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6)

02.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퇴근 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만큼 퇴근을 하는 내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왜냐하면 퇴근길 자체도 기분 좋았지만, 무엇보다 오늘은 평소에는 지랄 같았던 팀장에게서 아무런 지적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 막힘없이 쌓인 업무를 술술 처리할 수 있었고, 오랜만에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반드시 기념을 해 줘야 했다. 그래서 원룸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즐겨 마시던 맥주 두 캔과 안주로 먹을 과자와 견과류를 구매하고 밖으로 나왔다. 집에 도착해 냉장고 문을 열어 구매해 온 맥주 캔들을 제일 먼저 넣었다.

그런 다음 컴퓨터 전원을 켠 뒤 그길로 욕실로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씻지 않고 있다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씻기 귀찮아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착하자마자 씻으러 간다는 게 귀찮더라도 이 귀차니즘을 이겨 내면 그 뒤로 펼쳐질 편안함을 알기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은 꼬박꼬박 지키는 루틴이었다.

온종일 일하느라 찌들었던 몸을 씻고 나오자 하늘로 날아갈 듯 상쾌했다. 모름지기 샤워하고 나오면 시원한 맥주를 마셔 줘야 하는 법. 나는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맥주 한 캔을 꺼냈다.

딱.

경쾌한 소리 뒤로 꿀꺽꿀꺽 사정없이 맥주를 삼키는 소리가 따라왔다.

“크으, 좋다.”

벌써 반절 넘게 비어 버린 맥주 캔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실행했다. 로그인하고 얼마 후 게임에 접속하자 길원들에게서 환영 인사가 날아들었다.

[길드]무등산수박: 두식아 어서 와 ㅠㅠㅠ 어제는 미안했어 ㅠㅠㅠ

[길드]음치퀸: ㅎㅇㅎㅇㅎㅇㅎㅇ

[길드]큐띠빠띠: 두식아 ㅎㅇㅎㅇ

[길드]곽두식: 다들 ㅎㅇㅎㅇㅎㅇ

어쩐 일인지 비니가 보이지 않았다. 단축키 G를 눌러 길드 정보를 확인하자 비니는 접속하지 않은 상태였다.

“웬일이지.”

그동안 입고 있는 장비나 행동을 보면 온종일 게임에서 살 것 같았는데, 나름 현생을 사는 모양이었다. 시끌벅적했던 인사가 끝나자, 각자 할 일을 하느라 잠잠해진 채팅 창을 보다 나도 내 할 일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메인퀘를 진행하다 보니 두 번째 던전으로 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첫 던전을 갈 땐 잘 모르는 사람들과 갔다가 욕을 먹은 경험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길원들과 가야겠다 싶어 나는 길드 채팅 창에 도움을 요청했다.

[길드]곽두식: 토토뉴 지하 던전 클리어 좀 도와줄 사람 ㅠㅠ

도움을 요청하면 곧바로 서로 도와주겠다는 채팅이 올라올 줄 알았으나 웬걸,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평소에는 떠들썩했던 보이스 채널도 어쩐 일인지 조용해서 혹시 내 말을 못 본 건가 싶어 다시 한번 채팅을 전송했다.

[길드]곽두식: 토토뉴 지하 던전 클리어 좀 도와줄 사람 ㅠㅠ

[길드]무등산수박: 헉 ㅠㅠ 두식아 나 지금 레이드 뛰러 와서 ㅠㅠ 1시간은 걸려 ㅠㅠ 이거 끝나고 도아ㅗ줄게 ㅠㅠ

[길드]무등산수박: 아 미안 ㅠㅠ 오타야 ㅠㅠ 욕한 거 아님 ㅠㅠ

[길드]음치퀸: 저도 레이드 막 들어와서 ㅜㅜ 큐띠는 밥 먹으러 간댔는데 큐띠오면 같이 가자고 해 보세여 ㅠㅠ

수박 누나뿐만 아니라 다른 길원들 모두가 바빠 보였다. 이런 상황에 계속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어 짧은 고민 끝에 채팅을 입력했다.

[길드]곽두식: 그럼 그냥 나 혼자 가 볼게 ㅋㅎ

[길드]무등산수박: 우리랑 던전도 가 봤으니 잘할 수 있을 거야! 두시이 화이ㅁㅇㄴ팅!

아직도 첫 던전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지만, 수박 누나 말대로 이제는 던전 경험도 있으니 괜찮을 것도 같았다. 던전 목록에서 해당 던전을 선택한 후 기다리자 얼마 있지 않아 바로 매칭이 됐다.

나는 지난번 경험을 되살려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채팅을 전송했다.

[파티]곽두식: 안녕하세요. 해당 던전은 오늘 처음 오는 건데 ㅠㅠ 일단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파티]한보스: 안녕하세여

[파티]자두자두졸려: ㅎㅇ요~

[파티]키치키치: 안녕하세요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지난번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겠지? 앞장서서 달려가는 탱커 캐릭터의 뒤를 따라가며 희망 회로를 돌렸으나, 얼마 후 희망 회로는 까맣게 불타 버렸다.

[파티]한보스: 아 ㅡㅡ 힐러님 지금 뭐 해요? 힐 안 해요?

갑작스러운 지적에 머리가 새하얗게 굳었다. 분명 지난번과는 차원이 다른 플레이를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던전이 끝나는 내내 딜이 바닥을 기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나름 사람다운 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작은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이번에도 파티원들을 돌아가며 한 번씩 죽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난 첫 던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솜씨였다. 첫 번째 보스를 물리친 지금까지 한 번씩만 죽였으니까. 그러나 이만하면 괜찮게 플레이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와 달리 파티원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러는 이유를 확실히 알고 싶어 나는 다급한 움직임으로 채팅을 입력했다.

[파티]곽두식: 힐이요? 하고 있는데……요?

[파티]한보스: 저희 돌아가면서 죽여 놓고서는 힐을 하고 있다고여? ㅋ

[파티]곽두식: ㅇㅏ……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ㅠㅠㅠ

[파티]한보스: 힐러시면 힐러답게 파티원들을 죽이면 안 되죠 ㅋ 딜 넣는데 취해서 힐 안 할 거면 지팡이 버리고 차라리 딜러를 하시든가 ㅋㅋ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후회하는 중이었다. 차라리 딜러를 할 걸 왜 힐러를 한다고 설쳤을까, 과거의 임연우 이 병신 새끼야!

[파티]자두자두졸려: 두식 님 딱 봐도 뉴비 같으신데 그쯤 하세요 ㅠㅠ 원래 힐러는 파티원들도 죽여 가면서 크는 거죠 ㅠㅠㅠ

“하……. 씨발, 앞으로 삼시 세끼 자두만 먹는다.”

이 상황에 내 편을 들어 주는 자두자두졸려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감사하다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 말하기라도 했다간 한보스가 지금보다 더 지랄할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초보니까 실수할 수도 있지, 존나 빡빡하게 군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어찌 됐든 내가 실수한 건 분명하니 험악한 상황을 풀 겸 다시 한번 사과했다.

[파티]곽두식: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좀 더 열심히 해 볼게요 ㅠㅠ

[파티]한보스: 집중 좀 해 주세요

[파티]곽두식: 네 ㅠㅠㅠ 알겠습니다1!! ㅠㅠ

[파티]키치키치: 그럼 얼른 ㄱㄱ 해 봐여!! 다들 파이팅!

거듭되는 사과에 한보스가 한발 물러났다. 하긴 죄송하다고 사과하는데 거기에 대고 지랄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리라. 어찌어찌 분위기는 간신히 풀어졌지만, 부지런히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내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러다 또다시 마주친 몬스터들이 한데 모여들어 파티원들을 사정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몬스터들은 기존과는 달리 얌전히 죽는 놈들이 아니었다. 죽으면서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몬스터에게 맞지 않아도 파티원들의 피가 닳았다. 게다가 30초 동안 지속되는 대미지를 피해 버프까지 친절히 걸어 주는 극악무도한 놈들이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딜과 힐을 번갈아 하고 있던 나는 그 모습에 딜을 멈추고 미친 듯이 힐을 퍼부었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파티원들의 피는 좀처럼 차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달칵달칵달칵.

마우스를 광클하는 내 손가락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날 것 같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파티원들만큼은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잠시 후 5분이 1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몬스터까지 죽었다. 그러나 나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몬스터는 죽었지만, 그들이 파티원들에게 걸어 준 대미지 피해 버프는 여전히 적용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제자리에 멈춰서 피해 버프가 해제될 때까지 얌전히 자신이 해 주는 힐을 받고 가면 좋을 텐데, 파티원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앞다투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몬스터가 공격하는 것도 아닌데 피해 버프 하나 해결하지 못해 파티원들을 죽일까 싶어 나는 앞으로 달리면서도 파티원들에게 힐을 걸어 주기 바빴다. 이쯤 되니 파티원들의 HP 바가 꽉 차 있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힐을 하고 있을 때였다.

[파티]한보스: 두식 님 ㅋㅋ

내 앞에서 달려가고 있던 한보스가 대뜸 제자리에 멈춰 서더니 또다시 나를 호명했다.

[파티]곽두식: 네?

이번에는 파티원도 안 죽였는데 왜 저러나 싶어 나도 달리던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파티]한보스: 색칠 놀이 그만하라고요 ㅅㅂ

한보스에게 대놓고 욕을 들으니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지금 저 새끼가 뭐라고 한 거지?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파티]한보스: 피가 풀로 차 있는데 왜 쓸데없이 힐을 해요? ㅋ 아, 진짜 어이없네 ㅋ

[파티]한보스: 그쪽이 딜은 안 하고 힐만 하는 바람에 플레이 시간이 길어지고 있잖아요

[파티]한보스: 딜이랑 힐 둘 다 한꺼번에 할 수는 없어여? 아, 혹시 지능이 모자라서 멀티가 안 되시나?

처음에는 내가 실수한 게 있으니 사과도 했고, 참으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지능을 비하하는 단어가 나온 순간, 놈은 그야말로 선을 넘은 거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신고당해서 지난번처럼 광석을 캐러 가게 되더라도 놈에게는 한마디 해야 화병에 걸리지 않을 것 같아 즉시 실행에 옮겼다.

[파티]곽두식: ㅅㅂ 저기요 ㅋㅋㅋㅋ 말 좀 가려서 하죠?

[파티]한보스: 뭐? ㅅㅂ? ****야 지금 나한테 욕했냐?

[파티]곽두식: ㅅㅂ 겜 ㅈㄴ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노력 중인데 여기서 머 더 어떡하라는 거임? 힐 하면 힐을 한다고 ㅈㄹ 딜 하면 딜 한다고 ㅈㄹ 니 **는 첨부터 겜 잘했냐?

[파티]한보스: ㅇㅇ 적어도 너처럼 못하지는 않아씀 ^^ㅋ

[파티]자두자두졸려: 두 분 다 그만하세여 ㅠㅠ

[파티]키치키치: 맞아여 ㅠㅠ 저 빨리 클리어하고 나가 봐야 하는데;

실제 말싸움도 아닌데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 키보드 배틀을 벌이고 있다가 뒤늦게 올라온 채팅에 그제야 남은 파티원들이 생각났다.

“저 사람들은 무슨 죄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와 한보스 눈치를 살피는 파티원들이 불쌍했다. 돌아가는 꼴을 봐선 한보스 저놈은 절대 사과하지 않을 거였다. 그래서 나라도 두 사람에게 사과하기로 했다.

[파티]곽두식: 두 분께는 죄송합니다 ㅜㅜ 근데 저도 너무 열 받아서 그랬어요 ㅠㅠ

[파티]자두자두졸려: 두식 님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ㅜㅠ

[파티]키치키치: 그동안 암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ㅋㅋ 솔까 한보스 님이 먼저 시비 털었잖아요 ㅋㅋㅋㅋ 나 같아도 빡칠 것 같은데 ㅋㅋㅋ

[파티]한보스: 하 ㅅㅂ 내가 이래서 지인플을 ㅈㄴ게 싫어해요 ^^ 암만 지인이라도 감싸 주지 좀 마요 ㅋㅋ 그러니까 실력이 안 늘지 ㅋㅋㅋ ㅈㄴ 역겨운 지인플 니들끼리 잘해 보세요 ㅗㅗ

[SYSTEM]: 한보스 님이 파티를 탈퇴하였습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 놈이었다. 아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파티를 탈퇴해 줘서 고마울 수준이었다.

[파티]자두자두졸려: 넘 신경 쓰지 마세요 두식 님 ㅠㅠ 근데 아직은 초반 던전이라 괜찮은데 렙 높아질수록 던전 난이도도 올라가니까요 ㅠㅠ 힐러 스킬 운용에 대해서 공부 좀 하시는 게 여러모로 좋으실 거예요 ㅠㅠ!

[파티]키치키치: 자두 님 말이 맞아요 한보스 저 사람이 말을 좀 날카롭게 하긴 해서 빡치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두식 님 잘못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여 ㅇㅇ

[파티]곽두식: 네 ㅠㅠ 알겠습니다 죄송합ㄴ다

[파티]자두자두졸려: 일단 저희 셋이서 한번 진행해 볼까요? 되는 데까지 해 봐요!

[파티]키치키치: 파이팅!

다행히 한보스는 딜러였던지라 던전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탱커와 힐러는 그대로 있었기에 클리어의 희망이 조금은 보였다. 던전을 진행하는 내내 꼽주기 바빴던 한보스와는 달리 남은 파티원들은 친절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가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을 때면 친절히 채팅으로 조언해 주는 파티원들 덕분에 클리어할 수 있었다. 시간이 배로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파티]자두자두졸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즐아 하세요 :D

[파티]키치키치: 수고하셨습니다

[파티]곽두식: 두 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ㅠㅠ

막상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현타가 몰려왔다. 이제 메인 퀘스트에 포함된 던전을 두 번 갔을 뿐인데, 모두 다 플레이하면서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이 정도면 자신의 컨트롤에 문제가 있다는 뜻인 것 같아 급격히 자신감이 사라졌다.

“그냥 게임 접을까.”

게임 시작 전 직업 소개 페이지에 힐러 캐릭이 들고 있는 지팡이가 멋있어 보여 힐러로 시작했던 건데, 잘못된 선택이었나 보다. 첫 던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특히 이번에는 나름 던전 공략을 보면서 공부했는데도 이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원색적인 욕을 들으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 와중에 필드에 있던 선공 몬스터가 내 캐릭터를 사정없이 공격해 왔다. 열심히 지팡이를 휘둘러 잡은 뒤 마을로 귀환하며 진지하게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 보기로 했다.

이대로 게임을 접을지, 아니면 직업을 바꿔 플레이를 이어 갈지 고민을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스피커 너머로 몹시 당황한 듯한 수박 누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식아! 두식아!

[길드]곽두식: 네??

-두식아! 너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었어?

연신 다급하게 말하는 수박 누나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나 싶어 다시 한번 채팅에 이유를 물었다.

-두식이 너 사건·사고 게시판에 올라왔어! 얼른 확인해 봐!

[길드]곽두식: 사건·사고 게시판이요? 거기가 어딘데요?

-포털 검색창에 아브니르 *벤 검색하면 나올 거야! 지금 나도 확인하고 있는데 두식이 너 스샷 찍어 둔 거 있어?

도대체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누나한테 대답하는 건 일단 미뤄 두고 나는 서둘러 포털 검색창에 아브니르 *벤을 검색해 접속했다.

“사건·사고 게시판…….”

여러 가지 메뉴 중에 누나가 말한 사건·사고 게시판이 보였다. 단번에 클릭하자 게시 글 상단에 익숙한 이름과 함께 몇 분 전 올라온 따끈한 글이 보였다.

[사건·사고 게시판] 에메르@곽두식 욕설, 시비 및 실력 미숙 한보스

“이게 뭐야.”

하하, 사람이 너무 어이없으면 웃음만 나온다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 웃음만 나왔다. 근처에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면 자신을 미친놈 보듯 쳐다봤을 게 분명할 정도로 정말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웃다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미친놈처럼 허허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도대체 놈이 뭐라고 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서둘러 게시 글 제목을 클릭하고 마우스 휠을 아래로 굴리자 게시 글 내용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인게임 닉네임>

게시 글 작성자: 에메르@한보스, 게시 글 대상자: 에메르@곽두식

<사건 설명>

발생 날짜: 20xx. xx. xx

사건 내용: 금일 토토뉴 지하 던전을 도는데 힐러인 곽두식은 힐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딜을 넣지 않음. 처음에는 뉴비라서 잘 몰라 그런 건가 싶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조언해 줌. 근데 곽두식이 급발진해서 다짜고짜 나한테 욕을 날림. 자세한 건 아래 스샷 ㄱㄱ

+) 나머지 두 사람은 지인이라고 감싸 준 게 괘씸해서 닉넴 안 가리고 같이 넣음 ㅋ 암만 뉴비라고 해도 알려 줄 건 제대로 알려 줍시다, 좀 ^^ 자꾸 저러니까 이 겜 뉴비들 인식이 안 좋은 거임 ㅋ

<증거 자료>

(인게임 스크린 샷이나 동영상을 첨부해 주시면 좋습니다.)

[파티]곽두식: ㅅㅂ 저기요 ㅋㅋㅋㅋ 말 좀 가려서 하죠?

[파티]한보스: 뭐? ㅅㅂ? ****야 지금 나한테 욕했냐?

[파티]곽두식: ㅅㅂ 겜 ㅈㄴ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노력 중인데 여기서 머 더 어떡하라는 거임? 힐 하면 힐 한다고 ㅈㄹ 딜 하면 딜 한다고 ㅈㄹ 니 **는 첨부터 겜 잘했냐?

[파티]한보스: ㅇㅇ 적어도 너처럼 못하지는 않아씀 ^^ㅋ

[파티]자두자두졸려: 두식 님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ㅜㅠ

[파티]키치키치: 그동안 암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ㅋㅋ 솔까 한보스 님이 먼저 시비 털었잖아요 ㅋㅋㅋㅋ 나 같아도 *빡칠 것 같은데 ㅋㅋㅋ

[파티]한보스: 하 ㅅㅂ 내가 이래서 지인플을 ㅈㄴ게 싫어해요 ^^ 암만 지인이라도 감싸 주지 좀 마요 ㅋㅋ 그러니까 실력이 안 늘지 ㅋㅋㅋ ㅈㄴ 역겨운 지인플 니들끼리 잘해 보세요 ㅗㅗ

“하, 이 새끼 봐라?”

