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연애를 시작했는데요 (9/11)

2. 연애를 시작했는데요

아, 이제 다른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캡슐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베개 위로 얼굴을 묻고 있었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권경배에게 들었고, 사과도 세 번이나 했긴 한데….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 일단 찌뿌듯한 몸과 우울한 마음을 물로 씻어내고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한 뒤 사과나 하러 다니자 싶어 욕실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반신욕과 느긋한 샤워를 하고 나오자 핸드폰 벨 소리가 이제 막 끊어지는 중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 올 사람은 화환 아니면 권경배일 건데…. 핸드폰을 확인하자 역시나 미친놈이 또 헛소리하려고 전화한 건지 부재중에 화환이라 찍혀 있는 게 보여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네, 저 씻느라 못 받았는데 무슨 일 있어요?”

[큰일이야.]

“또 헛소리하려고 그러죠?”

[들켰어?]

“이제 뻔히 보이는데요?”

[그냥, 걱정돼서.]

“저 어른이에요.”

[어른이라고 상처 안 받고 안 아픈 건 아니잖아.]

“…왜 나한테 잘해줘요?”

[겸아.]

“나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왜 이렇게 챙겨 주고 걱정해서 쓸데없이 오해하게 해요?”

부작용이 생긴 게 분명하다. 헌 기억을 너무 씻어낸 건가? 노곤한 몸에 입까지 풀린 건지 참고 참은 말들이 우수수 흘러내렸다.

[좋아한다고 하면 이유 없이 전화하고, 핑계 없이 얼굴 보러 가도 돼?]

입술만 달싹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또 장난치는 건가? 아니면 미친, 아니 채하현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봐, 대답 못 하잖….]

“돼요.”

축축한 머리가 마르도록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한참 소리 없던 핸드폰 너머로는 무언갈 하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기다리던 목소리가 넘어왔다.

[잠깐 내려올래? 이런 얘기까지 통화로 하면 진짜 랜선 연애 같잖아.]

랜선 연애래, 어떡해…. 긴장으로 굳어진 목을 연신 끄덕이다 전화라는 걸 깨닫곤 겨우겨우 ‘네’ 라는 한마디를 뱉은 뒤 전화를 끊었다. 가슴이 병이 난 게 아닐까 싶게 뛰어댄 탓에 심호흡을 몇 번씩 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니 일단 정신이 빠져 있어 그냥 내려오긴 했는데, 나 지금 운동복인데?

다시 올라가야 하나? 그럼 기다릴 건데, 아니지 지금 차려입고 나가면 또 얼마나 놀리겠어…. 1층에 도착해 공동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길 건너라고 했으니 조금 더 걸리겠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아파트 입구로 천천히 걸었다. 조금 전 그친 비 덕분에 습한 바람에 불었지만, 설렘 때문인지 유난히 발길이 가벼웠다.

막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는 채하현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그렇게 좋은 건지 눈이 안 보이게 접어 웃는 얼굴이 전염되는 건지 나도 저절로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형아 마중 나온 거야?”

“기다려도 안 와서 데리러 온 건데요?”

“자기야, 그런 걸 마중이라고 하지 않을까?”

한 마디를 안 져요. 막상 가까이에서 보이는 예쁜 얼굴을 보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비가 개고 먹구름 사이로 내려온 햇살까지 채하현을 비추고 있었기에 눈이 부시게 예뻤다.

“똑똑해서 좋겠네….”

“나쁜 건 없지. 안 피곤하면 조금 걷자.”

고개를 끄덕이자 채하현은 산책로 쪽으로 발을 돌렸다. 아직 다섯 시가 되기 전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산책 나온 사람들이 보였고, 기분 탓인지 그들의 눈이 전부 채하현에게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모자나 마스크 이런 걸 씌우면 조금 안심이 될까? 이 사람은 좀 숨길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쓸데없이 예뻐서 아니, 쓸데가 없진 않지.

“나 말이야, 스무 살에 바로 군대 갔다 나와서 혼자가 됐거든. 뭐 따지고 보면 거의 내 잘못인데, 그전에도 관심보단 비교만 당했긴 했지만…. 그래도 혼자 남은 거랑 무관심해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건 다르잖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듣기 좋아 가만히 듣고만 있자 손을 뻗어 내 검지만 한 번 쥐었다 놓았다. 또 귀엽게 구네.

“그래서 질투도 엄청 심할 거고 집착도 많이 할 거야.”

무슨 말을 할 건지 예상이 갔다. 얌전히 고개를 들어 채하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런 말은 무슨 표정으로 할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채하현이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눈꼬리가 조금 붉어져 있는 것 같았다. 미친놈 주제에 부끄러워하는 건 왜 이렇게 예뻐? 이미 콩깍지가 스무 겹쯤 쌓인 내 눈을 미처 알지 못한 채 귀로 오르는 열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자기야, 나 혼잣말하는 것 같아 쓸쓸해.”

“잘 가다가 또 이러네.”

이 새끼는 헛소리로 긴장을 푸는 건가? 내 대답에 푸스스 웃음을 흘리더니 눈을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괜찮으면 나랑 한 번 만나 봐. 결혼을 전제로.”

“연애 한 번에 미래를 저당잡히는 기분인데, 제 손해 아니에요?”

“자기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

“…기대할게요.”

내 손을 다 덮듯 큰 손이 내려왔다.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그저 손등을 감싼 손을 맞잡아 주었고 맞닿은 미지근한 체온이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조금 더 같이 있자 잉잉거리는 채하현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에 쭈그리고 앉은 채였다. 미친, 나 채하현이랑 사귀는 건가? 오늘 1일? 연애 경험이라곤 고3 시절의 한 번이 전부였는데…. 그것도 공부만 하느라 차였지만 말이다.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어 서둘러 손을 씻고 침대에 누웠다. 보통 연애와 동성연애도 똑같은 건가? 핸드폰으로 동성연ㅇ까지 쳤는데 때마침 전화가 왔다. 나, 남자친구인 거니 저장된 이름은 바꿔야 하나? 화환은 너무 정 없어 보이지?

“여보세요.”

[네, 자기야. 잘 들어갔어?]

“바로 길 건넌데요, 뭐. 또 걱정했어요?”

[아니, 이번엔 목소리 듣고 싶어서.]

“길마님 연애 많이 해봤죠? 왜 이렇게 자연스러워….”

간지러운 발을 시트에 문지르다 중얼거렸다. 나는 설레서 잠도 못 자게 생겼는데 혼자 여유로운 게 아니꼬웠다.

[사귄 첫날부터 묻기엔… 너무 빠른 질문 아니야?]

“그런 대답이 오해와 망상을 부른다는 거 알면서 그러죠?”

[자기야, 나는 자기밖에 없는데.]

“…또 봐, 이런 거 말이에요.”

[그런데 아직 길마님이야? 이젠 그렇고 그런 사인데 다르게 불러주면 안 돼?]

“채하현?”

[…새롭긴 한데, 조금 더 다정하게 불러줘.]

“채하현. 하현아, 자기야, 하현이 형?”

전화기 너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기분이 좋은 건지 조금 들뜬 목소리로 웃었기에 내 입꼬리마저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자기야, 다 좋은데 세 번째가 제일 좋아.]

“네, 형. 얼른 저녁 먹고 어뉴어 들어와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네. 겸이 저녁은?]

“저도 먹고 들어가려고요.”

[이럴 줄 알았어, 같이 먹을 수 있었는데.]

“안 돼요. 저 떨려서 코로 먹었을 건데….”

[왜, 내가 너무 좋아서 설레서 그래?]

“네.”

왜 당연한 걸 묻는 거지? 아직 두근거리는 가슴에 숨도 잘 못 쉴 것 같은데.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아 끊긴 건가? 하고 핸드폰 화면을 보자 통화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형?”

[우리 자기가 너무 거침없이 치고 들어와서 놀랐네.]

큰형이 그랬다. 좋아하는 사람에겐 온 마음을 다하라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운명이니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표현하라고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나 혼자만의 일방통행도 아니었고, 이 정도는 다들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좋아한다느니 이런 간지러운 말은 아직 어렵지만….

저녁을 먹는 중에도 통화는 이어졌다. 오물거리다 얘기하는 목소리가 귀여워 일부러 더 말을 시켰더니 나중엔 그걸 알아차리곤 아주 천천히 대답하는 요망까지 떨었다.

[오늘 산책 늦게나 할 수 있겠는데? 길드전 보상 나누고 해야 하니까.]

“그럼 오늘은 랜선 산책해요?”

[아니, 얼굴 보는 게 더 좋아.]

“그럼 빨리 나눠 줘야겠네. 저 이제 접속해요.”

[네, 저도요. 들어가서 봐.]

