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비도술 연습장에 루베르 황자와 단둘이 남았다.
내심 쓸데없이 시전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터라 그가 비도 연습장에 남아 마저 훈련하자고 해 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루베르는 흰 낯에 말간 미소를 띠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른하르트 영식이라면 그럴 것 같아서 그랬어.”
“그럴 것 같았다 하심은⋯?”
“뭐든 새로 배우는 시간을 좋아하잖아. 검술이나 무술과 관련된 것이면 특히 더 좋아하는 편이고. 오늘은 저번 주보다 조금 더 실력이 늘기도 해서, 중간에 멈추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예, 맞습니다.”
짧게 대꾸하고 자세를 잡았다.
시어런의 말씨가 본디 부드럽기도 하였으나, 소년이 유독 다정한 어투로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찼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를 꾸준히 신경 써주고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또한 좋게 보였다.
루베르는 꼭 뼈다귀 물어다 주는 강아지마냥 비도를 집어다가 내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바르게 잡는 법을 다시 교정해주기도 했다. 이미 몇십 번을 반복한 동작이기에 나 혼자서도 쥘 수 있는 것을 굳이 도와주기에 또 한 번 웃었다.
비도를 던지려는 내 품새를 확인하고 곧바로 세 보 물러나는 녀석을 흘깃 보고 비도를 던졌다.
매섭게 날아간 비도가 목표물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과녁의 정중앙에서 두 치는 떨어진 위치였으나, 힘을 잔뜩 담아 던졌기에 날의 절반쯤은 과녁에 박혀 보이지 않았다.
“나가 노는 것보단 지금이 더 좋습니다.”
“⋯다행이다.”
“하지만 선배는 절 돕기만 하고, 딱히 무언가 연습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어어? 아니, 아니야. 난 그러니까⋯.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 있다고 하잖아? 에른하르트 영식의 자세를 봐주면서 정석적인, 그러니까, 기초적인⋯ 그런 것을 되새기고 있는 거야.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어.”
“그래요?”
내가 손을 내밀자, 루베르는 또다시 비도를 건네어 주었다.
나는 비도를 받지 않고 그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네 손가락으로 손등을 받치고, 손목 안쪽이 위를 바라보게 하여 엄지로 맥을 짚었다.
중원에서라면 무례로 느껴질 일이었으나, 시어런에서는 워낙에 서로의 손을 덥석덥석 잡으니 잠시 의아하고 말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내끼리니 새삼 내외할 일도 아니었다.
튼튼한 손목을 쥐고 그 손의 모양새를 눈으로 훑었다. 루베르는 키가 커 전체적으로 길쭉길쭉했다. 그 손도 그랬다. 조금 더 자라면 한 번에 비도 두셋을 쥐어도 낙낙하겠다 싶었다.
손가락은 얇은 편인데 손마디만 굵은 것이 꾸준히 단련한 태가 났다.
검지 둘째 마디 위쪽으로 굳은살이 박여 있고, 손바닥 안쪽이 검병의 모양대로 단단하였다. 맥이 펄떡이는 것으로 기의 흐름이 굵직한 것을 알았다.
대단한 무골(*무공을 배우기에 최적화된 훌륭한 신체)이었다.
“⋯아, 어⋯ 갑자기 내 손은 왜?”
“선배가 한손검을 사용하였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에.”
“바꿀까?”
“예?”
“아, 음, 아니야. 왜? 내 손이⋯ 양손검을 쓰기에 좋은 손이 아닌 것 같아?”
“제가 아는 검식은 전부 한손검을 사용하는 것뿐이라, 선배가 제게 도움을 주시는 것만큼 보답할 길이 없어 그렇습니다.”
“아⋯. 검식을. 가르쳐 주고 싶었구나⋯.”
잡았던 손목을 놓았다.
루베르는 여전히 허공에 손을 든 채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원 길거리에 이런 녀석이 돌아다닌다면 대단한 문파에서 일찍이 잡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혈족이 아닌 이에게 검식을 가르칠 수 없어 그간 후계를 고민해 본 적 없던 나에게도 놀라우리만큼 탐이 나는 인재였다.