자신이 참지 못하고 욕을 한 잘못?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게시 글에 첨부된 스크린 샷에는 전체 대화가 아니었다. 놈은 게시 글을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유리해 보이도록 교묘히 스샷을 여기저기 잘라 편집해 놓은 걸 증거라고 들이밀고 있었다.

게시 글 아래로 내려가자 글이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리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과 자신을 감싸 준 파티원들을 욕하는 댓글들뿐이었다.

└옥수수강냉이: 구웨웨웩 지인플 존나 역겹네

└치카포카: 저런 힐러는 지팡이를 빼앗아야 됨 ㅋㅋ 힐러 못 하게 ㅋ

└치즈조아: 민호야!! 저런 뉴비들 유입 좀 걸러라!!!

└└박민호: ㅇㅇ 나 불러써?

└└보고싶어자기: ㅁㅊ ㅋㅋ 갑분 겜 디렉터 소환 ㅋㅋㅋ

└└정신차려: 근데 진짜 디렉터 등장한 거?

└└다카포: 정신차려 님 ㅋㅋㅋ 아눀 ㅋㅋㅋㅋㅋ 저분 겜 디렉터 아니심 ㅋㅋㅋ

└호랑이기운: 곽두식 검색해 보니까 길드는 계략이네 ㅋㅋ 길마 비니 있는 곳 ㅋㅋㅋㅋ

└└버터크림: 비니 이 사람은 왜? 이 사람도 무슨 병크 있음?

└└밤식빵: 비니? 맨날 헐벗고 다니는 걔 아님? ㅋ 남캐가 맨날 벗고 다녀서 ㅈㄴ 역겨웠는데 ㅋㅋㅋㅋ

└└호랑이기운: ㅇㅇ 걔 맞음 ㅋㅋㅋ 병크는 딱히 없고 우리 섭 랭킹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찐 고인물 유저기도 하고, 실력 좋아서 이 겜 좀 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함 ㅇㅇ

└└밤식빵: 유명하면 머함 ㅋ 저런 싹 누런 뉴비 데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썩은 거 ㅋㅋ 계략 길드 자체 꼴 보기 싫었는데 이참에 폭파됐으면 좋겠네 ㅋㅋ

└└떡찧는방앗간: 밤식빵 이 새끼는 열폭 오지네 ㅋㅋ 계략 길드에 돈 떼인 거 있음? ㅋㅋ 글고 증거로 첨부한 스크린 샷 자체도 이리저리 자른 것 같은데 ㅋㅋ 전체 스샷 가져오세여 ㅇㅇ

└└밤식빵: 방앗간 이 새끼 계략 길드원임? LV1짜리는 뭐다? 사이언스다 ㅇㅇ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님네 뉴비나 교육시키셈 ㅋㅋㅋㅋ

자신뿐만 아니라 길드 자체가 싸잡혀 욕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먹이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피라니아 떼를 보는 듯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 해명해야 했다.

분노에 가득 차 씩씩거리며 나는 회원 가입 버튼을 클릭해 인적 사항을 써 넣었다. 번거로운 휴대폰 인증까지 마치고 나자 회원 가입을 완료할 수 있었다. 회원 가입도 완료했으니 조금 전 봤던 게시 글로 달려가 댓글을 입력하려는데 스피커 너머로 길드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식아! 두식아? 게시 글 봤어?

-두식아! 저거 사실 아니지?

-대답 좀 해 줘 두식아!

내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길드원들을 무시할 수가 없어 댓글 작성은 잠시 미뤘다.

[길드]곽두식: 듣고 있어 ㅠ 지금 게시 글 확인했고, 사실이 아니라서 반박 댓글 달려고 ㅠㅠ

그러자 내 채팅을 확인한 수박 누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식아, 잠깐만. 댓글 달기 전에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한테 설명 좀 해 줄래?

나는 누나의 부탁에 기꺼이 조금 전 던전에서 있었던 일화를 채팅으로 설명했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마자 길드원들에게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 새끼, 미친 새끼네. 지가 한 짓은 생각 안 하고 저딴 식으로 글을 썼단 말이야?

-두식이 네가 고생이 많았네.

-두식아, 혹시 스크린 샷 찍어 둔 거 있어?

스크린 샷을 찍어 둔 게 있냐는 수박 누나의 물음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길드]곽두식: 아니 ㅠㅠ

그러자 방금까지 신나게 욕을 하고 있던 길원들뿐만 아니라 누나까지 저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럼 두식이 네가 불리한데.

-그러게.

[길드]곽두식: 왜? 왜 내가 불리해? 먼저 시비 건 **는 저 **인데?

-저기는 스크린 샷이 없으면 사람들이 믿어 주질 않거든.

[길드]곽두식: 저 스샷이 조작된 거라고 해도?

-자기한테 유리하게 이것저것 잘라서 편집해 두긴 했지만, 일단 저 사람한테는 스크린 샷이 있잖아. 너는 없고. 이 상태에서 두식이 너나 우리가 댓글로 반박한다 해도 오히려 욕먹을걸.

[길드]곽두식: 그럼 이대로 나는 욕먹어야 되는 거야?

그때 인게임 화면에서 ‘비니 님이 접속하였습니다.’라는 알림이 나타남과 동시에 보이스 방에서도 비니가 등장했다.

-다들 무슨 이야길 그렇게 심각하게 하고 있어? 그리고 두식이 넌 왜 욕먹어?

-비니 왔어? 지금 큰일 났어! 얼른 *벤 가 봐.

-*벤? 왜?

-두식이 올라왔어.

-두식이가? 왜? 일단 잠깐만. 확인해 보고 올게.

그리고 잠시 후, 게시 글을 확인하고 온 비니에게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새끼가 감히 우리 길드 막내 두식이를 건드려? 너희들은 뭐 했어. 두식이가 욕먹을 동안.

-아니, 그게 우리도 두식이 잘못 아니라는 거 잘 알지. 근데 두식이가 스샷이 없대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

-그걸 고민하고 있었어? 두식아, 지금 바로 고객 센터 가서 1:1 문의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해당 던전 돌았던 시간이랑 날짜 말해 주면서 그 시간대 채팅 내용 좀 보내 달라고 해 봐. 그럼 보내 줄 거야.

-오, 맞다. 그렇게 하면 되겠다.

비니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당장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이 억울했지만, 채팅 내용만 받으면 여론이 바뀌리라 생각하며 문의를 서두로 ‘안녕하세요. 문의할 게 있어서 글 남깁니다.’라고 썼을 때였다.

-아, 아니다 두식아, 잠깐만. 문의 안 넣어도 되겠다.

-왜?

-혹시나 해서 스샷 보고 두식이 너랑 같이 던전 돌았던 다른 파티원들한테 쪽지 보내 봤는데, 스샷 찍어 둔 게 있대.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서 찍어 뒀는데 진짜 생겨서 당황스럽다는데.

-잘됐다, 두식아. 그럼 바로 반박 글 올려. *벤 회원 가입하면 말해 줘. 게시 글 작성 방법 알려 줄게.

[길드]곽두식: 이미 회원 가입 완료했어

-그럼 잘됐다. 지금부터 내가 불러 주는 대로 글 써.

비니에게 알겠다고 대답한 후 게시 글 작성에 들어갔고, 오래지 않아 작성을 마칠 수 있었다.

[사건·사고 게시판][반박문] 에메르@한보스 시비 및 스샷 조작으로 여론 몰이 곽두식

<인게임 닉네임>

게시 글 작성자: 에메르@곽두식, 게시 글 대상자: 에메르@한보스

<사건 설명>

발생 날짜: 20xx. xx. xx

사건 내용: 금일 토토뉴 지하 던전을 도는데 다짜고짜 한보스 님이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해당 던전은 이번이 첫 방문이라 시작 전에 미숙하다고 미리 밝힌 대로 미숙한 플레이와 거친 언행을 한 점은 사과드립니다. 마찬가지로 인게임 내에서도 처음에는 죄송하다고 말했으나, 지속되는 시비로 열 받아서 저도 말이 거칠게 나갔습니다. 그리고 해당 게시 글에 올라온 스샷은 한보스 님이 유리한 부분만 짜깁기된 스샷만 올리셔서 아래에 전체 대화 스샷 첨부합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스샷 찍을 생각은 못 했는데, 같은 파티원이었던 자두자두졸려 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상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증거 자료>

(인게임 스크린 샷이나 동영상을 첨부해 주시면 좋습니다.)

[파티]곽두식: 안녕하세요. 해당 던전은 오늘 처음 오는 건데 ㅠㅠ 일단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파티]한보스: 안녕하세여

[파티]자두자두졸려: ㅎㅇ요~

[파티]키치키치: 안녕하세요

.

.

.

[파티]한보스: 아 ㅡㅡ 힐러님 지금 뭐 해요? 힐 안 해요?

[파티]곽두식: 힐이요? 하고 있는데……요?

[파티]한보스: 저희 돌아가면서 죽여 놓고는 힐을 하고 있다고여? ㅋ

[파티]곽두식: ㅇㅏ……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ㅠㅠㅠ

[파티]한보스: 힐러시면 힐러답게 파티원들을 죽이면 안 되죠 ㅋ 딜 넣는데 취해서 힐 안 할 거면 지팡이 버리고 차라리 딜러를 하시든가 ㅋㅋ

[파티]자두자두졸려: 두식 님 딱 봐도 뉴비 같으신데 그쯤 하세요 ㅠㅠ 원래 힐러는 파티원들도 죽여 가면서 크는 거죠 ㅠㅠㅠ

[파티]곽두식: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좀 더 열심히 해 볼게요 ㅠㅠ

[파티]한보스: 집중 좀 해 주세요

[파티]곽두식: 네 ㅠㅠㅠ 알겠습니다1!! ㅠㅠ

[파티]키치키치: 그럼 얼른 ㄱㄱ 해 봐여!! 다들 파이팅!

.

.

.

[파티]한보스: 두식 님 ㅋㅋ

[파티]곽두식: 네?

[파티]한보스: 색칠 놀이 그만하라고요 ㅅㅂ

[파티]한보스: 피가 풀로 차 있는데 왜 쓸데없이 힐을 해요? ㅋ 아, 진짜 어이없네 ㅋ

[파티]한보스: 그쪽이 딜은 안 하고 힐만 하는 바람에 플레이 시간이 길어지고 있잖아요

[파티]한보스: 딜이랑 힐 둘 다 한꺼번에 할 수는 없어여? 아, 혹시 지능이 모자라서 멀티가 안 되시나?

[파티]곽두식: ㅅㅂ 저기요 ㅋㅋㅋㅋ 말 좀 가려서 하죠?

[파티]한보스: 뭐? ㅅㅂ? ****야 지금 나한테 욕했냐?

[파티]곽두식: ㅅㅂ 겜 ㅈㄴ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노력 중인데 여기서 머 더 어떡하라는 거임? 힐 하면 힐 한다고 ㅈㄹ 딜 하면 딜 한다고 ㅈㄹ 니 **는 첨부터 겜 잘했냐?

[파티]한보스: ㅇㅇ 적어도 너처럼 못하지는 않아씀 ^^ㅋ

[파티]자두자두졸려: 두 분 다 그만하세여 ㅠㅠ

[파티]키치키치: 맞아여 ㅠㅠ 저 빨리 클리어하고 나가 봐야 하는데;

[파티]곽두식: 두 분께는 죄송합니다 ㅜㅜ 근데 저도 너무 열 받아서 그랬어요 ㅠㅠ

[파티]자두자두졸려: 두식 님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ㅜㅠ

[파티]키치키치: 그동안 암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ㅋㅋ 솔까 한보스 님이 먼저 시비 털었잖아요 ㅋㅋㅋㅋ 나 같아도 빡칠 것 같은데 ㅋㅋㅋ

[파티]한보스: 하, ㅅㅂ 내가 이래서 지인플을 ㅈㄴ게 싫어해요 ^^ 암만 지인이라도 감싸 주지 좀 마요 ㅋㅋ 그러니까 실력이 안 늘지 ㅋㅋㅋ ㅈㄴ 역겨운 지인플 니들끼리 잘해 보세요 ㅗㅗ

[SYSTEM]: 한보스 님이 파티를 탈퇴하였습니다.

해당 게시 글을 올리고 얼마 후 다시 확인에 들어갔다. 그사이 제법 달린 댓글을 확인하자 조금 전과는 여론이 정확히 반대로 뒤집힌 상황이었다. 모두가 한보스를 욕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한보스 게시 글에서 날 욕하던 사람도 한보스를 욕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사건이 대충 해결되고 나자 긴장이 풀린 몸에 힘이 쫙 빠지며 동시에 피곤이 밀려왔다. 오늘 게임은 여기까지만 해 보겠다고 길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게임 종료를 선택하려는데, 비니에게서 귓속말이 날아들었다.

[귓속말]비니>>곽두식: 두식아, 앞으로는 나랑 같이 붙어 다니자 ^ㅁ^

[귓속말]곽두식>>비니: 뭐? 왜?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비니가 나에게 보여 준 행동들은 하나같이 일반 유저의 범주에서 살짝 벗어난 행동들뿐이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게 무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경계를 한 게 무색해질 만큼 얼마 있지 않아 밝혀진 비니의 의도는 생각했던 것보다 건전했다.

[귓속말]비니>>곽두식: 쟈가운 두식이 ㅠㅠ 잊었어? 나 네 멘토잖아 ㅠㅁㅠ

“아, 맞다.”

그제야 생각났다. 아, 쟤 내 멘토였지? 하고. 실제로 비니가 내 멘토이긴 했지만, 달라진 거라고는 한 달짜리 타이틀과 텔레포트 아이템뿐이었기에 깜빡 잊고 있었더랬다. 심지어 타이틀은 획득한 것 같은데 어디에서 적용하는지 몰라 적용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생각난 김에 비니한테 물어보기로 했다.

[귓속말]곽두식>>비니: 나 타이틀 적용 방법 좀 알려 줘

그러자 대답이 오는 대신 비니에게 파티 신청이 도착했다. 곧바로 수락하자 기다렸다는 듯 비니에게서 채팅이 끊임없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파티]비니: 타이틀 적용하는 방법 몰라서 안 하고 다녔던 거야?

[파티]곽두식: ㅇㅇ 왜?

[파티]비니: 나는 두식이 네가 나 싫어해서 내 닉넴 나와 있는 타이틀 일부러 거른 줄 알았지 ㅠㅜ

“흠, 그래도 눈치는 있나 본데.”

내가 자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놈도 알고 있었다니, 눈치가 아예 안드로메다로 보낸 놈은 아니구나 싶으면서도, 알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똑같이 행동하는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감탄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를 조금이라도 티 냈다간 일어날 일이라고는 뻔했기에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파티]곽두식: 그럴듯한 말인데? ㅋㅋ

[파티]비니: 이나멓ㅁ니ㅏ엏ㅇㄴ머르 수긍하지 말라고 ㅋㅋ큐ㅠ

[파티]곽두식: 그래서 타이틀 적용 어케 하는지 좀 알려 줘

[파티]비니: ㅇㅇ 단축키 C 누르면 캐릭터 창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적용하면 돼 ㅋㅋ

비니의 안내대로 C를 눌러 캐릭터 창으로 들어가 해당 타이틀을 적용했다.

<비니의 관심을 받는>곽두식

지금까지 곽두식으로만 다니다 갑자기 닉네임 앞에 타이틀이 적용되니 괜스레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타이틀을 적용하자마자 비니도 따라서 자신의 타이틀을 바꿨는지 <곽두식의 멘토>로 변경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어쩐지 놈과 마치 커플이 된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커플이라니. 생각을 해도 이딴 생각을.”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니었나 보다.

[파티]비니: 이러고 있으니까 두식이 너랑 커플된 것 같아 u.u*

“미쳤나, 저게.”

[파티]곽두식: 임티 뭐임? 당장 떼. 소름 돋으니까

[파티]비니: 아잉, 두식 쟈기 부끄러워서 그래? 너를 위해서라면 이런 것도 쓸 수 있어 ㅇㅅㅇ ㅇ_ㅇ ㅇㅁㅇ

[파티]곽두식: 하지 마, 미친놈아!!!

[파티]비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 싫어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네가 그렇게 반응할 때마다 재밌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곽두식: 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

내가 질색을 하든 말든 혼자서 낄낄거리며 즐거워하는 놈을 보니 약이 바짝 올랐다. 어떻게 하면 놈을 골탕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내가 놈과 거지 같은 멘토 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에메르 서버에 다시 온 이유. 바로 GM으로 의심되는 놈을 가까이에서 조사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떻게 이걸 잊고 있을 수가 있지.”

나는 즉시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종이에 빠르게 메모한 뒤 모니터 옆에 해당 메모를 보란 듯이 부착했다.

★★★★★비니 GM인 거 밝혀내기!!

이렇게 하면 절대 잊어버릴 일은 없으리라. 어떻게든 밝혀내서 놈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왕 다짐한 거 이참에 비니를 슬쩍 떠보기로 했다. 무릇 GM이라면 일반 유저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희귀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기 마련. 어쩌다 한 번씩 GM인 게 들통나는 이유를 보면 저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인게임 안에서 구현해 내기 힘든 아이템이나, 비싼 강화 무기들을 여러 개 가지고 있으면서 유저들에게 판매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비니의 무기도 하나같이 현란했었지. 비니의 캐릭터를 우클릭해 장비를 살펴보자 역시나 한눈에 보기에도 휘황찬란한 장비들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12강 된 장비들뿐이었다. 재빨리 포털 창에 ‘아브니르 12강 무기’를 검색했다. 그 결과 10강이나 11강까지 강화를 했다는 글은 더러 보였지만 12강 무기 강화에 성공했다는 글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밝혀낼 줄이야. 약간 허무했지만 일단 비니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파티]곽두식: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파티]비니: 뭔데? 두식이 너라면 다 말해 줄 수 있지 ^0^

[파티]곽두식: 네 장비 보니까 죄다 12강 무기던데 어케 한 거야? 다들 10강, 11강이 한계인 것 같던데 ㅋㅋ 혹시 매크로 썻음?

