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관의 사생활 (외전) - 현월궁의 주인
1. 황실의 보물
“태후마마, 속상해 죽겠습니다.”
화창하고 한가로운 봄날이었다. 호수에 있는 정자에 앉은 현홍왕비는 향기로운 차를 앞에 두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마침 운서가 아이들을 데리고 영현궁에 머물 때였다. 운서는 태후에게 사돈이 될 장사도에 대한 흉을 한창 늘어놓고 있었다.
그때, 현홍왕비가 태후에게 의논할 일이 있다며 입궁한 것이다.
현홍왕비는 선황제의 친동생인 효창왕의 정실이다.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을 제외하면 모두 혼인하여 잘살고 있었다.
가끔 연진과 함께 승마와 검술을 연마하러 입궁하는 사촌들이 바로 효창왕과 현홍왕비의 아들들이었다.
“태후마마, 마마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둘째와 셋째는 벌써 가정을 꾸려서 손주를 낳았는데, 첫째만 혼자 허송세월하고 있으니, 저러다 쓸쓸히 여생을 보낼까 걱정이 됩니다.”
아들 걱정을 하는 왕비의 눈이 더욱 촉촉해졌다.
“남색을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제대로 된 짝을 찾아서 연을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왕비의 말이 모두 맞습니다.”
태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현홍왕비는 크게 한숨을 쉬었고, 운서의 귀는 더욱 쫑긋했다.
운서도 현월궁의 주인인 아운을 잘 알고 있다.
황궁에서 몇 번이나 가까이에서 봤었고, 자신의 혼례식 때도 참석했다. 아운이 무기력한 얼굴로 매가리 없이 축하한다며 인사했던 게 기억이 났다.
‘원래는 총명하고 밝고 사랑스러운 분이었는데.’
아운은 연인이 죽기 전까진 밝은 사람이었다. 따스하고 자애로운 성격이라 연진도 그를 친형처럼 따랐었다.
왕자는 아버지의 시종을 사랑했고, 그와 혼인을 약속했었다. 그 때문에 크게 노한 효창왕이 그를 후계자의 자리에서 박탈한 것은 물론, 맨몸으로 내쫓았다.
연진이 별궁이었던 현월궁을 내주지 않았더라면 세상 물정 모르는 왕자가 궁 밖에서 홀로 길을 헤매다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아운을 어릴 때부터 돌봐주던 집사와 유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에….”
“당장 일할 사람이 없는데, 아운이 글쎄 다른 하인은 들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뭡니까.”
“이런…, 아기 때부터 돌봐준 집사와 유모가 죽었다니, 아운의 상심이 크겠습니다.”
“예, 제가 급하게 하인 몇몇을 보내놓긴 했습니다. 그런데 아운이 그들을 돌려보내려고….”
왕비는 이러다가 아들이 굶어 죽겠다고 울기 시작했다.
“태후마마, 그놈이 저를 말려 죽일 작정을 한 게 아닙니까!”
“설마, 그 착한 아이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부왕의 반대로 정인이 죽었다고 지금까지 두문불출하는 아이입니다. 저희 때문이라고 원망을 하는 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사랑스러웠던 왕자는 연인이 죽은 후에 소심하고 우울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10년이 지났어도 그는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고 현월궁에 처박혀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급기야 현홍왕비는 눈물을 떨궜다. 태후는 얼른 비단 손수건을 꺼내 왕비에게 건네주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사이였습니다. 남색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어디서 시종 따위가….”
현홍왕비는 신분이 낮은 놈이 제 아들을 유혹해서 혼을 쏙 빼놨다고 화를 냈다. 되바라진 놈이었다고 욕을 하다가 태후의 좋지 않은 표정을 깨닫고 바로 입을 닫았다.
왕비는 황후가 내관 출신이라는 걸 잊고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태후는 화내지 않았다. 대신 왕비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다독이기 시작했다.
“왕비,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내가 아운을 불러서 따끔하게 혼을 내도록 하지. 아니면 황궁에서 얼마간 지내게 하며 돌봐주든가.”
“마마, 정말이십니까? 그래만 주신다면 당분간은 발을 뻗고 자겠습니다.”
“왕비께서 발을 뻗고 주무실 수 있다면야 당장 금군이라도 풀어서 아운 왕자를 데려오도록 하지요.”
“…….”
운서는 태후와 왕비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10년 전, 왕자 아운의 혼약자가 집안의 반대로 목을 매고 죽은 것은 유명한 일이었다.
그것도 연진이 내어준 현월궁에서.
아운이 쫓겨난 뒤에 그를 찾아 현월궁으로 간 시종이 어느 날 아침, 정원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가 죽은 이유에 대해서 아운은 함구했다. 그러나 한동안은 여러 추측과 함께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다. 현월궁에서 살림을 차렸음에도 효창왕이 그를 위협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혔지만, 아운에게는 바로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인 모양이었다.
‘얼마나 상심이 컸으면….’
운서가 아운을 안쓰러워하고 있는데, 그때 유모와 오 내관이 아이들을 데리고 정원으로 나왔다.
“마마, 전하께서 자꾸만 나가자고 보채셔서….”
오 내관의 품에 안긴 보옥은 어서 내려달라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잘하였구나. 명이는 이리 데려오고 보옥이는 내려줘라. 더 안고 있다가 네 얼굴에 멍이 들겠다.”
“예.”
오 내관이 보옥을 땅에 내려주자마자 아이는 부리나케 운서에게로 아장아장 다가왔다. 운서는 일어나서 보옥이를 안고 이리저리 얼러주었다.
“황녀께서 황후를 닮아 벌써 미인입니다.”
“…하하.”
운서는 보옥이가 자신을 닮았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제가 보기에 보옥이는 숙부인 영서를 닮았는데, 가끔 다른 사람들이 닮았다고 해주니 힘들게 낳은 보람이 있었다.
현홍왕비가 영현궁에서 하룻밤 머물다 간다고 하여 운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는데, 보옥은 계속 정원으로 가자고 칭얼거렸다.
태후가 직접 수를 놓아서 공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밖에서 놀고 싶은 모양이었다.
운서는 떼를 쓰는 보옥을 꼭 안고 아이의 작은 뺨에 제 뺨을 비비며 얼렀다. 그래도 보옥이 얌전히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버둥거렸다.
보옥은 이제 막 두 살이 되었는데, 연진을 닮아서 힘도 체력도 좋았다. 아이의 칭얼거림에 두 손을 든 운서가 결국 오 내관을 불렀다.
“오 내관, 정원으로 바로 가자.”
“예, 마마.”
오 내관은 가마꾼들을 재촉해서 전각이 아니라 바로 정원으로 가자고 했다.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운서는 아이의 손에 공을 쥐여주고 땅바닥에 천천히 내려주었다.
태자 명은 요람에서 작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두 살이 된 보옥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작은 공을 굴리며 한창 공놀이에 빠져 있었다.
아장아장 걷는 보옥은 공을 집어 던지듯 바닥에 굴리면서 ‘까르륵’ 웃었다. 아이의 곁에 있던 운서는 얼른 공을 집어서 딸의 작은 손에 건네주었다.
“꺄….”
보옥은 공을 받자 운서를 향해 환하게 웃으면서 공을 굴렸다. 공을 쫓아 아장아장 걷는 보옥의 뒤를 오 내관이 재빨리 뒤따랐다.
“아이고, 전하. 그렇게 빨리 걸으시면 넘어지십니다. 조심, 또 조심하세요.”
오 내관은 아이가 넘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보옥의 뒤를 아등바등 따랐다.
보옥이 뒤뚱거리며 열심히 공을 쫓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것을 본 오 내관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팔다리가 짧은 오 내관의 손은 보옥이 있는 곳까지 닿지 못했다.
보옥이 앞으로 고꾸라질 찰나, 어디선가 커다란 손이 나타나서 아이의 몸을 안아주었다.
“이런, 전하. 조심하셔야지요.”
커다란 손은 작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고서 정자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땅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있는 오 내관은 그를 올려다봤다.
‘아니, 명석이 저놈이 여기는 왜?’
오 내관은 병부의 관복을 입은 명석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명석이 무관의 시험을 치르고 병부에 들어가 종 9품 배융부위가 되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저 하찮은 놈이 어떤 연유로 옥궁까지 온 건지 궁금할 뿐이었다.
“명석이구나, 어서 오너라.”
명석을 반기는 운서는 명석의 손에서 보옥을 받아 안고는 그를 연못 근처에 있는 정자로 데려갔다.
“관복을 입으니 이제 헌헌장부로구나.”
덩치가 유난히 좋은 명석은 평범한 관복을 입었을 뿐인데도 벌써 뛰어난 장수처럼 보였다. 운서는 활짝 웃으면서 오 내관에게 차를 내오라고 명했다.
차를 준비시키기 위해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오 내관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무관 시험 성적이 아주 좋았다고 들었다. 네 신분이 미천해서 아직은 좋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폐하께서는 네가 능력을 증명하면 출세할 거라고 하셨다. 나도 힘껏 밀어주마.”
“…마마, 소인은 배융부위도 감지덕지하옵니다.”
명석은 부모님이 가장 기뻐한다고 싱글벙글하며 덧붙였다.
이윽고 오 내관이 차를 가져왔다. 그는 명석을 경계하듯 노려보면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일은 좀 수월해졌더냐?”
“황후마마께서 신경을 써주시어 편히 근무하고 있습니다. 선배들도 잘해주시고요.”
“그래? 그거 잘되었구나. 아무리 내가 네 뒤를 봐준다고 해도 동료들에게 인심을 잃으면 출세를 해도 의미가 없으니, 잘 처신하여라.”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런데 대답하는 명석의 목소리는 영 힘이 없었다. 운서가 알고 있는 명석은 어려운 일이 있어도 늘 밝은 아이였다.
“명석아, 오늘따라 왜 힘이 없니?”
“실은 작은 주인님의 혼사 때문에….”
“아!”
명석의 대답에 운서는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얼마 전에 영서가 찬과의 혼례식 날짜를 잡았다며 소식을 전했었다. 그러니 영서에게 마음이 있던 명석이 시무룩해진 것도 이해가 갔다.
“작은 주인님께서 셋째 도련님과 혼인하시면 소인은 나가서 살아야겠지요?”
명석이 황궁에서 병사로 근무하고 있어도 그는 여전히 운서의 본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의 부모가 요선각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에 영서가 찬의 가족이 되면 장사도와 얽히게 되어 서로 불편해지니 나가겠다는 말이었다. 문제는 명석의 부모도 함께 일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었다.
배융부위의 녹봉으로는 아직 부모를 부양하기에는 벅차다. 그리고 명석의 양친도 어디서든 일을 하길 원하고 있었다.
“아니, 네가 왜 나가느냐? 형님이 새살림을 내서 나가야지.”
“안 됩니다. 소인이 어찌….”
