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황녀의 미행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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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와 탈리안은 서재에서 이야기를 마쳐가고 있었어요.
그동안 있었던 일의 전부를 황녀에게 말해준 탈리안이었죠.
웬만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의외네요.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된 황녀는 지금껏 들은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했어요.
“그러니까 베리아의 처리에 애를 먹고 있다, 이 말이군. 그로 인해 지르니트와 말다툼을 했고?”
“저는, 베리아를 용서할 수 없으니까요.”
“이유를 들려준다면 좋겠지만, 괴로운 기억일 테니 싫어하겠지.”
“계속해서 제 정조를 노려왔다는 것으로는 부족한가요? 저항해도 억지로 만져오는 그런 짓을 했는데….”
베리아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죠.
접근만 해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저항했었다고요.
그 저항조차 소용없었다고 하니 탈리안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에요.
“음, 베리아의 능력 중에는 다른 사람의 몸을 빼앗아 조종하는 것도 있다고 들었는데, 다른 사람의 몸으로 그랬던 건가?”
“아뇨, 그럴 때만은 굳이 자신의 몸으로 찾아와서 괴롭히곤 했었어요. 다른 사람의 몸으로 찾아올 때는 저에게 인형이 되라고 설득할 때만이었죠.”
“그럼 그건 정조를 노려졌다기보다는, 그저 순간적인 유희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마군주에 대해서 짤막한 지식으로나마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대의 고향인 연옥이라는 곳 또한 그러한 곳이니까.”
“연옥이 그렇다고 해서 저까지 그런 것은 아니에요!”
탈리안이 성을 내며 소리치자 황녀가 바로 미안하다며 사과했어요.
만난 뒤로 바로바로 사과하는 황녀를 이해하기 어려운지 헛기침을 한두 번 하고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탈리안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그런 베리아를 갱생시키겠다거나, 살려두겠다거나…. 그런 건 이해할 수 없어요.”
“무슨 일 때문에 집이 이렇게 허전한지는 알았지만…. 탈리안, 그대는 마기노가 맞는지 의심되는군.”
“그게 무슨 말이죠?”
“연옥의 연장선인 이야기이지. 그렇다고 그대를 뭐라 하는 것은 아니야. 그저 마군주라면 보통 오랜 시간을 살아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대는 너무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더럽혀지지 않아서 힘만 마군주의 것을 쓰는 느낌이고, 속은 완전히 사람과 같아 보여. 특히나 성적으로 말이야.”
“…그야, 그 연옥과 긴 시간을 버티려면 감정을 따로 숨겨두고 분리해둬야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일도 가능해요.”
이어서 탈리안은 질에게 보여주었던 때처럼 그림자와 마기를 사용해 분신을 딱 하나만 만들어냈어요.
굳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섯 명을 전부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다른 분신을 대표해 나온 것은 실리아였어요.
“탈리안! 정말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에요, 실리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최근에는 도서관을 운영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 앞에 있는 황녀에게 잠깐 보여주려고 부른 거니까…. 길게는 못 있을 거예요.”
황녀는 둘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대화가 끝나고 실리아가 먼저 인사를 해온 뒤에야, 정신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신기하다며 실리아의 손이나 팔, 다리 같은 곳을 만져보기 시작했죠.
“화, 황녀님?! 간지러운데요!!”
“조금만 참아줘, 신기해서 말이야! 확실하게 만질 수 있는걸 보면 환상도 아니고! 의지대로 움직이게 만들어낸 분신이라기엔 인격까지 갖추고 있어, 만들기 전에 따로 이렇게 반응하도록 설계를 해놓은 것도 아닐 텐데!”
감탄하면서 이곳저곳을 만지다가 얼굴까지 만지기 시작한 황녀예요.
그렇게 탈리안의 분신을 만드는 능력이 신기한 걸까요?
“그녀도 저에요. 너무 만지면 나중에 그녀가 저한테 돌아왔을 때, 제가 불쾌해지니 그만 만지세요.”
실리아가 황녀를 거절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 결국 보다 못한 탈리안이 직접 나서서 황녀를 떨어트려 놓으며 말했어요.
