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57화 (57/176)

57.

루베르는 그의 부모와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히 늘어놓았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지금의 황제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공정한 사랑을 주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 노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황제는 자신의 아이 셋을 모두 함께 만나는 일은 좀처럼 없었으나, 셋 모두에게 동일한 날에 동일한 양의 시간을 할애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였다.

그들이 각자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해서는 서로에게 온전히 얘기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 덧붙었다.

루베르는 아버지에게 검식을 선보이거나 나라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 생기는 고충 따위를 듣는 일을 즐긴다 하였다.

루실라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온전히 자신이 차지할 수 있는 시간에, 그들은 함께 사냥을 하기도 하고 검식을 연습하기도 하고 온전히 마음을 쏟거나 받을 수 있다 하였다.

루베르와 루실라의 어미인 황비 케이트 안티네스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권력욕이 강한 분이셔서, 전대 황비가 타계하기 전부터 황비 자리를 노리고 계셨다고 해. 나와 루실라가 태어난 그 날부터, 우리가 황위를 잇기를 간절히 바라셔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셨다나 봐.”

“이런저런 일이라면 어떤⋯?”

“그냥, 미리 외조부님을 통해 지지 세력의 기반을 쌓아 두거나 하는 것들. 별로 대단한 건 아냐. 황비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계시지만, 명예롭지 않은 일엔 절대 손대지 않는 분이시거든.”

“⋯흐음.”

“그래서 황위를 노리고 있는 날 편애하고 루실라를 멀리하시더라고. 본인이 쌓아 놓은 기반이 황제가 되지 않을 루실라에게 흘러들어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

“그래서 난 루실라 앞에서는 어머니 얘기를 하지 않아. 그냥, 괜히⋯ 그 애한테서 어머니의 존재를 빼앗은 기분이 들더라고.”

술 한잔 하지 않고서도 소년이 그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비밀을 술술 풀어나가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어찌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 말을 아꼈다.

누구든 그저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인지, 아니면 나를 그만큼 가까운 동무로 여기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잠자코 듣다가 소년의 손등을 두어 번 도닥여 주자, 루베르가 빙긋 처연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의아한 점이 떠올랐다.

“그럼 선배가 황제가 되고 싶다 생각하는 건, 그저 모친의 영향일 뿐입니까?”

“그렇지는 않아. 난, 그러니까⋯ 리차드 형과 정치 이념이 많이 다른 편이거든. 아버지를 존경해서 나도 아버지 같은 황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도 하고⋯.”

“음.”

“어머니의 꿈을 이뤄 주고 싶다는 생각보다, 황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했어. 이건 내 꿈이야. 어머니의 것이 아니라.”

루베르의 표정과 눈빛이 단호하였다.

나는 대꾸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루베르는 잠시간 할 말을 고르다가 이번에는 제가 만들고 싶은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 또한 나와 나의 혈족들이 살아가야 할 땅에 대한 흥미가 많아, 녀석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어느새 밤이 깊었다.

저녁 시간이 훌쩍 넘어 굶어야만 했지만 좀처럼 허기지지 않았다.

목표하였던 만큼 수련하지는 못하였으나 루베르와 목이 바싹 마르도록 이야기를 많이 나눈 탓에 아쉬움이 없었다.

다음번에는 순전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자리를 만들 것을 약속하고, 자리를 파했다.

* * *

주말에는 특별한 일 없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였다.

도서관에서는 늘 대부분의 시간을 동무들과 함께 보냈다.

잠시 루베르가 와서 기웃거렸으나 책 한 무더기를 옆에 쌓아 둔 마리앤과 제니가 함께 자리 잡고 있기도 하였고, 나 또한 외워야 할 유인물이 많아 다음을 기약하였다.

루베르가 돌아가고 나서 내게 모이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하였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쉐이든이 황자와 내가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 하는 이야기를 꺼냈을 적에는 이전과 다른 대답을 돌려줄 수 있었다.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생각했던 것보다 털털하여 성격이 좋더라.”

