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 고난의 시작은 던전에서 (8/11)

@브로콜리

1. 고난의 시작은 던전에서

눈을 뜨니 창밖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분까지 축축 처져 아침 운동을 건너뛰곤 그 자리 그대로 누워 밖만 바라보았다.

나는 비 오는 날이 정말 싫다.

눈을 잠시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시간이 벌써 한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움직이기 귀찮은데…. 침대 옆 테이블 위 충전시켜 둔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알람이 와 있었다. 3위 보상이 들어왔으니, 저녁에 나눠주겠다는 화환의 메시지와 구름이네는 이제 길탈 할 건데, 레드 던전은 계속 돌아줄 거냐는 물음이 와 있었다.

구르미 [겨미 자기, 아직 잠?ㅜㅜ]

하늘 [아기잖아….]

별이 [누가 보면 진짜 아긴줄 알겠네….너희랑 3살 차이나는 건 앎?]

유우 [누나, 형들 용병 끝나서 나가요?]

구르미 [ㅇㅇ…. 겨미자기 보고 가려고 기다리는 중]

유우 [던전 돌려고가…. 아니라?]

구르미 [앗]

달이 [오늘도 안 나오면 어쩌지…. 금비 어제 자기도 껴서 돌자던데.]

유우 [저 10분이따 접속할게요.]

그런데 용병으로 온 거면 채예쁜이에게 돈 받고 온 거 아닌가? 우리는 돈도 뺏겨 노동력도 착취당해… 아, 물론 아이템은 다 내 하우징으로 들어오지만. 고양이세수와 가글만 한 뒤 물을 한 컵 들고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Hunter : A New Adventure 17번 채널로 입장합니다.]

[환영합니다, 헌터님!]

[길드]구름이 : 겸이다!

[길드]유우 : 안녕하세요.

[길드]간계밥 : ㅎㅇ

[길드]수박맛사탕 : 겨미다!

나르를 깨운 뒤 레벨을 확인해 보니 248에 경험치 바 3분의 1 정도가 차 있었다. 와… 되게 안 오르네.

“겨미! 이제 던전 가나?”

“아니, 저녁때…. 혹시 모르니까 사람 많을 때 가자.”

“아라따! 그럼 오늘은 머하나?”

“글쎄, 일단 레드?”

“그럼 나르는 나나와 놀게따.”

이래서 애들 키워 봐야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는 건가? 나르를 한번 노려보다 푸름이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사탕 누나는 아직 화가 안 풀린 것 같으니….

[귓속말]유우 : 푸름아.

[귓속말]푸름 : 넵.

[귓속말]유우 : 나나랑 같이 있어? 나르가 또 나나 찾는데..

[귓속말]푸름 : ㅋㅋㅋㅋ 네, 제가 길드 성으로 갈게요!

내가 있는 곳은 하우징이었기에 바로 길드 성으로 이동했다. 나중에 우리 애가 나나랑 결혼한다고 하는 건 아닌지, 아직 나나한테 언니로 불리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둘이 놀겠다는 걸 막을 생각은 없다.

길드 성에 도착하자 구름이들이 전부 소파 위에 빈둥거리는 중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잠시 뒤 미래의 내 모습이 그려져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겸이, 여기 왔네.”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네, 나나 보고 싶다고 나르가 울어서요….”

“나르는 나나 되게 좋아하네. 갖다 버리라더니…. 나나한테 일러 줄까?”

“구르미! 또 나르와 싸우고 싶나?”

앙칼지게 눈까지 치켜뜬 나르를 귀엽다는 듯 보고 웃던 구름이가 손을 들어 항복의 표시를 했다.

“겸이 자기야, 채하현 점심 먹으러 갔는데 기다릴까?”

고개를 끄덕이곤 남은 자리 위로 올라가 앉았다. 요정도 밥을 먹는 건가? 이젠 익숙한 주접을 머릿속에 떠올리다 술 한 잔에 나가떨어지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술도 먹었잖아. 걔도 먹고는 살아야지.

“금비는 누구예요?”

“아, 우리 길드 제작자…. 금비 끼워서 돌려면 한 명 나가야 할 건데, 누가 나갈래?”

자기는 꼭 갈 거라며 셋 중에서 한 명이 빠지라는 구름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사람들 덕분에 넷이서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가위바위보도 조용히 하는 법을 모른다는 듯 시끌벅적하게 하는 사람들을 질린 눈으로 보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푸름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나…!”

“나르다!”

나르가 나나에게 날아가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던 푸름이 길드 퀘스트를 하다 왔다며 다시 밖으로 향했다. 혹시 몰라 간식거리를 가득 챙겨주곤 잘 다녀와 인사를 하는데 나르는 그런 나를 본 척도 안 하고 나나의 곁에서 웃으며 사라졌다.

화환이 접속한 건 30분이 더 지나서였다.

“겸이 잘 잤어?”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파티 신청을 모두에게 걸었다. 가위바위보는 구름이가 졌지만, 겸이 자기와 하는 마지막 던전을 빠질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린 덕분에 별이 누나가 양보해 주었다. 곧이어 금비라는 아이디가 파티에 들어왔다.

“겸아, 금비한테 파장 줘. 던전 앞이래.”

“아, 네.”

파티장을 넘기자 바로 소환이 왔다. 금비는 구름이보다 작은 체구에 커다란 후드가 달린 망토로 얼굴을 꽁꽁 숨기고 있었다.

“금비 오랜만이네.”

화환의 아는 척에도 고개만 꾸벅 숙이곤 파티장을 넘겨 주었다. 뭐야, 어리둥절하게 화환과 사람들을 둘러보자 구름이가 쑥스러움이 많다며 웃었다.

유난히 조용히 사냥하는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오늘은 화환마저 치근대는 게 없었는데 절대 아쉬운 건 아니고…. 금비라는 사람이 무서운 건가? 괜히 눈치만 보며 걷는데 구름이가 화환과 금비를 계속 돌아보았다.

한동안 의심과 불신이 가득한 던전을 계속 이어갔다. 물어봐도 되는 건지, 안 그래도 불편한 분위기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다섯 번째 입장 전 잠시 쉬자는 말에 잔디밭에 앉아 멍하게 맑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겨미 자기야, 불편하지?”

“네…. 뭐예요? 둘이 사이 안 좋아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구름이의 귓가에 속삭이자 깔깔 웃으며 뒤로 넘어가더니 내 귀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금비가 사탕이 되게 잘 따랐거든, 그런데 채하현이 홀랑 데리고 나갔잖아. 엄청나게 싸웠지. 겨미 자기 눈치 빠르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눈치채지 않을까요?”

