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김영석: 야, 게임 다운받음?]
[김영석: 서버는 도시섭 ㄱㄱ 직업은 가슴이 시키는 직업으로 알아서 하든가 ㅇㅇ]
[김영석: 형아 닉넴은 최강지갑전사 접속하면 친추 ㄱ]
게임 영업에 성공한 영석이 잔뜩 신이 났는지 연달아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게임 다운도 하지 않았건만 놈의 기세를 보면, 벌써 우리 둘은 게임에서 만나 함께 던전을 탐험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최강지갑전사?”
범상치 않은 닉네임에 몹쓸 호기심이 들었다.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확률은 아주 낮았으나 이미 내 손가락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 지갑전사? 맨날 쪼들린다고 하더니 이 게임에 네 월급 다 투자한 거? 노답일세ㅋㅋㅋㅋ]
[김영석: 어허, 난 시간을 돈으로 산 것뿐이라고 ㅋㅋ 그리고 월급 받은 거로 장비 한 부위씩 맞출 때마다 얼마나 짜릿한데 멀 모르네 ㅋㅋ]
[나: 난 되도록 돈 안 쓸 건데, 이거 돈 써야 되는 겜이야? 그럼 안 해야지]
[김영석: 돈 안 써도 됨 ㅇㅇ 무과금으로 해도 뭐 큰 이상은 없는데, 대신 시간이 좀 많이 걸리고 하드 콘텐츠 참여가 어렵다는 것뿐이지 머]
[나: 거 바깥 공기 좀 쐬고 여친도 좀 사귀고 그래]
[김영석: 이 게임이 내겐 여친이나 다름없어 ㅋㅋㅋ 겜 할 때마다 얼마나 설레는데 ㅎㅎ 데이트하는 기분이 든다니깤 ㅋㅋ]
“미친 새끼.”
얼른 접속하지 않고 뭐 하냐는 영석의 호들갑에 게임 런처를 실행시켰다. 이어서 게임을 저장할 장소를 지정해 주는 것까지 마치고 스타트 버튼을 클릭하자 다운로드가 시작되었다. 완료까지 소요 예상 시간이 1시간을 가리키는 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영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다운받는데 1시간 걸림. 먼저 겜 하고 있던가.]
[김영석: ㅇㅋㅇㅋ 안 그래도 먼저 하고 있음.]
게임이 다운로드 될 동안 딱히 할 게 없어진 나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직업 가이드 메뉴를 클릭했다. 영석에게 듣기로는 탱커, 딜러, 힐러, 음유 시인으로 직업이 나뉘어져 있다고 했으나, 아무래도 직접 눈으로 설명을 읽어 보고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각 직업 소개 글과 플레이 영상을 보면서 직업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다운로드가 완료될 때쯤에야 간신히 희망 직업을 결정할 수 있었다. 게임 시작 버튼을 클릭하고 잠시 기다리자, 화려한 영상과 함께 게임 대기 화면이 나타났다. 곧바로 캐릭터 생성하기를 클릭했다.
남자와 여자 성별을 고르라는 문구에 나는 남자를 선택한 뒤, 헤어 설정에 들어갔다. 다양한 헤어스타일이 있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에 드는 헤어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머리길래 이상한 브릿지가 다 들어가 있는 거야.”
2000년대 초반에나 유행했을 법한 브릿지와 헤어스타일에 기겁한 나는 그중에서 그나마 심플한 머리를 골랐다. 다음으로 이어진 얼굴 설정은 기본 커마로도 괜찮아 특별히 손을 대지 않은 채로 빠르게 넘어갔고, 직업까지 선택해 주자 마지막으로 닉네임 설정만이 남았다.
심플하고 깔끔하게 두 글자 닉네임으로 하고 싶었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닉네임이 없어 인터넷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게임 닉네임 두 글자 추천’을 검색창에 입력한 후 클릭하자 뜻이 좋은 순우리말 두 글자 닉네임을 포함해 다양한 결과가 나타났다.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단어를 닉네임 입력창에 입력한 후 중복 확인 버튼을 클릭하자 ‘생성 불가능한 닉네임입니다.’라는 문구가 나를 반겨 주었다.
하긴, 출시된 지 오래된 게임이었으니 어지간한 닉네임은 다 있겠지.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글자 닉네임을 도전해 봤으나 역시나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생성 불가능한 닉네임입니다.’ 문구를 계속 보고 있자니 점점 오기가 생겼다.
“……씨발,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나는 팔까지 걷어붙인 뒤 전투적인 자세로 두 글자 닉네임을 마구잡이로 입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게임인지 진짜 누가 봐도 말이 되지도 않는 닉네임마저 생성된 닉네임이라는 문구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터져 나왔다.
“뚫웩마저 있을 줄이야.”
뚫웩뿐만 아니라 닝뷰, 뷰븅, 뷁두, 를뷍 등을 조합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두 글자 닉네임은 포기하기로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닉네임 정리 기간 때 생성할걸.”
몇 달 전에 영석이 휴면 계정 정리에 들어가니 지금이야말로 닉네임을 선점하기에 딱 좋을 때라고 말해 주었으나 으레 쓸데없는 소리이겠거니 하고 무시했던 게 지금 와서야 후회가 됐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뚫웩은 주인을 만났는데.
초조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머리를 굴려 봤지만,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영석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나: 야, 나 닉네임 추천 좀.]
메시지를 보내고 5분이 지나도 영석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 뒤로 5분을 더 기다려 보았으나 여전히 답이 없어 나는 영석과의 통화를 시도했다. 한참 동안 통화 대기음만 들리다 끊어야 하나 싶을 때 영석이 전화를 받았다.
“야, 메시지 확인 안 해?”
-지금 던전 돌고 있어서 개 바쁜데 왜 전화했냐.
“닉네임 추천 좀 해 달라고.”
-일단 전화 끊어 봐라. 이것만 돌고 봐 줌.
“오키.”
그렇게 통화를 종료하고 10분쯤 흘렀을 때, 영석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영석: 이 겜 오래된 겜이라 어지간한 닉넴 다 있음 ㅇㅇ]
[나: 뚫웩도 있더라 ㅅㅂ]
뚫웩의 배신에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자꾸만 욕이 튀어나왔다.
[김영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
[나: 뭐 좋은 닉네임 없냐?]
[김영석: 넌 이 겜은 첨이니까 뉴비 들어간 닉네임 하나 하든가.]
[나: ㅅㅂ 쪽팔리게 뉴비인 거 광고하고 다니라고?]
[김영석: 이 겜 뉴비들한테 친절함. 걱정 ㄴㄴ해]
“그래 봤자 뉴비라고 만만하게 보겠지.”
영석의 말이 못마땅했으나 달리 떠오르는 것도 없어 현실에 수긍하기로 했다.
[나: 그냥 뉴비는 있을 거 아냐.]
[김영석: 당연하지. 레어 닉넴인데. 음…… 늅뉴비, 정신없는뉴비, 세계서열0위뉴비, 뜨거운뉴비 ㅇㄸ?]
[나: 아 ㅅㅂ 나 이 겜 안 해]
남은 진지한데 장난식으로 대꾸하는 영석이 못마땅해 빈정이 상했다.
[김영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ㅈㄴ 재밌네.]
“자기 닉네임 아니라고 막말하네.”
연신 대화창에서 ㅋㅋㅋㅋ을 남발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어 영석이 말해 준 닉네임을 차례대로 시도했다. 정신없는뉴비, 세계서열0위뉴비, 늅뉴비를 입력했으나 이미 생성된 닉네임이라는 익숙한 문구에 나는 큰 기대 없이 마지막 닉네임인 뜨거운뉴비를 입력했다.
<생성 불가능한 닉네임입니다.>
“역시나.”
뚫웩도 있는데 뜨거운뉴비가 없을 리 없었다. 이제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세 글자라도 좋으니 강렬하고 세 보이는 닉네임을 검색하던 중 ‘곽두식’이라는 닉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싶어 입력해 보니 생성이 가능하다는 창이 나타났다. 옳다구나 싶어 누가 가로채 가기 전에 얼른 캐릭터 생성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서버 선택만을 남겨 두고 영석에게 다시 메시지를 전송했다.
[나: 야, 서버 ㅇㄷ?]
[김영석: 루실라 서버 도시섭임. 무족권 여기 ㄱㄱ]
[나: ㅇㅋ]
“루실라, 루실라……. 씨발.”
이번에는 루실라 서버를 비롯한 몇 개의 서버 이름 옆으로 나타난 ‘캐릭터 생성 불가’ 문구에 발목을 잡혔다.
[나: 캐릭터 생성 불가라는데?]
[김영석: ㅇ? 아, 사람들이 도시섭으로만 몰려서 그런가. 그럼 일단 다른 섭 ㄱㄱ. 캐시샵에 서버 이동권 판매하니까 나중에 서버 열리면 오든가.]
적극적으로 영업할 때는 언제고, 게임을 다운받고 캐릭 생성 완료까지 앞두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다 잡은 물고기 취급이었다.
[나: 서버 이동권 네가 사 ㅅㅂ]
[김영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ㅋㅇㅋ 섭이 열리면 이동권 선물해 드림 ^0^]
영석에게서 서버 이동권을 받기로 약속받고 나서야 나는 수많은 서버 중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한 서버를 선택했다. 드디어 길고도 험난했던 캐릭터 생성이 완료됐다.
[앞으로 재생될 영상을 감상하시려면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충분히 시간 여유가 있으실 때 시청해 주세요. 지금 바로 영상을 감상하시겠습니까? YES/NO]
“뭐 얼마나 오래 걸리길래…….”
나는 별생각 없이 곧바로 YES를 클릭했다. 보다가 정 안 되면 스킵하면 되니까. 잠시 후 까맣던 화면이 점점 밝아지며 영상이 시작되었다.
[에어 왕국의 10번째 왕자로 태어난 로터스 왕자. 왕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형제들에게 암살당할 뻔한 로터스 왕자는 쫓기듯이 한 척의 낡은 배에 몸을 싣고 에어 왕국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다니던 중 로터스 왕자는 폭풍우를 만나 배가 좌초되며 바다에 빠지게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래로 가라앉으며 정신을 잃은 로터스 왕자. 그러다 이름 모를 섬에서 정신을 차리게 된다. 이것은 신이 이끌어 주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로터스 왕자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신을 향해 기도하는데…….]
“아, 재미도 없는데 그냥 스킵해야겠다.”
나는 마우스를 쥔 손을 움직여 SKIP 버튼을 찾았으나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ESC 키를 누르자 게임을 종료하겠느냐는 시스템 창만 나타났다.
“게임 종료했다가 다시 접속하면 알아서 스킵되겠지?”
나는 곧바로 게임을 종료한 후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서버를 선택하고, 접속할 캐릭터를 선택하자 눈앞에 자동으로 영상이 재생되었다.
[에어 왕국의 10번째 왕자로 태어난 로터스 왕자. 왕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형제들에게 암살당할 뻔한 로터스 왕자는 쫓기듯이 한 척의 낡은 배에 몸을 싣고 에어 왕국을 떠나게 된다.]
“……씨발.”
빌어먹게도 영상은 처음부터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괜히 종료했다가 시간만 낭비한 셈이었다.
무슨 놈의 게임이 이러냐고 당장 이 게임을 추천해 준 영석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영석은 눈앞에 없었다. 고로, 나는 화를 삼키며 할 수 없이 영상을 시청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누군지도 모를 신에게 기도하는 남자의 모습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졌다.
“이거 왜 이래? 렉인가?”
두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의 모습은 1분이 흐르고 2분이 흘러도 그대로였다. 나는 의자에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일으켜 키보드를 이것저것 눌러 보기도 하고, 모니터를 툭툭 건드려 보기도 했으나 화면 속 남자의 모습은 똑같았다.
헤드셋 너머로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하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한 15분쯤 흘렀을까, 드디어 화면 속 남자에게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다리에 쥐라도 난 건지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거 개그 물인가?”
책상 위에 던져둔 휴대폰을 집어 들어 인터넷 검색창에 게임의 이름인 ‘아브니르’를 검색해 봤다. 게임 정보에 개그 물이 아닌 MMORPG로 나와 있었다. 휴대폰에 정보를 검색하는 사이 영상 속 남자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어서 헤드셋으로 남자의 대사가 들려왔다.
‘앞으로 이곳을 내 새로운 왕국으로 삼겠어! 일단 주변을 둘러보자.’
그러고는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느릿한 걸음걸이로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이동했다.
“도대체 내 캐릭터는 언제 등장하는 거야.”
수풀 사이를 지나 한참을 섬 안쪽으로 이동한 남자는 한곳에 선 채로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놀랍도록 아무것도 없는 곳이구나. 하지만 이것도 다 신의 뜻이겠지.’
“지랄.”
‘아니! 저게 뭐지?’
헉헉거리던 남자가 갑자기 놀라더니 제자리에서 허리를 숙였다. 남자가 허리를 숙인 탓에 자연스레 화면의 시야도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간 내려가자 동그랗게 생긴 무언가가 바닥에 절반쯤 묻혀 있었다.
“저게 뭐야?”
[로터스 왕자는 이름 모를 섬에서 하얀 알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알에서 신비로운 종족이 태어났고, 이 사실을 매우 기뻐한 로터스 왕자는 알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드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드류? 드류라면 내가 고른 캐릭터 종족 말하는 건가?”
다양한 종족 중에 겉모습은 인간과 큰 차이가 없으면서도 예쁘게 생긴 ‘드류족’을 선택했더랬다. 대강 추측해 보자면 유저가 선택한 종족에 맞춰 스토리에 등장하는 이름도 변경되는 것 같았다. 계속되는 이야기에 어느새 푹 빠진 나는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섬 곳곳에 묻힌 알들을 모두 부화시켜 준 로터스 왕자는 섬의 이름을 ‘엘니아’라 명명하고 드류족을 포함해 정령과 요정 등 다양한 종족들과 함께 섬을 가꿔 나가게 된다. 세월이 흘러 어엿한 왕국으로 성장한 엘니아. 본래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던 로터스 왕이었지만, 그의 소식을 들은 형제가 엘니아를 빼앗으려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드류족을 포함해 여러 종족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허억, 헉. 이대로…… 헉……. 끝날 수는…….’
죽기 직전 간신히 성에서 벗어난 로터스 왕은 마지막으로 남은 드류족 알을 들고 성에서 떨어진 깊숙한 장소에 알을 묻는 데 성공하게 되고, 곧바로 뒤쫓아 온 형제의 칼에 목숨을 잃게 된다.
‘마지……막 드류……족…… 너만이…… 우리……. 큭, 희망…….’
한창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가 전환되며 모니터 화면이 캄캄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모니터 화면을 보는데, 헤드셋 너머로 똑똑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화면이 따라서 흔들거렸다. 두드리는 세기가 커질수록 흔들림도 세지더니 얼마 있지 않아 조금씩 금이 가며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장면에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화면이 점점 밝은 빛으로 가득 차더니 이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곽두식’ 님이 태어났습니다. 당신만이 ‘엘니아’ 왕국의 희망입니다. 왕국을 차지한 사악한 왕을 물리치고 왕국을 되찾으세요.>
“…….”
드디어 기다리던 내 캐릭터의 등장이었다.
* * *
바로 월드에 진입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화면이 밝아지고 보이는 곳은 튜토리얼 장소였다. 조금 귀찮았지만, 그래도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기 전에 튜토리얼 퀘스트를 통해 간단한 기본 조작을 익혀 두는 게 앞으로의 게임 라이프에 도움이 될 게 분명했기에 잠자코 시키는 대로 따랐다.
앞뒤 좌우로도 움직여 보고, 점프도 해 보고, 앉아도 보다가 마지막으로 내가 선택한 직업인 힐러의 기본 스킬까지 시키는 대로 운용해 보고, 그렇게 장장 30분을 또 보내고 나서야 드디어 튜토리얼 장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식 월드 진입을 기다리며 화면에 나타난 게임 팁을 읽고, 얼마간 기다리다 보니 화면이 전환되며 ‘로터’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나타났다.
“이 나이에 설레기는 또 오랜만이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을 앞으로 천천히 개척해 나갈 것을 생각하니 두근거렸다. 캐릭터가 마을에 진입하자마자 마을 촌장을 찾아가라는 퀘스트가 날아들었다. 과거에 게임을 좀 했던 짬밥으로 어렵지 않게 마을 지도를 확대했다. 지도를 확대해 보니 파란 느낌표로 표시된 곳이 있었다. 느낌표 아래로 ‘촌장의 집’이라는 문구 확인까지 마쳤다. 손쉽게 마을 촌장의 위치를 알아낸 내가 곧바로 그리로 이동하려는데 순간 이상함을 감지했다.
“근데 여기는 원래 이렇게 유저들이 많은 건가?”
처음에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똥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름 매끄럽게 움직이던 캐릭터가 시간이 흐를수록 부자연스럽게 움직이질 않나, 화면까지 버벅거리기 시작해서 주변을 돌아보니 유저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여기서 이벤트라도 하나?”
하루가 멀다 하고 신작 게임이 쏟아지는 요즘 시대에 출시한 지 꽤 된 오래된 게임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어쩐지 추천할 게 없어서 망겜을 추천해 주는 거냐고 내가 영석에게 물었을 때, 망겜 아니라고 바락바락 화를 내더니. 정말 망겜이 아니었나 보다.
앞으로 정을 붙일 게임이 어찌 됐든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 싶어 안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람이 늘어 갈수록 심해지는 렉 때문에 제대로 이동조차 할 수 없게 되자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키보드 샷건을 내려치기에는 내 손만 아플 게 뻔했기에 차선책으로 바닥에 있는 본체를 발로 툭툭 두드렸다.
“우리 잘 좀 해 보자. 어? 내가 너 얼마나 비싸게 주고 샀는지 알아?”
때는 2년 전, 컴알못과 귀차니즘의 콜라보로 대충 전자 매장에 판매하고 있는 걸로 덜컥 구매한 컴퓨터였다. 뒤늦게야 조립 컴퓨터 판매 사이트에 가면 해당 가격으로 훨씬 성능이 좋은 컴퓨터로 구매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나 어쩌겠는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나는 컴알못인 것을.
