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마녀의 이름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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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안은 질보다 먼저 욕탕에 들어가 물에 목 아래까지 몸을 담그고 있었어요.
몸이 성장하기 전에 한두 번 정도는 어쩌다 탈리안과 같이 목욕했던 일이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어요.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같이 하자고 한 적은 없었다는 거죠.
성장한 이후로는 질이 먼저 하자고 한 적은 부끄러워서 싫다기에 거의 없다고 해도 될 거에요.
보통은 탈리안이 먼저 같이하자고 했었으니 이례적인 일이에요.
여기에 더해 탈리안은 방금만 하더라도 질에게 키스를 당하고, 마크까지 남겨진 채였으니….
질을 기다리다 보니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의식할 수밖에 없던 거에요.
그렇게 욕실 밖에서 질이 옷을 벗는 소리가 들어오자마자 욕탕의 물이 찰랑거렸어요.
준비를 마친 질이 들어오면, 머리를 수건으로 말아 올린 걸 볼 수 있었어요.
머리를 감은 수건 말고는 아무 곳도 가리지 않은 질을요.
욕실이기에 당연한 차림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냥, 완전히 알몸이었어요.
옷에 가려져도 날씬하면서도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하던 질은 알몸이 되면 보는 사람의 눈을 돌리게 했어요.
알마의 경우에는 빈부격차에서 오는 집착으로 인해 계속 노려봤던 것이니 예외로 치더라도요.
탈리안은 질의 몸이 성장한 이후 그 안쪽을 본 적이 없으니 어색해서 더 그렇겠죠.
생각해보세요.
어렸던 질의 흔적이 남아있는 날카로우면서도 빛나는 눈매, 집는 맛이 있는 적당한 볼살.
이런 어린 티가 남아있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한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랬다면 알마의 반응이 처음부터 좋지 않았을 테니까요.
굳이 ‘그 몬스터 어디서 사는 몬스터야?’라는 느낌으로 물어본 이유가 있던 거에요.
거의 완벽하게 성장한 뒤의 모습으로 바꿔줄 테니까요.
운이 나빠서 노인의 모습으로 변한다던가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도록 해요.
어쨌든 탈리안은 질을 한번 흘겨보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어요.
어쩌면 목욕하러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시선을 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언니, 미리 물어보겠는데요. 라피아 언니도 들어와도 되는 거죠?”
“넓으니까 상관없어요….”
“그렇대요! 라피아 언니! 들어오세요! …그런데 언니는 왜 저를 봐주질 않는 거예요?”
질은 라피아를 부르다가도, 자신이 아니라 욕탕에 가득 찬 물만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는 탈리안을 보며 투덜거렸어요.
“왜기는? 네가 이런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여전히 탈리안에게서 대답은 없었고, 대신 라피아가 뒤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접근해선 질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어요.
민감한 부위를 스쳐 가는 라피아의 손 때문에 질이 몸을 잠깐 떨었는데, 이때만큼은 탈리안이 그 모습을 눈동자만 굴려서 훔쳐볼 수밖에 없었어요.
“히약?! 뭐, 뭐 하는 거예요!?”
“앗, 따거?! 히잉…. 일어난 뒤로 질이 조금 까칠해졌어….”
장난을 받아주려는 생각은 없는 것인지, 질은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만져대는 라피아의 손을 순간적으로 세게 꼬집었어요.
하기야 같이 목욕하는 것만 허락한 것일 뿐, 장난까지 허락하진 않았겠죠.
라피아라면 당연히 장난을 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한 번도 같이 목욕한 적이 없었던 거니까요.
“자업자득이에요! 탈리안 언니 앞에서 뭐 하는 거예요? 탈리안 언니가 여기 없었더라도 이건 봐줄 수 없는 일이라구요!”
“그래도 이런 몸을 한 질의 탓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말해주려던 것뿐이었는걸….”
“매달리면서 부탁하길래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였잖아요! 다음에도 이러면 절대 같이 목욕 안 할 거니까요!”
“아, 알았어어….”
풀죽은 라피아는 질과 함께 가벼운 샤워를 시작했어요.
탈리안만 계속해서 욕조에 둘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같이 씻자고 한 것에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자는 의도도 숨어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라피아는 그 잠깐의 시간도 기다리기 힘들었나 봐요.
“근데 웬일이야? 마녀, 네가 같이 사는 것도 모자라서 같이 씻는 것까지 허락해줄 줄 몰랐는데.”