놈이 뭐라고 대답할지 기대가 됐다. 날카로운 내 질문에 뜨끔하기라도 한 건지 지금까지 재깍재깍 대답하던 놈이 어쩐 일인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놈이 이대로 도망가기라도 할세라 채팅 내역과 놈의 장비 창 스샷을 찍었다. 이제는 신고할 일만 남은 셈이었다.

놈이 언제 도망갈지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때, 대뜸 채팅 창으로 링크 주소가 등장했다.

[파티]비니: www.avenir.co.kr./event_main/2021_12 여기 ㄱㄱ

대체 뭔가 싶어 놈이 보내 준 링크를 복사해 인터넷 주소 창에 입력했다. 그러자 무기들이 전시된 건물 앞에서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는 캐릭터가 제일 먼저 등장했다. 이어서 아래로 내려가자 그제야 정확한 내용이 보였다.

<아브니르 12강 이벤트!>

2021.x.x(목) 점검 후~2021.x.x (목) 점검 전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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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강 이벤트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이걸 나에게 보낸 건지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저렇게까지 이벤트를 열 정도면 강화하기 힘든 게 분명했다. 그런데 비니는 장비 하나도 아니고 무려 풀셋이 모두 12강인 상태였다.

[파티]곽두식: 12강까지 올라가는 거 개 힘든 거 아님?

[파티]비니: ㅇㅇ 멘탈도 나가고 돈도 술술 나가고 힘들지

[파티]곽두식: 근데 도대체 어케 올린 거야? 수상한데

[파티]비니: 어케 올리긴 ㅋㅋㅋ 열심히 올렸지 ㅋㅋ

여전히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GM 아니냐고 우기기도 우스운 상황이었다. 12강까지 올라가기에는 힘들겠지만, 아예 강화가 불가능한 아이템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지만, 일단은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파티]곽두식: 수상한데 일단 넘어가 준다

[파티]비니: ㅇㅇ? 뭐가 수상하단 거야? 아, 강화? ㅋㅋㅋ 이거야 뭐 시간이랑 돈만 좀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ㅋㅋ 그러니까 두식이 너도 얼른 무럭무럭 자라서 형아 만큼 강해지렴 ㅋㅋ 이제 얼른 메인퀘 밀고 다음 던전 가야지? 앞으로 던전은 나랑 가자

메인 퀘스트와 다음 던전이라는 소리에 얼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길원들과 간 던전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방문했던 던전들에서 모두 안 좋은 경험을 했던 게 선명히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겪고 나서부터는 한 가지 결심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파티]곽두식: 나 앞으로 메인퀘고 뭐고 던전 안 갈 거야 ㅡㅡ

앞으로 다시는 던전을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더랬다. 그 말에 어지간히 놀라웠는지 비니가 격하게 반응해 왔다.

[파티]비니: ???????? 왜??????? 왜????? 두식아 왜왜애ㅗ애ㅗ애ㅗ왜왜애ㅗ??

[파티]곽두식: 지금 일부러 나 엿 먹으라고 ㅗㅗ 한 거지?

[파티]비니: 쏘리 오타였어 진짜야 믿어 줘 ㅠㅜ 그나저나 왜 던전을 안 가겠다는 거야?

[파티]곽두식: 너 같으면 가겠어? 갈 때마다 좋은 꼴을 못 봤는데? ㅋ 뉴비에게 친절하기는 무슨 ㅋㅋㅋㅋ

[파티]비니: 음음, 두식이 네가 운이 좀 없는 케이스이긴 했지 ㅜㅜ 저렙 던전에서 그런 사람들 만나기 쉽지 않은데 ㅠㅜㅠ

[파티]곽두식: 어쨌든 나 앞으로 던전 안 가 글고 힐러도 때려치울 거야 ㅅㅂ

분노를 한껏 실어 엔터키를 누른 후 마우스를 움직여 장비 창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착용하고 있던 나무 지팡이를 우클릭해 버리기를 선택했다.

그러자 내 발밑으로 딸그랑 소리를 내며 나무 지팡이가 버려졌다. 지팡이 하나만 바닥에 버렸을 뿐인데 기분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진즉에 이렇게 버릴걸, 할 수만 있으면 저 지팡이를 당장 두 동강을 내 불쏘시개로 쓰고 싶었다.

[파티]비니: ?????? 지금 뭐 하는 거야? 지팡이는 왜 버려??

[파티]곽두식: 말했잖아 ㅋ 나 앞으로 힐러 안 한다고 ㅋ

[파티]비니: 엥???????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심이었어?

[파티]곽두식: ㅇㅇㅇㅇㅇㅇㅇㅇ 200% 진심 ㅋ 앞으로 던전이고 힐러고 거들떠도 안 볼 거야 마음 같아서는 이 겜도 그냥 접어 버릴까 싶은데

[파티]비니: 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 겜 접지 마 두식아 나랑 오래오래 하자 ㅠㅠㅠㅠㅠㅠ

[파티]비니: 아, 진짜 ㅡㅡ 너 겜 접으면 나 화낼 거임

게임을 접고 싶다는 내 말에 비니가 다급하게 말렸다. 반드시 꼭 접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비니가 저렇게 간절하게 매달리니 의아했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사이도 아니었던 터라 나 같았으면 설령 아쉬움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쿨하게 보내 줬을 텐데. 안 그래 보였는데 정이 많은 놈이었나? 내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더욱 초조해졌는지 비니에게서 연달아 채팅이 올라왔다.

[파티]비니: 두식아 겜 접을 생각은 당장 휴지통에 버려!! 이참에 힐러 말고 딜러 해 보는 건 어때? 딜러는 딜만 하면 돼서 힐러보다는 부담 덜함 ㅇㅇ

[파티]곽두식: 힐러고 딜러고 던전 자체를 가기 싫다니까 ㅡㅡ

[파티]비니: 아니면 채집이나 제작은? 이거 키워 두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예쁜 옷도 만들어 입을 수 있어 ㅜㅜㅜㅜ

[파티]곽두식: 예쁜 옷?

[파티]비니: ㅇㅇ 보여 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니가 본래 입고 있던, 마치 옛날 로마 사람들이나 입을 것만 같은 룩에서 순식간에 멋진 정장을 착용했다. 핏부터 시작해 가슴 부분에 행커치프까지 의외로 디테일이 나쁘지 않았다.

[파티]곽두식: 좀 괜찮네

[파티]비니: 그치? 제작직 키우면 이런 옷 한 트럭은 만들어 입을 수 있어

[파티]곽두식: 근데 이렇게 멀쩡한 옷 냅두고 넌 왜 넝마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건데?

[파티]비니: 개성이지, 개성 ㅋㅋ 은 넝담이고 ㅋㅋㅋ 현생에서 맨날 비슷한 옷 입고 다녀서 겜에서는 자유롭게 입고 싶어서 ㅋㅋ

인정하기 싫었지만, 비니가 말하는 게 충분히 이해됐다. 나도 비니와 마찬가지로 매일 칼 같은 정장 룩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갖춰 입고 출근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보기에는 단정해 보이지만 실제로 입고 일하는 처지가 되면 무척 불편한 옷이었다.

[파티]곽두식: 정장 입고 일해?

[파티]비니: ㅇㅇ 직급 있어서 더더욱 차려입어야 해 ㅋㅋ

모든 GM들을 총괄하는 자리에라도 있는 건가? 대놓고 물어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GM이냐고 물어봐도 비니가 아니라고 잡아떼면 더는 우기기도 우스웠으니까.

어쨌든 비니가 보여 준 옷은 좀 혹했다. 예전부터 자캐 육성에 진심이었던 나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게 있었으니, 바로 룩덕질이었다. 게임 하면 룩덕질, 룩덕질 하면 게임만 한 게 없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비니가 이어서 다른 룩들을 차례로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광경을 볼수록 내 마음은 갈대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홀린 듯이 비니의 패션쇼를 지켜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게임을 접지 않고 제작직을 육성해 보겠다는 대답을 한 뒤였다.

[파티]비니: 약속했다? 게임 접으면 안 돼 두식이 ㅠㅠㅠ

[파티]곽두식: 알겠다니까 ㅡㅡ 일단 오늘은 피곤해서 이만 나가 볼게 ㅂㅂ

알겠다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할 수 없어 나는 마지못해 대답한 뒤 그 자리에서 얼른 게임을 종료했다.

게임뿐만 아니라 컴퓨터 전원까지 모조리 끈 후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내일 출근을 하려면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싶어 눈을 감는 순간,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에서 징징 진동음이 울렸다.

“이 밤중에 누구야.”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으나, 끊임없이 울리는 진동음에 할 수 없이 눈을 뜨고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바로 확인에 들어가자 채팅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는데, 메시지의 주인공은 바로 비니였다.

[비니: 두식아!!! 진짜 겜 접을 거 아니지? 나 기다린다???]

[비니: 우리 내일도 같이 겜 하자 ^0^ 내가 제작직 자세히 알려 줄게 ㅎㅎ 내가 네 멘토잖아!]

[비니: 두식아 벌써 자? 자는 거야? 안 자면 읽씹하지 말고 대답 좀 해 줘 ㅠㅠ]

[비니: 두식아~~~~~~~~~~~~~~]

“미친.”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낼 놈이었기에 나는 지금부터 잘 거니까 메시지를 보내지 말라는 대답을 한 후 휴대폰 설정에 들어갔다. 예전부터 설정해 둔다고 해 놓고 매번 깜빡해 미뤄 두었던 설정을 이번 기회에 할 참이었다. 자정부터 기상 시간까지 시간을 입력하고 수면 모드로 설정해 두자 더는 진동이 울리지 않았다.

그제야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겠다 싶어 나는 눈을 감았고, 오래지 않아 잠들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점심시간. 오늘도 점심 메이트인 영석과 함께 구내식당에 도착했다. 으레 점심시간이 되면 북적이는 곳이었지만, 오늘따라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식당 안이 직원들로 꽉 차 있었다. 다행히 매의 눈으로 빈자리를 스캔한 영석 때문에 나는 간신히 빈자리에 착석할 수 있었다. 식사하며 영석에게 힐러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것부터 시작해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자리 있습니까?”

소음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곧바로 보이는 얼굴에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씨, 밥맛 떨어지게. 하필이면 저 인간을 여기서 볼 게 뭐람.

“여기 자리 있습니까?”

내가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자리가 있냐고 물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해 괜히 트집거리를 잡히고 싶지 않아 할 수 없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럼 실례 좀 하죠.”

그러고는 대뜸 내 옆자리에 배식판을 내려놓은 인물은 다름 아닌 내가 속한 마케팅 팀의 팀장이었다. 일하면서도 매일 보는 얼굴을 밥을 먹으면서까지 봐야 한다니. 이렇게 된 거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심정으로 식사를 서둘렀다.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 시원한 아메리카노나 입가심으로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현실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나저나 두 분이 재밌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던데.”

여전히 대답할 생각이 없는 나와는 반대로 영석은 아무렇지 않은지 붙임성 좋게 팀장을 향해 말했다.

“네? 아, 연우랑 방금까지 게임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팀장님도 게임에 관심 있으세요?”

예전에 이미 나에게서 팀장도 온라인 게임을 한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는 영석의 연기 솜씨가 일품이었다.

“게임 말입니까?”

“네, 팀장님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아브니르라고 MMORPG 게임 있거든요.”

“아, 아브니르. 잘 알죠.”

“어? 혹시 팀장님도 아브니르 하세요?”

이어진 영석의 질문에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왜냐하면 평소 팀원들 사이에서도 지독한 일벌레로 소문난 팀장의 이미지와 게임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그런 게임 안 한다고 하겠지 싶어 얼마 남지 않은 콩나물국을 숟가락으로 떠 막 입으로 넣은 순간이었다.

“그럼요. 저도 합니다, 그 게임.”

“푸웁.”

“야이씨, 미친. 더럽게 왜 그래 임연우.”

“콜록콜록.”

추잡스럽게 먹던 국물을 뱉은 것만으로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민망할 지경인데, 무엇보다 가장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든 건 팀장의 눈빛이었다. 마치 한심스럽게 나를 보는 저 눈빛은 뭐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눈빛과는 다르게 테이블 위에 놓인 휴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받아요.”

“…….”

“……대가리.”

“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시끄러운 주변 소음 때문에 완벽히 들을 수 없었지만 대가리라는 단어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대가리라니.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싶어 옆에 앉은 팀장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안 받을 겁니까.”

“필요 없는데요.”

이 와중에도 팀장은 본인 손에 들고 있는 휴지를 흔들었다. 얼른 받으라는 듯이. 그러나 차라리 내 손으로 휴지를 가져오거나 하다못해 손으로 닦을지언정 팀장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럼 그건 아껴 뒀다가 나중에 배고플 때 먹기라도 할 겁니까.”

“뭐라고요?”

“지금 임연우 씨 턱에 붙어 있는 콩나물 대가리 말입니다.”

손가락 하나를 뻗어 정확히 내 턱 언저리를 가리키는 모습에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거렸다. 콩나물 대가리라니. 그런 농담을 왜 하고 지랄……. 씨발, 이게 왜 붙어 있는 건데.

깜짝 놀라 즉시 손으로 떼어 내자 노란색 콩나물 대가리가 묻어 나왔다. 그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내 얼굴은 걷잡을 수 없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열 받아서? 아니 쪽팔려서였다. 가뜩이나 꼴 보기 싫은 팀장 앞에서 이런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다니, 당장 어딘가에 코를 박고 죽고 싶었다.

“마무리는 이 휴지로 닦든가, 아니면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든가 알아서 하세요. 그럼 저는 밀린 업무 때문에 먼저 일어납니다.”

맞은편에서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을 더욱 구기고 있는 영석과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팀장은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석에게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흡, 푸하하하.”

“웃지 마.”

“크흑, 웃긴 걸 어떡하냐. 아, 그나저나 임연우 너만 아니었어도 팀장님 서버 물어보는 건데.”

“서버는 물어서 뭐 하게.”

“뭐하긴. 같은 서버면 버스 좀 태워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지. 그나저나 내 연기 어땠냐? 완전 쩔었지? 근데 팀장님이면 게임도 엄청 잘할 것 같지 않냐? 장비도 빵빵하고.”

“지랄……. 아, 씨발. 설마 진짜 우리 길드 길마 공세빈이 저놈인 건 아니겠지?”

설마 진짜 아브니르를 하는 건 아니겠지? 영석의 말에 그냥 대충 맞장구쳐 준 거겠지……. 그래, 그래야만 했다. 애써 아닐 거라고 위안하며 여전히 웃느라 바쁜 영석을 뒤로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런 내 뒤를 영석이 허둥지둥 쫓아왔다.

“내가 웃어서 삐쳤냐? 그러게, 누가 콩나물 대가리를 그렇게 얼굴에 붙이고 있으래? 큭큭. 아, 진짜 하필이면 얼굴에 대가리가 붙을 게 뭐야.”

“닥쳐.”

“사진 찍어 둘걸. 우울할 때마다 보게.”

사나운 내 반응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영석이 사무실로 향하다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세상 다시없을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겠거니 싶어 영석을 지나쳐 가려는데, 영석이 내 팔을 덥석 붙잡아 왔다.

“뭐 하는 거야.”

“이것 봐봐.”

불쑥 내 앞으로 휴대폰을 내민 영석 때문에 나는 보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화면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묘월이의 신비로운 선물 상자>

TO. 친절한 아브니르 유저들에게

지난번에 나쁜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는 날 구해 줘서 고마웠다묘

그래서 보답으로 내가 신비로운 선물 상자를 준비했다묘

마음 같아선 공짜로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보살펴야 할 가족들이 많다묘

그래서 미안하지만 조금만 돈을 받기로 했다묘 ㅠ^ㅠ

그 대신 함부로 볼 수 없는 아주아주 특별한 선물들로만 엄선하여 준비했으니 이번 기회에 다들 한번 구매해 보라묘!

FROM. 묘월

※판매 기간: 2021. x. xx 점검 후~2021. x. xx 점검 전까지

(해당 상품은 기간 한정 상품으로 정해진 판매 기간 동안만 판매되오니 이 점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판매 가격: 1,200캐시

[공지 사항 바로 가기] [아이템 샵 바로 가기] [확률표 확인하기]

“그래서 이게 뭔데?”

“뭐긴, 랜덤 키트지.”

“랜덤 키트?”

“그래, 잘만 하면 대박 터뜨릴 수 있는 상품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영석의 설명을 정리해 보자면 대략 이러했다. 아브니르는 일정 주기마다 랜덤 키트를 출시하는데, 이 랜덤 키트에서는 비싼 의류나 장비 등 여러 가지 아이템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랜덤 키트를 구매하는 모든 유저가 값이 나가는 아이템을 얻을 수는 없었다. 값이 나가는 아이템일수록 등장할 확률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가뜩이나 게임 접을까 고민 중인 나한테 이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뭔데.”

“성질 급하기는. 이것 좀 봐봐.”

짜증이 잔뜩 난 나를 영석이 달래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해당 키트에서 등장하는 아이템들을 미리 확인할 수 있는 페이지가 있었는데, 나는 홀린 듯이 한 의류 세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의류의 이름은 캐주얼 세트였는데, 깔끔한 볼캡에 이어 연한 청바지에 흰 반팔 티셔츠를 입은 캐릭터가 나와 있었다. 어찌 보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복장이었는데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이, 이 옷 뭔데?”

“아, 이 옷? 임연우 보는 눈 있네.”

“뭐?”

“비싼 거 보는 눈 말이야. 이 옷이 이 키트에서 확률이 제일 낮거든. 그만큼 제일 비싸다는 소리지. 최근 들어서 계속 레이스 달린 이상한 옷들만 내더니, 이번에 정신 좀 차렸나 본데.”

“이거 키트 구매하면 얻을 수 있는 거야?”

“키트에서 나오긴 하는데, 확률이 낮지. 정 안 되면 유저들한테 구매하는 방법도 있는데 엄청 비쌀걸.”

영석에게 처음 아브니르를 소개받을 때만 해도 가장 먼저 내가 물어본 질문은 입을 만한 옷이 많으냐는 질문이었다. 오랜만에 게임을 시작한 나였지만, 지금까지 다른 게임을 한 경험을 토대로 생각하면, 이 정도면 선방한 셈이었다. 보통은 세계관에 맞추느라 이상한 드레스나 정장을 출시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오늘 키트에 나온 의상도 어떻게 보면 게임 세계관에 맞지 않는 의상이긴 했으나, 오래된 게임이라 그런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어찌 됐든 영석도 내가 의류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여 줬으리라. 영석과 헤어진 뒤 사무실로 돌아가며 굳게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당 의류 세트는 꼭 얻기로 말이다.

