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저희는 바로 다음 장소로 가죠.”
“조금 쉬지 않으셔도 괜찮으십니까? 그래도 폭주한 에스퍼를 가이딩하신 건데…….”
하성진은 이전에 주성원을 가이딩하고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코피를 줄줄 쏟아내던 한지우를 잊을 수 없었다.
물론 한지우는 약물 복용으로 등급을 올린 것이지만, 그래도 S급이 아니었던가. 하성진은 하진에게서도 그 모습을 보게 될까 봐 걱정스러워했다.
그러나 하진은 그런 하성진의 반응을 오히려 의아해하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고는 혹시 제 낯이 상했나 싶어 얼굴을 매만지더니 물었다.
“피곤해 보입니까?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요.”
거울이 있었다면 곧장 얼굴을 확인했을 하진을 보며 하성진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피곤은 무슨, 폭주 에스퍼를 가이딩하고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팔팔해 보였다. 알파 팀 전원 가이딩의 전설을 듣긴 했으나 실제로 멀쩡한 걸 눈으로 보니 신기했다.
“형 이럴 땐 피곤한 척이라도 하면서 뜯어낼 건 뜯어내는 게 좋아요.”
그 순간 끼어들어 조언 아닌 조언하는 이도윤이었다. 하성진은 하진을 물들이려는 악의 손길에 기겁했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끼어들지도 못하고 애꿎은 입안의 살만 잘근잘근 씹어대는데 다행히 하진은 이도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얼른 다음 장소로 가죠. 지금 폭주 중인 에스퍼가 몇 명입니까?”
하진의 물음에 하성진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한쪽에 끼고 있던 태블릿PC를 켰다.
“현재 치료가 끝난 최희준 에스퍼를 제외하고 5명의 에스퍼가 폭주한 상태에 있고, 4명이 전조 현상을 보였습니다. 9명 모두 한지우 가이드에게 자주 가이딩을 받았던 에스퍼들입니다. 능력이 강하기도 하고요.”
강한 에스퍼일수록 가이드에 대한 절실함이 강하다. 파장이 맞는 가이드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등급이 낮아도 파장이 맞는 가이드를 만나는 에스퍼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그건 로또를 연속으로 1등 할 확률보다도 낮았다.
그렇다 보니 한지우가 S급이 되었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열심히 그를 찾아가 가이딩을 받았고, 그로 인해 하진의 가이딩이 시급해져 버렸다.
하진은 한숨을 삼켰다. 생각의 수면 위로 한지우가 떠올랐으나 다시 가라앉혔다. 지금은 당장 해야 할 일이 넘쳐났다. 그에 집중할 때였다.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죠.”
“네.”
* * *
“후우…….”
하진은 붙잡혔던 어깨를 주물렀다. 하필이면 가장 멀리 있어서 나중에 찾아온 이가 제일 강할 건 뭐란 말인가. 그나마 이게 조절한 힘이라는 게 무서웠다.
이 에스퍼가 힘을 조절하지 않았더라면 하진의 어깨는 부서지는 게 아니라 그대로 몸에서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상상하니 소름이 쫙 돋는 일이라 서둘러 징그러운 상상을 털어냈다.
“으음…….”
하진은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줄줄 새어 나오는 한숨과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장에 급한 이들은 가이딩으로 해결했다. 파장도 안정시키고, 점막 가이딩으로 체내에 약물도 없앴다.
열 명 정도 되는 이들을 쉬지 않고 가이딩하고 나니 아무리 하진이라고 해도 피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방사 가이딩으로 흥분한 에스퍼를 진정시키고, 점막 접촉으로 또 가이딩하는 방식을 열 번이나 반복했으니 말이다.
하진이 측정 불가 등급이 아니었더라면, 가이딩의 총량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가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으려나…….’
두 눈이 뻐근한 걸 봐선 이미 밤이 된 지 한창 되었을 시간 같았다. 시간이 제법 걸렸는데도 급한 불만 겨우 껐다는 것에 하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나머지는 내일 하겠다고 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젓고 몸을 일으켰다.
피곤함에 생각하는 것조차 늘어졌으나 이건 단순히 늦은 시간까지 가이딩한 탓이었지, 몸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한 번에 끝내자.”
괜히 질질 끌어봤자 좋을 게 없기도 했지만, 알파 팀이 과연 두 번이나 자신이 다른 에스퍼를 돕는 것을 참아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절대 안 보내주겠지.’
따라온 이도윤만 해도 한 사람 가이딩하고 나올 때마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잔뜩 내고 있었다.
그걸 또 어르고 달래야 할 걸 생각하면 차라리 조금 피곤한 것쯤이야 참을 만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점막 가이딩만 필요한 것뿐이니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읏차.”