“질이 하는 말은 뭐든지 들어주기로 했으니까요. 예전에도 비슷한 약속을 했던 것 같은데…. 못 지켰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지켜야죠.”
“아, 그러셔. 그래서? 내 방은 어딘데?”
“2층에 있는 작은 도서관 옆에 공실이 하나 남아있어요. 욕실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방문을 당신의 기숙사와 연결해두었으니 확인해보세요.”
“그럴 거면 기숙사는 어쩌고, 그냥 짐만 가지고 나올 테니까 이따 좀 도와줘.”
“알겠어요.”
이 와중에도 탈리안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물에 떠다니는 자신의 머리카락만 구경했어요.
라피아에게도, 질에게도 단 한번의 눈길을 주지 않았죠.
이게 불만이었는지, 이번에는 질이 탈리안에게 말을 걸어왔어요.
몸에 거품을 잔뜩 묻힌 채로 돌아보면서요.
“저한테 해줬던 것처럼 방을 하나 새로 만들어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그렇네요.
질이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황실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화려한 방을 준비해주었던 일이 있으니까요.
다만, 탈리안은 질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어요.
“질, 이 집은 제 고유 능력인 영원의 도서관을 실체화한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라피아의 방을 만들어주는 건 불가능해요. 방을 비워주는 건 가능하지만요.”
“이 집도 언니 능력이에요? 마군주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야….”
“마군주가 대단하다기엔, 베리아가 너무 맥없이 잡혀버린 거 아니야? 물론 나는 죽도록 아프긴 했지만.”
놀라는 질의 말에 라피아가 끼어들었어요.
분명 마군주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크리미아가 준비한 마법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맞아주고, 질에게도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본인은 엉망진창으로 당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가진 힘에 비해 이름값을 못한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성녀 후보였던 분이 도와주었다고 했었죠. 마기노는 성녀와 상성이 좋지 못합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베리아는 성녀의 기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데.”
“그건…. 일단 샤워 다 하고 얼른 들어오세요. 그러면 말해줄 테니.”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 뜸을 들이는 것만 같은 탈리안의 모습에, 질과 라피아는 서로를 잠깐 바라보고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샤워를 마무리했죠.
욕실이 넓었던 만큼, 욕조도 3명은 충분히 들어가고도 3명이 더 들어갈 만한 크기를 자랑했어요.
질이야 몇 번이고 썼던 욕조겠지만, 라피아는 아니었으니 꽤 놀랄만한 부분이었을 거에요.
자신의 본가에서나 볼만한 개인 욕조가 탈리안의 집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요.
“기숙사의 욕조도 이렇게 크진 않았는데, 네 취향이야?”
그래서인지 욕조에 발을 담그면서도 탈리안에게 말을 거는 라피아였죠.
그래도 본가 얘기를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게 놀랄만한 물건은 아니었나 보네요.
“취향…. 그렇네요. 저는 책도 좋아하지만, 씻는 것도 상당히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하려던 이야기가 뭐야?”
라피아는 질도 욕조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제 전생에 관한 이야기에요. 모두가 알고 있을 거예요. 베리아…. 아니, 마군주가 특별한 존재에 이끌린다는 것쯤은.”
탈리안도 전생자라면 같은 마군주임에도 베리아가 집착했던 이유가 설명이 가네요.
특별한 존재가 막강한 힘을 가진 마기노가 되었으니, 베리아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매력적인 존재는 없겠죠.
“너도 나랑 같은 전생자라는 거야?”
“아니요, 저는…. 책 속에 납치되어버린 특별한 케이스에요. 처음에는 이 세계가 책 속의 세계라고 착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책한테 납치당했다니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 전생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
탈리안도 나름대로 이해하지 못할 신기할 일을 겪었네요.
너는 이런 일 겪어본 적 있냐고 남한테 자랑스럽게 말해도 되겠어요.
하지만 그저 책에 납치당하기만 했는데 이런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면 전생에서 인기가 상당했겠어요.
“그 책에는 이 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어요.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생물이 만들어졌는지, 어떤 미래를 걷게 될지까지, 전부. 그래서 알고 있는 거예요.”
“근데 네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거치고는, 넌 베리아한테 잡혀버렸잖아.”
라피아의 말도 맞아요.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탈리안은 베리아를 상대로 가뿐히 이겨냈어야 했어요.
“아쉽게도, 저에 대한 미래는 알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개입하는 순간…. 제가 모르던 미래로 바뀌어버리는 거예요. 그럼에도 최악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이 책 때문이죠.”
탈리안은 항상 거실에서 읽고 있던 책을 공중에서 만들어내 라피아와 질에게 보여주었어요.