“내가 그렇게 그 집안과 사돈을 맺는 건 안 된다고 했는데.”
찻잔을 힘껏 잡은 운서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보옥의 뒤를 쫓던 오 내관이 또 작은 돌에 발이 걸려 휘청한 아이의 몸을 재빨리 받쳐주며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에구구, 전하! 너무 빨리 걸으시면 넘어지십니다.”
“오 내관, 아이들은 원래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배우는 거네. 너무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괜찮아.”
“황후마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귀한 황녀님의 몸에 생채기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운서는 칭얼거리기 시작한 명을 안고는 애들은 몸에 흙 좀 묻히고 다치면서 크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오 내관은 운서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보옥의 뒤만 졸졸 따랐다.
보옥의 일거수일투족에 노심초사하는 오 내관의 뒷모습이 엉거주춤했다. 그것을 보고 운서가 웃는 사이 공을 쫓던 보옥이 갑자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잡풀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를 잡았다.
“으아악! 전하, 그 고귀한 손으로 지저분한 벌레를 만지시다니요!”
오 내관은 소리를 빽 지르며 어서 버리라고 종용했다. 보옥을 너무 과보호하는 오 내관의 모습에 운서는 명을 어르며 혀를 쯧쯧 찼다.
그때 연진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검은 정복을 입은 연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보옥을 안아 올렸다. 연진이 보옥을 높이 안아 올리자 아이는 까르륵 웃었다.
보옥은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연진에게 매달렸다.
“전하, 폐하의 의복에 흙이 묻습니다.”
“괜찮다, 오 내관. 우리 보옥이가 이제는 아주 잘 걷는구나. 금방 뜀박질도 하겠다.”
“아직 어리신데도 황녀님의 체력이 남다르십니다. 어찌나 공놀이를 좋아하시는지 매일 다섯 번은 정원에 나가자고 보채십니다.”
오 내관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는 공놀이를 좋아하는 보옥을 뒤쫓느라 쉴 틈이 없어 보였다.
“폐하, 오시었습니까.”
운서는 명을 안고 연진을 반겼다. 명석도 연진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래, 명석이 너로구나. 황후에게 네가 월등한 성적으로 무관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명석을 보는 연진의 시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해 아닌 오해가 풀렸다고는 해도, 운서가 다른 사내와 함께 있는 모습은 달갑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운서가 중간에 끼어들어 제가 명석을 불렀다고 두둔했다.
“명석이가 근무를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사람을 보내 여기로 잠깐 불렀습니다.”
“그런 것이냐? 나는 너와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왔는데….”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명석아, 잠깐만.”
명석이 재빠르게 근무지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운서가 그를 불렀다. 그리고 운서는 명석의 손에 은자가 든 주머니를 쥐여주었다. 동료들에게 인심을 잃지 말고 술을 사라고 챙겨주는 것이다.
명석은 손사래 치며 사양했다. 그렇지 않아도 운서에게 받은 것이 많았다. 제 학자금이며 용돈에, 가족이 입을 옷까지 마련해 준 것이다.
“네가 무사히 무관이 되어서 주는 상이니 받아라.”
“…예.”
명석은 허리를 굽혀 주머니를 받았다. 황후가 내리는 하사품을 거절하는 건 법도가 아니다.
명석이 돌아가자 연진은 삐뚜름한 시선으로 운서를 쳐다봤다.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는 놈이 명석이에게는 돈을 덥석덥석 주니 질투가 났다.
“왜 그런 시선으로 소인을 보시옵니까?”
“네가 저놈을 너무 챙기는 거 같다. 남동생 같다고 해도 진짜 남동생은 아니지 않느냐.”
“그게 그러니까… 저놈이 안쓰러워서 그럽니다.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리죠.”
운서는 날이 더우니 이만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연진은 투덜거리면서도 아이들을 안고 운서를 따라 순순히 들어갔다.
수라상이 차려지자 여관들을 물리고 운서가 직접 연진의 시중을 들었다. 운서는 황후가 되었어도 직접 연진의 수라 시중을 들고 있었다.
연진의 옆자리에 바짝 앉은 운서는 그에게 전복탕을 떠주었다.
“날이 더워서 몸보신을 위해 탕을 준비했습니다. 전복을 많이 넣었으니 다 드십시오.”
연진은 순순히 전복탕을 먹기 시작했다. 운서는 그런 그의 곁에서 명석의 사정을 말했다. 영서에게 고백도 못 하고 이제는 요선각에서 나오게 생겼다는 말을 연진은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사정이 딱하지 뭡니까.”
“영서가 그놈을 받아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냐?”
“그게 아닙니다. 명석이는 제 처지에 형님을 넘보는 건 말도 안 된다며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집을 구해주겠다고 해도 더는 신세 지고 싶지 않다면서 한사코 거절하지 뭡니까.”
그동안 영서와 운서에게 신세를 진 상황에 자기 마음을 전하는 건 무리라고 여긴 것이다. 거기에 영서는 이미 짝을 찾았으니 더더욱 고백할 수 없었다.
“그놈이 제 주제를 알아서 다행이구나. 사실 영서는 명석이 그놈보다 부례감과 혼인하는 게 더 낫지 않으냐.”
“예?!”
운서는 바로 도끼눈을 떴다.
“폐하께서 신분으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소인의 신분도 하찮았는데, 어찌 황후로 맞으셨답니까!”
“아니, 내 말은…. 영서가 너와는 다르게 계산이 빠르거나 영리하지 못해 사람의 됨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잖느냐.”
“…그렇죠.”
운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도 영서는 온실 속의 화초다. 선하고 남을 잘 돌봐서 요선각의 점원들이 많이 따르긴 하지만 약삭빠르지 못하다.
지금도 요선각의 실세는 어머니다. 영서의 성격이 워낙 순한 탓에 걱정된다며 가게를 완전히 물려주지 못한 것이다.
“명석이를 보아하니 그 아이는 배운 것도 부족하고 변변한 경험도 없는 어린아이라 커다란 요릿집을 경영할 영서를 뒷받침해주기엔 무리지 싶다. 반면, 부례감은 다르지 않으냐.”
동창의 수장이었던 찬은 유능한 인재다. 상인 집안에서 자란 그는 많이 배우기도 했고, 연진이 시키는 일을 차례차례 해결하면서 쌓은 경험도 만만치 않았다.
규모가 있는 음식점을 경영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거래처와의 문제나 직원이나 손님들과의 마찰도 많고, 또 주인에게 접근하려는 사기꾼도 간혹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서의 옆에서 그를 지키고 도울 사람으로 찬이 적합하다는 말이었다.
“…….”
운서는 연진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삐뚜름한 시선은 풀지 않았다. 연진은 황후의 작은 손을 잡고 볼을 잔뜩 부풀린 그를 달랬다.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고, 명석이의 사정이 딱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 인연이 아닌 게지.”
“…뭐, 그렇지요.”
“알았다. 태감에게 그놈과 식솔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알아보라고 할 테니, 뚱한 표정이나 좀 풀어라.”
“예?! 폐하, 참말이십니까?”
운서의 눈이 바로 휘둥그레졌다. 연진이 명석을 질투하여 또 툴툴거릴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 네가 명석이 그놈을 식솔로 여기니 나도 함께 돌봐주어야지. 약속하마.”
연진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나 사실 연진은 명석이 탐탁스럽진 않았다. 식솔은 개뿔, 커다란 덩치로 자꾸 운서의 곁을 얼쩡거리는 놈이 매우 거슬렸다.
자꾸 옥궁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도 모자라 명석이 오갈 곳이 없어지게 되면 운서가 계속 신경을 쓸 것이 아닌가.
자신과 아이들에게만 쏟아야 할 운서의 관심과 애정을 나눠 받는 놈이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연진은 명석이 못마땅해도 살 곳을 정해주려는 것이다. 우선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 짝도 찾아주면 둘의 사이가 자연스레 멀어질 테니, 제 마음도 한결 편할 것이 아닌가.
‘이왕이면 북정도호부 같은 곳으로 멀리 보내면 좋을 텐데.’
연진은 명석을 아예 아주 먼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당분간은 운서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이만 벅벅 갈았다.
‘그래, 그놈을 차근차근 승차시켜서 경험을 쌓으라고 먼 곳으로 보내 버리면 되겠구나! 명석이 그놈이 부례감처럼 나나 운서의 주변 사람과 혼인할 일도 없을 테니….’
아무도 모르게 명석을 치워버릴 계획을 짠 연진은 속으로만 웃었다.
“폐하, 백성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어쩜 이리 군왕의 면모를 잘 갖추셨습니까.”
연진의 속마음을 모르는 운서는 지아비의 너그러움에 감탄만 했다. 감동했다면서 소매로 눈가를 꾹꾹 찍은 운서가 연진의 단단한 팔에 매달려 살랑거리며 교태를 부렸다.
“흠, 뭘 이런 걸 가지고 감동을 하는 게냐. 명석이 그놈도 내 백성이니 챙기는 것이지.”
“그래도 아랫사람의 사정을 세심하게 돌보는 제왕은 이 땅에서 폐하뿐일 것이옵니다. 우리 태자가 폐하의 인애를 그대로 닮아야 할 텐데요. 폐하는 너무 멋지십니다.”
운서는 거듭 멋지다는 말을 반복하며 연진의 품에 포옥 안겼다. 그뿐인가, 단단한 가슴에 말랑한 빰까지 비비고 작은 손으로 가슴도 꼬물꼬물 만졌다.
그에 명석을 질투했던 연진의 마음이 또 사르륵 녹았다.
“황후는 짐이 그리 좋으냐?”
연진이 완전히 풀어진 입꼬리를 한껏 치켜올리고 물었다.
“당연하지요! 폐하는 저의 영웅이십니다. 폐하께서는 소인이 황궁에서 어리바리하던 시절부터 탈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잘 돌봐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때부터 폐하를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운서는 연진의 단단한 팔을 더듬고 여린 어깨를 살랑거리며 한껏 아양을 떨었다. 연진이 없었다면 선배들의 텃세에 잘 지내지 못했을 거라며 한탄까지 섞으니, 운서를 바라보는 연진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연진이 운서를 제 다리 위에 올리고 든든한 팔로 꽉 안아주었다.
“운서야….”
“폐하.”
“귀여운 것. 그때부터 너는 내 것이었으니, 잘 돌봐주는 게 당연하지.”
황후가 되고 제 아이를 둘이나 낳았어도 운서는 여전히 귀여웠다. 특히, 지금처럼 자신에 대한 애정을 보여줄 때는 너무 좋아서 심장뿐이 아니라 온몸이 다 녹는 것 같았다.
연진이 운서의 부드러운 뺨에 제 얼굴을 문지르며 사랑스러운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그러자 운서가 연진의 목에 냉큼 매달려서 그에게 입을 맞췄다.
연진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운서가 살포시 웃으며 입술을 뗐다. 둘의 입술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연진의 입술이 운서에게 달라붙었다.