그날 저녁, 퇴근 후 곧장 집으로 돌아온 나는 비장한 각오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게임에 접속하기 전 아이템 샵에 제일 먼저 접속해 캐시를 충전했다. 영석에게 미리 조언을 들은 대로 초반이니 무리는 하지 않고,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세트만 구매할 생각이었다. 10개가 한 세트였기 때문에 12,000원을 충전한 후 묘월이의 신비로운 선물 상자 키트를 구매했다.

얼른 까고 싶어 재빨리 게임 실행 버튼을 누른 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서버를 선택한 후 접속할 캐릭터 선택까지 마치자 로딩 화면이 나타났다. 로딩이 끝나기만 해 봐라. 당장 까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접속하자마자 보이는 채팅 창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길드]큐띠빠띠: 아 ㅅㅂ 이번 키트 확률 개 창렬이네 진짜 ㅋㅋ

[길드]무등산수박: 그러게 ㅜㅜ 확률표 보니까 확률이 전반적으로 좀 낮긴 하더라

나보다 한발 앞서 키트를 구매했는지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가만히 대화를 보고 있자니 점점 불안해졌다. 게임을 오랫동안 플레이한 저 사람들도 안 나오는데, 나에게 나올까?

[길드]밤밤무슨밤: 묘월이 이 ㅅㄲ 그냥 사냥꾼한테 던져 줬어야 했음 ㅡㅡ

[길드]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

[길드]무등산수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또빈 세트 하나 먹었다면서? 이번에는 얼마나 지른 거야?

[길드]비니: 30

[길드]큐띠빠띠: ㅎㄹ ㅁㅊ 또빈이 저 정도면 우리는 아예 못 먹겠다 ㅋㅋㅋㅋ 어? 두식이 왔네 ㅋㅋㅋㅋㅋㅋ 어서 와

[길드]무등산수박: 두식이 어서 와~~

그제야 내가 접속한 걸 알아차린 길원들이 저마다 인사를 해 왔다.

[길드]곽두식: 다들 ㅎㅇㅎㅇ 근데 이번 키트 그렇게 안 좋아?

[길드]큐띠빠띠: 확률이 지난 키트보다 낮긴 해 ㅋ 우리 길드 최고 행운아 또빈이 30이나 질러서 간신히 의류 세트 하나 먹었다는 거 보면 말 다 했지 ㅋㅋ 근데 두식이 너도 키트 삼?

[길드]곽두식: ㅇㅇㅇ

[길드]무등산수박: 얼마나 샀어?

[길드]곽두식: 1세트만 구매했는데

[길드]비니: 1세트 정도면 뭐 ㅋㅋㅋ 맛보기로는 나쁘지 않지 ㅋㅋ 그 대신 그 뒤로 더 지르면 패가망신 열차 타는 거니까 조심 ㅠㅜ

다들 사전에 입을 맞추기라도 한 건지 저마다 1세트를 끝으로 더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을 해 왔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도 여기서 더 지를 생각은 없었다. 12,000원이 적은 돈도 아니고, 땅을 파서 나오는 돈은 더더욱 아니었다.

“후우.”

한숨을 크게 내쉰 후 인벤토리 창에 들어가 있는 선물 상자를 큰맘 먹고 클릭했다.

<고마움을 담아 채집 속도 증가 포션 (10분)을 선물한다묘!>

“…….”

멋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알 수 있었다. 쓰레기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 처음이니까 뭐. 아직 9개 남았잖아.”

상자를 깐 개수보다 까지 않은 개수가 더 많았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고마움을 담아 제작 속도 증가 포션 (10분)을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채집 속도 증가 포션 (5분)을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묘월이가 한 땀 한 땀 만든 모자를 선물한다묘!>

채집과 제작 속도 증가 포션만 나오다 드디어 뭔가 쓸 만해 보이는 모자가 등장했다. 곧바로 착용해 보자 쫑긋 솟아난 토끼 귀가 꽤 앙증맞아 보였다.

“이거 가격 좀 나가는 거 아냐?”

나는 당장 길원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길드]곽두식: 묘월이가 한 땀 한 땀 만든 모자 얼마나 함?

길원들에게서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며 나는 작은 꿈에 부풀었다. 만약에 비싼 아이템이라면 이걸 팔아서 낮에 보았던 의류 세트를 구매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해당 의류 세트를 구매하고도 돈이 남는다면, 비니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장비를 구매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게 골드 빛 미래를 꿈꾸고 있을 때 드디어 대답이 돌아왔다.

[길드]큐띠빠띠: 지금 시세 1만 골드 ㅋㅋㅋㅋㅋㅋㅋ 아까 내가 팔 때까지만 해도 10만 골드였는데 언제 이렇게 떨어졌냐 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

[길드]비니: 두식아 ㅋㅋ 그건 그냥 팔 생각하지 말고 네가 착용하고 다녀 ㅋㅋ 너랑 잘 어울리겠다 ㅋㅋㅋㅋ

“말도 안 돼.”

이 뽀짝한 토끼 머리띠가 단돈 1만 골드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당장 비니를 독촉해 해당 아이템의 시세를 확인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 요청했고, 그 결과 경매장 시스템을 알 수 있었다. 경매장 검색창에 묘월이가 한 땀 한 땀 만든 모자를 검색하자 아래로 내가 가진 것과 똑같은 모자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9,999골드…….”

심지어 고 잠깐 사이에 1만 골드에서 네 자릿수로 내려간 가격에 눈앞이 어질했다.

[길드]곽두식: 이거 왜 이렇게 싼 건데? 이렇게 예쁜데??? ㅈㄴ 말도 안 돼

[길드]큐띠빠띠: 싼 이유는 그만큼 키트에서 많이 풀려서 그렇지 ㅋㅋㅋㅋㅋ 또빈 말대로 두식이 네가 착용하고 다녀 ㅋㅋㅋㅋㅋㅋ

당연히 귀엽게 생긴 모자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앞으로 내가 잘 착용하고 다닐 생각이긴 했지만, 대박일 줄 알았던 템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운이 쪽 빠졌다.

“이제 6개 남았네.”

6개 안에 캐주얼 세트가 뜰 확률은……. 차라리 내가 집을 살 확률이 더 높아 보일 만큼 그야말로 희박한 수준이었지만, 그렇다고 구매한 걸 까지 않을 수도 없으니 빠르게 남은 상자도 까 보기로 했다.

<고마움을 담아 제작 속도 증가 포션 (10분)을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채집 속도 증가 포션 (10분)을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경험치 증가 포션 (5분)을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경험치 증가 포션 (10분)을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묘월이가 한 땀 한 땀 만든 모자를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묘월이가 한 땀 한 땀 만든 신발을 선물한다묘!>

“…….”

혹시나 하는 한줄기 희망을 품고 경매장에 묘월이가 한 땀 한 땀 만든 신발을 검색했다.

“……700골드.”

그때 내 곁을 스쳐 지나가던 한 유저가 바닥에 무언가를 버렸다. 마우스를 가져가 버려진 물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묘월이가 한 땀 한 땀 만든 신발’

잠깐이나마 700골드라도 벌어 보려 경매장에 올려 볼까 했던 게 한순간에 우스워져 버린 상황에 좌절한 것도 잠시, 나는 게임창을 아래로 내리고 아이템 샵에 접속했다.

“그래, 애초에 10개로는 어림도 없지.”

애초에 1세트만 구매하겠다는 계획은 깡그리 사라진 뒤였다. 적어도 5세트는 사야 뭐라도 쓸 만한 게 나오지 않을까 싶어 큰마음 먹고 이번에는 5세트를 구매했다. 그 탓에 강제로 당분간 저녁은 컵라면 신세를 면할 수 없을 테지만, 캐주얼 의류를 가지게 된다면야 그깟 컵라면쯤은 기쁜 마음으로 먹어 줄 수 있었다. 게다가 요즘 컵라면은 종류도 많으니까 질리지도 않을 테지.

[길드]큐띠빠띠: 두식아?? 키트 다 깠어???

[길드]비니: 어째 조용한 게 불안한데? 두식아!! 안 돼!!! 하지 마!!!!

[길드]큐띠빠띠: 두식이가 지금 뭐 하는 줄 알고 안 된다는 거야?

[길드]비니: 원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어 보나 마나 추가로 캐시 충전해서 키트 구매했겠지 ㅋ 처음에 1세트 구매했으니 지금은 한 5세트 구매했으려나?

“내가 강아진 줄 아나. 안 되긴 뭘 안 돼.”

정확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맞힌 것만으로도 모자라 구매한 개수까지 맞힌 비니 때문에 움찔한 것도 잠시였다. 더는 누구도 지금의 나를 말릴 수 없었다.

“더도 덜도 말고 캐주얼 세트 하나만 나와 주세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까지 한 후 나는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온 선물 상자 50개를 빠른 속도로 클릭하기 시작했다.

* * *

<고마움을 담아 제작 속도 증가 포션 (10분)을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묘월이가 한 땀 한 땀 만든 옷을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경험치 증가 포션 (5분)을 선물한다묘!>

.

.

.

<고마움을 담아 묘월이가 한 땀 한 땀 만든 모자를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채집 속도 증가 포션 (10분)을 선물한다묘!>

<고마움을 담아 묘월이가 한 땀 한 땀 만든 신발을 선물한다묘!>

“씨발, 이게 말이 돼?”

구매할 당시에만 해도 많게만 느껴졌던 상자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50개 정도면 뭐라도 하나 줄 법한데, 팔리지도 않을 템들만 나왔다는 현실에 게임을 하고 싶은 욕구가 급격히 사라졌다.

[길드]비니: 두식아! 안 돼!! 멈춰!!!

[길드]큐띠빠띠: 우리야 조금만 까 보고 안 되면 바로 손절할 수 있지만 두식이는 처음이라 조절이 힘든 거 아냐? ㅋㅋㅋㅋㅋㅋ 똥템 나오더라도 키트 깔 때는 또 재밌잖아 ㅋㅋㅋㅋ

큐띠빠띠의 말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도박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쯤 되니 왜 중독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더는 구매하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는데, 내 손은 의지를 배반하고 홀린 듯이 캐시 충전을 클릭하고 있었다.

“후우, 진짜 마지막으로 진짜진짜 마지막.”

정말 마지막으로 5세트만 더 까 보기로 하고 캐시 충전을 했다. 또다시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온 상자 50개를 보고 있으니 뭐라도 하나는 나오겠지 하는 마음과 씨발, 이번에도 안 나오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키트 까기를 시작하려는데, 순간 비니에게서 파티 신청과 함께 귓속말이 도착했다.

[귓속말]비니>>곽두식: 두식아 지금 키트 까고 있는 거 아니지? 이제 그만 까 ㅠㅠㅜㅜㅜ

그러나 비니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키트를 서둘러 개봉했고, 결과는 보나 마나였다. 지금까지 얻은 포션의 양만 보자면 벌써 제작직과 채집 직업을 만렙까지 찍고도 남을 양이었다.

나는 헛헛해진 마음으로 채팅 창에 키트 결과를 보고했다.

[길드]곽두식: 님덜 키트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휴 할말하않

[길드]비니: 그러게 내가 지르지 말라고 했잖아 ㅜㅠ

[길드]큐띠빠띠: 두식아 키트 얼마치 샀어?

[길드]곽두식: 10만 원치 넘게 산 것 같은데 큐ㅠㅠㅠㅠ

[길드]큐띠빠띠: ㅇ0ㅇ

[길드]곽두식: 여기서 더 구매하면 나오지 않을까?

[길드]비니: 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

[길드]큐띠빠띠: 놉!!!

[길드]무등산수박: 두식아 넌 할 만큼 했어 ㅜㅜㅜㅜㅜ 이제 그만 질러 ㅠㅠㅠㅠ

길원들 모두가 저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말리니 거기에 대고 차마 더 까 보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미련이 남아 아이템 샵을 기웃거리는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비니가 당장 아이템 샵 화면 보지 말고 길드 하우스로 오라고 했다.

“쟤 신기 있는 거 아냐? 어떻게 알았지?”

좀 전부터 귀신같이 내 상태를 알아맞히는 비니가 신기하면서도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거절하지 못하고 텔레포트 기능을 사용해 길드 하우스로 이동했다. 하우스에는 비니뿐만 아니라 현재 접속 중인 대부분의 길원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러나 길원들 중에서 유독 내 눈에 띄는 길원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비니였다.

[길드]무등산수박: 어서 와 두식아 ><

[길드]큐띠빠띠: 두식이 ㅎㅇㅎㅇ

길원들의 인사에 대충 대꾸해 주고 나는 당장 비니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가지고 싶었던 캐주얼 세트를 보란 듯이 입고 있는 비니를 보고 있자니, 겨우 사그라들었던 욕구가 스멀스멀 다시 올라왔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듯이 차라리 보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참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눈앞에 해당 세트를 입은 캐릭터를 보니 참기가 너무 어려웠다.

뭐, 비니 입장에서는 키트에서 나왔으니 입은 거겠지만, 현재 망테크를 탄 내 앞에서 저 옷 입은 꼴을 보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길드]곽두식: 지금 약 올리는 거야, 머야 ㅡㅡ 왜 네가 그 옷을 입고 있어

[길드]비니: ㅇㅇ? 이거? 키트에서 나와서 입었지

그러면서 놈은 보란 듯이 내 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 돌기까지 했다. 키가 큰 놈의 캐릭터가 해당 옷을 입으니 그야말로 옷태가 끝내줬다. 내 캐릭터에도 입혀 주면 진짜 끝내줄 것 같은데. 보고 있을수록 아쉬움만 들었다.

[길드]곽두식: 얼마 써서 얻었다고 그랬지?

[길드]비니: 나? 한 30 정도 썼을걸

“30이라니.”

30만 원은 나에게 있어서 한 달 월세에 버금가는 금액이었다. 지금 비니는 한 달 월세 금액의 옷을 입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대화에 비니 GM설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길드]큐띠빠띠: 그래도 30 정도면 선방한 거지 ㅋㅋㅋ 저 옷 확률 엄청 낮은데 ㅋㅋㅋㅋ

[길드]비니: ㅇㅇ 이번에 진짜 ㅋㅋㅋ 나도 까면서 오버라고 생각함 ㅋ 지금까지 이 정도로 득 못 해 본 건 처음이라니까

[길드]큐띠빠띠: 그러게 ㅋㅋㅋㅋㅋ 어지간하면 1세트 안에 득템하더니 이번에는 좀 많이 쓰긴 했네 ㅋㅋㅋ

“어쩌면…….”

자기 입으로는 30만 원치 상자를 구매해서 나온 결과라고 하지만 모를 일이었다. GM이라면 해당 옷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입을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 게다가 대화를 보면 평소에도 비니는 다른 사람보다 득템 운이 좋은 것으로 추측됐다.

나는 혹시 몰라 지금 대화들을 모조리 캡처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유용한 증거로 쓰이길 바라며, 바탕 화면에 새 폴더까지 만들어 해당 사진을 따로 모아 두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비니는 유독 내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그냥 기존에 입고 다니던 룩처럼 입기를 바랐으나, 이런 내 바람과는 다르게 놈은 좀처럼 옷을 바꿔 입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세트만 더 질러 볼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예감이 내 몸을 감쌌다. 눈 딱 감고 한 세트만 더 지르면 마치 캐주얼 세트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말이다.

“아니야. 이미 이번 달 예산 초과라고. 정신 차리자, 임연우.”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두 손을 들어 얼굴까지 찰싹찰싹 내려쳤다. 마치 이렇게 하면 키트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이때, 비니의 옷 색깔이 다른 색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얼른 키보드를 두드려 채팅을 입력했다.

[길드]곽두식: 방금 그건 뭐야???

[길드]비니: ㅇㅇ? 뭐가?

[길드]곽두식: 방금 옷 색깔이 바뀌었잖아

설마 색이 다른, 같은 옷을 두 벌이나 가지고 있는 걸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비니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은 다음에 이어진 대화에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드]큐띠빠띠: ㅇ? 몰랐어? 저 옷 염색되는 옷이야 ㅋㅋㅋ

[길드]곽두식: 염색? 옷도 예쁜데 염색도 된다고?

[길드]비니: ㅇㅇ 자기가 원하는 색으로 염색 가능 ㅋㅋㅋ 그나저나 두식이 이 옷 엄청 마음에 드는가 보네 ㅋㅋㅋ 형아가 한 벌 사 줄까?

“혀, 형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채팅 창에 ㅇㅇ이라고 쓴 걸 황급히 지웠다. 딱 봐도 그냥 하는 소리로 보이는데, 거기에 넘어가면 나만 우스워질 게 분명했다. 차라리 한 세트 더 질러서 보란 듯이 내가 직접 얻고야 말 테다.

정말정말정말 마지막으로 한 세트만 딱 더 질러 보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아이템 샵에 들어가 조용히 결제했다. 키트를 구매했다는 걸 들키면 보나 마나 구매하지 말라, 왜 구매하느냐는 둥 온갖 잔소리가 쏟아질 게 뻔했기에 얼른 해치울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결제하기 전에는 한 세트만 더 구매하면 나올 것만 같았던 게 막상 결제를 하고 나니 망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차피 나오지 않을 거 빨리 까 버리자.”

이전까지는 상자 하나를 개봉할 때마다 아이템이 어떻게 나왔나 꼬박꼬박 확인했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포션 종류나 한 땀 한 땀 만들었다는 쓰레기 같은 옷을 줄 게 뻔했으니까 말이다. 마우스를 빠르게 달칵거리며 별 기대 없이 상자 10개를 모두 개봉했을 때였다.

[길드]큐띠빠띠: ?????????????????

[길드]무등산수박: ????????????????

[길드]비니: ??????????????

갑자기 길드 채팅 창이 물음표로 물들었다. 왜 저러나 싶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인벤토리 정리나 하기로 했다. 보나 마나 잡템만 잔뜩 얻었겠지, 그냥 앞으로 키트의 키 자도 보지 말고 이번에 얻은 포션으로 채집이랑 제작이나 열심히 올리자는 마음으로 정리를 하던 중, 처음 보는 낯선 상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또 어떤 신박한 쓰레기 템인가 싶어 별다른 기대 없이 마우스를 상자 위로 가져간 순간 나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캐주얼 세트>

“아아아아악!”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볼을 있는 힘껏 꼬집어 봤다.

