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직원들은 연락도 없이 찾아온 하진과 알파 팀에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했다. 어쩐 일로 방문했냐는 말과 필요한 게 있으면 당장 호출하지 그랬냐는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그, 그래서 어쩐 일이십니까?”
한지우의 이상 현상을 곧바로 보고하지 않아 사태를 키워 징계받고 안내 데스크로 내려온 하성진 대리가 침을 꼴깍 삼키며 나섰다.
그도 원해서 나선 건 아니었다. 징계 때문에 직급이 낮아지긴 했으나 징계가 끝나면 다시 돌아갈 대리이기 때문에 하진을 담당하는 건 그의 몫이 되었다.
‘젠장, 이럴 때만 대리지!’
하성진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며 하진을 제게 넘긴 후배들을 속으로 원망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웃네?”
“……죄송합니다.”
그러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은 다 옛말이 되었는지 한승호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올라간 하성진의 입꼬리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젠장, 웃지도 말라는 거냐? 아주 그냥 내가 동네북이지?’
하성진이 웃는 얼굴로 아래로 불만을 터트렸으나 그게 다였다. 어쩌겠는가. 본인의 죄인 것을. 하성진은 빠르게 입꼬리를 내리고는 죄책감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승호 씨.”
“왜애, 쥐뿔 한 것도 없는 놈들이 처웃잖아.”
한승호가 자신을 말리는 하진에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물론 하진이라고 해서 저들이 예쁘겠는가. 하지만 대놓고 티를 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사람이란 아무리 자기가 잘못한 일이라도 타박하거나 싫은 소리를 듣다 보면 반발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본인이 가해자임에도 말이다.
‘이왕이면 크게 뜯어내야지.’
하진에게는 큰 그림을 위한 계획이 있었다.
“이분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얘기를 나눌 분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하진의 말에 알파 팀 등쌀에 죽어가던 직원들이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환하게 살아났다. 하진은 그 표정들을 아닌 척 눈에 담았다.
‘이걸로 협회 내 여론이 조금은 내 쪽으로 기울겠군.’
아무리 협회장의 힘이 강하다 해도 피해의 규모가 작지 않았다. 이럴 때 여론까지 하진에게 유리하게 만든다면 그가 조금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해도 협회장은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제 에스퍼들의 검진을 받으러 왔는데 바로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연락도 필요 없죠.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하성진의 안내를 받아 병동으로 향하자, 역시나 마찬가지로 의료진이 허둥지둥 나와 하진과 알파 팀을 맞이했다. 하성진 대리는 마치 폭탄을 떠넘긴 후련한 기분을 맛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퇴장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의료진은 하진의 등장에 다른 관심을 가질 겨를도 없었고, 알파 팀은 원래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하진 가이드! 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대표로 나선 의사는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하면서도 슬그머니 희망을 품었다. 하진이 무사히 돌아온 지금, 가장 시급한 사안은 파장을 통제하지 못 하는 에스퍼들이었다.
의료진의 시선이 분주히 움직였다. 에스퍼들을 데리고 온 것을 보면 분명 본인 혹은 저들의 검진을 위함일 텐데, 하진과 알파 팀 모두 이미 돌아온 날 모든 검사를 마쳤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때 말했던 가이딩을 통한 치료 후, 확인을 위한 검진일 터였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하진은 알파 팀의 검진을 부탁했다.
“가이딩은 마친 상태이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예, 예! 물론이지요. 알파 팀 에스퍼분들은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그러나 의료진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두 사람이었다.
하진도 모르는 일인 터라 시선을 돌려 곁에 남은 백자안과 차진우를 바라보자 대답이 돌아왔다.
“하진 씨 곁을 전부 비울 수는 없으니까요. 두 사람씩 검사를 받으려고 합니다.”
뒷말은 의료진을 향한 말이었다. 더는 협회를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었으나 협회 소속이라고는 하나 의료진인 그들에게는 큰 타격이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과연 하진의 가이딩으로 그 정체불명의 약물을 없앨 수 있냐는 것이었다.
“예, 상관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검사이니 잠시 앉아계시죠.”
병동을 지키는 D등급 에스퍼가 남은 세 사람을 안내했다. 원래 병동은 그 중요성 때문에 B등급 이상의 에스퍼가 경비를 서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현재 등급이 조금 높다 싶은 에스퍼들은 모두 한지우에게 가이딩을 받고 독방에 갇힌 신세였다.
그 탓에 당시 한지우의 관심을 받지 못한 낮은 등급의 에스퍼들이 협회를 지키고 있는 신세였다.