“흐응….”
깊은 입맞춤과 함께 연진의 단단한 손이 운서의 몸을 더듬었다. 커다란 손이 작은 엉덩이를 마구 주물렀다. 그 바람에 운서의 유두와 양물이 살살 부풀었다.
“운서야, 넣고 싶구나.”
어느새 운서의 가슴으로 내려온 연진의 입술이 옷 위로 탱글탱글한 돌기를 핥았다. 그럴 때마다 운서는 가슴과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응…, 폐하, 오늘 아침에도 읏, 아앙, 계속 넣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또 넣고 싶구나.”
운서가 엉덩이를 움직일 때마다 연진의 사타구니를 자극해서 그의 육봉도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연진은 금세 뾰족하게 달아오른 젖꼭지와 말랑한 엉덩이를 크게 주물럭거리면서 졸랐다. 촉촉하고 깊은 구멍에 제 성기를 넣고 싶다고.
“대낮부터 저를 부끄럽게 만드십니까…, 수라도 제대로 드셔야지요.”
운서는 연진을 밀어내는 듯해도, 거절하진 않았다. 오히려 눈가가 더욱 촉촉하게 붉어지고, 볼록하게 부푼 유두가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연진은 얼른 운서의 가는 몸을 더 바짝 안고 입술을 붙였다.
“수라는 이따가 먹겠다.”
“하는 수 없지요. 폐하, 잠깐만입니다.”
운서는 교태로운 웃음과 함께 연진의 매끈한 뺨에 쪽쪽, 입맞춤을 했다.
기분 좋게 웃은 연진이 운서에게 입맞춤을 하면서 운서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황후의 붉은색 옷이 금세 바닥으로 떨어지고 속바지와 속곳도 벗겨졌다.
“힝, 폐하… 낮부터 발가벗겨져 부끄럽습니다.”
순식간에 운서를 발가벗긴 연진은 그의 작은 몸을 제 다리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귀엽게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운서의 작은 엉덩이를 양쪽으로 힘껏 잡아 벌렸다.
그러자 운서의 부은 곳이 쫀득하게 벌어졌다. 연진은 운서의 부드러운 입구에 제 선단을 비볐다. 부드러운 입구에 뜨겁고 단단한 살이 스쳤다. 연진은 선단에서 흘러나오는 분비액으로 운서의 음문을 촉촉하게 적셨다.
“앙, 앗.”
“짐의 거근을 깊게 넣어줄 테니 얌전히 있어라.”
운서의 촉촉한 입술을 핥는 연진은 그의 말랑한 엉덩이를 거칠게 주물럭거렸다. 운서는 계속 부끄럽다고 앙앙거리며 연진의 어깨와 허리를 팔과 다리로 감싸고 답삭 매달렸다.
구멍에 닿은 연진의 기둥이 벌써 흉흉하게 열을 내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남근이 불끈거리며 운서의 구멍 입구를 계속 지분거리다가 안으로 꾹꾹 넣어졌다.
아침에도 연진과 교접을 한 터라 운서의 구멍은 아직 붉게 부어 있었다. 그런 곳에 연진의 살 몽둥이가 다시 깊게 들어왔다.
“하앗!”
안쪽을 한껏 벌리는 거근에 운서가 바르르 떨었다. 점막이 더 벌어지고, 울퉁불퉁한 흉기가 불쑥불쑥 들어왔다. 연진의 무릎 위에서 다리를 넓게 벌린 운서는 발끝까지 부들거렸다.
“하읏, 폐하…, 앗, 폐하의 옥근이 너무 뜨겁습니다.”
뜨거운 성기에 운서는 붉은 눈가를 더 붉히며 야살을 떨었다. 심지어 엉덩이 안이 델 것 같다고 몸을 들썩거렸다.
운서가 앙앙거리며 몸을 흔들 때마다 살들이 질척거리며 비벼졌다.
그것도 모자라 일부러 연진의 육봉을 거부하듯 안을 조였다. 연진은 운서의 가는 허리를 잡고 잘 들어가지지 않는 성기를 이리저리 비틀어 강제로 욱여넣었다.
“아으읏, 폐하, 강제로 넣으시면… 앗, 앗. 아픕니다. 항, 깊어….”
핏줄이 성성하게 부푼 대물이 운서의 작고 통실통실한 엉덩이 사이로 단번에 깊게 박혔다.
“아앗, 깊어!”
운서는 연진에게 매달려서 앙앙 신음했다. 그리고 배 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깊게 박힌 거근을 음란한 점막으로 우물우물 씹으며 조였다.
운서의 음란한 조임에 연진의 허리가 떨렸다. 보들보들하고 뜨거운 속살이 귀두부터 두꺼운 뿌리까지 완전히 삼켜서 바들거리고 있었다. 음탕한 떨림만으로 연진은 천상에 오를 것 같았다.
“하아, 네 구멍은 언제나… 정말 좋구나.”
“아응, 너무 커…, 으응, 몰라, 창피해….”
단단한 고환 위에 앉게 된 운서가 허리를 떨며 신음했다. 계속 훌쩍거리는 그는 작은 손으로 연진의 단단한 목에 꼭 매달렸다. 그러고는 연진의 육봉 때문에 제 속살이 너무 뜨거워 힘들다면서 몸까지 들썩거렸다.
젖은 구멍이 커다란 육봉을 찐득찐득하게 조였다. 그럴 때마다 젖은 보드라운 내벽과 뜨거운 살덩이가 비벼지고 뒤섞였다. 질퍽한 소리도 함께였다.
운서의 속살이 울퉁불퉁한 기둥에 음란하게 달라붙어 핏줄까지 조이는 탓에 연진의 허리가 부들거렸다. 매일 몇 번이고 삽입할 때마다 제 것을 뿌리까지 깊게 품어주면서 힘들다고 훌쩍거리는 운서 때문에 매번 가슴이 설렜다.
“…미치겠구나.”
“힝…, 저는 폐하의 거근 때문에 매일 부끄럽사옵니다. 폐하께서는 대낮부터 저를 창피하게 만드십니까. 아이도 둘이나 낳아드렸는데…. 매번 만족하지 못하는 옥근을 가지고 계시니. 흑, 왜 매일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
“아, 운서야…, 미안하구나.”
운서의 투정에 연진이 숨을 몰아쉬고 그를 달랬다. 커다란 손으로 운서의 가슴을 살살 만져주니 또 야살스러운 속살이 제 것을 질퍽하게 물었다.
운서는 훌쩍거리면서도 제 엉덩이를 살살 흔들며 달아오른 속살로 연진의 남근을 자극했다. 뜨거운 구멍이 성기를 질깃질깃 조이며 달아오른 살들이 음란하게 비벼졌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크게 발기한 흉기가 운서의 속살을 위협하듯 더욱 사나워졌다.
“으읏, 너무 뜨거워….”
“그러니 네가 밤낮으로 짐의 대물을 달래주어야지. 전에 분명히 네 입으로 아이만 낳으면 밤낮으로 넣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연진은 운서의 가슴살과 젖꼭지를 더듬으며 짓궂은 말을 보탰다.
“앙, 앙, 폐하, 지금도 밤낮으로 넣으시면서…. 혹, 모자라시는 겁니까?”
“당연히 모자란다. 그러니 짐의 배필인 네가 더 많이 넣게 해주어야지. 오늘 밤에는 밤새도록 넣고 자도 되는 것이냐?”
“히잉, 창피하게….”
눈가를 새빨갛게 물들인 운서는 창피하다면서도 엉덩이를 더 들썩거렸다. 그럴 때마다 구멍 속과 살덩이가 노골적으로 비벼지고 단단한 귀두가 운서의 전립선을 짓눌렀다.
“하읏, 폐하… 너무 좋아.”
“운서야….”
둘은 동시에 몸을 떨었다. 운서는 양물을 꼿꼿하게 세우고 연진은 저를 못살게 구는 말랑한 엉덩이를 거칠게 주물럭거리며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치덕치덕, 굵고 울퉁불퉁한 성기가 위아래로 움직이자 음란한 내벽이 더욱 잘게 떨렸다.
운서는 또 허리를 바들바들 떨면서 안을 꽉 조이며 두꺼운 성기를 속살로 음란하게 물었다.
“하윽, 배 속까지… 들어왔어.”
운서는 제 배를 만지며 훌쩍거렸다. 말로는 힘들다고 해도 운서는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음탕한 속살로 대물을 찰지게 맛봤다.
운서의 음란한 투정에 연진의 육봉이 더욱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연진은 더 참지 못하고 허리를 크게 튕겼다. 탄탄하고 젊은 몸이 힘차게 움직이니, 운서의 작은 몸이 위아래로 크게 들썩거렸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보드라운 점막에 울퉁불퉁한 기둥이 마구 비벼졌다.
“하읏, 아응, 폐하, 앗.”
신음을 내지른 운서의 엉덩이가 연진의 성기 위에서 크게 흔들렸다. 운서가 위로 들썩일 때마다 향유에 젖은 굵은 기둥이 번들번들하게 젖은 채로 드러났다가 금세 음란한 구멍 안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철썩철썩, 퍽퍽.
육봉이 차진 소리를 내며 운서의 속살을 때렸다. 그러면서 전립선까지 한꺼번에 찔렀다. 그대로 양물을 꼿꼿하게 세운 운서가 잔뜩 벌어진 발끝까지 바들거리며 훌쩍거렸다.
“아앙, 너무 깊어… 힝, 폐하, 커다란 옥근이 배 속을 찌릅니다. 힝, 구멍 아파. 흑, 아흑, 너무해요.”
“운서야, 운서야. 네놈이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운서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흥분한 연진의 살 몽둥이가 크게 부들거렸다. 연진은 운서가 내숭을 떠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매번 죽겠다고 야살을 떨 때마다 자신도 흥분해서 죽을 것 같았다.
“폐하께서 저를 거칠게 다루시니….”
“흠, 그럼 좀 더 거칠게 다뤄주마.”
연진은 운서의 말랑한 엉덩이를 꽉 잡고 위아래로 크게 흔들기 시작했다. 제 탄탄한 허리도 동시에 움직였다.
“아욱, 앗, 제발, 앙, 거칠어. 하읏, 앙… 좋아. 폐하, 깊어서 너무 좋아요.”
굵은 성기가 운서의 좁은 구멍 속을 훑으며 길게 빠져나왔다가 푹 박혔다.
운서가 위에 올라와 있는 상태라 그의 체중이 더해져서 연진의 육봉 위에 완전히 주저앉게 되었다. 푹푹, 음란한 소리와 함께 운서의 음문이 연진의 음낭에 철썩 달라붙었다가 끈적하게 떨어졌다.
“아으읏, 좋아. 항, 너무 깊어서… 좋아요. 제발!”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는 운서는 좋다고 헐떡거리며 연진에게 힘껏 매달렸다.
