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42화 (42/88)

#42

잠시 PVP를 뛰는 사이, 메인 퀘스트를 모두 끝낸 퇴사기원이 이제 이스카리아에 가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해 왔고 나는 파티를 어떻게 모을까 고민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공팟에 들어가는 건데…. 스트레스성 위염이 도져 복통을 호소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아는 사람 있어요? 저 친없찐이라]

[길드/퇴사기원: 길드 나오면서 손절해서 좀....]

[길드/퇴사기원: 둘이서 못깰까요? 역시 힐러는 있어야하나?]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포션 존1나 먹으면 솔클도 된다던데 해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길드/퇴사기원: 저 공략 보고 올테니까 둘이서 함 가보져 공팟보단 이게 낫다]

불현듯 술자리에서 패치노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공팟을 갈 바에는 솔클을 한다고 했던가. 평소 던전을 갈 때는 파티 플레이를 선호했기에 가지고 있는 포션이 얼마 없었다. 일단 구매하러 가긴 해야 하는데.

거래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포션을 적당히 사재기한 나는 순식간에 떨어진 골드를 보며 짜게 식었다.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이놈의 돈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하다. 이스카리아 한 판 뛰고 다시 앵벌이 하러 가야지.

[길드/퇴사기원: 곧죽님 저 궁금한 거 있는데 멘퀘 다 하셨어요?]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 네]

[길드/퇴사기원: 이스카리아 깨고 난 다음도?]

“헐.”

안 했다. 이스카리아만 깨고 그 이후 스토리는 진행하지 않았다. 왜 잊고 있었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채팅을 응시하던 나는 이어지는 퇴사기원의 말에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길드/퇴사기원: 아니 별건 아니고..]

[길드/퇴사기원: 전 뭐 스포 신경 안써서 걍 있는거 봣는데 님이 봤으면 음.....ㅋㅋㅋ.ㅋㅋ]

내 최애가 알타니아라는 건 길드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메인 스토리에서만 나오지!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고뇌했다. 퇴사기원이 저렇게 말한 것으로 보아 분명 알타니아와 관련이 있을 터. 왜 나는 진작 이후 내용을 보지 않은 거지. 이스카리아를 원트클 했다는 거에 정신이 팔렸었나.

당장이라도 NPC에게 달려가 스토리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이미 생겨 버린 선약이 있었다. 심지어 내가 먼저 이스카리아에 가자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퀘스트가 어디에 가는 것은 아니니 이스카리아를 클리어하고 난 다음에 봐도 문제는 없었다. 하나, 뒤 내용이 신경 쓰인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하지도 않던 트롤 짓을 하게 되면 어떡하지. 머리를 쥐어뜯던 나는 힘겹게 채팅을 쳤다.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공략 보셨어요?]

[길드/퇴사기원: 일단 보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ㅠㅠㅠㅠ]

[길드/나한테명령하지마: 괜찮아요 바로 갑시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는가. 퇴사기원은 진짜 둘이서 갈 거냐며 불안하다는 듯이 채팅을 올렸다. 괜찮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장비도 무려 13강짜리 이스카리아 무기였고 다른 장비는 발할라로 도배를 해 뒀다. 더불어 포션도 대량으로 사 뒀으니 문제없다.

둘이서 하는 게 백날 힘들다고 한들 공팟만 하랴. 공팟을 가게 되면 거기서 트롤 치는 놈들에 의해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소수로 가면 적어도 그럴 일은 없어진다. 자고로 클각이란 어떻게든 만들면 되는 법. 다년간의 겜창 짓으로 다져진 컨트롤을 보여 주마.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클리어 시간이었다. 공팟에서 트롤들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가는 것보다 나 혼자서 다 해 먹는 게 시간이 덜 걸린다. 빠르게 끝내고 다음 퀘스트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알타니아와 관련된 스토리를 보지 않고 버티기란 내게 있어 이스카리아 솔클보다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퇴사기원에게 파티 초대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한 나는 곧바로 이스카리아의 절망에 매칭을 넣었다. 초행이라 겁이 난다며 노력하겠다는 퇴사기원의 채팅을 한 눈으로 보고 흘린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원트클. 무조건 원트클. 나는 능히 할 수 있다. 어떻게든 할 것이다. 겜창이니까!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최대한 죽지말고 딜만 제대로 넣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힐러 없으니까 광딜 오면 포션 빨면서 버티시면 됩니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탱킹은 제가 할 거구요]

눈에 불을 켜고 보스 몬스터를 향해 달려 나갔다. 어그로가 끌리며 보스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한다. 광역 딜이 들어오자마자 포션을 먹고, 높은 피통으로 탱버까지 버티고 나니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방에 죽지 않는 이상 포션으로 커버가 가능하다. 디버프 또한 힐러의 도움 없이 늪에 들어감으로써 해제할 수 있어 다른 던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보스딜ㄱ]

[파티/퇴사기원: 쫄은여]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제가처리]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쫄은 내가 맡기로 했다. 채팅을 치면서 광역기를 사용해 쫄의 어그로를 가져오고, 동시에 포션이 들어 있는 단축키를 연달아 눌렀다. 힐러가 없기 때문에 실수 한 번이 크게 작용한다. 최대한 빨리 쫄을 녹이기 위해 온갖 스킬을 쏟아부으며 동시에 보스의 임계점을 확인했다.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빡집중을 하던 나는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깜짝 놀라며 삑사리를 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쫄은 다 잡았으나 이어 나가던 콤보가 끊겨 버렸다. 어떤 새끼가 이런 씨.

