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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29화 (129/189)

〈 129화 〉 황녀로 인해 파헤쳐진 질의 모습은

* * *

라피아가 황녀에게 시달리는 시간이 꽤 길어지면서 둘은 질의 여러 장면을 볼 수 있었어요.

질이 제일 먼저 걸어서 도착한 곳은 수도에서 탈리안이 운영하던 도서관이었어요.

걸어서 가기에는 힘든 거리였던 것을 아는지, 질은 신체 강화마법을 사용해 몇 분 만에 도착해버렸는데 따라오는 두 명만 지칠 뿐이었어요.

도착하고 나서도 당연히 도서관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지만, 질은 굴하지 않았어요.

다른 가게의 문에 열쇠를 사용하고는 도서관과 연결해서 건너가 버렸거든요.

둘은 하는 수없이 창밖에서 질이 무엇을 하는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마저도 소용없는 짓이었어요.

탈리안이 도서관을 오면 항상 가서 잠들거나 책을 읽던 방에 들어가 버렸거든요.

그 방에는 창문도 나 있지 않기에 구경하는 건 불가능했어요.

도서관의 닫힌 문을 깨부수고 들어갈 수도, 창문을 깨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군.”

“안에서 뭘 하는 걸까요?”

“으음, 3배속으로 돌려보도록 하지.”

“배속도 가능해요…? 그러면 늦추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왜 굳이 뛰었어야 했던…!”

황녀는 자신 있게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이고는 작게 중얼거렸어요.

하지만 3배속이 되었는데도 질은 10분간 나오지를 않았어요.

이미 도서관에 도착하고 나서 20분이라는 시간을 기다렸는데도요.

질이 나왔을 때는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보다 훨씬 정돈된 차림을 하고 있었어요.

움직여서 여기저기 구겨지고, 접히고, 흐트러진 옷을 고쳐 입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죠.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 몰라도 질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크게 심호흡을 한두 번 하고는 곧바로 다음 장소인 워프룸으로 향했어요.

이상하게 열쇠를 사용하지 않는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낭비하는 듯한 모양이었어요.

“황, 레나이…. 님. 질이 안에서 뭘 했을 것 같아요?”

“본인은 뭘 했는지 잘 알 것 같지만, 그렇게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라서 쉽게 알려주진 못하겠는걸. 그리고 그대는 모르고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으니까 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네….”

질이 들어간 워프룸의 입구에 달린 명패에는 ‘아스티엘 마법 학원’이었어요.

의뢰를 수주하러 간 것이라면 마법 학원에 가는 게 제일 편한 길이기는 해요.

마법 학원의 학생이 다른 지역에서 의뢰를 받으려면 비교적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지금은 질이 향한 탈리안의 개인 강의실을 보도록 하죠.

탈리안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자리, 개인 책상과 의자, 강단과 화이트 보드까지.

제일 먼저 질이 들어와서 한 행동은 의자에 앉아 탈리안이 쓰던 책상에 얼굴을 파묻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손으로 탈리안이 있었을 것 같은 자리에 손을 대고 천천히 움직였어요.

한동안 탈리안은 이 강의실을 쓰지도 못했을 텐데, 마치 탈리안의 온기를 느끼려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질의 손은 점점 아래로 향했어요.

“억지로 데려와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미안하지만, 미리 나가 있어도 되고, 이 장면을 넘겨도 되는데 어떻게 할 거지?”

“…넘겨주세요.”

“알았다. 하지만 탈리안도 지켜보고 있다고 했었는데, 이런 장면까지 다 본 건가? 알고서도 모른 척을 하고 있다는 건가?”

“탈리안이? 걔도 참, 악취미네….”

“적당히 보다 그만두지 않았겠어? 보아하니 탈리안이 그런 쪽으로는 내성이 거의 없다시피 하던데.”

“레나이 님이 본 그대로이긴 한데요…. 이렇게 서로 좋아하면서 왜 싸워가지고….”

황녀는 중얼거리는 라피아의 모습에 손가락을 튕겨 바로 장면을 건너뛰었어요.

강의실을 나서는 걸 따라가자마자 또다시 신체 강화마법을 걸어서, 단숨에 워프룸까지 달려가는 질이에요.

이번에는 명패에 ‘리니스’라고 적혀있네요.

워프룸을 나와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어느 평원과 습지의 경계였어요.

분명히 괴조와 마기노 중에서도 삼뿔이었던 녀석을 만났던 곳이었죠.

갑자기 이런 여행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황녀님, 아니…. 레나이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

“흔히 겪는 사춘기 아니겠어? 어린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싸웠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까, 이렇게라도 기분 전환을 해야지.”

“아~ 사춘기….”

“모든 아이가 그렇듯이 나쁜 쪽으로만 엇나가지 않으면 되는 거지. 그럴 가능성이 보인다면 옆에서 잡아주면 되는 거고.”

그럴듯한 해석이면서도 왜 그렇게 익숙하냐고 딴지를 거는 라피아를 가뿐히 무시하고 바닥에 누워버리는 질을 관찰하는 황녀예요.

가면 갈수록 무시하는 게 자연스러워지네요.

두 번째긴 하지만, 라피아도 딱히 별 반응 안 하기도 하고요.

질은 한동안 풀밭에 누워있다가 여러 번 뒤척이면서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마법을 쓴 거예요.

한 손을 아래로 향해 땅에 마법진을 새기고, 나머지 한 손은 하늘로 뻗어 새로운 마법진을 만들었죠.

그리고는 팔을 교차시켜 마법진을 섞어버리더니 황녀의 능력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렸어요.

둘은 질과 같이 바닥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지니 이보다 더 놀랄 수가 있겠어요.

둘 다 일어서서 질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가 라피아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어요.

“흐아악?! 아아!?”

