도 한다고 들었어.”
루베르는 언제나처럼 사근사근하고 친절하게 내가 묻는 말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었다. 중간에 루실라가 혀를 내두르는 것을 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매가 저들끼리 격의 없이 친하여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윌턴 로버츠 교수가 열 명의 학생만 받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말도 들었다.
비도술은 그 자세와 던지는 힘이 중요한 수업이라 교수가 학생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아주어야 해서 수업 자체가 이론보다는 실전에 치우쳐 있었다.
때문에 겨우 일주일에 한 차례 수업을 들으면서 너무 많은 학생을 받으면 한 학생당 비도를 한 번씩밖에 던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일주일에 겨우 한 번 비도를 던질 것이면 수업을 듣는 의미가 없지 않으냐 하는 말에 수긍하여 나 또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내 성격상 이런 것을 스승에게 직접 물을 수 없었을 것이니 루베르가 있어 참 다행이라 여겼다.
설명을 듣고 만족한 나와 달리 아해들은 골고루 침울했다.
벤자민이야 비도술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되어 침울한 것이고, 루실라와 맷은 목요일 오후에 듣는 수업이 난해하지만 꼭 들어야 하는 수업이라 가기 싫다 하였기에 그 까닭을 알았으나 루베르의 경우에는 난데없었다.
그 가여운 표정이 신경 쓰여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느냐 슬쩍 물었더니, 한참을 아무 말 않다가 이제 나와 따로 비도술 연습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쉽다는 말을 했다.
겨우 그것으로 그렇게 침울해 있었던 건가 생각하니 녀석이 하는 짓이 가엾고 어여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머리를 헤집었는데, 녀석이 피하지 않고 얌전했다.
그런 루베르가 귀여워 한참 후에도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 * *
지난 학기에 왕왕 들렀던 곳이기 때문에 비도술 수업 교실은 찾아가기 쉬웠다.
늘 루베르가 기다리고 있던 연무장 어귀를 지나면서 다시 한번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흰 낯에 서운한 기색을 잔뜩 담고서도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몇 번이고 저는 괜찮다 하던 것을 떠올리니 언제 한번 시간을 내 놀아 줘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나와 엇비슷한 시간에 도착한 아해들과 윌턴 로버츠 교수를 기다렸다.
아무래도 검을 다루는 수업이다 보니 모두 검술부의 학생이었다. 열 명 중에 나만 1학년이었고, 둘이 2학년, 일곱이 3학년이라고 했다.
1학년보다 3학년 학생이 더 많은 이유를 물었더니, 저를 3학년이라고 소개한 올리버 컴바인이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글쎄. 점수 얻는 게 더 쉬워서 그런 게 아닐까.”
“더 쉽다니요?”
“전공 수업이 아니고서야 교양 수업으로 한 학기 학점을 채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검술부 놈들이 머리를 쓰지 않고 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업은 몇 없거든. 비도술 수업은 너무 어렵지도 않고, 너무 힘들지도 않아서 그런 놈들이 노리기에 딱 좋잖아.”
“그럼 저번에 제비뽑기할 때 징징대던 선배는⋯.”
“필립? 걘 원래 몸을 잘 못 써. 재수강했어도 똑같았을걸.”
내가 그놈은 무엇이냐 하고 말끝을 흐리니, 곁에서 다른 아해가 끼어들어 설명해 주기에 그러려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잘 지내보자 인사한 아해들이 아카데미 생활 꿀팁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어느 건물 뒤에는 낮잠 자기에 좋은 공간이 있고 어느 건물 사이에는 미신이 있고 하는 이야기였다.
일각쯤 지난 뒤, 딱 정시가 되자 교수가 들어왔다.
나는 시어런에 와서 이렇게 새까만 흑의로 온몸을 두른 이를 처음 보았다. 중원에서는 왕왕 볼 수 있었던 차림이기도 했다.
대개 밤일을 하는 이들이 저런 차림을 했다. 나 또한 밤손님을 한두 번 맞아 본 것이 아니었다.
중원에서 본 암살자들과 다른 것은 그저 복면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묘하게 핏기 없는 얼굴색을 보아하니 수업 중에만 복면을 하지 않을 뿐, 밖에서는 얼굴을 칭칭 둘러 가리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차림새에 흥미를 느낀 것은 나뿐인 모양이었다.
다른 아해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세를 바로 하기에 나 또한 그사이에 섞여 담담한 표정을 꾸며 냈다.
로버츠 교수는 학생들의 면면을 가만히 살펴보더니 적당한 테이블에 훌쩍 올라앉았다. 그 방만한 태도가 잘 어울렸다.
“이번 학기에도 열 명은 채웠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아쉬운 것도 같고 뿌듯한 것도 같았다.
교수의 혼잣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몇몇이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교수가 재차 입을 열었다.
“반갑다, 제군들. 내 이름은 윌턴 로버츠. 시어런 아카데미에서 팔 년째 단도 던지는 법을 가르치고 있고⋯. 제국 귀족 연감 검사감찰팀에 적을 두고 있다. 수업 시간 외에 제군들과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지.”
농담이라고 한 것 같은데 웃어도 되는지 몰라 다들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윌턴 교수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가지고 온 꾸러미를 하나씩 들고 가게 했다.
꾸러미는 위아래가 접힌 천을 한 방향으로 돌돌 말아 천으로 묶은 것이었는데, 풀어헤쳐 보니 적당한 크기의 비도가 열 자루씩 들어 있었다.
그중 아홉은 크기가 같았으나,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이 팔뚝의 길이를 닮은 중검인 것이 눈에 띄었다.
“지금 나눠 준 단도는 이번 학기 수업 시간 동안만 사용하고 반납한다. 개인 물품이 있다면 가지고 와도 좋다. 본 수업 시간에는 단도를 관리하는 방법, 정지한 과녁에 단도를 던져 맞추는 법, 움직이는 과녁에 단도를 던져 맞추는 법, 그리고 몇 가지 위기 상황 대처법에 대해 배울 예정이다. 다들 앉아서 듣도록.”
비도술 연습장에는 앉을 자리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과녁과 과녁 사이에 놓인 테이블은 비도 꾸러미를 올려놓기 위한 것이었다.
고심하는 나와 달리, 다들 털썩 바닥에 잘도 앉기에 나 또한 바닥에 앉아 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일전에 루베르가 제 단도 꾸러미를 꺼내 왔던 쪽의 수납장을 턱짓으로 대강 가리킨 윌턴 로버츠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쪽에 있는 수납장은 자유롭게 사용해도 되지만 잠금장치가 없으니, 지금 나누어 준 단도 외의 귀중품을 두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라. 중간고사 때는 움직이지 않는 과녁을, 기말고사 때는 움직이는 과녁을 겨냥하여 단도를 던져 그 결과를 반영해 점수를 낸다. 필기시험은 따로 없다.”
“⋯.”
“제군들은 단검과 장검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윌턴 로버트의 시선과 말투가 줄곧 딱딱했던 탓인지 아무도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윌턴 교수는 누구 하나를 지목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청했다. 교수가 고개를 가벼이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단검은 장검보다 은밀하게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교수의 눈에 광채가 도는 것을 보았다. 윌턴 로버츠는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려 웃었다. 창백한 낯에 혈색이 도는 모습이 기괴하여 등골이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