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잠시간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내공심법을 이곳의 제자들에게 전할 생각으로 들떴던 나는, 삼백예순한 가지의 혈도 중에 열두 가지를 겨우 알아보고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혈은 인체의 내부에 숨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강 이쯤 되는 것 같은데⋯ 하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았다.
요리를 못 하는 이가 대강 이 정도 넣으면 될 것 같은데, 하고 소금을 왕창 쏟아 넣으면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내 몸이야 잘 알지만, 의원이 아니다 보니 타인의 맥이 어떻게 뛰어노는지는 몰랐다.
중원에서 무인의 맥을 짚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내공을 다루는 고수는 누구든 다른 이의 맥문에 사나운 내공을 들이밀어 상대를 위협할 수 있었다. 손목을 잡고 대화하는 것은 목덜미를 틀어쥐고 대화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곳 시어런의 이들은 중원의 이들과 생긴 것도 다르고 골격도 달랐다. 생각할수록 더욱 막막하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사들의 오러 운용법과 제 것을 비교했을 때⋯. 물론 저는 이런 방식으로 빠르게 힘을 얻긴 하였으나, 보편적으로 적용하지 못할 방법인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태어난 직후부터 자연스럽게 호흡을 통하여 마나를 축적했다 함은, 가장 순수하고 마나와 친밀할 때에 이미 비물질계를 깨우쳤다는 말이에요. 그 방법을 안다고 해도 아무나 따라 할 수 없어요. 사람이 사지를 온전히 제 의지로 움직일 수 있으려면 여덟 살은 되어야 해요.”
“그야⋯.”
“심지어 여덟 살이 된다고 해도, 그 어린아이가 기사가 되고 싶을지, 마법사가 되고 싶을지, 아니면 빵집 주인이 되고 싶을지 모르잖아요. 그건 중요한 문제죠.”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얼어붙었다.
아이가 무엇이 되고 싶을지 모른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중원의 많은 곳에서 아이들은 늘 굶주렸다. 어느 고을을 가도 거지가 떼거리로 있었는데, 그중 삼분지 일은 늘 아이들이었다.
개방이 융성한 이유가 있었다. 십만 개방도가 있다는 말은 강호에 거지가 십만을 훌쩍 넘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황궁이 있는 하북에도, 동정호 유람으로 유명한 호북에도, 광서, 광동, 귀주, 섬서, 서안을 가릴 것 없이 온 중원에서 쓸 만한 아이는 언제든 주워 올 수 있었다.
구파일방은 중이고 도사고 거지였다. 길거리에서 대여섯 살 난 쓸만한 무골(*무인이 되기 적합한 신체)의 아이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냥 주워다가 제자로 삼았다.
그렇게 무림인이 된 아이들은 긴 평생을 자신을 키워 준 사람을 사부라 부르며 부모처럼 여기어 사문에 충성했다.
오대세가는 핏줄로 이어졌다. 혼인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세가의 무인이 되었다. 몸이 허약하거나 무재를 타고나지 못한 이들은 비웃음을 받으며 전답이나 서고 따위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가문에서 죽어야만 했다.
정파의 일원이 된 아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하오문에서는 여아들을 거두어 기녀로 썼고, 흑사문이니 월하문이니 하는 사파에서는 큰 아이들을 잡아가 민초들의 돈을 뺏는 일에 썼다.
음향단이니 은월단이니 하는 살수 조직에서 아이들을 동굴에 가두어놓고 혀를 잘라 살수로 길렀고, 강호를 저들이 차지하겠다 들고 일어난 마교는 아이 백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두고 그중 하나가 살아남을 때까지 기다린 뒤 이긴 것을 주워다 저들의 수하로 삼았다.
아이들은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받는 존재였다. 힘을 가진 것들이 그리 정했다.
나는 중원에서 태어난 그 순간부터 무인이 될 예정이었고, 시어런에서 태어나서도 무인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이와 같은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터였다.
손끝이 떨려 들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더글라스는 내 안색을 살피더니 어어, 하고 물잔을 가까이 끌어왔다.
“갑자기 왜 이러지. 좀 추워요? 담요라도 꺼내 올까요?”
“아니, 아닙니다. 지금 몸이 지저분해서 담요는⋯. 그냥 태어나면서부터 기사가 되고 싶은 아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막막해서⋯ 그렇습니다. 그, 제가 사용하는 방법은⋯ 보통 다섯 살 정도에 시작하는 것이라고⋯ 열 살만 되어도 늦다고⋯ 전해 들어서⋯.”