“뭐, 뭐야…. 왜 그렇게 놀라요? 지금까지 미행한 사람들이 누군데….”

갑자기 뒤에서 어깨를 잡힌 라피아는 뒤로 넘어질 정도로 놀랐던가 봐요.

쓰러진 라피아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질이 투덜대도 대꾸를 못 하는 걸 보면요.

그래도 황녀는 라피아와는 다르게 상당히 무덤덤한 느낌이네요.

그럴 것 같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둘을 보고 있어요.

“으음, 예상은 했지만, 언제부터 알게 된 거지? 게다가 본인의 능력에서 벗어난 방법에 대해서도 궁금하군. 쉽게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황녀님은 정말 취미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저 탈리안 언니한테 여러 마법을 배웠다구요. 마나를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하는지도. 오늘은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미리 라피아 언니랑 황녀님한테 제 마나를 섞어놨었어요.”

“오…. 그런 것도 탈리안에게 배운 건가?”

“저 마을에서도, 언니 집에 있을 때에도, 도서관에서도, 마법 학원에 있을 때에도, 언제든 책을 읽었으니까요.”

역시 질에게 있어서 제일 뛰어난 스승은 탈리안도 있지만, 책이 차지하는 비중도 만만치 않을 거예요.

예로부터 책에는 다양하고 도움이 되는 지식이 들어있었으니까요.

“그렇군, 그럼 본제로 들어가서….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지금까지 실컷 라피아 언니랑 떠들어 놓고 뭘 물어보는 거예요.”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려는 라피아에게 손을 내밀며 퉁명스레 답하는 질이에요.

하기야 누군가가 미행하며 자신에 대해 떠들었는데 반갑게 맞이해주는 것도 보통은 못할 일이죠.

“뭐야, 지금 사춘기라고 인정하는 거라고?”

“실제로 그런 기분이 드는걸요. 언니는 그런 적 없어요? 이렇게 막, 말로 설명 못 할 기분에 잡아먹히는 듯한…. 최근에 탈리안 언니랑 말다툼을 하고 나서부터 그래요.”

질은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어요.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철이 드는 것도 흔한 일인데, 사춘기라고 일찍 오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질 본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황녀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아요.

“그건 사춘기가 아니라 사랑이군.”

“하아!? 사랑?! 레나이 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시는 거예요?! 질한테 있어서 탈리안은…!”

“라피아? 기분은 알지만, 모르는 척은 그만하도록. 질은 그대도 사랑하지만, 탈리안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열심히 황녀에게 그렇지 않다며 소리치는 라피아였지만, 정작 한마디도 못 하고 입을 다물어버렸어요.

사실이기에 황녀에게 반박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질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으니까요.

예전이라면 그나마 ‘가족으로서 좋아하는 것’이라며 변명이라도 둘러댔겠지만요.

“음, 지르니트? 탈리안과 싸웠다고 알고 있다. 화해하고 싶을 텐데…. 도와줄 수도 있는데?”

“…정말요?”

마치 그란스리를 실제로 영접한 것보다도 더 반짝이는 눈빛으로 황녀를 바라보는 질이에요.

라피아는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피해 다녔는데, 황녀가 화해를 도와준다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질도, 라피아도 못한 일을 황녀가 도와주겠다잖아요?

당연히 성스러운 것을 보다시피 하는 게 맞아요.

“오는 길에 심심해서 라피아에게 물어보았지, 왜 탈리안과 싸웠는지. 베리아 때문이라고? 간단한 것을. 베리아도 그대의 것으로 만들면 된다! 그 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탈리안이라면, 탈리안마저 그대의 것으로 만들면 되는 거지!”

하지만 황녀가 말한 것은 질도, 라피아도 이해하지 못할 엉뚱한 말이었어요.

이론적으로는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어요.

베리아를 질의 것으로….

황녀의 말을 조금만 순화해서 번역하자면, 베리아가 탈리안을 원하는 만큼, 질도 원하게 만들라는 것이에요.

다른 게 있다면, 베리아가 다가올 리는 없으니 질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게 황녀의 말처럼 된다면 베리아의 갱생은 둘째치고, 질과 베리아의 공존만큼은 이룰 수 있을 거예요.

질은 베리아를 처리하고 싶다는 쪽은 아니니, 어쩌면 이 방법이 질에게 있어서 제일 나은 방법일 수도 있어요.

“레나이 님, 황궁에 계실 때는 일부러 점잖은 모습을 연기하신 건가요? 저 진짜 알고 있던 이미지랑 너무 달라서 환상이 깨지려고 하는데요.”

뭐어…. 이런 황녀의 언행에는 라피아의 환상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기 직전일지도 모르지만요.

이에 황녀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며 다시 떠들기 시작했어요.

“황궁에서 업무를 보다 보면 얼마나 스트레스가 쌓이는지 알고 있나? 그렇기에 본인이 기를 쓰고 황궁 밖으로 나가 억지로라도 공훈을 세우고 있는걸 몰라주다니, 그대도 아직 멀었군.”

황궁에 있다면 다양한, 정말 다양한 업무가 있을 거예요.

특히 수많은 공훈을 세운 황녀라면 주변에서 알아서 일을 가지고 올 테고요.

그렇다고 일을 거부하려고 해도 개인 사정이 있어서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일 테니….

황녀가 이런 성격을 숨기고 있는 것도 그 일환 중 하나겠죠.

뭐, 그런 건 질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저기 황녀님,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실래요? 처음에는 뭐부터 해야 하는지.”

“우선 집으로 돌아가자고! 화해부터 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탈리안이 없어서야 되겠어?”

그래요, 화해도 중요하죠.

일단은 화해의 실마리가 잡혀서 다행이에요.

아마 황녀와 만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탈리안과 어색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을 게 뻔하니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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