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보석 박힌 금 촛대가 요한이 걷는 길을 따라 세워져 있었다. 촛불이 이리저리 일렁거리면서 그림자를 수십 개, 수백 개로 갈랐다.
마치 영화를 틀어 놓은 것처럼 영혼 없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높은 천장에 메아리쳤다.
본능적인 오한이 아리안을 덮쳤다. 아리안은 헐떡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림자 같은 사람들이 석실 양쪽으로 가득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마치 아리안과 요한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낄낄대고 박수를 치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요한이 석실 중앙에 드디어 멈춰 섰다.
짐승처럼 웅크린 거대한 제단이 아리안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전 요한이 국왕을 조종해 죄 없는 어린아이를 죽이게 했던 바로 그 제단이었다.
제단은 그때와 달리 온통 붉었다. 피였다. 그 표면에 흐르다 말라붙은 핏줄기가 선명했다.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을 흘러내리고 또다시 그 위를 흘러내린 끝에 긁어내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피딱지가 제단 전체를 껍질처럼 뒤덮고 있었다.
아리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제단에서 있었을 수많은 참혹한 희생 제의를 상상하자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솟구쳤다.
“우욱….”
아리안은 양손으로 입을 막아 간신히 구토를 억눌렀다.
그 희생제의 밤이 반복되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바로 조금 전 있었던 일인 양 생생하게 떠올랐다. 미친 국왕, 마법사들, 요한… 그러나 문을 열어젖히고 아리안을 구하러 왔던 칼릴만이 없었다.
요한이 아리안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리안은 딱딱한 돌바닥을 두 바퀴 구른 끝에야 멈췄다. 눈앞이 팽팽 돌았다. 짙은 피 냄새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손목 발목에 어마어마한 통증이 내달렸다. 바닥을 구르며 손목과 발목이 꺾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리안은 그대로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웅크린 아리안의 등 위로 깔깔거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아리안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요한의 발이 보였다. 시선을 더 올렸다. 석상처럼 우뚝 선 요한이 있었다. 그의 등 뒤에 걸린 램프가 발하는 역광 탓에 얼굴에 그림자가 깊게 져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아리안은 이전 요한이 희생제에서 죄 없는 소녀의 생명을 매개로 국왕의 몸을 빼앗았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의 저 신체를, 성을 채운 수많은 요한들의 신체를 얻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여기서 흘렀을까.
경멸과 혐오, 공포가 한데 얼룩져 얼굴에 드러나고 말았다.
“이번엔 어느 몸으로 옮겨 가려고?”
답지 않은 빈정거림에 요한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스윽 치켜 올라갔다. 그의 등 뒤에서 램프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요한의 발치로부터 솟구친 수십 가닥의 갈라진 그림자들이 석실 사방을 가득 메우고 넘실댔다. 그가 바닥에 웅크린 아리안을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림자가 따라서 아리안의 위를 덮었다.
아리안은 애써 두려움을 숨기고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요한은 그 적대적인 시선을 즐거운 듯이 맞받아쳤다.
“곧 대공이 여기로 올 거야. 그 차원 마수. 걸어 다니는 청색 초거성. 수천 개의 차원에 걸쳐 분포한 초고밀도 신체. 영원불멸한 강함과 아름다움을 갖춘 몸.”
아리안의 얼굴에서 쑥 핏기가 가셨다.
“이런 나약한 필멸의 신체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지.”
요한의 음산한 미소가 아리안의 핏기 없는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자, 이제 대답해 봐. 높은 자들 중 한때 가장 높았던 이여. 내가 이번엔 어느 몸으로 옮겨 갈까?”
아리안이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칼릴을 이곳까지 끌어들이려는 이유….
“말도 안 돼… 그건, 그런 건, 넌 버티지 못할 거야. 그런 고질량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해.”
“그야 충분한 준비가 없다면 그렇겠지.”
그 순간 아리안은 코를 찌르는 듯한 피비린내를 인식했다. 시선이 저절로 제단을 향했다. 제단의 돌벽 표면을 걸쭉한 무언가가 느릿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는 생피. 얼마 지나지 않은 희생제의 흔적이 이 석실 전체에 적나라했다.
아리안은 삼 년 전 그 지하 감옥에서 요한이 지껄여 대던 헛소리를 이 순간 떠올려 냈다.
“그런 차원 마수가, 고질량이, 다차원 신체… 아!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차원의 개수를 계산해 낼 수만 있다만, 산출량이, 그때의 에너지가… 그걸 감당할 매개만 있다면!”
