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아리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기어 나갔다.
하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낮은 의자에 앉히고 양말을 벗겨 발을 세숫대야에 담갔다. 그리고 발과 종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리안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화난 대공의 질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훌륭한 발 마사지가 시작된 것이다.
아리안의 당혹감이야 물론 하인만큼은 아니다.
하인은 아리안이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뒤부터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대공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가 가져온 것은 여성용 옷이었다. 일왕자는 남자에게 여자 옷을 입히고 여자에게 남장을 시켜 자기 시중을 들게 한다고 들었는데 이 엄격한 대공이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행히 곧 대공이 하인의 고뇌를 끝내 주었다. 그는 하인이 가져온 옷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옷을 다시 가져와라.”
그것은 어깨와 가슴팍이 트인 우윳빛 드레스와 작은 사파이어가 붙은 푸른색 허리띠였다. 부드러운 비단신도 함께였다.
대공은 이런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궁금해하며 손끝으로 그 옷을 집어 들어 보았다.
옷은 파살리아풍이었다. 소맷단이 길고 나풀거렸다. 이것의 출처가 어디든 간에 그의 소유물은 아니리라.
대공은 혀를 한 번 찬 뒤에 그것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간소한 것으로 가져와. 간소한 것으로.”
그는 일부러 두 번 반복해 말했다. 하인은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예.”
아리안은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발 마사지가 끝난 뒤에는 누군가 그의 얼굴과 목을 따스한 물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그다음에는 평소에 아리안이 입는 옷과 크게 다르지 않은 회색 옷을 가져와 입혀 주었다.
그 투박한 로브 속에 숨고서야 아리안은 간신히 마음을 놓았다.
대공이 그에게 다가왔다. 단단한 엄지가 꽉 주름 잡힌 미간을 눌렀다.
그제야 아리안은 화들짝 놀라 표정을 풀었다.
대공이 입을 열었다.
“식사나 하지.”
“저, 정말? 나하고?”
아리안이 그렇게 물었다가 스스로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 그의 발을 씻겨 준 하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양 부지런히 주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대공이 아리안에게서 몸을 돌렸다.
“식사는 식당에서 하겠다. 닛사와 오스발에게도 그렇게 전해라.”
하인이 예, 하고 대답한 뒤에 빠르게 침실을 떠나갔다.
닛사와 오스발은 식당에서 대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미심쩍은 얼굴이었는데 그 표정은 대공의 뒤로 아리안이 슬금슬금 따라 들어오자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대공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최고조를 찍었다.
숙면 덕분에 대공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피부는 매끄러웠고 표정은 편안했다. 그의 눈은 평상시에는 불면과 두통으로 인해 예민한 칼처럼 날카로웠으나 오늘은 한결 부드러운 푸른빛이었다.
남자의 전신에서는 폭발할 듯한 활력이 맴돌았다.
“…좋아 보이십니다.”
오스발이 먼저 떨떠름히 그렇게 말했다.
대공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곤 어디에 앉아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아리안에게 자신의 곁 빈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최근엔 항상 좋아 보이셨는데 오늘은 유달리 좋아 보이시네요.”
오스발이 굳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서 그가 아리안을 쳐다보았다.
아리안은 그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웠다.
대공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오스발의 말에 대답했다.
곧 하인이 들어와서 음식을 차려 놓기 시작했다. 늦은 아침이었으므로 음식은 제법 거창했다.
껍질을 발라낸 조개와 게살을 넣은 스튜, 버터를 발라 튀긴 민물송어, 향신료를 뿌린 납작한 밀빵, 양파와 순무를 곁들인 사슴 고기, 장미 열매 잼과 몇 가지 다른 향신료를 채워 넣은 파이 같은 것들이 은그릇에 담겨서 식탁 위에 놓였다. 음식들은 금방 만든 것이라 모두 따듯했고 손쉽게 먹을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잘려 있었다.
다른 하인이 식탁에 금 촛대를 올리고 초에 불을 붙였다.
대공의 정면 맞은편 벽에 큰 창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커튼과 태피스트리로 가려져 있었다. 좋은 계절이었다면 아침 햇살이 식당 전체를 환하게 비출 만한 크기의 창문이었다.
