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혹시 내가…… 뭘 잘못했어? 아리아, 너를 실망시킨 일이, 있는 거야? 그렇다면 말해 줘.]
고개를 들어 올린 은발의 물빛 눈동자에 투명한 물이 고여 흐르기 시작했다. 은발은 계속해서 이유를 물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거지. 그럴 거야, 그래. 미안해. 전부 잘못했어.]
멍청하게 배신당했다는 걸 알면서도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화를 풀어 주면 안 될까. 나한테 이러지 마, 응? 가엾게 여겨 줘. 제발.]
놈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서럽게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두 사람의 사이로 달려갔다. 은발의 앞을 막아서며 가짜 녀석의 멱살을 잡아챘다. 엉망인 손이 부르르 떨렸으나 그까짓 고통으로 쥐고 있는 멱살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게 무슨 개짓거리야.”
가짜를 향해 욕설이 서슴없이 나왔다.
“X발, 미쳤냐?”
[ “그새 친해졌어? 화가 많이 난 것 같네. 이 몸한테 손을 대고…….” ]
멱살을 잡은 내 손 위로 지선우의 겉껍데기를 뒤집어쓴 가짜의 손이 올라왔다.
“너 같은 사이코패스가 형 몸에 있는데 화가 안 나는 게 정상이냐? 야, 너 저 새끼랑 같은 편 아니었어?”
은발 쪽을 턱짓하며 물었다. 딱히 은발의 편을 들고 싶은 건 아니다. 놈과의 사이는 서로 안 죽이는 게 다행일 정도로 최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건, 가짜를 향한 놈의 맹목적인 사랑이 꼭 과거 나의 사랑과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배신당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용당했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등신 머저리 같은 사랑 말이다. 그래, 아주 낡고 지친 사랑.
[ “편이라고 말하니 좀 웃기네. 애들도 아니고.” ]
“뭐?”
[ “너도 고생이 많았어. 알파와 오메가를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거든. 자, 네가 고대의 힘을 깨워 준 덕에 나도 드디어 염원하던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때가 왔어.” ]
“개소리 집어 치-”
[ “이제 시작이야.” ]
내 말을 뚝 끊은 가짜가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지선우의 것이 분명한 낯인데도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상기된 뺨은 정말로 지금의 상황을 즐거워하는 것 같아 더욱 기괴했다.
“……미칠 거면 곱게 미쳐.”
나는 가짜를 팍 밀쳐 내곤 몸을 돌렸다. 일단 저 칼부터 빼내야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칼의 손잡이를 막 잡았을 때였다.
휘이잉! 커다란 바람이 불더니 콰앙-! 억센 바람으로 인해 한 번 무너졌던 건물이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투의 부작용인 건가? 하긴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꽤나 화려하게 이곳저곳을 부숴 놓았으니까. 이대로 머뭇거린다면 아득바득 살아난 이유가 없다.
‘젠장, 내부 붕괴가 너무 빠른데.’
시간을 더 지체한다면 다 같이 생매장당하기 딱 좋은 꼴 아닌가. 일단 뭐가 되었든 탈출해야 했다.
일의 순서를 정한 나는 빠르게 은발의 가슴에 꽂혀 있는 칼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안 그래도 힘을 주지 못하는 손이 자꾸만 삐끗거렸다. 젠장, 젠장! 욕설을 뱉으며 다시 손잡이를 잡는데, 그 순간 칼 주위로 검은 연기가 쉐에에엑!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 “이 세계와 너의 세계, 온 차원과 시간 속 괴물들의 혼을 불러들이고 있는 거야.” ]
의문에 대한 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가짜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발의 피부가 검게 변하고 눈동자의 빛도 잃어 가는데, 가짜는 여전히 덤덤해 보였다.
[ “자얀은 좋은 그릇이야. 죽지 않는 몸. 괴물들을 담아 봉인하기에 저만한 그릇이 없지.” ]
“……봉인?”
[ “전에 말하지 않았니?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거라고.” ]
은발이 그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 “알파와 오메가의 잠들어 있던 힘으로 너희가 가진 이능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버릴 거야. 괴물이 없는 세계에서 쓸데없는 이능력은 다른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잖아. 그런 곳에 백산을 둘 수는 없어. 난 그녀가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하거든.”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거다.
[ “그럼 더 이상 희생하지 않아도 돼. 백산도 다시 태어나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거라고. 마을을 지키지 않아도 돼. 쓸데없는 책임감에 힘들어하며 백산 혼자 외롭게 죽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 누구도 그녀한테 강요할 수 없어.” ]
가짜는 희열에 전 채 이어 말했다.
[ “괴물도 에스퍼도 가이드도 없는 세계. 그래, 내가 꿈꾸던 세계의 완성이야.” ]
괴물도 에스퍼도 가이드도 없는 세계라니. 아니, 그보다 뭐가 되었든 저 새끼가 미쳤고, 은발 놈이 위험하다는 건 알겠다.