아무리 봐도 기초를 새로이 수련해야 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수련 방식이야 제각기 다른 것이고, 나 또한 길이 막힐 때마다 삼재검법을 반복하고 있으니 그가 한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잠시 신기해하고 아쉬워하다가 루베르의 손에 들린 비도나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여 두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고 있을 테니, 나중에 혹여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세요. 가문의 이름까지는 빌리지 못하더라도,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어어⋯. 고려하기만 하는 거야?”
“선배의 혈통과 지위가 제겐 부담스러운 편이라서.”
“⋯아.”
루베르가 곧장 묵묵히 입을 닫는 것이 조금 안쓰러웠으나 그뿐이다.
이 소년의 기질이 순진하고 상냥한 것과 그 혈통으로 말미암아 내 혈족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 생각하였다.
녀석은 그 뒤로 가끔 내 어깨의 각도나 팔의 방향을 신경 써 주었으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맑게 갰던 얼굴이 묘하게 가라앉은 기색을 띠는 것이 신경이 쓰여, 여덟 번째 비도를 던진 뒤에 오른팔의 팔꿈치를 주무르며 잠시 쉴 것을 제안했다.
연습실 한켠에 놓인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딱히 몸을 크게 움직인 것은 아니라 근육이 피곤할지언정 땀은 나지 않았다.
묵묵히 그러고 있으니 소년이 까만 눈을 들어 이쪽을 건너다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소년은 한참을 어물거렸다.
녀석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녀석이 한숨처럼,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내가 황자인 게 에른하르트 영식과 친해지는 데 방해가 되는 거야?”
“예.”
“⋯왜? 그러니까, 내가 황제가 되면 나와 가까운 사이인 게 부담이 될까 봐?”
나는 조심히 말을 골랐다. 녀석의 기분이 상하도록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기보다⋯. 시어런 제국이 큰 만큼, 황제의 권위도 드높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당연히 황좌를 탐내는 사람이 더 있겠지요.”
“⋯응.”
“저는 제 가족의 안위가 무척 중하기 때문에, 계승권 싸움과 같은 일에 휩쓸리고 싶지 않습니다.”
“잠깐만, 에른하르트 영식. 시어런 제국의 황위 계승권 싸움은 그렇게 거칠지 않아. 피를 보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그럴 리가. 나는 당혹하여 희게 질린 루베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쉐이든 로제가 황위 계승권 싸움에 대한 언질을 줬던 것을 떠올렸다.
쉐이든은 자신의 섣부른 행동으로 인해 제 가문 기사들의 목이 달아날까 걱정하였다. 그의 두려움이 괜한 데서 비롯되진 않았을 것이다.
중원에서도 귀한 혈통을 타고 난 이들은 큰 잘못을 저질러도 멀리 귀양이나 가는 반면에, 그 밑을 따르는 몸종들은 사소한 잘못으로도 목이 날아가고는 하였다.
내가 루베르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어지간히 티가 났는지, 그가 짙은 눈썹을 팔자로 그리며 항변하였다.
“물론 형과 내가 황위를 다투고 있기는 하지만, 우린 공정한 경쟁을 하게 되어 있어. 부황께서는 우리 세 남매가 온전한 성인이 되고 난 뒤에 몇 가지의 시험을 통해 황위를 이을 사람을 고르겠다고 하셨어.”
“그 시험은 무얼 평가하는 겁니까?”
“아직은 잘 모르지만, 일단 추측하기로는 정치학과 경제학에 대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실 것 같아. 거기에 어느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따위도 중요하게 보시겠지. 실제로 나라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할지도 모르고.”
“예.”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부황께서 평화를 원하고 계신다는 거야.”
“음.”
“나도 그래. 아무리 리차드 형이랑 사이가 나쁘다고 해도, 형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 우리 둘 중 한 명이 황제가 되면, 다른 사람은 공작위를 받게 되어 있어. 황실의 영지 일부분을 나누어 받고 상대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게 될 거라고.”