하기야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자기 자신인데, 나중에 황녀가 만진 기억이 합쳐진다면 탈리안에게 있어서는 기분 나쁜 체험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뭐? 아! 확실히 감정을 분리한다던가, 숨겨둔다던가 말했었지? 그럼 이 실리아라는 분신은….”
“자꾸 분신, 분신! 저는 분신이 아니라 실리아라고요!”
실리아는 분신으로만 불리는 게 싫었는지 황녀의 말을 끊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서까지 화를 냈어요.
“미, 미안하다. 그럼 실리아는 그대의 감정을 재료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그대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아무리 마군주라지만 이런 일도 가능하다니 새삼 감탄하게 만드는군!”
“정확해요. 그래서 저는 300년 넘도록 황녀님이 느끼는 그대로 살아오는 게 가능했던 거에요.”
“최소한 300년…. 긴 시간이야, 그래서 지르니트는 언제 돌아오지? 슬슬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대는 지르니트가 걱정되지도 않는 건가?”
“…몰라요. 의뢰라도 하러 나갔겠죠. 위험한 일만 하지 않고, 제때에 돌아오기만 하면 되니까, 제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탈리안은 멀뚱멀뚱 앉아서 대화를 구경 중인 실리아를 다시 그림자 안으로 돌아오게 하며 말을 이어갔어요.
그렇지만 질이 언제 들어오는지 모르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니, 생각보다 탈리안의 기분이 많이 상한 것 같아요.
황녀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예전에는 옆에 두거나 있고 싶어 해서 안달이 났었으면서, 이제는 방치하겠다고?’라며 물어봐 왔지만….
“방치하는 게 아니에요.”
…라고 대답할 뿐이었어요.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황녀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덧붙였어요.
“방치한다는 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때 하는 말이잖아요. 저는 그러지 않아요. 멀리서 분신을 시켜서 지켜보게 하고 있으니까….”
“허, 언제는 모른다며, 신경 쓸 필요도 없다며 시치미 떼더니…. 그렇게 앞에서는 언짢은 듯한 표정을 하고, 뒤에서는 지켜봐 주고 있었나. 과보호도 이런 과보호가 따로 없군. 지르니트가 알면 경악할 일이야.”
“멋대로 떠들어도 좋아요….”
“뭐, 그걸로 됐다. 본인이 둘의 화해할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무슨 자신감으로 황녀가 둘을 화해하도록 만들겠다는지 모르겠네요.
탈리안도 이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녀에게 물어봤지만, 전혀 대답해주지 않았어요.
황녀가 해준 말은 단 한마디, ‘지르니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였죠.
어쩔 수 없이 그 전까지는 탈리안이 억지로 황녀와 어울려줘야 했어요.
이 길고 긴 대화의 시간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것은 집의 분위기에 버티다 못해 도망쳤던 라피아였어요.
“1층에 아무도 없길래 와 봤더니, 황녀님이 왜…?”
“라피아! 오랜만에 보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럼 새롭게 자기소개를 해보도록 할까? 앞으로 한 달마다 찾아올 황녀 레나이 아발테인이다. 잘 부탁하지!”
“아, 오늘이었어요? 그런데 탈리안은 왜 책상에 엎어져 있는 거예요?”
라피아의 말대로 책상 위에는 너무나도 편안한 표정으로 곤히 잠든 탈리안이 있었어요.
이에 황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해주었죠.
“본인과의 대화에 조금 지쳤나 보더군, 대화 도중에 졸기 시작하길래 그대로 자도록 놔뒀어. 그런데 지르니트는 아직인가?”
“어디 나갔어요? 제가 있는 곳에는 안 왔는데.”
“흠흠, 사건의 냄새가 나는군!”
“사건이라니 아직 오후 3시밖에 안 됐는데요?”
“그런 건 상관없어, 자! 따라오라고!”
황녀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탈리안에게 덮어주고는 앞장서서 라피아를 이끌었어요.
피곤하다며, 집에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냐며 따지는 라피아의 말에 황녀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조차 하지 않았어요.
완전히 무시당한 상황에 라피아는 화를 내면서도 황녀의 강한 힘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요.
라피아의 힘도 꽤 센 편이었을 텐데, 황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상당히 의외네요.
“황녀님!! 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찾아가려고요?!”