전화를 끊고 접속하자 아까 있던 길드 성이었다. 지금 쟁 중이니 혼자 성에 있지 말라고 했는데…. 얼른 하우징으로 이동하기를 눌렀고, 곧 성문 앞에 도착했다.

[귓속말]화환 : 자기야, 어디야?

[귓속말]유우 : 길드 성에 혼자 있으면 안 된대서, 하우징이요.

화환에게 파티를 걸곤 소환하자 바로 앞으로 소환되었다.

“손잡으려면 결혼부터 해야 하는 거지?”

“아니요, 좀 개방적으로 살려고요. 손 정도야 뭐.”

마침 수인으로 있었기에 먼저 화환의 손을 잡곤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기억력도 좋네. 뚝딱거릴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손을 잡는 건 쉬웠다.

“그런데, 비밀연애 하는 거예요?”

“당분간은 그게 좋지 않을까? 아, 나르랑 뽀뽀 그만해. 나 질투해.”

일단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그건 소나기같이 갑작스럽게 하는 거라 내가 잘 막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일단 막는 시늉이라도 해야겠지…. 삐진 거나 진짜 서운해하며 질…투하는 모습도 궁금하긴 했지만, 천천히 알아가면 될 일이지.

멀리 가든 하우스가 보였다. 사람이 있는 건지 그림자도 보였기에 잠시 잡았던 손을 놓곤 히든 스킬을 쓴 뒤 가장 작은 외형으로 바꿔 화환의 다리를 긁었다.

화환은 나를 번쩍 안아 들곤 배에 얼굴을 한 번 부빈 후 가든 하우스로 들어갔다. 이젠 지겨울 만큼 익숙한 열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 중이었고, 내가 들어섬과 동시에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나왔던 디유가 나타났다.

‘언제나 헌터님의 여정을 응원하는 디유입니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아이디 만들 때 도와주던 애 아니에요?”

“그러게…. 여기 왜 왔지?”

다른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나만 보던 솜뭉치가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헌터님, 저희 실수로 벨런스 조정에 실패해 피해를 끼쳐드렸습니다.’

“인색 던전?”

‘그렇습니다. 제2의 죄 인색 던전은 원래 그렇게 정신적인 충격을 심하게 드리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사과드리며, 던전 클리어에 힘써 주시는 열두 분의 헌터님께 보상을 드리기 위해 디유가 찾아왔습니다.’

“어쩐지…. 과거까지 캐면서 괴롭히더라.”

권경배가 크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랬지.

‘헌터님의 배낭 안으로 보상을 넣어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단 말씀 드리며…. 오늘도 어뉴어 안에서 즐겁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진 디유의 자리를 멍하니 보다 사과의 선물은 뭔가 싶어 배낭을 확인하자 [GM의 사과 상자]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질투의 왕 던전의 밸런스 조정 실패로 고통스런운 시간을 보내게 한 점 사과드립니다.’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게 큰 폰트로 적힌 상자가 말이다.

“GM 사과 상자 들어왔어요. 열두 개.”

“그렇지?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심하긴 했어….”

“일단 나눠 드릴게요, 마침 다 모여 계시네요.”

우편으로 하나씩 보내 준 뒤 상자를 확인하자 코스튬 스무 개 가까이 리스트로 있었고, 이중에 하나를 골라 받는 것이었다. 무슨 사과가 이렇게 물질적인지, 물론… 고마웠다.

“와… 드디어 나도 사과 상자를 받아 보네.”

“네? 이거 뭔지 다 아시는 거예요?”

“유명했지. 작년에만 오류 때문에 세 번인가 받았다고 들었거든….”

이런 실수가 잦은 건가? 빽빽하게 글로만 되어있는 리스트를 보다 창을 닫곤 사람들을 둘러보는데 유난히 신이 난 수박 누나는 흥얼거리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분명히 던전 안에선 누구보다 짜증을 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전부 똑같은 거 입고 던전 다닐까?”

“소속감 하나는 쩔 듯.”

“…좀 멋진데?”

장꾸 형의 감탄사에 송금이 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기야, 뭐 입고 다닐 거야?”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일단 그냥 두려고요.”

“아, 겸인 하나도 못 봤겠구나.”

고개를 끄덕이자 수박 누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어뉴어 제복 NO.0’이 예쁠 것 같다며 중얼거렸다. 넘버 제로라니 시리즈별로 있는 건가?

“맞아, 스킬 쓸 때 효과로 옷깃 날리는 거 예쁘더라.”

“아, 맞어! 제로가 검정인가?”

수박 누나는 유명한 룩덕이니 고민 없이 제복 NO.0를 골랐다. 배낭 안엔 기본 검정 제복과 모자, 그리고 위에 걸치는 코트가 들어왔는데 역시 룩덕….

딱 봐도 화려해 보였다. 어깨 견장은 금색 술이 달렸으며 왼쪽 가슴엔 세 개의 훈장과 어뉴어의 다섯 나라의 국기가 나란히 수놓아져 있었다.

현실에선 전혀 신을 일 없는 무릎까지 오늘 워커와 허리 위에 자리 잡은 금색 벨트까지…. 진짜 이렇게 입고 다녀도 되는 걸까?

“이거 입고 다니라고 만든 거 맞죠? 너무 화려한데.”

“응, 룩덕 워너비 템 1호야. 입어 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보미 누나까지 보태는 말에 머뭇거리다 바닥으로 내려와 또 히든 스킬을 해제한 후 착용하기를 하자 바로 원래 입고 있던 옷과 바뀌었다.

입고 나니 더 민망해졌다. 흰 셔츠 넥타이를 감싼 재킷은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길이었으며, 화려한 금장으로 존재감을 알렸고, 그 위로 걸쳐진 코트마저 화려한 금박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생각보다 몸에 붙는 것 같아 괜히 어색해 옷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옷이 날개네.”

“응, 예쁘다. 잘 어울려.”

원래 처음 화려한 옷을 입으면 어색한 법이라며, 겸이는 꽁꽁 싸매도 섹시하다는 막말을 뱉던 장꾸 형이 코스튬을 갈아입었다. 모두 같이 옷을 갈아입는 걸 보던 나르가 삐죽거리며 내 앞으로 날아와 물었다.

“겨미, 그 옷은 먼가!”

“어때? 안 이상해?”

“머찌다, 겨미!”

나르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한 번 훑어보더니 피서지 룩을 입은 제 몸을 내려다보곤 옷자락을 양손으로 쥐었다.

“겨미…. 나도 겨미같이 머찐 옷 입고 싶다.”

“펫 옷은 어떻게 구해요? 제 옷 줘도 되는 거예요?”

“아니, 펫 상점에서 사는 거지. 캐시템이야.”

송금이 형의 말에 설정 옆에 있던 캐시샵을 열었다. 여기서 펫 상점…. 코스튬 탭으로 들어가자 별의별 옷들이 있었다. 수영복, 동물 코스튬에 털 옷까지. 역시 땅 파서 장사하는 게 아닌 게임사의 예쁜 코스튬 가격은 기본적으로 사악했다.

그중 내가 입은 것과 비슷한 걸 장바구니에 넣자 39,000원. 빠르게 체크카드를 등록하고 결제까지 마친 뒤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내가 입은 것과 비슷한 제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뭐야, 다들 갈아입었네요.”

“응, 모이니까 예쁜데 사진 한 번 찍을까?”

고개를 끄덕이곤 우편에 들어온 옷을 나르에게 들려준 뒤 주위를 둘러보는데 조금씩 다른 디자인이긴 했지만, 모아놓고 보니 그럴듯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화환을 확인하자 내가 입은 검정색과 똑같은 디자인의 백색 제복을 입고 서 있었다. 저 여우 같은 놈.

“내가 그렇게 예뻐? 우리 겸이가 형아한테 눈을 못 떼네….”

“흰색도 예쁜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벗을까? 겸이가 벗으라면 벗을 수 있어, 나.”

예쁜 변태가 셔츠 단추를 푸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니 저런 행동은 둘이 있을 때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노출증이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은데…. 그걸 내가 품어줄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했다.

“겨미, 나르 옷 입었다. 어떤가?”

나르 덕분에 화환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못했다. 양팔을 벌리고 눈앞에서 요리조리 자기 옷을 보여 주는 모습이 귀여웠기에 화환의 헛소리를 얌전히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반짝이며 양팔을 크게 벌리는 걸 보니 칭찬 한마디 해줘야 할 것 같아 이리저리 둘러보는 척하다 나르와 눈을 맞췄다.

“나르 엄청 세 보인다, 멋있어.”

신난 나르가 한명씩 눈앞으로 찾아가 새 옷 자랑을 했다. 겨미가 사주었다, 겨미가 머찌다고 했다! 하는 나르의 모습에 권경배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유우겸 첫 현질이 펫 옷이라니…. 겜창 다 됐다.”

