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40)화 (40/130)

#40

희생제를 하겠다는 국왕의 개소리는 진담이었다.

파살리아 사람들은 앞에서는 침묵을 지켰으나 뒤에서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국왕이 노망이 났다는 소문과 함께 태양 없는 낮도 막바지를 향해 치달았다.

대공은 어두운 주랑 한가운데에서 두 명의 궁정 마법사와 마주쳤다.

한 명은 여자였고 다른 한 명은 남자였다. 여 마법사는 육십 살 정도 된 것 같았고 그녀의 도제로 보이는 남 마법사는 그보다 젊었다. 둘 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그 음침한 얼굴만은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섯 명의 소년 소녀를 마치 염소나 돼지를 몰듯이 줄줄이 이끌고 있었다.

여자가 대공을 향해 고개를 깊숙하게 숙여 보였다.

“대공 전하.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대공의 시선이 그녀를 스쳐 지나가 두 마법사의 뒤에 서 있는 아이들에 닿았다. 그것을 눈치챈 여자가 자랑스레 지껄였다.

“산 제물의 후보들입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한번 보시겠습니까?”

대공이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제 마법사가 아이들을 향해 손짓해 마치 상품을 전시하듯 대공 앞에 그들을 주르르 세웠다.

대공의 곁에 서 있던 오스발이 대놓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표정 관리를 못 하는 못난 부하와 달리 대공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그는 다섯 명의 소년 소녀를 훑어보았다. 모두 어렸다. 열 살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여 마법사가 으스대는 투로 입을 열었다.

“코르모 두스의 희생제 비의에 따라 고르고 고른 산 제물입니다. 터럭이 없거나 옅고 팔꿈치에서 새끼손가락 끝까지의 길이가 발의 길이의 정확히 두 배일 것. 그리고 피부의 색깔은 아주 희거나 아주 검어야 하며 위아래 입술의 두께가 같아야 합니다. 모두 태양이 떠 있지 않은 정오에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하나같이 하품 나는 이야기였다.

“전부 어리군요.”

오스발이 대신 대답했다. 그의 짙은 눈썹 사이는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물론이죠.”

궁정 마법사가 히죽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코르모 두스의 희생제 비의에 따르면 산 제물은 결코 열세 살은 넘어서는 안 됩니다. 예외가 있기도 하지만 드문 경우죠.”

“예외라….”

대공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아이들은 모두 겁에 질린 것 같았으나 패닉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두 ‘산 제물’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를 정도로 어리거나 아니면 아편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가장 앞에 선 두 명의 눈은 흐리멍덩하고 흰자위의 면적이 극도로 적어 번들거리는 검은자위만 보였다.

“어떻습니까? 일왕자 전하께서는 매우 흡족해하셨는데… 대공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렇게 말하는 마법사의 뒤에서 그녀의 도제가 대공을 평가하듯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대공은 무관심한 눈으로 산 제물 후보들을 훑어보았다.

애초에 그는 희생제에 관심이 없었다. 일왕자의 장난질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 짓거리에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노망난 늙은이의 여흥에 불과했다. 궁정 마법사들이 그 노인의 귀에 무슨 개소리를 흘려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보다 관심을 가진 것은 차라리 이 궁정 마법사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궁정 마법사 특유의 기이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목표를 가진 공동체로서의 동질성이라기보다는 마치 여러 개의 제각각 움직이는 머리를 가진 마수 또는 단 한 개의 뇌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거대한 군집 생물을 닮았다.

대공은 마법사들의 노쇠하고 음침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마법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공 전하?”

궁정 마법사가 초조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대공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희생 제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형님께서 어련히 고르셨겠지.”

그 대답에 그녀가 꾸며 낸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대공이 그녀의 깊게 숙인 정수리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물었다.

“희생제는 언제인가?”

“저희 궁정 마법사들이 달과 별의 위치를 읽어 날짜를 계산하여 희생제에 적합한 시기를 골라내었습니다. 이는 모두 철저하게….”

“그래서 그게 언제지? 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아니라면 결론부터 말해라.”

마법사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국왕 폐하께서 가장 빠른 날짜를 원하셨기에, 희생제는 지금으로부터 닷새 뒤에 치러질 것입니다.”

닷새 뒤. 그것은 모두의 예상보다 이른 날짜였다. 그 사실을 궁정 마법사 또한 모르지는 않았다. 그녀가 약간 오기에 찬 얼굴로 말했다.

