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43화
‘내분인가?’
생각보다 과해진 분위기에 하진이 불똥을 맞을세라 긴장했다.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본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다기보단 마치 이 광경이 익숙한 사람들 같았다.
게다가 소심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습관적으로 애꿎은 손가락만 계속 괴롭히며 손톱의 거스러미를 떼고 있을 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에 하진은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형제 싸움이란 이런 거구나. 그런 조금은 과장된 오해를 품은 채로.
이해를 포기한 하진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들도, 형제 싸움에 정신없던 이들도 모두 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몸을 다 돌리지도 못했는데 귀신같이 달라붙는 시선에 하진의 표정이 구겨졌다.
“뭘 봅니까.”
평소였더라면 매너와 배려를 탑재한 채 사람을 대했을 하진이지만, 납치범에게 그런 걸 챙겨줄 필요는 없었다.
“소개 아직 다 안 끝났는데? 이제 같이 지내야 하는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하진은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쏘아붙이려다가 문득 탈력감을 느낀 사람처럼 어깨에 힘을 풀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렇게 사정 봐줄 이들이었으면 납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려면 빨리 하시죠.”
“휴, 너무 차갑다니까.”
서주안은 마치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는 학생의 눈처럼 초점이 흐릿해지는 하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 탓인데. 하진은 뻔뻔한 반응에 또 한 번 울컥할 뻔했으나 잘 참았다.
하진이 반응하지 않자, 서주안도 여기까지만 했다. 더 긁었다간 무덤덤하면서도 예민하기 그지없는 가이드님께서 화를 내실 게 분명했다.
서주안은 서지한과의 말다툼이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다음 사람의 소개로 넘어갔다.
“이쪽은…….”
“블랙 독이라고 불러.”
“강아지예요.”
“야!”
하진은 어쩐지 익숙한 광경에 기시감을 느꼈다. 서주안이 웃으며 강아지를 긁어대고, 강아지는 그에 화를 참지 못하고 바락바락 화를 내는 광경이 익숙하다면 익숙했다.
“아지야.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지. 아, 네 이름은 네가 여섯 살 때 혼자 지었다고 했던가?”
“이 시발 새끼가!”
아니다.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한승호를 긁어대는 백자안은 저렇게 얄밉지 않았다.
하진은 가증스럽게 이제야 생각난 척하며 강아지가 숨기고 싶어 했던 비밀을 그대로 까발리는 서주안을 보며 질색했다.
한순간이나마 저 둘을 한승호와 백자안에게 대입한 게 미안해졌다.
‘엮여 봤자 좋을 게 없는 타입이군.’
처음 옥상에서 서주안과 만났을 때 차진우가 왜 그렇게 서주안을 경계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능력이 까다로운 걸 떠나서 사람 속을 긁는 데 아주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강아지가 입 닥치라며 빛처럼 빠르게 달려들자 서주안 또한 능력을 사용해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아지야. 누누이 말하지만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니까? 그 나이대 애들이 귀엽고, 특이한 이름으로 관심받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거야.”
“아악! 닥치라고!”
그 와중에도 사람 속을 긁는 소리를 해대는 게 이제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장래에 죽는다면 남의 손에 죽는 게 희망 사항인가 싶을 정도였다.
‘한 사람 소개할 때마다 이럴 건가.’
하진은 고작 세 사람 이름을 듣는 데 벌써 삼십 분이 흘러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슬슬 발바닥도 아파왔다.
또 들어가려고 해봤자 붙잡히겠지. 하진은 고개를 돌려 계속해서 손가락 거스러미를 뜯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웅크린 자세 탓인지 남자는 이 중에서 가장 덩치가 작아 보였다. 그래도 에스퍼라고 하진보다는 크지만 말이다. 하진은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하진이 처음으로 부르는 말에 싸우던 이들도 싸움을 멈췄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지만, 하진은 신경 쓰지 않고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하진이 부른 이가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반응이 없더니 정적이 계속되자 설마 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 저요?”
“예. 이름이 뭡니까?”
“제, 제, 제 이름을 물어보신 거예요?”
고작 이름 한 번 물어본 것치고는 과한 반응이었다. 이름만 빠르게 물어보고 들어가려 했던 하진은 과한 반응에 잠시 자신이 뭘 잘못 건드렸나 싶어졌다.
“쯧.”
그 꼴을 지켜보던 서지한이 작게 혀를 찼지만, 너무 작아서 하진에게는 미처 닫지도 못했다.
“……예.”
하진은 과한 반응을 보이는 사내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름만 알아내면 방에 들어가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 내 이름을 물었……. 목소리 너무 좋……. 날 마음에…….”
남자가 두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고 무어라 빠르게 중얼거렸으나 너무 빠른 중얼거림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체 이름은 언제 알려줄 건데.’