난 또 둘이 구여친, 구남친은 되는 줄 알았네. 오해해서 미안한 마음에 화환 쪽으로 달려가 무릎을 한 번 토닥여주었다. 그래, 남한테 미움받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지. 힘내라, 예쁜아.

“안아 줘?”

당연하게 내 진심은 전달되지 않았다. 고개만 저은 뒤 배낭 구석에 있던 사탕을 하나 꺼내 화환의 손 위에 얹어 준 뒤 던전 입구로 달렸다.

[귓속말]화환 : 자기야, 매력 어필 방식을 바꾼 거야? 위부터 공략한다, 뭐 이런 거?

[귓속말]화환 : 이런 거 안 해도 난 자기 거라니까..

읽을 가치가 없어 그대로 던전에 입장하며 얼음을 입에 물었다. 도대체 저 예쁜이의 진심이 뭔지 모르겠다.

운이 좋은 건지 이번엔 리자드 킹이 나왔다. 처음 보는 노란 색의 몬스터는 등에 달린 화산에서 검은 연기와 용암을 뿌렸는데, 발 디딜 곳이 없어져 둘 위로 올라왔을 때였다.

“자기야 아기로 변해봐.”

화환이 내가 서 있는 돌 위로 뛰어오려는 듯 얘기했다. 아무리 살아날 수 있다고 해도 뜨거운 곳에 익어 죽는 건 사양이다. 화환의 말대로 가장 작은 외형으로 바뀌자 화환은 내가 있는 바위로 뛰어왔다. 그러더니 나를 들곤 조금 더 넓은 곳으로 뛰어올랐다.

[귓속말]유우 : 길마님은 왜 안 날아요?

“저번처럼 코에 뽀뽀해 주면 알려줄게.”

화환을 한 번 올려보다 코 위로 내 코를 가볍게 붙였다 뗐다. 먹고 떨어지라는 게 아니라 눈꼬리를 내려 웃던 얼굴이 생각나 그냥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화환도 놀란 듯 멈칫하더니 귀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며 저주에 걸린 걸 대놓고 알릴 생각이 없어 날개를 꺼내지 않는다고 답했다.

별거 아닌 게 아니었네, 괜히 축 처지는 기분에 어깨 위로 몸을 걸치곤 폴짝거리며 뛰어오르는 화환에게 붙어 있었다.

쉽게 다리를 들어 올리지 않는 리자드 킹 덕분에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권경배라도 있으면 조금 더 쉬울 텐데, 하는 생각도 잠시. 구름이가 처음 보는 커다란 악어를 소환해 꼬리로 한 번에 리자드 킹을 뒤집어 눕혔다.

하늘에서 기회만 엿보던 하늘이가 긴 창을 꺼내 정확히 배로 그 창을 찔러 넣자 잠시 몸부림을 치던 리자드 킹이 곧 검게 물들었다.

“와, 구름이 누나 그건 뭐예요?”

“아, 우리 악순이. 귀엽지?”

“아뇨, 그건 아니고….”

미적 취향이 특이한 사람인가? 채하현을 따라다녔다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번이 막판 하자. 나오든 안 나오든. 너무 폐만 끼쳐서 미안하네.”

솔직히 나도 나올 때까지 돌아 주고는 싶지만, 막연히 이 던전만 돌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한 방에 나오는 무리를 없앨 위치와 스킬까지 알게 된 구름이들이라 드래곤이 나오기까지 시간문제였다. 막 죽은 해츨링 뒤로 이상한 안개가 자욱하게 펼쳐지더니 드래곤이 나타났다. 우리에게 크르릉 하고 한 번 울부짖곤 곧바로 브레스를 뿜어냈다.

“와, 얜 패턴이 좀 다른데?”

하늘이의 말에 구름이 삐죽 솟은 돌 위로 올라가 불길을 피했다.

“얘도 마지막이라는 거 알고 이러나?”

“그러지 마, 나 기대한다고.”

[귓속말]푸름 : 겸이 형, 어디예요? 나르가 인색 던전이라면서 던전 앞에서 꼼짝도 안 하는데..

타이밍이 어떻게 이렇게 잘 맞지…. 화환을 힐끔거리다 바로 채팅창을 열었다.

[귓속말]유우 : 길마님. 푸름이랑 나르가 인색 던전 찾았다는데요?

한 손으로 내 등을 안고 싸우던 화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끝나 가니까 푸름이한테 사람 모아 달라고 해 줘.”

[귓속말]유우 : 우리 던전인데 길마님이 끝나 가니까 사람 좀 모아 달래. 지금 다 모일 수 있나?

[귓속말]푸름 : 일단 연락은 해 볼게요ㅠㅜ

[귓속말]유우 : 계란이 한테도 부탁해 놓을게ㅜㅜㅠ

바로 핸드폰으로 메신저를 열었다. 아마 윗집 겜창은 여전히 게임 중일 거고, 던전이 열렸다고 하면 기뻐하며 사람을 모아 오겠지.

커다란 비명과 함께 레드 드래곤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피가 반쯤 깎인 하늘이에게 힐을 써 주는데 내 앞으로 분홍빛을 띠며 회전하는 동그란 원이 가까이 왔다. 뭐지? 앞발로 그걸 건드리자 순식간에 빛을 잃곤 내 발 위로 떨어진 것은 하트 모양의 분홍색 보석이었다.

“어?”

“그거, 미친…. 이제야 나와?”

물고 있던 얼음을 뱉어내곤 발바닥 위에 있는 보석을 내려 보았다.

“이거 드래곤 하트라는데…. 찾던 거 맞아요? 그런데 왜 나한테 떨어지지?”

“겸이 껀가 본데?”

화환이 장난스레 얘기하곤 달이 형에게 다가갔다. 드래곤 하트라고 해서 뛰고 있는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예상했는데 이런 보석일 줄이야. 양손으로 굴려 보다 가까워진 달이 형 쪽으로 보석을 내밀었다.

“와, 진짜 물욕을 없애니 뜨는구나.”

조심스레 받아 들곤 한참 훑어보다 여태 나왔던 아이템들을 전부 내게 준 뒤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니, 뭐 나는 열어 준 것밖에 한 일이 없는데….

“고생 많으셨어요. 누나, 형도 잘 가.”

아쉬운 얼굴의 구름이가 언제든 부르라며 싸게 도와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길드 채팅으로 인사를 한 뒤 네 명의 하늘 길드원들이 피안 길드를 탈퇴했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화환과 얼마 없는 길드 창고를 탈탈 털어 푸름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이미 송금이 형과 사탕 누나를 제외한 열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다들 긴장되는 얼굴로 던전 입구만 힐끔거리는데 나르가 날아왔다.