몸을 일으키고 팔을 위로 쭉 뻗어 스트레칭까지 마친 하진이 바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급한 불을 꺼서 그런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하성진은 더는 불안한 눈으로 하진의 몸 상태를 살피지 않았다. 열 명의 에스퍼의 폭주를 막고서도 멀쩡히 서 있는 가이드를 더 걱정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미 안일하게 굴었다가 징계를 받고 있었기에 의무적으로 하진의 몸 상태를 살피긴 했다. 걸음걸이도 똑바르고, 시선이 흐리멍덩하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이게 진짜 S급 가이드구나.’
정확히는 측정 불가 등급이지만, 대외적으로 그의 등급은 S급이었기에 이렇게 S급 가이드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가 쌓여만 갔다.
하성진의 생각을 읽을 능력이 없는 하진은 폭주 에스퍼를 대상으로는 할 수 없었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치료가 필요한 나머지 에스퍼들을 한 공간에 모아 주시겠습니까?”
“네? 아, 하긴 이제 이하진 가이드가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죠. 알겠습니다. 그럼 연구동에 방 하나를 준비하겠습니다. 그쪽으로 가시죠.”
운전석에 올라탄 하성진은 짧은 통화를 몇 번 하더니 연구동에 도착해선 하진을 빈방으로 안내했다.
“에스퍼들이 모두 모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이하진 가이드는 잠시 휴식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휴식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하진은 고맙게 소파에 앉았다. 푹신한 소파는 불편함 없이 하진의 몸을 감쌌다.
“형 피곤하면 좀 자도 돼요.”
이도윤이 유혹하듯 속삭였으나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불러놓고 그러면 안 되죠.”
“형이 불렀으면 아침까지라도 기다려야지.”
이도윤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진은 슬쩍 몸에 힘을 빼고 소파에 편히 기댔다. 그러자 몸이 편해진 탓인지 스멀스멀 눈이 감기려 했다.
‘지금이 몇 시지……?’
몇 시길래 벌써 잠이 오는 건가 싶어 반쯤 감은 눈으로 벽 한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시간은 열두 시를 넘긴 상태였다.
‘잠깐, 그럼 내가 이 시간에 에스퍼들을 집합시킨 건가?’
갑자기 잠이 확 깼다. 기댄 몸을 앞으로 숙인 하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마른 얼굴을 손으로 비볐다. 본의 아니게 갑질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물론 이도윤의 말대로 에스퍼들은 가이딩만 해준다면 아침까지도 기다릴 수 있었으나 애초에 이도윤의 말을 억지 취급한 하진은 그 사실을 몰랐다.
더군다나 몇십 년을 평범한 사고방식을 추구하고 살아오지 않았나. 하지만 상식적으로 사람을 한밤중에 불러내는 쪽이 이상한 사람 아닌가.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집에 갈까요? 못한다고 내가 말할까?”
잠들 것 같았던 하진이 갑자기 얼굴을 문지르며 끙 소리를 내자 이도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진은 대답도 듣기 전에 하성진을 찾으려고 일어서는 이도윤의 손을 붙잡아 다시 앉혔다.
“잠 좀 깨려고 그런 겁니다. 그러니 얌전히 앉아 있어요.”
틈을 주지 않는 하진에 이도윤이 쳇,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하진의 옆에 앉았다.
‘모르겠다. 나중에 사과하면 되겠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한 하진은 작게 혀를 차며 하성진이 두고 간 물을 들이켰다. 조금 눈이라도 감고 있을까 했는데 잠은 무슨, 제정신이나 챙겨야 했다.
차가운 물로 졸음을 쫓아내고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스트레칭을 마치고 나자 노크와 함께 하성진이 문을 열었다.
“이하진 가이드, 준비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도윤 씨는 여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던 하진이었기에 이도윤은 이번에도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부득불 쫓아가 다른 놈들이 허튼짓은 하지 않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하진이 굳이 자신을 떼어놓고 가는 마음을 이해했기에 참았다.
손을 흔드는 이도윤을 뒤로하고 하성진의 안내를 따라간 곳에는 에스퍼들이 모여 있었다. 수는 대략 폭주한 에스퍼들보다 조금 많아 보였다.
열 쌍이 넘는 눈들이 일제히 하진에게 향했다.
정작 당사자인 하진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하성진이 괜히 어깨를 움츠리며 놀랐다. 그러다 본인도 민망했는지 헛기침으로 무마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그럼 이하진 가이드. 가이딩이 끝나면 불러주세요.”
“네.”
이곳에 모인 에스퍼들은 굳이 하성진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지만, 얼굴까지 벌게진 게 안타까워서 하진은 순순히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