***
“대명전으로 가지 않고, 이대로 너와 함께 있고 싶구나.”
침상에 누운 연진은 품 안에 있는 운서를 힘껏 안으면서 아쉬워했다.
“저도 폐하와 함께 있으면 좋지만, 오늘은 금군의 훈련을 보러 가시는 날이잖습니까. 폐하의 군대가 모든 준비를 다 해놨을 텐데, 안 가시면 안 됩니다.”
가뜩이나 운서와 교접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운서는 어서 준비하시라 연진을 달랬다. 금군들이 연진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달 내내 열심히 훈련했다고 들었다. 그뿐이 아니라 오늘은 연진이 직접 우수한 병사를 뽑아 상을 내릴 예정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가지 않으면 수많은 병사가 실망할 것이다.
“…알았다.”
연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일어났다. 운서는 침상에 누워 옷을 입는 연진을 지켜봤다. 사실 운서도 연진과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주어진 책무가 먼저다.
그래도 서국의 천자가 자기가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니 좀 안쓰럽기도 했다.
‘어릴 때는 공부를 하느라 변변히 놀지도 못하셨는데.’
“폐하, 저녁에 돌아오시면 폐하의 옥근을 다시 깊게 넣게 해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내일 아침까지라도 얼마든지 넣으십시오.”
운서는 정무에 바쁜 연진에게 오늘 밤에는 제 몸을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뭐라?! 정말이냐?”
“당연하지요.”
“흠흠, 알았다. 약속했으니 이따 밤에 딴소리 말아라.”
운서의 말 한마디에 연진은 얼굴이 환해졌다. 운서도 금방 기분이 풀어진 연진을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침상에 엎드린 운서가 연진을 바라보면서 발끝을 흔들고 있는데 그가 다가왔다.
옷 매듭을 여며달라는 것이다. 운서는 몸을 일으켜서 연진의 옷에 손을 댔다. 운서는 아직 발가벗은 채였다. 연진에게 사랑받은 흔적이 남은 몸을 고스란히 보이면서 매듭을 느릿느릿 단정하게 여며주었다.
그동안 연진의 눈동자가 운서의 벗은 몸을 바쁘게 훑었다. 붉게 달아올라 있는 목덜미와 가슴 그리고 가느다란 허리와 매끈한 허벅지까지.
연진은 곧바로 손을 뻗어서 운서의 가슴을 만졌다. 손끝에 걸리는 통통한 젖꼭지가 유독 요사스럽게 붉었다. 연진은 다시 운서의 유두를 한입에 삼켜 핥고 빨고 싶었다.
그러나 입에 넣지 못하고 만지기만 하며 침만 삼켰다.
“네 젖꼭지가 유독 크게 부풀었구나. 아까 내가 만져서 그런 것이냐?”
“폐하, 짓궂게 굴지 마십시오.”
운서는 제 유두를 지분거리는 연진의 손을 찰싹 때렸다. 어서 손을 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연진은 바로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그의 손이 운서의 가슴에서 떨어지진 않았다. 운서의 눈치를 보며 집요하게 만지는 것이다.
운서는 발가벗은 채로 연진의 품에 안겨서 그의 뺨에 입을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쪽쪽, 입 맞춘 운서는 연진의 단단한 허리에 팔을 둘렀다.
“폐하, 이제 수라를 마저 드시고, 대명전으로 가셔야지요.”
운서의 요사스러운 애교에 연진의 심장이 녹고 혼이 쏙 빠질 것만 같았다. 만약 연진이 금군의 훈련을 보러 가야 하지 않았다면 이대로 운서의 엉덩이에 제 물건을 깊게 파묻고 새벽까지 허리를 흔들었을 것이다.
“네 덕분에 힘이 펄펄 난다. 이대로 금군과 검술 대결을 해도 내가 전부 이길 것 같구나.”
연진은 아직도 운서의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고 그의 몽글몽글한 젖꼭지를 희롱했다.
“아읏, 당연하지요. 폐하는 소인의 천하제일검이 아니시옵니까.”
“하하하, 그렇지.”
연진은 운서를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운서는 언제나 저를 위하고 작은 일도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우어줬다. 그 덕에 공부나 무예 연습이 힘들어도 견디고 늘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운서도 얇은 옷을 걸치고 내관을 불러 다시 수라상을 차리게 했다.
수라상이 다시 차려지자 연진은 운서를 끌어안고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연진은 아직도 욕정이 가시지 않았는지 운서의 옷자락에 손을 넣고 유두를 쓰다듬었다.
“운서야, 연회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는 게냐?”
“으응, 연회요?”
운서는 연진의 손을 또 찰싹 때렸다. 그래도 엉큼한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발간 젖꼭지를 계속 만지작거리는 연진이 씨익 웃으면서 운서가 좋아하는 소고기구이를 먹여주었다.
“그래, 네 가족들을 초대해서 연회를 열기로 했잖으냐.”
“아, 그렇죠. 폐하, 이번에도 소인의 식구들만 초대할 것이니 옥궁에서 조촐하게 진행할까 합니다.”
고기를 우물우물 씹는 운서는 볶은 전복도 달라고 했다. 연진의 젓가락이 얼른 채소와 함께 볶은 전복을 집어서 운서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연진은 운서가 보옥을 낳은 후, 약속대로 그의 식솔들을 황궁으로 불러 거한 연회를 열어주었다. 그것도 대명전에서.
대명전에서 연회를 여는 경우는 황제나 태자의 즉위식, 국혼이나 황실의 큰 제사를 지낼 때뿐이다. 그런데 연진은 대명전에서 폭죽을 터트리고 예인들을 모조리 부른 것도 모자라 그들을 가마에 태워 황궁을 구경시킨 것이다.
심지어 연진은 운서의 양친에게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했으니 좋은 마차를 타고 다니라며 말 여덟 필과 장인이 만든 마차까지 직접 선물했다.
“대명전에서 해도 괜찮은데.”
“너무 번거롭사옵니다.”
시끌벅적했던 연회를 떠올린 운서는 이번에는 조용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 연회는 네 마음대로 하여라. 그런데 이번에 부례감과 그의 식솔들은 부르지 않을 생각이냐?”
“…….”
전복을 다시 입에 넣기 직전이었던 운서는 찬을 입에 올리는 연진 때문에 숟가락을 탁 놓았다. 그러고는 입맛이 싹 사라졌다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영서와 찬이 곧 기일을 잡아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박하게 혼례를 치를 예정이었다.
운서는 두 사람의 혼례를 끝까지 반대했다. 심지어 명석이 형을 좋아한다고 그를 들이밀면서 영서가 찬과 헤어지길 원했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서는 결국 찬을 선택했다.
‘사기꾼 도사 같으니라고. 형님께 두 명의 남편이 생긴다고 하지 않았었나? 금칠을 한 수레는 찬이 맞았는데….’
운서는 제 형에게 두 명의 남편이 생기는 건 달갑지 않으나 찬이 행복한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특히, 좋은 걸 혼자 먹은 놈은 말이다.
“아니, 왜 화가 난 것이냐?”
“몰라서 물으십니까? 부례감의 식솔들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종자들인데, 그들과 사돈을 맺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운서는 이제 찬의 얼굴은 보기 싫다며 노발대발했다. 찬도 싫지만, 그의 부친과 첫째 형은 욕심만 많은 옹춘마니였다. 명석의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찬만 생각해도 짜증 나는데, 영서와 찬의 혼례가 결정되자마자 장사도의 첫째가 요선각을 들락거리며 거들먹거린다는 말이 운서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운서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를 까드득 갈았다. 운서의 얼굴에는 분노만 가득할 뿐,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운서의 살벌한 표정에 연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조만간 덕비와 현비의 일을 이실직고해야 할 연진은 운서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는 찬에 대한 일은 거론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폐하. 잠깐만요.”
“왜, 왜 그러느냐?”
“폐하, 아까부터 왜 그놈에게 계속 부례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제 내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구나. 내가 자꾸 잊게 된다. 부례감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
“그놈이라고 편히 부르십시오. 만인지상이신 폐하께서 천한 놈의 호칭을 뭐 하러 고민하십니까.”
운서는 콧바람을 크게 내며 더욱 역정을 냈다. 이전의 운서는 마음의 빚 때문에 언제나 찬의 역성을 들었었다. 영서와의 사이를 반대하다가도 찬이의 출세까지 신경 썼었다.
그런 운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찬이 도사의 약을 먹고 고환을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같이 없는 처지에 그런 좋은 게 있으면 함께 먹지. 그걸 혼자만 홀랑 먹냐!’
“…….”
이를 아득바득 가는 운서를 보자 연진은 잠시 찬을 안쓰럽게 생각했다. 전에는 연진이 화를 내도 운서가 그의 편을 들어주었는데, 이제 아무래도 좋다고 하는 걸 보니 단단히 미움을 산 모양이었다.
‘분명히 그 약 때문일 테지.’
고환을 되돌리는 약 때문에 운서가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운서는 찬의 고환이 복구된 것을 알고 자기도 먹겠다고 약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후가 온전한 남자가 되면 궁에서 살 수 없다는 반대에 부딪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찬이 더더욱 부러운 운서가 그를 고깝게 보는 것이다.
찬을 황궁으로 들일 생각을 하는 연진은 운서가 반대할까 봐 고민이 많았다.
“운서야,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태감의 면도 있고 해서….”
연진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래서… 사례교위가 어떨까?”
“폐하께서 그놈에게 사례교위의 직책을 내리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부례감보다는 품계가 낮지만, 그가 전에 잘못한 일도 있으니까.”
“…….”
“왜, 싫으냐?”
아직 뚱한 표정의 운서의 눈치를 살핀 연진이 다시 물었다.
“싫다니요. 사례교위면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직책이 아닙니까. 정4품 호군의 바로 아래인데, 죄를 지은 자에게는 너무 과분한 자리인 것 같사옵니다.”
사례교위는 형부 소속으로 종5품이다. 부례감의 품계가 종2품이니 품계로 보면 한참 아래로 강등되는 것이다.
“…너무 과분한 것이냐?”
실은 찬에게 별부사마의 자리를 주려고 했던 연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별부사마는 병부 소속이긴 했지만 대장군의 지위를 받지 않고 황제의 명만을 수행하는 부대의 수장이다.
찬의 유능함을 썩히고 싶지 않은 연진은 그를 별부사마에 봉하여 실컷 부려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운서가 쌍심지를 켜고 있으니 높은 관직을 주는 건 아직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선오와 은혜의 일로 당분간은 운서에게 잘 보여야 하고.
“…뭐, 폐하께서 그리 결정하셨으면 따르는 게 신하 된 도리가 아닙니까.”
“네가 싫다면 그놈을 황궁에 들이지 않겠다.”
“싫지 않습니다. 하나뿐인 형님의 배필을 놀고먹는 한량으로 둘 순 없지요.”