“겨미!”

“응, 여기가 인색?”

“맞다, 다행히 한 명의 왕만 있지만…. 여긴 힘들 거시다.”

나르가 손끝을 잘근거리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불안해하는 건 처음인데. 안 그래도 처진 분위기가 더욱더 침울해졌다.

“송금이 형이랑 사탕이는?”

“아, 근처 캡슐방 찾아서 온다는데…. 조금 걸릴 거래요. 일단 우리 먼저 인색의 왕 얘기 듣고 있으라고 연락해 왔어요.”

화환과 푸름이 동시에 나르를 바라보았다.

“인색의 왕은 아주 많은 악마를 거느리고 있다. 게다가 그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아….”

“가지고 논다고?”

“그러타. 가장 마음이 무너졌을 때, 그때를 찾아내어 끊임없이 그 당시의 목소리를 만들어 낸다. 어떠케 보면 가장 잔인한 던전이지. 천 개의 입이라는 스킬이다! 다들 인색의 말에 속아 자학을 하면 안 대. 여기는 그대들에게 게임 속 세상이라는 걸 잊지 마라야 한다.”

“과거까지 캐는 거야?”

“맞다, 하지만…. 그대들은 겨미가 고른 자들이니 과거에 발이 묶여 현재를 잃을 사람이 아니지?”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불안한데….

“인색의 속삭임에 속아 정신을 놓아 버린다면…. 그대들은 인색의 꼭두각시가 될 거다. 기억해라. 인색의 꼭두각시가 되면 파티원일지라도 서로 공격이 가능하게 된다.”

유난히 권경배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나 때문이겠지.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에 멍하니 나르의 얼굴만 보고 있을 때였다.

“유우겸.”

내 이름을 부르는 권경배를 돌아보자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너 진짜 조금만 더 예뻤으면 내가 업고 살았다.”

“미친 소리 작작 하고, 알지? 과거일 뿐이야.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대신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권경배를 보며 한 번 웃어 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일 뿐이지.

잠시 후 송금이 형과 사탕 누나가 접속했다는 알림과 함께 곧 이곳으로 왔다. 화환이 둘만 있던 파티에 순서대로 사람들을 초대하곤 던전 앞으로 걸어가며 형과 누나에게 인색의 왕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세이브 존에서 포션을 나눠 준 뒤 던전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곳은 여태 갔었던 칠죄종의 던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눈이 시리게 선명한 분홍색 배경, 안개 같은 뿌연 연기 사이론 가면을 쓴 사람들이 춤을 추듯 안고 있었으며 우리가 들어섬과 동시에 노랫소리가 울렸다.

[일곱 개의 죄악 제3의 죄 ‘인색’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무사히 클리어하시고 명성을 널리 퍼트리세요.]

- 던전 페널티 발생. 아이템 획득확률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공격력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방어력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회피율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포션 사용 쿨 타임이 소폭 상승합니다.

[칠죄종 던전 발견! 최초 발견자에게 칭호가 지급됩니다.]

‘인색’

-칭호 효과로 피해 흡수와 피해저항이 7% 증가합니다. 칠죄종 칭호를 모두 획득 시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와, 우리 이제 칭호 하나만 더 모으면 되네요.”

“헤미르 던전에서 얻은 조각은 더 안 나오나?”

떠들 때가 아니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이 춤을 추며 가까이 오더니 우리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 우는 얼굴 두 종류의 흰 가면은 분홍 배경 속 유난히 빛이 났으며, 울고 웃는 소리를 쉼 없이 내고 있었다.

“미친, 존나 징그러워.”

수박 누나가 중얼거렸고 사탕 누나는 조용히 버프를 돌렸다. 저게 나르가 말하던 악마 부하들인가? 멀리 반투명한 휘장이 쳐진 단상 위론 턱을 괴고 앉은 그림자만이 살짝 비치고 있었다.

처음으로 가면 쓴 악마를 쓰러트린 건 지우였다. 웃는 가면이 쓰러지자 동시에 지우가 웃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놀란 사람들이 싸우던 것도 멈춘 채 지우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은 수박 누나였다. 우는 가면을 쓰러뜨린 수박 누나는 우는 척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듯 눈물까지 흘리며 진심으로 엉엉 울었고, 두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니 가면의 표정에 따라 감정이 북받치는 것 같았다.

[리무브]

“이거 쓰러진 가면 표정대로 웃고 우는 것 같은데?”

“응…. 흑, 상태 이상 오열, 이래.”

다행히 상태 이상 해제 스킬인 리무브를 사용하자 웃고, 울던 사람들도 진정하기 시작했고, 빨리 쓸어버리자며 거대한 불덩이를 날리는 수박 누나의 뒤로 사탕 누나가 붙어섰다.

“왕은 왜 안 내려와요? 저기 있으면 공격 안 된다며.”

불 다음으로 나나의 파도가 실내를 휩쓸었다. 펫도 상태 이상이 걸리나? 고민하기 무섭게 나나는 멀쩡한 얼굴로 나르의 옆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어느새 악마들은 반이 넘게 사라졌고, 상태 이상에 걸린 사람에게 리무브를 써주는데 갑자기 휘장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걷혔다.

남은 인형들은 순식간에 멈춰 선 뒤 단상 위의 왕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려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인색의 왕은 분홍색 슈트에 레이스로 눈을 가리고 있었고, 검고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묶은 여성 캐릭터였다. 유난히 붉은 입술을 올려 웃고 있었다.

“부하들 다 죽어 가는데 왜 저래?”

권경배의 중얼거림이 들린 건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왕이 바닥으로 한 번에 내려오며 뿔뿔이 흩어진 파티원들을 눈에 새기듯 둘러보더니 양손을 뻗어 안개를 더욱 자욱하게 만들어 냈다.

“나르, 겸이한테 실드.”

“길마, 이건 공격이 아니라 실드가 소용없다!”

“그럼, 사탕이 겸이 체력만 신경….”

화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 바닥에 주저앉아 귀를 막는 사탕 누나가 보였다. 이게 천 개의 입인지 뭔지 그건가? 서둘러 사탕 누나에게 달려가 어깨를 흔들었지만 멍하게 뜨인 눈에선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다음은 권경배였다. 작게 욕을 짓씹으며 얼굴을 찌푸렸고, 따라 지우가 스르륵 바닥과 한 몸이 되었다.

“뭐야, 왜 이리 다들!”

“누나는 괜찮아요?”

보미 누나와 수박 누나도 하나, 둘 전의를 상실한 사람들 곁으로 그나마 멀쩡한 사람들이 다가갔고, 푸름이 여기로 오는 걸 확인하며 멀뚱히 서 있는 권경배의 아래로 달려갔다.