큰돈 썼다는 푸름의 말에 나르가 환불하라며 옷을 벗으려고 했고 결국 웃으며 스크린 샷 몇 장을 찍곤 길드전 보상이라며 쥐여 주는 돈을 받았다.

[귓속말]화환 : 우리 겸이 부자 됐네.

[귓속말]유우 : 자기야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형아 돈 많아!

[귓속말]유우 : 아, 아니다 또 헛소리할 거죠? 그냥 대답하지 마요.

[귓속말]화환 : 나 또 서운하게 만드는 거야?

이번만은 진심인데…. 어색하게 눈을 피하는데 채하현의 뾰로통한 표정으로 내 정수리를 내려 보았다.

[귓속말]유우 : 형은 내 관심만 먹고 살아야지.

곁으로 바짝 붙은 채예쁜이의 어깨가 떨렸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간지러운 가슴에 따라 웃는데 권경배와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곤 권경배를 노려보자 어이없는 얼굴로 고개를 팩 돌렸다. 저 덩치에 안 어울리게 삐친 적인가? 삐져도 예쁜 건 채하현뿐인데.

[귓속말]민초맛사탕 : 겸이 나랑 얘기 좀 할까?

사탕 누나의 말에 괜히 겁이 났다. 화가 다 풀린 건지 아니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음에 내게 화를 내려고 하는 건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공손해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다 천천히 대답을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귓속말]유우 : 잘못했어요, 누나.

[귓속말]민초맛사탕 : ㅋㅋㅋㅋㅋㅋ 누가 계란이 친구 아니랄까 봐 대답하는 것도 똑같아

[귓속말]민초맛사탕 : 화내는 거 아니야. 전엔 내가 너무 욱해서.. 사과하려고

[귓속말]유우 : 권경배랑 같은 취급 해서 사과 안 받아주고 싶은데 그래도 돼여?

[귓속말]민초맛사탕 : 앗

[귓속말]수박맛사탕 : 무릎이라도 꿇으까? 우리 겸이가 계란이보다 착하긴 하지

[귓속말]유우 : ㅋㅋㅋㅋㅋ 송금이 형이랑 얘기는 잘하셨어요?

[귓속말]유우 : 갑자기 인색 던전 불려와서 어색해진 건 아니죠?

[귓속말]민초맛사탕 : 이래서 내가 겸이를 예뻐해. 채하현은 병원 예약해 줄까 물었다는데

우리 채예쁜이가 걱정이 많은 성격인가? 채하현의 얼굴을 올려보자 누가 자기 예쁜 걸 몰라줄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얌전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빈 쿠션으로 가 등을 기대어 앉자 쪼르르 따라와 옆자리에 앉았다.

[귓속말]유우 :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주는 게 아닐까요?

[귓속말]민초맛사탕 : 벌써 편들어?

[귓속말]유우 : 편이 될 수밖에 없는 얼굴이잖아요...

[귓속말]민초마사탕 : ㅋㅋㅋㅋㅋㅋ 우리 겸이도 어쩔 수 없는 얼빠구나

[귓속말]민초맛사탕 : 아무튼, 오늘 고생 많았어. 남은 던전도 얼른 깨고 느긋하게 놀러나 다니자.

사탕 누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로운 시간은 세계채팅 한 줄에 깨어졌다.

[세계]사내연애 : 피안 쫄아서 길드성도 안 지키네 ㅋㅋㅋㅋㅋ

[세계]말랑콩떡 : ㅋㅋㅋㅋㅋㅋ템도 다 빼놓고 ** 쓰레기짓 쩔죠

[세계]강낭콩땅콩 : ** 피안 성최고의 수확물=빛과 송금 포션

[길드]베르 : ㅋㅋㅋㅋ 상급 포획틀

익숙한 이름에 움찔하자 다른 사람도 다 확인한 건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세게]구름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전 들어갔을 때 한 번 털어놓고 말이 많죠^^!

[세계]달이 : 피안 길드성 말고 다른 성에 쉬고 있을 건데 1도 모르는 주제에 말이 많죠^^!

“어, 써니 언니가 동맹해 줄까 물어보는데?”

“거절했어. 악동 무서워서 하늘이랑 동맹 맺었다 입 털 까봐.”

낯선 이름에 채하현을 올려보자 하늘 길마라며 대답해 주었다. 써니라서 길드 이름이 하늘인건가? 내 의문의 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알 수 있었다.

[세계]써니사이드업 : ㅆㅂ! 악동 *같은 **들 때문에 피안이 동맹도 안 받아주네.

[하늘 길드가 악동 길드에게 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세계]사내연애 : 써니 님 저희 이미 쟁 중인데......... 이게 무슨 매너죠?

[세계]시비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로남불 쩌네 길드전 중인 길드 쟁 걸고 턴 게 누구였죠^^?

[세계]시비충 : 내가 하면 참교육 남이 하면 비매너임 뭐임?

“와, 세쳇 재밌다…. 든든한 아군이 생긴 기분이고, 좋네.”

“드래곤 하트가 좋긴 좋았나 봐, 절대 앞에 안 나오는 길마님 까지 나온 거 보면.”

나르의 옷 자랑을 한참 들어주고 있던 송금이 형이 표정을 굳히곤 채하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 하트?”

“아….”

채하현도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순식간에 나쁜 사람이 된 기분에 눈만 깜빡거리며 둘을 보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레드 던전만 죽어라 돈 이유가 그거였구나… 다른 템이 아니라?”

“네, 형도 필요하세요? 100번 넘게 돌아서 겨우 하나 얻은 건데….”

“아니, 나는 다른 것도 많이 받았는 걸…. 드래곤 하트는… 신화급 아이템이지만 괜찮아….”

다시 그 고생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는지 계속해서 피안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중인 악동 길드마스터의 세계채팅에 다들 모인 김에 악동의 성을 털러 가기로 했다.

물론 나는 빼고, 말이다. 채하현도 길드원의 분위기에 어영부영 따라갔고, 나르와 느긋하게 있으려 했더니 나나가 가면 나르도 간다며 사탕 누나의 손을 잡고 날아가 버렸다.

산책을 가장한 데이트 약속이 취소되는 광경을 멍하니 보고 앉아 있다가 혼자 성도 둘러보고, 만렙이 됐으니 칠죄종 던전에서 나온 액세서리도 껴놓은 뒤 접속을 종료했다.

[그래서, 이사강이 곡괭이로 베르 엄청 때렸어.]

“응, 그렇게 얻어맞고 결국 항복했구나.”

[겸이 헌터 업무 아직 안 받아봤지?]

“네. 아직 메인 퀘도 다 못 밀었죠.”

[또 엄한 던전 뜰까 봐?]

“음…. 그렇죠.”

[우리 길드 창고 빵빵해, 걱정 말고 찾아서 가자. 사탕 말대로 빨리 클리어하고 느긋하게 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자기야, 내 퀘스트가 이제 지겨워졌어?”

[아니, 빨리 겸이랑 결혼하게.]

“어뉴어 결혼 콘텐츠 없다면서요.”

[겸이 상자 있잖아. 수인 왕국에서 할 수 있는 거.]

“이럴 때만 기억력 좋죠?”

[기억력만이겠어요? 지금 겸이 졸린 것도 아는데.]

“어떻게 알았지? 숨기는 중이었는데.”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는데, 힘들게 숨기기까지 해. 얼른 자, 눈 감고.]

“형도 얼른 자요, 키 크다고 늦게 자지 말고.”

[응, 겸아. 좋아해. 잘 자.]

채하현은 자라고 하면서 잠을 깨우고 있다. 좋아한대, 어떡해…. 머리를 베개에 묻어 얼굴을 숨겼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 살랑거리기를 잘하는 거지? 쿵쿵 뛰어대는 심장 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릴 것 같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기야, 나 또 쓸쓸해.]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채하현의 불퉁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네에, 형도 잘 자요.”

[우리 애 부끄럼 많은 걸 잊어 버렸네. 내일 봐요.]

전화가 끊김과 동시에 발을 굴러 침대를 내려치다 뭐에 홀린 듯 인터넷을 켜 전에 검색하다 만 동성연애를 검색창에 입력했다.

한참 연관 검색어까지 타고 들어가다 결국 성인 인증까지 해 찾아본 결과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그게 거기로 들어간다고? 책에서나 나올 법한 성관계에 놀라기보단 뇌가 잠시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런데 채하현은 어느 쪽인 거지?

물어보려 해도 이미 잘 자라는 인사를 한 후로 2시간이 지나 있었기에 조용히 이어폰을 찾아 동영상만 재생했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느라 세 시가 넘어서 잠이 든 탓에 눈을 뜬 건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었다. 멍한 정신에도 어제의 배움은 잊히지 않았고, 마침 핸드폰이 울려 발신자를 확인하자 역시 채하현이었다.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마침 잘됐네.

