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내가 죽는 대신 지선우는 살려 주겠다? 이제 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를 잊고 배신하고 상처 준 사람을 살려 주는 게 왜, 뭐가 대단해서, 그걸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 싫어. 내가 살고 싶어. 더 이상은 힘들어. 형 때문에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그랬는데도 형은 결국 나를 버렸잖아. 근데 또? 내가 또?
“싫어, 싫, 어! 아으, 윽!”
고통으로 바닥을 까드득 긁으며 소리쳤다.
“내가 왜, 왜!”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야. 모든 게 억울했다. 이곳에 끌려온 것도, 형을 사랑한 것도, 이제 와 그를 비난하는 못난 내 모습까지 모두 끔찍했다.
[ “꼴사납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건 축복인데.” ]
그걸 모르냐며 가짜가 고개를 저어 댔다.
[ “난 드디어 백산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한데. 넌 아닌가 봐.” ]
여기를 어떻게든 벗어나야 하는데. 갉작갉작, 부서진 손톱으로 바닥을 짚어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를 죽죽 끌고 나아갔다. 피 웅덩이에서 이어진 붉은 길이 내 다리 뒤로 생겨났다. 살아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그렇게 했다. 구차해 보여도 말이다.
콱! 기어 가는 내게 가짜가 다가와 등을 짓밟았다. 별로 힘을 주지도 않은 것 같은데, 작은 발 아래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컥!”
[ “움직이지 마. 주술 선 안에 있어야지. 혹여나 백산이 다른 문제라도 가지고 태어나면 어쩔 거야. 네 뼈와 살,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소중하다고.” ]
핀에 고정된 벌레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더 이상의 반항은 무의미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정말 이렇게 끝이구나. 허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젠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조금 졸릴 뿐.
가짜는 주변을 느리게 둘러보곤 천천히 물러섰다. 주술 선 바깥으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 “약속은 지킬 테니 걱정 마. 백산의 몸이 완성되면, 내 혼과 바꿔 그녀를 부를 거야. 그럼 이 아이는 자유가 되겠지.” ]
“…….”
개소리 말라고 욕을 한가득 해 주고 싶은데, 정작 할 수 있는 건 색색- 곧 꺼질 숨을 내쉬는 것뿐이었다.
[ “그러니 네가 잘…… 뭐야……. 왜, 안…….” ]
가짜의 말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힘이 없어서, 더는…… 너무 힘들었다.
…
……
……화악!
“뭐 하고 있어! 다리에 힘줘!”
죽음에 가까워지던 몸을 누군가가 번쩍 들어 올렸다. 가라앉던 정신이 맑아지며, 막힌 숨구멍이 헉하고 트였다.
‘뭐야…….’
뿌연 시야 사이로 보이는 이는 방금까지 나를 지옥에 처박던 지선우였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아까와 달리 애틋하고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 정도.
‘뭐지? 가짜 놈이 왜. ……아니야. 느껴지는 게 달라……. 이 익숙한 느낌은 설마.’
“……형?”
“힘주라고! 바보야!”
나를 둘러업은 채 주술진을 벗어나고자 억척스레 걸어가는 이는 분명 내가 아는 지선우였다. ‘진짜’ 지선우 말이다.
“……하아, 하, 지선, 우……?”
“시간이 없어. 또 언제 잠식당할지 몰라. 빨리 가야 해!”
정말로…… 형이잖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자 지선우가 살벌하게 소리를 질렀다.
“낙유성. 형 말 안 들려? 몸에 힘주라고!”
나는 본능적으로 늘 그에게 혼이 났을 때 흠칫 놀라던 버릇처럼 몸에 힘을 바짝 줬다.
“누구 마음대로 제물로 바쳐.”
이를 빠드득 갈며 나를 질질 끌고 가는 지선우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향한 증오의 말을 쏟아 냈다. 그러나 넝마가 된 피부 위로 차마 숨기지 못한 잔떨림이 전해져 왔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지선우가 울고 있다. 분노에 찬 숨이 여린 울먹임과 섞여 동시에 들려왔다.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마…….”
겨우 마지막 주술 선 바로 앞까지 나를 끌고 온 지선우가 중얼거렸다. 이제 딱 한 발만 나가면 된다. 그런데, 우당탕! 지선우가 나를 선 밖으로 집어 던졌다.
“윽!”
“하아, 하…….”
