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만사가 다 그런 식이다. 마음이 괴로우면 몸을 괴롭히면 나았고, 몸이 괴로우면 잠을 자야 나았다. 푹 자고 일어나니 얼굴에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것이 별일도 아닌 것으로 괜히 심란해했다 하는 생각이 일었다.
아카데미에 다닌 지 얼마나 오래되었다고 금요일을 휴일처럼 여기는 것인지.
자신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언제나처럼 연무장으로 나섰다.
일전에 밟아 둔 무한보 자국이 아이들의 발자국으로 뒤덮여 알아보기 어렵기에, 내공을 실어 꾹꾹 다시 밟아 제 모습을 찾아 준 뒤에 연무장을 돌았다. 운기조식을 하고 씻은 뒤 쉐이든의 방문을 두드렸다.
둘이 내려가 식탁에 자리 잡자 또 지지배배 귀여운 소리를 내는 것이 붙었다.
오늘 옆에 붙어 떠들어대는 것은 함께 야영 수업을 들으며 꽤 친해진 푸른 머리 학술부 소녀, 제니였다. 쉐이든과 제니는 각자 따로 듣는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함께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양껏 음식을 먹으며 둘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묵묵히 들었다.
식사 인원이 늘어나면서부터 내게 부러 말을 걸지 않는 한은 식사 중 떠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홀로 협객행을 다니는 것이 익숙하여 누군가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는 것이 아직 어색하였다.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거나, 누군가를 꾸짖거나, 배움을 청할 때가 아니면 듣는 것이 편했다.
이곳에 와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왜요’인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중원에서의 나는 말수가 적었다. 필요할 적에는 깍듯한 말도 하였으나, 특히 악적 앞에서 한 마디 이상을 하지 않기로 유명하였다. 상대가 살려달라 애원할 적에, ‘왜?’하고 구명의 이유를 묻고 답을 듣고 나면 어찌할지 판단이 섰다. 구구절절하고 구질구질한 변명 끝에 살아 돌아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내 앞의 사람들이 악적은 아니지만, 내가 헤아릴 수 없거나 까닭 모를 의문을 맞닥뜨리면 아무래도 왜? 소리가 먼저 나오기 마련이었다. 사람 참 변하지 않는다.
“에른하르트 영식은 오늘도 수련할 생각인가요?”
“왜요?”
“왜긴, 같이 나가고 싶어 그러지. 매달 셋째 주 금요일에는 야시장이 열리는데, 구경할 것도 많고 먹을거리도 괜찮은 편이야. 오늘 같은 날은 샌슨 교수님도 쉬게 두자. 응?”
제니가 제 역성을 들어주는 쉐이든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제니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도 수험공부를 위해 수도에 일 년을 머물렀는데, 그러는 동안 매달 한 번씩 있는 야시장은 놓치지 않고 구경 나가 답답한 마음을 풀어놓았다 지저귀었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슬쩍 솔깃한 것이, 사실 그간 마음고생을 하여 그렇지 몸은 착실히 배운 것을 꿀떡꿀떡 삼켜 자라고 있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었다. 팔다리가 길어지고 내공이 쌓이고 하는 것은 세월이 약이라 지금 당장에 조급해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곧장 대답하지 않고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제니는 제 식판이 가슴팍에 닿지 않도록 식탁 안쪽으로 죽 밀어내었다. 몸을 바짝 기울여 이쪽으로 붙는 얼굴에 이미 흥이 실렸다.
“저랑 마리앤, 이반, 데미안, 그리고 쉐이든이랑 다 같이 해서요! 구경하면서 야영 가방에 채워 넣을 만한 것이 있나 보기도 하고요. 야시장에는 집에서 직접 만든 보존식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도 많단 말이에요! 또 새로운 무기가 있을지도 모르고, 마탑의 마법사들이 취미로 만든 아티팩트들도 볼 수 있고ㅡ.”
“음.”
“지금 ‘응’이라고 한 거죠? 네? 미카엘, 같이 놀러 가요. 네에?”
“뭐, 그럽시다.”