“희생제의 날에 신관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 말에 대공이 그녀를 힐끗 내려보았다.

마법사는 감히 그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대공의 뒤에 서 있던 오스발이 되레 발끈하여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다 댔다. 대공이 한 손을 들어 올려 그런 오스발을 막았다.

“만일 당일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설마요.”

마법사가 대공의 질문에 히죽거렸다.

“닷새밖에 남지 않았는데 설마 그사이에 대공 전하의 보호 하에 있는 신관의 정결함에 문제라도 발생하겠습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희생제는 치러질 겁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눈동자만 굴려 어린아이들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주름진 입가가 찢어질 듯 길어지며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 걱정하실 것 없사옵니다, 대공 전하. 부디 저희 궁정 마법사들을 믿고 맡겨 주시옵소서.”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들에게서 모든 흥미를 잃은 것처럼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인 뒤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어 놓았다.

그 걸음을 붙잡은 것은 궁정 마법사의 한마디였다.

“그러고 보니 국왕 폐하께서 대공 전하께 저희가 조제한 정화의 비약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대공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정화의 비약이라는 개짓거리가 대공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오스발도 똑똑히 보았다. 오스발의 손이 검 자루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선득했다.

마법사가 히죽 웃었다. 그녀의 노쇠한 얼굴 위에서 눈동자만이 번쩍거렸다.

“그것은 저희 궁정 마법사들의 비전이온데… 효과는 어떠하신지요?”

“글쎄.”

대공이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잘 모르겠더군.”

그 대답에 마법사의 눈이 더욱 기괴하게 번쩍였다. 그녀가 그 눈을 가리려는 듯이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아, 역시. 정화의 묘약이 효과를 나타내지 않았다니 이 어찌나 부족함 없는 신체이신지. 건강하고, 젊고, 튼튼하지….”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마지막 말은 지나치게 낮고 작아서 오로지 대공만이 그것을 들었다.

대공은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회랑을 빠져나오자마자 오스발이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의 어깨가 분을 참지 못하고 들썩거렸다. 대공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검 손잡이를 몇 번이나 우악스럽게 쥐었다 풀기를 반복하던 오스발이 고개를 돌려 대공을 바라보았다.

“전 정말 저런 것들이 딱 질색입니다.”

그가 혐오를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공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런 어린애들을 데리고 희생제니 뭐니….”

오스발이 거칠게 중얼거렸다.

도르센에서 노동력은 귀중하다. 젊고 건강한 소년 소녀는 특히 가장 귀한 인력이었다. 이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살인이 오스발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뻔한 것이었다.

“참아, 오스발.”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저 짓거리도 오래가진 않을 테니까.”

망령 든 노인네의 말년 발악이 얼마나 가겠는가. 어차피 국왕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에 비해 아르바는 젊고 건강하다. 세대교체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단지 대공은 마법사가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

희생제의 밤, 나일이 궁정 마법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아리안은 나일을 보자마자 작게 히익 하고 비명을 삼켰다. 미리 언질을 듣기는 했으나 그 충격적이었던 밤의 변태를 보고 태연한 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공이 변함없이 차분한 표정으로 곁에 서 있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비명을 참지 못했으리라.

나일의 시선이 대공의 어깨 너머 아리안을 훑었다. 뱀 같은 눈이었다.

아리안은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그 시선을 피해 최대한 몸을 웅크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작아지려고 했다.

다행히 그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쉽다는 듯이 혀로 입술을 핥은 그가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우애 깊은 형제처럼 양팔을 벌리고 대공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툭툭 쳤다.

“어때, 아우.”

그가 물었다.

“아직도 생각 안 바뀌었어?”

그의 뒤에는 국왕의 마법사들이 서 있었지만 나일은 마치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그들을 물릴 수 있다는 듯이 굴었다.

대공은 낮게 피식 웃었다. 그 웃음으로 대답을 알아들은 나일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 발자국 물러섰다.

“서두르자구. 국왕 폐하께서 기다리다 목이 빠지실 지경이니.”

빈정거리는 투로 말한 그가 궁정 마법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마법사들이 아리안을 향해 정밀한 기계처럼 동일한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 보였다.

“이쪽으로. 신관이여.”

아리안이 불안한 눈빛으로 대공의 무표정한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잠시 마주쳤다. 대공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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