“⋯루베르 황자님이 털털하다고요? 어떤 면에서요?”

“그냥, 조용조용하고 싫어하는 것도 많지 않고. 잘 웃고, 부끄러움은 많이 타고.”

“지금 2황자님 얘기하는 거 맞지?”

“2황자가 두 명일 리는 없지.”

“아니⋯, 그래. 그렇구나⋯.”

“또 아이가 성실하여 수업도 열심히 듣는 것 같고, 품행도 바르니 가까이하여 나쁠 게 없다. 왜 네가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하였는지 알겠더라.”

“⋯아이⋯. 2황자님도 아직 성인이 아니시기는 한데.”

“음.”

다른 아해들이 보는 앞에서 쉐이든이 2황자를 지지하는 말을 하였다 하기에는 저어한 구석이 있어 말을 아꼈다. 쉐이든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계사 수업을 그렇게 열심히 들었으니 잘 정리된 노트를 빌려줄 수 있었을 테고, 비도술 수업을 열심히 들었으니 내게 알려주는 품새가 바른 것이 아니겠는가.

참 성실하고 착한 아해였다.

순하고 얌전한 것이 사납고 폭급한 것보다는 나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으니, 그런 이가 황제가 되면 이 나라의 전망이 밝지 않겠는가.

내심 그가 꾸려 나가고 싶은 시어런에 대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쏙 들어차는 구석이 있었기에 크게 손을 거들어 줄 생각은 없어도 마음속으로는 그를 지지하게 되었다.

한참 마법의 속도를 높이는 방안에 대한 레포트를 쓰느라 이런저런 두툼한 서책들을 뒤적이며 골머리를 썩이던 마리앤이 눈을 반짝이며 종알거렸다.

“2황자님은 확실히, 품행으로 따지자면 모범생 타입이기는 하죠. 시어런 아카데미에서 가장 안경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남자 1위? 검술부가 아니라 마법부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바라는 친구들이 많아요.”

“말도 안 돼! 2황자님은 무조건 검술부여야지. 그 어깨를 하고 마법부에 들어간다면 그만한 낭비가 또 어디 있겠어?”

“하지만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잖아. 그러면 무조건 마법부 아니야?”

“아니야! 유전형질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만큼 단편적인 게 어디 있겠어? 흑발적안 남성은 모두 차갑고 잔인하다는 속설만큼이나 뻔한 말이잖아!”

검은 머리터럭에 붉은 눈을 하고 있는 아비를 둔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학술부 제니의 열성적인 변론에 눈만 끔벅이며 앉아 있었다. 붉은 눈을 하고 있으면 차갑고 잔인하다는 속설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들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였다.

“그런 말이 있어요?”

“아니, 그, 에른하르트 백작가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뭐, 그냥 뻔한 얘기예요. 밝은색의 머리칼을 미인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보니까 종종 듣게 되는 말들⋯? 사실 머리 색만으로 미인과 미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부터가 웃긴 소리기는 한데.”

“또 이렇게 정석적인 미남을 앞에 두고 있는 입장에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내게 몰리는 시선에 작게 탄식하였다.

결국에 마리앤이 그 성정이 유약하고 얌전하던 제니마저 물들여버렸구나. 역시 친구는 가려 사귀어야 했다. 그들은 나를 앞에 두고 내 외모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얼굴에 금칠하는 것이 재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아해들이 까르르 웃어대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다시 머리 색으로 이야기가 돌아왔다.

아비와 어미의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들어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이 분홍빛의 머리터럭이 눈에 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 새로운 화두가 마냥 신기하였다.

마리앤과 제니, 그리고 쉐이든까지 힘을 더해서 금발이 더 좋은 것 같다느니, 적발도 나쁘지 않다느니, 흑발이 정석 미남의 증거라느니, 적발과 갈발은 서브남의 조건이라느니 하는 둥 이야기를 나누느라 공부에 소홀하였다.

