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32)화 (32/130)

#32

대공이 별 시답잖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오스발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닛사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오스발이 닛사 쪽으로 슬쩍 머리를 기울였다.

“아니. 안 그렇습니까? 지루한 파살리아 생활에 대공 전하께 이런 낙이라도 있어야지요.”

대공은 그 말을 들었지만 못 들은 체했다.

오스발이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닛사가 그를 향해 못마땅한 눈총을 보냈다.

곧 식탁 위의 화제가 바뀌었다. 오스발이 참, 하며 말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부르조가 보낸 서신은 읽어 보셨습니까?”

“읽어 봤다.”

“그 겁쟁이 노인이 아주 공포에 질렸더라고요. 뭐라더라….”

“그 새로운 마수의 공포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그것들은 이전까지 우리가 보아 왔던 마수들과는 달랐습니다. 이피립투스, 오코렉스, 날개 달린 아라투아… 그런 마수들이야 우리 도르센 사람들에겐 곳간의 새앙쥐나 방앗간의 참새만큼이나 익숙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군대가 불을 뿜는 드래곤과 와이번들을 학살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던 삼 년 전의 전쟁을 어찌 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상대해 온 우리 역전의 용사들마저 그 마수 앞에서는 겁에 질려 그저 속수무책으로….”

“그만.”

편지를 낭송하기 시작한 닛사를 대공이 멈췄다.

닛사가 점잖은 척 입을 다물었다. 오스발이 낄낄거렸다.

아리안은 얇게 썰린 사슴 고기를 먹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퍽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대공 전하께서 안 계시니 호들갑을 떠는 거죠. 그 노인네가 대공 전하를 신처럼 믿고 모시는 거 아시잖습니까?”

“빨리 돌아오라는 항의겠죠.”

오스발과 닛사가 번갈아 말했고, 드물게도 대공이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세누아의 네리우스 경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 그 공포스러운 마수가 진짜인지 아니면 노인네의 호들갑인지 확인하기엔 그녀만 한….”

대공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뒤이어 조심스러운 몸종의 목소리가 불청객의 방문을 알려 왔다.

“대공 전하. 궁정백이 오셨습니다. 국왕 폐하의 전언을 가지고요.”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일시에 얼어붙었다.

닛사와 오스발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고, 바로 일 초 후 다시 대공을 바라보았다. 두 가신의 시선을 받은 대공이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큰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아리안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곧 그는 식탁 앞을 떠나갔다. 오스발이 황급히 일어나 대공을 따라 나갔다.

마지막으로 닛사가 그들을 따라 식당을 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홀로 남은 아리안은 여전히 식탁 앞에 앉아 그들이 나간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을 먹던 손은 허공에 멈춘 채였다.

닛사가 그에게 다가갔다.

“전하께서 이미 네게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다만, 며칠 전 일왕자가 다녀갔다.”

그 말에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가 숨을 꼴깍꼴깍 삼키며 닛사를 올려다보았다.

닛사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널 어찌해 보려는 생각을 아직 포기 못 한 모양이지. 병사들을 몇 명 남겨 둘 테니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거라.”

그 뒤에 그녀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네가 대공 전하께 기쁨이 되는 모양이니 그건 반가운 일이다. 식사는 마저 하거라. 하인들에게 이야기를 해 두마.”

닛사는 그 말을 남기고 식당을 떠나갔다.

아리안은 그들이 떠나간 자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대공이 덜어 준 파이 조각을 한입 맛보았다. 잼과 말린 과실을 으깨 넣은 파이는 달콤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져 곧 완전히 달아올랐다.

식당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

궁정백을 따라 도착한 국왕의 알현실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대공은 파살리아 궁정 귀족들 몇몇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면 같이 속내를 읽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미소, 또는 무표정, 겉이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얼굴들.

그리고 그 얼굴들 끝에서 대공은 일왕자 나일을 발견했다. 그는 이전과 달리 어두운 무채색 옷을 입고 있어서 대공은 그를 몇 초쯤 뒤에야 알아보았다.

대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알현실의 모퉁이마다 불길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곳에는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상복같이 어두운 옷을 입었고 모두가 말이 없었다.

이 알현실 전체는 거대한 장례식장 같았다.

벽에 걸린 램프가 커다랗게 너울거릴 때마다 그림자가 이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대공은 그 위를 저벅저벅 밟고 지나가 두 번째 상석, 나일의 맞은편 자리로 가서 섰다.