그게 바로 협회 전체가 하진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이유였다. 지금 상황에서 반정부든 에스퍼 반대 세력이든 쳐들어온다면 협회는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무너질 게 분명했다.
의료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검사를 진행했다. 피 검사부터 파장 검사, 이능력 제어 실험까지 평소에도 하는 것들이지만, 두 배 이상의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시행했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려 먼저 검사를 받은 이들이 돌아오고, 교대한 두 사람이 검사에 들어간 지도 어느새 한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거의 세 시간가량이 지났다.
커피와 간단한 다과만 먹은 하진은 그제야 백자안이 종일 식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미안함을 가득 담고 백자안에게 물었다.
“배는 고프지 않습니까? 뭐라도 사달라고 부탁할까요?”
하진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며 사과하자 백자안이 고개를 저었다.
“결과 듣고 돌아가서 저도 형이 해준 거 먹을래요.”
백자안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요리를 하다니 너무하다며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다.
“들었습니까?”
“팀장이 말해주던데요.”
그 말에 하진의 안에서 차진우에 대한 인상이 조금 바뀌었다. 슬쩍 쳐다보자 차진우가 작게 미소 지었다. 어른스러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조금 유치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능글맞은 면도.
“그럼 가는 길에 장을 보고 가죠. 뭐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하진의 질문에 백자안은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좋았다.
“저는 형이 해주시는 거면 뭐든 다 좋아요.”
얼핏 달콤한 말이지만 해주는 입장에서 가장 까다로운 대답이 바로 ‘아무거나’가 아닌가.
하진은 조금이라도 백자안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좋아하는 맛이나 싫어하거나 못 먹는 음식 따위를 물었다.
결과적으로는 백자안은 하진과 실컷 대화할 수 있어서 즐거웠지만 말이다. 어쨌든 백자안은 비현실적인 외모를 하고서 입맛은 지극히 토속적이었다. 그는 특별한 요리를 바라기보단 하진이 차려주는 집밥을 원했다.
과연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차리는 것 자체는 쉬웠다. 그저 하진이 평소에 먹고 살던 대로 차리기만 하면 되었다.
“혀엉!”
하진이 어떤 음식을 만들지 고민하는 사이 한승호와 이도윤도 검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한승호는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백자안을 떼어놓았고, 이도윤은 그 틈을 파고들어 검사가 힘들었다고 징징대며 애교를 부렸다.
“하자는 게 뭐 이리 많은지 힘들었어요.”
“그래도 건강과 직결된 문제이니 신중하게 해야죠. 결과는 언제 나온다고 말해주던가요?”
“조금만 기다려 달라던데?”
한승호가 이도윤도 잊지 않고 하진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며 대답했다. 오 분 정도 기다렸을 즈음에 나이가 지긋한 의사 한 명이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하진은 벌떡 일어났다. 마치 드라마에서 어딘가 아픈 주인공의 상태를 전해 듣는 가족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결과가 어떻습니까?”
아까까진 괜찮았는데 붉게 달아오른 의사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결과가 어떻길래 저런 얼굴인 걸까.
하지만 걱정과 달리 의사는 좋은 의미에서 얼굴을 붉힌 것이었다.
“검사 결과 이상 없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없앨 수 없었던 약물이 이하진 가이드의 가이딩으로 인해 사라졌다고요!”
의사는 쓰러질까 걱정될 정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알파 팀 전원, 불안하던 파장이 안정되었고, 이능력 통제력이 올랐습니다.”
“어쩐지 하진 형한테 가이딩받고 나서부턴 능력 전개가 수월하더라니.”
한승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이전에 하진과 입을 맞춰 가이딩받았을 때부터 그런 감각을 느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아니, 기쁘지 않다기보단 그 사실을 누군가가 알아버린 게 싫었다.
특히나 협회가 알아버렸으니 하진을 다른 에스퍼들에게 붙이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들로서는 강한 에스퍼들은 많을수록 좋으니 말이다.
“이하진 가이드만 있다면 현재 폭주하려는 에스퍼들 모두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의사의 말에 알파 팀이 인상을 썼으나 오히려 하진은 담담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을 가이딩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그들도 피해자에 불과한데 자신의 심술에 괜한 불똥을 맞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가이딩하러 가겠습니다.”
그 말에 의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람을 부르죠!”
의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연락을 취하자 한승호가 비명을 지르듯 하진을 불렀다.
“형!”
비단 한승호만이 아니었다. 알파 팀은 믿을 수 없었다. 점막 접촉을 통한 가이딩을 해야 하는데 하진이 거절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