질은 그걸 보자마자 왜 항상 탈리안이 그 책을 읽고 있던 건지 이해하게 됐어요.
“그래서 맨날 거실에서 읽고 있었던 거네요. …차라리 미리 말해주었다면 언니 혼자서 고민하지 않았어도 됐을 거잖아요.”
“그럴 수 있었다면 그랬을 거예요. 이 책의 내용은 저 이외에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게 되어있어요. 전에 한 번 읽어봐서 알잖아요?”
“아, 으응…. 그랬, 죠.”
확실히 질이 탈리안이 항상 읽던 책의 내용이 궁금해서 건네받았던 적이 있었죠.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어요.
문자가 적혀있기는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에요.
“내가 한번 읽어봐도 돼?”
“그러세요. 어차피 못 읽겠지만….”
“익숙한 글자지만…. 못 읽겠네. 근데 이거 꼭 읽어야 해? 네가 내용을 말해줘도 되는 거 아니야?”
“저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건 모두 시도해봤어요. 라피아 당신의 말대로…. 저는 이제부터 찾아올 ────에게 ───며 ──대한 ──를 ───할겁니다.”
탈리안이 하는 말 중 일부가 질과 라피아에게는 기괴한 소리로 들려왔어요.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가 있는데도 온몸에 닭살이 올라올 정도로 말이에요.
직접 듣고 나서야 질과 라피아는 이해했다는 얼굴을 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어요.
“언니는 도대체 어떤 싸움을 해온 거예요…?”
“그건 이제 와서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면, 질과 라피아에게 제 진짜 이름을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지금 이름도 제 것이기는 하지만, 탈리안으로 살기 이전의 전생에서의 이름을…. 둘에게는 미안하고 고마운 게 가득하니까, 저를 조금 더 알아주었으면 해서.”
“앞으로는 더 잘하겠다는 그런 다짐 비슷한 건가? 근데 그걸 굳이 목욕하면서 말해야 해?”
“곧 베리아의 일로 바빠질 것 같으니까요. 쉬고 싶다는 핑계로 황궁의 부름을 무시하는 것도 이제 한계에요.”
어쩐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는데도 탈리안과 라피아의 행동에 은근히 여유가 묻어나오는 게 이상하기는 했어요.
그야 충분히 쉴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고, 질의 상태도 봐야 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라피아, 혹시…. 일본, 이라고 알고 계신가요.”
그런데 탈리안은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뜬금없이 일본이라는 말을 꺼냈어요.
라피아는 그 단어에 반응하듯 잠깐 눈을 크고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작게 웃다 탈리안을 바라보며 대답했죠.
“…넌 한국이라고 알고있냐.”
한국이라는 말에 탈리안도 라피아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어요.
아주 잠깐 웃고는 생각에 잠긴듯한 눈으로 말을 하는 거예요.
“신기하네요.”
“나도 신기해.”
“왜 저만 모르는 이야기로 둘이 웃는 거예요? 저 따돌리는 거예요?”
질은 둘만 아는 이야기에 기분이 상했는지 투덜거렸어요.
라피아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며 그런 게 아니라고 했지만….
“질은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를 거예요.”
“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탈리안 덕분에 짜증 섞인 말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 짜증마저도 이전에 비하면 진심이 아니라 장난식으로 소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요.
“어쨌든 저는, 우루시쿠로 아오이라고 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살던 18살 고등학생이었어요. 이 세계로 넘어온 지는 최소 300년은 지났을 거예요.”
“아, 아깝네. 여고생이었으면 나보다 어리다고 놀리려고 했는데 살아온 시간만 보면 완전 까마득한 연상이잖아.”
종족마다 다르겠지만, 탈리안과 라피아가 정말로 사람이었다면 300년이라는 시간은 보통 긴 게 아닐 거에요.
할머니를 넘어서서 제대로 살아갈 수는 있는지가 걱정될 시간인 거죠.
그렇지만 라피아도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에 자신도 탈리안만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탈리안의 나이를 알고서도 특별히 놀라거나, 놀리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거고요.
“아쉽겠어요.”
“응, 엄청 아쉽네. 근데 왜 소개를 하다 말아?”
“하다가 말았다니, 무슨 말이죠?”
라피아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탈리안이에요.
전생의 이름도, 나이도 말했는데 더 뭘 말하라는 걸까요?
“마군주라면 가지고 있는 것들 있잖아. 베리아가 뭐랬더라? ‘오만과 탐욕의 마기노를 이끄는 마군주 베리아다!’라고 했던 거 같은데, 넌 뭐 없어?”