찬에게 이를 갈면서도 운서는 또 깜찍하게 제 형을 챙겼다. 운서의 말투는 떨떠름하지만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연진은 슬쩍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연진은 이만 대명전으로 가겠다고 일어났다. 운서도 흐트러진 옷을 여미고 그를 배웅했다. 연진은 운서의 침소를 나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내가 네게 할 말이 있었는데 그만 깜박하였구나. 운서야, 내일은 나와 홍안궁에 가자꾸나.”
“홍안궁에요?”
“그래, 덕비와 현비가 우리를 초대했다. 네가 보옥이와 명이를 낳고 느긋하게 연회를 즐긴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자리를 마련했다는구나.”
사실은 덕비와 현비의 사이를 밝히기 위한 자리다. 셋이서 이실직고를 하기 전에 연회를 열어서 운서의 기분을 한껏 풀어주려는 것이다.
“현비가 그동안 갈고닦은 솜씨를 보여주겠다는구나.”
“세상에나, 어쩜 이렇게 고마우실까. 저는 두 분께 변변히 해드린 일도 없는데 받기만 하니, 황실의 안주인으로서 부끄럽사옵니다.”
운서는 소매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동안 덕비와 현비에게서 선물을 받기만 했지, 두 사람을 초대할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뿐인가, 연진이 후궁전으로 걸음을 할 것 같으면 냉큼 아이들을 팔아서 옥궁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그리 생각하지 마라. 너는 보옥이와 명이를 낳아서 황실에 큰일을 해주었잖느냐. 내일은 나와 홍안궁으로 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꾸나.”
“예, 그리하지요.”
운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일이 기대된다고 했다.
***
다음 날, 해가 질 무렵에 운서와 연진은 나란히 홍안궁으로 향했다. 덕비는 정원 곳곳에 붉은 등불을 켜고 황제와 황비를 맞았다.
“이런 자리는 제가 먼저 만들어야 했는데, 황후가 되어서 제 할 일을 덕비에게 미룬 것 같아 민망합니다.”
푹신한 방석에 앉아 술잔을 받은 운서가 선오와 은혜에게 먼저 사과했다. 두 사람이 옥궁으로 찾아오면 항상 차만 마셨지 두 사람을 초대해서 연회를 열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둘러앉은 탁자에도 운서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했다. 운서는 산해진미를 보니 자신의 부족함이 더욱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괜찮다. 네가 아이들 때문에 바쁘다는 건 덕비와 현비도 알고 있으니까.”
연진은 운서 대신 변명을 해주었다.
“폐하도 참….”
운서는 연진을 향해 눈을 흘겼다. 후궁들 앞에서 눈치 없이 제 편을 들었다고 가볍게 타박을 한 것이다.
덕비와 현비도 연진의 아내다. 그런데 연진이 팔불출의 모습을 보이니 민망하기 그지없고 앉은 자리가 좌불안석이었다.
‘가뜩이나 폐하를 혼자 독점하고 있어서 미안한데, 눈치 없으시긴.’
연진을 빤히 보는 운서는 그가 후궁들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속으로만 혀를 끌끌 찼다.
정작 운서는 자신을 둘러싼 세 명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서가 민망해하는 사이 후궁들과 연진이 재빠르게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연진은 지금이 딱 좋을 때니 어서 이실직고하자고 눈짓했고, 선오와 은혜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용기를 낸 사람은 은혜였다. 그녀는 운서에게 술을 권하며 오송주를 잔에 가득 따랐다. 은혜는 운서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짧은 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오늘 황후마마를 모신 이유는 저와 덕비가 마마께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 무엇이든 말씀해보세요.”
운서는 입꼬리를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후궁들이 저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긴장한 것이다. 연진을 저만 독점하는 게 미안하지만, 연진을 나누어 달라는 말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이외라면 덕비와 현비가 무엇을 말해도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그간 황후마마께 미처 말씀을 드리지 못한 비밀이 있습니다.”
선오도 술잔을 비운 운서를 힐긋 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나 곱고 평온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긴장으로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래요? 대체 저,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저기 그게, 일단 한 잔 더 마셔야겠습니다.”
선오와 은혜는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마주 봤다.
두 사람은 운서가 보옥을 낳은 후에 이런 자리를 마련하여 자신들의 사이를 고백하려 했었다. 그런데 운서가 바로 둘째를 회임하는 바람에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까지 오게 된 것이다.
운서는 선오와 은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길래 뜸을 들이는지 답답한 마음에 술병을 들었다.
“이번엔 제가 한잔 따르죠.”
운서의 말에 선오와 은혜는 잔을 들어서 술을 받았다. 그런데 술을 받은 선오의 손이 살짝 떨리는 걸 운서가 눈치챘다.
언제나 의연한 덕비가 긴장할 정도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운서의 가슴도 덩달아 두근거렸다.
사실 운서도 선오와 은혜에게 부탁할 게 있었다. 운서는 보옥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두 사람에게 아이의 예절 교육을 맡기고 싶었다. 두 사람의 기품 있는 모습을 보옥에게 배우게 하고 싶은 것이다.
지아비를 독차지한 것도 미안한데, 아이의 교육까지 부탁하는 게 염치없어 보여서 그동안 말을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의사를 넌지시 떠볼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내게 아쉬운 소리를 한다면 보옥이를 맡기는 게 쉬울 테지.’
“도대체 두 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리 뜸을 들이시는 겁니까. 어서 속 시원하게 말씀해보십시오.”
속내를 숨긴 운서가 방긋 웃으며 재촉하자 선오와 은혜가 입을 뗐다.
“마마, 오늘은 소녀와 현비의 사이에 대해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용기를 낸 선오는 고운 손으로 은혜의 흰 손을 덥석 잡았다. 은혜도 그녀의 손을 꽉 맞잡았다.
“고백이라니요? 두 분의 사이는 언제나 좋지 않습니까. 덕분에 황실이 편안했고요. 제가 황후가 된 이후에도 두 분의 도움으로 별 탈 없이 내명부를 잘 꾸려올 수 있었습니다.”
아리따운 두 사람의 정다운 모습에 운서는 어쩜 그리 사이가 좋으냐며 감탄만 했다.
“그게 아니오라… 황후마마, 송구하옵게도 덕비와 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옵니다.”
이번에는 현비가 말을 이었다. 운서가 선오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사랑하는 사이라고, 직접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운서는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예?! 폐하, 두 분께서 벌써 술에 취하셨나 봅니다. 덕비와 현비께서는 주량이 어마어마하시면서 취한 척하며 농담을 다 하시네요.”
운서는 연진의 팔을 통통통 때리며 해맑게 웃었다. 덕비와 현비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아는 것이다. 이번에도 운서가 알아듣지 못하자 덕비가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마마, 저와 현비는 연인 사이옵니다.”
“아니, 농담은 그만하시래도요.”
“사실이옵니다.”
“……!”
순간, 덕비의 고백에 마냥 웃던 운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더니 작은 손에서 술잔이 스르륵 떨어졌다.
그런데 술잔이 바닥에 나뒹굴기도 전에 운서의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들부들 떨며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운서의 눈물에 연진과 후궁들은 당황했다.
갑자기 울다니?
그동안 자신들이 운서를 속여왔던 걸 알면 크게 화를 낼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창백하게 질린 채로 떨며 울고만 있는 것이다.
“우, 운서야, 실은….”
“마마, 소녀들을 용서하십시오.”
세 사람은 운서가 크게 충격을 받은 거라고 생각했다. 연진은 얼른 창백하게 질려 있는 운서에게 변명과 상황 설명을 하려고 했다. 선오와 은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하는 사이, 훌쩍거리던 운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상에!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흑….”
“……?!”
운서의 한 마디에 세 사람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아니, 외롭다니?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운서였다. 이제는 세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운서를 쳐다봤다.
“폐하, 소인이 욕심이 많아서 두 분을 너무 외롭게 했나 봅니다.”
“으응?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이고, 이 커다란 황궁에서 지아비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매일 독수공방으로 외로우시니, 같은 처지를 위로하시다 두 분이 눈이 맞으신 게 아닙니까!”
운서는 계속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소매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눈물을 떨구다 못해 엉엉 울며 오열하는 모습에 세 사람은 흠칫 놀라서 서로를 돌아봤다.
세 사람은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서로 입을 막고 눈치만 봤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연인 사이임을 고백했는데, 운서가 황당한 오해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두 분께서 애초에 동성을 좋아하시는 것도 아닌데…, 아이고, 흑.”
운서는 제 잘못을 탓하며 더욱 큰 소리로 울었다. 제가 죽일 놈이라는 한탄과 함께 연신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모든 게 다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후궁들을 돌보지 못하고 지아비를 독점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옵니다.”
“화, 황후마마, 오해이십니다.”
당황한 덕비와 현비가 손사래 치며 절대 아니라고 했다.
“운서야, 네가 아무래도 덕비와 현비의 말을 크게 곡해했구나.”
연진도 오해라고 했지만 운서는 셋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오해는 무슨 오해입니까! 소인이 폐하와 정답게 밤을 보낼 때마다 두 분은 외로움에 몸부림치다가. 아이고,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이제라도 폐하께서 옥궁과 후궁전을 공평하게 오가셔야….”
“잠깐만! 난 싫다. 아니, 내가 왜…? 그보다 운서야, 내 말부터 찬찬히 들어봐라.”
후궁전을 오가란 말에 연진은 대뜸 싫다고 했다. 그래도 운서는 연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지아비의 사랑을 받아야 할 아리따운 분들께서, 흐엉! 저처럼 간악한 놈 때문에….”
“그게 아니라니까!”
제 말만 하며 울기 바쁜 운서 때문에 답답한 연진이 급기야 목소리를 높였다. 그 와중에 덕비와 현비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운서의 오해가 황당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서는 세 사람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연진을 삐뚜름한 시선으로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왜 언성을 높이시는 겁니까! 따지고 보면 두 분을 오래 독수공방시킨 폐하의 잘못이 제일 크지 않습니까.”
운서는 연진이 후궁전으로 걸음하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꾀병을 부렸던 저의 꼼수는 모르는 척했다.
“운서야, 너는 황후가 되어서도 여전히 남의 이야기는 귀담아듣지 않는구나!”
“그게….”
“짐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아, 송구하옵니다.”
연진의 질책에 운서가 마지못해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그래도 운서의 눈초리는 아직 사납고 입도 삐죽 나와 있었다.
“내 말을 다시 잘 들어라. 덕비와 현비가 연인이 되었던 건 황궁에 입궁하기 전부터였다.”
“…네?!”
그제야 운서가 연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두 사람은 후궁으로 입궁하기 전부터 사귀는 사이였다고.”
“아니…, 그게 말이 되옵니까? 두 분이 사귀는 사이인데, 어떻게 후궁으로 입궁을 합니까. 하하… 폐하, 그런 농담을 하시면 안 됩니다.”
