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뉴페리시니 (10)
* * *
“피네는 저기, 북서 쪽에 엘프들이 사는 도시 있지? 그 부근의 시골 소녀였어.”
“저는 북동 쪽이었는데, 어? 북서쪽은…. 그럼 피네는 엘프예요?”
“어…. 응, 맞아. 순수혈통인 엘프이기는 한데…. 사연이 좀 있어서 엘프 중에서도 순혈주의자랑은 그다지 친하지는 못한 아이지.”
“근데, 엘프라기에는 피부색이 구릿빛이던데…. 엘프는 하얗지 않아요?”
질의 궁금증은 있을 만한 것이었어요.
그야, 엘프는 모험가가 아니라면 보통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걸요.
게다가 대중에게 글자로 알려진 엘프는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구릿빛의 엘프가 있다는 것을 아는 부류는 모험가밖에 없을 거예요.
“말했잖아? 순혈주의자와는 그다지 친하지 못하다고. 원래는 하얀 피부의 엘프도, 구릿빛 피부의 엘프도 같이 살았었어. 이제는 아니지만 말이야.”
“나중에 제대로 알아봐야겠네요.”
“뭐어~ 어쨌든?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감옥에서 피네를 지켜주다가 그런 거야. 덕분에 피네가 마음고생을 좀 했지. 잡혀 오기 전에는 이렇게 아프지도, 어두운 아이도 아니었는데.”
“잡혀 오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요?”
“당연하지? 지금 모습이야 이렇지만…. 나도 일단은 모험가였는걸. 피네의 마을을 지켜내는 역할로 장기계약을 했었던. 그때가 아마~”
* * *
북서부의 눈이 내리는 어느 마을.
질이 살고 있던 곳이 1년 중 가을이 제일 긴 곳이라면, 이곳은 1년 내내 눈만 내려오는 세상이 하얗게만 보이는 곳이었어요.
이런 백지와도 비슷한 세상과 대비되는 사람…. 아니, 엘프가 있었어요.
구릿빛의 피부에 파란 눈, 약간 위로 치솟은 귀까지.
전형적인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었죠.
피부가 어둡고, 온몸에 빛나는 푸른 문신을 하고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요.
그럼에도 이들의 생활은 질의 마을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어요.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정령계와의 경계를 허무는 눈을 가지고 있어 그들과 어울리고 다닌다는 것이 전부겠죠.
그러니까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온화하면서도 장난스럽고, 잘 웃으며, 때로는 순수한.
그런 정령의 모습을 닮아있었어요.
덕분에 정령들에게서 힘을 빌려 삶이 약간 편해졌다는 것까지.
하지만 이런 엘프들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었어요.
몇 달 전에 일어난 대재앙으로 인해 마기노가 침입해 올 것도 그렇지만, 그 이후에 생겨난 노예상 슬리브스터의 습격 소문이었죠.
이런 이유에서 좀처럼 마을에 외지인을 들이지 않는 폐쇄적인 엘프들이 길드에 의뢰해 다른 종족을 마을에 들이기 시작한 것이었어요.
그 와중에도 자연 친화적인 종족만 골라서 뽑았는지, 계약한 종족들은 거의 대다수가 수인이었어요.
맞아요.
그중에는 드래고니안이었던 케이넨도 끼어있었던 거예요.
“이야~ 픽클 울프에 스달 베오, 같은 드래고니안에 드라이어드, 응? 저건 뭐야? 에너지체인 솔티유까지 있네! 그렇게 당하는 게 무서운 건가?”
단단해 보이는 근육에 균형 잡힌 몸으로 민첩함을 자랑하는 늑대형 수인 픽클 울프, 엄청난 덩치와 힘, 맷집까지 자랑하는 곰 수인 스달 베오, 숲에서 방어 전술을 펼치기에는 최적인 드라이어드까지.
여기에 케이넨이 말한 솔티유 종족은 순수한 에너지가 모여들어 탄생한 종족이라 파괴력만으로 따지자면 따라올 종족이 없었죠.
이렇게 계약된 모험가들만 어림잡아 40명.
질의 마을 사람들을 피난하도록 유도한 초짜 모험가들과는 다르게 이 정도 전력이라면 슬리브스터는 물론, 마기노가 오더라도 무사할 것만 같은 신뢰감이 들 정도예요.
그런데 케이넨이 주변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한 소녀가 망설이는 발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어요.
피네네요.
“응? 뭐야, 이런 꼬마 엘프가 있었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언니 꼬리 만져봐도 돼요?”
“뭐야? 처음 만나자마자 겁도 없이? 음~ 그렇지만 안될 건 없지. 만져봐!”
수많은 모험가가 추가적인 설명을 듣기 위해 한 곳에 모여 떠들썩한 와중에도 겁 없이 다가온 걸 보면 피네는 꽤 담력이 있는 편이네요.
케이넨이 잠깐 불편한 표정을 짓는데도 겁먹지 않고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꼬리에 달라붙어 신기하다는 듯이 만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너무 격렬하게 만진 탓인지, 케이넨은 꼬리를 휘감아 피네의 양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아버렸어요.
“그렇게 만지면 간지럽잖아, 적당히 만져야지!”
“미, 미안해요. 빛나고 매끄러워서 기분 좋았는데….”
“응? 아하핫! 더 만지는 걸 허락해주지. 내가 피부관리를 좀 잘해서 비늘까지 윤기가 넘치는 건 사실이니까!”
이유를 모르겠지만, 꼬리로 묶은 손을 풀어주며 자랑하기 시작한 케이넨이에요.
