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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23화 (23/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23화

에스퍼와 가이드는 성별을 초월한 관계지만, 하진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수도 있었다. 그 점을 그녀는 가장 신경 쓰고 있었다.

거부감을 느껴 에스퍼를 거부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알파 팀만 봐도 하진의 주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어떻게든 예쁨받으려고 하지 않나.

그런데 하진이 동성과 입을 맞춰야 한다는 거부감에 그들을 밀어내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단순히 사기가 떨어지는 걸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가이드에게 거절당한 에스퍼는 실제로 능력이 저하하거나 심한 경우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그러니 이수연으로서는 하진이 최대한 거부감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

“괜찮습니다.”

“네?”

서른두 해를 이성애자로 살아왔을 남성에게 어떻게 동성과의 키스를 납득시켜야 하나 고민하던 이수연에게 하진은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단순한 효율 문제가 아니라 의료 행위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인공호흡이라고 생각하죠, 뭐.”

“마, 맞아요! 의료 행위죠!”

이수연은 몇 번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진이 먼저 저렇게 말해준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반면 그는 이수연의 설명을 듣고 떠오른 기억에 턱을 매만졌다.

에스퍼가 내상을 입는 경우 중에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했을 상황도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누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백자안.’

아직도 그가 폭주하던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분명 폭주했으니 내상을 입었을 텐데 치료하지 않은 건가?’

그때의 가이딩으로는 내상을 치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확신하기에는 그가 너무 멀쩡해 보여서 알 수가 없었다.

이수연에게 물어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녀는 가이드 교육 담당이니 자세히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돌아가는 대로 백자안을 붙잡고 물어볼 수밖에.

‘몰랐다면 몰라도 알고서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자. 그럼 이제 방사 가이딩에 대해 알아볼까요?”

일단은 수업부터 듣고.

접촉 가이딩에 대한 실습은 이미 지난 수업에서 손을 댄 것만으로 에스퍼들을 재워버린 걸로 끝내버렸으니 할 필요가 없었다.

“방사 가이딩은 그저 가이딩을 내뿜는 걸로 끝인 게 아니에요. 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하고, 에스퍼와 떨어져 있을 경우 에스퍼에게 도달하기까지 최대한 가이딩을 낭비하지 않아야 해요.”

그러고는 상자 속에서 선글라스 같은 걸 꺼내 썼다.

“이걸 쓰고 있으면 가이딩의 흐름이 보이거든요. 일종의 엑스레이 같은 거죠. 이걸로 봐드릴 테니 우선 가이딩해 보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하진은 방사 가이딩을 시도해 보았다. 이미 가이딩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보여준 하진이었기에 그녀의 기대가 무척 높아 보였다.

그러나 그 기대와 달리 하진은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방사 가이딩은 넓게 퍼트릴 때는 분무기로 뿌린 것같이 고운 입자여야 하고, 목표 지점을 두고 움직일 땐 마치 레이저처럼 쓸데없이 낭비되는 가이딩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하진은 좀처럼 그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방 안에 가이딩을 넓게 퍼트리라고 하면 이수연의 시야가 뿌옇게 될 만큼 농도가 짙은 가이딩을 퍼트렸다.

저곳에 에스퍼가 서 있다고 생각하고 가이딩을 보내라고 하면 무슨 대포알이 날아가는 것처럼 날아갔다.

방사 가이딩은 주로 에스퍼와 접촉이 어려울 때 필요한 방식이다.

그러니까 던전에 들어가거나 전투 상황에 주로 사용하는 가이딩인데 긴급한 상황에서 이런 방사 가이딩을 맞았다간 전투 중에 잠들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에스퍼는 물론이고 가이드의 목숨도 위험해진다. 이수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다고 방사 가이딩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다음 수업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몇 번 더 오셔야겠어요.”

“……예.”

그동안 가이딩하면서 막혔던 적이 없던 하진도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조금은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언제는 일이 쉬웠던 적이 있었나.

학교를 다니고, 대학에 입학하고, 회사에 입사하는 순간까지 하진에게 쉬운 건 없었다.

혼자가 된 후로 남들보다 훨씬 뒤처진 곳에서 시작해야 했던 하진은 그만큼 더 노력했고, 기어코 앞서가지 않았나.

가이딩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수업이 끝난 하진이 건물을 나서자 백자안이 짠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진 형, 데리러 왔어요.”

놀라게는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정말 크게 놀랄까 봐 일부러 기척을 크게 내고 다가오는 모습이 다정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그러나 하진은 그런 배려보다는 그렇지 않아도 벼르고 있던 사람이 앞에 나타났음에 눈을 빛냈다.

“혼자 오셨어요?”

“네. 다른 팀원들은 다 각자 임무가 있어서 나갔어요. 며칠 안 들어올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백자안은 혼자 하진을 독차지하게 된 게 그렇게도 좋은지 배시시 웃으며 뺨을 보기 좋게 붉혔다.