입궁 전부터 사귀는 사이였는데 후궁이 되다니?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선오와 은혜가 후궁이 되기 전부터 연인이었다면 입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황제의 후궁이 호락호락한 자리도 아니고, 입궁 후에는 합궁하여 아이를 낳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동성 연인끼리 나란히 입궁했다니, 그것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저처럼 욕심 많은 몹쓸 놈을 위해서 애쓰실 것 없습니다.”
애써 눈물을 거둔 운서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줄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세 사람이 동시에 운서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마마, 폐하의 말씀은 전부 사실이옵니다.”
“에이, 설마요.”
운서는 연진의 말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이 아니어야 했다. 그동안 자신이 연진과 후궁들의 합방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설마?”
“운서야, 그 설마가 맞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연진이 다시 쐐기를 박았다.
“그, 그럼, 폐하께서는 그동안 두 분의 사이를 다 아시고 계셨다는 겁니까?”
“그래, 다 알면서 짐의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말도 안 돼! 정말로 덕비와 현비의 사이를 다 아시고도 저 두 분의 입궁을 허락하시고, 그동안 입을 다물고 계셨단 말씀입니까?!”
“…그, 그래.”
연진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덕비와 현비는 집안의 고명딸로 어릴 적부터 후궁으로 입궁하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고. 운서, 너도 염 부인의 성격은 알고 있지 않으냐.”
“…아, 알지요.”
선오의 모친인 염 부인이 두 사람의 사이를 알았다면 입에서 불을 뿜었을 것이다. 당연히 두 사람을 갈라놓고 선오를 강제로 후궁으로 들여보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후궁을 많이 들일 생각이 없었다. 혼인을 하면 황후만 맞이하고 싶었고, 그래서 서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둘을 후궁으로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덕비와 현비가 있으면 어마마마께서 다른 후궁을 맞이하라고 하지 않으실 게 아니냐.”
게다가 후궁에게서 후계자를 볼 생각이 없었던 연진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운서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허탈해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자신이 황제와 후궁들의 합방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것이 애초에 무용지물이었다는 말이다.
후궁들에게서 후사를 볼 생각이 없다는 연진의 생각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연진의 혼인 후에 자신이 황실의 후사를 위해 얼마나 동분서주했던가.
운서는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운서가 다시 연진을 바라봤다.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그러나 연진의 표정은 여전히 씁쓸하기만 했다.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건… 배신이야!’
운서는 쓰디쓴 배신감에 머리에 열이 올랐다. 혈압이 상승하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며 시야가 흐려졌다. 운서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폐하와 두 분께서는 그간 제가 아등바등 애쓰던 모습을 보며 아주 재미있으셨겠습니다.”
“마마,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운서야, 오해다.”
후궁들과 연진은 한사코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운서에게는 어떤 말도 다 변명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오해라고요? 그럼 폐하를 위해 출궁하려 했던 소인에게 언질은 주셨어야지요!”
운서는 화를 내며 일어났다. 그동안 자신이 아등바등 노력하는 것을 다 보고서도 계속 자신을 속여왔던 이 사람들과 더는 한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뒷목이 당기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아이고!”
뒷목을 잡은 운서가 그대로 쓰러졌다.
“운서야!”
“황후마마!”
뒷목을 잡은 그대로 철퍼덕 쓰러진 운서를 보자 연진이 기겁하며 태감을 불렀다.
***
연진은 내관을 줄줄이 대동하고 옥궁 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옥궁의 대문은 굳게 잠긴 상태였다.
황제의 위엄은 어디로 갔는지 연진은 그 앞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오 내관은 왜 이리 나오지 않는 것이냐.”
운서의 소식을 가져올 내관을 기다리는 연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옥궁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홍안궁에서 혼절했던 운서는 바로 옥궁으로 옮겨졌다. 어의의 정성스러운 진료 덕분에 운서는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연진이 한시름 놓는 것과 동시에 운서가 눈을 뜨자마자 그에게 옥궁에서 나가라며 내쫓은 것이다.
연진은 꼼짝 못 하고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운서가 제 얼굴만 보면 혈압이 오른다니, 다시 쓰러질까 봐 무서웠다.
그런데 운서는 연진에게 당분간 옥궁에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말라면서 아이들까지 보여주지 않겠다고 했다.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짐을 소박 놓다니. 내쫓긴 것까진 나의 잘못이 있으니 넘어갈 수 있어도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연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옥궁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진은 마음이 급했다. 모후가 알면 큰일이라 조용히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만 혼이 나고 말면 다행이지만 만약, 태후가 후궁들의 사이를 알게 된다면?
황제와 합궁할 마음도 없는 이들이 황실을 속이고 입궁했다는 이유로 죄인이 될 수도 있다. 선오와 은혜가 죄인이 되면 그들의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터다.
이 일이 태후에게 알려지기 전에 운서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 연진은 이래저래 마음이 급했다. 그가 계속 옥궁을 떠나지 않고 밖에서 서성이는데, 이윽고 육중한 문이 조금 열리고 오 내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오 내관이 문 사이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연진을 부르자, 연진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그에게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런 그의 뒤로 태감을 비롯해 내관들과 금의위들이 줄줄이 따랐다.
“오, 그래. 오 내관, 운서는 괜찮은 것이냐?”
“예, 어의가 황후마마의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놀란 것뿐이라면서요. 궁인들이 서둘러 마마의 평정심을 되돌릴 수 있는 탕약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되는 것이냐?”
“…그건 아직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마마의 진노가 보통이 아니시어.”
오 내관은 연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연진은 한숨과 함께 유덕을 불렀다.
“알았다. 하는 수 없지. 태감, 그것을 가져오너라.”
“예.”
유덕은 묵직한 상자를 가져와서 연진에게 건네주었다. 연진은 그것을 다시 오 내관의 손에 들려주었다. 상자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폐하, 이것은…?”
“황후가 좋아할 만한 물건으로 준비했다. 이것을 운서에게 잘 전해주어라. 원래는 셋째를 낳았을 때 주려고 한 것인데….”
연진은 이것으로 운서가 화를 조금이나마 풀렸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에 오 내관은 눈을 반짝였다. 셋째를 낳을 때 주려던 것이라면 황실의 보물이 틀림없다.
“예, 폐하.”
상자를 받은 오 내관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자가 아주 묵직한 것으로 봐서 운서가 보자마자 응어리진 마음이 사르륵 풀어질 게 뻔하다.
“나는 대명전으로 돌아가 있을 테니, 좋은 소식이 있거든 사람을 보내어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상자를 품에 안은 오 내관은 연진을 향해 굽신거리다가 부리나케 운서의 처소로 들어갔다.
“마마, 다녀왔습니다.”
“너는 어딜 다녀오는 거냐?”
운서는 오 내관에게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막 탕약을 마셨는지 잔뜩 인상을 쓴 운서가 다른 내관에게 사탕을 받아먹으면서 빈 그릇을 건네주었다.
“폐하께서 부르셔서….”
“뭐라고? 내가 폐하께서 부르셔도 절대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늘. 오 내관, 그렇게 충성심이 없어서 출세하겠느냐!”
“아니, 마마. 소인은 하찮은 내관인데 만인지상께서 나오라고 하면 나가야죠. 황제의 명을 어긴 죄로 목이 잘리기는 싫습니다.”
오 내관은 소심하게 투덜거렸다. 자신은 운서처럼 사랑받는 내관이 아니었다. 그러니 황제에게 반항했다가 바로 목과 머리가 분리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
운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충성심도 뚝심도 없는 오 내관에게 황제에 대한 반항을 바라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마마, 그만 마음을 푸시지요.”
“마음을 풀라니! 미쳤더냐. 폐하와 후궁들이 내게 어떤 짓을 했는데!”
운서는 절대로 화를 풀 수 없다고 이를 벅벅 갈았다.
‘어쩌면 그리 꽃 같은 얼굴로 몇 년이나 천연덕스럽게 속이셨나.’
생각하면 할수록 덕비와 현비에게 화가 들끓었다. 분노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점점 불타올라서 운서는 후궁들을 당장 냉궁으로 보내 벌을 주고 싶었다.
‘그리하면 덕비와 현비는 아마 출궁을 당하겠지.’
이미 황제가 그들의 사이를 알고 있었고, 묵인했으니 집안이 풍비박산 나진 않겠지만 후궁의 자격은 잃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일 괘씸한 건 연진이었다. 애초에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저를 계속 속여온 것이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이를 까드득 가는 운서는 지금이라도 태후에게 고할지 말지 고민이었다. 사실 연진이 괘씸해서라도 고자질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마마, 이것을 보십시오.”
그때 오 내관이 운서에게 연진이 보낸 묵직한 상자를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운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니, 오 내관, 그게 무어냐?”
“마마, 폐하께서 진심으로 미안해하시며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신다고?!”
미안하다면 진작에 모든 걸 털어놓고 협조를 구했어야 했다. 후궁들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말했더라면 자신은 덕비와 현비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계략과 모략을 짜주었을 것이다.
‘애초에 나를 믿지 않으신 게지.’
어릴 적부터 언제나 함께였는데 자신을 신뢰하지 않다니, 정말 너무했다. 연진에게 서운한 운서는 상자가 연진으로 보여서 그것을 괜히 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돌려보내고 싶었으나 운서의 눈은 이미 묵직한 상자에 가 있었다.
“…뭐가 들었길래 이리 무겁냐?”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마마께서 셋째 아기씨를 낳으시면 주시려고 한 것이라 합니다.”
“뭐라? 그렇다면…?!”
운서가 오 내관을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의 보물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에 운서의 입가가 바로 헤실헤실 풀어지기 직전이었다.
“아니, 폐하께서는 이런 물건으로 날 회유하려 하시다니.”
운서는 어림없다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의 눈은 이미 상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리 줘봐라.”
“예, 마마 상자가 꽤 무겁습니다.”
“무거우면 얼마나 무거울까…. 헉, 정말 무겁구나.”
묵직한 무게감에 운서는 눈을 반짝거렸다.
보옥을 낳았을 때는 커다란 진주를, 명을 낳았을 때도 엄지손가락만 한 비취를 받았었다. 모두 귀하고 값비싼 보물이었지만 이 정도까지 무거운 것은 없었다.
상자를 다리 위에 올린 운서의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상자는 두 손으로도 들기 버거운 무게였다.
“오 내관, 상자를 좀 열어봐라.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서 손이 다 떨리는구나.”
“예.”
오 내관이 가까이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에구머니나!”
운서는 입을 떡 벌렸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용의 형상이었다. 기다란 몸을 구불구불하게 접은 용은 네 개의 발을 가지고 사납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붉은색 보석을 입에 문 채로.
“이, 이건!”
“마마, 이건 보물 중의 보물이옵니다.”
“…….”
용의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눈이 부신 운서는 동그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세상에나, 이런 귀하디귀한 것을 내게 주셨다니. 아니, 그보다 셋째 아이를 낳았을 때 주려고 하셨다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운서는 이제 다른 의미로 손을 떨었다.