“아, 더럽게 아프잖아!”

그러나 그 아픔도 지금 이 순간에는 기분 좋은 아픔이었다. 믿을 수 없어 다시 한번 게임 화면을 확인했다. 혹시 내가 너무 간절히 바라서 꿈을 꾸는 건 아닌 걸까 싶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화면은 그대로였고, 길원들의 반응을 보건대 정말 내가 캐주얼 세트를 획득한 사실은 변치 않는 현실이었다.

[길드]큐띠빠띠: 두식아 ㄹㅇ임?? 진짜???

[길드]비니: 우리 몰래 키트 까고 있었구나 두식이 ㅋㅋㅋㅋ 어쨌든 ㅊㅋㅊㅋ

[길드]무등산수박: 두식아 득템 축하해!!!

[길드]밤밤무슨밤: 축하드려여 두식이형~~~~~~~~~~~~~~~~ 대에박~~~~~~~

[길드]곽두식: 다들 ㄱㅅㄱㅅ 근데 내가 득한 건 어케 앎?

[길드]비니: 고가 템 득템하면 누구누구가 무슨 템을 득했는지 채팅에 떠 ㅋㅋㅋㅋ

즉시 지난 채팅을 확인해 보자 비니의 말대로였다. 나는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해당 채팅 내역과 인벤토리에 있는 캐주얼 세트 상자 스샷을 찍었다.

[길드]큐띠빠띠: 초심자의 행운인가 ㅋㅋㅋㅋㅋㅋ 아씨 나도 한 세트 더 까 봐?

[길드]밤밤무슨밤: 나도 손이 근질거리는데 ㅋㅋ 아 어떡하지 ㅋㅋㅋㅋ

[길드]비니: 딱 봐도 각 나오네 ㅋㅋ 둘 다 물욕 센서 땜에 안 나올 듯 ㅋㅋ 현실은 포션 파티 ^0^

[길드]밤밤무슨밤: 아 ㅡㅡ 비니 형 부정 타게 ㅡㅡ 하긴 키트 깔 때 물욕 센서 있음 더럽게 안 나오더라 ㅋㅋ 꼭 암 생각 없이 까야 좋은 거 나옴 ㅋ 두식이 형도 그랬어여?

그러고 보니 밤밤이의 말대로 마지막에 키트를 깔 땐 기대감이 이전보다 현저히 낮아진 상태이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는데 이렇게 나오다니. 기분이 좋아 자꾸만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길드]비니: 나왔으니까 얼른 입어 봐 ㅋㅋㅋ 아니면 혹시 팔 생각?

[길드]곽두식: ㄴㄴㄴ 내가 입을 거야

말 나온 김에 한번 입어 보기로 했다. 드디어 내 캐릭터에게 예쁜 옷을 입혀 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떠 상자를 개봉하려는데, 갑자기 화면 아래에 친구 신청 창이 등장했다.

<휘파람바람 님이 친구 신청을 하였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뭐야.”

처음 보는 닉네임에 잘못 신청했거니 싶어 곧바로 거절을 선택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유저에게서 친구 신청이 오는가 싶더니, 그 뒤를 이어 오류라도 걸린 것처럼 친구 신청 창이 빠른 속도로 쌓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가 든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사이 사건·사고 게시판에 올라간 거라도 있나 싶어 직접 확인까지 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뭐지?”

혼자서 고민하다 이내 이렇게 고민만 할 게 아니라 친구 신청 받아서 날 친추한 이유를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수십 개의 친구 신청 창 중 가장 앞에 있는 베드가이에게서 온 신청을 승낙했다. 무슨 이유로 친구 신청을 한 건지 정확한 이유를 묻기 전에 베드가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베드가이 (온라인/5채널) 캐주얼 세트 갖고 싶다!!! 나한테 싸게 팔아 줄 사람?>

[베드가이]: 안녕하세여 두식 님

[곽두식]: 안녕하세요

[베드가이]: 채팅 알림 보고 친추 드린 건데, 혹시 캐주얼 세트 저한테 판매해 주심 안 될까여? 제가 진짜 가지고 싶은 옷이라서여 ㅠㅠ

[베드가이]: 프로필 보니까 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비 같은데 ㅠㅠ 솔직히 뉴비한테는 꼭 필요한 옷이 아니잖아여 ㅠㅠ 제가 100만 골드에 살게여 ㅜㅜ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뉴비니까 필요 없으니 자기한테 팔아 달라는 말에 기가 막혔다. 지가 뭔데 필요 없니, 있니 따지는지 개소리도 정성껏 하는 새끼였다. 게다가 길원들의 말을 들어 보면 나오기 힘든 옷인 것 같았지만, 100만 골드 정도는 안 될 것 같았다. 물론 100만 골드 자체도 현재 나에게는 큰돈이긴 했지만.

의심스러운 마음에 경매장에 들어가 캐주얼 세트를 검색했다. 그러자 나오는 가격에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게 얼마야. 일, 십, 백, 천, 만……. 5억이잖아.”

5억에 판매되고 있는 아이템을 100만 골드로 후려치다니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입은 장비를 보고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보여 잘 모를 것 같으니 후려칠 심산인 것 같았다.

“미친 새끼가.”

[곽두식]: 저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 경매장에 5억에 올라온 걸 100만 골드에 사겠다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정신이세여?ㅋㅋㅋㅋㅋㅋㅋ

[베드가이]: 경매장 가격 그거 거품이에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제 유저들 사이에서는 100만 골드에 거래되거든여? ㅋㅋㅋ 가격 모르면 나대지 마세여 ㅋㅋㅋㅋㅋ

나대지 말라는 말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어떻게 된 게 만나는 유저들마다 다들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뿐이지?

[곽두식]: 그럼 다른 사람한테 사세여 ㅋ 난 팔 생각 없으니까 ㅋㅋㅋㅋ

인사도 하기 싫어 팔 생각 없다는 말을 끝으로 1:1 채팅방에서 나온 뒤 친삭까지 빼놓지 않았다. 물론, 나오기 전 이전 경험을 되살려 스샷까지 찍어 증거를 남겨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분은 상했지만 캐주얼 세트를 얻었으니, 그냥 똥 밟은 셈치고 넘어가려 했지만, 놈은 뻔뻔해도 너무 뻔뻔스러웠다.

[전체]베드가이: 아 ㅋㅋㅋㅋㅋㅋㅋ 요새 뉴비들 ㅈ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설쳐 대네 ㅋㅋㅋㅋ 킹받게 ㅋㅋㅋㅋㅋ ㄱㄷㅅ 뉴비 님 해킹 길만 걸으세여 ^^

[전체]관종인간: ㅇㅇ 요새 뉴비들 ㅈ도 모르면서 설쳐 댐 ㅋㅋㅋ

[전체]월요일좋아: 저 사람은 갑자기 왜 급발진함? 뉴비한테 돈 뜯기기라도 함?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해킹 길만 걸으라는 둥 욕을 먹고 있으니 그저 어이가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되어 바로 반박하려 채팅 창 상태를 살폈으나, 아무리 살펴봐도 외침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길원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길드]곽두식: 혹시 채팅 창에 전체 <-- 이걸로 말하려면 어케 해야 돼?

[길드]비니: 전체? 그거 확성기 아이템 사야지만 할 수 있는데 갑자기 왜?

이유를 물어오는 비니에게 나는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을 남김없이 설명해 주었다. 잠시 후, 모든 설명이 끝나자 길드창이 단번에 뜨겁게 불타올랐다.

[길드]밤밤무슨밤: ㅁㅊ ㅋㅋㅋㅋㅋㅋㅋ ㅈㄴ 어이없는 놈이네 ㅋㅋㅋㅋ

[길드]큐띠빠띠: 딱 보니까 뉴비 등쳐 먹으려다 실패한 ㅅㄲ네

[길드]비니: ㅂㅅ 같은 **가 감히 우리 길드 귀염둥이 막내 두식이를 건드려?

[길드]곽두식: 내 편 들어 주고 그놈 욕해 주는 건 고마운데 마지막에 귀염둥이 막내라는 말은 취소해 ㅡㅡ

28살. 성인이 된 지 한참이 흐른 나이에 귀엽다는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기보다는 소름이 돋았다. 실제로 닭살이 오른 팔뚝을 세차게 문지르기까지 했다.

[길드]비니: 왜? 난 있는 사실을 말한 건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길드]큐띠빠띠: ㅁㅈ 두식이 은근 귀여움 ㅋㅋㅋㅋㅋ

[길드]밤밤무슨밤: (잘 모르겠지만 대충 두식이 형 귀엽다는 짤)

[길드]비니: 내가 대신 말할게 기다려 봐 두식아

[길드]큐띠빠띠: 나도 말할래 ㅋ 가만히 있으려니까 열 받음 ㅋㅋ 근데 두식아 혹시 대화 내용 스샷 찍어 뒀어?

[길드]곽두식: ㅇㅇ

[길드]큐띠빠띠: ㅇㅋㅇㅋ

그리고 오래지 않아 채팅 창으로 비니와 큐띠빠띠가 등장했다.

[전체]비니: 베드가이 님 ㅋㅋㅋㅋㅋㅋ 지금 경매장에 5억에 올라온 캐주얼 세트를 100만 골드에 팔라고 한 양심 없는 인간은 누규?

[전체]비니: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 등쳐 먹으려고 한 주제에 아무 잘못 없는 뉴비 욕하느라 바쁘시네 ㅋ 그리고 우리 두식이는 캐주얼 세트 팔 생각 없다니까 자꾸 친구 신청 걸지 마세요

[전체]큐띠빠띠: 아 ㅋㅋㅋㅋㅋ 진짜 어디 가서 아브니르 한다고 하지 마요 베드가이 님 ㅋㅋㅋㅋㅋ 님 같은 인간이랑 같은 게임하고 있는 게 쪽팔리니까 ㅋ

[전체]후르츠캔디: 헤에에엑 미쳤네 ㅋㅋㅋㅋㅋ 5억짜리를 100만 골드에? ㅋㅋㅋ ㅅㅂ 급처상도 저 가격에는 안 살 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바삭한감자전: 와우내; 추드가이야 베하다

그러자 해당 메시지를 봤는지 베드가이가 반응해 왔다.

[전체]베드가이: ㅅㅂ 어이가 없어서 ㅋㅋㅋㅋ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세여 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언제 뉴비 등쳐 먹으려 했다고 그럼? ㅋㅋ 그리고 본인 등판도 아니고 제3자가 왜 끼어듦? ㅋㅋㅋ 꼬우면 본인이 나타나든가 ㅋㅋ

[전체]비니: 응 ^^ 해당 대화 스샷 다 가지고 있으니까 바로 신고 먹일게여 ^ㅁ^

[전체]치크: 아 채팅 창 ㅈㄴ 시끄럽네 둘이서 그냥 1:1 채팅으로 하라고 ㅡㅡ

[전체]관종인간: 신고 ㄱ 신고 ㄱ

[전체]후루츠캔디: 추드가이야 왜 등판 안 함? ㅋㅋㅋㅋ 증거 스샷 가지고 있다니까 쫄으셨남 ㅋㅋㅋㅋㅋㅋ

[전체]바삭한감자전: 확인 결과 추드가이좌 접종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빤쓰런 잘 봤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한바탕 소란했던 순간이 지나고 나는 길원들의 조언에 따라 고객 센터 1:1 문의 게시판에 게시 글을 남겼다. 어떻게 보면 사기나 다름없는 방법이었고, 이대로 넘어가기엔 다른 유저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시 글 작성까지 마치고 나니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나가 보겠다는 말에 비니가 다급히 나를 붙잡았다.

[길드]비니: 두식아 잠깐만 이거 받아 가

그러고는 대뜸 나에게 거래를 걸더니 거래 창에 여러 가지 장비 아이템을 척척 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장비 아이템을 거래 창에 올린 비니가 얼마 있지 않아 거래 확정 버튼을 눌렀다. 거기에 올라온 장비들을 보니 채집과 제작을 할 때 필요한 장비와 도구들이었다. 갑자기 왜 나한테 이런 걸 주는지 몰라 비니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길드]곽두식: 이건 왜 주는 거야?

[길드]비니: ㅇ? 앞으로 채집이랑 제작직 올린다면서

[길드]곽두식: 그건 그런데 그냥 상점에서 내가 구매해도 되잖아; 돈이 없는 것도 아니구…… 5억짜리 옷 획득한 마당에 공짜로 받으려니까 좀 부담스러운데

[길드]비니: 이거 내가 두식이 널 위해 직접 만든 거야 ㅠㅠ 아이템 맨 아래 보면 내 닉넴까지 박혀 있거든? 메이드인 비니 장비 ^ㅁ^

비니 말대로 아이템들 위로 마우스를 가져갈 때마다 나타나는 해당 아이템의 정보 창 맨 아래에 제작자 비니라는 문구가 있었다.

[길드]곽두식: 근데?

[길드]비니: 상점용보다 이렇게 제작자 이름 박힌 장비가 더 좋아 ㅇㅇ 근데 반응이 그게 다야? 쟈가운 두식이 ㅠㅁㅠ

이어서 비니의 캐릭터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흑흑 우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내가 너무 차갑게 반응했나 싶어 조금은 미안해졌다.

[길드]곽두식: 미안; 당황해서 그랬지; 딱 봐도 비싸 보이길래

[길드]비니: 얼마 안 하는 거니까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그냥 받아 가 ㅠㅠ 만렙용 장비가 가격이 좀 나가지 저렙용은 재료 얼마 안 하거든 ㅋㅋ

[길드]큐띠빠띠: ㅁㅈㅁㅈ 줄 때 받아 가 ㅋㅋㅋ 글고 원래 우리 길드 들어오면 비니가 예전부터 만렙전까지 장비 만들어 주곤 했어 ㅋㅋ 그러니까 부담스러워할 필요 전혀 없음!

[길드]비니: ㅇㅇ 내가 길마라서 길드원 복지 차원에서 필요한 장비나 아이템 같은 거 제공해 주는 것뿐이니까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 ㅋㅋㅋ 그리고 난 너의 멘토이기도 하잖아 ㅇ.<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길원들에게 나눠 줬다는 말을 들으니 어째서인지 기분이 묘했다. 정확히 뭐라 하기에는 할 말이 없었지만, 여하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길드 복지 차원에서 주는 거라니 안 받겠다고 하기도 애매해 마음을 고쳐먹고 거래 수락을 했다.

[길드]비니: 장비는 10레벨마다 바꿔 줘야 하니까 렙업하면 나한테 말해 줘 두식아 ^0^

[길드]곽두식: ㅇㅇ 난 피곤해서 먼저 나가 볼게 다들 ㅂㅂ

[길드]비니: ㅂㅂ

[길드]큐띠빠띠: ㅂㅂㅂㅂㅂ

[길드]밤밤무슨밤: 형 들어가세여

게임을 종료하고 지친 몸을 침대에 맡겼다. 시끌벅적했던 게임 속과는 다르게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은 조용했다. 그래서일까, 다른 날보다 유독 쓸쓸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 * *

삭삭삭삭.

풀을 베는 낫 소리가 경쾌했다. 자세히 들으면 나름의 박자감도 느껴졌다. 마지막 풀까지 말끔히 베어 내자 발랄한 배경음과 함께 레벨 업을 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파티]비니: 두식이 렙업 ㅊㅋㅊㅋ

[파티]곽두식: ㄱㅅㄱㅅ

[파티]비니: 그럼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 ㄱ

[파티]곽두식: ㅇㅇ

비니의 탈것에 탑승 신청을 하자 곧바로 비니가 수락했다. 탈것의 주인은 비니였기에 나는 얌전히 탑승만 하고 있으면 비니가 알아서 이동했다. 이번에도 다음 장소로 알아서 이동하는 비니를 확인하곤 나는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비니에게서 장비를 받고 본격적으로 채집에 빠져서 산 지 벌써 며칠이 흘렀다. 앞으로는 내 멘토답게 내 옆에 딱 붙어 다니겠다고 하더니, 정말 비니는 게임에 접속하기만 하면 내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번거로우니 다른 곳으로 가라는 내 거절에 비니는 내가 네 멘토인데 어디로 가냐는 말로 반박해 왔고, 그 말에 반문할 수도 없어 포기한 지 오래였다.

[파티]비니: 근데 하루 종일 풀만 베면 안 지겨움?

[파티]곽두식: 아니? 난 오히려 사냥하는 것보다 이게 더 적성에 맞는 듯 ㅇㅇ

말 그대로 던전에서 사냥하는 것보다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풀을 베는 게 내 적성에 맞았다.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고, 너무 평화로운 장면이라 그런지 실제 잠을 잘 때도 이전보다 더욱 꿀잠을 이루곤 했다.

[파티]비니: 그래? 다행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곽두식: 근데 왜 자꾸 안 지겹냐고 물어봐 ㅡㅡ 네가 지겨워서 그러지?

[파티]비니: 아니? 전혀어어? 내가 지겹다고? 하 참 나 아니거든여 ㅋㅋㅋㅋ

“지겹나 본데.”

그도 그럴 게, 나에게 지겹지 않느냐고 물어온 게 벌써 열 손가락으로 꼽고도 모자랄 만큼 그 횟수가 나날이 늘어 가는 중이었다. 나야 레벨 업을 하느라 풀을 베기라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지만, 비니는 이미 채집뿐만 아니라 전 직업이 만렙인 고인물이었기에 옆에서 할 게 없는지 매번 가만히 서 있기만 했으니 지겨울 만도 하겠지.

내가 힐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했으면 멘토인 비니도 나에게 조언해 줄 게 많았겠지만, 하루 종일 풀만 베는 게 다이다 보니 요즘 비니의 역할은 이동 셔틀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눈에 봐도 지겨워 보여 멘토라고 꼭 붙어 있을 이유는 없으니 볼일 보러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보았지만, 내 말을 들을 비니가 아니었다.

[파티]비니: 왜? 내가 지겨운 사람으로 보여?

[파티]곽두식: ㅇㅇ

[파티]비니: 아닌데? 나 안 지겨운데? 근데 이럴 때 몸풀기로 던전 한번 돌면 딱 좋을 텐데 ㅎㅎ 같이 가 보실?