[자기야 아직 자?]

“이제 일어났어요.”

[아쉽다 뽀뽀로 깨워 주러 가려고 했는데,]

“형,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일어나자마자 내 생각부터 한 거야? 좋다. 뭔데요?]

“형이 넣고 싶은 거죠?”

사실 자리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인터넷의 넘치는 지식 덕분에 받아들이는 사람이 부담이라는 것도 알았고, 아픈 걸 싫어하지만… 채하현이 아파서 잉잉 우는 걸 생각해 보니 그게 더 속상할 것 같았기에 이미 머릿속으로는 어느 쪽이든 받아들일 수 있게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응?]

“응.”

[자기야, 지금 내가 뇌가 썩어서 그런지 이상한 쪽으로밖에 해석이 안 되는데…. 이게 맞아?]

“…그럴걸요?”

[일찍 자라고 보내 놨더니… 나랑 자려고 그런 거 찾아본 거야?]

그런 거 찾아본 건 맞지만 채하현을 어떻게 해 보려 불순한 의도를 갖고 찾은 건… 맞았다. 아니, 그런데 이 예쁜이 목소리를 또 왜 이렇게 간지럽게 내고 난리야.

“꼭, 그렇지만은 않을걸요….”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할 생각으로 찾아본 거야? 겸이 자기는 난데.]

“놀리는 거죠? 대답 안 할래.”

[이런 사소한 거 하나하나에 오해와 망상을 부르는 거 알고 있지? 수상해서 의심까지 돼. 안 되겠다, 오늘 나랑 같이 점심 먹어.]

“그냥 자기가 같이 먹고 싶은 거면서.”

[들켰네, 데리러 갈게. 우리 집에서 먹자, 자기야.]

“이상한 짓 안 하겠다고 약속하면요.”

[자기야, 모르나 본데… 나도 혼전 순결이에요. 겸이만 야한 생각 안 하면 돼.]

본인에게 결혼을 열 번쯤 한 사람의 바이브가 줄줄 흐른다는 건 모르는 건가? 어이가 없어 대답하지 않으니 30분 뒤 집 앞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30분이면 빠듯한데…. 일단 옷을 벗으며 욕실로 달려가 따뜻한 물로 샤워했다.

솔직히 별생각이 없었는데… 어제 본 두 번째 영상이 떠오른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하필 샤워 중인 사람의 뒤를 따라와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을 맞다 고개를 저으며 음란한 생각을 털어내곤 쏟아지는 물줄기에 얼굴을 묻었다.

언젠가 있을 일을 대비하는 거다… 하며 손만 움찔거리다 고개를 저은 뒤 빠르게 몸을 헹구곤 밖으로 나오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안 되겠다. 어제 북마크 해둔 사이트에서 초심자를 위한 도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일단 그걸 한 번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준비다. 준비일 뿐이었다. 한창때인 성인인데 잠도 잘 수 있는 거 아닌가. 잘 풀어줘야 한다고 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자기야, 머리 말리고 와도 된다니까.”

“더워서 빨리 마를 건데요, 뭐.”

“그러다 감기 걸… 아, 혹시 내가 간호해주는 거 기대하는 거야?”

대충 대답한 뒤 홀린 듯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들리는 헛소리에 대답 대신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채하현은 요상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더니 계속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간호사복 준비할게.”

“형, 혹시 술 마셨어요?”

“아니, 나 술 못 먹는 거 알면서 그러지.”

“왜 취한 것 같지….”

“취했지. 겸이한테.”

“네, 헛소리 그만. 저 배고파요.”

고개를 끄덕인 채하현의 발이 조금 더 빨라졌다. 역시 얼굴만 봐도 배는 부르지 않는구나.

채하현의 집은 모델하우스 같았다. 있을 거 다 있는데 생활감이며 온기 하나 없이 덩그러니 있는 공간.

“구경해도 돼요?”

“네, 국 데우기만 하면 되니까 천천히 보고 와.”

“뭐야, 밥 해 주는 거예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잖아.”

기특한 말에 잡고 있던 손을 놓곤 채하현의 허리를 안아 등을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잠시 움찔하던 채하현도 따라 내 등을 안아 주며 토닥거렸다. 빨리 밥을 차리라 주방으로 보이는 곳에 밀어 넣은 뒤 천천히 집을 둘러보았다.

우리 집과 비슷한 크기의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했다.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는데 캡슐 두 개가 덩그러니 놓인 방은 유난히 채하현의 냄새가 많이 배어 있었다. 거의 여기서 사는구나. 손님용 방까지 깔끔하게 정리돼 있으면서 정작 자기 침실은 이불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게 보여 웃음이 났다.

얼른 주방으로 가 앞치마까지 두른 채 종종거리는 채하현의 등을 안으며 앞을 내려다보니 노란 계란물을 푸는 중이었다.

“겸이 오늘 기분 좋아?”

“조금. 나 부르려고 청소했어요?”

“어제부터, 힘들었어.”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나를 뒤에 달고도 쉽게 만들어 내는 계란말이에 채하현의 등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채하현이 차린 점심은 꽤 호화스러웠다. 메인 반찬 하나에 마른반찬 두 개, 아직 김이 폴폴 나는 계란말이까지. 얘 진짜 나한테 시집 안 오나?

“혹시 신랑수업 했어요?”

“아뇨, 사 먹는 거 귀찮아서 하다 보니 늘었지. 맛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계란말이를 입에 넣자 뿌듯하게 웃으며 반찬을 얹어 주는 채예쁜이의 행동에 차마 네 얼굴이랑 맨밥만 있어도 진수성찬인데…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주는 대로 받아먹은 탓에 평소 먹던 양보다 더 많이 먹어 속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방긋 웃으며 얹어 주는 반찬을 안 먹을 순 없지 않은가. 채하현은 평소보다 배가 불러 소파에 눕듯 앉은 내 앞에 컵을 내려놓은 뒤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아직 내 대답 안 들었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채하현의 예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지? 요리하는 이유는 이미 들었는데.

“무슨 대답이요? 요리 잘한다는 거 말고 또 있었나?”

“넣는 쪽인지 물어봤잖아. 그거 아직 대답 안 한 것 같은데.”

아… 채하현이 앞에 내려놓은 컵을 들어 올렸다. 만약에 채하현이 당하는 쪽이라면 장바구니에 성인용품을 주문해 포장도 풀지 않은 채 줄 수도 있는데.

“네, 네. 그래서요? 어느 쪽이에요?”

“겸이 연인 상자 나랑 같이 여는 날 알려줄게요.”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이 예쁜이도 나와 결혼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겠지?

“저 이제 집에 가볼게요.”

“먹튀야? 예쁘게 밥 차려 놨더니 그것만 먹고 가?”

“네. 뮤첼 빨리 잡아야 결혼하지. 형은 당분간 뜨거운 물에 씻어요.”

“…이렇게 더운데?”

“삶아서 쓰려다 양보한 거예요.”

마음 같아선 눈앞에서 발갛게 삶긴 채 잉잉 우는 걸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애인을 뜨거운 물에 익힐 수는 없어 최대한 양보한 거였다.

“형은 이리저리 몸을 굴리고 다녔을진 모르겠지만… 저는 아직 때 묻지 않았거든요.”

“우리 자기가 동정 고백을 이렇게 하네.”

생각보다 저렴하게 들리는 내 고백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말하면 지금이라도 나가서 떼고 오고 싶은데….”

“농담을 왜 그렇게 무섭게 해? 이게 그건가, 질투 유발?”

“집에 갈래요. 생각하는 시간을 갖죠, 우리.”

채하현이 화들짝 놀라며 내 허리를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금 우위를 잡은 자리에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모르는 척 손을 털어내곤 채하현의 옆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앉았다.

“자기야 나 진짜 울어?”

말과 다르게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채하현을 한 번 노려보았다. 그제야 눈을 내리깔며 슬퍼하는 표정을 만들었다.

이대로 울려도 되지 않을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냐 싶다가도 눈꼬리부터 붉어지는 얼굴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채하현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얼굴이 문제다. 조금만 덜 예뻤어도 엉덩이를 내리칠 수 있었는데.

“다음엔 울어도 안 봐줘요.”

“네에.”

대답만 잘하지. 언제 울먹였냐는 듯 생글거리는 채하현이 빨리 뮤첼을 잡으러 가자며 캡슐이 있는 방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설마 이 새끼 나랑 같이 게임 하려고 캡슐 하나를 더 산 건가?

내 의심을 눈치챈 채하현이 예.전.에 쓰던 기계를 쓸 테니 나에게 새.것을 쓰라는 쓸데없이 강조된 말을 하더니 말릴 새도 없이 캡슐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Hunter : A New Adventure 09번 채널로 입장합니다.]

[환영합니다, 헌터님!]