미끼로 덧붙인 것들 모두 흥미진진하여 달아날 구멍이 없었다.
제니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손뼉을 치며 기대된다며 부산을 떨었다. 그럼 수업이 끝난 뒤 모여 점심 식사는 밖에 나가서 하자기에 그러마 고개를 끄덕였더니, 얼른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오겠다며 식판을 들고 벌떡 일어나 달음박질을 했다.
그리하여 오전 기초 검술 시간에 마엘로 샌슨에게 오늘 오후는 외출할 예정이라 수련을 하지 않겠다 하니, 잘 생각했다며 어깨를 투덕이는 손이 묵직하여 제법 매웠다.
그는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고 몇 번을 거듭 말하였는데, 새삼 더글라스의 말에 놀란 그 밤이 떠올라 입 안이 썼다.
아이다운 것이 무엇인지 배운 적이 없으니 아이다울 수가 있나.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럴 생각입니다. 하고 적당히 대답한 뒤 오후 치까지 오전에 수련하기 위해 마엘로를 달달 볶았다.
* * *
간만의 외출에 교복을 입고 나갈 수는 없다며 내 옷장을 대신 뒤적이며 열을 낸 쉐이든 덕분에, 오랜만에 집에서 입던 옷을 꺼내었다. 그나마 품이 남던 교복을 벗고 딱 맞게 지어 온 옷을 입으려니 벌써부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중원의 옷은 그 자락이 낙낙하였다.
남궁의 무사들은 특별히 몸이 크거나 특별히 몸이 작지 않은 이상은 같은 크기의 옷을 입었는데, 긴 끈을 사용하여 손목과 허리, 발목 따위를 둘러 옷자락을 감싼 뒤 매듭을 지어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식이었다.
그 덕분에 품에 은자 주머니를 넣을 수도 있을 만큼 낙낙하여 답답할 일이 없었다.
시어런의 옷은 달랐다.
옷 한 벌을 지을 적마다 흉통의 크기와 허리, 거기에 목, 손목, 발목, 상완, 하완, 허벅지와 종아리 둘레까지 전신을 칭칭 감아 확인해야만 옷을 지어낼 수 있었다.
내 어깨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가 어찌 되는지를 검이 아니라 줄자로 재어가면서 떠들어댄 재단사의 말에 따르면, 성인이 되면 지금보다 더 꼼꼼히 옷을 지어야 태가 난다고 했다.
아득한 일이었다.
오늘 쉐이든이 골라 입으라 꺼내어 준 옷은 그중에서 그나마 팔뚝 소매가 넓은 것이었다.
얇은 셔츠는 옷깃이 없고 목둘레가 좁았으나, 그 앞쪽 선이 목젖 천돌혈을 넘어 쇄골까지 길게 트여있어 고개를 움직이기 좋았고, 손목은 빳빳한 천으로 바짝 당겨 감쌌으나 셔츠 품 자체가 넉넉하여 바지 안에 넣어 입도록 지어졌다.
낙낙한 셔츠 위로 폭 좁은 베스트를 둘러 단추를 채우니 몸에 딱 맞는 갑주를 입은 것처럼 허리선이 단단하게 섰다. 전체적으로 셔츠를 제외하고는 색이 밝지 않았으나 베스트에 은실로 가득히 섬세한 자수가 놓여 있어 부유한 것이 티가 났다.
내 옷은 해가 뜨기 전 새벽하늘처럼 짙은 푸른색이고, 쉐이든이 차려입은 옷은 말갛게 가라앉는 노을을 닮은 적색이었다. 나와 엇비슷한 모양에 카라가 있고 셔츠 소매 폭이 좁은 옷을 입은 쉐이든은 거추장스럽지도 않은지 그 위에 긴 코트를 걸쳐 입었다.
“뭔가 더 걸치지 않아도 괜찮겠어? 아직 봄이 되려면 조금 남았는데.”
“원래 내가 추위를 잘 안 탄다. 괜찮아.”