“이사 왔으니, 황녀님은 그만해도 돼. 레나이라고 부르도록!”
“그건 불경죄 아닌가…? 아, 아무튼! 어떻게 찾을 건데요!?”
“하핫, 방법이 다 있지! [지르니트의 과거를 보여라!]”
황녀는 앞마당에 나오자마자 능력을 사용하더니, 마나가 모여들어 반투명한 황금빛을 띠는 질의 모습을 이뤘어요.
이건 황녀가 탈리안과 만나 집에 들어갈 때, 멀리서 지켜보던 시간의 질의 모습이에요.
완벽에 가까운 재현도를 보고서 황녀는 혼잣말로 ‘본인이 봐도 잘 만들었군.’이라며 자화자찬을 시작했죠.
질의 몸을 이리저리 구경하면서 보기 부끄러운 곳을 살펴보고 관찰하는 건 덤이었지만요.
라피아는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놓고 황녀를 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어요.
“이제 따라가 보실까!”
“예?! 아, 아니…! 아아! 모르겠다 진짜…!”
절대 놔줄 생각이 없는 황녀의 손을 보고는 저항을 그만두고 억지로 끌려다니기 시작한 라피아에요.
황녀가 만들어낸 질을 뒤따라 걷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 질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야 하겠죠.
그런데 이동하는 도중에도 황녀의 말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탈리안이 겪은 일을 라피아도 똑같이 겪어야 했죠.
예를 들어 반투명한 질이 몬스터와 싸우는 듯한 모습을 할 때부터 한마디를 시작하더니, 그 한마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오오, 대단하지 않나? 저 기민한 움직임, 고삐가 풀린 망아지와도 같은 격렬함! 그대는 저보다 더 화려하게 싸우겠지? 눈앞에 상상되는 게 정말 멋지군! 아니라고? 너무 겸손함을 떨지 않는 것이 좋아. 그대가 크롬웰의 양녀라면 그만한 값을 해낼 것이라 믿고 있으니까 말이야.”
처음은 라피아에 대한 칭찬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끝마친 말이 크롬웰이 양녀였기 때문인지, 이어서 황녀는 크롬웰에 대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죠.
크롬웰에 대한 대화만 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그러고 보니 크롬웰은 잘 지내는가? 크롬웰은 보고 있자면 엘프라지만 허약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언젠가 한 번 픽하고 쓰러져버릴 것 같은 노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니까 말이야! 하핫! 그러니 그대도 지금부터 건강을 챙기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황궁에 오랜 시간 동안 봉사하지 않겠어!”
황녀의 눈에 보인 크롬웰의 모습은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바로 건강의 이야기로 넘어가서는, 또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황녀가 틈을 주지 않고 말했냐면 라피아가 대답하려는 순간, 절묘하게 치고 들어와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였어요.
보통 대화라는 것은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황궁에서 숨겨오던 모습이 라피아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라는 것 때문에 터져나온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이야기는 더 이어졌어요.
“특히 나중에는 본인의 곁에서 탈리안, 지르니트와 함께 일해주었으면 더욱 바랄 것이 없겠군, 양손에 꽃이 셋이나 있다니 그보다 행복한 게 어디 있겠어? 그러니 하는 말인데 나중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본인의 곁에서 함께 지내는 건 어떤가? 한 달마다 일주일씩 같이 있으려는 이유에는 이런 것도 있었으니, 잘 생각해보는 게 좋아. 어쩌면 일이라는 것이 밤일이 될 수도 있고, 서로가 즐거울 수도 있….”
정말 끊임없이, 질리지도 않고 말하는 거였어요.
라피아는 황녀가 억지로 잡아 끌고 다니고 있으니 탈리안처럼 졸지도 못하는 상황이에요.
아니, 이런 황녀의 말을 듣다 보면 머리가 아파져 올 거예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걸 보면 이미 머리가 아픈 걸지도 모르겠어요.
대충 흘려들으며 ‘네…. 아…. 네에….’같은 대답만 반복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황녀의 앞에서 잠든 탈리안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예요.
의식의 흐름에 따라 대화하는 황녀를 보고 있자면 정신이 나가도 이상한 일은 아닐 거에요.
당장이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을 텐데 버티고 있는 걸 보면 라피아도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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