평소라면 식사는 제법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오스발이 나불나불 떠들어 대는 소리, 그를 타박하는 닛사의 새된 목소리에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식당을 울렸으리라. 파살리아의 정세나 코르키라의 전황에 이어 도르센의 사소하거나 조금 덜 사소한 소식들이 무작위적으로 식탁 위에 내던져졌을 것이다.
대공은 식탁의 침묵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기름진 소스를 끼얹어 오랫동안 부드럽게 쪄 낸 사슴 고기를 뒤적거리다가 아리안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리안은 흰 빵을 손으로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별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없었다.
대공은 그의 접시에 사슴 고기 한 토막을 얹어 주었다.
쨍! 오스발이 손에 쥐고 있던 식사용 칼이 접시 위에서 미끄러지는 소리가 식탁을 요란스레 갈랐다.
대공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오스발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공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리안이 사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썰고 있었다. 그것은 대공에게는 깨작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리안은 가난한 신전에서 생활한 것치고는 마르지 않았다. 대공은 그가 적절하게 살집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조금 더 키가 자라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저 나이쯤에 대공 자신은 어땠던가? 대공은 몇 년 전을 돌이키며 아리안의 접시로 이번에는 송어튀김의 가운데 토막을 옮겼다.
아리안이 멍하니 대공을 바라보았다. 닛사와 오스발도 그랬다.
“흠… 흠. 그러고 보니 오늘 새벽에 재밌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오스발이 헛기침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침묵이 간신히 깨졌다.
“국왕이 이상한 꿈을 꿨다는군요.”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고작 망령 난 늙은이의 개꿈 얘기냐?”
대공이 흥미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니요. 들어 보십시오. 그야 그 꿈 자체는 그냥 개꿈이겠지요. 한데 궁정 마법사들이 그걸 계시라고 지껄여 댔다지 않습니까?”
“계시라고?”
닛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오스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오라스테스의 전쟁 이후로 그런 게… 계시니 예언이니 하는 거 말입니다, 전부 없어졌다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국왕이야 궁정 마법사들이 하는 말이라면 나귀가 개를 낳았다 하더라도 믿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은 없습니다. 뭐. 국왕의 개짓거리가 또 시작될 전조라는 정도?”
대공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그는 오스발이 꺼낸 화제에 관심을 잃고 다시 아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리안은 가시를 모두 제거한 송어 튀김의 부드럽고 촉촉한 뱃살 부분을 뜯어 먹고 있었다. 입술에 버터가 묻어 번들거렸다.
대공은 이번에는 받침대 달린 높은 접시 위에서 파이 한 조각을 덜어 아리안에게 옮겨 주었다.
아리안이 송어 살을 우물거리다 말고 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닛사가 황급히 입을 열어 대공 대신 말했다.
“너는 성장기니 많이 먹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전하께 감사 인사를 올리거라.”
아리안이 여전히 멍한 얼굴로 대공을 향해 “고맙…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좋은 마음이 든 것은 아마 간밤의 드문 숙면 때문이리라. 지난밤의 수면은 수면제를 써서 억지로 잠드는 기절과도 같은 잠과는 전혀 달랐다. 수면제에 뒤따르는 두통도 없었고, 우스운 말이지만 좋은 꿈을 꾼 것도 같았다. 어젯밤 아리안이 그에게 잎사귀를 물려 주며 그런 말을 하긴 했었지. 그러니 이것은 훌륭한 약사나 의사에게 내리는 상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대공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안의 접시에 사슴 고기를 더 옮겼다.
닛사와 오스발이 동시에 시선을 교환했다.
대공이 누군가를 총애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스물세 살의 건장한 남자였고 딱 그에 어울리는 만큼만 행동했다. 젊은 대공의 연애사는 오락이 드문 도르센에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고, 대공은 마치 백성들의 관심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도 되는 양 행동했으므로, 자신의 연애 상대가 그것을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막지 않았다.
이따금씩 닛사는 대공의 연애가 마치 의무감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 의무적인 관계들과 이것은 달랐다.
뭐니 뭐니 해도 이번의 상대는 그냥 보통 소년이 아니었다.
아리안은 대공의 저주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잘된 일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닛사가 그 의문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오스발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어떻습니까.”
그 말에 닛사를 포함해 대공과 아리안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보기 좋잖아요.”
그 말에 대공이 한쪽 눈썹을 쓱 치켜올렸다. 오스발이 시시덕댔다.
“아니. 대공 전하하고 신관님 말입니다.”
신관님? 그 말에 아리안이 눈을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