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09)화 (109/130)

#109

요한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흥분한 것처럼 목소리에도 열기가 섞여 들고 몸이 들썩거렸다.

“초고밀도 정신이 다차원 신체와 융합하는 과정에서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발생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 내가 계산한 바에 의하면, 일단… 다차원에 걸쳐 분포하던 신체 질량이 대략 초속 817만 킬로미터로 수축할 거고 수축이 시작되고 0.35 마이크로초 뒤에 톨만-오펜하이머-볼코프 한계를 초과하게 될 거야. 계산은 그래. 아무튼 그건 더 이상 다차원 생물종은 아니겠지.”

“자살행위야. 그런… 그런 건 아무도 못 버텨.”

“끽해야 블랙홀밖에 더 되겠어?”

히히힉, 하고 요한이 웃음인지 기침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소리를 터트렸다.

“더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수축하는 과정에서 대충 삼천 억 제타줄 정도의 에너지가 발생할 거고….”

거기서 요한은 말을 멈췄다.

아리안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양 플레어의 수억 배나 되는 그 힘을 가지고 재앙의 이름을 가진 자가 무엇을 할 것인가?

“넌… 네 목적은… 정말로 재앙을 불러오는 거야?”

“하핫, 설마!”

요한이 대번에 웃음을 터트리며 아리안의 질문을 부정했다.

“난 말야… 삶을 즐길 작정이야. 우주가 망하면 대체 그게 무슨 재미야? 응? 안 그래? 물론 높으신 분들 낯짝이야 꼭 한번 보고 싶지. 그 작자들한테 무슨 말을 건넬지는 아직도 고민 중이지만… 아주 인상 깊은 첫 인사말이어야 할 텐데. 왜냐면 날 이렇게 만든 작자들이잖아? 뇌리에 박혀서 아주 잊히지 않을… 그런 인사말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지.”

“널 이렇게 만들었다고?”

아리안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의미야? 누가 널 이렇게… 아니. 넌, 넌 대체 누구야? 언제 추방당했어? 널 쫓아낸 건 누구고? 네 신체를 죽인 건….”

“이봐아, 아리안.”

요한이 킬킬대면서 아리안의 말을 가로막았다.

“대단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말했잖아. 난 묵시록의 요한이라고….”

그가 제단에 앉은 채 허리를 펴며 양손을 바깥쪽으로 부드럽게 펴 보였다. 제단의 피가 엉겨 붙은 손바닥은 붉었다. 요한은 그 손바닥을 천천히 자신의 가슴팍에 얹었다.

“난 예언이 생겨난 순간 태어났어.”

그림자 아래로 그의 눈과 입이 느리게 곡선을 그렸다.

“그러니까… 너희가 날 만든 셈이지.”

그 순간 원숭이가 요란스레 심벌즈를 챙챙챙챙 울렸다. 왁자지껄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아리안과 요한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들이 춤추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며 다가와 제단을 둥글게 둘러쌌다. 난쟁이가 있는 힘껏 북을 두들겼다. 쿵, 쿵, 쿵, 쿵!

램프들이 흔들리면서 빛과 그림자가 벽과 천장을 파도처럼 휩쓸었다.

요한이 제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아리안을 향해 성큼성큼 가까워지며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내가 불쌍해? 당연히 불쌍하겠지. 널 알아. 자비로운 분이여. 날 동정하지? 불쌍하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지 않아? 포옹은? 키스는? 적어도 품에 숨긴 그 칼로 날 찌를 때 망설일 정도로는?”

아리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시에 아리안의 앞에 도달한 요한이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리안은 그에게서 나는 시체 냄새를 맡았다. 죽음과 부패의 냄새였다.

갑작스레 요한이 팔을 뻗어 아리안의 양 손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네 계획이 뭔지 알아.”

그가 히죽댔다.

“마녀의 검. 그걸로 내 신체를 찌를 생각이었겠지. 그 마녀가 칼을 주면서 뭐라 하던가? 네 권능을 되찾을 수 있다고? 그 계집애가 누굴 찌르라고 했어? 응? 솔직히 말해 봐, 아리안.”

아리안은 창백하게 굳은 채 그저 그가 말할 때마다 숨에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죽은 신체. 그렇다면 지금 요한은?

아리안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요한이 히힉, 히힉, 하고 숨넘어가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젠 몸 하나로는 못 버티게 되었거든. 히힛, 히, 히힉, 큭, 크큭, 크크크큭.”

고장 난 기계인형 같은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일제히 따라 웃었다.

아하하학, 깔깔깔, 호호호호, 으흐흣, 하하, 까르르륵!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아리안은 요한을 있는 힘껏 밀어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큰거리는 발목을 절뚝거리면서 사방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모두가 요한이었다. 그림자들은 전부 요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체, 본체가 분명 있을 거야. 이렇게 수많은 신체로 의식을 균일하게 나누는 건 불가능해. 더 이상 일왕자의 몸이 본체가 아니라면 다른 몸으로, 여기 어딘가에….’