[길드]수박맛사탕 : 겸이다! 겨밍!

[길드]장꾸 : 겸이 ㅎㅇ

[길드]지우 : 겸이 형 왜 이렇게 늦게 와여!

[길드]빛과송금 : 겸아, 얼음 안 필요해?

[길드]푸름 : ㅎㅇㅎㅇ

[길드]민초맛사탕 : 겸이 ㅎㅇㅇ

[길드]민초맛사탕 : 뭐야 길마도 왔는데 다들 겸이만 반기네.. 우리 길마 겸이였음?

[길드]간계밥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간계밥 : 집에 없던데 ㅇㄷㅇ?

순식간에 밀려온 채팅에 진저리를 치다 권경배의 귓속말을 보곤 입꼬리가 올라갔다.

[귓속말]유우 : 우리 자기 집

[귓속말]간계밥 : 뭐야, 언제 집까지 허락하는 사이가 된 거? 망상인가..

[귓속말]유우 : ^^!

[귓속말]간계밥 : 안 들을래. 모르고 싶음.

기쁨은 나누면 두 배고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두 사람이게 꼭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듣지 않겠다는 권경배에게 자랑할 필요까진 없지. 얼른 히든 스킬을 켜고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라디아탄이 있던 산을 한 번 들렀다 퀘스트를 할 생각이었다.

[귓속말]화환 : 자기야, 사탕이 레이드 한 번 하자고 해서 다녀올게. 메인퀘 밀고 있어.

[귓속말]유우 : 나르도 아직 거기 있어요?

[귓속말]화환 : 응, 나르 언니 옷 입고 있어. 그리로 보내줄까?

[귓속말]유우 : 언니옷..?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 나중에 데려와주세요.

언니 옷이라니 나나가 얼마나 좋길래 제복도 갈아입은 거지? 이래서 아들은 키워 봤자인가? 한숨을 내쉬며 성문 밖으로 걸어 나가자 이제 제법 활기를 찾은 마을에 유저들이 한둘씩 보였다. 아마 하우징을 옮긴 사람들일 텐데 이상하게 NPC나 마을 주민들이 없어 조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대, 유명한 헌터가 아닌가!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막 마을 밖으로 나와 산으로 올라가는 길, 이름조차 뜨지 않은 사람이 나를 붙잡은 채 얘기하자 바로 알림이 떴다.

[숨겨진 퀘스트 발생!]

-수상한 노인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거절]

전에 푸름이 열매를 얻어온 퀘와 비슷한 건가? 일단 수락을 누르고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사람을 올려보았다.

-친절한 아이구나. 아이언레빗의 뿔을 구해줄 수 있나? 여기로 조금만 올라가면 레빗굴이 나오지. 거기 왕을 잡으면 나오는 아이템이란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수상한 노인의 의뢰]

1. 수인족 왕국의 서쪽 산, 레빗굴의 왕인 아이언레빗의 뿔을 가져다주세요. (아이언레빗의 뿔 1/1)

아이언레빗은 라디아탄의 첫 퀘스트였는데…. 초보 사냥터의 템인 것 같아 송금이 형에게 주지 않아 마침 배낭 안에 있었기에 얼른 그 사람 아래로 내려놓았다.

-벌써 찾아온 건가? 역시 유명한 헌터는 다르군, 그래. 다음은 꿀너구리의 수염을 구해주게, 저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무너진 집이 있을 걸세. 그곳에 꿀너구리들이 몰려 있지.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수상한 노인의 의뢰]

2. 꿀너구리 사냥. 딜러슨의 양봉장에 자리 잡은 꿀너구리의 수염은 구해주세요. (꿀너구리의 수염 0/10)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이거 히든 직업의 튜토리얼에서 나온 아이템들이잖아. 앞에 멀뚱히 선 사람을 노려보다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리며 뒤를 힐끔거렸다. 저 사람 뮤첼은 아니겠지?

오랜만에 온 딜러슨의 집은 이미 세월의 흔적이 지난 표시가 확 났다. 내 키보다 큰 잡초에, 무너져 내린 집과 벌통들은 사람의 손을 못 탄 지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고, 대신 꿀너구리들이 바글거리며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서둘러 광범위 공격인 프레즐과 하울링을 사용하자 금방 수염이 모였다. 혹시나 더 필요할까 싶은 마음에 아이템이 다 모였음에도 꿀너구리를 잡았지만, 아이템은 더 들어오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뒤 바로 노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다시 그 앞으로 수염을 내밀자 웃음소리와 큰 손이 내려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강한 자였군, 이렇게 빠르게 모아 주다니…. 마지막 부탁을 해도 되겠나?

“뭔데요?”

-꿀너구리 소굴 아래로 내려가면 튜나르의 꽃밭이 있지. 그 꽃을 좀 따다 주게. 소중한 친구가 좋아하는 꽃이야.

“혹시 거기 키메라 있어요?”

-그렇진 않단다. 그곳의 키메라는 없어진 지 오래지. 그대도 알지 않는가?

움찔하는 몸으로 바르게 세워 올려 노인을 빤히 올려보았다. 하지만 로브로 꽁꽁 가려진 탓에 미소 짓는 입가만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일단 튜나르의 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꽃은 나르도 좋아하는데, 우리 나르의 살아 있는 친구는 없으니 나르와는 상관없는 거겠지?

튜나르의 꽃밭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유난히 커져 있었다. 향긋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온 사방에서 불어 왔다. 연분홍 꽃잎이 다치지 않게 이로 줄기를 뜯자 튜나르가 배낭 안으로 차곡차곡 들어왔다.

열 개가 다 차서 노인이 있는 자리로 가 꽃은 내려놓자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튜나르의 꽃을 들어 올리며 후드를 벗었다.

“체이슨?”

-아직 나를 기억해 주는 거야?

로브를 벗은 그는 언제 노인이었냐는 듯 나르의 기억 속에서 봤던 체이슨의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떻게? 죽었잖아. 아직 떠도는 거야?”

-네가 찾아준 안식의 품에서 자고 있었지. 다른 수인들도 구해 주었지? 그대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들의 힘을 모아 내가 온 거야.

나르를 데리고 와야 했다. 누구보다 반가워할 아이였고, 사과하고 싶을 텐데…. 발을 동동 두르다 채팅창을 열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데, 체이슨의 발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르 데려올게. 잠시만, 잠시만….”

체이슨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열 개의 튜나르를 하나로 합쳐 내 쪽으로 내밀었다.

-이제 시간이 없어. 이걸 그 서툰 아이한테 전해 줄 수 있어? 미워해서 미안했다고, 너는 내 소중한 친구라고.

“직접 줘야지. 나르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소중한 우리의 왕. 그대가 이리 다정한 사람이라 안심했어. 마지막 죄인은 뮤첼의 연구소에 자리 잡았어. 우리가 알려 주고 싶은 건 이거야. 부디 그대가 옳은 선택을 하길.

곧이어 체이슨이 사라지며 튜나르의 꽃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결코 지지 않는 튜나르의 꽃]

뭐지 이 전개는…. 먹먹함에 빠르게 꽃을 주워 하우징으로 이동하기를 눌렀다. 이젠 마지막 죄인이 있는 곳도 알았으니 더 퀘스트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가장 작은 외형으로 바꾼 뒤 쿠션에 몸을 파묻었다.

[귓속말]유우 : 형, 언제 와요?

[귓속말]화환 : 자기야, 나 보고 싶어?

지금은 나르가 더 보고 싶었지만, 사실을 말하면 삐질지도 모르겠으니 일단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려 채팅창을 열었다.

[귓속말]유우 : 네, 얼른 와요. 저 하우징이에요.

[귓속말]화환 : 무슨 일 있었어요? 이제 보스만 잡으면 되는데.

[귓속말]유우 : 그냥.. 혼자있기 싫어서요

슬쩍 내비친 대답에 채하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냥 쿠션 위로 박힌 몸을 꾸물거려 더 안쪽으로 파고든 채 눈을 감았다. 20분쯤 흘렀을까? 달려온 듯 숨을 몰아쉬는 채예쁜이 가든 하우스의 문을 열곤 내게 걸어왔다.

“자기야, 누가 괴롭혀?”

아무 말 않고 팔을 뻗자 이젠 당연하게 나를 안아 주는 채하현의 뒤로 사탕 누나와 나르, 나나가 들어왔다. 체이슨의 이야기를 나르에게 해도 되는 걸까? 이제 막 동생이 생겨 즐거워하는데….

“겨미, 나르가 없어서 쓸쓸했나? 왜 또 비 맞은 똥강아지 얼굴인가!”

이 새끼가… 나는 지금 엄청난 고민 중인데.

“나르, 체이슨 기억나?”

채하현이 나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더니 쿠션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 덕분에 편한 자세를 찾으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을 수 있게 되었다.

