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냐 내 최애를 죽인 게-6화 (6/88)

#6

레인저가 원거리 사격을 날리는 것을 보며 백스텝을 밟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장비를 확인하니 거너에 비해 레인저가 더 좋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관통 대미지 쪽을 주로 찍은 거 같은데. 거슬리는 레인저를 먼저 잡아야 하나, 소기 목적 달성을 위해 거너를 먼저 잡아야 하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레인저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장비가 좋지 않은 거너를 빠르게 정리하고 레인저를 잡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되었다. 원거리 직업인 만큼 거리가 멀어질수록 상대하기 까다롭겠지만, 이래 봬도 한때 결투장 지박령이었단 말이지. 치명타만 잘 터진다면 이 정도는 무리 없이 이길 수 있으리라. 그때였다.

“이건 또 뭐야.”

[전체/죽으러온놈: 비겁하게 이대일이라니]

[전체/죽으러온놈: 이제 이대이다]

[전체/욜로족: 쟨 뭐임?]

[전체/딩크족: ㅋㅋㅋ아 쟤 걔 아니냐 곧죽을놈 따까리]

뭐야, 왜 쟤가 내 따까리야. 모르는 사람이에요. 기겁해서 채팅을 치려는 찰나, 죽으러온놈이 거너를 향해 콤보기를 날렸고 순식간에 거너의 HP가 깎였다. 채팅 창에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온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도 물음표가 떠올랐지. 만렙이 아닌데, 저런 대미지가 나올 수 있나? 뭘 어떻게 하면 대미지가 저래?

녀석의 기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거리를 벌리는 게 중요한 거너 캐릭터를 들고 상대 거너의 근거리로 접근하더니 거너 스킬 트리에 어지간해서 넣지 않는 총격술을 사용했다. 직업상 HP가 낮은 축에 들어가는 거너를 가지고 근거리에서 공격하는 유저는 거의 없는데, 정말 알다가도 모를 프리지아의 세계란.

죽으러온놈은 욜로족에게 딱 붙어 녀석이 스킬을 쓰려고 할 때마다 스턴을 걸었다. 더불어 스킬을 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연달아 총격술을 사용하며 차곡차곡 대미지를 누적시켰다. 그리고 들어오는 스킬을 오로지 무빙만으로 피하는데,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어지간한 고인물이 아닌 이상에야 저런 스텝은 못 밟겠다. 이 새끼, 역시 고인물 중의 고인물이었구나.

[전체/딩크족: ㅇ,ㅏ니; 저거 뭐야?]

[전체/딩크족: 저게 돼?]

[전체/죽으러온놈: 돼]

그렇지. 되겠지. 되니까 하고 있겠지. 일순 이 PK가 내 PK가 아니라 죽으러온놈의 PK였나 생각될 정도로 녀석은 신명 나게 날아다녔다. 얼마 전까지 1렙이던 놈이 저만한 무빙을 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스킬을 처박는 모습에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거너를 죽으러온놈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나는 레인저에게로 다가가 갖가지 콤보를 사용했고, 죽으러온놈에게 잠시 한눈 팔렸던 녀석은 급하게 백스텝을 치며 나와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한번 좁힌 거리를 다시 벌리게 두면 광전사를 접어야지.

광전사의 방어력이 아무리 낮아도 엄연히 근딜이다. 레인저보다 낮을 리 없다. 거리 유지만 할 수 있다면 1평캔이 가능한 내 쪽의 승리는 당연했다.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았고 한번 거리를 내준 녀석은 연속적으로 들어오는 대미지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채팅으로 신명 나게 욕을 박는 레인저를 뒤로하고 거너 쪽을 확인하니 뜻밖의 양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도 레벨빨 장비빨이 있으니 욜로족이라는 거너가 이기고 있을 줄 알았는데, 무려 만렙도 아닌 죽으러온놈이 이기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죽으러온놈은 욜로족의 공격을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무빙으로 전부 피했으며 틈틈이 유효타만을 날렸기 때문이다.

“쟤 진짜 뭐지….”

컨트롤 한번 장난 없다. 나도 저렇게는 못 할 거 같은데. 물론 본캐인 광전사로는 신경 써서 하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본캐도 아닌 직업을 가지고 저런 무빙을 뽐내라고 한다면, 글쎄. 어느 정도 연습하고 난 이후에나 가능하겠으나 저렇게 완벽하게는 못 할 거 같다. 일단 원딜 직업은 내 손에 안 맞거든.

도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연달아 백스텝을 사용하며 도망치려고 각을 잡는 욜로족의 모습에 뒤로 돌아가 스킬을 사용했다. 내가 레인저를 상대하는 잠시 동안 많이도 처맞았는지 순식간에 녹아 버리는 녀석을 보며 죽으러온놈의 레벨을 확인했다. 바로 어제 76이었는데 지금 녀석의 레벨은 무려 92나 되었다. 아니, 얘는 진짜 왜 날 따라다니는 거지? 저 정도면 그냥 만렙까지 쭉 미는 게 낫지 않나?

[전체/욜로족: 아니 ** 너 뭐야]

[전체/욜로족: 방해오졌네;;]

[전체/욜로족: 애초에 시12발 지도 거너면서 왜 끼냐고]

[전체/죽으러온놈: 니가 가라 마을]

[전체/딩크족: ** ***가 ****]

니가 가라 마을은 또 뭐야. 니가 가라 하와이 패러디냐. 분노에 찬 욕설에 조금 다급한 마음으로 채팅을 쳤다.