“야, 권경배!”

“…….”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허공만 바라보는 친구가 낯설어 다리를 마구 긁어대다 결국 히든 스킬을 해제하곤 경배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정신 차려. 여기 던전이야. 아까 나르가 알려 줬잖아. 과거라고!”

몸이 휘청이게 흔들자 그제야 고개를 젓는 권경배의 눈에 내가 비쳐 보였다.

“이 씨발! 내가 무슨 템을 받아!!”

아무래도 슬픈 기억이 아닌 화나는 기억으로 사탕 누나에게 들린 건지 벌떡 일어나 곡괭이를 들곤 인색에게 달려갔다.

-이곳엔 내가 가지고 놀 만한 기억을 가진 이가 없는 것인가?

사탕 누나를 가볍게 피한 인색이 금방 일어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가지고 놀다니… 뭐 저런 몹이 다 있지?

이제 정신이 든 권경배가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인색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화환이 허공을 보며 서 있었다. 이번엔 화환이 걸린 건가?

화환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꽉 쥔 주먹은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힘이 들어갔고, 조금씩 불안함이 몰려들어 서둘러 화환에게 달려갔다.

“길마님, 괜찮아요?”

미동도 없는 화환에 울컥해 꽉 쥔 주먹을 맞잡곤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길마님. 나르가 얘기해 줬잖아요. 그건 다 지나간 과거예요.”

화환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뺨을 한 대 치면 나아질까? 의문에 손가락이 꼬물거렸는데 서둘러 사탕 누나가 달려와 화환의 귀를 막아주었다.

“채하현, 정신 안 차려? 지금 너까지 무너지면 어떡하라고, 개새끼야!!”

비명을 지르는 사탕 누나의 말에 멈칫하던 내 손이 당당해졌다. 개새끼라는 말을 듣는 것보단 뺨 한 대 맞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즐겁지 않군. 그대들은 나 하나도 즐겁게 해주지 못하는 머저리들인가?

눈에 빛이 돌아오는 화환을 보다 인색의 왕을 바라보았다. 인색은 보미 누나의 검 손으로 쳐내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아니 보이는 건 없었지만 보미 누나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뚫리면서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인색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더니 곧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불안이 현실로 한발 내미는 순간이었다.

‘내 딸 잡아먹은 새끼!’

순식간에 머릿속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몸이 그대로 굳었고, 심장이 쿵 하며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냥…. 아주, 아주 무서웠다.

10년 전 기억이었다. 열세 살 생일 무렵, 여름휴가로 부모님과 방학이던 형들, 외가 쪽 사람들이 전부 모여 바다로 여행을 간 첫날 저녁. 기억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을 어떻게 이렇게 찾아낸 건진 모르겠지만 저절로 몸이 떨려오고 있었다. 꼭 그때처럼 말이다.

휴가와 장마가 겹친 날이었다. 이미 예약을 마쳐 날짜를 옮기기도 어려웠기에 그대로 강행한 여행은 즐겁기보단 지친 어른들에 의해 펜션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나 지겨워…. 여기 앞에만 잠깐 둘러보고 올게, 응?’

어린 날의 나는 지루함에 엄마를 졸랐었다. 군것질이 하고 싶다고 조르다 이젠 산책이라도 가고 싶다며 말을 꺼냈던 순간이었다. 눈앞엔 권경배가 다가왔고 그게 뻔히 보이는데도 머릿속을 파고드는 날 선 얘기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죽인 거야. 저 악마 같은 것이 저, 저!’

뒷목을 잡고 넘어가는 외할머니의 모습이 아직 선명해 눈앞이 흐려졌다. 그런데도 그날의 광경은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고, 울 자격조차 없다며 고함치는 목소리에 아랫입술을 물며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잔뜩 받은 생일선물이 있었지만, 아빠가 자동차 열쇠를 챙겨 마지막 선물이라며 잠깐 드라이브나 가자는 말에 신이 나 쪼르르 달려갔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무슨 운전이냐며 말리는 외할머니를 모르는 척 아빠의 허리만 안고 있자 형들은 잘 다녀오라며 누워 손만 흔들어주었다.

안 되는데, 그렇게 나가면, 나가면…. 부들거리는 몸에 필사적으로 힘을 줬다. 그럴수록 떨림도 커졌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 하나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고는 한순간이었다. 미끄러운 빗길에서 커브를 도는데 마주 오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쿵 하며 도는 차 안 엄마의 품에서 보던 빗줄기가…. 꼭 지금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식어가는 체온과 핏물 사이로 보이는 달이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려주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니 장례가 시작되고 있었다.

‘쓸모없는 것, 네가… 네가 내 딸을…!’

눈 아래 주름 사이사이로 눈물이 스며들 만큼 우는 외할아버지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작은형만이 유일하게 내 귀를 막아 주었고 너 같은 새끼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며 호통치는 외할아버지를 큰형이 어깨를 감싸며 밖으로 나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귀를 막아 주던 작은형도, 무서운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나갈 큰형도 없었다. 그저 반복되는 사고의 소리와 고함만이 귓가에 맴돌았고, 그 소리를 들으며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네 가족 모두가 널 싫어해. 자기 소중한 자식을, 부모를 빼앗아 갔잖아.’

“아니야, 큰형도 작은형도 모두 흑, 나, 나라도 살아 줘서… 다, 다행….”

턱턱 막혀 오는 숨에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은 채 눈을 감고 눈물만 뚝뚝 흘리자 따뜻한 손바닥이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는 게 느껴졌다.

‘네가 죽고 엄마 아빠가 살아남았으면 좋았을걸.’

‘너만 없었어도 우리 넷은 행복했을 텐데.’

‘고집만 안 부렸어도 다 같이 있을 수 있었잖아.’

‘겸이 얼굴을 볼 때마다 역겨워. 그래서 보고 싶지 않아, 겸아. 네가 사라져야 했어.’

‘우리 인생에서 꺼져 주면 안 될까? 죽어 줘, 겸아. 우리 눈앞에서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고.’

쉼 없이 나를 괴롭히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자 거기엔 이미 울 듯한 권경배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 좀, 죽여 줘. 경배야, 제발….”

“유우겸, 너 정신 안 차려!”

뺨이 화한 느낌이었다. 눈꼬리가 빨개진 권경배가 참지 못하고 내 얼굴을 때린 것 같았는데 머릿속이 꼭 안개라도 낀 듯 흐릿했다.

“겸아, 지금 여기 어디야?”

화환이 나지막이 물어왔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다 놓고 편해지고 싶어 양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는데, 뻗어 온 손이 내 손목을 잡아 끌어내리며 다시 한번 물어왔다.