커다랗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꼬리를 만져오는 피네가 퍽 귀여워 보였던 것이겠죠.
이것이 케이넨과 피네의 첫 만남.
두 번째 만남부터는 계속해서 먼저 다가오는 피네 덕분에 케이넨이 지칠 정도였어요.
“언니! 저랑 같이 놀아요!”
“내가 뭐 때문에 여기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전부 다 네 마을을 지켜주기 위해서…!”
“괜찮으니 다녀오세요.”
어느 날은 자신과 놀아달라는 피네를 말리기 위해서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하려고 했지만, 정작 마을 주민이었던 엘프 중 하나가 괜찮다고 말하는 바람에 무의미한 저항이 되었어요.
이뿐이었을까요?
그다음 날도.
“언니, 이번에는 좋은 곳을 알아냈어요! 따라와 봐요!”
“말했지만, 피네…. 아, 이봐! 잡아당기지 마! 피네!!”
억지로 이끌려 산 높은 곳까지 자신을 지켜달라고 말하고는 억지로 마을보다 몇 배는 더 높은 산까지 이끌었어요.
케이넨의 어떤 점이 피네를 이렇게 좋아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다음 날도.
“이거 선물이에요! 써 줄 거죠? 언니는 착하고 이쁘니까!”
“아~ 이러면 또 내가 거절 못 하는 거 어떻게 알고? 근데 뿔 때문에 쓸 수 있으려나 몰라.”
“제가 씌워줄게요! 앉아보세요!”
화관을 만들어서 가져온 피네가 강아지처럼 보이는 탓에 케이넨은 쭈그려 앉았어요.
사실 피네가 칭찬하지 않았어도 케이넨은 지는 척을 해주며 적당히 어울려주면서 화관을 머리에 직접 썼겠죠.
날이 가면 갈수록 둘의 관계는 깊어져 갔어요.
물론 그다음 날도.
“언니, 오늘은 집에 놀러 와서 자고 가지 않을래요?!”
“자고 가라고? 하지만 너희 부모님이 허락할지….”
“그럴 줄 알고 미리 허락까지 받아왔어요!”
피네는 상당히 치밀했네요.
그런데 항상 이렇게 케이넨하고만 놀아도 되는 걸까요?
피네도 자기 또래의 친구들이 있을 텐데요.
케이넨도 이제는 피네와 잘 어울려주지만, 이 부분이 걱정되는 듯했어요.
이러다가 또래에게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이미 당하고 있는 것인지 말이에요.
“피네, 넌 친구들이랑 안 놀아?”
“네? 놀아요. 옆집에 아브디아라는 소꿉친구가 있는데, 걔는 모험가가 꿈이라서 항상 자기 연습 때문에 바쁘다고 잘 안 놀아주거든요.”
“아하~ 그래서 나한테 왔다는 거구나?”
“아, 아니에요! 저는 단순하게 언니가 좋은 거예요!”
“어? 어, 어어…. 그래…? 그렇구나….”
소리치는 피네의 모습에 고개를 휙 돌려 중얼거리듯 말하는 케이넨이었어요.
잠을 잘 때는 케이넨의 꼬리를 피네가 안고 자며 상당히 거리가 가까워진 것을 보여주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드래고니안이 꼬리를 만지게 해주고, 안게 해준다는 것은 꽤 높은 신뢰를 주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뿔과 함께 제일 민감한 부분이니까요.
그렇게 다른 모험가들의 재계약 시즌이 돌아왔을 때도, 몇몇은 그대로 마을을 떠나기도 했지만, 당연히 케이넨은 마을에 남게 되었어요.
거의 매일을 피네와 붙어 지내는 것이 케이넨에게는 일상이 되어있던 거예요.
이런 행복이 매일 이어졌으면, 이라고 마음속으로 바란 적도 있을 거예요.
슬리브스터가 방어가 좋지 못한 마을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오지만 않았다면 케이넨의 행복도 계속 지켜졌겠죠.
기습은 새벽에 이루어졌어요.
마을 입구의 파수를 하고 있던 모험가의 목을 뚫는 짧은 도신의 검.
비명 한번 질러보지도 못한 모험가는 그대로 쓰러져 마을로의 침입을 허무하게 허락해버렸어요.
하지만 그런 방비 정도는 당연히 해놨다는 것처럼 일제히 모든 모험가가 문을 박차고 나와 마을을 지키려고 했어요.
엄청난 수의 슬리브스터가 마을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겁먹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이렇게 대규모로 행동하는 슬리브스터가 있다고는 들은 적이 없으니, 모험가들은 당연히 당황했어요.
다만, 케이넨만큼은 곧바로 침착을 되찾았는데요.
동료들 옆에서 싸우기보다는 피네에게 가는 걸 택한 것 같아요.
일단 마을 사람들을 지키는 게 임무이니까 이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피네!!”
마을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상황 속에서도 금방 피네의 집에 도착한 케이넨은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녔어요.
그러다 피네를 찾아낸 것은 옷장 속이었죠.
피네의 부모님은 어디 갔는지 몰라도 부들부들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이 꽤 안쓰러워 보였어요.
“피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어, 언니, 아빠랑 엄마가….”
“괜찮아, 괜찮으니까, 여기서 도망치자. 미리 도망치기로 했던 그곳에서라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이제 막 불타기 시작한 피네의 집 안에서, 옷장 안의 피네를 꼭 끌어안아 주는 케이넨이에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피난처를 정해두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요.
과연 피네의 부모님이 무사히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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