황금용은 이제까지 그가 받았던 어떤 귀중품보다 훨씬 더 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내관이었던 시절에 유덕에게서 얼핏 들은 바로는 선황제께서 가장 아끼는 보물이 붉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라고 했었다.
‘그럼 이게 바로 그 보물이렷다?!’
그저 보기만 해도 손이 덜덜 떨렸다.
‘우리 폐하는 나를 위해 선제께서 아끼던 황실의 보물을 선뜻 내주시는 분인데, 내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낸 건 아닌가?’
보물에 눈이 먼 운서는 제가 연진의 말을 오해한 건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흐음.”
찬찬히 따져보면, 사실 연진은 말을 하고 싶었어도 후궁들을 위해 애써 침묵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태후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덕비와 현비는 황궁에서 쫓겨났을 테니까.
게다가 덕비와 현비가 없어진다고 연진이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또 다른 후궁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사랑하는 연진이 두 사람의 사이를 묵인했을 것이다.
덕분에 자신이 황후가 되기도 했고.
‘가만, 덕비와 현비가 애초에 연인이 아니었다면?’
덕비와 현비는 황후가 되려고 들어온 후궁들이었다. 당연히 둘 중 한 사람이 벌써 연진을 덮쳐서 아이를 낳고 황후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나는 폐하의 대물 맛도 못 보고 지금까지 내관으로 남았을 수도 있지.’
더 깊게 생각해보면, 후사를 바라며 온갖 수를 쓴 자신을 알면서도 연진은 우직하게 후궁을 더 들이지 않았다. 단식투쟁까지 해가며 자신을 다시 황궁에 들이기도 했고, 그 고집 덕분에 아이도 낳을 수 있었다.
저만을 바라보는 연진 덕분에 제가 황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운서는 갑자기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만을 사랑해준 연진의 고집과 마음이 고맙고, 황실의 보화를 아낌없이 저에게 선물하는 그의 마음이 더 귀해 보였다.
대를 이어 물려줄 재화를 선뜻 내준 걸 보니 선황제의 보물보다 자신을 더 아끼는 게 아니겠는가.
‘역시 태후께는 말씀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 어마마마께서 덕비와 현비를 내치시고, 이번 기회에 다른 후궁을 들이실지도 모르니까.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지.’
황제의 후궁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후궁들이 내쳐지면 새로운 후궁들이 입궁할 것이다. 황제와 황후의 금실이 아무리 좋아도 후궁을 들이지 않는 황실은 없었다.
후궁의 수를 줄여 황실의 후계 구도를 안정시킨 선선대마저 아리따운 귀인들을 여럿 입궁시켰었다.
연진이 지금은 자신만 바라보지만 새 후궁이 들어오면 그들에게 관심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또 새 후궁들은 덕비와 현비와는 다르게 황제에게 관심이 많을 테니까.
‘황제의 아이만 낳으면 만사가 형통할 텐데, 당연히 욕심을 내겠지. 살살거리며 어떻게든 폐하를 꾀려고 난리를 부릴 게 틀림없어.’
운서는 다른 후궁이 연진의 몸에 손을 댄다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
운서는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깜짝이야.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오 내관은 보물을 얻고도 화를 풀지 않은 줄 알고 운서에게 다가와서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마마, 어서 숨을 깊게 쉬십시오. 태의가 심호흡을 통해 화를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화를 계속 속에 쌓아두면 몸이 상한다고요.”
“…알았다.”
운서는 크게 심호흡하며 화를 다스리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격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황금으로 만든 용을 찬찬히 감상했다.
용은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기다란 몸체를 이루는 비늘은 반짝거리고 이빨과 발톱은 날카롭고 날카로운 눈은 위엄이 넘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입에 물고 있는 붉은 보석이 압권이었다.
‘이건 궁을 통째로 준다고 해도 바꾸기 힘든 물건이로구나.’
“…오 내관.”
“예, 마마.”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설마, 아직도 옥궁 밖에서 서성이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
“대명전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럼 어서 폐하께 가서 내가 찾는다고 전하거라.”
“예, 마마.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민첩한 몸놀림으로 대명전으로 향하는 오 내관의 발걸음이 바람처럼 가벼웠다.
***
오 내관으로부터 소식을 받은 연진은 부리나케 옥궁으로 달려왔다.
연진이 허겁지겁 황후의 침소를 향하는 중에 운서는 비단 끈으로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 장지문이 활짝 열리고 연진이 들어오자 운서는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폐하….”
“운서야, 괜찮은 것이냐? 아직도 안색이 파리한 것이 또 쓰러질 것만 같구나. 오 내관, 태의가 별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정말 괜찮은 게 맞느냐?”
“그게….”
오 내관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는 운서가 지금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모르는 연진은 운서의 작은 손을 찾아서 힘껏 잡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운서가 쓰러진 직후부터 제대로 쉬지 못해서 얼굴이 초췌해져 있었다.
“네가 갑자기 쓰러져서 의식을 잃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폐하…, 걱정을 끼쳐 송구하옵니다.”
운서는 훌쩍거리며 연진을 불렀다. 연진은 즉각 운서의 코앞까지 더욱 바짝 다가가서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운서는 연진에게 일어나고 싶다고 손짓했다. 연진이 운서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주었다.
침상에 앉은 운서는 연진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그런 운서의 앞에서 연진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기가 죽었다.
“운서야, 내가 정말 잘못했다. 진즉 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놨어야 했는데, 네가 받을 상처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정말 미안하다.”
연진은 열심히 사과했다. 그러나 연진을 바라보는 운서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기만 했다.
“그간 소인이 세 분의 합궁을 위해 갖은 모략과 계략을 썼습니다만….”
“그, 그랬지.”
운서의 목소리까지 음산해서 연진은 고개만 끄덕였다.
“소인의 몽실한 엉덩이가 터지도록 태형을 당하고, 쥐꼬리만 한 내관의 녹봉을 털어서 물 건너온 값비싼 최음제까지 샀는데…. 그게 전부 헛수고였다는 말씀이지요.”
“…아니, 최음제라니?”
최음제를 샀다니,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물 건너온 최음제를 어떻게, 언제, 왜 구매했는지 물으려고 하자 운서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그냥 넘어가십시오!”
저도 모르게 최음제에 대해 이실직고한 운서는 당황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연진이 최음제를 어디에 썼냐고 물을 것 같았다.
운서는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넘어가라며 눈을 부라렸다.
최음제는 연진에게도 썼지만, 왕야들에게도 썼다. 그들과 사통하다 연진에게 딱 걸린 밤에 말이다.
그의 표독함에 연진은 고개를 끄게 끄덕이며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최음제의 용도에 관해 물으면 운서는 또 자신을 내쫓을 게 틀림없다.
“알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마.”
“아이고, 억울해라!”
운서는 소매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연진이 자신에게 진작 귀띔이라도 해주었더라면 이런저런 쓸데없는 짓거리는 하지 않고 그냥 연진에게 제 엉덩이를 홀랑 바쳤을 것이다.
운서는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도 아까웠다.
무엇보다 황후가 되는 지름길이 있는데, 연진 때문에 이런저런 일을 당하며 빙빙 돌아온 것이 제일 억울했다.
“운서야, 내가 다 잘못했다. 그러니 어마마마께만은 알리지 말아다오.”
“폐하께서는 제가 그렇게 미덥지 못한 겁니까?”
운서가 째려보자 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네가 미덥지 못한 게 아니라…. 정말 미안하구나. 변명의 여지가 없다.”
“뭐, 폐하께서 진심으로 반성하시니 이번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어마마마께서 아셔봐야 혈압만 높아지시지 않겠습니까.”
“정말 고맙구나. 그럼 덕비와 현비도 함께 용서해주는 것이냐?”
“…예.”
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용서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이 내관 시절에 두 분께 신세도 많이 졌는데, 그분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내치면 안 되지요.”
내관이었을 당시, 덕비와 현비가 제 손에 쥐여주었던 용돈이 참 짭짤했었다. 그뿐인가, 그 둘은 자신이 아이를 낳을 때마다 선물도 꼬박꼬박 보내주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지아비한테 냉대를 받는데도 직접 찾아와서 감동했었지.’
덕비와 현비의 성격으로 볼 때, 그 둘이 연진에게 사심이 있든 없든 운서의 출산을 진심으로 축하할 사람들이었다. 운서는 두 사람의 축하에 진심으로 기뻤었다.
“제가 어찌 선녀 같은 분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운서가 한숨을 쉬며 함구하겠다고 하자마자, 연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운서가 황궁이 떠들썩하도록 난리를 부리진 않겠지만, 후궁들을 용서하지 않을까 봐 걱정한 것이다.
그때 밖에서 운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연진이 묻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태감이 대답했다.
“홍안궁의 궁인들이 황후마마께 드릴 선물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선물이라고?”
선물이란 말에 운서의 귀가 번쩍 뜨였다. 운서는 제가 화가 났다는 것도 잊고 활짝 웃을 뻔했다.
지금 꾀병을 부리느라 연진 앞에서 좋아할 수 없는 운서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연진을 향해 힘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이라 해라.”
“예, 폐하.”
이윽고 문이 열리고 상자를 든 태감이 들어왔다.
“황후마마, 후궁들이 정성으로 준비한 선물이옵니다. 부디 마마의 상심한 마음에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알았다. 태감은 홍안궁의 궁인들에게 내가 선물을 잘 받았다고 전하게나.”
유덕은 상자를 연진에게 건네고 물러났다.
연진은 문이 닫히자마자 상자를 운서에게 건네주었다.
“덕비와 현비가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가 보구나. 어서 열어봐라.”
“아니, 뭐 이런 걸 다….”
선물이 아니어도 이미 선오와 은혜를 용서하기로 했지만, 운서는 주는 선물을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상자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연진에게 황금용을 받았던 운서는 더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한 연진도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다.
“상자만 봐도 그리 좋으냐?”
“당연히 좋지요. 아이고, 폐하께서 주신 황금용의 감동이 아직 식기 전인데 또 이런 귀한 선물을 받다니요.”
“열어보지도 않았는데 귀한 선물인지 어찌 아느냐?”
“그걸 꼭 봐야 압니까. 저를 위하는 덕비와 현비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도 귀하지 않겠습니까.”
하루에 두 번이나 선물을 받아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운서는 자기가 꾀병을 부리던 중이었다는 것도 잊고 신나게 대답하다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연진의 시선을 깨닫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연진은 줄곧 운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뒤늦은 수습에 연진은 이미 운서가 꾀병을 부리고 있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연진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서 열어봐라. 후궁들의 선물이 무엇인지 나도 궁금하구나.”
“예.”
운서는 한층 더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상자를 열었다.
“헉!”
“아니, 이것은?!”