“여기 어디야, 겸아.”

고개만 저었다. 귓가에 소리치는 듯한 먹먹함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바들거리는 떨림이 나조차 알 수 있게 심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폭 하고 내 목을 감싸는 자그마한 몸에 천천히 눈을 뜨자 나르의 긴 머리가 보였다. 나르, 나르가…. 채하현이 있는 곳이다.

“정신 차려, 겸아. 여기가 어디야?”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이곳은 내게 더는 열세 살의 어린 소년이 홀로 자리를 지키던 장례식장이 아니었다.

“더, 던전….”

“넌 지금 몇 살이야.”

두 번째 물음은 권경배였다. 눈물을 털어내듯 눈을 깜빡이곤 떨림을 숨기려 내 손목을 쥔 화환의 손을 꼭 맞잡은 채 입을 열었다.

“스, 흑…. 스물, 세 살.”

“열세 살이 아니잖아. 10년도 더 전이라고.”

“그, 치만… 내가, 흐윽, 나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결국 나르의 조그마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디가 고장 난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말문이 막혔으며, 그만 울고 싶어도 멈추지 않는 눈물은 끊임없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화환이 잡고 있던 내 손을 풀어냈다. 떨어진다는 불안감 탓에 다시 매달리듯 옷자락을 잡자 큰 손이 내 얼굴을 들어 올려 닦아 준 뒤 품 안으로 가려 주었다.

“송금이 형, 수면향 지금 있어요?”

“아…. 있어, 겸인 괜찮아?”

“정신 차리긴 했는데, 조금 힘든가 봐요.”

화환이 나와 나르를 한 번에 안고 일어나더니 송금이 형에게 무언갈 받아 세이브존과 가까운 구석으로 나를 내려 주었다. 그러곤 다시 한번 볼을 쓸어내리더니 조그마한 병을 내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내가 기억하는 던전의 마지막은 여기까지였다.

─채하현─

축 늘어지는 유우겸을 나르에게 맡긴 뒤 서둘러 전투 중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누가 만든 건지 아직도 달갑잖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는 기분에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럼에도 유우겸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려는 시선을 겨우 참아내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유우겸에게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순전히 외형 때문이었다. 3년 가까이 한 게임이 이제 더는 즐겁지도,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을 때쯤 뚝 떨어진 동물형 캐릭터에 처음 게임을 시작한 날처럼 많은 의문이 생겨났으니 말이다.

낯설어하는 얼굴과 긴장한 듯 굳은 몸에 긴장을 풀어주려 가볍게 다가갔던 거긴 한데…. 그게 이렇게 길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발끈하는 게 귀여웠고, 곁에 있으면 얻는 보상 또한 쏠쏠해 거의 길드 마스코트처럼 끼고 다닐까 하는 고민도 잠시 했었다. 뭐,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의 유우겸이 히든 스킬을 갱신하려 잠깐 수인 외형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뭐가 그렇게 비밀스러운지 길드 마스터 방까지 들어갔던 처음과 다르게 모든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변한 모습을 봤던 날.

생각했던 것보다 큰 체형에 놀란 것도 잠시, 꽁꽁 가린 얼굴에서 언뜻 보였던 그려놓은 듯 유려한 눈에 나르가 비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눈에 담은 듯한 눈동자에 시선이 빼앗긴 건 한순간이었다.

저 눈이 내게 닿으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 순간부터 호기심을 바탕으로 달리던 관심의 괴도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짐이 느껴졌다.

애정 결핍이라 하나? 어렸을 적부터 가족의 사랑은커녕 관심조차 받지 못한 탓에 유난히 사람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늘 바쁘신 부모님의 똑똑하고 자랑스러운 큰딸, 그런 누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막내. ‘누나의 그림자에 가려진 불만’이라는 핑계로 포장하며 내가 흥미 있어 하는 것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게 나쁜 길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장꾸의 활이 인색의 긴 옷자락을 뚫자 반대로 뛰어오른 왕의 손끝에선 분홍색 빛이 뿜어졌다. 그 빛은 앞에서 싸우고 있는 우리를 지나쳐 유우겸이 누운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아 앞을 막으며 방해하자 왕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계란, 햇살아. 이거, 빛 뿌리는 거 막아 줘. 이거 겸이한테 닿으면 안 될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는 둘의 뒤로 나르가 겸이를 숨기듯 실드를 펴는 게 보였다. 아직 잔뜩 젖은 눈이 나르가 보기에도 애달파 보이는 건지 옆에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뉴어를 처음 시작한 계기는 우연이었다. 성인이 됨과 동시 쫓겨 가듯 입대했고, 전역하고 나오니 이미 나를 놓은 부모님은 미리 주는 유산이라며, 건물 몇 채와 지금 사는 집을 내게 넘겨 주었다. 그러니 돈 걱정 없어, 공부도 관심 없어. 무기력하게 지내던 중 스치듯 본 광고가 어뉴어의 광고였었다.

첫 일 년은 재미있었다. 아니, 재미있는 정도가 아니라 빠져 살았다가 맞는 건가? 그러니 돈까지 쏟아부어 게임을 했었지. 솔플도 슬슬 질려 갈 때쯤 이사강과 마주쳤고, 그러다 만든 길드가 지금의 피안이었다.

거듭된 방해로 인해 화가 난 인색의 왕이 발을 굴러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뼈로 된 날개를 펼쳤다. 그러더니 공간을 가르듯 허공을 손으로 그었고, 그 안에선 나르의 주먹만 한 백색 종이 인색의 손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조심해라! 저 소리를 들으면 또 나쁜 소리가 들린다!”

‘하경이 반만 따라가도 바랄 게 없을 텐데….’

‘막나가는 것도 정도가 있지! 붙어먹을 게 없어 공부하라 붙여놓은 과외 선생이랑.….’

‘제발! 하현아, 누나 따라가라는 것도 아니고, 평범하게만 지내 달라는 거잖아!’

아까 들었던 내용의 반복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눈앞으로 그때의 풍경까지 생생하게 재생된다는 점? 파티원 전원의 얼굴에 짜증이 맺혔다. 그래도 다행이지. 유우겸이 자고 있어 이 꼴은 안 봐도 되니 말이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슬프길래 소리도 못 낼 정도로 울었던 걸까.

상태 이상 해제는 먹히지 않았지만 다행인 건 이게 전부 인색의 스킬이라는 걸 파티원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보다 빠르게 털고 일어난 사람 중 이사강이 짜증 가득 맺힌 얼굴로 메이스를 높게 들었다.

“저 씨발 핑크 공주 새끼가!”