하진은 어느 누구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는 에스퍼 네 명을 보며 두통을 느꼈다. 반정부 진영을 가리키는 협회의 표현이 떠올랐다.
사회 부적응자.
이것도 좋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냥 날것대로 표현하자면 지 좋을 대로 사는 미친놈들이었다.
“하아…….”
하진에게서 작게 한숨이 새어 나오자 소심남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제, 제 이름은 최지형이에요!”
하진은 피곤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이로써 같잖지도 않은 자기소개 시간이 끝났다.
그는 뭐가 그렇게도 웃긴 건지 연신 웃는 얼굴인 서주안에게 말했다.
“이제 들어가도 되겠죠. 그리고 한 가지 말해두는데 나한테 내준 방엔 허락 없이 들어오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명령할 입장이던가?”
서주안에게 말했건만 서지한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이유는 몰라도 서지한은 하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듯했다. 아니, 그보다는 경계한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하던 상관없는 하진은 오히려 상대가 재수 없어 할 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단정하지만 서늘한 인상에 그에 어울리는 미소가 걸리자 날카로운 분위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가이딩 쪼가리라도 받고 싶으면 그래야 할 텐데요.”
고압적이기까지 한 태도에 서지한의 얼굴이 굳었다.
“……협회 놈들이 얼마나 곱게 대했는지 보이는군.”
본인들은 곱게 대하지 않을 거라는 은유적 표현에도 하진은 코웃음을 쳤다. 사람을 바보로 보는 것도 아니고.
‘아니지. 내 등급이 낮았더라면 저 협박이 먹히긴 했겠지.’
하진은 쓸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던 방사 가이딩을 시작했다.
농도를 조절할 필요 없이 그저 내뿜는다는 생각만으로 가이딩을 행하자 에스퍼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강아지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가이딩에 잠들었다. 서주안 또한 처음으로 웃지 못하고 당황했다.
능력을 사용해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이미 가이딩이 닿았다는 걸 느낀 순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다만 그렇게나 하진을 경계했던지라 가이딩조차도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 서지한이 어쩐지 서러운 얼굴로 잠든 건 놀랍긴 했다.
하진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최지형을 마지막으로 엇 하는 짧은 순간에 에스퍼 넷이 순식간에 잠들었다.
하진은 조용해진 사위에 진작 이럴 걸 그랬다고 혀를 차며 방으로 돌아갔다. 문은 따로 잠그지 않았다.
저들이 허락 없이 문을 따고 들어오진 않을 테니까.
* * *
하진은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납치범 주제에 심심할 걸 걱정이라도 했는지 다양한 책이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자 기기는 줄 수 없으니 책이라도 한가득 넣은 것이리라.
하진이 그중 책 한 권을 다 읽었을 때쯤 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니 말을 들을 텐데?
그보다 벌써 일어났다는 것도 놀라웠다. 방사 가이딩이 약했던 건가. 조금은 당황한 본심을 감추고 고개를 돌렸다.
문 한가운데에 주먹이 튀어나와 있었다. 공격인가 싶어 몸을 긴장시키는데, 그 주먹이 쏙 빠져나갔다. 다만 주먹만 나간 게 아니라 팔에 걸린 문짝이 함께 우지끈 소리를 내며 뜯겨 나갔다.
문짝이 떨어지고 잔뜩 당황한 강아지의 얼굴이 드러나자, 하진은 긴장한 몸에 힘을 풀었다. 저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잠깐이라도 긴장했던 게 민망해졌다.
“……뭡니까.”
“아니, 일부러 이런 게 아닌데……. 노크하려고 한 거란 말이야.”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문을 뚫은 손을 빼지도 못하고 문짝에 끼운 채 강아지가 하진의 눈치를 살폈다.
‘한번 잡아놓으니 편하긴 하군.’
사람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조금 그랬지만, 납치범이니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문이 부서진 것은 언짢았다.
얼굴 보기 싫어서 방 안에 틀어박힌 건데 이러면 그저 공간만 분리되어 있을 뿐,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확연히 느껴지지 않나.
“하아, 최대한 빨리 고치세요.”
“어, 응…….”
맹랑하게 굴 때는 언제고 눈치를 살핀 강아지가 문짝을 달고 현관 밖을 빠져나갔다.
별생각 없이 그 뒤를 시선으로 쫓다가 서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계속해서 하진이 있는 곳을 보고 있었는지 서지한은 놀라지도 않았다.
‘저쪽도 좀 기가 죽었으려나.’
납치범과 사이좋게 지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으나 괜히 시비 걸리는 것보단 강아지 같은 반응이 차라리 나았다. 어차피 자신은 받아줄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잠시 그와 눈을 맞추고 있던 하진은 미련 없이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서지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왜 도망가지 않았지?”
서지한은 하진의 시선이 다시 제게 돌아오자 뒷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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