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문이 닫히고 고개를 돌린 하진은 그때까지도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이들에게 우선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일단 먼저 늦은 시간에 불러 모은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이렇게 늦은 줄은 몰랐습니다.”
깔끔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린 하진은 마치 발표를 하듯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가이딩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가이딩이라는 말에 하진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성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가 있었다.
“나부터! 나부터 해줘!”
대답도 듣지 않고 다가올 기세에 하진이 손을 들어 멈춰 세우려는데 그보다 먼저 흥분한 에스퍼를 막아 세우는 이가 있었다.
“야, 김덕중. 너만 급하냐? 진정 좀 해.”
그러자 김덕중이 발끈하며 화를 냈다.
“진정? 진정?! 너는 수치가 위험하지 않으니까 진정할 수 있겠지만, 내 수치는 지금 아슬아슬하다고! 망할 협회 새끼들이 전조 현상이 없다고 대기시킨 것만으로도 열 받는데 네가 뭔데 막아서!”
불안정한 파장으로 인해 몸이 아픈데도 전조 현상이 없어 끝없이 대기만 해야 했다.
김덕중은 참지 못하고 자신을 막아선 조현우를 퍽 밀쳤다.
싸움이란 누구 하나가 참는다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참으면 에스퍼가 아니었다. 어깨가 밀쳐진 조현우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새끼가……. 지금 쳤냐?”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파장이 불안정한데도 이 순간만큼은 그 사실을 잊은 것처럼 능력을 사용하려 했다.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은 건가?’
저들이 말로 싸울 때부터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던 하진은 몸싸움으로까지 번지려 하자 다급히 나섰다.
차분히 상황을 설명하고 치료에 들어가려 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그냥 재워버리는 게 제일 나을 듯했다.
하진을 중심으로 농밀한 방사 가이딩이 퍼지자 마치 꽃에 벌과 나비가 꼬이듯 에스퍼들의 시선이 꽂혔다.
“이건…….”
잔뜩 예민해져 싸우기 일보 직전이었던 그들도 다른 이들과 다를 거 없이 입을 헤, 벌리고서 하진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화를 냈던 건지 의아해질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마치 혈관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았던 통증이 사라졌다. 흐르는 공기마저도 예민하게 받아들이던 살갗이 잠잠해졌다.
그들은 이하진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기적을 보고 있었다.
“조, 조금만 더…….”
처음 맛보는 황홀함에 취한 누군가가 작은 걸음이지만, 한 걸음 하진을 향해 내디뎠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에스퍼들이 질 수 없다는 듯 발을 움직였고, 그러한 움직임은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 퍼졌다.
좀비나 광신도처럼 다가오는 다수의 사람은 꽤 공포스러웠다. 양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하진은 저도 모르게 물러날 뻔한 발을 붙잡으며 가이딩을 아예 쏟아부었다.
소름이 돋았던 만큼 강하고 진한 가이딩에 다가오던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잠들었다.
제각기 겹쳐져 잠든 이들을 내려다보며 하진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걸음을 돌려 문을 열고서 하성진을 불렀다.
“잠시 도움이 필요한데요.”
“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그 말에 하진이 자신만 보이게 조금 열었던 문을 활짝 열고 방 안의 풍경을 내보였다.
“으어……?”
처음엔 마구잡이로 버려둔 옷가지인 줄 알았다. 형형색색의 머리카락이 달려 있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에스퍼들이 단체로 쓰러져 잠들어 있는 광경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이게 무슨…….”
하성진이 설명이 필요한 얼굴로 하진을 쳐다보았다.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게 꽤 놀란 모양이었다.
하진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다투려고 하시기에…… 음, 재워버렸습니다.”
“재웠, 아니, 저 사람들을 다요?”
하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성진은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이 붕괴되는 현실에 멍하니 잠든 에스퍼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기존에 알려진 방사 가이딩은 그리 효율이 좋지 못했다. 사정이 있거나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게 방사 가이딩이었다.
당연했다. 손만 잡아도 버리는 가이딩 없이 효율적으로 가이딩할 수 있는데 뭐 하러 공기 중에 아까운 가이딩을 다 흘린단 말인가.
분명 보통은 그게 맞는데…….
“그래서 저분들을 따로 다른 곳에 옮겨둬야 하는데 저 혼자선 힘들 것 같아서 사람을 좀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하성진은 귀로는 하진의 말을 들으면서도 머리로는 여전히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멍했다. 방황하던 시선이 잠든 에스퍼들에게 머무르자 하진이 손가락을 튕겨 그의 시선을 끌었다.
딱!