메이스가 바닥에 폭 박히자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그와 동시에 장꾸 형이 인색의 손에 있던 종을 깨트리자 말소리는 사라졌다. 놀란 인생의 왕이 곧바로 유우겸이 누운 곳으로 향했다.

유우겸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몸으로 말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 눈으로는 욕을, 입으로는 길마님, 길마님 하며 발 어디든 닿는 대로 걷어찼다. 헛소리는 할 때는 귀만 긁어대는 게 귀여웠었다. 바락바락 대들다가도 이내 꼬리를 말고 예쁘게 구는 것도 보고 있으면 질리지 않았다.

그렇게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더 의식적으로 추근거림이 흘러나왔다.

“자기야, 형아 꿈꿔야 해.”

“길마님 저 악몽 꾸라고 지금 돌려 말하는 거죠?”

“설마, 내가 우리 겸이 악몽 꾸기를 바랄까?”

“그럴 가능성 있지.”

거친 언변과 정반대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날 세운 말 하나에 귀까지 축 처져서 웅얼거리는 모습에 두 번째 칠죄종부터 알아차린 저주를 유우겸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었다. 웃는 것도 잘 보여 주지 않는데, 기죽어 미안해할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숨기기 바빴지.

[귓속말]베르 : 니들이 계속 오냐오냐하니까 걔가 사람 머리끝까지 기어오르잖아.

[귓속말]베르 :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이 먹은 게 최고 업적이라더라

[귓속말]베르 : 그래 놓고 다른 사람 오니까 또 꼬리 살랑거리고.. 이게 사람 가리는 거 아니면 뭔데 도대체

한참 나르와 무기 던전을 도는 중 온 채팅을 가만히 내려 보다 이사강에게 물었다.

[귓속말]화환 : 무슨 일이야, 왜 시간을 업적으로 쓰시는 분이 이렇게 화가 났어?

[귓속말]민초맛사탕 : 뭐야? 너한테 징징거려? 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화환 : 응, 조금 있으면 거품 물겠네. 겸이랑 싸운 거?

[귓속말]민초맛사탕 : 가만히 있는 애한테 다짜고짜 얼굴 보여 달라느니 귀여운 척한다고 지랄한 건 얘기 안 해?

한참 채팅창을 바라보자 나르가 내 머리카락을 당겨 앞을 보라 알려 주었다. 그런데 얼굴을 보여 줘? 뭔 소리지. 앞에 나타난 몬스터의 가슴에 총알을 박아 넣은 뒤 떨어지는 돌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귓속말]화환 : 응, 안 봐도 뻔하네. 먼저 시비 건 거지?

곧이어 알림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곧 메시지 확인하라는 말이 올라왔다. 우리 애가 이렇게 말을 잘했었나? 늘 미친놈 아니면 또라이라는 욕만 들었던 것 같은데. 스크린샷 사이로 중간중간 삐죽 나온 발바닥에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길마 드디어 정신을 놓은 건가…? 겨미! 나르를 좀 구하러 와라!”

밖으로 나가려는 나르를 어르고 달래 겨우 옆구리에 끼고 던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던전의 몬스터는 머릿수만 많을 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는데, 유난히 사냥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갈수록 좁아지는 공간 탓에 답답함과 짜증이 일어 배낭을 열어 잘 쓰지 않는 소총을 꺼내 손에 쥐었다.

송금이 형이 조금 개조해 준 이 무기는 파괴력이 어마어마한 대신 반동이 꽤 심해 잘 사용하지 않는 무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공간이 좁을 곳이나, 빠르게 클리어하고 싶은 곳에서는 꼭 필요한 무기다. 이걸 신기하게 보던 나르가 눈을 반짝였다.

“길마. 이걸 쓰면 빨리 겨미에게 갈 수 이께꾼!”

“응, 대신 큰 소리가 날 건데 나르 귀 안 아프겠어?”

“갠찮다. 참을 수 이따!”

큰소리치던 나르는 막 나간 탄환 하나에 내 옷 아래로 기어들어 왔다. 누가 유우겸 펫 아니랄까 봐서 하는 짓도 비슷해졌네.

다섯 번의 격발이 더 이어지고 나서야 던전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장과 땅이 이어지게 늘여진 종유석 중앙에 보호막에 둘러싸인 리볼버 두 자루가 보였는데, 신기하게도 백색 총신에 금색의 문양이 둘려 있었고, 그건 나르가 사용하는 마법진의 문양과 비슷해 보였다.

“저게 내 무기야?”

나르가 고개를 끄덕이곤 내 얼굴 높이까지 날아오르더니 작은 손으로 이마 위를 짚었다.

[축복]

“됐다! 이제 만질 수 있다. 얼른 가지고 겨미를 보러 가자.”

던전을 나와 길드 성 안에서 유우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끝나면 모이라고 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아직 길드 성엔 아무도 없었다. 기다림도 잠깐, 곧 문이 열리더니 얼굴 가득 짜증을 머금은 베르가 누가 봐도 화가 난 걸음으로 걸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내가 형인데 그런 말은 아니지 않아?”

“응, 그런데 형이 먼저 애한테 시비 걸었던데?”

“걔가 그새 또 쪼르르 일러바쳐?”

“아니. 다른 사람이.”

“다들 오냐오냐해서 그런 거라니까. 민초맛사탕도 봐, 끼고 살잖아.”

“끼고 사는 건 나지.”

“…그게 중요해? 그리고 그렇게 끼고 사니까 길마, 부길마 등에 업고 기세등등이지.”

베르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콩고물을 받아먹는 쪽은 우린데 알지도 못하고 또 유우겸을 험담하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한참 말을 고르던 베르가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쉬곤 입을 열었다.

“너, 길드원 한 명만 그렇게 싸고돌면 무슨 말 나오는지 알아?”

“알지, 근데 그럴 만하니까 싸고도는 거예요. 그리고 형, 사탕이 오기로 했는데 자리 좀 비켜 줄래요?”

말이 끝나기도 전 일어선 베르가 뭐 씹은 듯한 얼굴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보였다. 방금 싸웠는데 얼굴 보기 껄끄럽긴 하겠지. 내 어깨 위로 눈만 내놓은 나르가 베르의 사라짐과 동시에 날아올랐다.

“길마. 저 사람이 겨미를 괴로핀다….”

“나중에 같이 혼내 주자. 아, 저주는 겸이가 걱정할 것 같으니까 비밀로 할까?”

“나르는 겨미에게 비밀이 없다.”

“음…. 그럼 비밀 말고 조금 이따 얘기하는 건?”

“그, 그건 괜차는 것인가?”

“응, 나중에 알려 줄 거잖아. 지금 알려 주면 겸이 슬퍼할걸?”