[한도윤: 안녕하세요]

[한도윤: 제가 혹시 어제 실수하지는 않았나요...]

“지금 했다! 지금 했어!”

네가 바로 이 구역 개트롤이다, 이 새끼야! 보스를 두들기며 다시금 콤보를 쌓은 나는 빠득 이를 갈며 딜에 집중했다. 고작 한 번 실수한 건데도 딜 로스가 심했다. 연신 울리는 핸드폰 진동이 거슬려 무빙이 필요하지 않은 시점에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뭐 그리 할 말이 많다고 톡을 끊임없이 보내. 모텔에서 친구랑 묘하게 얽혀 있게 만들었다고 지금 복수하냐? 나라고 그러고 싶었는 줄 알아?!

“둘 중에 하나라도 제정신이었으면 거기에 안 버렸어!”

처음에는 집 주소가 어떻게 되느냐고 멱살을 잡아 흔들며 물었으나 술에 취해 개가 된 그들은 본인들의 집 주소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들을 집에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걔들의 뭘 믿고 집에 데려와?

[파티/퇴사기원: 저 죽]

[파티/퇴사기원: 죽어요ㅠ]

[파티/퇴사기원: 포셔뉴ㅠ없어ㅠ아ㅠㅠㅠㅠ]

보스의 남은 HP는 대략 15%, 퇴사기원의 캐릭터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가진 거 다 털어 넣어도 깰 수 있을지 장담을 못 하겠다. 진퇴양난이 이런 걸까. 빠득 이를 갈며 키보드를 부서져라 두드렸다. 앞날은 모르는 일이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 것이다. 저번에도 이러다가 클리어하지 않았던가. 이거 끝나기만 해 봐라. 욕을 X발 다발로 쏟아 줄 거야.

(4)

패치노트에 대한 분노를 담아 온 힘을 다해 키보드를 연타했다. 빌어먹을 새끼. 전에도 그랬지만, 힘줘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한들 캐릭터가 강해지는 효과는 없다. 그저 집중하다 보니 힘이 들어갔을 뿐. 너무 힘주어 누른 탓인지 자판 하나가 말썽을 부려 콤보가 끊길 뻔했다. 심장이 절로 쫄깃해진다.

[파티/퇴사기원: 진짜ㅠㅠ죄송해요ㅠㅠㅠㅠ]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ㄴ]

채팅 치지 말고 조용히 좀 있어 봐요. 지금 빡집중 하고 있잖아. 헤드셋을 타고 들어오는 배경 음악과 효과음을 제외하면, 오로지 타다닥타다닥하는 키보드 소리만 들렸다. 보스의 남은 HP는 10%, 전멸기가 나오는 임계점 또한 92%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삑사리만 안 냈어도 이렇게까지 빡빡하게 굴러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크리티컬 히트가 뜨게 해 주세요! 딱 두 번만! 많이도 안 바란다! 두 번 정도는 떠도 되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공속에만 올인하는 게 아니라 크리티컬도 좀 올려 둘 것을. 속으로 과거의 나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딜을 넣던 나는 까맣게 점멸하는 화면에 손을 멈췄다. 설마, 깼나?

“…아아아아아니잖아! 아아아악! X발! 으아악! 아악! 망겜 X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욕지거리를 씹어 내뱉었다. 까맣게 점멸하던 화면이 밝아지며 전투가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 말은 뭐다? 내가 보스를 죽이는 것보다 보스가 전멸기를 쓰는 게 더 빨랐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크리티컬이 안 떠서, 그때 삑사리를 내서, 각종 이유가 겹쳐서! 이걸 못 깼어! 나라를 잃은 듯 허탈하게 팔을 늘어뜨렸다. 진짜 모든 의욕이 사라진다.

[파티/퇴사기원: ㅠㅠㅠㅠㅠ]

[파티/퇴사기원: 진짜 아깝네요ㅠ 제가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ㅠㅠ]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님 탓 아니에요]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초행에 이만하면 잘하셨는데 뭘]

[파티/나한테명령하지마: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힐러도 없이 그만큼 버텼으면 잘한 편이다. 심지어 그는 초행이 아니던가.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지. 나직이 심호흡을 하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음성 채팅을 쓰지 않은 건 신의 한 수였다. 만약 마이크를 켰으면 내가 내뱉은 욕이 퇴사기원의 귀로 고스란히 들어갔을 것이다. 텍스트에 감정이 묻어 나오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할 말이 뭐 그리 많다고 쌓여 있는 톡을 보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인내해야 한다. 패치노트한테 천리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뭐 하고 있었는지 얘가 알고 그랬겠는가. 그냥 눈을 떴는데 모텔이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보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용암처럼 끓어오르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님]

[죽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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