나는 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칼의 손잡이를 잡았다. ……씹, 왜 이렇게 안 빠져! 시간이 없다는 걸 알기에 초조해졌으나 이를 악물고 잡아당겨도 꿈쩍하지 않는다.
[ “열심히네. 의외로 정이 많은가 봐. 나라면 버리고 도망갔을 텐데.” ]
“닥, 쳐!”
[ “근데…… 왜 너는 아무런 위험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니?” ]
지선우의 몸을 한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서 나른히 물었다. 칼을 잡아당기던 손이 우뚝 멈췄다.
[ “내가 너를 괜히 불러들인 거 같아?” ]
“뭐?”
[ “내가 정말로 원하던 게, 이 아이 하나라 생각하니. 이 아이는 그저 내 영혼을 잠시 담을 인형이자, 너를 제어할 키에 불과해.” ]
하얗고 가는 손이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 돌렸다. 가짜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 “들어 봐. 나는 말이야, 꽤 오래 온 시간선을 헤매었는데도 백산만큼 강한 영혼을 지닌 인간을 찾지 못했어. 그녀의 혼을 품기엔 모두가 약해 빠졌거든. 젠장, 근성도 없지! 그나마 기대했던 뤙과 자얀도 영 맞질 않더라고?” ]
“…….”
[ “그렇게 기다리다…… 하, 드디어 너를 발견한 거야. 맙소사, 이렇게까지 딱 들어맞는 인간은 처음 봤어. 백산의 핏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그녀와 닮은 힘, 강한 영혼. 그녀의 환생을 위한 재료로 충분했지. 아, 등가교환이라는 말 알지?” ]
“무슨 개소릴-”
[ “같은 가치를 지닌 두 개의 물건이 교환되는 것. 안타깝게도 인간 하나의 혼을 불러오는 데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통하질 않더라고. 신도 참 욕심쟁이지. 내놓아야 할 게 너무 많아.” ]
싱글싱글, 맛이 간 눈빛으로 가짜가 웃었다.
[ “그래서 말인데…… 그녀를 대신해 지옥으로 가는 값은 내가 치를 테니, 넌 네 뼈와 살과 영혼을 좀 주지 않을래? 도와주는 대가로 ‘지선우’는 살려 줄게. 어때, 너한테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지?” ]
가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 “물론 이건 부탁 아닌 통보고.” ]
웃기지 말라며 손을 쳐 내려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자세히 보니 검은 무언가가 내 몸을 꽉 묶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를 기준으로 넓게 퍼져 있는 실선은 마치 하나의 주술진 같았다.
그제야 가짜는 내 턱을 놓고 눈을 다시 반달로 접었다.
[ “나라면 도망갔을 텐데…… 라고 아까 충고해 줬잖아. 멍청하게 시간 끄는 줄도 모르고 하는 말을 전부 듣고 있으면 어떡해.” ]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벗어나려 힘을 끌어 올렸지만, 우습게도 작은 불꽃조차 만들 수가 없었다. 지쳐서 능력이 나오지 않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은 마치 힘을 쓰기 위한 모든 기본적인 방법을 잊은 것만 같았다.
“욱! 컥, 끄으……!”
지옥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눈과 코, 입을 타고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피에 컥컥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녹아 가는 것처럼 속이 너무 뜨겁고 아팠다. 그만하라고 해야 하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제대로 된 소리가 아니었다.
우웩, 욱! 뭔지 모를 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울컥 뱉어졌다. 사지가 무엇인가에게 뜯어 먹히는 것 같았다.
“하악, 하! 으, 아아!”
[ “걱정 마. 고통은 잠시야. 네 몸을 분해하는 거니까.” ]
“흑, 힉, 흐으……. 흑! 악!”
콜록콜록, 힘이 빠진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야를 뿌옇게 만드는 게 눈물인지 핏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파. 아파, 아파! 아프다고! 그만둬, 제발. ……제발.
[ “그래도 네 가이드를 지켰잖아. 장하다. 낙유성.” ]
……가이드? 아, 맞다. 선우 형. 형, 형은…… 형은 살려 주겠다 했지. 그럼 형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건가? 형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끅…….”
다행이다. 다행인데. ……그럼 나는? 나는 어쩌라고?
“나, 흑, 나…… 으, 아…….”
죽기 싫어. 나도 죽고 싶지 않아. 싫어, 아파. 그만. 제발.
지친 마음은 금방 무너졌다. 주르륵주르륵 흐르는 눈물 사이로 으깨진 손이 아예 녹아 가는 게 보였다. 무서웠다. 그때와 달리 정말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일까? 분명 형을 위해 내 목숨 정돈 버릴 수 있을 거라 자부했는데, 막상 죽음이 다가오니 역시 겁이 났나 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 아니다. 그게 아니다. 나는 해냈었다. 이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스물세 번의 죽음조차 버텨 냈었다. 이건 그저…… 더 이상 지선우를 위해 희생할 마음이 없을 뿐인 거다.
마음속 깊숙이 넣어 두었던 분노가, 누르고 눌러 놨던 배신감이, 모른 척했던 원망이 한 번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