심각한 표정을 하는 나르의 뒤로 이사강과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어떤 사람의 미친 소리로 기죽어 있을 유우겸을 기운 나게 할지 고민할 시간이 온 것 같은데….

“이제 겸이 올 건데, 비 맞은 똥강아지처럼 걸어올 거니까 나르가 마중 나가 줄래?”

“알겠다. 나르가 똥강아지를 안아 오게따!”

비마즌 또, 똥강아지… 비마즌…. 두어 번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나르를 이사강이 이상한 눈으로 돌아보다 천천히 걸어왔다.

인색의 발길을 잡은 건 간계밥이었다.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몸으로 인색을 몰아붙여 준 덕분에 꼼짝없이 잡힌 인색은 독 안에 든 쥐처럼 공격을 맞아야 했다.

탕하는 총성과 내 체력이 겨우 1이 남았고, 인색의 이마 중간에 있던 보석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양날의 검인 스킬은 나조차 잊고 있던 것이었다. 아마 나르가 말하지 않았다면 쓸 생각도 못 했을 거였다.

검게 물들며 사라지는 인색을 뒤로한 채 서둘러 유우겸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갔다. 보상이고 뭐고 신경 쓸 시간이 없어 일단 길드 성으로 이동해 소파 위에 편하게 뉘어준 뒤 송금이 형을 바라보았다.

“이거 두 시간 있으면 깨는 거죠?”

송금이 형이 유우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는 왜 쓸데없이 귀여움을 받아선 아무나 쓰다듬게 두는 거지?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에 관자놀이 부근을 가만히 문지르다 아직 젖어 있는 눈가를 손으로 쓸어주었다. 밖이었으면 퉁퉁 붓겠네.

“나 길드 나갈 거야.”

유우겸이 나가고 이제 업데이트로 서버가 닫히기 5분 정도 남았을까, 갑자기 길드 성으로 찾아와 말하는 베르는 말려 주길 바란다는 듯 눈에선 미련이 가득했다. 하지만 오히려 반가운 소리였지 말릴 사람과 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이미 악동의 길드 마스터와 뒤로 친분을 쌓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갈 땐 가더라도 에그타르트는 누군지 알려 줘야지.”

옆에 있던 간계밥의 눈이 커졌다. 이사강이 찾는 유저를 쟤도 알고 있었나?

“나간다는 건 안 말려?”

“굳이?”

“너희 전부 개새끼들이구나. 기다렸지? 내가 나간다는 말 하는 거.”

“아니, 형.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형은 에그타르트가 누군지 아는 거예요?”

“새 인생 사는 사람 흔들지 마. 아, 알아도 그 사람이 모르는 척할 수도 있겠네.”

내 쪽을 힐끔거리는 사람의 얼굴을 빤히 내려 보자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던 베르가 결국 눈을 내리깔며 ‘송금이’라 중얼거렸다.

“마지막 배려로 퇴출은 안 할게요, 잘 가세요.”

“야! 진짜 히든 하나 굴러왔다고 피안이 뭐 되는 줄 알아?”

“제가 모셔 온 거지, 굴러온 히든은 아닌데…. 형, 겸이한테 자격지심 있어요?”

“그 싸가지 없는 새끼 얘긴 꺼내지 마, 똑같은 새끼들이.”

씩씩거리던 베르가 자리를 떴고 간계밥이 눈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내일 만나서 계란이가 송금이 형한테 얘기해 볼래? 내가 말하면 강요가 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간계밥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몇 시간 뒷면 유우겸을 보는 건가? 어제부터 긴장된 탓에 평소의 반도 추근거리지 못했기 때문에 만나는 순간부터 밀린 추파를 날릴 생각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시끌벅적한 식당 안을 지나쳐 예약한 방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가장 눈이 가는 건 역시 유우겸이었다.

유우겸은 게임 속에서 보는 것보다 더 눈길을 끄는 외모였다. 다른 사람보다 한 톤 낮은 검은 머리와 작은 얼굴에 단정하기보다 조금 날카로운 눈꼬리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으며, 오뚝한 코 아래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 옆 폭 패인 보조개 하나가 유난히 시선을 잡았다.

‘길마님 진짜 또라이예요?’

불퉁한 물음에 나오는 대로 헛소리를 하자 겸이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으며, 팔 안으로 폭 들어온 몸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싫어하는데도 일부러 더 가까이 다가갔었다. 술도 그렇다.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주제에 조금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마신 거였고, 진짜 유우겸네 집에서 잠을 잘 줄은 몰랐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낯선 천장에 놀란 것도 잠시, 어젯밤 내내 맡았던 포근한 향이 여기가 누구의 집이고, 누구의 침대인지 알려주고 있어 괜히 웃음이 난 탓에 베개에 얼굴을 묻곤 한참을 빈둥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거실 소파 위 이불을 폭 덮은 채 미동 없이 색색거리는 유우겸을 빤히 보고 서 있다 테이블 위 옷가지를 챙겨 씻고 나왔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냥 깰 때까지 기다릴까, 하고 앞에 주저앉아 자는 얼굴을 멍하니 보다 나도 모르게 뽀얀 얼굴 위로 손가락을 세워 한 번 찔러 보았다.

침대가 하나인가? 그냥 옆에서 자지. 아쉬움에 몇 번 더 볼을 찌르며 유우겸을 부르자 부스스 뜨인 눈에 내가 비쳐 보였다.

자기 옷을 입고 있는 게 이상했던 건지 끔뻑이던 눈꼬리가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역시 웃으니까 더 예쁘네. 괜히 귀로 열이 오른 것 같아 방금 일어나 아직 포근한 향이 가득 한 이불에 얼굴을 부빈 뒤 아무렇지 않은 척 배달 앱을 켰었다.

천천히 다가갈 생각이었다. 분노의 던전에서 화를 풀어 준다는 핑계로 사심을 채우듯 꼭 붙어 있었을 때 스킨십이 어색한 걸 깨달았으니 말이다. 일상에서 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늘 붙어 있었다. 유우겸도 이젠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익숙하게 느끼는 건지 안겨서 이동해야 할 땐 꼭 내 다리를 퍽퍽 찼다. 우리 겸이는 이런 취향인가?

그래서 자기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질문 이후 묘하게 나를 피하는 느낌에 혹시나 하는 생각은 최근 들어서 확신으로 다가왔다. 전보다 더 나를 편해하는 모습과 헛소리를 받아치는 방법도 바뀌었고, 무엇보다 나를 빤히 보는 횟수가 늘어난 것이다.

