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아리안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간신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궁정 마법사들이 다가와 그를 에워쌌다.
그들은 어둡고 긴 복도를 통과하여 파살리아 북쪽 성탑으로 향했다. 어둠에 잠긴 계단을 오랫동안 내려간 끝에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통로가 나타났다. 선두에 선 마법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아리안은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앞뒤 좌우에서 둘러싼 네 명의 궁정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두건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그들의 얼굴은커녕 나이나 성별조차 알 수 없었다.
긴 복도의 벽 너머로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심한 바람이 불 때마다 벽 틈에서 선득한 한기가 스며들어 왔다.
그는 긴 복도 끝, 어둑한 석실로 끌려갔다.
석실로 통하는 복도와 계단은 어두웠고 축축한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벽에 드문드문 걸린 몇 개의 램프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고 그 그림자는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불길한 핏빛으로 칠해진 석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법사 두 명이 그 석문을 밀어 열었다. 그그그그극, 돌이 바닥에 긁히는 요란한 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검은 입처럼 뻥 뚫린 문 안쪽으로부터 으스스한 안개가 기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신관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 마법사가 그렇게 말했다. 나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는군.”
그가 대공을 힐긋 쳐다보았다.
대공은 팔짱을 끼고 묵묵한 표정이었다. 그는 나일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은 석실 안의 어둠 속을 화살처럼 응시할 뿐이었다.
아리안은 어쩔 줄 모르고 잠시 뒤를 돌아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이 차분한 눈으로 아리안을 마주 보았다.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아리안은 어쩔 수 없이 석실 안을 향해 한 걸음 옮겨 놓았다.
대공은 한 발짝 한 발짝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리안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이 석문을 다시 닫았다.
문이 느리게 쿠웅, 닫히는 순간, 나일이 피식 웃으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대공에게 가까워졌다. 대공이 눈을 스윽 좁히며 그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대공의 바로 앞에 멈춰 선 나일이 팔꿈치를 대공의 어깨에 걸치며 그를 향해 머리를 기울였다.
“그거 기억나, 아우?”
나일이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대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석상처럼 문 앞에 도열한 네 마법사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아무 반응도 없었다.
“우리가 어릴 적에, 네가 아주 근사한 병정 인형 세트를 가지고 있었던 거 말이야.”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것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나일이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근사한 거였지. 당시 왕비가… 아차. 이젠 그렇게도 말하면 안 되는군. 네 생모. 그 여자가 네게 선물했던 거라고 기억해. 모든 병정들이 상아로 장식된 칼을 차고 있었고 유리 말을 탄 기사도 있었지. 퍽 정교한 거였는데….”
그가 나불나불 지껄여 댔다. 마치 그 장난감 병정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 양 상세한 묘사였다.
“내가 그걸 달라고 했는데 너는 끝까지 안 줬거든… 어린 맘에 그게 퍽 서운했었어.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땐 진지했지. 왜, 어린애들은 흔히 그러잖아. 응? 동생. 설마 아직까지 서운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이대로라면 혼자 끊임없이 지껄일 기세였기에 대공은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그땐 저도 어렸었나 보군요. 지금이라면 형님께 망설임 없이 드렸을 텐데요.”
“그래?”
나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 눈에는 별로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
그가 대공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는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한참을 킬킬거렸다. 간신히 웃음을 멈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잘 알아 둬, 동생. 도르센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파살리아에서 아랫사람의 미덕은 양보라구.”
대공이 고개를 돌려 나일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일왕자의 얼굴에는 탐욕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대공은 그 오래된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기억나지도 않는 장난감 병정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뻔한 만큼 대공의 관심도 아니었다. 나일의 다음 말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북쪽과 서북쪽 통로 밖에 네 병사들이 있는 거 알아. 뭐. 그걸 내가 봤다는 건 아니고, 뻔한 거잖아. 당연히 그렇겠지. 여기서 사람 빼돌릴 만한 길이 거기밖에 더 있나.”