개나리색 예쁜 원피스를 입은 나르가 눈을 굴리다 이내 체이슨이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끄덕였다.

“체이슨이 교만이 뮤첼의 연구실에 있다고 알려줬어.”

“…레미는? 그 토끼 수인도 만난 건가?”

“아니, 체이슨만.”

“체, 체이슨이 나르를 아직 미워하지 않나?”

“…….”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인 채 울먹이는 나르의 목소리에 괜히 속상했다. 아직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나르를 보곤 바닥으로 내려와 배낭에 있는 튜나르의 꽃을 앞에 내려놓았다.

“이거 나르한테 주래. 미워해서 미안했다고, 나르를 자기의 소중한 친구라고 했어.”

나르의 얼굴이 무너짐과 동시에 눈물이 범람했다. 이 작은 몸에 어떻게 그렇게 큰 슬픔을 안고 있을 수 있었던 걸까? 싶을 만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는 마음이 흘러나오는 듯 소리 없이 쏟아지기만 했다.

“끅, 흐흑… 겨미, 내가 흡. 이걸 받아도, 대는 거신가?”

“당연하지, 나르 친구가 준 건데….”

나르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걸 만지듯 튜나르의 꽃을 소중하게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그러더니 이제 거릴낄 게 없다는 듯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방금 막 들어온 수박 누나와 권경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사탕 누나마저 눈시울을 붉히며 나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흑, 겨미… 고맙다.”

내가 용서해 줬다는 것처럼 목놓아 우는 나르의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늑대의 모습이었기에 얌전이 앞은 지키고 앉았다.

이따 나르가 좋아하는 간식을 푸름과 권경배에게 시켜 잔뜩 사 오게 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르의 얼굴을 내려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이 작은 아이는 내가 지켜 줄 것이다. 이렇게 우는 일이 없게 즐거운 일을 잔뜩 경험시켜주고, 웃는 얼굴만 봐야지. 몇 번을 되뇌다 나르와 나를 동시에 안아 토닥여 주는 채하현의 손길에 잠시 잠이 들었다.

“자기야?”

“아니 내 거…!”

잠을 털어내려 고개를 붕붕 돌리는데 어느새 모인 열한 명의 사람과 튜나르의 꽃을 손에 쥔 채 나를 보고 있는 나르가 보였다.

“계속 발버둥만 치길래 일단 깨웠는데, 괜찮아?”

가까이 고개를 숙인 화환의 얼굴에 고개를 끄덕이며 앞발을 들어 눈을 부비자 나르가 내 곁으로 날아왔다.

“겨미 꿈꿨다?”

“…응.”

“우리 지금 교만을 언제 잡으러 갈지 회의 중이다. 이러나라.”

나르가 나를 안고 있는 화환의 손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와 눈을 맞추며 웅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꿈을 꾼 것 같은데… 무슨 꿈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겨미, 왜 이러케 멍한가!”

퉁퉁 부은 눈으로 누굴 혼내는 건지…. 어이가 없어 코로 나르의 코를 부비자 깔깔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그러자 화환이 서둘러 나르와 나를 떼어 놓았다. 아, 얘 질투한댔지.

“겸이 깼으면 같이 정하면 되겠다. 언제 갈래?”

“맞아, 위치는 나르가 안다는데.”

“다들 언제가 괜찮으세요? 전에 나르 기억으로 볼 땐 뮤첼의 연구소까지 가는데 몬스터가 엄청 많던데.”

“그럼 주말 아니면 저녁 시간이 좋지 않아?”

“그런데 교만이 끝이 아니지 않나? 교만 때리는 중에 뮤첼까지 나오면 어떻게 해?”

“그러게요…. 아, 5차 각성퀘는 메인퀘 다 밀어야 나와요?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데.”

“아닌데, 만렙 되면 바로 열리지 않나?”

다들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퀘스트 창을 확인해 봐도 아직 검게 물든 상태 그대로였기에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우리 지금 드랍된 아이템 중에 빈자리상, 하의 투구지?”

“응, 다음 템은 투구 나올 것 같다는, 송금 오빠가.”

사탕 누나의 대답에 화환이 잠시 조용히 있다 내 쪽을 내려 보았다.

“형, 겸이 만렙 장비도 형이 맞춰 주는 거예요?”

“응, 웬만하면 특수효과 붙은 거로 만들려는데 장비엔 잘 안 붙네. 리자드킹 가죽도 부족하고.”

“아…. 레드 던전 1인 클 가능한 사람?”

수박 누나와 보미 누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1인 클리어라니…. 저번에도 수박 누나 혼자 클리어한 건가?

“자기야, 떼돈 벌게 던전 좀 열어 둘까? 누나랑 수박이는 최대한 많이 돌고, 리자드킹, 드래곤 하트는 길드에서 살게.”

보미 누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정도는 괜찮은 걸까?

“괜찮아요?”

“하루쯤은? 템도 자기 쓰기 바쁘지, 무자비하게 시장에 풀리진 않을 거야.”

화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도 레드 던전만 돌아야겠네. 구름이 누나에게도 얘기해 주고….

[귓속말]유우 : 누나

[귓속말]구름이 : 겸이 자ㄱㅣ야 하늘로 오려고?

[귓속말]유우 : ㄴㄴ 레드 던전 하루 열 거예요

“그럼 교만은 겸이 템 맞추고 가는 거야?”

“그래야지. 금요일쯤 되겠죠?”

“최대한 맞춰 볼게.”

답이 없는 채팅에 화환의 품에서 뛰어내려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몸을 부르르 떠는데 채팅창이 반짝였다.

[귓속말]구름이 : ㅋㅋㅋㅋㅋ 용돈 달라는 거구나!

[귓속말]유우 : 들켜따ㅎㅎ 리자드 킹 템 삽니다

[귓속말]구름이 : ㅇㅋㅇㅋ

“바로 갈 거죠?”

누가 더 많이 던전을 클리어할지 내기 중인 두 누나를 보며 묻자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던전 앞으로 간 거겠지 싶어 던전을 열었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의 입장료가 들어왔다는 알림이 떴다.

그 뒤로 권경배가 새로 얻은 ‘스킬 채집하는 자’ 효과로 희귀아이템 획득률이 높아졌다며 우리 둘을 끌고 던전으로 향했다.

돈은 삽시간에 모였다. 이렇게 벌다가 하루아침에 재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만큼 말이다. 다섯 번을 채우고 드래곤 하트까지 얻은 권경배가 떵떵거리며 송금이 형의 작업실로 갔고, 나르와 화환의 다리 위에서 빈둥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형, 저 부자 됐어요.”

“다들 벼르고 있었나 봐.”

“그러니까요. 이걸로 구름이 누나네 템 사고….”

“나르는 케이크가 먹고 싶다, 겨미.”

“…나르 케이크 자판기 있잖아. 간계밥.”

멀리서 계라니! 하고 부르기만 해도 배낭을 뒤적이며 간식을 꺼내던데. 나르가 치 하며 고개를 돌렸고, 화환은 아직 나르의 손에 들린 꽃을 보며 나르의 등을 토닥였다.

“그거, 송금이 형한테 부탁하면 액세서리로 만들어 줄걸.”

“그럴 수도 있나? 겨미, 나르 돈 줘라. 송금이에게 의뢰할 거시다!”

잘됐다. 잃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고개를 끄덕이고 배낭을 열었다.

“얼마나 주면 돼요?”

“나르가 가서 무러보게따! 겨미 여기 그대로 이써라!”

대답도 듣기 전 훌쩍 날아와 내 양 볼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뒤 날아가는 나르의 뒷모습만 빤히 보았다. 좆 된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화환의 다리 위로 뛰어오르자 화환이 쿠션에 기대 누우며 나를 배 위로 옮겨 안았다.

“자기야, 뽀뽀는 나르랑 하고 올라타는 건 내 위로 올라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며 채하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으며 내 양 볼을 손으로 닦았다. 올라타다니,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잘도 하네.

한숨을 폭 내쉬며 채하현 위로 기어올라 입술 위로 혀를 내어 길게 한 번 핥아 준 뒤 다시 내려와 채하현의 가슴팍을 벅벅 긁어 그 위로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웠다.

“…나르는 두 번 했잖아.”

“볼이었잖아요.”

“치사해.”

“치사한 게 누군데…. 언제는 우리 애라더니 이젠 뽀뽀하는 거로 질투하면서.”

“앞으로 질투 안 한다고 하면 밖에서도 해 줄 거야?”

질투한다고 해도 밖에서는 500번도 더 해 줄 수 있는데, 이 예쁜이는 멍한 얼굴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형, 나랑 뽀뽀하고 싶어요?”

“더한 것도 하고 싶은데…. 우리 자기는 내가 별로인가 봐.”

