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7화 (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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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부족한 파밍을 위해 레이드를 돌며 생각했다. 역시, 반복 작업은 재미가 없다. 내가 쌩쌩한 뉴비였으면 또 몰라도 이미 고일 대로 고여 버린 썩은 물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새로 나온 던전이라 해도 고인물들은 보스가 시전하는 기술 이름만 보면 대충 파훼법을 알 수 있는걸. RPG 기믹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라 ‘다 봤던 얼굴이구만?’이 된단 말이지.

애초에 잘하던 PK를 그만두겠다 선언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며칠 내내 비슷한 수준의 유저를 학살하고 다니다 보니 흥미가 뚝 떨어졌다. 갑작스럽게 PK 당한 유저들의 반응도 거기서 거기였고, 해 본 적 없는 컨셉질을 하는 것도 지루했다.

“뭐 재밌는 거 없나.”

밀려드는 권태감에 적당히 마을에 캐릭터를 주차를 시킨 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메인 퀘스트가 나온 지도 꽤 되었고 레이드도 끝물이라 조만간 신규 업데이트가 진행될 것이란 소문이 돌던데. 이왕이면 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지루해….”

책상에 턱을 괴고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유저가 PVP 신청을 받으라며 귓속말로 난리를 치는 게 보인다. 아, 귀찮다고. 상대하기 귀찮아 죽겠다고. 한번 받아 주면 다른 놈도 받아 줘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하다 보면 끝이 없어요, 끝이.

[귓속말/곧죽을놈>베타: 형 뭐 잼는 거 없나요]

[귓속말/곧죽을놈>베타: 심심해 뒤지겟어...]

결국, 과한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베타 누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이 누나는 누구보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니까 재밌는 걸 알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귓속말/베타>곧죽을놈: 채작ㄱ]

[귓속말/곧죽을놈>베타: 개노잼;;]

[귓속말/베타>곧죽을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ㅇㅈ]

“놀리는 거냐고….”

이 양반, 내가 자기 길드 안 들어갔다고 삐친 게 분명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며 부들부들 귓속말을 보내자 이윽고 새로운 채팅이 올라왔다.

[귓속말/베타>곧죽을놈: 정 할거없음 겜방이라도 보실?]

[귓속말/베타>곧죽을놈: 나 보는 겜방 스트리머 있는데 지금 방송 중이거든]

[귓속말/곧죽을놈>베타: 그런거 본적없는디]

[귓속말/베타>곧죽을놈: 긍까 함 봐보라고]

어차피 게임이 거기서 거기일 텐데 남이 하는 걸 봐서 뭐 하냐. 자고로 진성 겜창이라면 본인이 직접 플레이를 해야 재밌는 거지. 베타 누나가 보낸 방송 링크를 보며 잠시 고민한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링크를 복사했다.

브라우저에 복사한 링크를 붙여 넣자 방송에 접속이 되며 30초짜리 광고가 나왔다. 뭐야, 인터넷 방송 시청하려면 광고도 봐야 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미간을 찌푸리며 어디 얼마나 재밌는지 한번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광고가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다. 이윽고, 광고가 끝나자 방송 중인 실시간 영상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끼고 있던 헤드셋을 붙잡아야 했다.

-아…. 라인 밀리네. 안 되겠다.

“무, 어… 뭐야?”

미약한 웃음기가 맴도는 낮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고작 몇 마디 말에 베타 누나가 왜 이 사람 방송을 보는지 알게 된 기분이다. 성우 출신인가?

“목소리 되게 좋네.”

ASMR이었나. 그런 거 해도 잘할 것 같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스트리머의 플레이를 확인한 순간 게임 방송을 괜히 하는 게 아니구나 싶어졌다. 잘한다. 이런 유의 게임을 별로 해 본 적 없어 기초 지식이 부족한 내가 봐도 ‘와, 이 사람 진짜 잘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현재 그가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은 프리지아처럼 MMORPG 게임이 아니라 MOBA 게임. 5인 팀전으로 PVP를 진행하며 적군 타워를 부수는 공성전 게임이었다. 스트리머는 그 좋은 목소리로 팀원 하나하나에게 오더를 내리며 현란한 컨트롤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적 탑 라인 갱커 올라가요. 견제 좀 하시고 CS 좀 먹죠.

-한타 각 잘 잡으면 터트릴 수 있을 듯?

-오, 궁 좋다. 잘 썼다! 다 죽여!

스킬 이펙트가 화려하게 터지며 아군이 미쳐 날뛴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게임의 흐름이 완전히 스트리머 측으로 넘어왔다는 건 알겠다. 화려한 컨트롤로 적군을 쓰러트리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 ‘나도 저 게임 한번 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림도 없지.”

MMORPG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내가 인제 와서 다른 게임이라니. 열에 열 쌍욕 먹을 거다. 유저의 날아다니는 쌍욕은 무섭지 않지만, 게임에서 지는 건 무서운걸. 저런 게임은 욕하면서 던지는 애들이 많댔단 말이야. 게임을 잡았으면 이겨야 하는 한국인 특성상 내가 저 게임을 하는 순간 안 그래도 터진 인성이 두 배로 터질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스트리머의 플레이를 유심히 보며 오더를 귀 기울여 들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라도 이 게임을 하게 된다면 지금 들은 것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지금이야 이해 못 한다더라도 기초적인 운용법을 알고 나면 다를 수도 있잖아.