비록 이동은 더뎠지만, 그래도 용케 게임에서 튕기지는 않고 있어 그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조금씩 이동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바닥을 내려다보는데 빨간 카펫같이 생긴 게 끝도 없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카펫이 아니라 붉은 망토를 착용한 캐릭터들이었다.
“미친.”
마치 시체를 연상케 하는,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수많은 캐릭터를 보니 소름이 쫙 돋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비빌 수 있는 언덕인 영석에게 물어보려 통화를 시도했지만, 한참의 기다림 끝에 돌아온 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딱딱한 음성뿐이었다.
모험과 낭만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졸지에 19금 호러 게임이 된 장면에 당장 게임을 종료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내 앞에 등장한 ‘비니’라는 닉네임을 가진 캐릭터가 말없이 손짓하며 앞으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내가 따라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자 자리에 멈춰 서서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재차 손짓했다.
“설마…… 따라오라는 건가?”
짧은 고민 끝에 속는 셈치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내 캐릭터가 움직이자 앞에 있던 비니 캐릭터도 손짓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비니를 따라 걷다가 아무리 그래픽 덩어리라지만 다른 유저의 몸을 밟고 지나가는 게 신경 쓰여 캐릭터들을 피해 캐릭터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게 웬걸,
“미친 거 아냐?”
내 캐릭터가 자신들을 밟지 않고 걷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내 앞으로 드러누웠다. 한꺼번에 많은 캐릭터가 움직이자 컴퓨터가 버벅대는 사이 또 좀 전과 똑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쯤 되니 한 가지 확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일부러 밟아 달라는 뜻이구나.
“내가 못 밟을 줄 알고?”
기괴함 때문에 살짝 두려움에 떨던 과거는 까맣게 잊고 보란 듯이 바닥에 쓰러진 캐릭터들을 밟고 지나갔다. 이미 내가 밟고 지나온 길에 누워 있던 유저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내 앞으로 자리 잡고 눕는 모습에 기가 막혀 헛웃음이 흘러나왔지만, 꿋꿋이 무시하고 이동한 끝에 마침내 첫 퀘스트 장소인 마을 촌장 NPC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스피커 너머로 ‘빵’ 하고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더니 여러 유저들의 말풍선으로 화면이 가득 채워졌다. 내용을 살펴보니 환영한다는 말과 자신은 알 수 없는 대화들로 가득했는데, 워낙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져 내용들을 다 살펴보기가 힘들었다.
동시에 현란한 스킬과 탈것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눈이 부시는 건 둘째 치고, 금방이라도 튕길 것처럼 화면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 광경이 마치 우리 집 컴퓨터가 ‘차라리 날 죽여줘!’ 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요란한 소음을 뚫고 익숙한 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영석에게 온 연락이었다.
“야! 김영석! 왜 전화를 안 받아!”
-쏘리쏘리. 일일 퀘스트 때문에 던전 도느라고 전화 못 받았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게 다 뭔데?”
-그게 뭔 소리야?
나는 한참을 영석에게 조금 전 겪은 일을 설명했다. 입 안이 바짝 마를 정도로 열띤 설명을 마치고 나니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기 전인데도 벌써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의자에 지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통화를 이어 갔다.
“그래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 건데? 사람들이 왜 저러는 거냐고.”
-아? 그거. 뉴비 환영식.
“뉴비 환영식?”
-어, 이 게임이 워낙 오래된 게임이라 진입 장벽이 높기도 하고, 요즘은 MMORPG 게임 자체가 별로 인기가 없잖아. 그래서 뉴비가 엄청 귀하거든. 그리고 뉴비 도와주면서 자기들도 이득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환영 한번 엄청 열렬하네. 게임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너한테 바로 물어볼 거니까 전화나 제때 받아.”
모르는 게 있으면 당장 물어볼 테니 제때제때 전화 잘 받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영석과 통화하는 사이에도 유저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 캐릭터를 향해 열심히 환영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런 게 한국인의 정인 건가 싶기도 하고 오만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정신없는 분위기 속 촌장 NPC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한 마을을 대표하는 촌장답게 둥글둥글한 체형에 온화한 인상이라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 온 걸 환영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마을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 앞으로의 여행을 축복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첫 퀘스트를 완료하자, 곧바로 다음 퀘스트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마을 밖에 있는 몬스터를 종류별로 각 5마리씩 잡아 오라는 퀘스트였다.
“힐러가 무슨 공격을 해?”
요즘 힐러들은 공격도 해야 하나 싶어 단축키에 자동으로 등록된 스킬들을 살펴보니, 힐 스킬 말고도 공격 스킬이 따로 있었다. 스킬을 확인하고 곧장 퀘스트 장소를 향해 이동하려는데, 처음 보는 유저가 다짜고짜 거래를 걸어왔다.
처음에는 해당 유저가 잘못 눌렀겠거니 싶어 바로 거절했다. 그러나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저마다 거래를 걸어오는 탓에 거절 버튼을 누르기도 점점 힘들었다. 거래를 해 오는 거로 보아선 나에게 무언가를 주려는 것 같았다. 거래 신청을 승낙할지 거절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여러 유저들 중에서도 특히 가장 눈에 띄는 닉네임이 있었으니.
바로 이곳까지 손짓으로 나를 안내해 준 ‘비니’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저였다.
“……비니?”
순간 머릿속으로 눈앞에 보이는 닉네임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설마.”
이 와중에도 비니는 자기가 칠전팔기 오뚝이라도 되는지 끊임없이 거래를 걸어오는 탓에 나중에는 거래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비니 님이 거래 신청을 요청했습니다]
[비니 님이 거래 신청을 요청했습니다]
[비니 님이 거래 신청을 요청했습니다]
“왜 이리 질척거려, 진짜. 좀비가 따로 없네.”
좀비처럼 포기를 모르고 달려드는 비니와 다른 유저들을 피해 쫓겨나듯이 황급히 마을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런 후, 제발 여기까지 쫓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 발자국 뗀 순간, 내 캐릭터가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어? 뭐야?”
<‘곽두식’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마을로 돌아가시겠습니까? YES/NO>
몬스터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사망했다고 하니 일단 YES를 눌러 마을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마을로 돌아가 살아나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비니가 또다시 거래를 걸어왔다.
차라리 영석에게서 템을 뜯어내면 뜯어냈지, 모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기에는 좀 그런 것 같아서 채팅 창을 통해 거래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주변에 있는 다른 유저들이 끊임없이 저희들끼리 말하는 바람에 내가 말한 채팅은 순식간에 묻혀 버렸다.
할 수 없이 아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방법밖에 없겠다 싶어 앞만 보고 달렸다. 얼마 후 마을 밖, 몬스터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 씨발? 저 새끼 뭔데!”
내 캐릭터가 해당 맵에 진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빕신’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저가 커다란 검을 들고 가차 없이 내 캐릭터를 공격했다.
<‘곽두식’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마을로 돌아가시겠습니까? YES/NO>
비록 내 캐릭터는 사망했지만, 채팅만은 할 수 있었기에 나는 당장 놈을 향해 따졌다.
[일반]곽두식: ㅅㅂ 이 **야 지금 머하자는 건데 ***야!!!
본래 내용은 ㅅㅂ 이 새끼야, 지금 머하자는 건데 개새끼야!!! 였지만, 별 표시로 순화되는 바람에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
[일반]피빕신: 뉴비 죽이기 개꿀~~~~~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냐?”
머리끝까지 열이 받아 채팅으로 다음 욕설을 쏘아붙이려는 순간, 내 시체 위에서 춤추고 있던 놈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갑자기 픽 쓰러졌다.
“뭐야?”
마우스를 사용해 주변을 둘러보자 언제 왔는지 비니가 있었다.
[일반]피빕신: 아 ㅅㅂ 머야 ㅡㅡ 아 ㅈㄴ 킹받네
[일반]비니: 꼬우면 일어나서 덤벼
[일반]피빕신: ㅅㅂ
나와는 달리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부활한 피빕신이 곧바로 비니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여전히 바닥에 누운 채로 둘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제발, 비니 님이 이겼으면.”
어느새 내 안에서 귀찮은 좀비 같은 새끼에서 비니 님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화려한 검을 들고 비니를 향해 피빕신이 달려들었지만, 비니의 공격 한 번에 놈은 또다시 픽 쓰러졌다. 곧바로 악에 받친 놈이 채팅 창을 패륜이 가득한 욕설로 물들였다.
[일반]비니: ㅇㅇ 신고 완료
신고했다는 비니의 말에 놈은 빠르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부활하러 마을로 다시 돌아가기 전, 내 대신 복수를 해 준 비니에게 감사 인사를 전달했다.
[일반]곽두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남긴 후 마을로 부활하려는데, 다음으로 이어진 비니의 말에 눈을 의심했다.
[일반]비니: 그러게 내가 거래 걸 때 진즉에 받지 그랬어요?
“뭐래, 이 새끼가.”
그러나 채팅 창으로는 뇌를 한번 거친 까닭에 제법 순화된 단어들을 입력했다. 어쨌든 날 도와준 사람이니까.
[일반]곽두식: 네?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일반]비니: 이 겜 아예 첨 하는 거예요?
[일반]곽두식: 첨 하는 건데요.
[일반]비니: 제가 지금 힐러로 직변해서 두식 님 살려 드릴 테니까 부활하자마자 환경 설정 들어가서 PVP 전투 허용 체크 해제부터 하세요. 이 겜이 기본적으로 뉴비들한테 친절한 편이긴 하지만, 가끔가다 저런 ** 새끼도 있으니까 만렙까지 육성하기 전에는 웬만하면 피빕은 꺼두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요
[일반]곽두식: 아……, 네네;;
알겠다는 대답을 하자마자 죽어 있는 내 캐릭터 앞에서 비니가 힐러로 직변을 했다. 어떻게 알았느냐면, 검과 방패를 들고 있던 캐릭터가 나뭇잎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어째 비니의 옷차림이 이상했다.
“근데 왜 저렇게 헐벗고 있어?”
비니의 캐릭도 나와 같은 드류족이었는데, 기본 옷을 입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그의 캐릭터는 상의에는 하와이안 목걸이를 연상케 하는 꽃이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만 한 게 끝이었고, 하의는 삼각팬티 하나만 입은 게 다였다. 그러나 반전이 하나 있었으니, 헐벗은 옷차림과는 다르게 캐릭터 외형은 그야말로 존예 존멋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비니는 장발이었는데 머리카락 색이 촌스러운 노랑이 아니고 연한 금발이라 햇빛에 머리칼이 빛나는 게 무척이나 예뻤다. 금발에 녹안이라니. 이 조합은 마치 잘생김의 공식 조합이 아니던가. 게다가 피부색도 하얗게 반짝반짝 빛나는 외모였다. 28살이나 먹어 놓고 게임 캐릭터에 설레는 건 좀 우스웠지만, 비니라는 유저의 캐릭터 외형만큼은 몹시 훌륭했다.
“저렇게 열심히 커마해 놓고 왜 저런 옷을 입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옷차림은 꼴도 보기 싫었지만, 외형만큼은 내 취향이었기에 나중에 어느 정도 게임이 손에 익으면 슬쩍 따라 해 보려 열심히 마우스 휠을 굴려 화면을 확대한 뒤, 비니 캐릭터가 잘 보이도록 스크린 샷을 찍었다. 자고로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자캐가 예쁘고 멋있어야 키울 맛이 나는 법.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비니 캐릭터는 열심히 부활을 시도 중인지 지팡이를 바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시스템 창이 등장했다.
<‘비니’ 님의 부활을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나는 망설임 없이 YES를 선택했다. 캐릭터가 사망한 상태에는 채팅 말고는 다른 시스템 창을 건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활하자마자 비니가 알려 준 대로 시스템 창에 들어가 피빕 허용에 체크되어 있는 걸 해제했다.
[일반]곽두식: 감사합니다 ㅠㅠㅠㅜㅜ
[일반]비니: 피빕 설정했어요?
[일반]곽두식: 네, 알려 주신 대로 했어요
[일반]비니: 그럼 이거 받아요 ㅋㅋㅋ 이번에는 받겠지 ㅋㅋㅋㅋ
<‘비니’ 님이 거래를 요청하였습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이번에는 정말 거절하기가 애매한 상황이라 할 수 없이 YES를 클릭하자 곧바로 거래 창이 화면에 등장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부활석을 포함해 거래 창에 이것저것 내가 알 수 없는 아이템을 하나둘 올리는 것도 모자라, 무려 1,000,000 Gold나 되는 큰돈을 올리는 걸 마지막으로 거래 완료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일반]곽두식: 저…… 돈 너무 많이 주시는 거 아니에요?
[일반]비니: 이 돈 1시간도 안 돼서 벌어요 ㅋㅋㅋ 그냥 줄 때 받으세요
“알고 보니 부자였나?”
하도 헐벗고 있길래 옷 살 돈이 없어 벗고 다닌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걸까. 새삼스러운 마음에 다시 비니 캐릭터의 옷차림을 살펴보니 부티가 나는 것 같기도 한 게……. 씨발, 헐벗은 옷차림에 어떻게든 부티를 느끼려 노력하는 내 모습이 참으로 없어 보여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뉴비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 한 금액이라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준다는데 거절하기도 우스워 눈 딱 감고 거래 승인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문구와 함께 비니가 건네준 아이템과 돈이 고스란히 내 인벤으로 들어왔다. 게임이 설치되는 동안 미리 공부해 뒀던 대로 단축키 I를 눌러 인벤토리 확인에 들어갔다.
“부활석, 생명력 500포션, 마나 500포션, 마을 귀환서, 롤로의 쿠키…….”
부활석은 말 그대로 캐릭터가 사망했을 때 마을이 아닌 이 부활석을 사용하면 제자리에서 부활을 가능하게 해 주는 아이템이었고, 마을 귀환서는 마을로 곧바로 귀환하게 해 주는 스크롤, 그리고 롤로의 쿠키는 한 번 먹을 때마다 30분 동안 마력을 일시적으로 높여 주는 음식이었다.
이어서 비니가 부활석 존재를 아느냐는 말을 시작으로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 갔다. 부활석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자원 하나하나가 소중한 지금 상태에선 최대한 아껴 뒀다 사용하고 싶어 마을 부활을 고집했던 거였다. 이제 슬슬 퀘스트하러 떠나고 싶은데……. 상황을 보니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눈치를 보다 적당한 타이밍에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일반]곽두식: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그럼 저는 이만 ㅎㅎ;
도움은 다 받았으니 이제 각자 갈 길을 가야 할 시간이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마음이 조급했다. 그래도 이왕 게임에 들어온 거 몬스터는 한번 잡아 보고 게임을 꺼야 하지 않겠는가.
지도에서 내가 잡아야 할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위치가 반짝였다. 그리로 이동하려는데 또다시 채팅 창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일반]비니: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시면 멘토 시스템 받아 보는 게 어때요?
[일반]곽두식: 멘토요? 그게 뭔데요?
[일반]비니: 두식 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를 저 같은 고인물이 멘토가 되어서 한 달간 게임 시스템에 대해 알려 주는 시스템이에요. 보다시피 이 겜이 워낙 고인 게임이다 보니 초반에 뉴비들 진입 장벽이 꽤 높거든요
[일반]곽두식: 아, 정말요?
퀘스트에 나와 있는 몬스터만 잡고 게임을 종료할 생각이라 영혼 없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영혼 없는 대답에도 비니는 쓸데없이 친절했다.
[일반]비니: 멘토 매칭 받으시려면 마을에 있는 게시판으로 가야 하는데,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아씨, 귀찮은데. 그나저나 오늘 처음 만났는데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건데?”
도움은 고마웠으나 이제는 살짝 귀찮았다. 그때 조용히 잠자고 있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얼른 확인해 보니 영석이한테 걸려 온 전화였다.
“왜 전화했냐.”
-내가 깜빡하고 말 안 해 준 게 있어서. 이 겜에 멘토 시스템이라고 있거든? 넌 이 겜 처음 하는 거니까 멘토 시스템을 이용하면 좋을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어떤 고인물 유저가 나한테 멘토 시스템 얘기해 주더라.”
-오? 그래? 그럼 그 유저 따라가면 되겠네.
“아니, 난 혼자 다니고 싶은데 계속 옆에 달라붙어서 귀찮아 죽겠는데.”
-너 직업 어떤 걸로 했는데?
“힐러.”
-힐러면 솔플하기 힘들지. 어쨌든 마을에 가면 멘토 게시판 있으니까 이용해 봐, 한번. 내가 너희 섭 가서 알려 주고 싶은데, 길원들이 던전 가자고 해서 빠질 수가 없네. 모르는 거 있으면 전화하고.
“이 새끼는 지가 게임 같이하자 해 놓고 막상 내가 하니까, 이제 잡은 물고기라고 신경 안 쓰는 거 되게 거슬리네.”
-쏘리쏘리. 진짜 중요한 던전이라 빠질 수가 없어.
“끊어. 이 새끼야.”
통화를 종료하고 나는 곧바로 채팅 창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내가 영석과 통화하고 있는 사이, 아직도 내 캐릭터 옆에서 서성거리는 비니가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말뿐이랴. 내가 알지 못하는 감정 표현까지 써 가며 내 캐릭터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일반]곽두식: 죄송한데 이만 게임 나가 봐야 해서요
[일반]비니: 그래요? 설마 내가 귀찮아서 도망가려는 거 아니죠?
“미친 새끼. 어떻게 알았지?”
이어서 비니 캐릭터가 내 캐릭터 앞에서 등을 돌리는 포즈를 취하더니 스피커 너머로 ‘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짐작하건대 삐쳤다는 감정 표현인 걸로 추정됐다.
사실 그대로 ‘응, 네가 귀찮아서 도망가는 거야.’라고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예의란 예의는 모두 끌어모아 손가락을 움직였다.
[일반]곽두식: 절대 아니고요,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하는 거 마ㅈ아여
[일반]비니: 그럼 어쩔 수 없죠. 그 대신 친추 받아 줘요 ㅇㅋ?