채하현의 얼굴로 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다 이내 다리 사이로 다시 얼굴을 묻었다. 명색의 첫 뽀뽀인데 이렇게 게임 속에서 할 순 없지.

“겨미!!! 솜그미가 2억에 해 준댔다! 빨리 돈을 줘라, 나르에게!”

타이밍 좋게 나르가 날아와 화환의 배 위로 퍽 소리가 나게 앉으며 양손을 곱게 포개 내밀었다.

“앞으로 뽀뽀 안 한다고 약속하면 줄게.”

“…그건 친밀감의 표시가 아닌가? 왜 못하게 하는 거지?”

“겸이는 뽀뽀한 사람이랑 결혼하기로 했어. 나르 겸이랑 결혼하게?”

“하지만…. 사탕이 알려 주었다. 뽀뽀는 친한 사람과 한다는 걸.”

“그건 사탕 기준이지. 겸이 기준은 아니잖아.”

요망한 미친놈이 달달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나르를 홀리기 시작했다. 태어난 지 한 달 된 나르는 그 말에 홀라당 넘어가 고개를 끄덕였고, 화환이 나르의 손 위로 돈을 얹어주었다.

“질투 안 한다더니 질투할 상황을 안 만드는 거였어요?”

“어른의 유도리지. 그래서, 자기야 나랑 뽀뽀 언제 해 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채하현은 이름을 바꿔야 했다. 채여우나, 채구미호 정도로? 하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애인의 재롱이라 치면… 귀여운 정도지.

“오늘 자고 가도 돼요?”

“…손만 잡고 잘 거야?”

“손도 안 잡고 잘 건데…?”

“설마, 자기야 손 말고 다른데 잡으라는 건 아니지?”

“내가, 내가… 실수했네. 그냥 집에 갈게, 다음에 봐요.”

다른 뜻이 있긴 했다. 채하현이 씻는 물 온도 확인이며, 막 깨어났을 때의 얼굴이 궁금했던 건데… 이렇게 음탕하게 해석할 줄은 몰랐다. 서둘러 채하현의 배 위에서 뛰어내리며 이를 한 번 내보이곤 최대한 멀리 떨어진 쿠션 위로 뛰어올랐다.

“역시 여기선 얼굴이 안 먹히네. 나가서 봐, 겸이 오늘 외박하는 날일 거니까.”

한동안 투닥임이 계속되었다. 작정하고 살랑거리는 채하현을 모는 척했지만 계속 치근대는 말에 결국 보미 누나와, 수박 누나가 안으로 들어올 때쯤 나는 배를 까뒤집고 누워 있었다.

던전은 하루가 되기 10분 전 닫혔다. 구름이 누나에게 아이템을 사와 송금이 형에게 보내자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나르를 사탕 누나에게 맡긴 뒤 접속을 종료하고 채하현과 나란히 저녁을 먹은 후 산책로를 걸었다.

“형, 솔직히 얘기해 봐요. 캡슐 새로 산 거죠?”

“응, 겸이랑 같이 게임하려고.”

내가 자기 집에 언제 올 줄 알고…. 두 걸음 앞에 걷는 채하현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손을 잡았다. 싫지 않을 만큼 따끈한 온기에 혼자 머쓱해 주위를 둘러보는 척 걷자 금세 맞잡아오는 손이 귀여워 웃음이 계속 났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채하현의 잠옷을 입고 머리를 말려 주는 손길에 반쯤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얼굴이 문제다. 그 얼굴에 홀려 다시 게임을 하다 결국 욕실로 밀려왔으니 말이다.

“자기야, 졸려?”

“조금요. 형 게임 할 시간 아닌가?”

“자기가 여기 있는데 게임은 무슨.”

“와, 길마가 이래도 되나?”

“길마보다 믿음직한 부길마가 있잖아. 다 됐다.”

보송해진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하긴, 사탕 누나가 더 믿음이 가는 사람이긴 하지….

채하현이 먼저 침대 위로 올라가 내가 누울 곳을 정리하듯 꼬물거렸다. 어차피 누우면 다 흐트러질 텐데. 눈을 부비며 이불을 걷어 주는 곳으로 누워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 뒤척거리다 보니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잘 자, 좋아해.”

여우 같은 새끼. 살랑살랑 웃는 얼굴로 하는 말에 귀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눈을 굴리며 못 들은 척하려다 채하현의 입술 위로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곤 등을 돌려 누웠는데 채하현이 내 허리를 안아 제게 딱 붙게 만든 후 목덜미로 얼굴을 부볐다.

“겸이는 말보다 몸으로 하는 걸 좋아하네.”

“네, 잘 자요.”

“나 못 잘 것 같아. 오늘 첫 뽀뽀 한 날이잖아.”

한 번 더 해 주면 잘 잘 것 같다는 둥, 어떻게 등을 돌릴 수 있냐며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쪽으로 다시 돌아눕자 크게 하품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채하현이 크게 웃다 입술을 내밀었다. 어디서 이런 여우같은 놈이 나온 걸까?

“겸아, 많이 졸려?”

“응, 내일 또 해 줄게 얼른 자요.”

채하현이 온몸으로 나를 안아 등을 토닥였다. 답답하면 못 자는데…. 는 무슨 오랜만에 푹 잔 기분까지 들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채하현에 놀란 것도 잠시, 긴 속눈썹을 구경하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와 양치만 빠르게 한 후 다시 방으로 들어와 채예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생길 수 있지? 혹시 요정이나 천사가 아닐까? 손가락을 뻗어 채하현의 뽀얀 볼을 쿡쿡 찔렀다.

“형.”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은데….

“자기야.”

알고 싶지 않은 걸 알아차린 기분이다. 분명히 깨어났는데 자는 척하는 중인 이유를 말이다. 볼을 찌르던 손을 내려 채하현의 턱을 감싸 쥐며 입술을 볼록하게 만들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그제야 눈을 뜬 채하현이 내 손을 잡곤 손등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어댔다.

“자기 나갈 때. 어떻게 알았어?”

“형 연기는 하면 안 되겠다. 눈동자가 춤추던데요.”

똘망똘망한 눈으로 연신 베개에 얼굴을 부비며 일어나지 않는 채하현을 보곤 따라 옆에 누웠다.

“새벽에 단체 채팅방에 송금이 형이 바지 띄웠다던데, 확인했어?”

“아, 핸드폰….”

채하현이 자기 옆 테이블에 충전 중이던 내 핸드폰을 내 손 위로 올려 주었다. 단체 채팅방 확인 전 7시 20분에 온 작은형의 메시지를 먼저 확인하자 백설이가 이제 ‘빵’을 익혔다며 동영상 세 개가 와있었다. 채하현과 그걸 돌려본 뒤 단체 채팅방을 열었다.

송금 [이미지]

송금 [임팩트 화려한 건 아닌데 스킬 쓸 때마다 주변에 바람이 분대]

수박 [겸이거?]

송금 [응, 다음 던전 준비랑 상의 때문에 강화는 어려울 것 같은데, 환이나 계란이가 도와줘….]

“강화 어려워요?”

“아니, 10강부터 부적 바르면 별로. 돈이 많이 들지.”

“저 부자인 거 알죠? 빨리 접속해요, 강화석인가 그것도 필요한 거잖아.”

“우리 애도 겜창 다 됐네. 아침 빵 먹어요, 밥 먹어요?”

“빵. 빨리 되는 걸 먹어야죠.”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든 건지 채하현은 내 허리를 끌어안고 놓을 생각을 안 했다. 아니, 강화석 구하러 가야 하는데…. 결국 뽀뽀 세 번이나 받은 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채하현의 뒤를 따라다니다 식탁 위로 내려준 커피와 식빵을 마시듯 먹고 어뉴어에 접속했다.

“겨미! 오늘도 길마와 같이 온 건가?.”

“겨미…!”

“어? 나르 나나랑 둘이 있어?”

“맞다! 나르와 나나가 겨미 성을 지키는 중이었다!”

화환에게 달랑 들려 들어온 가든 하우스는 엉망이었다. 과자 부스러기에, 쓰레기들까지. 물론 정각이 되면 청소가 되긴 한데….

“나르, 나나 재미있게 놀았나 보네.”

“…펫이 이렇게 군것질해도 돼요?”

우리 둘의 주위를 빙빙 도는 두 명의 아기들을 노려보며 묻자 나르가 쓰레기를 숨겼다. 그러자 나나가 나르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나, 나나가 아니라 나르의 잘모시다! 나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아닌데, 저거랑 저건 나나가 했잖아.”

바닥에 그림 그린 것과, 쿠션을 모아 아지트로 만든 걸 가리키는 나나에 화환의 어깨가 흔들렸다. 웃음이 나? 벌로 두 마리의 펫은 강화석 파밍에 끼고 가기로 했다.