나는 그중 절반은 알아듣고 절반은 알아듣지 못하였는데, 연극이나 연정 소설과 같은 데에서 주로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여 그러려니 하고 신경 쓰지 않기로 하였다.

“에른하르트 영식은요? 에른하르트 영식은 어떤 머리 색이 이상형이다, 하는 거 없어요?”

“굳이 따지자면⋯.”

“따지자면?”

“⋯흑발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은 있습니다.”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눈에 익기 때문이었다.

중원에서는 백옥처럼 희고 빛 좋은 피부에 흑단마냥 검은 머리칼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다.

사슴 같이 가늘고 긴 목을 가져야 했고, 걸음걸이는 구름 위를 걷는 듯 둥실둥실 우아한 것을 선호하였다.

나는 거기에 뼈마디가 튼튼하고 골반이 큼직한 사람을 가장 아름답다 생각하였다.

적어도 아이를 낳다 죽을 것처럼 여리여리한 인상의 여인은 옷자락에 스치기만 하여도 똑 부러질 것 같아 말 섞는 것도 두려웠다.

때문에 남궁가의 여식들 중에서도 나를 잘 따르는 것들은 꼭 사내마냥 씩씩하고 당돌한 아해들이었다. 그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문득 아련한 마음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에른하르트 가의 둘째, 미하엘도 검은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아비를 꼭 닮은 머리칼에 어미를 닮은 청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 밝고 활기찬 성정이 고스란히 읽혔다. 귀여운 녀석을 떠올리자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돌았다.

미하엘 에른하르트의 생각을 하면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가 없었다.

아해들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받아주는 대신에 다시 유인물을 손에 쥐었다. 몇몇 물음을 귓등으로 흘렸더니 아이들 또한 다시 저들의 책을 들여다보았다.

유인물에는 지난 시간에 배웠던 황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황제는 당대에는 평가하지 않는 법이라 하였다.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는 수업 중에 현 황제가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직접 보고 후에 평가할 수 있도록 잘 기억해 두라는 말을 했다.

루베르 안티 시어런에게 있어 황제는 다정하고 현명한 아비였다.

그는 묵묵히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한다 하였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자식들에게 최대한 할애하기 위해 골몰하는 모습을 보인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내게 그 방식은 옳게 보이지 않았다.

자식들을 각기 따로 만나 네가 가장 귀하다 다디단 말을 하며 옆에 끼고 돈다니.

그러다 그 자식들을 모조리 한 방에 몰아넣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중원에서는 직계와 방계의 도가 따로 있었고, 장자와 차남의 도가 따로 있었다.

아비의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아비의 뒤에서도 하면 안 되었다. 아우는 형을 존경하고, 형은 아우를 돌봐 주어야 한다 여기고 살았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지난날에도 형보다 뛰어난 아우는 여럿 있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에게는 시어런의 방식이 더욱 달게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옳은 것도, 마냥 그른 것도 없어 어렵고 아득하였다.

유인물을 몇 번 더 읽어 외워 두었다. 유인물의 가장 막바지에는 안티네스 후작가에 대한 내용과 플로이드 왕국에 대한 내용이 빼곡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나는 황가 직계손뿐만 아니라, 그 방계 친인척들의 이름자도 외워 익혔다.

플로이드 왕국은 예전에 노란색 염료의 가격을 뛰게 만든 메리사 플로이드 왕녀의 나라였다. 그 핏줄을 그대로 받았으면 리차드 플로 시어런의 성격도 퍽 유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황자 리차드 플로 시어런이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때 유인물을 읽고서 처음 알았다.

그는 창백하고 허약한 인상의 미남으로 시어런 아카데미 법학부에서 수학하였다고 했다. 마법부 수업을 몇 차례 수강하였으나 마법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고도 적혀 있었다.

얌전한 성정을 지니고서도 일류무인의 자질을 지닌 루베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쉐이든이 어찌 그런 식으로 다음 대 황제의 자질에 대하여 단언하였는지 알 듯 말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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