“끈질기네, 정말.”
그러나 도움 받은 게 있어 싫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결국 비니와 친구까지 맺고 나서야 간신히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을 귀환서를 사용해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내 상태를 당장 오프라인으로 변경했다. 이렇게 설정해 두면 상대방에게는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오프라인 상태로 보였다. 비니의 위치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나를 따라 마을로 오지 않고 해당 맵에 그대로 있는 게 보였다.
“아씨, 몬스터 잡아야 하는데.”
어떡할까 하다가 일단 이곳에 있으면 비니에게 들통날 확률이 높으니, 채널 이동부터 한 다음에 이왕 마을로 온 거 멘토를 매칭하기로 했다. 꼴을 보아하니 영석은 자기 섭에서 노느라 바빠서 별 도움도 안 될 게 뻔했고, 모르는 게 나올 때마다 매번 검색하는 것도 번거로우니 멘토 시스템을 이용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멘토로서 비니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냥 좀 뭐랄까…… 되게 부담스러웠다.
“15채널로 가 볼까.”
7채널에서 15채널을 선택해 채널을 이동한 뒤 마을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 멘토라고 쓰인 게시판을 발견하고 그리로 이동했다.
게시판을 클릭하자 멘토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나타났다.
※멘토 시스템이란?
게임 적응이 힘든 신규 유저를 위해 기존 유저가 한 달 동안 게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입니다. 신규 유저와 멘토 유저는 1:1 매칭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주의하실 점은 한번 멘토가 정해지면 도중에 해제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생각하셔서 신청해 주세요.
해당 시스템을 이용하는 신규 유저에게는 ‘(멘토 유저 닉네임)의 관심을 받는 (신규 유저 닉네임)’ 타이틀을 얻게 되며, 반대로 멘토에게는 ‘(신규 유저 닉네임)의 멘토 (멘토 유저 닉네임)’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해당 타이틀의 효과로는 스탯 증가가 있으며 정확히 한 달간 사용이 가능, 해당 기간이 지난 후에는 타이틀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스탯은 삭제가 됩니다.
이 밖에도 멘토와 신규 유저에게는 서로의 위치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텔레포트 귀환서를 별도로 드립니다. 이 역시 한 달 동안 사용이 가능합니다. 지금 바로 멘토를 매칭 받으시겠습니까? YES/NO
기나긴 설명을 대충 흐린 눈으로 넘긴 후 YES를 선택했다. 그러자 멘토를 찾는 중……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더니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멘토와 매칭되었다는 문구와 함께 당장 멘토 곁으로 이동하겠냐는 질문에 승낙했다.
“한 달 동안 도움 받을 사인데 인사는 해야겠지?”
멘토가 있는 7채널로 이동한다는 문구와 함께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다가 다시 밝아졌다. 그런데 눈앞에 등장한 장소는 처음 보는 장소가 아니었다.
“여기는 아까 왔던 곳인데?”
조금 전 몬스터를 잡으러 왔다가 자꾸만 귀찮게 달라붙는 비니를 간신히 떼어 놓고 헤어진 곳이었다. 잠깐 있었다고 그새 눈에 익은 장소를 반갑게 보고 있을 때였다.
[일반]비니: 하 ㅋ
[일반]비니: ** 어이없네 ㅋㅋㅋ
“뭐야, 지금 나한테 욕한 거야?”
채팅 창에 올라온 **를 보고 기가 막혔다.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왜 저놈한테 욕을 먹어야 하지? 그리고 누구는 뭐 욕을 못 하는 줄 아나? 당장 욕 배틀에 참여하려는 순간 비니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일반]비니: 두식 님 저한테 ㄱㅜ라 쳐서 기분 좋았어요?
* * *
친구 시스템에 대해서는 이전에 영석에게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길드에서 귀찮게 따라붙는 유저가 한 명 있다며, 그 사람을 피한다고 계속 오프라인으로 해 두는 바람에 길원들이 자기가 게임을 접은 줄 안다면서 몹시 억울한 어조로 내게 토로한 적이 있었다.
영석의 말에 따르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상태로 변경해 두면 자신을 친구 추가한 다른 유저의 친구 창에는 게임을 종료한 것처럼 나타난다고 했다. 회사에서 마주칠 때마다 하소연해서 다른 게임 시스템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 있게 해당 방법을 시도했건만, 이렇게 지독히 엇나갈 줄이야.
지금도 채팅 창으로 왜 자기에게 거짓말을 했느냐, 내가 무슨 전염병이라도 있어서 나를 피하냐, 도와준 사람을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는 거냐, 등등 쉴 새 없이 채팅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탓에 주변을 지나가던 다른 유저가 무슨 일이냐며 관심을 기울이기까지 하는 장면에 식겁한 나는 다급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일반]곽두식: 죄송합니다 ㅜㅠ 그냥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랬어요 ㅠㅜㅜ 절대 비니 님이 싫다는 건 아닙니다 ㅠㅠ
[일반]비니: 그럼 솔직하게 말을 했어야죠. 도와주겠다는 사람 ㅂㅅ 만드니까 기분 좋아요?
[일반]곽두식: 진짜 죄송합니다 ㅠㅠㅠㅜㅜㅜ
그러나 계속되는 사과에도 한번 감정이 상한 비니는 좀처럼 화를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나지만, 거듭되는 사과에도 여전히 툴툴거리기 바쁜 놈을 보니 점점 감정이 상했다.
“아, 진짜. 내가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니고.”
그래, 자기를 피한 게 들통났으니 기분은 충분히 나쁠 수 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사과까지 했는데도 계속 저러니, 나도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 진짜. 이렇게까지 하면서 게임을 해야 하나?
“서버 옮길까.”
해당 캐릭터로는 멘토를 매칭한 것 말고는 별달리 한 게 없어 캐릭터를 갈아타려면 지금이 딱 적기였다.
그대로 빠르게 로그아웃을 하려다가 아직도 섭섭하다고 토로하고 있는 놈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남기기로 했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일반]곽두식: 도와준 건 고마운데 1절만 해야지 ㅋㅋㅋ ㅈ같아서 진짜 ㅋㅋㅋ 뉴비 좀 도와줬다고 유세 부리지 마세요 ㅋㅋㅋㅋ 겜만 하지 말고 현생도 좀 살고요 ㅇ? 그럼 이만 ㅃㅇ~
놈의 채팅이 올라오기 전에 재빨리 로그아웃 버튼을 누른 나는 다시 게임 대기 화면으로 돌아와 다른 서버를 선택했다. 좀 전과 똑같이 종족과 직업을 선택하고 커마까지 간단히 만져 준 뒤, 대망의 닉네임 입력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닉네임 입력창에 짧은 사이 정이 듬뿍 든 곽두식을 입력하자 역시나 생성이 가능하다는 창이 나타났다. 같은 닉네임을 했다가 놈이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이 생각은 5초도 채 지나지 않아 말끔히 사라졌다.
“서버가 이렇게 많은데, 설마.”
현재 이 게임에 있는 서버만 해도 총 10개가 넘었다. 게다가 비니는 비록 옷차림은 정신 상태를 의심케 할 만큼 다소 이상했으나, 부캐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성하기 힘든 두 글자 닉네임이니 본캐일 가능성이 컸다. 본캐인 만큼 온갖 정성을 쏟아 캐릭터를 육성했을 테니 나를 따라 다른 서버로 올 확률도 현저히 낮아 보였다.
아무리 캐시 숍에서 서버 이동권을 판매하고 있다지만 가격만 해도 현금 2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는데, 그렇게 돈을 써 가면서 오늘 처음 만난 뉴비인 날 따라올 확률은? 당연히 0%였다.
“좋아. 이대로 가자.”
곽두식을 입력하고 확인 버튼을 클릭하자 아까 봤던 영상이 다시 재생되었다. 스토리를 이미 확인하기도 했고,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영상이라 나는 때마침 출출해져 주방으로 가 빠르게 컵라면 조리에 들어갔다.
즐겨 먹는 컵라면 뚜껑을 열고 함께 동봉된 라면 스프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런 다음 뜨거운 물을 선에 맞춰 붓고 일회용 젓가락과 컵라면을 들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왔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자리에 앉자마자 지루했던 영상이 딱 맞춰 끝이 났다.
컵라면이 익을 때까지만 잠깐 게임을 하기로 하고 로터 마을에 들어서자, 역시나 유저들이 나를 격하게 환영해 주었다. 부디 오래오래 게임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들 뒤로 이번에는 거래 신청이 아닌 길드 가입 신청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심지어 채팅 창으로는 서로 자기네들 길드에 오라는 이야기들 말고도 저들끼리 서로의 길드를 욕하는 채팅까지 이어졌다.
길드 가입에 대해선 아직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마우스를 바쁘게 움직여 들어온 신청 알림을 모조리 거절하고 빠르게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다 아차 싶었다.
“이번에는 꼭 꺼야지.”
비니가 알려 준 대로 마을에서 벗어나기 전 PVP 허용에 체크 해제를 한 뒤, 조금 전 잡지 못했던 몬스터를 잡으러 이동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Lv.1 몬스터를 발견하고 단축 창에 등록된 스킬을 사용하려 단축키를 눌러 스킬을 시전하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유저가 눈앞에 있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 탓에 열심히 시전 중이던 스킬이 강제로 중지되었다.
아무리 Lv.1 쪼렙 몬스터라도 나처럼 갓 게임을 시작한 뉴비는 절대 한 번에 죽일 수 없다. 고로, 이런 비매너 짓을 한 유저는 뉴비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뉴비들 상대로 PVP 거는 병신에 이어서 이제는 일부러 뉴비가 퀘스트를 진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새끼가 도대체 어떤 놈인가 싶어 닉네임을 확인하는 순간,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신의 경지에 오른> 비니
“서, 설마…… 같은 놈은 아니겠지.”
나는 황급히 못 본 척 어색하게 캐릭터를 움직여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모니터 뒤에 있는 나는 몹시 당황한 상태였지만, 게임 속 내 캐릭터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비니를 지나쳤다. 제발 따라오지 마라. 제발 그냥 갈 길 가, 제발.
그러나 간절한 내 바람과는 다르게 비니는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러고는 한술 더 뜨듯이 채팅 창으로 본인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어필하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일반]비니: 두식 님, 여기서 또 만나네요? 그사이 저 잊은 거 아니죠? 저 에메르 섭 비니에요:)
처음에는 채팅 창을 못 본 척 말없이 앞으로 캐릭터를 전진시켰다. 그러나 역시나 놈은 끈질겼다.
[일반]비니: 두식 님, 지금 어디 가요? 두식 님이 잡을 몬스터는 여기 있잖아요 ㅋ
[일반]비니: 캐릭터 움직일 손가락은 있고 채팅 입력할 손가락은 없어요? ㅋㅋ
[일반]비니: 두식 님~~~~ 두식 님~~~~~ 아까 저한테 욕은 잘하시더니, 왜 지금은 암말도 안 해요? 저한테 ㅈ 같다고 했잖아요
비니는 지치지도 않고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하는 꼴을 보니 내가 제대로 상대를 해 주기 전까지는 자리를 뜰 기세가 아니었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줄 알고 마지막에 그렇게 욕을 날린 거라 지금 상황이 머쓱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고민 끝에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작전에 들어가기로 했다.
[일반]곽두식: 죄송한데 혹시 다른 분이랑 헷갈리신 거 아니세요?
[일반]비니: 제가 두식 님을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요 섭섭해요 저 ㅠㅠ
[일반]곽두식: 아니 진짜 님 첨 본다니까요;
[일반]비니: 거짓말 받아 주는 것도 이제 슬슬 지치니까 이제 그만 순순히 자백하시죠?
[일반]곽두식: 진짜 님 모른다니까요!!!
“그만 좀 가라!!!”
그러나 비니는 자신이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걸 드러내고 싶은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일반]비니: 진짜 눈앞에서 욕설을 그렇게 들었는데도 좋은 말로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ㅋ 에메르 섭 곽두식이랑 종족부터 시작해서 커마에 직업까지 존똑인데 내가 **도 아니고 응? 두식 님 제가 진짜 **인 줄 알아요?
“언제 남의 커마까지 훔쳐본 거야? 음흉한 놈.”
조금 전 자신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다며 비니의 커마를 따라 하고 말 거라는 다짐은 까맣게 잊은 채로 중얼거렸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
한번 모른 척하기 시작했으니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모른 척할 셈이었다. 계속해서 모른다고 시치미를 뚝 떼자 갑자기 비니의 태도가 달라졌다.
[일반]비니: 흐응 그렇게 나온다 이거죠? 알았어요 ㅋㅋ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마세요 ㅋㅋ 그럼 다음에 또 봐요 ^ㅇ^
“후회는 무슨. 끝까지 허세 부리기는.”
저 말을 끝으로 비니는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이미 놈과 입씨름을 한 탓에 더는 게임을 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게임을 종료하고 나니 그제야 잊고 있었던 컵라면의 존재가 뒤늦게 떠올랐다. 황급히 확인해 보니, 이미 라면은 불어 터질 대로 불어서 국물이라고는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가난한 자취생으로서 음식을 버린다는 건 생각도 해 보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없이 불어 터진 라면을 먹으며 남은 불금을 보냈다.
* * *
다음 날, 주말의 여유를 한껏 느끼며 느지막한 시간에 기상한 나는 대충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 후 다시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만 해도 게임에 대한 존재를 잊고 있었으나, 영석에게서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냐는 메시지에 그제야 게임 생각이 났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영석에게 어제 만난 또라이에 대한 일화를 털어놓고 싶었지만, 금방 끝날 이야기가 아니기도 했고, 평화로운 주말을 또라이 때문에 더는 열 올리기도 싫었다. 돌아오는 월요일, 점심시간에 영석에게 이야기하기로 하고 대기 화면에 접속했다.
제일 처음 캐릭터를 생성했던 에메르 서버와 또라이 같은 비니를 피해 두 번째로 캐릭터를 생성했던 헤르오 서버 사이에서 짧은 고민을 하다 헤르오 서버를 선택했다. 그놈과 멘토로 맺어진 에메르 서버에는 두 번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 이따 에메르 서버에 있는 곽두식 캐릭터를 삭제하기로 하고 접속을 하는데, 눈앞으로 새로운 장소가 펼쳐졌다.
새로운 장소도 장소였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뉴비다운 기본 옷을 입고 있던 캐릭터는 마치 죄수복을 연상케 하는 옷을 입고 있었다.
도대체 내 캐릭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어리둥절하던 차, 화면 중앙으로 눈꼬리가 하늘 끝까지 올라간 캐릭터와 함께 붉은 문구가 등장했다.
‘죄수 21189번! 얼른 광석을 캐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죄수 21189번? 그게 뭔데?”
그와 동시에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확인에 들어갔고, 퀘스트의 내용은 이러했다.
개과천선!
곽두식 님은 20xx. xx. xx일 PM:10:15분경 유저를 향한 무분별한 욕설로 인해 비매너 유저로 신고가 되었습니다. 운영 정책에 따라 곽두식 님은 ‘개과천선’ 퀘스트를 완료하기까지 해당 장소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해당 퀘스트를 통해 잘못한 점을 반성하시고 매너 있는 유저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
-광석 1,000개 캐기 (0/1000)
“내가 비매너 유저라고?”
어제 게임을 막 시작한 내가 비매너로 신고당할 일이 뭐가 있나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가다 유력한 용의자가 떠올랐다.
“씨발……, 비니 그놈 짓이구나.”
스피커로 꽝꽝대는 소리가 뭔가 싶었더니 광석 캐는 소리였나 보다. 그제야 화면을 전환하니 내 캐릭터 양옆으로 부지런히 광석을 캐는 유저들이 보였다. 닉네임이 하나같이 adsvsaw, bvxcww 같은 이질적인 걸 보니, 말로만 듣던 매크로 캐릭터인 것 같았다. 매크로 신고를 당해 여기에 왔으면서 광석 캐는 것조차 매크로를 돌리는지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냥 다른 섭 갈까.”
광석 1,000개라니 어느 세월에 다 캔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대기 화면으로 돌아와 다른 서버를 선택한 뒤 캐릭터 생성 버튼을 클릭했다.
<‘개과천선’ 퀘스트를 완료하기 전까지는 캐릭터를 생성할 수 없습니다.>
“하…….”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 계정으로는 캐릭터를 생성할 수 없으니 아예 다른 계정을 새로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현실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회원 가입까지는 순조로웠지만, 캐릭터를 생성하려고 하니 역시나 그놈의 퀘스트 때문에 캐릭터를 생성할 수 없다는 알림이 친절하게도 나타났다.
이렇게 된 이상 빌어먹을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광석 1,000개를 채집해 가면서까지 이 게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도 했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엔 억울했다.
“두고 보자, 씨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비니 그놈만큼은 처리하고 싶었다. 다시 헤르오 서버에 접속해 곡괭이를 착용하고 광석 채집을 시작했다.
“아…… 햇빛 보고 싶어.”
벌써 몇 시간째 어두컴컴한 광산 안에 갇혀 광석만 캐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깡, 깡 광석을 캐는 소리만 들어도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진행하다간 광석을 모두 캐기 전에 나부터 정신을 놓을 것 같아 계획을 변경했다. 30분 동안 광석을 캐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으로 걸어가 바깥 풍경을 구경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5시간이 꼬박 지나서야 드디어 광석 1,000개 채집을 완료할 수 있었다. 퀘스트가 완료되자마자 칙칙했던 죄수복에서 본래 입고 있었던 옷으로 변경되는 것까지 지켜본 후에야 빌어먹을 장소에서 나왔다. 어둡기만 했던 내부와는 달리 바깥으로 나오니 하늘에서 눈부신 해가 내리쬐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자유의 맛인가.”
나는 앉은 자세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렇게 자유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있는데 눈앞에 나를 이 꼴로 만들었던 비니가 나타났다.
[일반]비니: 두식 님 좋은 오후네요 ㅎㅎ 많이 힘들었죠? 고생 많았어요 ^^
그러고는 대뜸 나에게 거래를 걸어왔다. 앞으로 놈에게서 한 톨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였기에 당연히 거절 버튼에 손이 가려다 멈칫했다. 이놈은 보통 또라이가 아니었다. 어제처럼 거래 거절을 하며 회피하면 놈은 더욱더 신이 나 날뛸 것이다. 대충 받아 주고 놈을 떠나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승낙했다.