상자 안에 있는 선물은 산호였다. 산호를 잘라서 만든 장신구가 아니라 붉은 산호 덩어리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 운서는 커다란 산호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붉은색을 띠는 산호는 남쪽 바다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나무 모양으로 생긴 산호의 가지마다 금으로 만든 이파리와 보석 열매가 달려 있었다.
“훌륭한 장식품이구나.”
“예, 그렇습니다. 폐하, 이것 보십시오. 산호를 조금만 움직여도 이파리와 보석이 달랑거리며 흔들립니다.”
연진은 선오와 은혜가 그동안 이날을 위해 작정하고 선물을 준비했다고 감탄했다.
운서는 단순한 장신구나 금덩이를 받았어도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호와 은혜는 운서의 응어리진 마음을 단번에 풀어주려면 특별한 선물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것이다.
‘내 후궁들이 영리하여 운서의 화가 수월하게 풀리겠구나. 이걸 준비하느라 오랫동안 고심했겠군.’
금 조각과 보석 열매가 딸랑거릴 때마다 운서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운서는 산호에 혼이 빨린 것처럼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그리 좋으냐?”
“예, 너무 아름답습니다. 폐하, 이것을 저의 침소에 놓고 두고두고 보고 싶습니다.”
운서는 산호를 침상 가까이에 두고 영롱한 자태를 매일매일, 질릴 때까지 보고 싶었다.
“그것만 방에 둘 것이냐? 네가 내 선물보다 후궁들의 선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왠지 서운하구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네가 짐의 선물에는 일언반구도 없으니 더욱 서운해지는구나.”
연진은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폐하께서 주신 황금용은 황실의 보물이 아닙니까. 그 귀한 것을 침소에 두면 누가 만질까 훔쳐 갈까 걱정만 할 것입니다. 제가 어찌 잠은 자고, 정원을 마음껏 거닐 수 있겠습니까?”
“…….”
“보나 마나 매일 바들바들 떨며 지낼 것이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의 선물은 다른 누군가의 선물과 비교하여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옵니다.”
“…왜?”
“폐하의 정성과 사랑이 담뿍 담겨 있지 않사옵니까.”
운서는 어깨를 살랑거리며 연진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끼우고 단단한 어깨에 뺨을 비볐다.
“으음, 너는 참….”
“황금용은 소인이 셋째를 낳았을 때 주려고 하셨다면서요.”
“그래, 이제 네가 셋째를 낳았을 때는 다른 선물을 주어야 하니 고심을 해봐야겠구나.”
“폐하… 선물보다 소인은 저를 위하는 폐하의 마음이면 족합니다. 선황제께서 귀하게 여기던 보물을 받았는데, 소인이 그 이상을 원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 이상…?”
운서가 슬쩍 흘린 말에 연진은 신음을 흘렸다. 연진의 귀에는 그 이상을 기대한다는 말로 들린 것이다. 황실의 보물 창고를 또 뒤져야 하나 생각하는데, 운서가 그의 품에 폭 안겼다.
“황금용은 소인이 잘 보관하다가 태자에게 물려주겠습니다. 황실의 보물이 황궁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니까요.”
“황후가 짐의 선물을 아껴주니 참으로 고맙구나.”
“폐하도 참.”
운서는 연진의 품에서 몸을 바르작거리며 허리며 엉덩이를 살랑거렸다.
“으으음….”
운서의 교태에 연진의 하반신이 벌써 뻣뻣해지고 있었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연진은 저를 보며 활짝 웃는 운서의 허리를 살며시 안았다.
“아무래도 내일 덕비와 현비를 위해 옥궁에서 작은 연회라도 열어야겠습니다. 저런 훌륭한 선물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지요.”
운서는 연진에게 예인을 불러 달라는 둥, 또 현비와 함께 비파 솜씨를 뽐내 달라며 신이 났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구나.”
연진은 흡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운서가 완전히 화를 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 품에 안긴 운서의 몸을 토닥거리던 연진은 운서와 눈을 맞췄다.
이제 운서의 화도 풀렸으니 진득하게 입맞춤을 해볼 생각이었다. 함께 뜨거운 밤도 보내고.
그런데 연진이 그의 허리를 끌어당기려던 순간이었다. 운서가 그의 품에서 홀랑 빠져나갔다. 워낙 순식간이라서 연진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운서는 선물이 든 상자를 잘 챙겨서 품에 꼭 안고 종종거리며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운서야, 어디를 가려는 것이냐?”
“내탕고에 갑니다. 귀한 보물에게 어서 자리를 내주어야지요.”
묵직한 상자들을 들고 있는 운서의 엉덩이가 유난히 실룩거렸다.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곧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잠깐!”
연진이 그를 불렀으나 운서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연진은 운서를 졸졸 따라갔다. 작은 발을 부지런히 놀리는 운서는 곧장 내탕고로 향했다.
그는 연진이 따라오는 걸 알면서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평소라면 자신을 보지 않는다고 잔뜩 투덜거렸을 연진도 지금은 얌전히 운서를 쫓았다.
그 사이 내탕고로 쏙 들어간 운서는 상자들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품에 안고는 이쪽저쪽을 서성거렸다.
운서의 내탕고는 예전보다 훨씬 더 꽉꽉 차 있었다. 운서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 이곳저곳에서 들어온 선물을 야무지게 챙긴 덕분이었다.
“뭘 하는 거야?”
“이 귀한 보물을 둘 자리를 정하려고 합니다. 태자에게 물려줄 귀중한 재화가 아닙니까.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두어야지요.”
“그래, 알았다. 나는 방해하지 않고 여기에 있으마.”
연진은 자기가 이곳에 있다는 걸 거듭 알리며 내탕고 입구 안쪽에 살짝 쪼그려 앉았다.
상자를 든 운서는 선반의 가장 위쪽부터 아래까지 쭉 살피고는 가장 위 선반을 골랐는지 팔을 쭉 뻗었다.
“그곳으로 자리를 정한 것이냐?”
“예, 너무 잘 보이는 곳에 두면 훔쳐 가기 좋지 않습니까.”
“황후의 내탕고를 어떤 간 큰 놈이 털어간다고 아까부터 걱정이냐. 그런 놈이 있으면 머리와 목을 분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폐하, 목과 머리가 분리되는 것만으로는 소인의 성에 차지 않습니다. 삼대를 멸하십시오!”
운서는 있지도 않은 도둑 생각에 부들거리며 발끝을 세워서 상자를 선반에 올려두려고 애썼다.
소리 없이 일어나서 운서에게 가까이 다가간 연진은 낑낑거리는 작은 손에서 상자를 빼냈다. 그리고 큰 키와 기다란 팔을 이용해서 수월하게 상자를 가장 위 선반에 두었다.
“아이고, 역시 폐하이십니다. 키도 훤칠하시고, 무거운 상자도 한 팔로 번쩍번쩍 드시니 언제 봐도 참 늠름하십니다.”
운서의 칭찬에 또 연진의 기분이 단번에 좋아졌다.
“내가 그리 좋으냐?”
“예, 온 세상을 뒤져도 폐하보다 멋진 사내는 없을 것이옵니다. 힘도 좋은데, 잘생기시고 항상 다정하시지 않습니까.”
겨우 상자를 선반에 둔 것뿐인데 운서가 난리를 치며 멋있다고 하자 연진은 입이 양쪽으로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늘 운서의 칭찬에 약한 연진은 얼굴을 붉히며 좋아했다.
“운서야…. 네가 그리 말해주니, 기분도 좋고 가슴이 뛰어서 미치겠구나.”
운서가 또 제 혼을 쏙 빼놓는 통에 가슴이 저릿하고 다리 사이가 뻐근했다.
“폐하….”
교태를 부리는 운서도 불그스름하게 눈가를 붉히고 연진의 곁에서 살랑거렸다. 보물을 제자리에 두고 나니 이제 연진의 강건한 몸이 보인 것이다.
“그럼 입맞춤이나 좀 하자. 아까부터 황금용에 밀려서 서운해 죽을 것 같다.”
연진이 서운하다고 하자마자 운서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운서에게 입을 맞추는 연진은 자신의 황후가 재물을 심하게 좋아하긴 해도 돈보다 자신을 더 사랑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암, 그렇고말고 운서가 가장 사랑하는 건 바로 서국의 황제인 나겠지.’
연진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입술을 내민 운서의 입술에 제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 연진의 입술을 받은 운서는 제 입술을 냉큼 벌리고 그의 혀를 쪽쪽 빨았다.
몇 번이나 입술을 겹친 연진은 그제야 만족스러워서 입술을 뗐다. 그리고 지금부터 진한 입맞춤을 할 생각에 운서의 허리를 다시 안으려는데, 또 운서가 없었다.
분명히 제 품 안에 있었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가 주변을 돌아보자 운서가 몇 발자국 떨어져서 상자들을 살피며 히쭉히쭉 웃고 있었다.
“…….”
그런 운서를 가만 지켜보던 연진은 자신감이 떨어졌다. 방금까지 운서가 돈보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확신했었는데, 지금은 재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끔 이곳에서 이부자리를 펴고 자기도 하고.’
“폐하, 왜 또 갑자기 표정이 안 좋으십니까?”
연진을 바라보는 운서의 눈동자는 해맑고 행복에 차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연진은 고개를 저으며 운서를 향해 마주 웃었다. 운서가 재물을 너무 사랑해서 질투는 나지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굳이 트집을 잡고 싶진 않았다.
“네가 화를 푼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아직 분노가 다 가신 건 아닙니다. 그래도….”
운서는 황금용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며 눈가를 발긋하게 물들였다. 운서의 입꼬리가 휘어지고 연진의 팔에 냉큼 매달렸다.
“제가 오래 화를 내면 황실의 분란만 가져오지 뭐가 좋습니까. 이제는 황실의 웃어른으로서 아량을 베풀어야지요.”
“황실의 안녕을 걱정하는 황후의 깊은 마음이 남다르구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늘 폐하의 정실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운서야, 넌 정말….”
연진은 운서의 말에 가슴이 벅찼다. 운서가 화를 푼 이유에는 선물이 마음에 쏙 든 것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황실의 평안 때문이라는 것이다.
운서는 후궁들과 다투지 않고,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궁인들을 잘 돌보며 늘 겸손하기까지 했다. 자신에게는 최고의 배우자여서 황후가 되어준 게 고마웠다.
연진에게 황실의 보물은 황금용이 아니라 운서였다.
“사랑한다. 운서야. 너를 황후로 맞아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연진이 운서를 힘껏 안았다. 운서도 두 팔로 연진을 꽉 끌어안았다. 연진이 자신만을 사랑해주니, 전생의 원수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헤헤, 폐하, 저녁 수라도 여기서 드실 거지요?”
“당연하지. 보옥이와 명이와 놀아주다가 이곳에서 침수도 들겠다. 하지만 그 전에….”
연진은 당연한 소리를 하냐면서 운서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을 깊게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