혼전 순결에 손도 안 잡겠다면서 내가 발을 주물러도 얌전히 있었으며, 코를 핥거나 촉촉한 코를 맞추는 것도. 이쯤 되면 진짜 날을 잡아도 되지 않나?

‘야, 채하현.’

‘왜, 이사강.’

‘너 우리 겸이한테 왜 아저씨들처럼 추근거리냐?’

‘티 나?’

‘안 날 거라 생각한 거야?’

‘아니, 유우겸도 알아차릴 만큼 나나?’

‘뭐야, 진짜야? 너 남자 좋아했나…?’

‘나는, 겸이를 좋아하지.’

눈치 빠른 이사강은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 귀를 파며 내 앞에서 멀어졌다. 이렇게 티가 나는데 이상하게 유우겸만 모르지.

아무런 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겸이를 봤을 때 처음 든 감정은 놀람이었다. 여린 건 알고 있었지만, 숨도 못 쉴 만큼 우는 주제에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떨어트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자기를 죽여 달라는 말을 했을 때는 놀람보다 가슴이 먹먹해졌고, 곧이어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올라가는 소꿉친구의 손을 보고도 못 본 척 그대로 두었고, 옆으로 돌아간 얼굴에 바로 후회했다.

“여기 어디야, 겸아.”

무슨 말을 들은 거냐, 뭐 때문에 이렇게 소리도 못 내고 우는 거냐고 물음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손까지 덜덜 떨며 울어대는 유우겸에게 나까지 화를 낼 수 없었다.

그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유우겸의 양손만 붙잡은 채 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에 여기가 어디냐 물었다.

어디냐고, 아직 그 무서운 시간에 혼자 떨고 있는 거냐고, 깜빡이는 눈은 점점 초점이 잡혀 왔고, 달싹거리던 입술의 떨림이 조금 멎을 때쯤 유우겸이 내 손을 맞잡아 왔다.

두 시간이 이렇게 길었었나? 열두 명의 시선이 유우겸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 이번에 신발 줬어요!”

삭막한 분위기에 혼자 어색해하던 지우가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겸이는 이제 만렙도 찍었네. 하며 레벨업 알림을 확인한 송금이 형이 작업실로 가려다가 사탕이 옆에 있다는 걸 깨닫고 저녁에 오겠다며 접속종료를 했다.

[축하드립니다! 숨겨진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유우님의 파티 화환, 푸름, 수박맛사탕, 간계밥, 지우, 장꾸, 빛과송금, 뽀또, 햇살, 민초맛사탕, 보미 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일곱 개의 죄악 제2의 죄 ‘인색’의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파티원의 명성이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최초 보상 마몬의 분홍 보석이 유우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인색의 신발:심판이 모든 파티원에게 지급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인색의 생명의 근원이 화환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인색의 안식 버프로 파티원 모두의 디버프를 해제합니다!

“이제 진짜 한 명만 더 쓰러트리면 끝이네.”

“응, 이번 던전은 진짜 힘들었다.”

수박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유우겸 손이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아무도 못 본 건지 무기 얘기로 실내가 시끄러웠는데 이 분위기도, 잠들기 전 엉엉 울었던 것도 전부 민망해서 눈을 못 뜨는 것 같았다. 좀 뻔뻔하게 굴어도 아무도 뭐라고 못할 텐데.

[귓속말]화환 : 겸아, 눈 떠도 돼.

[귓속말]유우 : 이 분위기에? 제가 혹시 길마님처럼 얼굴이 두꺼운 줄 아시는 것 같은데.. 전혀 아니거든요?

[귓속말]화환 : 아하, 혹시 내가 뽀뽀로 깨워주길 바라는 거야?

채팅을 보내기 무섭게 눈을 뜬 유우겸이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럴 거면서. 유우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은 뒤 혼자 꾸물거리는 손 위로 손가락을 하나 갖다 대었다. 전처럼 떨림이 없음을 확인하는 거였는데, 아직 유우겸의 상체에 붙어 있던 나르가 고개를 번쩍 들곤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겨미 갠찮나?”

“응…. 자고 일어났더니 멀쩡해.”

눈을 뜨기 전까지 웅성거리던 실내가 한순간에 정적에 쌓였다. 유우겸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곧이어 미안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눈을 피했다.

“저 자는 동안 클리어 한 거예요? 안겨 다니는 거로 모자라 잠까지 자네…. 힘들지 않으셨어요?”

“힘들었지, 푸름인 세 번 죽었지? 계란이랑 지우도 두 번씩 죽었고.”

누가 들어도 놀리는 목소리인 수박의 말에 유우겸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뭐래, 누나 나 한 번 죽었거든요? 그리고 보미 누나나 길마님 빼고 한 번씩은 죽었잖아요!”

“아 맞다, 인색 빛에 달려들어서 죽기 직전에 사탕이 힐 받고 살았지….”

겸이 깬 거 보고 가려고 기다렸다며, 수박과 보미 누나가 씩씩거리는 간계밥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장꾸 형과 지우네도 송금이 형이 부탁한 게 있다며 던전을 돌러 갔으며, 길드 성에 남은 사람은 나, 푸름과, 겸이, 간계밥뿐이었다.

겸이는 계란과 이야기 중인 것 같았다. 아까 있던 일을 해명하는 건지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고 멍하니 앉아 있는 푸름과 여전히 겸이 얼굴을 살피는 나르, 그런 나르 언니를 이상하게 보는 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 겸이 형 만렙이네요.”

“응, 일어나 보니까 250 됐더라. 던전 돌아서 업 했나 봐.”

“메인 다 깨면 이제 진짜 헌터 퀘 받겠네요…. 고생길이 훤하다.”

“그러게, 첫 헌팅이 릴스의 알이었는데 아직도 그건가?”

“아, 길마님… 누가 고인물 아니랄까 봐…. 바뀌었죠, 릴스로.”

“그래? 더 어려워졌네. 길드 창고에 상급 포획 틀 있었는데 다 털렸지?”

고개를 끄덕인 푸름이 길드챗을 확인해 달라 이야기했다.

[길드]보미 : 악동 패러갈 사람

[길드]수박맛사탕 : ㅈㅇ

[길드]장꾸 : 아 그건 못 참지 저요

[길드]지우 : 오 던전 입장하려고 했는데 타이밍 좋네요. 저희도여!

“가려고?”

“네, 할 거도 없었는데 잘됐죠.”

푸름이 나르를 꼬시는 동안 이야기가 끝난 둘 중 계란이 자기도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쉬다 저녁에 들어올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건가? 고개를 끄덕이곤 길드원이 가는 악동 길드 성으로 이동했다. 이상하게 찝찝한 마음에 두 시간쯤 싸우다 접속종료하고 저녁 시간쯤 유우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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