강화석은 하루에 세 번 돌 수 있는 광산에서 석탄 같은 몬스터를 잡으면 나온다고 했는데 한 번 클리어 할 때 열다섯 개밖에 못 얻는다고 했다.

“12강이 풀강인데… 열다섯 개요? 저 칠죄종 템도 다 강화해야 되는데….”

“아무도 겸이한테 안 알려 준 거야?”

“네. 강화석 모은다는 말만 들었지….”

“겨미, 얘들은 나나에게 경험치를 주지 않는다!”

“응, 그렇지.”

“자기야, 길드 창고에 있는 거 써. 천천히 채워 두면 되니까.”

“진짜… 오늘부터 꾸준히 돌 거예요.”

채하현이 처진 내 귀를 세워주듯 쓰다듬었다. 나르와 나나는 처음 보는 몬스터가 신기한지 거의 가지고 놀 듯 장난을 치며 사냥하기 시작했다.

우리 나르야 강한 걸 알고 있었지만, 나나도 저렇게 강했나? 동그란 원형으로 물을 모아 그 안에 석탄 몇 마리를 넣어 빨래 돌리듯 돌리며 장난을 치다니…. 고개를 젓곤 바닥으로 내려와 몬스터에게로 달려가며 하울링을 사용했다.

45개의 강화석을 배낭에 넣고 다시 성으로 돌아오자 거긴 사탕 누나가 혼자 성을 지키고 있었다.

“누나 언제 오셨어요?”

“아까. 그런데 뭐야 둘이…. 결국 우리 겸이 채하현한테 넘어간 거야?”

따지고 보면 그게 맞지 않을까? 어색하게 웃으며 사탕 누나의 눈을 피하자 화환이 내 얼굴을 들어 올리며 눈을 맞추곤 씩 웃었다.

“넘어왔지, 겸이가.”

“우리 애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길마님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죠.”

그럴 수도 있다 고개를 끄덕이던 사탕 누나의 시선이 우리 뒤쪽을 향했다. 거긴 두 마리의 펫이 정원의 꽃을 잔뜩 따서 흩뿌리며 들어오는 중이었다.

“사탕이! 나르 나나 잘 보고 있었다. 얼른 간식 줘라.”

“잘 보랬더니 진짜 눈으로만 본 거야? 방이 이게 뭐야?”

“애, 애들은 원래 이런다!”

말이나 못 하면…. 화환은 또 내 발바닥을 찰흙 주무르듯 주물럭거리다 깨끗한 쿠션 위로 앉았다. 또 찡얼거릴 줄 알았는데 웬일로 그냥 넘어가는 건가?

“저 강화석 가지러 길드 성 다녀올게요. 여기 있을 거죠?”

“네, 빨리 올 거죠?”

얌전히 대답하는 게 예뻐 머리를 어깨를 토닥여 준 뒤 길드 성으로 이동했다. 길드전이 승리로 끝났기에 풍족한 강화석을 잔뜩 챙긴 뒤 하우징으로 돌아갔다.

바로 앞에 수인 왕궁의 입구가 보였다. 생각했던 대로 혼자 움직이는 게 빠르긴 하네. 무사히 강화할 수 있게 된 덕에 콧노래가 절로 났고, 막 문으로 들어가려는데 다리 건너편에서 누군가 달려 나오며 내 발목을 잡았다.

“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거기엔 베르가 서 있었고, 뒤로는 세 명의 사람이 더 걸어 나왔다. 전에 데리고 다니던 사람들인가?

“저요?”

“진짜 여기가 다른 성인가 보네.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대화의 기본도 잊은 사람의 말을 더 들을 필요가 없다. 몸을 돌려 성문으로 들어가려는데 고함치듯 다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울컥 짜증이 일었다.

“야. 내가 말했지? 나이 먹은 게 살면서 얻은 최고의 업적인 것처럼 굴지 말라고.”

“야?”

“그래, 야. 뭐 그렇게 막역한 사이라고 옆집 강아지 부르듯 부르고 난리야.”

“너 말 다 했어?”

“덜 했으면 기다리게? 더 할 말 없으니까 이렇게 찾아오지 말고, 길 가다 만나도 아는 척 좀 하지 마.”

“…너하고 할 말 없으니까 화환이나 불러.”

“그딴 식으로 명령하는데 내가 왜?”

[귓속말]화환 : 자기야, 아직 못 찾은 거야?

귀가 가려웠던 건지 자기 얘기를 할 때 말을 거는 게 신기했지만, 일단 저 새끼가 우리 집 예쁜이에게 추근거리지 않게 멀리 쫓아내는 게 먼저였다.

“사과할 거니까 부르라고.”

“사과할 거면 사탕 누나한테 해야지, 왜 애먼 사람 오라 가라야.”

[귓속말]유우 : 누나 지금 성문 앞인데 베르가 사과한다고 길마님 부르래요

[귓속말]민초맛사탕 : ㅋㅋㅋㅋㅋ ㄱㄷ 내가 간다. 겸이네 성문이지?

[귓속말]유우 : 길마님 꽁꽁 숨겨두고 와여 길드명 없는 거 보니까 다시 오고 싶어서 저러는 듯 ㅠ

채하현은 무른 사람이니 불쌍해 보인다고 막 들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 떼놔야 했다. 베르는 도끼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제가 생각해도 내 말이 맞다는 걸 알아서 저러나?

[귓속말]화환 : 자기야

[귓속말]화환 : 겸아?

[귓속말]유우 : 나 보고 싶어요?

[귓속말]화환 : 왜 당연한 걸 묻지? 어디예요

[귓속말]유우 : 다 와가지 이게 말로만 듣던 분리불안인가 뭔가예요?

“또 대가리 깨지러 왔나? 겸아, 들어가 봐 겸이 자기 걱정하더라.”

“누나, 저기 네 명인데요?”

“나르가 이따!”

“겨미, 나나도 있다!”

세상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을 달고 온 사탕 누나에 베르가 하얗게 질리며 눈을 굴리고 있었다. 이게 강약약강이지? 내가 자기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나? 일단 걱정 중인 화환이 눈에 아른거려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사탕 누나의 걸쭉한 욕이 들려왔다. 이러려고 들여보낸 거구나….

“형, 성문 앞에 베르 찾아와서 싸우고 왔어요.”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 화환의 무릎 위로 뛰어오르며 얘기하자 화환이 안정적으로 나를 받아 주곤 눈을 크게 떴다.

“여긴 어떻게 알고?”

“모르죠, 사과한다고 형 부르라던데 둘이 만나는 거 싫어서 사탕 누나 불러 주고 왔어요.”

“잘했어, 사과받아야 하는 건 이사강이지. 내가 아니라. 이제 장비나 강화해 볼까?”

거래소에 있는 행운 부적 중 노란색과 붉은색을 쓸어 모은 뒤 장비창을 열어 나태의 야장부터 강화하기 시작했다. 부적은 10강부터 쓰는 템인데 노란색은 확률 업, 붉은색은 실패했을 때 수치가 떨어지는 걸 막아 준다고 했다.

막 야장과, 신발을 풀강으로 만들었을 때, 사탕 누나가 후련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갔어요?”

“응, 존나 개뻔뻔하게 다시 길드 넣어 달라더라.”

“역시네.”

“그것 때문에 나 찾은 거래?”

“응, 겸이 들어오고 전부 겸이만 챙기고 따라다녀서 질투 나서 나간 거라던데? 자기가 실수했대.”

나한테는 야라고밖에 안 했으면서. 사탕 누나가 무섭긴 했나 보네. 이제 팔찌를 강화하려 손에 들자 나르와 나나가 양옆에 딱 붙어 앉았다.

“그게 다가 아닐 텐데.”

“던전 안 끼워 줘서 그랬겠지.”

“그렇지, 지우네는 들어오기도 전에 던전부터 데려갔잖아. 내 실수였어.”

“그게 다가 아닐 텐데…?”

화환을 한 번 올려 보고 그와 똑같은 말을 하자 채하현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여워서 봐준다.

“뭐야, 뭐가 더 있어?”

“베르 님 길마님한테 관심 있었잖아요.”

6강을 세 번째 실패하며 대답하자 나르가 자기가 해 보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우리 자기가 쓸데없는 사람만 관찰했네.”

“눈에 딱 보이던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그럴 시간에 나나 더 신경 써 주지.”

대답 대신 화환의 손을 두 번 토닥이자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두 마리의 펫을 양손에 끼고 사탕 누나가 옆으로 와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나한테 그 지랄을 했구나. 나랑 채하현 친해 보이니까….”

이제야 자신이 억울한 입장인 걸 알아차린 사탕 누나가 화환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화환의 잘못도 아니지 않을까…? 혼자 착각한 그 사람의 탓이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사탕 누나를 힐끔거리다 화환의 앞을 막아서며 마저 강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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