[전체/곧죽을놈: 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전체/딩크족: **하지마 쟤가 니 쫓아다니는게 자게에서 얼마나 유명한데 구라를 치고 있어 이 ****가]

[전체/곧죽을놈: 나 자게 안하는데]

사실을 말해 줘도 안 믿네. 자게에서 말이 어떻게 오고 가고 있는진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썩 좋게 흘러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욕먹는 거 자체는 예상 범위 내인데, 설마 죽으러온놈이랑 엮이면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구라 아니고 나도 진짜 쟤가 누군지 몰라. 내 겜생에 관련 없는 놈이란 말이야.

[전체/죽으러온놈: 우리가 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ㅠ]

[전체/죽으러온놈: 제가 얼마나 님을 쫓아다녔는데...]

그건 네 사정이고. 누가 쫓아다니랬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쫓아다니기는 엄청 쫓아다니긴 했지. 죽여 달라고. 아무리 게임을 잘해도 한번 또라이는 영원한 또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쓰러진 채로 쉼 없이 욕하던 거너와 레인저 파티는 부활 시간이 다 됐는지 결국 마을로 돌아갔다.

PK를 시작한 이후, 한 번에 둘을 상대한 건 처음이었다. 투명이라는 전적도 있고, 다음에 또 거너를 노리게 되면 그땐 넷 이상의 정규 파티를 상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손 털려고 했으니 차라리 다행인 건가. 아니면 부러 파티를 만들어 나를 잡으러 오려는 놈들이 생길지도.

가만 생각해 보니 조금 짜릿했다. 나 하나 잡겠다고 파티까지 꾸려서 쳐들어오는 유저들이라…. 재밌겠네. 나는 사라진 두 시체의 흔적을 보며 채팅을 쳤다.

[전체/곧죽을놈: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님 대체 정체가 뭐예요?]

[전체/죽으러온놈: 님한테 죽으러 왔습니다]

[전체/곧죽을놈: 그거 말고 진짜 뭐 하는 사람이길래 죽여달라고 쫓아와요?]

[전체/곧죽을놈: 저 아세요?]

프리지아를 오래 플레이하면서 나한테 호감을 갖는 유저는 얼마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공대원이랑 길드원 정도. 딱히 여기저기 교류를 하고 다니는 성정도 아닌지라 더 없는 것도 있다. 그래서일까, 저만한 컨트롤을 가지고 이렇게 뜬금없이 찾아와 죽여 달라고 하는 죽으러온놈이 뭐 하는 놈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 또라이는 많고 많은 사람 중 왜 나한테 죽여 달라고 찾아오는 걸까.

[전체/죽으러온놈: 님의 사랑을 뺏는 거너들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전체/곧죽을놈: 뭔 개12소리야;]

[전체/곧죽을놈: 님 뭐 하는 사람이냐니까요]

[전체/죽으러온놈: 궁금하면 오백원]

아, 혈압 오른다. 그냥 이대로 무시할까. 그게 내 정신 건강에 이로워 보이는데.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심호흡을 하는데 죽으러온놈이 다시 채팅을 쳤다.

[전체/죽으러온놈: 제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요? 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이 중요하지]

[죽으러온놈 님이 곧죽을놈 님에게 애정을 표합니다.]

그냥 흔한 미친놈인가? 일반적인 미친놈치고는 게임을 잘해도 너무 잘하니 겜잘알 미친놈이로구나.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나는 자판에 손을 올렸다.

[전체/곧죽을놈: 저 이제 PK 안 하고 다닐거에요]

[전체/곧죽을놈: 그러니까 님도 이제 그만 쫓아오세요]

[전체/죽으러온놈: ?]

[전체/죽으러온놈: 아니 잠깐만요]

[전체/죽으러온놈: 왜요?]

[전체/죽으러온놈: 저 때문인가요?]

[전체/죽으러온놈: 안돼요 님 없으면 전 어떡하라고...]

그건 네가 알아서 하시고요. 말을 마친 나는 주르륵 올라오는 채팅을 무시하고 마을로 귀환했다. 잠시 쉬면서 밥이나 먹어야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키보드에서 손을 떼는데 돌연 결투 신청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체/이베라: 아쌐ㅋㅋㅋㅋ받아요 빨리]

[전체/곧죽을놈: 넌 뭐세요]

[전체/이베라: 님이 죽인 거너랑 레인저네 길원이욬ㅋㅋㅋㅋㅃㄹ받으셈]

내가 왜? 나는 거절 버튼을 누르고 시스템 창을 열어 결투 신청 차단을 눌렀다. 연속적으로 올라오던 결투 신청 메시지가 뚝 끊긴다.

[전체/이베라: 뭐임 왜 안받음? 투명은 받았으면섴ㅋㅋㅋ이제와서 쫄림?]

[전체/곧죽을놈: 아뇨 그냥]

[전체/곧죽을놈: 같잖아서 ㅎ]

[전체/이베라: **도ㅋ;]

[전체/이베라: 니가 한 게 있으니 걍 받지?]

[전체/곧죽을놈: 귀찮은데]

[전체/곧죽을놈: 꼬우면 피케이 걸던가요 당장 여기서 치고박음 되겠네]

[전체/곧죽을놈: 피케이할 자신은 없고 피빕할 자신은 있고?]

[전체/곧죽을놈: 조건적 자신감에 부12랄을 탁! 하고 치고 갑니다]

이제는 익숙한 욕 채팅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들은 진짜 뇌트워크라도 통하는 건가. 왜 하는 짓이 하나같이 다 똑같지? 이왕 시비 걸릴 거 조금 참신한 시비가 걸렸으면 좋겠다. 가령, 죽으러온놈처럼 말이다. 그 양반이 컨셉이 하도 희한해서 빡돌긴 했어도 재미는 있었는데. 역시 게임은 차단 목록 채우려고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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