[일반]비니: 제가 직접 만든 5성 음식이에요. 맛있게 먹어 주세요 ㅎㅎ
이어서 놈이 거래 창에 자랑스럽게 올린 건 ‘새하얀 두부’였다.
“……하.”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두부의 등장에 말문이 막혔다. 기가 막혀 연신 하, 하. 헛웃음만 터뜨리고 있을 때였다. 거래 승인을 하지 않는 내가 답답했는지 비니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일반]비니: 얼른 안 받고 뭐 해요? 자고로 두부는 따뜻할 때 먹어야 해요 ㅋㅋ 제가 두식 님을 위해서 특별히 +10강 된 종결 요리 도구들로 만든 거라 그 효과도 끝내준다고요 ㅎㅎ
비니의 열띤 설명에 나는 거래 창에 올라온 음식 위로 마우스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제일 먼저 ‘새하얀 두부’라는 이름 위로 별 다섯 개가 보였고, 다음으로는 이 음식을 먹을 경우의 효과가 보였다.
<해당 음식을 먹으면 30분 동안 생명력 200 증가, 스태미나 200 증가, 마나 200 증가, 행운 100 증가, 최대 대미지 증가>
먹어서 해가 되는 음식은 분명 아니라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지만, 어쩐지 선뜻 먹기가 꺼려졌다. 그러나 계속되는 비니의 강요에 할 수 없이 거래 승인 버튼을 클릭했다.
[일반]비니: 자, 이제 얼른 먹어 봐요 ^ㅅ^
거래가 성사되자마자 인벤토리 창에 들어온 음식을 클릭해 사용하기를 선택했다. 그러자 곧바로 음식의 효과가 적용되었다는 문구와 함께 음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신이 음식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받아서 먹었으니 감사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또 무슨 핑계로 나를 신고해 감옥에 집어넣을까 봐 두려워서이기도 했다.
[일반]곽두식: ㄱㅅ합니다
자꾸만 귀찮게 들러붙는 비니를 마음 같아서는 어딘가에 고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을 담은 이중의 의미가 내포된 감사 인사였다.
“앞으로 다시는 보지 말자.”
인사를 끝내고 비니가 붙잡기라도 할세라 나는 얼른 귀환하기를 선택해 빠르게 마을로 돌아왔다. 오늘에서야 혼자서 조용히 퀘스트를 진행해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짜증만 가득했던 가슴이 설렘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마을 밖에 있는 몬스터까지 깔끔히 잡고 나니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몬스터를 모두 잡고, 10업씩 렙업을 할 때마다 힐러 전용 스킬을 획득하도록 도와주는 치료사의 집에 방문했다. 치료사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활 횟수로 랭킹을 매긴 건지 유저의 캐릭터가 서 있는 게 가장 먼저 보였다.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앞으로 열심히 해서 나도 최고의 힐러가 돼야지!”
아직 게임에 대해 잘 몰라 아무런 목표가 없던 내게 드디어 첫 번째와 두 번째 목표가 생겼다. 첫 번째는 무사히 메인 퀘스트와 만렙을 달성할 것, 두 번째는 저 랭킹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최고의 힐러가 되는 것으로 말이다. 치료사의 집을 나서기 전에 직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답시고 여러 힐러 스킬을 사용해 모의 전투를 깔끔하게 클리어한 뒤 밖으로 나왔다.
진행 속도는 느릴지언정 그래도 하나씩 착착 진행되어 가는 분위기에 뿌듯함을 느끼던 것도 잠시, 다음 퀘스트를 진행하려 이동하려던 길목에 멘토와의 매칭을 도와주는 게시판이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아씨, 저거 꼭 해야 하나.”
자칫 잘못하다간 비니 같은 미친놈이나 어쩌면 비니보다 더한 놈을 만날 수도 있는 건데, 웬만해선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게시판 앞에 서서 멘토와 매칭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 동안 고민하던 나는 마침내 힘든 결정을 내렸다.
한 번 더 매칭을 받아 보기로. 지금이야 쪼렙 뉴비라 누군가의 도움이 크게 필요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레벨이 올라가고, 메인 퀘스트가 진행될수록 이 게임에 대해 알려 줄 누군가가 필요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을 이 게임에 초대한 김영석, 이 빌어먹을 새끼는 정작 서버가 달라 도움을 받기도 애매했다. 놈과 할 수 있는 거라곤 채팅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뿐이었다.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매번 말을 걸거나 전화하는 것도 번거로우니, 이왕이면 나와 같은 서버에서 나를 도와줄 멘토가 있는 게 여러모로 좋아 보였다.
“설마 그 또라이가 걸리겠어?”
게시판을 클릭한 후 매칭을 받겠냐는 물음에 과감히 YES를 선택했다. 제발 이번 멘토는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멘토를 찾는 중……이라는 문구가 사람 애를 태울 정도로 깜빡깜빡하는가 싶더니, 얼마 가지 않아 적절한 멘토를 찾았다는 문구와 함께 이동하겠냐는 창이 나타났다.
얼마나 긴장되는 순간인지 누구도 현재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멘토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를 선택하자 화면이 전환되며 로딩 화면이 나타났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캐릭터는 건물 내부 안에 들어와 있었다. 상점 NPC 뒤로 여러 가지 술병이 보이는 걸 보니 이곳은 주점인 것 같았다.
장소에 대한 추측은 대충 끝났으니, 이제 내 멘토가 누구인지 확인할 차례였다. 그런데 아직 멘토를 확인하기도 전인데, 왜 이리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까.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말처럼 NPC들의 대화만 올라오던 채팅 창으로 지금 이 순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놈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일반]비니: 우리 또 보네요?
[일반]곽두식: ㅎ…… 그러게요
“설마……. 이번에도 저놈이 내 멘토겠어?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거겠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캐릭터 시점을 사방으로 움직이며 주점 내부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안에는 술에 취해 흥에 겨울 대로 겨운 NPC들만 있을 뿐 유저라고는 나와 비니 단둘뿐이었다.
“씨발, 진짜 저 새끼가 또 내 멘토라고?”
나는 믿을 수 없어 단도직입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일반]곽두식: 저기요 비니 님이 제 멘토 맞아요?
[일반]비니: 아마도요? 저는 여기 앉아서 쉬고 있을 뿐이었는데, 멘토 요청 알림이 뜨더라구요 ㅋㅋㅋ
[일반]곽두식: 혹시 이 겜 GM이세요?
[일반]비니: 제가요? 아뇨 ㅋㅋㅋ 전 순수한 유전데요 ㅋㅋ 그저 이 게임을 좀 오래 했을 뿐이죠 ㅋㅋ
멘토로 등록한 유저는 암만 못해도 수십은 될 텐데, 연속으로 두 번이나 같은 놈과 매칭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GM일 거라고 의심했으나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아직 장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이었지만, 장비 공개 창을 통해 살펴본 놈의 장비는 죄다 +10 강화는 기본이고,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멋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나 비싼 장비들이요, 라고 주장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최근 다른 게임에서 운영진이 게임 내 고가의 아이템을 복사해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수천의 돈을 챙겼다는 뉴스 기사로 게임을 좀 한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뜨거운 화제로 거론되고 있었다.
놈에게서 구린 냄새가 풀풀 났다. 만약 놈이 GM이라는 걸 자신이 밝혀내기라도 한다면……. 하는 상상을 하자 생각만 해도 고소함에 웃음이 치밀어 올라왔다. 아직은 눈에 띄게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GM이라는 게 밝혀지고 조사에 들어가면 모를 일이었다. 이런 속내도 모르고 자리에 앉아 있는 비니가 천진하게도 말을 걸어왔다.
[일반]비니: 두식 님.
[일반]곽두식: 네?
[일반]비니: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저희 같이 에메르 섭 ㄱㄱ하죠?
[일반]곽두식: 에메르 섭이요?
[일반]비니: 제가 여기도 캐릭터가 있긴 하지만 에메르 섭이 본섭이라서요. 두식 님 보니까 아직 퀘 진행 얼마 안 하신 것 같은데, 저랑 같이 본섭에서 하면 제가 더 잘 도와줄 수 있거든요 ㅎㅎ
놈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놈을 피해 서버까지 옮겨 가며 새 캐릭을 판 건데, 결국 보란 듯이 놈과 만나 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본섭에서 놈을 조사해야 GM이라는 걸 밝혀내기도 수월할 터였다. 장비도 여기보다 더 대단할 테니까 말이다.
고민을 끝낸 나는 곧바로 승낙을 담은 채팅을 입력했다. 빠르게 본섭으로 이동하자는 놈의 제안에 처음 캐릭터를 생성했던 서버인 에메르 서버에 접속했다. 그러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비니 캐릭터 때문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일반]비니: 역시 본섭 공기가 더 좋네요 ㅋㅋㅋㅋㅋ 두식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미친. 공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일반]곽두식: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ㅎㅎ 서버가 좀 더 쾌적한 것 같기도 하구요!
입으로는 온갖 욕을 퍼부으면서도 손가락으로는 놈의 의견에 동조하는 메시지를 입력했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주자 기쁜지 이어서 비니가 제안을 해 왔다.
[일반]비니: 두식 님, 길드 가입하지 않으실래요?
[일반]곽두식: 길드요?
[일반]비니: 네 ㅋㅋㅋㅋ 길갑하시면 업적 점수도 얻을 수 있고, 제가 자리에 없을 때 다른 길원들이 두식 님의 퀘 도와드릴 수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혼자 겜 하면 심심하잖아요 ㅋㅋ
[일반]곽두식: 저야 초대해 주시면 감사하죠 ㅎㅎ
[일반]비니: 그럼 지금 바로 길초 드릴게요. 바로 승인해 주심 돼요
네놈이 GM이라는 것을 밝히고 보란 듯이 당당하게 탈퇴하고 말리라. 채팅이 끝나자마자 비니에게서 길드 가입 초대가 날아들었다.
<‘비니’ 님이 ‘곽두식’ 님을 ‘계략’ 길드에 초대하셨습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그렇지 않아도 놈의 닉네임 위로 계략이라는 문구가 계속 있길래 대충 길드 이름인 건가 했더니, 정말로 길드 이름으로 밝혀졌다. 딱 저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길드 가입을 승낙했다.
그러자 조용했던 채팅 창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무슨 내용인지 읽어 보려고 해도 여러 사람이 저마다 말을 하고 있어 채팅이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며 잠시 라이브 방송을 하는 아이돌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채팅이 잠잠해진 것을 틈타 메시지 확인에 들어갔다.
[길드]음치퀸: 와! 뉴페다, 뉴페!
[길드]삐빅정상입니: 또라이들이 모인 길드에 뉴페 등장이라…….
[길드]무등산수박: 어서 오세요 뉴페 님 >.<
[길드]밤밤무슨밤: 이게 얼마 만의 뉴페냐 ㅠㅠㅠㅠㅠ 누가 델꼬 왔어? 또빈 형이야?
[길드]비니: 당연 내가 데리고 왔지
[길드]밤밤무슨밤: 오우; 여기 와서 내 절 받아 또빈 형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비니: ㅇㅇ 지금 감
예상치 못한 격한 환영에 넋을 잃었던 것도 잠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리던 한국에 사는 한국인답게 인사를 남기려는데, 비니의 채팅이 채팅 창에 올라왔다.
[일반]비니: 두식 님, 파갑한 뒤에 여기에 타세요. 탑승하려면 마우스 오른쪽 누르고 탑승하기 누르면 돼요
그러고는 현실에서도 보기 힘든 유명한 외제 차를 본떠 만든 듯한 탈것을 소환시켰다. 놈이 알려 준 대로 ‘ㅁㄴㅇㄹ’이라는 이름을 띄운 파티에도 가입하고 탈것에도 무사히 탑승했다.
비록 그래픽 덩어리이지만 이렇게 외제 차를 탑승하는 날이 올 줄이야. 살짝 감격에 젖은 채로 있을 때 나와 비니를 태운 차가 빠르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일반]곽두식: 헐, 이거 날 수도 있어요? 미쳐따
[일반]비니: 그럼요 두식 님도 겜 좀 하시다 보면 저처럼 탈것 얻어서 이렇게 날 수도 있을 거예요 ㅋㅋ 그때까지 제가 잘 케어해 드릴 테니까 오래 게임해요 ^^
“와 씨, 갑자기 의욕이 확 생기는데.”
나도 얼른 노력해서 비니처럼 보란 듯이 탈것을 얻고 말 거라고 다짐하며 주변 구경에 들어갔다. 아래에서 걸어서 이동할 땐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공중에서 보자 한눈에 들어왔다.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해 맵 어디에 서 있어도 스샷 명소가 된다는 게임답게 모든 광경이 훌륭했다.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며 공중에 떠 있던 시점이 서서히 아래로 향하는가 싶더니, 이내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시점을 전환해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비슷한 집들이 빽빽이 들어선 장소였다. 곧바로 탈것을 집어넣은 비니가 뭐 하나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때 비니가 당당하게 외쳤다.
[일반]비니: 당장 문 열어! 뉴비 들어간다!
비니의 채팅이 올라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 있는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열린 문안으로 먼저 들어선 비니의 캐릭터가 나를 향해 따라오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못 이긴 척 안으로 들어가자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엄청 잘 꾸며 놨네.”
대문을 통과하자 넓은 정원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하얀 분수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스피커 너머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실감 나게 들려왔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실제 캐릭터가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세트로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그래픽 쪼가리치고는 꽤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옆으로는 커다란 벚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꽃잎이 떨어지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마치 실제처럼 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것만 같았다.
이어서 분수대 왼쪽에는 체크무늬의 피크닉 매트가 바닥에 깔려 있었고, 매트 주변으로 해바라기와 튤립을 포함해 다양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광경에 구경만 하고 있을 무렵, 내 앞으로 집 안에서 나온 길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캐릭터들을 보니 하나같이 각자 개성이 뚜렷했고, 입고 있는 장비들이 비니만큼은 못해도 다들 화려한 게 고인물들이 분명해 보였다. 혹시 자신과 같은 뉴비가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같이 으쌰으쌰 열심히 키워 보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여기저기 사방에는 고인물들뿐이었다.
[일반]밤밤무슨밤: 와, 진짜 뉴비시네 난 구란 줄 알았짘 ㅋㅋㅋ 또빈 형 내 절 받아 ㅋㅋㅋ
[일반]비니: 오냐 ^ㅅ^
밤밤무슨밤 닉네임을 가진 캐릭터 앞에 비니가 냉큼 섰다. 그러자 밤밤무슨밤 캐릭터가 냅다 절을 하는 게 아닌가. 신기한 제스처의 세계에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을 무렵, 내 주변으로 먹이를 발견한 상어 떼처럼 고인물들이 순식간에 내 캐릭터를 에워싸며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일반]음치퀸: 킁킁 느껴진다 진짜 뉴비의 스멜이!!
[일반]무등산수박: 두식 님! 두식 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일반]곽두식: 네 편하게 부르세요 ㅎㅎ
[일반]무등산수박: 앗! 넹넹 ㅎㅎ 두식 님 보이스 하실래요? 하실 의향 있으심 주소 알려 드릴게요 :-)
음성 채팅이 가능한 보이스 초대를 보내 준다는 채팅에 멈칫했다.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던 터라 선뜻 승낙하기에는 망설여졌다. 또래 친구들이 굵고 낮은 목소리를 자랑한다면, 내 목소리는 남자치고는 톤이 높아 중성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화상으로만 대화를 나눴을 때, 열에 일곱 정도는 여성으로 오해하곤 해서 스트레스를 자주 받았다. 그렇다고 초대를 거절하자니,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 보이스에서 내 뒷말을 할 것만 같아 무작정 하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저기서 싱글싱글 재수 없게 웃고 있는 비니를 보자면……. 내 욕을 할 가능성이 93% 정도는 되어 보였다.
[일반]무등산수박: 아, 부담스러우시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강제로 하라는 건 아니니까요! ㅎㅎ
내가 대답이 없자 거절이라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일반]곽두식: 거절하는 건 아니구요 ㅠㅠ 제가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는데, 부모님이 제게 관심이 워낙 많기도 하고 집이 워낙 오래돼서 방음이 잘 안 되거든요 ㅠㅠ 그래서 듣톡만 가능할 것 같은데 괜찮나요?
실제로는 멀쩡히 잘 작동되는 마이크도 있었고, 취업하자마자 독립을 해 혼자 살고 있었지만, 저들은 이러한 사정을 모를 테니 속이는 건 쉬웠다.
[일반]무등산수박: 네네 듣톡도 가능해요! 아, 혹시 단체 톡방도 있는데 참여 가능하세요? ㅎㅅㅎ 주 대화 내용은 고양이 자랑이나 음식 자랑 등 소소한 일상 대화가 거의 대부분이구요 새로운 던전 나오면 공략법 의논하기도 하고 그래요!
“참여하라는 게 왜 이리 많아?”
분명 자신이 한창 게임에 뼈져 살던 예전에는 오로지 게임 안에서만 소통하는 게 다였다. 그래서 일상과 게임을 분리할 수가 있었는데, 요즘은 다른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이 게임에서 손을 놓은 지 꽤 오래됐으니 그사이 많이 바뀔 법도 했다.
[일반]곽두식: 초대해 주시면 감사하죠 ㅎㅎ
[일반]무등산수박: 오픈 채팅 검색에 아브니르 계략 길드 검색하시면 나오구요 입장 비번은 0505예요. 참고로 비번 뜻은 우리 길드 길마인 또빈의 생일이랍니다 ㅋㅋㅋ
[일반]곽두식: 아 ㅎㅎㅎ 네 ㅎㅎㅎㅎㅎㅎ
그야말로 안물안궁, TMI 정보였으나 난 그저 웃었다. 길원이 알려 준 오픈 채팅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길드 가입한 곽두식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D’라는 딱딱한 인사말과 토끼가 웃고 있는 이모티콘 하나를 전송했다. 이어서 인터넷 주소 창에 미리 복붙해 둔 초대 주소를 입력하자 아브니르 계략 수다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서버가 나타났다.