대공의 미간이 희미하게 좁아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나일의 눈이 교활하게 번득였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나는 신관을 빼돌릴 맘이 없거든. 어때, 동생. 아직도 그 병정 인형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 안 나?”
그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번엔 나도 마지막까지 참 아까웠어. 도르센 촌구석 출신치고는 제법 미인이었지.”
그러면서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우린 형제잖아? 당분간 네 침대를 데울 사람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하라구. 모드론의 쌍둥이를 빌려줄 테니까.”
그 말을 남긴 그는 석실 앞에 선 대공의 뒷모습을 비웃으며 떠나갔다.
***
석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한기가 그를 내리눌렀다. 아리안의 호흡이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불길한 냄새가 났다.
그의 등 뒤에서 마법사들이 석실의 문을 느리게 닫았다. 쿵. 조금의 틈도 없이 문이 맞물리며 삽시간에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길은 정면의 어둠뿐이었다.
아리안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앞으로 나아갔다. 끝이 없는 것 같은 긴 통로 끝, 석실이 나타났다.
그 석실은 어둑하게 밝혀져 있었다. 아른거리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아리안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맞은편 벽 앞에 커다란 의자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 노쇠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아리안은 그것이 국왕임을 알아차렸다. 그 의자에서 몇 걸음 떨어진 아래쪽에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세 명의 마법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국왕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로 오거라, 신관이여.”
아리안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더. 더 가까이. 이쪽으로.”
노인이 아리안에게 연신 손을 까닥였다.
아리안은 간신히 그가 앉은 옥좌 바로 아래까지 다가가 비틀거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국왕의 겨우살이 가지처럼 가늘고 바짝 말라비틀어진 회색 손가락이 아리안의 어깨에 얹혔다. 그것에서는 아무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국왕이 그 손에 힘을 주어 아리안의 몸을 살짝 밀었다. 아리안은 순순히 그 힘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석실 중앙에 거대한 검은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의 양옆에는 아리안의 허리 정도 높이의 메마른 우물 두 개가 있었고, 그 사이에 놓인 램프에서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비쳤다.
방은 어두웠으나 아리안의 시력은 그 제단 위에 놓인 희멀건 몸뚱어리를 알아차리기에 충분했다.
희게 반들거리는 덩어리가 제단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것은 소녀였다. 그녀는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주 느리게 그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어서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 희생제가 무엇을 위한 것이든 간에 피를 동반하리라는 예고였다.
아리안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다른 희생 제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자신이 빠져나가면 희생제는 취소되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네가 신관이구나. 과연 첫째 왕자의 말대로 젊기도 하지….”
아리안의 희고 반들거리는 볼과 목덜미를 핥듯이 응시하던 국왕이 기이하게 뒤틀린 표정으로 웃으면서 아리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이토록 젊고… 건강한 신관이라니….”
국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아리안의 어깨를 잡은 손을 조금씩 조금씩 목덜미 쪽으로 미끄러트렸다.
아리안은 침착하려고 애썼다. 어차피 이곳 차원의 조잡한 주술이 그에게 해를 끼치기는 쉽지 않다. 별것 아닐 것이다. 닛사도 그랬고 대공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괜찮다. 조금만 견디면 모든 것이 끝나고 대공이 다시 그를 데리러 올 것이다. 그게 약속이었다.
국왕이 한쪽 손을 힘없이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마법사여. 어서 준비한 것을….”
그 명령에 대답한 것은 옥좌 아래 도열한 마법사들이 아니었다. 대답은 옥좌 뒤편에서 들려왔다.
“예, 폐하.”
아리안은 그때서야 옥좌 뒤편으로 검은 입처럼 뻥 뚫린 어두운 통로를 발견했다. 그것은 빛 한 점 없는 해구 또는 죽은 자의 동공을 닮았다. 거기서부터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느릿느릿 걸어와 옥좌 곁에 완전히 멈춰 섰다.
궁정 마법사.
그가 한 손을 내려 옥좌의 등받이에 짚었다. 마치 자신이 왕인 듯한 오만한 동작이었으나 국왕은 마치 보지도 못한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마법사여. 어서 준비한 것을….”
국왕이 다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