이 석실, 피로 물든 제단, 그리고 아리안 자신.
준비가 무엇인지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아리안의 신체는 이제 더 이상 고차원 응집체도, 순물질도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계의 그 어떤 제물보다 더 강력한 산 제물이리라.
그리고 요한은 이전 희생제를 통해 국왕의, 일왕자의, 수많은 인간들의 몸을 차지했듯이 이번에는 칼릴의 몸을 자기 것으로 만들 작정이다. 아리안의 피를 매개 삼아서.
요한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며 손을 뻗어 아리안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했으나 눈빛만은 난해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나도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지.”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얼굴이 아리안을 향해 가까워졌다.
“하지만 계획이 바뀌었어.”
“계획이 바뀌었다고?”
아리안은 무심코 되물었다.
대답 대신, 요한은 아리안의 턱을 탁 떨쳐 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단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가 피로 끈덕거리는 제단에 양손을 짚고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눈에 흐르던 난해한 빛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평상시와 같은 비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꽤 고생했지. 막대한 양의 제물이 필요했거든. 너 하나를 대체하기 위해서….”
그 말이 암시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대규모 희생제.
“뭐어. 꽃 전쟁이나 시황제릉만큼의 막대한 규모는 못 되지만 말야. 나도 꽤 노력했다구. 나름대로 절차도 다 지켰고. 어디 보자. 순결할 것, 병들지 않을 것, 신체에 모자란 부분이 없을 것….”
그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즐거운 듯이 산 제물의 조건을 나열했다. 열 개 손가락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그가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아리안은 애써 눈에 힘을 주어 그를 쏘아보았다. 대규모 희생제. 즉 수많은 살인. 어째서 아리안을 산 제물로 쓰려는 계획을 바꾸었는지는 궁금하지도, 또 중요하지도 않았다.
“네 계획은 끝났어. 어차피 칼릴은 여기 안 올 테니까.”
“안 와도 상관없어.”
“뭐…?”
그 순간 급작스레 요한의 표정이 변했다. 양 눈썹 끝이 밑으로 축 떨어지고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아니지. 하핫, 안 온다 해도… 아니. 아냐. 그 자식은 올 거야. 와야만 해, 하지만 오지 않는 편이… 나는….”
그가 초조한 듯이 손톱을 와작와작 씹으며 발로 바닥을 탁, 탁, 탁, 빠르게 두드렸다. 손톱 끝이 으깨져 나가며 피가 손목을 타고 흘러 떨어졌다. 불안증을 앓는 환자처럼 그의 시선이 천장으로 갔다가 바닥으로, 다시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정적 끝, 조금 전의 병적인 모습이 거짓말처럼 요한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엄청나게 근사할 거야.”
“뭐라고?”
“1987A나 2015L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되지. 넌 역사의 산증인이 되는 거야.”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석실을 웅웅 울렸다.
“빅뱅 이래 이런 일이 또 있을 것 같아? 천만에! 이전도, 이번도, 그리고 다음 빅뱅까지도 다시 없어!”
그가 다시 삽시간에 표정을 바꿔 사르르 미소 지었다.
“그러니 나한테 고마워해.”
“대체 무슨 소릴….”
“새로운 은하의 탄생을 지켜볼 테니까. 뭐, 죽음일 수도 있고.”
요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덧붙이고는 피투성이 제단에 훌쩍 걸터앉았다.
“슬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흐음. 도르센 대공은 시간 개념이 없군. 이봐, 듣고 있어? 네 전 애인은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
그는 지루하다는 듯이 하품을 한 번 했다.
“나는 기다림에 강하거든. 그런데 이 마지막 기다림만은… 뭐어, 이제 기다리는 건 정말로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그의 얼굴에 광기와 이성이 점멸하는 전조등처럼 깜빡깜빡 번갈아 오갔다. 아리안은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요한의 등 뒤에 걸린 램프가 위태롭게 삐걱삐걱 흔들렸다.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빛 탓에 그의 얼굴 위쪽 절반이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칼릴의 몸으로 뭘 할 작정이야?”
“아. 뭘 하기보다는 일단은 뭘 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볼 작정이야.”
빙긋, 그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차원 마수들이란 게 그렇잖아? 우리 곁에 있는 미지의 존재들. 너희들이, 아차, 실수. 높으신 분들이 차원 마수들을 그토록이나 경계하는 것도 이해가 돼. 그래. 높으신 분들. 그분들 낯짝도 좀 하나하나 볼까 해. 내 생각엔 제법 유쾌한 만남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