내공 수발이 자유로우니 한서불침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정도의 날씨에 추위를 느끼지는 않았다. 도리어 갑갑한 옷 위에 갑갑한 옷을 두르는 것이 끔찍했다.
길거리에서도 불편하지 않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가죽 검집과 한 쌍인 장검을 허리띠에 달아매자, 놀러 가는 길에도 검이 필요하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길거리에서 어떤 불량배를 만나 위협을 당할 줄 알고. 내 타박에 결국 쉐이든도 검 하나를 허리에 달았으나, 일반 검이 아니라 장식처럼 검갑이 화려한 것을 꺼내 와 한참을 웃었다.
일전에 근로 장학인가 뭔가를 한다던 선배를 마주쳤던 아카데미 입구에서 일행을 만났다. 나와 쉐이든만 이렇게 공작새마냥 꾸민 꼴이면 낯 뜨거웠을 텐데, 우르르 자리에 모인 여섯 모두가 평소보다 잘 단장한 모습이었다.
특히나 이곳 소녀들의 발목께까지 오는 스커트는 그 자락이 몇 겹인지 모를 만큼 풍성하여 중원의 것보다 무거울 것처럼 보이는데도 제니와 마리앤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사뿐히 걸었다. 그 태가 매우 신기하였다.
스쳐 지나가며 보아도 놀러 나온 아카데미 학생처럼 보이는 꼴에 큰일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긴장하였는데, 야시장이라 이름 붙여놓고 한낮부터 왁자지껄하게 벌어진 좌판들 앞에는 또래의 소년 소녀들이 손과 손에 먹을거리나 장난감을 들고 돌아다녔다.
수백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어여쁘게 꾸미고 나온 것을 보고 나는 또다시 속으로 내가 이 땅에서 특별히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거리를 둘러보는데 거지나 동냥하는 아이가 없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꺼리던 마음을 접고 동무들을 따라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물건을 구경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제니가 호언장담한 대로 신기한 물건들이 퍽 많았다. 일부러 눈에 띄기 위해 쓰고 나온 듯, 먼지가 내려앉은 큼직한 고깔모자를 쓴 마법사들의 좌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좌판 위 둥글고 노랗고 보송보송한 것에 눈알이 두 개 박혀있는 인형을 보고 의아하여 물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이거요? 인형입니다. 병아리 인형이요. 여기 이 뒤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ㅡ.”
마법사 사내가 그 공같이 생긴 것의 옆구리에 톡 튀어나온 것을 누르자, 녀석은 털에 숨겨져 있는 줄도 몰랐던 주황빛 부리를 벌렸다 닫았다 하며 삐약삐약, 삐약삐약. 귀여운 소리를 냈다.
나는 그만 픽 웃어버렸다. 날개도 발도 없는 것이 정말 쓸모없어 보였다.
“왜, 이거 사 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신기하긴 합니다마는.”
데미안의 말을 거절하자 마법사 사내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다른 것을 꺼내어 하나씩 하나씩 버튼을 눌러 선보여 주었다.
하나는 코끼리랍시고 둥그런 회색 공인형에 눈 두 개와 긴 코만 붙은, 코를 뱅글뱅글 돌리는 놈이었고, 다른 하나는 엇비슷한 생김에 세모난 귀 두 개를 달고 고양이인 체 야옹야옹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그 좌판 앞에서 머무르며 인형을 주무르고 논 값으로, 나는 주머니에서 은전을 꺼내어 결국 병아리 인형을 하나 샀다.
“의외로 귀여운 걸 좋아하네요, 미카엘.”
“줄까요?”
“아뇨, 그냥 계속 그렇게 들고 있어 주세요.”
아하하, 꽃같이 웃는 마리앤이 제니의 손을 움켜쥐고 걸음마다 폴짝폴짝 뛰어올랐기 때문에, 그녀들의 붉고 검은 치맛자락이 함께 일렁일렁하였다.
흥에 취한 걸음이 어쩐지 꿈결에서 본 것만 같아 품 안의 인형을 조몰락거렸다.
말캉한 인형이 생각보다도 손맛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