“역시 그렇죠? 보편적으로 쓸만한 방법처럼 보이진 않았어요. 그래서 더 신기했지요. 그럼 사람이 아니라 다른 동물과 몬스터로 실험한 걸 볼까요? 여기 파란 끈으로 표시된 부분인데ㅡ.”
이후로 이어지는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하고 상냥했다. 큰 몸집을 구부려 작게 보이게 웅크린 자세는 자신의 앞에 앉은 이가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일 터였다.
나는 그 자세가 익숙했다. 중원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앞에 두고, 세가에서 설거지나 비질을 하면서라도 먹고살 것이냐 물을 적의 나도 꼭 저런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는 울며 내 손을 잡았고, 종종 세가 내에서 마주칠 적에 방긋 웃으며 감사하다 말했다. 길가 아이를 주워다가 평생 종살이를 시켜도 은인이라 불리었다.
그 아이들에게 내공심법을 알려 준다 하였으면 뛸 듯이 기뻐하여 구배지례(*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을 때 올리는 아홉 번의 절)를 올렸으련만, 세가의 무공은 외인부전 비인부전이라 여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이 다르니 같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살면 살수록 그 땅의 모든 것들이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겨졌다. 지금은 뻗을 손도 없고, 돌아갈 길을 열어 준다 하더라도 내 아끼는 것들이 모두 스러지고 없는 그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음에도.
그들이 불쌍하고, 그때의 내가 불쌍하여 가슴이 먹먹했다.
한참을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결국에는 지금 당장은 실현되지 않은 기술이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원하는 때가 온다면 마탑과 연결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왜 지금 당장은 아니냐 물었더니 그는 당연하게도, 아직 내가 덜 자라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세계는 온후하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의 걸음에는 속이 수선하여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까만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였으나 중원의 것처럼 쏟아지게 많지는 않았다. 땅에도 빛이 있는 까닭이었다. 혹여나 어두운 밤길을 돌아다니는 학생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중간중간 마법석을 박아넣어 켜 둔 가로등이 길 위를 달콤한 노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한 걸음 걷고 하늘을 보고, 두 걸음 걷고 하늘을 보다 보니 안 되겠다 싶어 연무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속이 답답할 적에 내가 하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울음 따위 그치고 전생 내내 후회로 남았던 경지에 이르기로 결심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개운치 않았다.
여덟 시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게 되어 있는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어 고요하였다. 불 꺼진 연무장의 한켠을 빙 두른 장식수가 어둠을 등에 업고 흐느끼듯 바람에 휘둘리며 바스락바스락 잎새 부딪히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 한 가운데에 당당히 서지 못하고, 적당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검을 꺼냈다.
두 손으로 단단히 검을 쥐었다.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하는 일은 언제나 삼재가 먼저였다. 하체를 단단히 하여 자리에 서서 가로베기를 시작했다. 왼쪽 한 점부터 오른쪽 한 점까지를 수평으로 긋는 선은 또렷하게 직선이었다. 자로 그은 듯 한 번 더, 한 번 더.
처음 남궁세가에 발을 들였을 때에도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이것이다. 그때 난 다섯 살이었다. 단련되지 않은 다리로 기마 자세를 하고, 가로베기 천 번, 세로베기 천 번, 찌르기 천 번을 하여야만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처음에는 검 끝이 덜덜 떨리던, 좌상에서 우하로, 좌하에서 우상으로 이리저리 날뛰던 검이다. 눈물 줄줄 흘리면서도 악을 쓰고 견뎌 내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검이다. 하체를 단련하고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지학에 겨우 빚고 약관에 바로 세운 선이다.
후에는 바른 선을 보면 자연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게 되었다.
숨을 들이마실 적에는 기운을 담고, 숨을 내쉴 때는 기운을 뺐다. 그렇게 얻은 것들을 차곡차곡 단전에 밀어 넣었다.
초심을 다잡고 싶어 창궁대연신공이 아니라 삼재심법의 묘리를 따랐다.
내공 한 줌 사용하지 않았으나 베이는 소리도 없이 허공이 베였다. 숫자를 헤아리지는 않았다. 마땅한 때, 마땅한 시에 다음 호흡이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백여 번을 가로 벤 뒤에 검을 잡아 높은 곳에 점을 찍었다. 세로베기 또한 마찬가지로 꿋꿋하게 곧은 선을 그었다. 시선은 정면에 두었으나 검 끝은 달에 닿을 듯 높이 올랐다가, 단전 앞쪽까지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별빛이 선득하니 검날에 비치었으나 흐릿한 윤광은 기껏해야 다섯 보 내외에서나 밝을 터였다.