사람들이 깔깔대면서 아리안을 향해 제각각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리안! 불쌍한 어린양!”

“기회는 한 번뿐일 텐데!”

“여기서 날려도 되겠어?”

“마녀가 정말로 누굴 찌르라고 했어?”

“나를?”

“아닐 텐데!”

메아리 속에서 요한이 아리안에게 다가와 덮쳐들 듯이 몸을 기울였다. 그림자가 떨어져 아리안을 덮었다.

“아리안.”

나일의 입술로 요한이 물었다.

“누굴 찌를 거야?”

아리안은 참지 못하고 검을 품에서 꺼냈다. 떨리는 두 손이 칼끝을 요한의 가슴팍에 겨눴다.

요한이 눈을 접어서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아리안은 깨달았다. 이중 그 무엇도 요한의 본체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없었다. 예언이 문자로 쓰인 순간 탄생한 실체 없는 허구의 재앙. 온 적 없는 재앙. 그리고 이제는 시체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허깨비. 애초에 육신을 타고나지 못했으니 그에게 있는 것은 감당 못 할 막대한 질량의 의식뿐. 수십 세기를 지나며 그 의식은 점차 거대해지고, 거대해진 의식을 감당할 신체를 찾아 분열하고, 분열하고, 또 분열한 끝에… 수많은 요한을 낳았다.

따라서 그의 정신은 어떤 단일 육체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이 칼로 그를 찌르는 것은 무의미했다. 파살리아까지 검을 쥐고 달려온 것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리안은 실패했다.

단검을 쥔 손이 힘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요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불쌍한 아리안….”

그가 아리안을 굽어보았다.

“사랑을 바친 연인에게 버림받고, 권능도 불멸도 잃고, 본인이 가여운 줄도 모르는 가여운 어린양. 그런 불쌍한 널 누가 챙기겠어?”

그의 얼굴에 가증스럽게도 갸륵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씨근거리고 눈동자에 기이한 열기가 일렁였다.

그가 깊은 숨을 토해 내듯이 개소리를 토해 내고야 말았다.

“…내가 보살피는 수밖에.”

그 목소리, 그리고 표정, 눈빛. 아리안의 등 뒤가 서늘해졌다. 마치 뱀 껍질이 뒷덜미를 스친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에 심장이 쑥 떨어졌다.

굳어진 표정을 눈치챘는지 요한이 히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 걱정 마. 네겐 별다르지도 않을 거야. 왜냐면… 어차피… 네가 사랑하던 몸일 테니까.”

칼릴의 육신을 뒤집어쓴 재앙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요한의 눈 속에서 일렁이는 기이한 열기가 이전 날 아리안의 몸에 짐승처럼 올라타던 그를 상기시켰다. 아리안은 필사적으로 구역질을 참았다.

요한이 마치 꿈에 젖은 것처럼 들뜬 목소리로 지껄여 댔다.

“어차피 길진 않을 거야. 기껏해야 오륙십 년 아니겠어? 물론 네가 하기에 따라 더 짧아질 수도, 더 길어질 수도 있겠지. 내가 이래 보여도 불사의 주술 하나는 자신 있거든. 가장 효과가 좋고, 부작용은 가장 적은 것으로….”

“필요 없어.”

아리안은 자신의 목소리가 그럴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난폭하게 들리기를 바라면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요한이 흥이 깨졌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뭐,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봐. 혹시 알아? 그 예쁜 얼굴이 쪼글거리기 시작하면 네 생각도 바뀔지.”

이제 사방이 고요했다. 요한이 이따금씩 무어라고 중얼중얼 혼잣말하는 소리만이 들렸다. 음식은 모두 식어 서늘했으며 난쟁이와 광대들마저 말이 없었다.

침묵 와중, 갑작스레 요한이 고개를 번쩍 반대편으로 돌렸다.

“아. 드디어. 두 번째 주인공이 등장하셨군.”

그 말에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그림자들 또한 일제히 제단 반대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백 개의 눈이 짐승의 입처럼 검게 뚫린 복도 끝을 응시했다.

난쟁이가 숨이 끊어져라 나팔을 불었다. 광대가 뚝 뚝 끊어지는 발음으로 외쳤다.

“도도도도르세세센, 대대대고고공, 저전하께서어, 드드드십니다다아아아!”

어둠에 잠긴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단 한 번의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의 기색도 없는 단호한 걸음 소리. 저벅, 저벅, 빠르게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서서히 칼릴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혼자였다. 그러나 움츠러든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아리안은 고정된 것처럼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거뭇한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왔다.

수백 개 요한의 얼굴이 서서히 바뀌었다. 수백 개의 눈알에 희열이 차올랐다. 하나같이 숨을 멈추고 칼릴을 따라 눈알을 굴렸다.

드디어 칼릴이 제단에서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멈췄다.

“내 아우.”

요한이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파살리아에 온 걸 환영해. 우리 막내를 위해 연회를 준비해 봤는데 어떠한가? 마음에 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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