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홀린 듯이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한승호는 저도 모르게 다시 하진에게 입을 맞추려다가 다시 이도윤에게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어딜 또 하려고.”
“아오, 진짜…….”
자신을 지켜보는 이들에 의해 한승호는 결국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미련이 넘치는 눈으로 하진의 입술을 좇던 그는 차진우의 시선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쳇, 내가 나중에 할걸.”
“순서가 바뀌면 뭐가 다를 거 같냐?”
이도윤의 깐족거림에 한승호가 결국 울컥하고 말았다.
“근데 이게 자꾸 반말하네?”
“……형이 할 말이야?”
두 사람의 만담 같은 대화를 뒤로하고 차진우가 하진의 옆에 앉았다. 한승호가 떨어지면서 아예 누워버린 하진을 등을 받쳐 일으켜 세우고,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급하게 밀어붙이던 한승호와는 달리 그는 하진이 숨을 고르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에 하진은 감사의 뜻을 눈으로 보내며 몸의 준비는 물론이고 마음의 준비까지 마쳤다.
어쩐지 두 사람만의 세상이 되어버린 분위기에 이도윤은 물론이고, 바로 방금 전에 하진과 입을 맞춘 한승호가 입을 부루퉁 내밀었다.
특히나 자신의 흔적을 지워내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던 한승호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직 입술도 마주치지 않은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입 맞춰도 됩니까?”
하진은 새삼스레 물어보는 것에 민망한지 작게 볼을 붉혔다. 민망해서든 부끄러워서든 하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자 지켜보는 이들의 질투가 커졌다.
그러나 하진은 그들이 질투로 미치려는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고, 차진우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신경 쓰지 않았다.
“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진의 대답에 차진우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다가갔다.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고, 입술을 느리게 움직이며 하진의 것을 자극했다. 마치 풋풋한 어린 청년들의 것 같은 입맞춤에 하진이 저도 모르게 사르르 눈을 감았다.
“으응, 하아…….”
한승호의 흔적을 지워냈던 입술이 차진우의 흔적으로 다시 젖어 들기 시작했다. 하진은 그와의 입맞춤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젖은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소리에 발끝이 간지러워지는 듯했다.
가볍게 쪽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지기도 하고, 아랫입술을 머금으며 혀로 그 입술을 쓸어내기도 하는 차진우의 행동에 몽롱해졌다.
혀를 섞지도 않았는데도 그 어떤 입맞춤보다도 색정적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는 하진이 몽롱함에 취해 멍해지려 할 때면 귀신같이 약하게 이를 세워 피가 몰리고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깨물어왔다.
그럴 때면 놀라는 동시에 허리가 찌르르 울려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틀고 말았다.
“흐읏……!”
두 사람의 입맞춤을 지켜보는 한승호와 이도윤은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입맞춤은 점점 진해졌고, 그들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그들 또한 느꼈으나 말릴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입술만 탐하고 있을 뿐, 가이딩은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진우가 저렇게 영악하게 굴 줄은 몰랐다. 차진우와 영악함이라니.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란 말인가. 그들은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했던 팀장의 색다른 면모에 배신감까지 느꼈다.
이도윤은 당장이라도 차진우를 하진에게서 떼어놓고 싶은 것을 주먹을 쥐며 참았다. 여기서 충동에 따라 그를 떼어놓는다 한들, 아직 가이딩을 받지 못했다고 우긴다면 이 꼴을 또 봐야 했다.
“으응…….”
질척하고 외설적인 소음이 귀를 찔렀다. 두 사람은 에스퍼의 뛰어난 신체 능력이 이 순간만은 무척이나 싫었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으나 점점 쾌락에 젖어 들며 허물어지는 하진의 모습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차진우는 등 뒤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을 느끼면서 하진의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혀를 얽는 대신 혀끝으로 입천장을 긁어내리자 하진의 허리가 움찔거리며 강하게 튀었다.
“흐읏!”
하진이 신음을 흘렸으나 맞닿은 입술에 뭉개졌다. 저도 모르게 차진우의 옷깃을 강하게 틀어잡은 하진은 그에게 몸을 붙인 채 바르르 떨었다.
쾌락으로 몽롱한 와중에도 이대로면 한승호와 이도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을 치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아래가 반쯤 반응하기 시작한 터라 위기감을 느낀 하진이 차진우의 혀를 붙잡기 위해 제 혀를 움직였다.
그러나 차진우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닿으려 하면 피해버리고, 부드럽게 피하면서도 하진의 입안 곳곳을 자극해대니 미칠 노릇이었다.
‘다른 가이드한테 점막 가이딩받은 적 없다면서 대체……!’