순진한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시어런 제국의 황권이 드높은 것은 황제가 강건하고, 그 자식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이었다.
내가 곧장 그의 말에 공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소년은 테이블 위에 손을 짚고 몸을 이쪽으로 기울였다. 가까워진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흠뻑 스민 것이 가여웠다.
그런 소년을 보고 있자니 쉐이든의 언질 없이 소년의 호소하는 목소리만 들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눈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저는 형제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선언하는 어린아이를 울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뒤늦게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지금으로부터 327년 전에, 시어런 대개혁이 시작되었잖아.”
갑자기 역사 이야기를 한다고?
의아하여 잠시 멈칫하였으나 내 대답을 기다리고 꺼낸 말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루베르는 곧장 말을 이었다.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매끄러운 말이 차근차근 나직하게 이어졌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혹시 배웠어?”
“아뇨, 그저 대개혁이 일어난 연도와⋯ 개혁을 주도한 귀족 가문들이 지금 다섯 개의 공작 가문이 되었다는 것 정도만 배웠습니다.”
“350년 전에 갓 태어난 아이가 황위에 올랐던 이야기는?”
“⋯모릅니다.”
루베르가 테이블 위에 얹은 제 두 손을 맞잡아 꼭 쥐었다.
기도하듯 애원하듯 단단하게 얽힌 소년의 손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여전히 희게 질린 그의 낯에 시선을 두었다.
루베르는 목이 탔는지 제 입술을 핥았다. 차라도 있으면 내어줬을 것을. 그런 생각을 하며 이어질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지금으로부터 9대 전에, 황위를 두고 큰 전쟁이 있긴 했어. 그 바로 윗대의 황제가 여러 정부를 두어 십수 명의 자손을 낳았기 때문이었대. 다들 자기 외척의 힘을 업고 황위를 다툰 탓에 영지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나 봐.”
“예.”
“그때가 시어런 제국이 생겨난 뒤 최악의 암흑기라는 이야기가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무덤을 만들 자리가 없어서 무덤 위에 무덤을 쌓던 시절이었다고.”
“⋯음.”
“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죽고, 나머지 황자와 황녀들이 서로서로 죽고 죽이는 동안 어느 한쪽의 편을 들던 귀족들도 죽고, 그 아래의 기사들도 죽고⋯. 그러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끝까지 서로를 공격하던 황자와 황녀가 동시에 죽어버린 거야. 더 이상 황족의 피를 이은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에야 내전은 끝이 났어.”
“예? 그러면 지금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전 황제의 자식이 있었대. 그 난리 통으로부터 반년이 지난 뒤에 태어났다고 하더라. 시어런의 황제는 신화적인 이유로 혈족 계승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이는 젖을 떼기도 전에 황제가 되었어. 그러니까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거야.”
“⋯.”
“그때 살아남았던 귀족들 중에 가장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던 다섯 가문의 수장은 어느 누군가에게 권력이 집중된다면 남은 귀족들도 전부 쓸려 나갈 거라고 생각했어. 뭐, 물론 그들 사이의 친분도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겠지만.”
루베르는 제 호흡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어찌 되었건 귀족들은 성공적으로 합의했어. 황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를 보호하고 또 제대로 기르자고, 황제다운 황제를 직접 만들어 보자고 결심한 거야.”
“⋯옳은 소리로 들립니다만.”
“유일한 문제는 그 아이가 황제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어. 태어나자마자 황제가 되었던 그는 스물세 살에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황제를 아꼈던 모두가 몹시 놀라 슬퍼했다고 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수업 시간에 해당 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듣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것은 시어런 황실의 비사였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공공연하게 떠들어 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 황제는 세 명의 아이를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났어. 시어런의 남은 사람들은 그 아이들 중 가장 황제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를 다음 대 황제로 세웠고, 그 이후로 시어런의 모든 아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고르게 되었습니까?”
루베르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침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