서버에 접속하자마자 마이크 아이콘을 클릭해 말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설정하고 있을 때, 스피커 너머로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서로 앞다투어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두식 님 맞으시죠?
-와아! 두식 님 오셨다!
-어서 오세요 두식 님!
보이스 서버에 접속하자마자 귀신같이 조용해진 게임 채팅에다 대고 나는 묵묵히 인사를 입력했다.
[일반]곽두식: 안녕하세요 ㅎㅎ
도대체 오늘 하루에만 몇 번이나 인사를 하는 건지. 인사봇이 된 것만 같았다. 그때 스피커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식 님,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일반]곽두식: 28이요 ㅎㅎ!
-오 또빈 형이랑 동갑이시네! 혹시 두식 님만 괜찮으시다면 저희 서로 말 편하게 할까요? 다들 나이대가 비슷하거든요. 저는 27살이고, 인겜에서는 그냥 편하게 밤밤이나 밤이라고 불러 주세요. 저는 형이라고 부를게요.
[일반]곽두식: 말 편하게 하면 빨리 가까워지고 저야 좋죠 ㅎㅎ 그럼 앞으로 밤이라고 부를게요 ㅎㅎ
대화를 주고받을 때마다 예의 바른 척, 웃음이 많은 척 행동하려니 힘들었다. 그것도 몹시, 매우, 아주 많이.
-두식 님, 저는 29살이고 편하게 수박이나 박이라고 불러 주세요. 편하게 그냥 누나라고 부르셔도 되고요. 게임을 하시다가 모르는 거나 장비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참고로 저는 계략 길드 부길마랍니다.
-수박 누나 부자니까 요요의 갑옷 10강짜리 하나 사 달라고 하세요!
-밤아, 오랜만에 피빕 한번 붙을까?
-헐, 누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와 태도에 따뜻함을 느낀 것도 잠시, 살벌한 경고에 저 사람 앞에선 조심하기로 다짐했다. 길마인 비니 다음으로 부길마인 수박 누나가 이 길드 실세인 것으로 추정됐다.
-두식아, 안녕? 나야, 비니.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 동갑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돼.
스피커 너머로 부드러우면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수하게 목소리만 놓고 보자면 듣기 좋은 목소리였으나 내용까지 더해지니 앞전에 했던 생각이 순식간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미친 새끼. 가만…….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 같은데?”
분명 어디선가 한번, 아니 수십 번은 들어 본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누군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연예인 누군가의 목소리 같기도 한데, 놈의 목소리를 떠올릴수록 이상하게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또빈 형답지 않게 친절한 척 오지네요. 두식 형, 또빈 조심해요. 우리 길드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또빈 형이거든요.
밤이를 선두로 다른 길원들도 친절히 경고를 해 왔지만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이미 알 수 있었다. 저놈이 또라이라는 것을.
“근데 왜 또빈이라고 부르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곧바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일반]곽두식: 근데 왜 또빈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또빈 뜻은 또라이랑 저놈 닉네임인 비니를 합쳐서 또빈이라고 부르고 있어. 진짜 또라이 같은 놈이거든. 사는 세계가 우리 같은 일반인이랑은 좀 다른 느낌?
-그렇게 말해 버리면 두식이가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뭐라고 생각하긴. 또라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면서 저희들끼리 한바탕 떠들썩하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곧바로 일상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자신은 선뜻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끈끈한 유대감을 느꼈다. 자신을 향한 관심이 금세 사그라진 것을 느끼고 나니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인사를 포함해 자기소개도 얼추 끝났으니 이만하면 자리를 피해도 되겠지 싶어 채팅 창에다 대고 제일 무난한 퀘스트 핑계를 댔다.
[일반]곽두식: 저 메인 퀘스트 하러 이만 가 볼게요 ㅎㅎ 오늘 접속하고 퀘스트를 하나도 못 했거든요 ㅠㅠ
-혹시 퀘스트 하다가 모르는 거 있음 저희한테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알려 드릴게요!
[일반]곽두식: 네 ㅎㅎ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ㅎㅎ;
서둘러 캐릭터를 움직여 집 밖으로 나오자 불편했던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 불편함에 그냥 길드를 탈퇴해 버릴까 싶은 생각을 잠깐 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또빈이 자신을 순순히 놓아줄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이제 길드에 가입한 지 첫날, 1시간도 채 안 되는 짧은 만남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테니 친한 게 당연한 거였다. 소외감을 느낀다고 토라져 있기보다는 저들이 다가오는 만큼 자신도 거기에 맞춰 다가가는 게 맞는 법이었다. 이왕 길드에 가입했으니 잘 지내보고 싶은 욕심도 조금은 있었다.
“일단 당분간은 좀 더 지켜보자.”
길드에 적응될 때까지 조금 더 버텨 보기로 하고, 이제는 정말 퀘스트를 하러 한창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귓속말]비니>>곽두식: 두식아, 지금 어디야?
“또 무슨 꿍꿍이지.”
당장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귓속말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길드 채팅을 두고 자신한테 귓속말로 메시지를 따로 보낸 까닭에 길드 채팅에 대고 말을 할 수도 없어 포털 사이트에 ‘아브니르 귓속말하는 방법’이라고 검색을 하려던 참에 또다시 비니에게서 귓속말이 날아들었다.
[귓속말]비니>>곽두식: 귓속말하는 방법 채팅 입력창에 귓속말/상대방닉넴 입력하면 귓속말 보낼 수 있어 해 봐 ㅋㅋㅋ
때마침 알고 싶었던 정보를 알려 준 비니에게 나는 그가 말한 대로 귓속말을 시도했다.
[귓속말]곽두식>>비니: 무슨 일인데?
“오, 진짜 되네.”
귓속말을 전송하는 데 성공을 하니 큰 업적을 이룬 것처럼 신이 났다.
[귓속말]곽두식>>비니: 지금 파티 초대할게
채팅이 올라옴과 동시에 ‘비니 님의 파티에 가입하시겠습니까?’라는 시스템 창이 등장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는 건지. 혀를 쯧쯧 차며 수락했다.
[파티]곽두식: 왜? 무슨 일인데?
[파티]비니: 두식아, 우리 집에 고양이 보러 갈래?
[파티]곽두식: 고양이? 무슨 고양이? 이 게임에 고양이도 있어?
[파티]비니: 있지. Jol La 귀여운 고양이
평소 너튜브로 강아지나 고양이 영상을 즐겨 보던 나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것도 그냥 고양이도 아니고 귀여운 고양이라니. 당장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파티]곽두식: ㅇㅇ 보러 갈래 당장
[파티]비니: ㅇㅋ ㄱㄱ
<‘비니’ 님이 ‘곽두식’ 님을 ‘SWEET HOME’으로 초대했습니다. 초대를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망설임 없이 YES를 선택했다. 그러자 화면이 전환되며 게임 화면 TIP이 등장하더니 이동 중이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화면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입고 있는 템부터 부내가 나더니 화면으로 보이는 집도 엄청났다. 조금 전에 봤던 길드원들이 모여 있던 집보다 크기부터 시작해 디자인까지 스케일이 남달랐다. 마치 게임 속이 아닌 실제 집처럼 꾸며 놓은 외관을 보니 그저 감탄만 흘러나왔다.
마우스로 화면을 움직이며 주변을 구경하고 있는데, 집 안에서 비니가 걸어 나왔다.
[파티]비니: 우리 집에 어서 와 ㅎㅎㅎ
[파티]곽두식: 고양이 ㅇㄷ?
고양이가 더 중요했던 나는 비니를 보자마자 고양이부터 찾았다.
[파티]비니: 고양이? ㅋㅋㅋㅋ 집 안에 들어오면 있어 ㅋㅋㅋ 근데 넌 나는 본 척도 안 하냐? ㅋㅋㅋㅋ
[파티]곽두식: ㅇㅇ 인간은 관심 없어
섭섭하다며 채팅으로 칭얼거리는 비니를 뒤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의 대기 화면 끝에 나타난 집 안의 풍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거 왜 이래?”
혹시 모니터가 맛이 간 건가 싶어 툭툭 두드려도 보고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 보기도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화면은 여전히 암흑이었다. 나는 당장 채팅으로 비니를 호출했다.
[파티]곽두식: 야 어디ㅆ?
[파티]비니: ㅇㅇ? 여기 있음
[파티]곽두식: 불 좀 켜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파티]비니: 우리 애가 밝은 걸 싫어해서 어쩔 수 없음 ㅇㅇ
[파티]곽두식: 암만 그렇다고 해도 안 보이잖아 ㅡㅡ
[파티]비니: 전체 채팅으로 비니야~~~ 라고 부르면 올 거야
“……비니?”
[파티]곽두식: 고양이 이름이 비니?
[파티]비니: ㅇㅇ 나랑 똑같은 이름
자신과 똑같은 이름이라는 비니의 말에 부르기가 싫어졌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고양이는 구경하고 가야 할 것 같아 할 수 없이 전체 채팅으로 고양이를 불렀다.
[전체]곽두식: 비니야~~~
진짜 비니 말대로 고양이가 올지 촉각을 곤두세운 채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너무 조용해 실행 중이었다는 것도 깜빡 잊고 있던 보이스에서 소리가 들려온 건.
-야옹.
“아아아악!”
[파티]곽두식: ㅇㄹㅇ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화면은 캄캄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선 채로 가만히 있자, 얼마 가지 않아 스피커 너머로 누군가가 재수 없게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개 웃겨. 두식이 놀랐어요? 우쭈쭈.
-뭐야. 갑자기 재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또 장난쳤어?
-뉴비 신고식이지.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듯 낄낄거리던 놈은 한참이 지나서야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에 맞춰 컴컴했던 화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그러자 화면에 귀여운 고양이는커녕 호피 무늬 속옷을 입고 비니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씨발…….”
전투적으로 컴퓨터 앞으로 달려간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분노의 타이핑을 시전했다.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분노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아 타이핑하자 방 안에는 키보드가 거칠게 신음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티]곽두식: ****야 재밌냐?
[파티]비니: ㅎㅅㅎ 야옹
[파티]곽두식: ** 네가 사람**지 고양이냐고
[파티]비니: 화났어?
[파티]곽두식: 너 같음 화 안 나겠냐? 이 상황에?
[파티]비니: 우리 두식이가 화가 많이 났구나 ㅋㅋㅋㅋ 이제 진짜 커여운 고양이 보여 줄게
[파티]곽두식: ㄲㅈ **
이번에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놈이 장난을 치겠구나 싶어 파티를 해제하려는데, 내 앞으로 정말 귀여운 고양이가 나타났다. 앙증맞은 크기의 고양이는 깜찍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니가 움직일 때마다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파티]비니: ㅇㄸ? 커엽지?
[파티]곽두식: ㅁㅊ 개 귀여워. 이건 뭔데? 계속 따라다녀?
[파티]비니: ㅇㅇ 꼬마 인형이라는 건데 먹이 먹여서 레벨 올리면 스탯 올려 줘 ㅋㅋ 한번 소환해 두면 계속 따라다니기도 하고 ㅋㅋ
나는 당장 마우스 줌을 있는 대로 당겨 고양이를 확대했다. 새까만 턱시도를 입은 고양이었는데 살랑살랑 꼬리를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 두툼한 앞발과 뒷발 등 게임 속 고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살인적으로 귀여운 모습을 가진 고양이었다.
그때, 비니의 캐릭터가 주머니를 뒤적이는 시늉을 하는가 싶더니 고양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츄르를 닮은 간식을 고양이 앞에 내밀자, 고양이는 당연하게도 간식을 향해 온몸으로 달려들었다.
[파티]곽두식: ㅁㅊㅁㅊㅁㅁㅊ
[파티]비니: 이거 가지고 싶어?
[파티]곽두식: 넌 당연한 소릴 손가락 아프게 하냐? 당연히 가지고 싶지
[파티]비니: 그럼 내가 도와줄까?
[파티]곽두식: 어케 하면 얻을 수 있는데? 당장 말해
눈앞에 있는 고양이에 눈이 멀어 버린 내게 비니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파티]비니: 거가템이면 사 주겠는데 아쉽게도 거불템이라서 네가 직접 득해야 해 ㅋㅋ 퀘 진행하다 보면 던전 가라고 하는데 그거 클리어하고 나면 하드 모드 열리거든? 거기서 얻을 수 있음 ㅇㅇ
[파티]곽두식: ㅇㅏ귀찮은데
[파티]비니: 아니면 저 고양이 대신 날 데리고 다니든가 ㅋㅋㅋ
[파티]곽두식: ㅅㅂ 바로 퀘 하러 간다 ㅂㅂ
방금 비니의 발언은 아까 크게 놀란 것 때문에 기운이 다 빠져 게임을 종료하려던 내 생각을 단번에 뒤집는 말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시달리는데 게임하는 내내 비니가 졸졸 내 뒤를 따라다닐 걸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파티]비니: ㅈㄲㅁ
[파티]곽두식: 왜?
[파티]비니: 그거 하드라 아직 너한테는 좀 힘든 던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일 처음에 나온 던전이라 매칭이 잘 안 되거든? 당장 도와주고 싶은데 오늘은 내가 나가 봐야 해서 힘들 것 같고, 내일 도와줄 테니까 내일 같이 가자 ㅇㅋ?
[파티]비니: 어제 보니까 메인퀘 진행 아직 제대로 안 한 것 같던데, 내일 바로 갈 수 있게 오늘 퀘 진행 좀 해 둬 ㅋㅋㅋㅋ 던전 매칭은 다른 길원들한테 부탁하면 서로 가겠다고 달려들 테니까 ㅋㅋ
“흠.”
비니의 제안에 대답하기 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해당 던전에 가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해당 던전이 열리기까지 메인퀘를 얼마나 진행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파티]곽두식: ㅇㅇ
일단 알겠다는 대답을 날렸다. 생각하는 것보다 퀘 진행 속도가 빠르다 싶으면 길원들한테 도움을 요청해 볼 생각이었다.
[파티]비니: ㅇㅋㅇㅋ 그럼 내일 보자 내 꿈꿔 자기 ^0^
“미친 새끼.”
‘파티가 해체되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비니 캐릭터가 두 손으로 하트를 날리는 제스처를 확인하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로 이동하기를 클릭했다.
-얘들아, 나 오늘은 먼저 나가 볼게 다들 즐아.
-엥? 형 벌써 나가? 웬일이래.
-나도 현생 살아야지. 밀린 일 처리해야 해.
-형한테 현생도 있었어?
-닥쳐. 두식아, 내일 나랑 만나기 전까지 알지? 열심히 해!
-뭐야. 둘이 무슨 약속을 했어?
-그런 게 있어. 그럼 난 진짜 나가 본다.
띵동. 소리와 함께 비니가 보이스를 종료했다. 이어서 다른 길원들에게서 게임을 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물어보라는 말이 한 번 더 뒤따랐고, 나는 길드 채팅에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 메인 퀘스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비니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내일 비니를 만나기 전 보란 듯이 고양이를 가지고 싶었기 때문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한참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씨발, 바로 옆 건물에 있는데 지가 갈 것이지 왜 자꾸 오라 가라야!”
어디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바로 옆 건물이건만, 절대 스스로 움직일 생각은 1도 하지 않는 NPC를 대신해 쓸데없이 움직이는 퀘스트가 너무 많아 진행 속도가 더뎠다. 자신들의 왕국을 되찾고 말 거라면서 정작 행동하는 건 없는 게 짜증이 났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마다 비니가 보여 준 고양이를 떠올리며 묵묵히 진행해 나갔다. 왕국 근처에 있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우리와 같은 편인 NPC에게 편지를 전달하거나, 도시락을 전달하거나 하는 둥 수없이 많은 퀘스트를 진행한 끝에 마을 NPC에게서 드디어 <헥터 던전의 비밀>이라는 퀘스트를 받게 되었다.
헥터 던전은 과거 로터스 왕이 혹시나 닥쳐올 위기를 대비해 나쁜 놈들을 상대로 왕국을 되찾을 비기를 숨겨 둔 장소였다. 로터스 왕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해당 던전에는 이 비기를 수호할 요정들이 살고 있었지만, 왕국을 빼앗긴 지금은 요정 대신 사악한 무리가 해당 던전을 차지하고 있으며, 왕국을 되찾을 비기도 오염된 지 오래라 더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어 이것을 파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던전을 클리어하라는 지시에 던전 목록에 들어갔다. 아직 개방하지 못한 던전들이 대부분이라 수많은 물음표 사이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문구가 보이는 ‘헥터 던전’을 클릭하고 참가 버튼을 클릭했다. 첫 던전이니 일단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 볼 생각이었다.
짧은 기다림 끝에 매칭이 완료됐다는 문구와 함께 화면이 전환되며 순식간에 마을에서 던전 안으로 들어왔다.
[파티]어제오늘내일: 안녕하세요!
[파티]삽고수: ㅎㅇㅎㅇ
[파티]세빈: 안녕하세요
[파티]곽두식: 안녕하세요!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올라오는 채팅 창에다 대고 나도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난 후 가타부타 다른 말없이 바로 앞으로 돌진하는 탱커 캐릭터를 따라 나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아브니르의 던전은 대부분이 4인 던전이었는데, 파티 인원으로는 탱커 1명, 힐러 1명, 딜러 2명으로 구성되는 게 기본이었다.
나는 열심히 치료사의 집에서 모의 전투를 진행하며 배운 대로 탱커들이나 딜러들의 HP 게이지가 줄어들 때마다 채워 넣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들 어그로를 끌어 파티원들을 지켜 주는 든든한 탱커와, 높은 딜을 자랑하는 딜러들과는 달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지만 현저히 낮은 힐량과 딜을 보니 얼른 그들처럼 강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내 다짐과 달리 보스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첫 던전이라 경험이 없다 보니 탱커뿐만 아니라 날 포함해 파티원 모두 골고루 한 번씩 돌아가며 죽인 탓에 플레이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수를 할 때마다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파티원들에게서 괜찮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다음에 올 때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와야겠다고 보스 방에 입장하려던 때였다.