이미 수업 시간 내도록 한껏 시달린 몸이었다. 몸과 마음을 괴롭힌 뒤, 또다시 몸을 괴롭히는 데 힘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땀이 말라 버석했던 무복이 다시 척척하게 젖어 들어 몸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검을 내리치는 속도는 처음과 같이 일정했다. 그 한 획 한 획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꽂히는 듯하였다.
제가 이 땅에 갑작스럽게 내려왔듯이.
“⋯후욱.”
찌르기 위하여 기마 자세를 풀고, 검을 든 우수를 오른쪽 허리 뒤에 단단히 붙였다. 상체를 곧게 세우고 호흡을 가다듬는 찰나 예민하게 펼쳐진 기감에 사람이 걸려들었다.
저 먼 곳에서 다른 건물로 가는 듯하여 신경 쓰지 않았더니, 자리에 서서 머뭇거리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 마음이 수런댔다.
어쩐지 끝을 제대로 내지 못한 것이 찝찝하고 아쉬워 검을 내려놓지 못하고 공중의 한 점을 곧게 짚은 채 잠시 기다렸다.
조금 더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결국 포기하고 자세를 늘어트렸다.
“⋯내가 방해한 모양이네.”
“아닙니다.”
방해한 것을 알면 돌아가지 않고.
시꺼먼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소년도 시꺼먼 색이라, 만 리 서역에서 중원인을 마주한 듯하였다. 중원 사람과 닮은 것은 그 머리 색과 눈 색뿐이고 훤하게 큰 키나 우묵한 눈매가 시어런의 것임에도 그랬다.
하긴, 아예 이름자에도 시어런을 붙들고 있는 소년이다.
루베르의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잊고 있었으나 문득, 오전의 수업 시간에 소년이 당황하여 허둥거렸던 것이 생각났다.
허한 가슴을 하고 서 있다가 마주한 새벽이라 새삼 마음이 쓰였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녀석도 어쩐지 가라앉은 기색인 게, 저처럼 심란한 일이 있었나 보다 하였다.
까만 밤 산책길에 오르는 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곳이 중원이고, 제가 마흔둘 언저리의 남궁정연이었다면 고민에 빠진 지학의 소년일랑 손목 잡아 객잔에 앉혀 두고 소면 한 그릇, 만두 한 접시 말아 주어 밥 먹이는 것으로 묵묵히 위로를 대신하였겠으나 지금은 마땅히 먹일 것도, 더할 말도 없었다.
저를 보고 멀뚱히 선 소년의 앞에 또 멀뚱히 마주 서 있는 꼴이 기이하여 고요한 숨소리가 여덟 호흡을 넘어갈 즈음 해서 먼저 입을 열었다.
“뭡니까. 오늘 아침부터.”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요. 별일 없었습니다. 잠이 안 와서.”
서로 속내 털어놓을 사이가 아님을 안다. 녀석이 자리를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제야 납검하고 빈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를 손빗으로 쓸어 넘겼다. 손도 머리도 지저분하게 젖어 있었으나 어차피 들어가 씻으면 되는 것이니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무어라 입을 달싹이려다 그만두는, 고뇌에 찬 얼굴의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단단하게 잘생긴 놈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달밤에 홀로 칼춤 추는 이 앞까지 걸어와 이러고 있나 싶었다.
기다려도 상대가 입을 열 것 같지 않아 잠시간 고민하다가, 그를 뒤로하고 성큼성큼 걸었다. 이전에 마엘로 샌슨과 두 소녀가 나란히 앉아 있던 나무 아래를 찾아 덥석 앉았다. 이 자리가 평평하니 땅이 잘 골라져 있어 편히 쉬기에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 그랬다.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옮겼음에도, 불만 한 톨 없이 그 걸음을 뒤따라온 소년이 제 앞에 섰다. 샌슨이 저를 보고 그러했듯,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자리에 앉혔다.
“무슨 일 있는 건 선배 아닙니까?”
“⋯나도 그냥, 잠이 안 와서.”
“별이나 좀 보다 들어가지요.”
말재주가 없어 달래는 말은 원체 할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이제 피곤하니 들어갑시다. 하자 루베르는 유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황자가 이렇게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빌빌거리는지,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생각하며 들어가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몸을 많이 쓴 탓인지, 마지막에 묵묵히 곁을 지켜 준 이가 있어 그랬는지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