게임의 결과는 스트리머 측의 승리. 적군의 항복을 받아 낸 그는 고생했다는 말을 남긴 뒤 게임에서 나갔다. 초반에 CS 차이가 어쩌구, 바텀 라인이 저쩌구 하며 게임이 끝난 후의 브리핑을 짧게 하는데… 솔직히 나는 반도 못 알아먹었다. 게임 짬밥이 아무리 길어도 장르가 다르면 어쩔 수 없구나. 전문가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와, 진짜 오늘 랭겜 너무 빡셌다…. 이렇게 힘든 판은 오랜만인 것 같아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나도 모르게 귀밑을 긁적였다. 이만 방송을 끝내겠다는 말에 곧바로 인터넷 창을 닫았다. 방송이 꺼지자 프리지아의 배경 음악이 들려왔다. 음, 마음이 평온해지는 브금이야.

[귓속말/베타>곧죽을놈: 방송 끝낫더라]

[귓속말/베타>곧죽을놈: 봄? 어땠음?]

어땠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귓속말/곧죽을놈>베타: 게임 갈아탈까 고민중]

[귓속말/베타>곧죽을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베타>곧죽을놈: 고인물들한테 털릴각ㅎ]

[귓속말/곧죽을놈>베타: 그래도 내가 짬밥이 있는데]

[귓속말/베타>곧죽을놈: 응 아니야~ 타겜 가면 너도 뉴비야~~]

너무하네. 겉으로는 베타 누나의 말에 반박하면서도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었다. 아까 딱 한 판 하는 거 봤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이래서 MOBA 게임은 함부로 건드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귓속말/곧죽을놈>베타: 정 할거 없을 때 찍먹이나 해볼라고]

[귓속말/베타>곧죽을놈: 곧죽이 미래=봇전 이기고 재능있다 착각하며 자신감 뿜뿜하다 일겜에서 멘탈 털려버리기]

[귓속말/곧죽을놈>베타: 그건 경험담인가요?]

[귓속말/베타>곧죽을놈: ㅋ....ㅋ.ㅋㅋ.ㅋ..앗쉬1바 들킴ㅎㅎ 제가 저랬어요 ㅎㅎ;;]

[귓속말/곧죽을놈>베타: ㅋ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

그래도 영상 같은 거 돌려 보면 랭킹 점수가 들어가는 판은 못 돌려도 일반 게임 정도는 적당히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진짜 한번 해 봐야지. 인터넷 방송을 보며 환기를 시켰기 때문일까. 지금이라면 이것저것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새 캐릭터로 뉴비인 척을 해 볼까.”

다른 게임 가면 나도 뉴비라고? 그럼 하던 게임으로 뉴비인 척하면 되지! 하다가 재밌으면 아예 본캐를 바꿀 수도 있고. 이 계정은 PK를 하도 하고 다녔더니 어그로가 너무 많이 끌려서 귀찮은 일이 꽤 생겼다.

프리지아의 시작과 함께한 곧죽을놈 캐릭터가 아깝긴 했지만, 완전히 삭제해 버리는 것도 아니고, 뭐. 칭호작이랑 업적작을 다시 하려면 좀 번거롭겠지만 못 할 정도는 아니다. 고인물이 괜히 고인 게 아니란 말이지.

혹시 몰라 새 아이디에 파 놓은 창고 캐릭터가 있으니 거기에 있는 아이템을 새 캐릭터에 집어넣어 쓰면 초반 러쉬는 가볍게 뛸 수 있으리라. 예전에 뿌렸던 경험치 증가 아이템도 있으니 레벨링도 수월하게 될 테고. 이거 괜찮겠는데?

생각을 끝마치자마자 나는 노트북을 켜 새 아이디로 들어간 뒤 캐릭터 생성 버튼을 눌렀다. RPG의 장점은 역시 커스터마이징이죠. 직업은 뭐로 할까? 역시 익숙한 광전사를 하는 게 나으려나. 다른 직업은 제대로 써 본 적 없으니 역시 하던 걸 하는 게 낫겠지? 딜 사이클이랑 틱택도 다 알고 있고.

직업에 대해 생각하며 커스터마이징을 진행하던 나는 무심결에 생성을 마친 캐릭터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붉은 장발에 강인해 보이는 외형의 여성 캐릭터. 알타니아를 똑 닮은 커스터마이징이자 곧죽을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나 진짜 알타니아 증후군에 걸렸나 봐.

“어쩔 수 없잖아. 살면서 처음으로 생긴 최애인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커스터마이징을 새로 했다. 장발 말고 숏컷에 무채색 계열로 해 줘야지. 캐릭터 성별은 남성으로 하고. 달칵, 달칵,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으로 캐릭터를 꾸몄다. 생각했던 것보다 마음에 들게 뽑힌 커스터마이징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그렸다.

뭔가 알타니아랑 다른 의미로 강해 보인다고 할까? 역시 검은색이 간지 하나는 확실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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