[파티]삽고수: 두식 님 아 진짜 ㅋㅋㅋㅋ 개 어이없네
[파티]곽두식: 네?
갑작스러운 삽고수의 발언에 내 심장은 저만치 아래로 덜컥 내려앉았다. 뭐지? 저 사람이 왜 저러지? 내가 또 뭘 잘못했나 하는 걱정에 마우스를 쥔 손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났다.
[파티]삽고수: 입고 있는 장비 그게 최선이에요? ㅋㅋㅋ 던전 오면서 누가 의장을 입고 와욬ㅋㅋㅋㅋㅋㅋ ** 라면딜 하니까 좋아여?
라면딜이라니 억울하면서도 이렇게 대놓고 지적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가슴이 긴장으로 두근거렸다. 초보자들한테 친절한 게임으로 소문이 난 게임이라 방심했던 게 문제였을까.
물론 게임 속 딜 미터기가 가리키는 자신의 딜은 삽고수의 말처럼 처참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대충 딜을 넣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뭐라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자신의 딜이 낮은 건 사실이었기에 먼저 사과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로 했다.
[파티]곽두식: 딜이 낮아서 죄송합니다 ㅜㅜㅜ 제가 게임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기도 했고, 이 던전도 오늘 첨 오는 거라 많이 미숙해서 실수가 잦았던 것 같습니다 ㅠㅠ 앞으로 주의할게요 ㅜㅜ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이쯤 하면 삽고수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었으나 웬걸, 현실은 차가웠다.
[파티]삽고수: 뉴비인 게 자랑임? 뉴비일수록 공략을 더 보고 오든가 했어야져 ㅋㅋㅋ 누군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ㅋㅋㅋ 글고 암만 뉴비라도 장비 창에서 최강 장비 누르면 자동으로 장비 입혀 주는데, 일부러 방보 0짜리 초보자 옷 입고 온 거면 사이언스지 ㅋㅋ 대놓고 라면딜 하겠다 아님?
[파티]연리지: 삽고수 이 **야 그만 좀 해라 ㅋㅋ 뉴비보다 네 ** 때문에 시간 더 낭비하고 있음 ㅋㅋ 너만 아니었어도 벌써 보스 깨고 나갔어 ㅡㅡ
[파티]삽고수: ** 세빈인지 뭔지 이 **아 왜 욕하고 **이야
[파티]어제오늘내일: 삽고수 님 그만하세요…… 님이 더 이상해요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부여잡으면서 어떻게 말해야 저 새끼를 열 받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같은 파티원들이 먼저 나서서 자신의 편을 들어 주었다. 내 잘못도 있으니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려 했지만, 너무너무 억울했다. 거듭 사과를 했는데도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계에 다다른 인내심이 더는 참지 못하고 결국 폭발했다.
[파티]곽두식: 죄송하다고 사과도 드렸고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했는데,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ㅅㅂ 머리라도 박으라는 소리임?
[파티]삽고수: ㅅㅂ? 지금 욕함? 와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ㅈㄴ 어이없네
[파티]곽두식: ㅅㅂ 넌 첨부터 게임 잘했냐?
싹수가 노란 초보로 낙인이 찍힌다고 해도 삽고수에게 욕을 퍼부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혹여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다른 파티원들이 삽고수 쪽으로 돌아서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살짝 하긴 했으나, 다행히 지금까지는 자신의 편을 제대로 들어 주고 있었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해 나는 더욱 전투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파티]삽고수: ㅅㅂ 너희 셋 지인이거나 같은 길원인가 본데 제발 지인플 할 거면 니들끼리 팟 짜서 가든가 해 ㅗㅗ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파티]삽고수: 빨리 돌고 밥 먹으러 가려고 했더니 ㅅㅂ ㅈㄴ 똥 밟았네
[파티]어제오늘내일: 저희 지인 사이 아니거든요. 뉴비분이라 실수할 수도 있는 거고, 실수하면 그냥 좋게 좋게 알려 주면 되잖아요 두식 님도 이제 그만하시고요
[파티]연리지: 급발진 오졌네 ㅅㅂ 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하기 싫으면 나가 이 ㅅㄲ야 두식 님 이거 대화 내용 캡처해서 고객 센터에 신고하세요 ㅋㅋㅋ 그럼 저 ㅅㄲ 바로 처벌 받을 거예여
[파티]곽두식: 아, 신고할 수 있나요?
[파티]어제오늘내일: 네
“프린트 스크린……. 프린트 스크린…….”
연리지 제안으로 나는 대화 채팅 스크롤을 제일 처음으로 올려 삽고수가 말한 화면을 모조리 빠짐없이 캡처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 자기 혼자서 욕을 하던 삽고수는 던전을 퇴장해 버렸고, 나는 남은 파티원들과 간신히 보스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한 명의 빈자리가 있음에도 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파티원들의 장비가 짱짱하기도 하고 던전 난이도가 낮아 가능한 일이었다.
[파티]어제오늘내일: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즐아 하세요! 그리고 두식 님 삽고수 저분이 이상한 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요, 장비는 최강 장비 버튼 누르면 인벤 창에서 방보 높은 템으로 자동으로 착용되니까 참고하시고요! 그럼 즐겜 하세요 ㅎㅎ!
[파티]곽두식: 감사합니다 ㅠㅠㅠ 그리고 죄송했어요 ㅠㅠ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ㅠㅠ
초보면 충분히 실수할 수 있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위로가 돌아왔지만 이미 트라우마가 생긴 후였다. 앞으로 던전을 돌 때마다 삽고수처럼 사사건건 시비를 걸 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어질했다.
“아, 머리 아파.”
평생 있는지도 몰랐던 두통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무래도 오늘 게임은 여기까지만 하고 종료한 후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몫으로 남겨진 보상을 열고 EXIT 버튼을 클릭하려 할 때 대뜸 연리지가 말을 걸어왔다.
[파티]연리지: 두식 님 무슨 서버세여?
[파티]곽두식: 저요? 저 에메르 섭이요
[파티]연리지: 아 다행히 저랑 같은 서버시네요 ㅎㅎ 던전 나가자마자 제가 파티 초대할 테니까 다른 거 하지 마시고 기다려 주세요
[파티]곽두식: 네?
[파티]연리지: 장비 판매하는 곳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안내해 드리려고요 ㅎ
연리지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은 휴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에 거절하기로 했다.
[파티]곽두식: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이만 나가 봐야 해서요 ㅎㅎ ㅠㅠ 제가 따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ㅠㅠ 그럼 즐아 하세요!
기운 내라는 연리지의 말을 끝으로 던전 밖으로 나온 나는 마을로 돌아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게임을 종료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눈을 감은 채 고민에 빠졌다.
아, 그냥 게임 접을까.
* * *
이름 임연우. 나이는 28세. 대기업까지는 아니더라도 업계에서는 아, 거기? 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하는, 꽤 이름 있는 회사에서 근무 중인 평범한 남자. 특기는 나사 하나는 빠진 사람처럼 퇴근 후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기. 이런 탓에 취미랄 것도 없었지만, 최근 들어 나에게도 새로운 취미가 생겼는데, 그건 바로 온라인 게임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내게 새로운 취미를 갖게 해 준 영석과 함께 밥을 먹으러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 온 영석은 나와는 다른 팀이긴 하지만 현재 같은 회사에 근무 중이었다.
음식이 담긴 배식판을 들고 영석과 함께 적당히 빈자리에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오전부터 팀장에게 된통 깨진 터라 말할 기운도 없어 묵묵히 수저만 움직여 음식을 씹어 삼키고 있는데 영석이 말을 걸어왔다.
“임연우, 게임 열심히 하고 있냐?”
“……게임은 무슨, 씨발. 게임 이야기도 하지 마. 내 앞에서.”
“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오는 영석에게 주말에 있었던 일화를 설명했다. 수저까지 내려놓고 열심히 설명한 끝에 오래 걸리지 않아 마칠 수 있었다. 물론 놈을 신고한 것까지 빼놓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그 게임 쳐다보기도 싫어. 초보 친화적은 무슨, 씨발. 웬 사이코 같은 새끼밖에 없더구만.”
“어째 재수가 없냐. 그런 새끼 만나기도 드문데.”
“드물기는, 씨발. 사방에 또라이 같은 새끼들 천지더구만.”
“그러지 말고 꾸준하게 해 봐. 만렙까지 찍으면 그때부터 신세계라니까?”
“아, 몰라. 오늘은 안 해. 가뜩이나 아침부터 그 새끼 때문에 짜증 나 죽겠는데.”
“그 새끼라면…… 너희 팀장? 근데 진짜 이 정도면 예전에 네가 말해 줬던 그 일 가지고 복수하는 거 아냐?”
“완전 100%지. 그때 웃었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후우……. 그냥 밥이나 먹자.”
내 말에 영석은 얌전히 식사를 재개했다. 다행이었다. 저놈이라도 내 말을 들어서. 경영 지원 팀에 있는 영석도 마케팅 팀에 있는 우리 팀 팀장에 대해 잘 아는 이유는 그놈이 직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유도 있었지만, 나 때문이기도 했다.
이름난 대기업까진 아니지만, 제법 탄탄한 기업인 우리 회사에 내가 입사했을 때부터 놈은 마케팅 팀의 팀장이었다. 회사에서는 직급 차이가 있으니 어쩔 수 없더라도 나이도 같으니 사석에서는 어쩌면 친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아 산산이 깨졌다. 놈은 나와는 차원이 다른 놈이었다.
아무리 내가 놈을 싫어한다지만 엄연히 공적으로 행동해야 할 회사에서 나는 놈을 볼 때마다 꼬박꼬박 팀장님이라고 부르며 나름대로 예의를 차렸다. 그러나 예의를 차리는 나와는 다르게 놈의 태도는 그야말로 재수 없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뿌득 이가 갈렸다.
‘임연우 씨가 보기에 이 제품이 요즘 트렌드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다시 조사해 오겠습니다.’
‘그리고 2페이지에 얼룩이 묻어 있더군요.’
자세히 보면 보이지도 않을 작은 얼룩을 놈은 당당하게 가리켰다.
‘도대체 문서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앞으로 좀 더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설마 절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겁니까?’
설마 저걸 유머랍시고 말한 건 아니겠지. 웃음은커녕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자 정말 그런 거냐고 눈빛으로 재차 물어오는 놈에게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 그건 오해입니다. 팀장님.’
‘제 오해라면 다행이지만, 임연우 씨가 계속 이럴수록 저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해 주시고, 이만 자리로 돌아가 보세요.’
놈과의 재수 없는 일화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올 초에 있었던 회사 단합 대회에서도 놈은 한결같이 재수가 없었다. 팀별로 족구 대결을 했었는데,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기엔 뭣하지만 나는 지극히 형편없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부족한 족구 실력까지 더해지니 말해 뭐 할까. 네트 건너편으로 넘어가야 할 공이 어째선지 팀장인 놈이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이를 두고 놈은 태연하게 망발을 내뱉었다.
‘임연우 씨, 저한테 관심 있습니까?’
‘네?’
‘자꾸 나한테 공이 와서 하는 말입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이상하게 공이 자꾸 팀장님한테 가네요. 하하…….’
가까스로 웃음을 지으며 나는 속으로 내 저주받은 두 다리를 탓했다.
‘임연우 씨가 일부러 제 관심을 끌어 보고 싶어서 준 게 아니고요?’
‘그건 절대 아닌데요.’
‘흠, 아니라고 하니 믿어는 보죠. 그런데 앞으로도 상대 팀이 아닌 나한테 공이 온다면 임연우 씨가 날 존경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절대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두고 보죠.’
차라리 장외 밖으로 공을 찰지언정 절대 놈에게는 주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나를 보고 놈이 피식거렸다. 그런 놈을 보며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야심 가득하게 다짐했건만, 하늘은 날 버릴 심산인지 공을 차는 족족 홀린 듯이 놈에게 향했고, 간신히 경기가 끝났을 땐 같은 팀이었던 직원들이 한데 모여 나를 놀려 댔다.
‘연우 씨, 팀장님이 그렇게 좋아? 팀장님은 연우 씨 같은 직원이 있어서 좋으시겠어요.’
다분히 장난기 섞인 농담이건만 놈은 또 진지하게 받아쳤다.
‘뭐, 그냥 그저 그렇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굴욕스러웠던 기억이 선명했다. 결벽증에 평범한 사람은 따라가기 힘든 이상한 유머까지 남발하는 놈의 태도에 학을 떼는 사람은 나뿐인지 다른 직원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아주 좋았다. 특히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180이 훌쩍 넘는 훤칠한 키에, 작은 얼굴 안에 조화롭게 자리 잡은 눈, 코, 입과 우아한 목선만 보자면 미남보다는 미인에 가까웠으나, 탄탄한 몸매를 본다면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갔다. 아무리 놈을 싫어하지만, 놈의 껍데기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의 입만 열지 않는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 또라이 같은 그 성격도 포함해서. 그나저나 또라이 하니까 또 다른 또라이가 생각났다.
“……비니.”
“뭐? 너희 팀장?”
“어?”
“방금 너희 팀장 이름 말한 거 아냐? 공세빈?”
눈앞에 있는 영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놈은 왜 갑자기 재수 없는 팀장 이름을 말하고 난리……. 잠깐.
“공……세빈? 세빈? 세빈……. 비니?”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영석아, 우리 길드 길마 닉네임이 비니거든?”
“근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팀장 이름 공세빈이잖아. 설마…… 둘이 동일 인물인 건 아니겠지? 생각해 보니까 목소리도 둘이 비슷했던 것 같아.”
내가 말하고도 소름 돋는 가정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이건 비니가 알고 보니 GM이었더라는 사실보다 더 끔찍하게 다가왔다. 내 말에 아주 잠깐 생각하던 영석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 게임하는 사람들이 암만 못해도 수만 명은 될 텐데, 우연히 가입한 길드 길마가 너희 팀장이다? 에이, 그건 아니다. 설사 네 말대로 너희 길드 길마가 팀장이다, 그러면 둘이 결혼이라도 해야 할 운명인데 완전?”
“역시 그렇겠지? 내가 지나친 거겠지? 그래, 그럴 리가 없겠지.”
또라이 같은 놈을 떠올리며 정신없이 식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식판에 있던 음식들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사무실로 돌아가기 싫어 천천히 걷고 있는 내 어깨를 영석이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스트레스 받을수록 게임으로 풀어야지. 넌 나와 같은 집돌이라 스트레스 풀 데도 없잖아.”
“그냥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충분히 힐링이 되거든.”
“그러지 말고, 내 말 믿고 한번 진득하게 해 봐. 길원들도 잘해 준다며. 내 얼굴 봐서라도 해 봐라. 응? 응?”
“씨발, 떨어져. 어딜 붙는 거야.”
알겠다고 해 줄 때까지 떨어지지 않으려 드는 놈에게 할 수 없이 알겠다는 대답을 해 주자 간신히 떨어져 나갔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정신 차리자, 임연우! 언젠가는 또라이 같은 팀장 놈의 코를 반드시 납작하게 해 줄 거라고 다짐하며 부지런히 두 손을 움직이는 걸 시작으로 오후 업무를 시작했다.
* * *
퇴근 후,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샤워까지 마친 뒤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푹신한 침대에 지친 몸을 눕히고 싶었지만, 낮에 징그럽게 붙어서 칭얼거리던 영석이 생각나 일단 게임 접속을 해 볼 요량이었다.
로그인을 하고 게임 접속 버튼을 클릭하자 얼마 전 던전 앞에서 게임을 종료했던 그대로 캐릭터가 서 있었다.
[길드]세계서열0위: 어? 첨 보는 분이시네. 안녕하세요?
[길드]음치퀸: 두식 님 넘 오랜만이에여!!!
[길드]무등산수박: 두식 님 ㅠㅠㅠㅠ 넘 안 들어오셔서 접은 줄 알아써요 힝구 ㅠㅠ
[길드]곽두식: 안녕하세요 ㅎㅎ 그동안 현생이 바빠서 접속이 좀 뜸했어요 ㅠ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요 며칠간 야근도 하고 바빴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길드]비니: 두식아 오랜만 ^0^
[길드]음치퀸: 근데 두식 님이랑 비니랑 실제로 아는 사이? 둘 다 한동안 안 들어오더니 오늘 맞춘 듯이 들어오네 ㅋㅋㅋㅋ
[길드]비니: 두식이랑 나랑 좀 통하는 사이긴 하지 ㅋㅋㅋ
[길드]음치퀸: ㅁㅊ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입고 있는 장비만 보면 온종일 게임만 할 것 같았던 비니는 어쩐 일인지 며칠간 접속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웬일이래.”
그래 봤자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마을로 이동했다. NPC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채팅 창에 귓속말이 등장했다.
[귓속말]비니>>곽두식: 두식아 우리 집에 라면 먹으러 올래?
“이 새끼, 또 무슨 꿍꿍이야?”
채팅을 확인하자마자 자연스레 내 입에서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게, 얼마 전 귀여운 고양이를 보여 주겠다고 해 놓고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던가. 물론 마지막에 정말 귀여운 고양이 인형을 보여 주긴 했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귓속을 선명히 파고들던 놈의 ‘야옹’ 소리는 잊히질 않았다.
게다가 라면 먹으러 자기 집에 가자는 말 자체는 오래된 유행어이긴 했으나, 그 속뜻을 모르는 사람이 커뮤나 게임 좀 하는 사람이면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15세 게임을 단숨에 19세 분위기로 만드는 놈을 보며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변태 새끼는 당장 꺼지라고 욕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기다림에 지친 놈에게서 또다시 귓속말이 날아들었다.
[귓속말]비니>>곽두식: 두식ㅇㅏㅏㅏㅏㅏㅏㅏ 내가 맛있는 라면 먹여 줄게~~~
[귓속말]곽두식>>비니: ㄲㅈ 너 같으면 널 믿겠음?
[귓속말]비니>>곽두식: ㅇㅇ 당빠 믿지 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라면 먹으러 우리 집 ㄱㄱ
이어서 놈은 더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대뜸 초대부터 날렸다.