사실 그게 거짓말이고 경험이 많은 선수라고 해도 좋을 움직임에 하진만 다급해졌다. 키스만으로 혼자 흥분해 버리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란 말인가.
하진은 얌전히 있으라는 뜻으로 차진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더는 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차진우는 그제야 얌전히 하진에게 저를 맡겼다.
차진우가 도망을 포기하자 하진이 재빠르게 혀를 옭아맸다. 적극적인 하진의 움직임에 차진우가 목 아래로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 약이 오른 하진이 혀를 깨물어대는데도 오히려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훑어내리며 자극했다.
“흣!”
“됐어! 이제 더는 못 참아!”
뜨거운 돌을 삼키는 심정으로 참아내던 이도윤이 한계점을 넘어서자마자 하진을 차진우에게서 떼어냈다.
뺨이 붉게 물들고, 입술이 부어오른 채 흐트러진 하진의 모습이 절경이었으나 이 모습을 만든 게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도윤은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아, 젠장…….’
이도윤과 한승호의 존재를 다시 자각한 하진은 뒤늦게 찾아온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차진우와 입을 맞추고 느끼면서 신음하는 꼴을 저들이 다 봤다는 사실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차라리 한승호 때처럼 상대가 강하게 몰아붙였다면 덜 민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경우엔 자신이 너무 즐겨버렸다.
“크흠, 저는 그럼 방에 있겠습니다. 백자안 씨가 일어나는 대로 검사받으러 가죠.”
하진은 결국 제 방으로 도주하기를 택했다. 하진이 떠난 자리에는 싸늘한 정적이 남았다.
유일한 브레이크인 그가 자리를 뜨는 바람에 세 사람 사이는 더욱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이 되었다.
“와, 팀장이 그렇게 영악할 줄은 몰랐네.”
한승호가 한 마디, 한 마디 씹듯이 말했으나 차진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웃을 뿐이라 질투에 미친 어린 청년들만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오, 진짜! 두고 봐. 다음엔 절대 그냥 안 넘어가니까.”
차진우를 두고 보지 않겠다는 게 아니었다. 다음 기회가 찾아온다면 하진을 그렇게 쉽게 넘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진은 자신도 모르는 무덤이 파진 줄도 모르고 찬물로 열이 오른 몸을 식히기 바빴다.
* * *
하진에게 가이딩받은 후 12시간을 넘게 푹 자고 일어난 백자안은 어딘가 경직된 분위기에 의아해했다. 특히나 하진의 반응이 유독 심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묘하게 저 세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군.’
하진과 연관된 일이라 그런지 거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백자안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하진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종의 사건이 뭔지 몰라도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하진의 일이라니. 그러나 물어본다 한들 알려줄 것 같지 않았다.
“형, 저 일어났어요. 재워주셔서 감사해요.”
대신 그는 그 틈을 타 하진의 관심을 자신에게 끌어오는 것을 택했다. 겸사겸사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은근슬쩍 거론하며 세 사람을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만 하진과의 모종의 사건을 겪은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역시나 귀신같이 알아들은 한승호가 미간을 와그작 찌푸리며 불쾌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어젯밤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놀란 하진이 자리를 피해버려서 무어라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백자안 씨도 일어났으니 검사받으러 가죠. 괜찮겠습니까?”
평소였다면 백자안의 식사를 먼저 챙기고 느긋하게 움직였을 하진이지만, 본인에게 민망한 일들만 자꾸 일어나니 당황하는 바람에 다급하게 굴게 되었다.
그러나 하진의 말이라면 짚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해도 웃으며 따를 백자안이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말이면 저는 언제든, 뭐든지 다 좋아요.”
“으, 저 여우 새끼.”
한승호는 하진을 되찾은 것은 좋지만, 백자안의 여우짓을 다시 봐야 한다는 사실에는 불쾌해했다.
백자안은 순하게 웃으며 현관으로 향하는 하진의 뒤를 따르다가 문득 깨달은 사실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잠든 사이에 가이딩이 끝났나 봐요?”
해맑은 물음에 방심하고 있던 하진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너무도 확연한 긍정의 표시였다. 하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백자안에게 민망할 건 없어서 다행이라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게 됐습니다.”
그 말 외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진은 에스퍼들을 이끌고 병동으로 향했다. 그새 하진의 얼굴이 많이 알려진 모양인지 걷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그들의 눈빛에는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을 목격한 것과 같은 충격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길에서 마주한 시선은 협회에 들어선 순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었다.
“흐억!”
“이하진 가이드?!”
구조상 병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협회 건물을 통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진이 발을 들여놓는 순간, 로비에 있는 모든 직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