힘을 주지 못하는 몸이 바닥을 세게 굴렀다. 나는 엎어진 채 아직 선 안쪽에 서 있는 지선우를 쳐다봤다. 뭐야, 왜 안 나오는 거지? 거기 있으면 위험한데.
“……지선-”
“잠깐! 잠깐만, 유성아. 내가 먼저 얘기, 후으…… 할게.”
지선우가 다급히 외쳤다.
“이제 와 하는 말이, 정리가 안 되지만- 하아…….”
나를 업고 오느라 힘이 들었는지 숨을 크게 고른다.
“아아, 시간이 없어서 다 못 하겠는데……. 그러니까,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지선우는 또 한 번 뒷걸음질을 쳤다.
“미안해.”
담담히 뱉는 말과 달리 형의 눈가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형은 나를 빤히 보다 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또 한 번 중얼거렸다.
“진짜 미안해.”
그렇게 듣고 싶던 사과였음에도 나는 멍청히 입술만 달싹거렸다. 무어라 대꾸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당장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느긋이 대화를 주고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머릿속에는 어서 형을 선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젠장, 저 주술진 안에 있으면 안 되는데. 밖으로 나와야지, 왜 자꾸 뒤로 걸어가.’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외치고 싶었는데, 상한 목에선 쉭쉭 바람 새는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그러는 와중 지선우는 또 한 발 뒷걸음질을 치며 내게서 멀어졌다.
“미안해. 유성아.”
사과는 됐어, X발. 당장 나오라고! 일단 뭐가 되었든 이쪽으로 오란 말이야, 제발. ……설마, 내가 형 탓해서 그래?
“혀, 아…… 읏.”
말을 하려던 나는 큰 통증이 느껴지는 목을 잡고 연신 기침을 토해 냈다. 한참을 괴로워하다 가까스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지선우는 조금 더 멀어진 후였다.
미쳤어? 뭐 하는 거야. 당장 돌아와! 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 불러야 한다. 형을 불러야 해.
“선……!”
가까스로 소리를 냈는데, 지선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다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내가 늘 좋아하던 예의 그 웃음이었다.
그때, 주술 선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선, 콜록, ……하아, 제…… 이리, 읏…….”
“아리아 씨, 제물은 내가 될게. 이 정도 방해는 방해도 아니지? 전부 당신 뜻대로 될 거라 생각했다면 유감이야. 내가 정말 반푼이 새끼로 보였던 건가 싶네.”
안 돼, 지선우. 제발. 안 돼. 이리 와.
“사실, 나도 너무 무서워.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않지만, 유성이를 지킬 수 있다면 썩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아. 나는 내 에스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거든.”
간절한 나와 눈을 마주친 채 지선우가 웃었다. 자신을 웃는 얼굴로 기억해 달라는 듯.
“이봐, 아리아 씨. 당신은 나랑 함께 가는 거야. 내 나쁜 머리로는 당신을 유성이한테서 떼어 놓을 방법으로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아.”
주술진은 붉어지다 못해 핏물을 머금은 것처럼 새빨개졌다.
“하하! 어때? 나약한 육체는 그렇다 치고, 당신의 혼도 제 가치를 낼 수가 없게 됐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나처럼 덜떨어진 사람으로 태어나게 될 거야. 아니,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꼭 그렇게 되길 바랄게. 아, 화내고 있구나. 하하. 엿이나 먹어라.”
지선우가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곤 개구지게 씨익 웃는다. 동시에 주술 선이 더욱 거대한 붉은빛을 뿜어냈다.
나는 형이 해서는 안 될, 아주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형-!”
있는 힘껏 남은 힘을 쥐어 짜내 형을 부르며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눈을 뜨지 못할 만큼의 강렬할 빛이 주변을 감쌌다.
“─잘 있어, 유성아.”
마지막으로 들려온 지선우의 목소리. 그리고…….
“응급! 빨리!”
“하악, 헉……. 허억, 하아…….”
“협회로 연락하세요!”
“왜, 흐, 으…….”
“정신이 들어요?”
“왜, 왜, 왜 흣, 아…… 왜!”
“낙유성 에스퍼! 낙유성 에스퍼! 이봐요! 빨리 들것!”
익숙한 언어, 번쩍이는 플래시, 웅성거리는 사람들, 내게 다가오는 구조대, 도시의 한복판.
나는 돌아왔다.
“……선우 형…….”
가이드를 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