<‘비니’ 님이 ‘곽두식’ 님을 ‘아브니르빌 201호’로 초대했습니다. 초대를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하, 내가 갈 줄 알고? 집 이름은 또 이게 뭐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놈을 믿을 수가 없어 NO를 선택했다. 이로써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으나, 역시나 길원들 사이에서 또빈이라고 불리는 놈답게 놈은 정말이지 끈질기기가 거머리 저리 가라 수준이었다. 내가 거절할 때마다 놈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초대를 보내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비니’ 님이 ‘곽두식’ 님을 ‘아브니르빌 201호’로 초대했습니다. 초대를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비니’ 님이 ‘곽두식’ 님을 ‘아브니르빌 201호’로 초대했습니다. 초대를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비니’ 님이 ‘곽두식’ 님을 ‘아브니르빌 201호’로 초대했습니다. 초대를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비니’ 님이 ‘곽두식’ 님을 ‘아브니르빌 201호’로 초대했습니다. 초대를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비니’ 님이 ‘곽두식’ 님을 ‘아브니르빌 201호’로 초대했습니다. 초대를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귓속말]곽두식>>비니: 그만 좀 해!! ㅁㅊㅅㄲ야!!!
[귓속말]비니>>곽두식: 두식이 네가 올 때까지 초대할 거야 ㅇㅅㅇ
<‘비니’ 님이 ‘곽두식’ 님을 ‘아브니르빌 201호’로 초대했습니다. 초대를 승낙하시겠습니까? YES/NO>
메인 퀘스트다 뭐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퀘스트 때문에 바쁜 나와는 다르게 고인물인 놈은 한가했다. 그것도 지나치게 말이다. 그런 놈이니 정말 자기가 한 말대로 내가 초대를 승낙할 때까지 초대를 날리고도 남을 놈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또라이 같은 놈한테 걸려선 이게 무슨 고생이야.”
할 수 없이 YES를 클릭하고 화면이 전환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화면으로 얼마 전 봤던 놈의 집과는 확연히 다른 집이 나타났다.
“이건 또 뭐야?”
분명 내 기억 속 놈의 집은 중세 시대 저택처럼 근사한 외형이었더랬다. 정원에는 푸릇푸릇한 잔디와 마당 중앙에는 하얀 분수대가 있는 근사한 집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현재 내 눈앞에는 지나치게 현실을 반영한 빌라 하나가 우뚝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게다가 그 빌라를 장식하고 있는 간판까지 보니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브니르빌 201호’
금빛으로 새겨진 이름을 보아하니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꽤나 익숙한 원룸 건물을 표현한 것 같았다. 정말이지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하면서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서성이고 있을 때, 역시나 지난번처럼 집 안에서 놈이 나타났다.
[일반]비니: 왔으면 얼른 들어오지 ㅋㅋ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해? ㅋㅋㅋ
[일반]곽두식: 너 같음 이렇게 생긴 집에 순순히 들어가고 싶겠냐?
[일반]비니: 우리 집이 어때서? 라면 먹고 가기 딱 좋은 자취방을 표현한 건데 ㅋㅋ 어때? 이거 다 엎는다고 돈이랑 시간 겁나 걸림 ㅋ 너 때문에 엎은 거야 ㅋㅋ
[일반]곽두식: 뻘짓했네 ㅋ
[일반]비니: 뻘짓이라니 ㅋㅋ 얼른 들어가자 ㅋㅋ 여기까지 왔으니 라면 먹고 가야지? ^0^
나를 향해 집 안으로 얼른 들어오라는 것처럼 열심히 손짓하는 비니 캐릭터를 따라 앞으로 이동했다. 문을 클릭 후 또다시 로딩중인 화면을 기다리며 미리 비니에게 따끔한 경고를 날리기로 했다.
[일반]곽두식: 15세 겜에서 라면 먹고 갈래가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냐? ㅋ 이상한 짓 할 생각인 거 뻔히 알고 있으니까 괜히 하지 말고 그냥 넣어 둬 ㅋ 안 그럼 캡처 떠서 신고해 버릴 테니까 ㅋ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저도 사람이라면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화면이 바뀌기만을 기다렸고,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난 내부 풍경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집 안 내부는 현실 원룸 내부를 그대로 고증한 모습이었다. 다만, 요즘 추세와는 동떨어진 몇 년 전 디자인이었는데, 죽지도 않고 살아 돌아온 체리 몰딩과 화려한 꽃무늬 벽지를 여기서 볼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미니 냉장고부터 시작해서 좁디좁은 싱크대, 성인 남성 두 명이 누우면 가득 찰 침대 크기까지.
마지막으로 방 중앙에는 낡은 밥상 위에 라면이 담긴 냄비가 놓여 있었는데, 모락모락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주변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광경이었다.
혹시나 싶어 라면을 클릭하자 ‘식사를 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곧바로 승낙하자 ‘방금 먹은 요리의 기운이 온몸에 가득하다.’라는 문구와 함께 체력과 스태미나 등 갖가지 스탯을 일시적으로 올려 주었다.
지난번처럼 이상한 짓을 할 줄 알았더니, 정말 말 그대로 라면을 준비한 사실에 이놈이 웬일이지 싶었다. 이대로 지나갔다면 마냥 이상한 놈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을 테지만, 역시 또빈이라는 별명을 가진 놈답게 이 상황을 허투루 넘어갈 놈이 아니었다.
[일반]비니: ??? 나는 너 메인퀘 한다길래 힘내라고 스탯 요리 준비한 것뿐인데 이상한 짓이라니??? 우리 두식이 보기보다 앙큼한 구석이 있네 ㅋㅋㅋ? 무슨 야한 상상을 한 거야? ㅋㅋㅋㅋ
“뭐래. 미친놈이.”
그제야 집 안에 들어오기 전 내가 남겼던 채팅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행동한 놈 때문에 졸지에 이상한 놈으로 찍혀 억울했다.
[일반]곽두식: 그거야 지금까지 계속 이상한 짓을 해 왔으니까 그렇지 ㅡㅡ
[일반]비니: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일반]곽두식: 그걸 몰라서 물어? ㅡㅡ 지난번 고양이부터 시작해서 지금 네 옷차림을 봐 누가 그렇게 입고 다녀?
알고 지낸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놈의 패션은 다른 유저와는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첫 만남부터 거의 홀딱 벗고 다니더니 오늘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상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연의 상태였고, 하의는 만 원권 지폐가 그려진 트렁크 팬티를 입고 있었다. 그야말로 오늘 놈의 패션은 지나가던 개가 봐도 수상한 놈이라 생각하고 피해 갈 모습이었다.
[일반]비니: 내 패션이 어때서? 집에서 누가 옷을 입고 다녀? 실제로는 팬티도 안 입고 다니는데 여기서는 팬티를 벗을 수가 없어서 많이 양보한 건데 ㅋㅋㅋㅋㅋㅋ 두식이 너도 지금 팬티만 입고 있는 거 다 알아 ㅋㅋㅋ 아니라면 내 전 재산 너한테 다 넘긴다 ㅋㅋㅋ
나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확인했다. 비니가 호언장담한 대로 현재 내 모습은 팬티만 입고 있었다. 그렇다고 놈처럼 만 원권까지 지폐가 그려진 속옷은 아니고 놈과의 차이점이라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블랙 색상의 드로어즈를 입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씨발, 어떻게 알았지?”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괜스레 아무 이상 없는 방 안을 살펴보고 다시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자, 이미 신이 날 대로 신난 비니가 폭주하고 있었다.
[일반]비니: 두식아, 왜 말이 없어?
[일반]비니: 암말 없는 거 보니까 내가 맞힌 모양인데? ㅋㅋㅋㅋ
[일반]비니: 이렇게 된 거 입고 있는 팬티 색까지 맞혀 볼까? ㅋㅋㅋ 음 검정?
이번에도 보란 듯이 내가 입고 있는 팬티 색까지 맞혔다.
[일반]비니: 아이고 우리 두식이 검정 팬티 입고 있었구나. 형아 보여 주려고 입었어요? ㅇㅉㅉ
“아이씨.”
잠시도 쉬지 않고 깐죽대는 놈의 태도에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채팅 창에다 대고 ‘ㅅㅂ 도대체 어케 알았’까지 입력하다 멈췄다.
“가만, 이대로 인정할 게 아니라 잡아떼면 되잖아?”
지금 당장 내 옆에 있는 것도 아닌데, 사실인지 아닌지 저놈이 알 길은 없는 상태였다. 고로, 놈의 전 재산을 가져올 수 있는 딱 좋은 기회였다.
“딱 기다려. 내가 오늘 네 전 재산 다 턴다.”
[일반]곽두식: 전화 와서 통화하고 왔는데 ㅋㅋㅋ? 팬티는 무슨 ㅋㅋ 멀쩡히 옷 입고 있거든?
[일반]비니: 두식아, 거짓말하면 나쁜 어른 된다고 학교에서 안 배웠어? ^^
[일반]곽두식: 옷 입고 있다니까? 네가 틀렸으니까 전 재산 당장 내놔 ㅋ
[일반]비니: 그럼 지금 바로 인증샷 ㄱ 옵챗 팔 테니까
놈의 태도를 보니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이것보다 이번에도 제때 반응하지 못하면 놈의 전 재산을 받기는커녕 한동안 놀림감이 될 게 분명해 보였다.
“내 옷!”
즉시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옷을 집어 아무렇게나 입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얼굴이 나오지 않게 사진을 찍자마자 채팅 창으로 ‘두식♥비니’라는 이름으로 옵챗방을 만들었으니 1분 안으로 들어오라는 비니의 명령이 떨어졌다.
채팅방 이름에 눈살을 찌푸리며 오픈 채팅방 이름을 검색하고 들어갔다.
[비니: 두식이 왔어? 얼른 인증 ㄱㄱ]
“누가 못 할 줄 알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 전 촬영한 사진을 전송했다. 그러나 전송 완료된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좆됐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옷을 입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입은 옷이 문제였다. 상의는 오늘 출근했을 때 입었던 셔츠였으며 하의는 배달 음식을 받을 때나, 집 앞에 잠깐 볼일이 있어 외출할 때마다 자주 입는 잠옷 바지였다.
차라리 벌거벗고 있는 게 더 나아 보일 것 같은 끔찍한 패션 테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에 나는 황급히 사진 삭제하기를 선택했다. 다행히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삭제는 되었으나,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비니가 확인했는지 숫자 1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이었다.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 비니에게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비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ㅊㅋㅋㅋㅋㅋㅋㅋ 우리 두식이 무척 급했나 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니: 그렇게 내 전 재산이 가지고 싶었어요? 5959 ㅋㅋㅋㅋㅋㅋㅋㅋ]
[비니: 노력이 가상해서 봐준다 ㅋㅋㅋ 거래 걸 테니까 받아 ㅋㅋㅋ]
꼴이야 우스워졌지만, 어찌 됐든 말했던 대로 자신의 전 재산을 주려는 모양인지 게임 속에서 비니가 거래를 걸어왔다. 놈의 전 재산이 얼마나 될까 내심 기대를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턱 하는 아이템이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1골드 금화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어서 1골드가 계속해서 올라왔고, 한참 동안 그 짓이 반복되다 마침내 마지막 금화를 올리자마자 비니가 말했다.
[일반]비니: 너를 향한 내 마음 ㄱㅇㅅㅇㄱ
“…….”
거래 창에다 1골드짜리 금화로 하트를 만든 놈에게서 얼른 받지 않고 뭐 하냐는 재촉까지 이어졌다.
[일반]곽두식: ㅡㅡ 장난하지 말고 빨리 전 재산 내놔
[일반]비니: 솔직히 내 전 재산 운운하기에는 양심에 찔리지 않아? ㅋㅋㅋㅋ 아까 그 사진 누가 봐도 조금 전까지 팬티만 입고 있었다고 하는 꼴인데? ㅋㅋㅋㅋㅋ
[일반]곽두식: ㅁㅊ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너만!!!
[일반]비니: 흠, 그래? 그럼 길원들한테 물어볼까? 나 아까 사진 저장했거든 ㅋ
[일반]곽두식: 당장 삭제해 ㅁㅊㅅㄲ 단쳇방에 올리기만 해 봐
[일반]비니: 농담이야 ㅋㅋ 진짜 믿었어? 내가 뭐 하러 쓸데없이 남자 사진을 저장해 ㅋㅋ
[일반]곽두식: 못 믿겠으니까 지금 바로 갤러리 인증해 봐, 그럼
[일반]비니: ㅇㅋㅇㅋ
인증해 보라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한 놈은 얼마 있지 않아 채팅방에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동영상 2개를 전송했다. 두 영상 모두 처음에는 아무런 소리 없이 놈의 커다란 손이 장난스럽게 인사하듯 양옆으로 몇 번 움직이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서 휴대폰 갤러리에 들어가 각 폴더를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끝이 났다.
혹시나 다른 곳에 이미 전송해 놓고 사진을 저장하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찜찜했으나, 발가벗은 사진도 아닌 데다, 얼굴도 드러나지 않은 사진으로 놈이 나쁜 마음을 먹더라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아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일반]비니: 잘 봤어? 내가 폰을 2개 쓰고 있어서 ㅋㅋ 업무상으로 사용하는 폰이랑 개인용 폰 이렇게 2개 ㅋㅋ
[일반]곽두식: 안물안궁ㅗ
[일반]비니: 차갑기도 해라 ㅋㅋ 그나저나 던전 다녀왔어? 아직 안 갔으면 같이 가 줄까?
던전 이야기에 얼마 전 겪었던 안 좋은 일화가 생각나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삽고순지 하순지 그놈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일반]곽두식: 다녀는 왔는데 이상한 사람 만나서 가기 싫어 ㅡㅡ
[일반]비니: 이상한 사람?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집요하게 추궁하는 비니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이 그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마치 어른에게 고자질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으나, 내 이야기를 듣고 내 편에 서서 동조해 주는 놈을 보니 마음이 후련하기도 했다.
[일반]비니: 앞으로 혼자 가지 말고 길원들한테 도와 달라 그래 ㅠㅠ 오늘은 나랑 길원들이랑 같이 가 보자 ㅇㅋ?
[일반]곽두식: ㅇㅇ 근데 참고로 나 아직 컨트롤이 미숙해서 엄청 민폐 끼칠 것 같은데
[일반]비니: ㄱㅊㄱㅊ 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비인데 첨부터 어케 잘해 ㅋㅋ 힐 하다가 탱커도 죽여 보고 그러면서 쑥쑥 크는 거지 ㅋㅋㅋㅋ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보다 길원들이랑 같이 가는 게 여러모로 멘탈에 좋을걸 ㅋㅋ
비니 말대로 생전 모르는 사람보다는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눠 본 길원들이랑 같이 가는 게 여러모로 나아 보였다.
[길드]비니: 뉴비 두식이와 함께 떠나는 짜릿한 던전! 딜러 선착순 2명 모집
[길드]무등산수박: 나나나난나나나나나나나나나나
[길드]큐띠빠띠: 22222222222222222222 손손
[길드]비니: 모집 끝 다들 보이스 ㄱㄱ
[길드]밤밤무슨밤: 아, 화장실 다녀온 사이 늦었네 ㅠㅠ 다음에 같이 가여 ㅠㅠ
[길드]곽두식: ㅎㅎ
이어서 화면 중앙에 ‘비니 님의 파티에 가입하시겠습니까?’라는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곧바로 승낙한 뒤 길원들이 모인 보이스에도 접속했다.
-우리 두식이 어서 와.
-두식아 안녕?
-안녕하세요, 두식 님. 처음 뵙네요. 저는 큐띠빠띠고요 나이는 두식 님이랑 같은데 말 편하게 할까요?
뒤이어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이 돌아와 나도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채팅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길원들 모두 헥터 던전 하드 모드에 진입했다. 하드 모드라 그런지 던전 분위기가 으스스한 게 보기만 해도 뉴비 기를 팍팍 죽였다.
-두식아 넘 긴장하지 마. 천천히 진행할 테니까.
-또빈 마음껏 죽여도 되니까 편하게 돌아.
-맞아. 또빈은 많이 죽여도 됨.
-그래그래. 나 많이 죽여도 되니까 편하게 돌아.
얼마든지 실수해도 되니 부담 갖지 말라는 말에 지난번보다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 정말로 출발해 보겠다는 비니의 말을 끝으로 앞으로 이동하려는데 뒤늦게야 그때와 똑같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다급하게 채팅으로 길원들을 불러 세웠다.
[파티]곽두식: 잠깐만 ㅠㅠ 나 장비 구매하는 거 깜빡했어 ㅠㅠ
-장비?
-음? 보통 메인퀘 진행하다 보면 장비 그냥 줄 텐데? 장비 창에 들어가서 최강 장비 버튼 클릭해 봐. 참고로 장비 창 단축키 E 누르면 돼.
[파티]곽두식: 응 잠만 한번 해 볼게 ㅠㅠ
비니가 알려 준 대로 장비 창 단축키를 누르고 이어서 최강 장비 버튼을 클릭하자 나한테 있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장비로 순식간에 교체가 이루어졌다.
[파티]곽두식: 헐; 나한테 이런 장비 있는지도 몰랐는데;
-뉴비들은 잘 모르긴 하지. 이 겜이 나온 지 좀 오래된 거라 뉴비들한테 불친절하거든. 장비 보니까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이제 진짜 출발한다?
장비까지 새로 바꿔 입고 나니 아직 본격적으로 던전을 돌기도 전이건만 벌써부터 클리어한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든든했다. 앞장서서 달려가는 비니의 뒤를 나는 열심히 쫓아갔다.
길원들과 함께하는 첫 사냥의 시작이었다. 곁에 있는 고인물들만 3명이니 이 던전 정도는 금방 클리어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그러나 항상 현실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는 걸 얼마 가지 않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 * *
[파티]곽두식: 하, 진짜 ㅠㅠㅠㅠ 죄송합니다 ㅠㅠㅠㅠ
-두식아, 괜찮아! 기죽지 마!! 원래 뉴비 땐 다 이런 거야
-지금처럼 탱커 죽여 가면서 실력 느는 거지.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그래,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오히려 난 색다른 경험이라 재밌는데? 여기서 독 스탯 10이나 쌓인 건 처음 겪어 봐서 신기하네.