[파티]곽두식: ㄴ

[파티]비니: 우리 두식이 저녁 반찬으로 단호박 먹었어? 왜 이리 단호해? ㅠㅠ

[파티]곽두식: 난 괜찮으니까 던전 다녀오고 싶으면 다녀와 ㅋㅋㅋㅋ 어차피 이번 장소에서 10업 할 때까지 계속 풀만 베어야 하는데

[파티]비니: 으음……. 그러면 딱! 한판만 레이드 돌고 올게 ㅠㅠ

다음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떠나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지. 쯔쯔.

비니가 떠나고 고요한 주변 풍경에 한 몸인 것처럼 녹아든 채로 나는 또다시 풀을 베기 시작했다. 요즘은 이렇게 베어 낸 풀들을 경매장에 올려 두곤 했는데, 가격은 크게 나가지 않았지만 올리는 족족 팔려 쏠쏠하게 용돈벌이도 하는 중이라 나름 생산적인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풀을 베었을까, 레이드를 다 돌았는지 비니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파티]비니: 두식아 마을로 올래?

[파티]곽두식: 마을? 왜?

[파티]비니: 여기 길원들이랑 아는 지인들 모여서 얘기하는데 너도 오면 좋을 것 같아서 ㅎㅎ 한 번씩 대화도 하면서 해야지 풀만 베다간 지루해서 겜 오래 못 한다? 그리고 친구 많이 사귀면 좋잖아 ㅋㅋ

아직 초반이라 그런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지만, 살짝 외롭기는 했다. 그래서 비니에게 마을로 가겠다고 대답한 뒤 마을로 이동했다. 마을 광장에 있다는 비니의 안내에 그리로 이동하니 여러 유저들로 북적이는 마을 광장 중앙에 비니와 길원들, 그리고 모르는 유저 몇 명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막상 다가가려니 어쩐지 망설여져 잠시 주춤한 사이, 나를 발견한 비니가 내 캐릭터를 향해 손짓했다.

[일반]비니: 두식아! 얼른 이리 와!

그 부름에 어쩔 수 없이 쭈뼛거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비니의 옆에 서자 주변에 있던 길원들과 모르는 유저에게서 인사가 쏟아졌다. 한차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저들끼리 알고 있는 대화를 이어 나가는 모습에 할 말이 없어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기만 했다. 내가 소외될까 봐 신경 쓰였는지 비니와 길원들이 중간중간 나를 챙겨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대화에 참여하기가 힘들었다.

“괜히 오겠다고 했나.”

뒤늦게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화에 끼어들기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그 대신 광장 주변에 있는 유저들을 살펴보았다.

“저 사람 입은 옷 괜찮은데?”

간혹가다 내 취향에 맞는 코디를 발견하면 스샷을 찍어 두기도 하면서 구경하다 보니 꽤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 직전까지 풀을 베고 오느라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내 캐릭터를 발견하곤 황급히 캐주얼 세트로 갈아입었다. 그러자 다른 유저들의 캐릭과 비교해 봐도 초라해 보이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한참 다른 유저들의 커마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황당한 귓속말이 도착한 건.

[귓속말]옐니르>>곽두식: 님, 제 친구 옆에서 좀 떨어져 주세요. 제가 낯가림이 있어서요.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감았다 떠 보기도 하고, 비비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쇼를 해도 귓속말 내용은 처음과 비교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장난이겠지?”

설마 진심이겠어? 하는 마음으로 나는 상대방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곽두식>>옐니르: ? 장난이시죠 ㅎㅎ?

그러나 내 기대와 다르게 상대방은 장난이 아닌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귓속말]옐니르>>곽두식: 장난 아닌데요? 그쪽 때문에 친구 옆에 가지도 못하겠고 인사도 못 하겠으니까 다른 데로 가시든가 해 주세요

세상 진지한 반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어이없어할 상황에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기에는 억울했다. 실제 얼굴을 보고 마주한 것도 아닌데 낯가림이라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픽픽 나왔다.

“설마 텃세 부리는 건가?”

생각을 거듭해 봐도 지금 당장 이 상황에 해당하는 거라곤 텃세밖에 없었다. 누가 순순히 비켜 줄지 알고? 어림도 없는 소리지. 도대체 저놈 친구는 누구지?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직접 옐니르에게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귓속말]곽두식>>옐니르: 님 친구가 누군데요? ㅋㅋㅋㅋㅋㅋ

[귓속말]옐니르>>곽두식: 저 비니 친군데요? 비니가 말 안 해요? 비니랑 저 되게 친한 사인데요

“또라이 곁에는 또라이들만 모이나?”

비니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니 옐니르의 또라이 짓도 그럴듯해 보였다. 이제 누구 친구인지도 말해 줬으니 알아들었으면 빨리 다른 곳으로 가라는 옐니르의 재촉에 나는 곧바로 길드 채팅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길드]곽두식: 또빈 옐니르 이 사람 네 친구 맞음?

여러 유저가 한데 모여 있는 광장이라 채팅 창에도 다양한 대화가 실시간으로 빠르게 올라오고 있어 그런지 비니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못 본 건가 싶어 다시 말하려는 순간 비니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길드]비니: ㅇ? 누구? 옐니르?

[길드]곽두식: ㅇㅇ 나한테 귓속말로 네 친구라고 하면서 자긴 낯가림이 있으니 나보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면 이 겜은 원래 이런 규칙이 있는 거야? ㅋㅋㅋ

[길드]큐띠빠띠: 엥? 그건 또 무슨 신개념 시비임?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곽두식: 내가 이상한 거 아니지?

[길드]큐띠빠띠: ㅇㅇ 낯가림은 무슨 ㅋㅋ 겜에서 낯가림 타령을 하고 있엌ㅋㅋㅋㅋ 근데 옐니르? 첨 들어 본 닉네임인데 누구지?

[길드]비니: 예전에 우리 길드 가입했다가 내가 강퇴시킨 체리빛사랑 이 사람 아냐? 패턴이 똑같은데? 또 닉넴 바꿨나 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 어휴

[길드]큐띠빠띠: 아아 우리 길드 최초로 강퇴당한 그 사람?

강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장 물어보았고,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옐니르는 작년에 길드에 가입을 한 유저였는데, 당시 옐니르는 나와 같은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뉴비였다고 했다.

보통은 비니가 길드 가입 권유를 해서 가입하거나, 아니면 다른 길원들이 새로 게임을 시작한 뉴비를 데려와 가입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옐니르는 당시 마을에 있던 비니를 향해 길드를 가입하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했단다. 그 말에 비니는 뉴비를 도와줄까 싶어 가입을 승인했고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라고 생각한 비니는 지금 나에게 하는 것처럼 옐니르를 데리고 돌아다니며 게임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 줬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옐니르의 태도가 이상해졌다고 했다. 비니 주변에 누가 접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쫓아내기 일쑤였고, 정작 비니 곁에 딱 달라붙어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만렙까지 육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니가 이동하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니가 접속만 하면 1:1 채팅으로 말을 걸기까지 해 나중에는 오히려 비니가 옐니르를 피해 다니는 수준에 이르자, 참다못한 비니가 옐니르를 길드에서 강퇴시켰다고 했다. 그 뒤 주기적으로 닉네임을 바꿔 가며 비니 근처에서 얼쩡거린다나 뭐라나.

[길드]곽두식: 어마어마한 또라이였네 ㄷㄷ

[길드]큐띠빠띠: 또빈에 대한 집착이 어마어마해;

[길드]비니: 두식아 미안 ㅜㅜㅜㅜ 저 사람 말은 그냥 무시해 ㅠㅠ

[길드]곽두식: ㅇㅇ; 근데 또빈한테 왜 저렇게까지 집착하는 건데?

[길드]큐띠빠띠: 그거야 또빈이 행동은 좀 또라이처럼 해도 은근 길원들 잘 챙겨 주거든. 여기에 게임 돈도 많지, 컨트롤도 좋고 그래서 게임 좀 오래 했다 하는 유저들 사이에서는 또빈이 좀 유명해서 ㅋㅋ 또빈이랑 친한 친구라고 하면서 다른 유저한테 사기 치려다 미수로 돌아간 적도 있고 뭐 ㅋㅋ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이니까 말도 섞지 마 ㅋㅋㅋ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처음으로 비니가 불쌍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딱히 없어 말뿐인 응원이나마 건네기로 했다.

[길드]곽두식: 힘내라

[길드]비니: 나 감동함 ㅠㅠㅠㅜㅜㅜ 우리 두식이 언제 이만큼 컸어? 위로도 할 줄 알고 ㅜㅜ 형아는 여한이 없다 ㅠㅠ 옐니르 저 사람한테는 내가 따로 말할게 그러지 말라고 ㅠㅠ

[길드]곽두식: 기껏 위로해 주니까 ㅡㅡ

비니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비니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옐니르는 빠르게 마을에서 사라졌다. 옐니르도 사라졌겠다, 이제 다시 채집 레벨링을 하러 떠나기로 했다.

[길드]곽두식: 그럼 난 다시 풀이나 베러 갈래

[길드]비니: 헐 ㅠㅠ 나 버리고 가는 거야 두식아? 가지 마 ㅠㅠㅠㅠ 좀만 더 놀다가 나랑 같이 가자

[길드]곽두식: ㄴㄴㄴㄴㄴㄴㄴ 넌 그냥 여기서 놀아 나 혼자 갈 테니까 ㅇㅇ

비니 근처에 있는 다른 길원들과 지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다시 풀을 베러 떠났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계속 자리 잡고 있기에 머쓱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얼른 채집 만렙을 달성해 돈을 많이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을에 있는 유저들의 커마를 살펴보다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다 싶어 경매장에 검색해 보면 하나같이 고가의 의상들이었다.

현재 내가 입고 있는 캐주얼 세트도 훌륭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마음에 드는 옷을 모두 가지고 말 거라고 다짐하며 비장한 마음으로 다시 채집 장비로 옷을 갈아입었다.

달리기 스킬을 사용해 조금 전까지 풀을 베던 장소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이미 다른 유저가 자리를 잡아 풀을 베고 있었다. 할 수 없이 해당 유저를 피해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나는 낫을 장비하고 다시 풀을 베어 나갔다. 그렇게 베어 나가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분명 처음에는 해당 유저와 거리가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한자리에서 채집 가능한 풀의 양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바꿔 가며 채집을 해야 했는데, 같은 장소에서 움직이다 보니 거리가 좁혀진 것 같았다. 혼자서 조용히 풀을 베던 장소에 나와 같이 풀을 베는 사람이 있으니, 더욱 힘이 나는 듯했다. 그래서 더욱 힘차게 낫을 휘두르고 있는데, 갑자기 근처에서 풀을 베던 유저에게서 대뜸 채팅이 날아들었다.

[일반]새싹농부: 자리요 ㅡㅡ

“무슨 말이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뒤에 붙은 이모티콘을 보니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무시할까 싶었지만,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새싹농부가 정확히 내 닉네임을 불렀기에 더는 모른 척하기가 어려워졌다.

[일반]새싹농부: 두식 님

[일반]곽두식: 네?

[일반]새싹농부: 자리요 ㅡㅡ

[일반]곽두식: 네?

[일반]새싹농부: 여긴 제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채널 가서 채집하세요

[일반]곽두식: 여기 그냥 다 같이 쓰는 장소 아닌가요?

당당히 이곳은 자신의 자리니 나더러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말에 순순히 이동하려다 멈칫했다. 만약 새싹농부의 말대로 자리 개념이 있는 장소였더라면 비니가 말을 해 줬을 텐데, 채집 레벨을 올리는 며칠 동안 그런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었다.

[일반]새싹농부: 그렇긴 한데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중에 온 사람이 비켜 줘야 하는 게 예의죠 ㅡㅡ 가뜩이나 장소도 좁은데 두 사람이 채집하고 있으니까 채집 양이 줄어들잖아요 ㅡㅡ

새싹농부의 쌉소리를 눈에 담은 순간 나는 무거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자꾸 나한테만 이런 거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나한테 이 겜에 있는 또라이들을 끌어당기는 페로몬이라도 나오나? 아니면 내가 뭣 모르는 뉴비로 보이니 만만하게 대하는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뉴비한테 친절한 게임이라더니.”

아무래도 영석이 나한테 사기를 친 게 분명했다.

“김영석, 이 새끼 출근하고 나서 보자.”

이게 어딜 봐서 뉴비에게 친절한 게임이란 말인가. 지나가던 뉴비가 비웃을 말이었다. 빠득빠득 이를 갈고 있는 와중에도 새싹농부는 빨리 채널 이동을 하라며 강요하는 장면에 나는 조용히 프린트 스크린 키를 연타했다. 그와 동시에 이번 진상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눈앞으로 비니가 등장했다. 여전한 개소리와 함께 말이다.

[일반]비니: 우리 두식이 나 몰래 친구라도 사귄 거야? 형아 섭섭해 ㅠㅠ

[일반]곽두식: 오자마자 뭔 소리야 ㅡㅡ 여기는 왜 왔어?

[일반]비니: 우리 두식이 심심할까 봐 왔지 ㅋㅋ 근데 이 친구는 누구?

비니가 자리좌에게 관심을 보였다. 나는 이때다 싶어 1:1 채팅을 통해 비니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고인물 중의 고인물이니 그만큼 이 게임에 대한 암묵적인 룰 같은 것도 잘 알고 싶지 않을까 하는 이유에서였다.

<비니 (온라인/7채널) 비니비니 비니비니 당근 당근!>

[곽두식]: 야 나 뭐 하나 물어볼 거 있는데

[비니]: ㅇㅇ?

[곽두식]: 아까 내가 여기 풀 베러 왔는데 저 사람이 먼저 베고 있길래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했거든? 근데 저 사람이 자기 자리라고 나보고 채널 이동하라는 거야 ㅡㅡ

[비니]: ???? 무슨 ㄱㅐ소리지 ㅋㅋㅋ 그런 거 없는데 ㅋㅋ 저 사람이 이상한 거 ㅇㅇ

[곽두식]: 어쩐지 ㅈ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씀

비니에게 확실히 확인도 받았겠다, 나는 당당하게 자리좌에게 따지려 했지만 나보다 비니의 행동력이 더 빨랐다.

[일반]비니: 저기요 새싹농부 님 ㅋㅋㅋㅋ 언제부터 자리 룰이 생겼어요? ㅋㅋㅋ 저 아브니르 오베 때부터 한 사람인데 ㅋㅋ 그런 룰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요?

[일반]새싹농부: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룰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도의상 늦게 온 사람이 알아서 피해 주는 게 센스고 매너라는 소리죠

[일반]비니: 그러니까 그렇게 꼭 해야 한다는 게 정해져 있냐고요

[일반]새싹농부: 제가 언제 그런 룰이 있다고 했어요? 전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요

[일반]비니: 그럼 불편한 사람이 채이를 하든가 아니면 얌전히 채집이나 계속하든가요 그쪽 때문에 우리 두식이 겜 접기라도 하면 그쪽이 책임질 거예요?

“잘 한다 비니!”

가끔 사람 골을 때릴 정도로 또라이 짓을 하거나 나에게서 GM으로 의심을 받는 비니였지만, 한 번씩 이렇게 내 편을 들어 줄 때는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 혼자 있을 땐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행동하더니, 비니가 말하자 단번에 태도를 달리하는 게 완전 재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서기는 싫은지 몇 번 더 그 자리에서 버티던 새싹농부는 *벤 커뮤니티 게시판에 지금 오고 간 대화 스샷 올리면 누가 역풍 맞을지 한번 볼까요? 라는 비니의 말에 그제야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나는 즉시 비니에게 고마움을 담은 감사의 말을 짧게 건넸다.

[일반]곽두식: ㄱㅅㄱㅅ

[일반]비니: 앞으로 진짜 자리 비우면 안 되겠네 ㅋㅋ 내가 잠시 한눈팔면 바로 이런 일 생기니까 ㅋㅋㅋㅋ

[일반]곽두식: 이 겜 유저들은 원래 다 이래?

[일반]비니: ㄴㄴㄴ 일부만 저렇지, 대부분은 친절한데 ㅠㅜ

[일반]곽두식: 그 일부가 넘 많은 것 같은데 ㅋㅋ

[일반]비니: 머쓱타드; 어쨌든 진짜 앞으로는 네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게 ㅋㅋ

그날 이후 비니는 자신이 말했던 대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나는 그 덕에 편하게 첫 만렙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내 입에서는 절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요 며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회의에 야근, 그리고 팀장의 잔소리, 이렇게 쓰리 콤보로 혹사당한 내 몸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피곤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급한 일은 다 끝났기에 앞으로는 제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내일이 주말이라는 사실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와 화장실 앞에 선 나는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입맛도 없는지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도 무언가를 먹고 싶은 욕구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은 패스하고 온종일 일하느라 찝찝했던 몸을 말끔히 씻기로 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샤워기 레버를 돌리고 그 아래에 서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물이 그동안 쌓인 피로까지 함께 씻겨 주는 듯했다.

잠시 후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물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말리는 시늉을 하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침대에 골인하려다 전원이 꺼진 책상 위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바쁜 현생을 보내느라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지도 언제인지 기억이 까마득할 정도였다.

“설마 길드에서 잘린 건 아니겠지.”

틈만 나면 하루가 멀다 하고 꼬박꼬박 접속하다 오랫동안 접속을 하지 않았으니 살짝 걱정이 들긴 했다. 내 몸은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었기에 한번 침대에 누우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내일이 오기까지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침대로 가기 전 잠깐 게임에 접속해 생존 신고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 무거운 발을 끌고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밑으로 다리를 뻗어 컴퓨터 전원을 켜고 부팅이 끝나자마자 게임 클라이언트를 실행해 로그인한 후 게임에 접속했다. 그러자 내가 로그인을 했다는 알림을 확인했는지 채팅 창으로 길원들의 환영 인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안 잘려서 다행이다.”

길드에 애틋한 정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아직 멋모르는 나에게 있어서 온갖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길드의 존재는 소중했기에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길드]밤밤무슨밤: ㅁㅊ 두식이 형! 넘 오랜만이쟈나

[길드]큐띠빠띠: 두식아~~~~~ 난 너 겜 접은 줄 ㅠㅠㅠㅠㅠㅠㅠㅠ

[길드]음치퀸: 두식 님!!! 어서 와여!!!