“잘됐네요.”

“……네?”

순간 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좋은 의미로. 자신과 단둘이 남은 상황이 잘됐다는 걸까. 백자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며 온몸에 빠르게 피가 돌았다.

“얼른 돌아갑시다. 물어볼 게 있어요.”

하진은 본인도 모르게 백자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맞잡았다.

“네에, 네!”

백자안은 제 손을 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차를 찾는 하진을 덥석 안아 들었다.

“백자안 씨?”

“이게 더 빨라요.”

어차피 교육장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굳이 차를 준비한 것도 하진에게 자기들이 이만큼 챙겨준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협회장의 뜻이었을 뿐이었고.

하진을 안아 든 백자안은 그대로 능력을 사용해 몸을 띄웠다.

순식간에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건물 옥상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가자 하진은 본능적으로 백자안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이러면 3분도 안 걸려요.”

고소공포증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맨몸으로 이 높이까지 올라오니 또 감상이 달랐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리 급할 것도 없는데 그냥 천천히 가죠.”

“괜찮아요. 순식간에 갈 수 있어요.”

백자안은 목에 감긴 팔이며 훅 다가온 온기에 배부른 낯을 하며 비행을 시작했다. 스치는 바람이 시끄럽게 귓속을 울려 하진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백자안이 호언장담한 대로 도착은 무척이나 빨랐다.

휘청.

“형! 괜찮으세요? 너무 빨랐나요? 죄송해요. 제가 마음이 급해서…….”

다만 부작용이라면 너무 빠른 속도감에 익숙해지지 못한 몸이 땅을 딛고서도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는 점이었다.

“괜찮, 으음, 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어지러움을 이겨내 보려 했던 하진은 결국 포기하고 소파에 몸을 파묻고 앉았다. 백자안은 하진의 부탁에 날듯이 움직여 찬물을 떠왔다.

속이 아릴 만큼 차가운 물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래도 한결 나았다. 메스꺼움이 가라앉은 하진은 옆자리를 두드려 백자안을 앉혔다.

속이 가라앉았으니 할 건 해야지. 하진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혀, 형?”

백자안이 화들짝 놀라고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으나 하진은 꿋꿋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뭐 배웠는지 압니까?”

“뭘, 배우셨는데요?”

백자안의 신경은 온통 하진이 잡은 손에 쏠려 있었다.

그나마 하진의 목소리라 인지하고 대답까지 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말을 걸었다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접촉 가이딩에 대해 배웠습니다.”

“접, 접촉 가이딩이요?!”

수줍은 소년처럼 얼굴을 붉힐 땐 언제고 백자안이 서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설마 저번처럼 다른 새끼가 실습이랍시고 들어온 건 아니죠?”

만약 그렇다고 하면 당장에 그 에스퍼의 입술을 잡아 뜯을 기세면서 백자안은 용케 하진에게는 그 살기가 닿지 않게 조절하며 화내고 있었다.

“이론 수업으로만 진행했습니다.”

“그건 참 다행이에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어쩔 수 없이 점막 접촉, 그러니까 입을 맞춰서 가이딩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에스퍼가 폭주했을 때 입은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요.”

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자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던 잘못을 들킨 기분이었다.

다 알고서 손을 잡았던 거였다. 백자안이 하진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손잡았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백자안은 처음으로 등에 땀이 흐르는 기분을 느꼈다.

정면을 향한 채 말을 이어가던 하진이 고개를 돌려 백자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때 입은 내상, 치료했습니까?”

마치 내 눈을 보고 솔직히 말하라는 듯했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진이 등을 돌리고 있는다 해도 백자안이 그에게 거짓을 고할 일은 없었다.

“아뇨…….”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S급 에스퍼임을 떠나서 하진의 가이딩이 그때까지도 몸 안에 맴돌고 있는데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을 받고 싶을 리가.

백자안은 하진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진이라면 혼을 내도 좋지만,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지 그랬냐고 혼내는 거라면 조금 싫을 것 같았다.

백자안에게는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하진은 제가 할 일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쨌든 같은 팀의 에스퍼를 다른 가이드에게 보낼 리도 없었다.

“그럼 가이딩받으시죠.”

“네?”

“아직도 내상을 입은 채라는 거잖습니까. 저는 그냥 못 두고 보겠네요.”

그렇게 말한 후 하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백자안에게 다가갔다.

백자안은 서서히 가까워지는 하진을 보며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 가늠하지도 못했다. 마치 세상이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가는 것 같았다.

천천히 하진의 얼굴이 다가오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 부드럽고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숨 쉬는 것마저 잊은 백자안은 꼼짝없이 굳어선 초점이 맞지 않은 시야로 보이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반쯤 내리깐 눈꺼풀 사이로 고동색의 예쁜 눈동자가 백자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근두근. 이대로 머리에 피가 몰려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순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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