자신의 부활을 받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비니의 캐릭이 살아났다. 그러나 부활이 되자마자 곧바로 힘없이 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모습에 나만 빼고 모두에게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오더니 동시에 채팅 창에도 불이 붙었다.
[파티]무등산수박: 앜 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비니: 두식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큐띠빠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너무 많이 웃어서 배가 넘 아팤ㅋㅋㅋㅋ
[파티]곽두식: 아씨, ㅠㅠㅠㅠ
[파티]비니: 두식아 ㅋㅋㅋ 이럴 때는 나 살리고 나서 바로 힐을 줘 ㅋㅋ 지금 독 스탯이 쌓여 있어서 피가 자동으로 계속 닳거든? 그래서 신성한 축복 스킬로 피 한꺼번에 채운 다음에 상태 해제 스킬 바로 쓰면 독 스탯 바로 사라지게 할 수 있어 ㅋㅋㅋㅋ
[파티]곽두식: 알았어. 한번 해 볼게
[파티]비니: 우리 두식이 파이팅!
“신성한 축복, 신성한 축복.”
잊어버리지 않도록 스킬 이름을 중얼거리며 비니를 부활시켰다. 비니의 캐릭터가 살아나자마자 나는 곧바로 신성한 축복 스킬을 사용해 비니의 생명력을 가득 채워 준 뒤 이어서 상태 해제 스킬을 사용했다.
-잘했어, 두식아. 지금부터 계속 이렇게 하면 돼.
비니의 뒤를 이어 다른 길원들에게서도 격려와 칭찬이 이어졌으나, 한번 저 밑으로 가라앉은 기분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간신히 중간 보스를 물리친 지금에 이르기까지 비니를 포함해 다른 길원들을 수도 없이 죽였기 때문이다. 특히 탱커 역할인 비니를 가장 많이 죽였다. 왜냐하면 선두에서 파티원들이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하는 탱커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딜을 넣는 것도 포기하고 미친 듯이 비니에게 힐을 쏟아부었지만, 몬스터들에게 공격받을 뿐만 아니라 독 스탯까지 쌓이니 피가 미친 듯이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비니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을 수만은 또 없는 게, 몬스터들의 독 공격은 파티원 전체에게 피해를 끼쳤기 때문에, 다른 길원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까지도 틈만 나면 죽어 나갔다. 게임 화면 속 시간을 보니 어느새 던전에 들어온 지도 1시간이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맞아. 여기는 특히 몬스터들이 독을 뿜어서 힐러들한테는 어려운 던전으로 소문난 곳이기도 하거든.
-자자, 다들 좀만 더 힘내서 막보까지 가 봐요.
아무리 초보들에게는 어렵다는 던전이라 할지라도 나만큼 파티원들을 암살하는 힐러는 없을 터였다. 이쯤 되니 어디 가서 힐러라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자신은 힐러가 아니라 암살자였다.
막보까지 가는 길. 비니와 길원들에게서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하면 된다, 저런 상황일 땐 이렇게 하면 된다 등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귀한 조언을 들었으나, 이미 멘붕이 된 자신의 정신은 이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순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실제 성격은 그리 착한 편도 아니고 입도 험했다. 그래서 평소 제 성격대로라면 제대로 잘 풀리지 않는 플레이 때문에 이쯤에서 온갖 욕이 튀어나왔어야 했지만, 나 때문에 실시간으로 죽어 나가는 파티원들을 보니 잔뜩 주눅이 들어 욕이고 뭐고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가까스로 날 포함한 일행들은 마지막 보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보스 외형을 보니 고약하게 생긴 게 쟤도 참 지랄 맞겠구나 하는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항상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는 법이었다. 본격적으로 보스를 잡으러 안으로 들어가기 전 스피커 너머로 비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식아, 얘가 이 던전에서 마지막 보스답게 제일 까다로운 보스거든? 얼마든지 실수해도 되는데 일단 공략을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설명 들을 준비가 되면 채팅 창에 대답해 줘.
[파티]곽두식: 들을 준비 됐어.
이미 해당 던전에 오기 전 따로 혼자서 공략을 보았으나, 막상 던전 안에 들어오니 공부했던 모든 것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기에 스피커 소리를 높인 후 귀를 기울였다.
-그럼 설명할게. 얘도 독을 가진 보스 몹인데 얘가 초반에 바닥에 독을 뱉거든. 이걸 밟으면 10초 후에 즉사하는데 범위가 또 더럽게 넓기도 하고, 파티원들이 서 있는 위치 중 랜덤 장소에 생겨. 그러니까 캐릭터 잘 보고 있다가 피하면 돼.
[파티]곽두식: 응, 알았어 ㅠㅠ
-좋아. 그럼 이어서 설명할게. 전투 중간쯤 접어들면 얘가 힐러 제외하고 파티원들한테 돌아가면서 독을 뱉거든? 근데 이게 금방 사라지는 게 아니고 1분 정도 독 효과가 유지돼. 그래서 이때 해당 파티원한테 빨리 힐을 해 주지 않으면 또 죽으니까 이것도 잘 기억하고 있다가 힐 해 주면 클리어에 도움이 될 거야. 그럼 준비되면 말해 줘. 바로 출발할게.
“후우.”
드디어 마지막 보스를 앞두고 있다는 생각에 긴장으로 손바닥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즉시 책상 위에 있는 휴지를 뜯어 손을 닦아 주고,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긴장 상태로 있던 뻐근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해 준 뒤 비장한 각오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파티]곽두식: 준비됐어 ㅜ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 볼게
-열심히 해 주기만 하면 돼. 혹시 실수해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다시 하면 되니까.
더 이상의 실수는 자신 쪽에서 사양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길원들을 암살한다면 힐러 지팡이를 절반으로 부수거나 땔감으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출발을 알리는 비니의 말을 끝으로 마지막 보스와의 전투에 돌입했다. 초반에는 시작이 좋았다. 엄청 강력하게 생긴 외형치고는 파티원들에게 들어오는 대미지가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할 만하겠는데? 아, 제발 나한테만 나타나지 마라.”
그러나 내가 방심하기만을 노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내 캐릭터가 서 있는 발밑으로 독 장판이 나타났다.
“씨발!”
힐러인 내가 여기서 죽어 버리면 꼼짝없이 재전투를 해야 했기에 나는 열심히 장판이 깔려 있지 않은 바닥 쪽으로 죽기 살기로 달렸다. 다다다다 키보드를 연타하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록 키보드를 두드린 게 효과가 있었다. 다행히 즉사만은 피할 수 있었다.
-두식아, 방금 잘 피했어.
-맞아. 진짜 잘했어.
-우리 두식이 잘하는데? 마지막까지 그렇게만 해 줘.
곧바로 길원들에게서 칭찬이 날아들었다. 그 칭찬을 듣고 있자니 아래로 축 처져 있던 어깨가 한 뼘 정도 솟아올랐다. 그 뒤로 이어진 전투도 무난하게 흘러가는가 싶었으나 문제는 보스의 생명력이 20% 남았을 때 터졌다.
놈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건지 큐띠빠띠 캐릭터를 향해 사정없이 독을 내뿜었다. 사전에 비니에게 들었던 대로 나는 곧바로 독 스탯이 쌓인 큐티빠띠 집중 케어에 들어갔다. 1분이라는 시간이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뼈저리게 느꼈다. 간신히 큐띠빠띠를 살려 냈다는 기쁨에 취한 것도 잠시,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으니.
-어? 또빈!
비니를 부르는 다급한 수박 누나의 목소리에 그제야 비니가 있는 곳을 확인하자, 좀 전까지 용감하게 보스를 도발 중이던 비니는 어느새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 큐띠빠띠에게 온 신경을 쏟는 바람에 탱커인 비니를 신경 쓰지 못한 게 원인인 것 같았다. 탱커인 비니가 죽어 버리자 다음 먹잇감을 물색하던 보스 몹이 곧바로 수박 누나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수박 누나가 죽자 그다음으로 큐띠빠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까지 모조리 죽였다.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이번 역시 내가 실수한 게 분명했다.
[파티]곽두식: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 ㅠㅠㅠㅠ
-괜찮아. 그래도 첫 트라인데 20% 남긴 거면 많이 온 거야.
-두 번째 트라이 땐 클리어할 수 있겠는데?
-이번에는 클리어 한번 가 보자고!
서로를 격려하는 훈훈한 분위기 그대로 두 번째에 클리어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한번 느낀 거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결국, 10번째 트라이 때 간신히 클리어했고, 보스가 사라진 자리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보물 상자가 등장했다.
상자 근처에 있던 비니가 상자 가까이 다가가자, 상자가 오픈되며 중앙 화면에 상자 안에 있던 보상들이 자동으로 인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스템]: 곽두식 님이 야옹 고양이 인형을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 곽두식 님이 포포 가루를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 곽두식 님이 100,000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 곽두식 님이 포포 가죽을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 곽두식 님이 생명력 500 포션 2개를 획득하였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고생 많았어.
-으아, 깨긴 깼구나. 사실 나 클리어 못 할 줄 알았어. 시간이 넘 촉박해서.
제한 시간 5분을 남겨 두고 아슬아슬하게 클리어한 터라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신조차도 당연히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멘탈이 너덜너덜해지긴 했어도 어찌 됐든 클리어하기도 했고, 비니를 포함해 파티원들도 일찌감치 던전에서 퇴장한 후였다. 나도 당장 어두컴컴한 던전에서 벗어나고 싶어 서둘러 던전에서 퇴장하기를 선택했다. 화면 로딩이 끝나고 나타난 장소는 던전에 입장하기 전에 있었던 비니의 집이었다.
당연히 비니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봤으나 어찌 된 일인지 집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두식아, 고양이 인형 얼른 소환해 봐. 가지고 싶어 했잖아. 참고로 인형은 그냥 인벤이 아닌 인형 인벤토리에 있어. 단축키 V 누르면 되고, 인형 소환하려면 인형에다 대고 마우스 오른쪽 클릭해서 소환하기 선택하면 돼. 한번 해 봐.
비니의 목소리에 깜빡 잊고 있었던 고양이 인형의 존재가 떠올랐다. 서둘러 V 키를 눌러 인벤을 확인하자 바라보고만 있어도 귀여움이 물씬 느껴지는 고양이 인형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우스 오른쪽을 클릭해 소환하기를 선택했다. 그러자 뾰로롱 귀여운 효과음과 함께 인벤에 있던 고양이가 필드에 나타났다.
“……귀여워.”
-고양이 인형 마우스로 클릭하면 캐릭터가 인형 끌어안기도 하거든? 한번 끌어안아 봐.
[파티]곽두식: 뭘 끌어안기까지 해 그냥 귀여워서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었을 뿐이지 끌어안을 정도는 아냐 ㅋㅋ
당장 껴안고 싶어지는 귀여움이었으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인형을 껴안았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아 괜스레 한번 튕겼다.
“이만하면 아무도 모르겠지.”
고양이 인형을 끌어안기 전 다시 한번 화면을 전환해 근처에 누가 있는지를 살폈으나, 주변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라고는 내 캐릭터와 고양이 인형뿐이었다. 이 틈에 얼른 끌어안아 봐야지 싶어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고양이 인형을 클릭했다.
그러자 정말 비니의 말대로 내 캐릭터가 허리 숙여 고양이를 들어 소중하게도 품에 끌어안는 게 아닌가.
“이런 기능도 있었단 말이야? 김영석, 이 새끼는 왜 이런 기능이 있다는 걸 숨긴 거야? 하여튼 도움 안 되는 새끼라니까.”
그야말로 고생한 보람이 있는 귀여움이었다. 화면을 확대해 품에 안긴 고양이를 보며 흐뭇함에 잠겨 있을 때였다. 고양이를 끌어안고 있는 내 캐릭터 앞으로 비니 캐릭터가 등장했다. 그것도 그냥 나타난 게 아니라 어디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던 모양인지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공중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우리 두식이 고양이가 그렇게 귀여웠어요?
“으악!”
갑작스레 등장한 비니 때문에 서둘러 품에 안고 있던 고양이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고양이를 안기 전 분명히 주변을 살폈는데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모양새에 하늘을 쳐다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구름과 날아가는 새뿐이었다.
[파티]곽두식: 어디서 나타난 거야? ㅅㅂ 깜짝 놀랏잔아1!!
-나?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지. 한 번씩 지붕 위에 올라가 상쾌한 공기 마시고 오면 기분이 좋거든. 근데 진짜 내가 있는지 몰랐어? 지금 파티 상태라 지도에 내 위치 그대로 나올 텐데?
비니의 말에 당장 지도를 확인하자 놈의 말대로 비니의 위치가 나타나 있었다. 씨발, 왜 이걸 볼 생각을 하지 못했지? 사전에 지도만 미리 확인했더라도 비니 앞에서 이런 개쪽을 당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파티]곽두식: ㅅㅂ 지도로 파티원 위치 확인할 수 있다고 나한테 말을 해 줬어야지1!!
-우리 두식이, 진짜 찐 뉴비였나 보네. 귀여워라.
-뭐야,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아아, 무슨 일이 있었냐면…….
비니에게 들킨 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길원들에게까지 놀림을 받고 싶지 않았다. 비니가 말을 할세라 서둘러 채팅 창에 메시지를 입력하고 엔터를 치는 순간 등골이 싸늘해졌다.
“……아, 씨발.”
[파티]곽두식: 다른 길원들한테 내가 고양이 끌어안았다는 이야길 하기만 해 봐1!!
조금 전 던전을 클리어하고 밖으로 나온 후 아직 파티는 해제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고로 비니뿐만 아니라 지금 자신이 한 말을 같은 파티에 있는 다른 길원들도 모두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귓속말을 보내야 한다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달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푸하하하하하.
-아, 두식아. 아, 나 너무 웃겨.
아니나 다를까, 스피커 너머로 같은 파티에 있던 길원들에게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에 전염이라도 된 듯 비니 또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파티]곽두식: ㅡㅡ 그만들 놀려요
-하아, 하아. 아, 너무 웃어서 배가 엄청 아파. 푸흡.
-올해 들어 최고로 웃겼어, 두식아. 큭큭.
좀처럼 그치지 않는 웃음소리에 차마 게임을 더 이어 갈 수 없어 황급히 종료했다.
-어? 두식아, 어디 가?
당황한 듯한 비니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지만, 게임뿐만 아니라 이어서 접속해 있던 보이스 방에서도 말없이 나오자 그제야 원룸 안이 고요해졌다. 그때,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짧게 울렸다. 손을 뻗어 확인하자 메시지를 보내온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비니였다. 그제야 인증 사진을 보내느니 뭐니 하면서 비니가 만든 채팅방에 들어간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비니: 두식아]
[비니: 두식아?]
[비니: 두식아? 두식아!]
[비니: 두식아, 대답 좀 해 줘 ㅠㅠ 혹시 기분 상햇어? 미안 ㅠㅠㅠ]
채팅방에 접속하지 않고도 미리보기 기능으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에 나는 말없이 휴대폰 화면만 노려보았다.
[비니: 수박 누나랑 큐띠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 ㅜㅜㅠ 설마 이대로 게임 접거나 하지는 않을 거지? 응? ㅜㅜ]
[비니: 두식이, 네가 접속할 때까지 기다릴게 ㅠㅠ 게임 접지 마 ㅠㅠ]
[비니: (사진)]
[비니: 기다릴게! 돌아와!!]
게임을 접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게임을 접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놈의 태도를 보니 약간은 속이 시원했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왜 저렇게까지 하지?”
개인적으로 대가 없는 친절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명 내게 무언가를 바라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자신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투를 잘하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뉴비였다.
“정말 말 그대로 내가 뉴비라서 잘해 주는 건가.”
이 게임이 유독 기존 유저들이 뉴비에게 친절하다고 말해 주던 영석이 떠올랐다. 그러다 어쩌면 조금 전 일 때문에 미안해서 저렇게까지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그렇게 미안하면 있을 때 잘하지. 쯧.”
컴퓨터 전원을 마저 끄고 휴대폰을 손에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침대가 있는 곳으로 가 털썩 누웠다.
편하게 누운 채로 휴대폰을 터치해 비니가 있는 오픈 채팅방에 접속하는 순간, 바로 보이는 사진 때문에 내 입에서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사진은 어디서 구한 거야.”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메시지 아래로 비니가 보낸 사진에는 펑펑 쏟아져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망부석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해당 사진은 예전부터 종종 보던 사진이라 단번에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나는 곧바로 메시지를 전송했다.
[나: 앞으로 한 번 더 놀리기만 해 봐 ㅡㅡ 죽을 줄 알아]
때마침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숫자 1이 사라졌다.
[비니: 두식아 ㅠㅠㅠㅠㅠㅠ 읗ㄴ망허ㅓ미너허어 ㅠㅠㅠ]
[비니: 앞으로 내가 잘할게 ㅠㅠㅠㅠㅠㅠ 그러니까 얼른 겜 접속해 ㅠㅠ]
힐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자 벌써 오후 11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내일은 출근해야 했기에 나는 곧바로 거절을 담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나: 지금 시간이 몇 신데 ㅋ 내일 출근해야 해서 오늘은 ㄴㄴ]
[비니: 그럼 내일이라도 ㅠ_ㅠ 꼭 들어와. 알았지? 나 기다린다? ㅠㅜㅠㅜ]
[나: ㅇㅇ]
[비니: 그럼 잘 자, 두식아 우리 꿈에서 만나자 :D]
“미친. 악몽 꾸라고 저주를 하네.”
지금까지의 대화 패턴으로 볼 때 여기서 더 대꾸했다간 대화가 끝나지 않겠지.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자연스레 잠을 잘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 테고, 내일 출근하면 존나 피곤하겠지? 그래서 해당 메시지는 가볍게 무시해 주기로 하고 비스듬하게 누워 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 이어서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던전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닌 덕분인지 나는 금방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