[길드]무등산수박: 두식아 ㅠㅠㅠㅠㅠㅠ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접속이 넘 뜸해서 우린 너 게임 접은 줄 알았잖아 ㅠㅠㅠ

[길드]연분홍빛꽃잎: 안녕하세요 두식 님! 처음 뵙겠습니다 ㅎㅎ 얼마 전에 새로 가입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예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처음 보는 낯선 닉네임이다 싶었더니 내가 접속하지 않은 사이 길드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 것 같았다. 게다가 나와 같은 뉴비라니. 방금 본 사람이었지만 고인물들 사이에 나와 같은 뉴비라니, 벌써 내적 친근감이 생겼다.

[길드]곽두식: 다들 ㅎㅇㅎㅇㅎㅇ 꽃잎 님 안녕하세요 ㅎㅎ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아 꽃잎 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길드]연분홍빛꽃잎: 네! 편하게 부르세요!

[길드]큐띠빠띠: 두식아 너도 보이스 ㄱㄱ

[길드]곽두식: ㅇㅋ

원래는 생존 신고만 하고 빠르게 게임 종료를 하려 했으나 다들 보이스에 모여 이야기하고 있으니 들어오라는 말에 잠깐 듣기라도 할까 싶어 접속하기로 했다. 계략 길원들이 모인 채널에 접속하자 스피커 너머로 다시 한번 환영 인사가 쏟아졌다.

-두식아 어서 와!

-어서 와 두식아.

-안녕하세요. 두식 님 저 꽃잎이에요. 수박 누나랑 큐띠한테 얘기 들어 보니까 저랑 동갑이시던데 말 편하게 할까요?

꽃잎이라는 닉네임만 보고 여자인 줄 알았는데 실제 목소리를 들으니 남자였다. 하긴, 요새 시대가 어느 땐데 닉네임 하나 가지고 남자 여자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일 터였다. 괜히 머쓱해져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길드]곽두식: 아 그래요? 그럼, 말 편하게 해요 ㅎㅎ

-뉴비 친구 생겨서 두식이 이제 덜 외롭겠네.

-그러게. 우리가 아무리 신경 쓰고 챙겨 준다고 해도 게임 진행 속도가 달라서 외로웠을 텐데 잘 됐다.

[길드]곽두식: 그럼 앞으로 뉴비 유저 많이 데려오기 ㄱㄱ

-우리도 마음 같아서는 새로운 길원들, 특히 뉴비들 많이 받으면 좋지. 그런데 길드 방침으로는 힘들 것 같아.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가입해 버리면 우리가 일일이 신경 써 주기가 힘들거든.

-그래서 소외감 느끼며 길드 탈퇴하는 사람도 생기고 말이야. 뭐, 이거 말고도 금방 게임을 접어 버리거나 길드 창고에 넣어 둔 템만 쏙 털어 간다거나 하는 빌런들도 있고.

비니나 다른 길원들의 태도를 보면 새로운 길원,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왜 새로운 길원을 받지 않는 건가 했더니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게임 하단 화면에서 누군가의 접속을 알리는 알림이 나타났다. 확인해 보니 비니가 접속했다는 알림이었다.

길마인 비니가 접속하자 모든 길원들에게서 인사가 쏟아졌는데, 내가 접속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격한 환영이었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보이스 채널로 오라는 길원들의 말에 얼마 있지 않아 비니가 등장했다.

-또빈! 한동안 접속이 왜 이리 뜸했어?

-회사 일이 바빠서 게임 접속할 시간도 없었어. 다들 나 보고 싶었어? 어휴, 이놈의 인기.

순간 들려오는 비니의 목소리에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 회사에 출근만 하면 목소리를 듣는 재수 없는 팀장의 목소리와 비니의 목소리가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팀장의 목소리보다 한 음조가 높아 보이는 활기찬 비니의 목소리도 그렇고, 팀장과는 차원이 다른 주접을 떠는 걸 듣고 있노라면 또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팀장도 이 게임을 한다고 했었잖아.’

그러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동시에 며칠 전 팀장이 아브니르를 한다고 당당히 고백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알기론 팀장은 주말을 앞둔 오늘까지도 회사에 남아 야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비니가 팀장일 확률은 더더욱 떨어졌다. 영석의 말대로 수많은 유저 중에서 팀장과 만날 확률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수준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슨 일이 있어도 게임에 접속을 하던 사람이 안 보이니까 우리끼리 엄청나게 놀랐잖아. 감기 몸살이 걸렸을 때도 기어코 출석 체크 이벤은 참여하던 놈이었는데.

-이번엔 진짜 바빠도 너무 바빴다니까.

-우쭈주, 우리 또빈 고생이 많아요. 근데 너랑 두식이 혹시 같은 회사에라도 다니는 거야? 어째 둘이 똑같은 날에 접속이 뜸하더니 다시 접속하는 것도 똑같네.

어떻게 저런 끔찍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큐띠의 말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오오, 알고 보니 같은 회사 동료였다? 뭐 이런 건가.

-두식이랑 나랑?

-잘됐다. 이번 정모에 둘이 만나서 확인하면 되겠네. 같은 회사라면 얼굴은 알 거 아냐?

정모 이야기는 둘째 치고 어느새 자신의 참석이 당연시된 분위기에 나는 황급히 제지하러 나섰다.

[길드]곽두식: ㅈㅁ 정모라니? 정모도 해?

-엥? 두식이 너 몰랐어? 난 또빈이 다 설명해 준 줄 알았는데?

[길드]곽두식: 그런 설명 들은 기억 1도 없는데

-음, 내가 말을 안 해 줬었나? 미안해 두식아, 내가 최근 들어 정신이 없어서.

-뭐야, 진짜 말 안 해 준 거야? 그럼 뭐 지금부터 알아 가면 되지. 우리 길드는 1년에 4번 정도 정모 하거든? 2번은 간단하게 카페에서 수다 좀 떨다가 밥 먹고 헤어지고, 나머지 2번은 각 잡고 펜션 예약해서 모여서 놀고 그러거든. 대충 4분기로 나눠서 한 번씩 한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정모를 자주 하는 만큼 길원들 사이가 끈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정모를 떠올리면 좋은 꼴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부정적인 생각이 앞섰다.

-이번 정모는 다음 주 토요일인데 두식이랑 꽃잎이는 어떻게 할 거야? 참석해도 좋고 안 해도 되니까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말해 줘.

-저는 참석할래요!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이야기하는 거 좋아해서요!

-좋아. 그럼 꽃잎이는 참석하는 거로 알고 있을게. 두식이 너는?

[길드]곽두식: 음, 난 참석이 힘들 것 같은데 ㅜㅜ 본가에 내려가기로 약속되어 있어서 ㅜㅜ

서울에 올라가더니 도통 본가에는 한번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못 이겨 다음 주 주말에 본가에 내려갈 예정이었다. 이번에도 내려가지 않으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걸 알기에 미룰 수도 없었다. 그래서 대강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곧바로 아쉽다는 길원들의 반응이 이어졌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두식이 얼굴 궁금했는데,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네.

-그러게. 나도 두식이 얼굴 진짜 궁금했는데.

[길드]곽두식: 다음 정모에는 꼭 참석할게 ㅠㅜ

-그래, 다음 정모에 꼭 보자.

-그나저나 그럼 이번 정모 때 두식이 빼고 다 모이는 건가?

-현재 상태로는 그렇지.

-우와, 이런 적 처음 아니야? 그동안 한두 명씩 빠지고 그랬었는데.

-그러게, 이번 정모에 펜션 예약해야 했는데 아쉽네.

그 이후로 정모 날에 어떻게 놀지에 관련해 대화를 나누는 길원들의 대화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정모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차마 그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모인 길드 집에서 벗어나 혼자서 마을로 텔레포트 했다. 채집을 만렙 찍고, 이어서 제작에 손을 대고 있었던 나는 제작 재료를 판매하고 있는 상점 NPC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상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스킬 아이콘을 클릭하기만 하면 내 손으로 직접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제작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이 매력에 푹 빠진 나는 며칠 전부터 현재 레벨에서 내가 만들 수 있는 의류 중 마음에 드는 옷을 하나 선택해 제작 중이었다. 아브니르는 사냥 장비와 비 사냥용 장비를 동시에 착용할 수 있었는데, 착용 후 마음에 드는 장비 창을 대표로 지정하면 지정해 둔 장비로 노출이 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전 운 좋게 키트로 뽑은 의류가 질린 건 아니었지만, 자고로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옷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임을 갓 시작했을 때의 목표는 힐러 직업을 만렙까지 육성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게임 내에 존재하는 의류들을 모두 모으는 것이 목표였다.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스피커 너머로 저들끼리 신난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제작에 집중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비니에게서 1:1 개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비니 (온라인/7채널) 비니비니 비니비니 당근 당근!>

[비니]: 두식아 뭐 해?

[곽두식]: 나? 제작 중

[비니]: ㅇㅎ 지난번에 뭐 만든다고 했었더라?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ㅠㅠ

[곽두식]: 아브니르 전통 의상

[비니]: 혹시 제작하는데 뭐 필요한 재료 같은 거 있어? 있으면 말해 ^0^

[곽두식]: 그럼, 해포 가죽 5장 있어?

[비니]: 해포 가죽? ㅈㅁ 아 있다 ㅋㅋㅋㅋㅋ 이거 필요해? 줄까?

[곽두식]: ㅇㅇ

[비니]: 지금 ㅇㄷ?

[곽두식]: 로터 마을

[비니]: ㅇㅋ 기다려 지금 감

[곽두식]: ㅇㅇ

마침 필요했던 재료를 가지고 오겠다는 말에 나는 얼른 승낙했다. 비싼 재료였다면 받기 꺼려했겠으나 해당 재료는 몬스터를 잡기가 좀 까다로울 뿐 재료 자체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포 가죽을 구하는 방법으로는 ‘해포’라는 이름을 가진 몬스터를 사냥하면 되는 간단한 방법이었는데, 문제는 이 몹이 선공 몹이라 근처에 유저가 다가가기만 해도 먼저 공격을 해 왔다.

이것뿐이라면 그냥 사냥을 하면 되겠지만, 문제는 이놈들이 떼로 덤빈다는 점이었다. 비니와 같은 레벨이 높은 고인물이라면 이것 또한 별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아직 뉴비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는 잡기가 꽤 힘들었다.

잘됐다 싶어 제작을 이어 가는데 서로의 곁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텔레포트 귀환서를 사용한 건지 비니가 바로 내 옆으로 깜짝 등장했다.

[일반]곽두식: 깜짝이야 ㅡㅡ

[일반]비니: 나 왔어 두식아 ^0^ 혼자서 외로웠지? 그래서 내가 왔어 ^ㅁ^

[일반]곽두식: 뭐래ㅡㅡ 빨리 가죽이나 내놔

비니의 말에 아닌 척했지만, 사실은 조금 외로웠던 모양이다. 비니가 오자마자 안도감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비니에게서 무사히 가죽을 전달받은 나는 옆에서 비니가 떠드는 걸 들어가며 한 번씩 맞장구도 쳐 주면서 제작에 열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직도 정모에 관련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길원들이 최종 결정자인 비니를 앞다퉈 소환했다. 길원들이 비니를 찾으니 당장 그리로 달려갈 줄 알았던 비니는 어째서인지 제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일반]곽두식: 안 가고 뭐 해? 다들 너 찾잖아

[일반]비니: 너 혼자 두고 어케 가 ㅠㅠㅠ 차가운 두식이 ㅠㅠ 내가 네 멘토인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날 보낼 수가 있어? ㅠㅠㅠㅠ 현생이 바쁘다고 그새 우리 약속 잊은 거야?

[일반]곽두식: 무슨 약속? 내가 너랑 약속한 게 있었어?

[일반]비니: 그럼! 너와 난 멘토와 제자로 맺어진 사이니, 어딜 다니든 꼭 붙어 다니기로 햇잖아 ㅠㅠㅠㅠㅠ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나?”

내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비니에게서 두식이 넌 너무 차가운 남자라든가, 어떻게 우리 약속을 잊을 수 있냐 등등 온갖 말이 쏟아졌다.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 찐으로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비니에게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이쯤 되니 어쩌면 한동안 꽤 바빴던 탓에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비니에게 일단 사과를 하며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일반]곽두식: 미안 ㅜ 암만 생각해 봐도 안 떠올라 ㅠㅠ

다소 낯간지러운 약속 내용에 내가 동의했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확실히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단정을 짓기에는 또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비니의 답에 나는 책상을 내려쳤다.

[일반]비니: 당연하지 ㅠㅠㅠㅠㅠㅠㅠ 나 혼자서만 너랑 붙어 다니겠다고 했지, 넌 그런 적 없으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에 두식이랑 노니까 재밌다 ㅋㅋㅋㅋ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사라졌어 ㅋㅋ 고마워 두식아 넌 최고야 ㅋㅋㅋ

“이거 미친 새끼 아냐!”

이어서 비니를 향해 내가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지만, 끄떡도 하지 않은 비니는 유유히 내 앞에서 사라졌다.

“두고 보자, 이 새끼.”

언제 한번 이 수모를 돌려주고 말 거라고 굳게 다짐하며 전투적으로 물레를 돌렸다. 다양한 소음으로 가득 찬 마을에 분노를 한껏 담은 물레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지다 사라졌다.

* * *

“뭐라고?”

-아니, 오늘 말고 다음 주에 내려오라고.

“왜?”

-우리 옆집에 사는 영호네 엄마 알지? 오늘 부부끼리 함께 근처에 놀러 가기로 했어. 그러니까 다음 주에 내려와.

“그걸 갑자기 말해 주면 어떡해. 이미 나갈 채비 다 했는데.”

-네 친구랑 놀든가. 하여튼 엄만 지금 나가 봐야 하니까 전화 끊는다. 다음 주에 보자, 아들.

“엄마? 엄마!”

더 이상의 할 말은 사절한다는 듯 휴대폰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아.”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집에서 나서기 전이라는 점이었다. 갑작스러운 약속 취소는 언제 겪어도 달갑지 않았으나 이미 취소된 약속을 어쩌겠는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집에서 푹 쉬기로 하고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입고 있던 외출복을 벗으려다 멈칫했다.

“가만……. 지금 몇 시지?”

침대에 던져둔 휴대폰을 가져와 현재 시각을 확인하자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현재 시각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메신저 앱에 들어가 여러 채팅방 중 한곳에 들어갔다.

[비니: 정말정말정말 혹시나 약속 취소돼서 정모 나올 수 있음 여기로 오면 돼 ^ㅁ^ 20xx. xx. xx 오후 12시 xx역 8번 출구 앞 cafe. 반달]

비니가 알려 준 약속 장소를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도 고민이 됐다. 아직 비니의 정체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비니를 생각하면 망설여졌지만, 나머지 길원들을 생각하면 참석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나를 도와준 길원들을 직접 만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안절부절못하고 한참을 고민하다 약속 시간까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정모에 참석하기로.

현관을 나서기 전 전신 거울 앞에서 흐트러진 옷차림을 다시 한번 점검한 후 빠르게 현관을 나섰다. 깜짝 등장하면 다들 놀랄 생각을 하니 살짝 긴장되면서도 동시에 흥분됐다.

주말이라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간신히 벗어나 8번 출구로 올라오자 반달이라는 이름의 카페가 앞에 보였다. 곧바로 카페로 들어가지 않은 채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1층 내부를 살폈지만, 대부분 2명에서 3명으로 이루어진 손님들만 테이블에 앉아 있을 뿐, 10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여 있는 테이블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1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 먼저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기다릴 수는 없어 음료라도 한 잔 주문하려 카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왼쪽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문은 잠시 뒤로 미루고 주저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2층 또한 1층과 마찬가지로 손님들이 뜨문뜨문 앉아 있을 뿐이었다. 포기하고 내려가려다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길래 그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계단 옆 보드에 적힌 글씨 중 익숙한 문구가 보였다.

<3층은 예약 손님 전용 공간입니다.>

-20xx. xx. xx 오전 11시 5명 예약 (1번 룸)

-20xx. xx. xx 오후 12시 10명 예약 계략 길드 (5번 룸)

해당 문구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3층으로 올라갔다. 보드에 적힌 대로 예약 손님 전용 공간에 탁 트인 1, 2층과는 달리 룸으로 이루어져 있어 비교적 조용했다.

“5번 룸……. 5번 룸…….”

마침내 찾은 5번 룸은 가장 구석에 있었다. 즉시 5번 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5번 룸인 듯한 곳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등장했다.

‘왜 저놈이 저기에서 나오는 건데?’

문을 열고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어제까지 회사에서 지긋지긋하게 봤던, 현재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당당히 꼽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 공세빈 팀장이었다.

아직 놈에게서 어떠한 말을 듣지도 않았건만, 내 예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동안 최악이라고 가정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야 말았다는 것을.

‘공세빈이 나와 같은 게임을, 그것도 같은 길드였다니.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공세빈이냐고! 아아, 괜히 왔어!’

세상에 존재하는 갖은 욕을 험상궂게 쏟아 내고, 좌절감에 엉엉 울고불고 난리인 시끄러운 속내를 공세빈에게 만큼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태연한 척 충격에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했다.

“……임연우 씨?”

공세빈에게서 이름이 불린 순간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아, 좆됐다. 최대한 임연우가 아닌 척 공세빈이 있을 뒤는 절대 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임연우 씨, 어제 제출한 파일에 문제가 있던데.”

“네? 무슨 문제요? 제출하기 전에 몇 번이고 확인했는데요?”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 파일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반응해 버렸다. 그 탓에 뒤돌아서자마자 날 보고 있던 공세빈과 눈이 마주쳤다. 요놈 잘 걸렸다는 눈빛으로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공세빈을 본 순간 진짜 좆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임연우 씨 맞네요.”

“…….”

“여기는 어쩐 일로?”

“네? 그게…… 저도 약속이 있어서요.”

“흠, 여기서 약속이 있다는 말입니까?”

“네, 저도 여기서 누굴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럼 저는 이만.”

무슨 일이 있어도 공세빈에게 내가 곽두식이라는 걸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고 있는 공세빈에게 인사한 후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바로 옆에 있는 문 앞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기 전 힐끔 눈동자만 굴려 공세빈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쯤 하면 사라질 법도 한데 공세빈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도 흥미로운 눈빛을 한 채로 말이다.