“으엇!”
경쾌한 소리에 하성진이 파드득 떨며 정신을 차렸다.
“최대한 빨리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고 싶거든요.”
“아, 네, 네. 금방 데리고 오겠습니다.”
결국 하진이 피곤한 티를 내고서야 발 빠르게 움직이는 하성진이었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안으로 들어간 하진은 우선 겹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잠든 에스퍼들을 먼저 치료하기로 했다.
엎어진 걸 돌려 눕히는 것만으로도 큰 노동이 되었다. 거의 100킬로는 될 것 같은 근육 덩어리에다가 잠들어 있기까지 하니 바로 눕히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힘 좀, 쓰는 사람을 데려오면, 좋겠네……!’
“허억, 후우…….”
팔 힘만으로는 힘들어 거의 온몸을 사용해야 했다. 겨우 한 사람을 돌려 눕힌 하진은 숨만 빠르게 고르고서 잠든 에스퍼의 입을 손으로 벌렸다.
처음 에스퍼와의 접촉 가이딩이라고 하면 떠올렸던 인공호흡을 이제야 해보게 된 게 우습기도 했다.
축 늘어진 혀에 자신의 것을 마주한 채 빠르게 가이딩을 불어넣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리는 데 5분은 걸린 거 같은데 치료에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하성진이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인력이 충원되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진은 낑낑거리던 자신과는 다르게 팔 힘만으로 근육 덩어리를 돌려 눕히는 직원을 보며 잠시 자신의 팔과 그의 것을 비교했다.
‘납치당한 동안 운동을 못 해서 그래.’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변명을 한 하진이 두 번째 에스퍼에게 입을 맞췄다. 엎어진 이들을 돌려 눕히면 하진이 치료하고, 그 치료한 이들을 직원들이 따로 데려가 눕혀두었다.
착착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 하진이 처음으로 협회의 일 처리에 만족했다. 쓸데없이 이동하는 과정이 사라지고 치료하는 속도 또한 빠르니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마지막 에스퍼까지 가이딩한 하진은 무릎을 꿇은 채 수그리느라 접혀 있던 몸뚱이를 바르게 폈다. 조금씩 저려 오는 허벅지를 퉁퉁 두들긴 하진은 하성진과 그가 데려온 직원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신 덕에 빠르게 끝냈습니다.”
그러자 그들 또한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마주 인사했다. 그들 모두 적잖게 놀랐는데 당연히 자신들의 잘못이었으니 하진이 젠체할 줄 알았던 탓이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죄송하고 감사하죠. 아직 제대로 된 보상도 해드리지 못했는데 돌아오신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분께 고생을…….”
며칠도 아니었다. 하진은 겨우 하루 쉬고서 이 많은 에스퍼를 치료했다. 심지어는 그 긴 시간 동안 불평이나 불만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진은 갑이었고, 특히나 납치 사건 이후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는데도 그는 조금도 힘든 티 내지 않았다.
자신이 왜 뒤처리를 해야 하냐고 화를 내도 그들은 할 말이 없는데 묵묵히 가이딩하고 심지어는 예의 바른 태도에 그들은 결국 감동하고 말았다.
‘이런 가이드도 있구나…….’
협회에서 가이드가 어떤 존재인가. 등급이 낮아도 가이드라면 대우받는 곳에서 등급이 높은 가이드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지 않던가.
언제나 모셔야만 하던 가이드만 보다가 하진 같은 이를 만나니 얼떨떨했다. 그러나 하진은 처음과 같은 태도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시각을 다투는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보다 치료가 끝났으니 저는 돌아가 봐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바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진은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등을 돌렸다. 대기실로 돌아가자 하진의 발소리를 들은 이도윤이 먼저 문을 열었다.
“이제 가는 거죠?”
이도윤은 하진이 문을 열기 위해 뻗었던 손을 잡고 정문을 향해 걸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하진을 안아 들고 뛰어가고 싶었다. 실제로 차를 타는 것보다 그게 더 빠르기도 했고 말이다.
“피곤하게 뭐 하러 그럽니까. 대우해주면 받으라면서요. 타고 가죠.”
그런데 하진이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제 손을 잡고 이끄니 그는 뒤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끄는 모습에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형, 멋있어요.”
“감사합니다.”
하진은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멋있다는 칭찬에 감사 인사를 건넸다. 사이좋게 손을 잡고 나가자 하성진이 빠르게 대기시켜둔 차량이 있었다.
푹신한 시트에 기대며 하진은 정말 오랜만에 퇴근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물론 이렇게 호화로운 퇴근길은 처음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