나일이 대공을 향해 히죽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공은 그 미소를 향해 짐짓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나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 알현실 안쪽에 걸린 태피스트리 반대편에서 스윽, 스윽, 하고 마치 뱀이 기는 듯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에는 인간의 걸음 소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음산한 기색이 있었다.

알현실의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태피스트리 끝, 기둥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 사이에서 화려한 신발이 나타났다. 그 신발이 무거운 몸을 이끌었다. 스으윽, 비단 밑창이 돌바닥에 스치는 소리에 무거운 모피 망토가 바닥에 스륵, 스륵, 끌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스륵, 텅, 스륵, 텅. 그 사이사이 무거운 왕홀이 바닥을 찍는 소리가 섞였다.

무거운 모피와 비단에 짓눌릴 듯 바삭하게 마른 국왕이 느릿느릿 걸어 옥좌로 향했다. 그 등 뒤로 궁정 마법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마침내 옥좌에 털썩 쓰러지듯 앉은 국왕이 알현실을 둘러보았다.

“짐이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그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열기가 섞여 있었다.

“짐이 계시를 받아서이다.”

그 뜬금없는 개소리에도 대공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오스발이 아침 식사 자리에서 언급한 이야기였다.

오스발의 말대로 계시니 예언이니 하는 것은 서른일곱 해 전에 오라스테스의 전쟁과 함께 사라지고 이제는 없었다. 대공 또한 종종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멍청이들을 만나 왔다. 대부분은 사기꾼이었고 나머지는 정신병자였다.

하지만 그 소리를 국왕이 지껄인다면 상황은 달랐다.

비슷한 생각을 다른 사람들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소리 없이 시선이 서로를 힐끔거렸다. 숨 막히는 눈치 싸움이 이어졌다.

“어떤 계시이옵니까?”

결국 궁정백이 가장 먼저 운을 뗐다.

“불길한 계시였다.”

국왕이 왕홀을 잡지 않은 손으로 보석 팔걸이를 와락 움켜쥐었다. 주름진 손등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마수 군단이 밀려들어 우리 왕국을 불태우고… 짐의 백성들을 도륙하여… 파살리아의 깃발이 피로 젖고 찢기는….”

국왕이 홀린 듯이 넋 나간 음성으로 중얼중얼 지껄여 댔다. 그 목소리는 가늘고 낮아서 중간중간은 거의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이따금씩 그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우산 모양으로 높게 솟은 알현실 천장에 찢어지는 듯한 메아리가 맴돌았다.

‘새로운 마수 군단이라….’

대공의 머릿속에 도르센에서 보내온 부르조의 서신이 떠올랐다.

‘그냥 끼워 맞췄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냉정하게 생각을 이어 나갔다.

‘도르센에 첩자가 아예 없을 리는 없어. 궁정 마법사들의 눈이 그곳에까지 미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고.’

아무튼 저 계시라는 것은 너무도 허무맹랑한 것이라서 대공은 이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이 바보 같게만 느껴졌다. 이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자가 왕자와 가신들을 모아 놓고 지껄인다는 소리가 고작 망령 난 늙은이의 꿈이란 말인가?

대공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국왕의 개소리는 절정에 달했다.

“우리 왕국에 드리워진 이 불길한 암운을 막기 위해서는… 희생제가 필요하다!”

대공은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희생제라니. 그 미개한 인신 공양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것은 백 년도 더 전이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그림자 마수와의 전쟁 탓에 왕국은 고질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려 왔으므로 희생제가 금지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비록 아르바가 그에게 국왕의 다양한 미친 짓에 대해 귀띔하기는 했으나 이것은 또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개소리였다.

“희생제라 하심은….”

궁정백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국왕이 아니라 그의 뒤에 서 있던 마법사였다. 그가 옥좌 곁에 무릎을 꿇고 앉자, 국왕이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저희 궁정 마법사들은 고대의 희생 제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짐의 마법사들은 고대의 희생 제의에 잘 알고 있노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희생제는 비전서에 적힌 대로, 고대의 절차를 따라 엄격하고 절도 있게 진행될 것입니다.”

“희생제는 비전서에 적힌 대로, 고대의 절차를 따라 진행될 것이니 경들은 걱정을 거두라.”

그것은 제법 기괴한 광경이었다. 마법사가 늙은 국왕의 귓가에 속삭이면, 국왕은 꼭두각시처럼 그것을 그대로 따라 지껄여 댔다. 그리고 궁정백이 마치 앵무새같이 “그렇군요!” “옳습니다!” “현명하십니다!”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중간중간 섞였다.

저질 희극도 이보다는 나으리라. 대공은 냉소를 숨기고서 이 우습지도 않은 군상극을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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