‘왜 저러고 서 있는 거야. 짜증 나게.’

좀처럼 움직일 생각이 없는 공세빈 대신, 내가 먼저 이 장소에서 벗어나는 게 내 정신 건강에 훨씬 이로울 것 같았다. 적당히 빈 룸에 들어가 있다가 놈이 자리를 뜨면 그때 나도 여기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이상하게 긴장으로 호흡이 떨려 왔다. 후우후우, 침착하자. 손잡이를 잡은 손까지 떨리는 것 같아 나는 더욱 힘을 줬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당연히 열릴 거라고 생각했던 문은 철컥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내가 잘못 만졌나 싶어 다시 한번 손잡이를 힘차게 돌렸다. 그럴수록 공세빈과 나만 남겨진 복도에 철컥철컥 소리만 울려 퍼졌다. 당황한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 당겨도 보고 밀어도 보고 했지만, 잠긴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이게 왜 이러지.”

“약속 장소가 정확히 거기 맞습니까?”

“그, 그럼요.”

“그래요? 제가 알기론 지금 이 시간대에 여기 예약된 룸은 1번 룸과 5번 룸뿐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리고 예약이 없는 룸은 모두 잠가 둔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올라오기 전 봤던 보드에 현재 예약 상황이 적힌 내용이 떠올랐다. 왜 이런 중요한 정보는 항상 늦게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급한 대로 훗날 흑역사로 기록될 만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기로 했다.

“어……. 제가 약속 장소를 착각했나 봐요.”

“아, 아예 약속 장소를 착각했다?”

“흠흠, 네.”

“예약 룸만 있는 3층까지 올라왔는데 약속 장소를 착각했다?”

“그, 그렇다니까요.”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차마 공세빈과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 황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뭐, 좋습니다. 좀처럼 믿기 힘든 말이지만 임연우 씨와 같은 팀의 팀장으로서 믿어 드리죠. 가 보세요, 그럼.”

“네, 팀장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랄게요.”

마음 같아선 좆같은 주말 보내라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입꼬리가 파르르 떨릴지라도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싶어 안도하며 뒤돌아섰다. 그러곤 앞을 향해 걸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두식아, 여기 휴대폰 떨어뜨렸어!”

“뭐? 어디?”

그 말에 깜짝 놀라 다시 공세빈을 돌아보는 순간, 나는 정말정말 좆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바지 주머니 왼쪽으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정확히 휴대폰을 넣어 둔 자리였다.

“역시 맞네. 임연우 씨. 아니 곽두식.”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공세빈 앞에서 나는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아아, 임연우 이 멍청한 새끼! 마음속으로 온갖 욕을 퍼붓고 있는 내 앞으로 공세빈이 득의양양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것을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 *

“두식이 오늘 약속 있어서 못 온다더니, 용케 왔네?”

“여기 장소는 어떻게 알았어?”

“혹시나 해서 며칠 전에 내가 알려 줬어.”

“오, 또빈 이럴 때는 또 길마 같단 말이지.”

무슨 정신으로 5번 룸 안에 들어와 앉아 있게 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그 잠깐 사이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멍하니 앉아 있는 내 주변으로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 떼처럼 길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내 근처를 감싼 채 저들끼리 대화를 이어 갔다. 보아하니 내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왜 자꾸 질문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나는 룸 안부터 살폈다. 룸이었지만, 폐쇄되어 있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전면에는 커다란 창이 나 있어 분위기가 화사했다. 룸 중앙에는 커다란 테이블과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나까지 포함해 총 11명의 인원이 테이블을 둘러싼 채로 앉았다.

“두식이까지 모이니까 좋다. 이로써 우리 계략 길드 인원이 다 모인 거네?”

“그러게, 웬일이야. 길드 생성 후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맨날 모이는 인원이라고는 또빈이랑 나랑 큐띠나 아니면 밤밤이뿐이었잖아.”

“그 말은 즉 이전까지는 우리 길드 최고 고인물들만 참석했다는 소리네.”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어쨌든 이렇게 다 같이 모이니까 북적북적한 게 좋다.”

“두식아, 음료 뭐 먹을래?”

“아니, 저는 두식이가 아니라…….”

“에이, 뭘 또 아닌 척을 해. 얼굴만 봐도 나 곽두식이요, 하고 쓰여 있는데.”

그러면서 큐띠빠띠가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조용히 저 새끼가 미쳤나 하며 욕을 꿍얼거렸다.

“우리 두식이, 이렇게 된 거 여기서는 서로 말 편하게 하자.”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룸 안으로 함께 들어온 순간부터 내 옆자리에 딱 붙어 앉아 친근하게 구는 놈 때문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앉은 채로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그동안 내가 알던 그 재수 없는 공세빈이 맞나 싶어서. 심지어 이제부터 말까지 편하게 하자는 놈의 말에 마음속으로는 그래 이 새끼야, 앞으로 마음껏 말을 편하게 해 주마! 하고 비장하게 외쳤지만, 나에게도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으므로 어떻게 그러냐는 식으로 일단 한번 튕겼다.

“그러면서 요 입꼬리 올라간 건 뭔데?”

그러면서 공세빈이 대뜸 자기 손가락으로 내 입꼬리를 쿡 찔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들짝 놀란 나는 방금 공세빈이 건드린 입꼬리가 있는 부분을 손바닥으로 황급히 감싼 채 뒤로 물러났다.

“큭큭, 두식이 반응 귀엽다.”

“생긴 것도 말랑말랑 귀엽게 생겨선 하는 행동도 귀엽네. 이런 두식이를 그간 또빈 혼자서 봤단 말이야?”

“우리 두식이 나한테 한 소리 들을 때마다 얼굴 찌푸리는 게 귀엽긴 하지. 그래서 더 잔소리하게 된다니까.”

“뭐? 이 새끼가!”

순간적으로 욱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자연스레 욕이 튀어 나갔다.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흘끔 공세빈의 동태를 살피자 놀랍게도 놈은 내게서 욕을 먹은 이 와중에도 웃고 있었다.

“오오! 두식이 입에서 이 새끼 나왔다! 근데 욕하는 것도 귀엽네. 위협이 하나도 안 느껴져.”

“우리 두식이, 그렇게 욕하고 싶었어요? 우쭈쭈.”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큐띠빠띠의 말 다음으로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공세빈의 발언까지 이어졌다. 그제야 나는 존나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우리 회사에서 최연소 나이로 팀장 자리에 올랐다는 놈을 이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아래 직원에게 쌍욕을 들어도 저런 강철 멘탈을 가져야 팀장 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화는 나지만 차마 뭐라 말하지 못한 채 씩씩거리며 열을 내는 내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놈은 태연스레 입을 열었다.

“간단한 소개는 했지만, 그래도 앞으로 얼굴 부대끼며 지내야 할 길원들인데 정식으로 자기소개부터 할까? 우리 두식이, 자기소개 잘할 수 있지?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해 줄 수도 있고.”

회사에서와는 180도 다른 공세빈 때문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실수할 때마다 이걸 죽일까, 살려 둘까 하는 눈빛으로 날 보던 공세빈의 눈빛이 아직도 나에겐 선명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있는 공세빈은 그런 일은 깡그리 잊은 것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나는 오히려 그런 공세빈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애초에 나한테서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얼굴을 찌푸린 날 제외한 길원들이 비니를 선두로 저마다 앞다투어 소개를 시작했다.

“이름 공세빈, 나이 28세. 겜닉은 비니. 현재 계략 길드 길마 맡고 있고, 게임에서 도움이 필요하면 0505 비니비니로 연락 주면 언제든지 달려갑니다.”

“음흉한 놈,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기 생일 노출하는 것 좀 보게.”

“그런 의미로 생일 선물은 현물 말고, 게임 아이템으로 주면 베리 땡큐 감사하겠습니다.”

능청스러운 공세빈의 말에 날 제외한 길원들 모두가 낄낄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나 혼자 웃지 못하고 있을 때 자기소개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오랜만에 자기소개를 하려니 기분이 이상하네. 흠흠, 이름은 윤영원이라고 하고 나이는 29세. 닉네임은 무등산수박이고, 계략 길드 부길마를 맡고 있어. 앞으로 잘 부탁해!”

마지못해 공세빈을 보며 웃었던 좀 전과는 달리 영원 누나에게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하얀 피부와 동그란 눈, 그리고 컬이 들어간 긴 갈색머리가 누나의 청순한 외모와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나를 보며 생긋 미소 짓는 누나를 보고 있자니, 게임 속과 똑같이 누나의 친절한 성향이 느껴졌다.

이어 다음으로 우리 길드의 분위기 메이커인 큐띠의 소개가 이어졌다.

“내 이름은 장민우고, 나이는 또빈이랑 두식이랑 같은 28살, 게임 닉은 큐띠빠띠. 닉네임 그대로 우리 계략 길드에서 귀여움을 받고 있지.”

남성미가 물씬 느껴지는 단단한 턱선과 운동을 꽤 좋아하는 모양인지 건장한 신체에 바짝 깎은 헤어스타일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발언에 자리에 있던 길원들에게서 야유가 쏟아졌다.

“우우우우.”

“우웩.”

“하여튼 난 인기가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아무튼 다들 잘 부탁해.”

반응들은 다들 저래도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그 뒤로도 다른 길원들의 소개가 계속해서 진행되었는데, 아직까지는 길원들의 실명보다는 게임 닉네임이 더욱 와닿았다. 그러다 우리 중 가장 마지막에 가입한 꽃잎의 소개가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연호라고 하고요, 나이는 28살, 게임 닉네임은 연분홍빛꽃잎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나와 비슷한 체형을 가진 데다 같은 뉴비라는 점 때문에 다른 길원보다 정감이 갔다. 좀 더 일찍 알게 되었더라면 친하게 지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러지 못하니 아쉽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새 자기소개는 마지막에 다다라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두식이만 남았네.”

맞은편에 앉은 큐띠가 말하자 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물론 그중에 공세빈도 있었다. 공중에서 공세빈과 시선이 마주치자 순간 이곳이 카페에 있는 룸이 아닌 회사에 있는 회의실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발표를 할 때마다 매의 눈으로 노려보던 공세빈답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소개해 볼 테면 해 보라는 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저 거만한 표정. 치가 떨렸지만 주변인들의 시선에 결국 입을 열었다.

“……임연우. 28살이고, 닉네임은…… 곽두식입니다.”

마지못해 소개하며 내심 목소리를 걱정했지만, 다행히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어 한시름 놓았다.

“나랑 같은 회사, 같은 팀에 근무 중이기도 하고.”

내 소개 뒤로 이어진 놈의 말에 길원들에게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 나는 그냥 장난으로 한 소리였는데, 진짜 둘이 같은 회사 사람이었다니.”

“세상이 마냥 넓은 것 같아도 이럴 때 보면 또 좁아 보인단 말이야.”

“근데 연우는 실명보다 닉네임이 더 입에 착착 붙네. 연우야, 그냥 두식이라고 불러도 돼?”

길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비니의 정체가 공세빈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상, 더는 이 길드에 남아 있기가 꺼려졌다. 그래서 자기소개가 한창 이어질 때 나는 홀로 길드 탈퇴를 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로 인해 이곳에 있는 이들은 공세빈을 제외하고는 오늘 하루만 보고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들이니,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얼마 전에 공세빈 저놈이 아래 직원들 때문에 개고생했다고 했잖아. 여기에 그럼 두식이 잘못도 있었다는 거네?”

“으음,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두식아, 도대체 무슨 실수를 한 거야? 공세빈 저놈 저래 보여도 짜증이나 화는 잘 안 내는 놈인데.”

“……콜록콜록.”

갑자기 사레가 들려 룸이 떠나가라 기침을 하는 내 등을 하필이면 공세빈이 두드려 주었다. 느낌 탓이겠지만 어째 등을 두드리는 놈의 손길이 거친 듯도 했다.

“우리 두식이, 나 몰래 맛있는 거라도 먹고 있었어?”

나는 등을 두드리는 놈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쳐 낸 뒤 놈을 노려봤다. 지금은 빙글빙글 사람 좋은 척 웃고 있지만 나는 이곳에서 놈의 본모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공세빈이 짜증이나 화를 잘 안 낸다고? 지나가던 개가 비웃고도 남을 말이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공세빈을 떠올렸다. 놈은 나에게 잔소리를 할 때마다 회의실로 호출했다. 단둘만 남겨진 공간에서 놈은 내 실수를 요목조목 짚어 가며 빈정거리기 일쑤였다.

‘임연우 씨, 저랑 단둘이 얘기하는 걸 좋아하나 봅니다? 이렇게까지 실수하기도 힘들 텐데.’

‘임연우 씨, 그거 압니까? 이번 주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면담입니다. 이 정도면 가족이나 친구 얼굴보다 더 자주 보는 거 같지 않아요?’

대충 이런 식이었다. 둘이서 면담할 때만 얄밉게 빈정거리던 놈은 정확히 회의실 바깥을 벗어나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 부하 직원의 실수에도 너그러이 웃어넘길 줄 아는 사람으로 말이다.

같은 실수를 해도 단독 면담의 기회는 언제나 제게만 찾아왔다. 그걸 두고 사내에서는 공세빈 팀장이 임연우 사원을 아낀다는 걸로 소문이 났는데, 나는 억울할 뿐이었다. 이미 대외적으로 너그러운 팀장, 인성 좋은 팀장, 잘생긴 팀장 등 갖가지 좋은 수식어가 공세빈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는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친절한 미소를 띤 가면을 쓴 놈은 기침이 멎을 때까지 내 등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모습을 유독 뚫어져라 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와, 세빈이 엄청 다정하네? 방금 이 길드에 들어오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이없는 발언을 한 주인공은 바로 내 뒤를 이어 길드에 가입한 연분홍빛꽃잎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연호였다. 공세빈의 여우 짓에 홀딱 넘어간 연호는 놈을 향해 아낌없이 칭찬을 날렸다. 그걸 들은 공세빈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맴돌고 있었다.

‘유치하긴.’

내가 자기 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공세빈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한 다정 하지.”

“웩.”

“응? 두식이 왜 그래? 속 안 좋아?”

아뿔싸, 공세빈의 가증스러운 대답을 버티다 못한 위가 급격히 멀미를 호소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공세빈 앞에서 토하는 건 괜찮았으나, 다른 사람도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이번 만남이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텐데, 안 좋은 꼴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누가 물 좀 가져와!”

누군가의 외침에 서둘러 룸 안을 빠져나가려는 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만!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이대로 집에 가서 쉬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잠깐 사이에 얼굴 해쓱해진 거 봐.”

우연히 반응한 게 생각보다 괜찮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길원들 앞에서 내 실수담을 말하지 않으면서 꼴도 보기 싫은 공세빈이 있는 이 자리를 자연스럽게 벗어날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다들 미안. 아무래도 체한 것 같아. 속이 영 안 좋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얼른 가 봐.”

이제 작별 인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나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뒤를 돌았을 때였다. 등 뒤로 두 귀를 의심케 할 만한 말이 들려왔다.

“두식아,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까?”

삐걱거리는 고개를 간신히 돌려 다시 뒤를 보자 역시나 짐작대로 그곳에는 공세빈이 있었다.

“하긴, 가뜩이나 비실거리는 애 혼자 보내기 신경 쓰이긴 하네. 공세빈이 데려다주면 되겠다.”

나는 당장 문제의 발언을 한 놈을 노려보았다.

“어이구, 두식이 눈 보니까 퀭한 게 상태가 영 안 좋은 것 같네.”

“그렇지? 얘가 회사에서는 반짝반짝하더니 지금은 눈에 총기가 없네.”

내 눈을 가지고 저들끼리 떠드는 모양새에 나는 그저 기가 찼다. 공세빈이 우리 집에 오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나는 얼른 공세빈을 포함해 눈앞에 있는 모두에게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다고 말한 뒤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로 공세빈을 포함해 길원들이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에 1층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혹시나 공세빈이 따라오지는 않을까 싶어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지만, 다행히 카페 밖으로 나올 때까지 놈은 쫓아오지 않았다.

역시나 놈은 말만 친절했을 뿐, 나를 집까지 데려다줄 생각은 한 톨도 없었던 게 분명했다. 물론 나 또한 놈에게 그런 친절을 바란 건 아니었다.

그길로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섞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대충 씻고 나와 그대로 침대에 누워 모자란 잠을 청하려던 나는 생각을 바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던 계획을 실천할 생각이었다.

그건 바로 길드를 탈퇴한다는 계획이었다. 오늘 만난 길드원들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다들 친절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공세빈이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공세빈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쌀알 한 톨만큼도 없었고, 회사에서도 마주치는 놈을 게임에서까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정모에서 막 돌아오자마자 실천하기에는 눈치가 보였으나 지금이 아니면 실행에 옮기기가 힘들 것 같았다.

컴퓨터 로딩이 끝나자마자 아브니르에 접속했다. 게임에 접속해 길드 접속 인원을 살피니 역시나 현재 접속한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것까지 확인을 마친 나는 곧바로 길드 메뉴에 들어갔다. 그러자 정보 변경과 메시지 메뉴 아래로 길드 탈퇴 메뉴가 보였다. 해당 메뉴를 선택하기 전, 길마인 놈에게 쪽지를 보내기로 했다. 생각 같아서는 말없이 탈퇴하고 싶었지만, 주말을 제외한 날에는 어쩔 수 없이 놈의 얼굴을 봐야 했으므로.

좀 급작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집으로 오기까지 부지런히 생각해 두었던 핑계를 댔다. 반말로 쓰고 싶었지만, 회사에서 마주칠 놈을 생각해 마지막 예의를 다하기로 했다.

[갑작스럽겠지만, 집안에 급한 사정이 생겨 오랫동안 게임 접속이 힘들 것 같아 부득이하게 길드를 탈퇴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쪽지 내용대로 놈과의 멘토 기간이 끝나는 한 달이 될 때까지 아브니르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집안에 급한 사정이 생겼다는 건 거짓말이다.

놈에게 쪽지를 보낸 후 그제야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길드 탈퇴 메뉴를 클릭했다.

[‘계략’ 길드를 탈퇴하시겠습니까? YES/NO]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YES를 선택했다.

[‘곽두식’ 님이 ‘계략’ 길드를 탈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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