“저, 저는 그런 거 없거든요?! 남들이 멋대로 붙인 이름이라면 있지만…. 이름의 힘이라며 말해대는데 손이 오그라들어서 도저히…!”
남들이 멋대로 불러댄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똑같이 부르는 이름이라면 그 명성만큼은 대단할 거에요.
절대로 부끄러워 할만한 것이 아닐 텐데 탈리안도 부끄러움이 많네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다고 하지만, 그 생기 없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 정도이니까요.
“어서 해봐, 질도 궁금해하잖아. 그렇지?”
“어, 으응…. 그렇게 말하니까 언니가 베리아처럼 자기소개하는 모습이라면 조금은, 아니 조금이 아니라 엄청 궁금해요.”
“질까지…!”
질과 라피아가 재촉해서 그런지 탈리안은 아예 입까지 물에 잠기도록 몸을 아래로 더 내렸어요.
이런 와중에도 둘의 시선이 계속해서 집중되니 참지 못한 탈리안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죠.
“시간을 담은 그, 금서의 주인 단탈리안…. 이에요….”
“…큭, 큭큭, 시간을 담은…. 금서, 킥킥….”
“웃지 마세요!! 저도 싫어하는 이름이니까!!”
너무나 예상 안의 결과에 탈리안은 양손으로 욕조의 물을 때리면서까지 소리쳤어요.
“큭큭…. 근데, 단탈리안이면 그거 아니야? 72 악마인가 뭔가 하는….”
“그럼 언니는 마녀가 아니라 악마인 거에요?”
라피아의 말에 탈리안을 다시 정의하려는 질이에요.
이제 와서 마녀라던가 악마라던가 좋을 대로 불러도 탈리안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예요.
질이나 라피아에게 있어서 탈리안은 탈리안이니까요.
“솔직히 마녀라 부르든 악마라 부르든 상관없지만, 굳이 정정하자면 솔로몬이 봉인했다고 전해지는 악마 중 하나겠죠. 그렇지만, 이 세계에는 솔로몬이 없으니 악마라고 불리기에도 뭣하네요.”
“또 혹시 모르지, 솔로몬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녀석이 나중에 나타날지.”
“그럼 탈리안 언니는 나중에 그 사람한테 봉인 당할 수도…?”
“그건 아닐 거에요. 베리아가 말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기노는 이미 한번 봉인 당했던 적이 있는 데다가…. 다른 마기노의 미래를 보더라도 솔로몬은커녕, 그 비슷한 존재조차 없었으니 괜찮아요.”
“이미 봉인 당했던 전적이 있으면 앞으로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비슷한 존재라면 태초신이나 그란스리일 텐데…. 모습을 감춘 지 몇십 년이 지났잖아.”
“그렇죠. 그래서…. 라피아?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당신도 전생자라고 했었잖아요. 물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와 비슷한 냄새가 나서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당신의 원래 이름이라거나, 전생에 어떻게 살았었는지…. 어쩌다 이 세계에 전생했는지 그런 것들을요. 질도 궁금하지 않아요?”
탈리안은 어딘가 들떠 보이는 표정으로 라피아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의심이 확신이 선 순간부터, 탈리안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라피아를 바라보기 시작했죠.
둘의 반응으로 보아 한국, 일본이라는 곳이 같은 세계에 있을 테니 그립거나 반가운 그런 감정이 피어났을지도 모르겠네요.
“믿기 힘든 이야기들뿐이지만, 궁금하긴 해요. 탈리안 언니랑 라피아 언니 둘 다 저한테 소중한 사람들이니까요.”
“너 진짜….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이번에는 라피아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어요.
하기야, 질이 언제 이렇게 솔직해져 봤어야죠.
“싫다면 안 할게요.”
“아니, 내가 언제 싫댔어? 그냥, 아! 진짜! 그냥 소개부터 할게…. 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살던 27살의 백하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어. 백이 성이고, 하윤이 이름이야. 평범하게 그림을 그리면서 벌어먹고 있었는데, 밖에 산책 나간 날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운도 없었지. 그 뒤에는 신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다가 이 세계에서 환생한 거지. 기억도 온전히 가진 채로.”
신까지 만났었다니, 라피아도 운이 좋네요.
신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만나지 않는 이상에야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는 기적은 바라지 못하겠지만요.
탈리안의 경우가 특이한 거겠죠.
“…언니들이랑 비교하면, 저는 아무것도 특별한 게 없네요.”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만 둘이서 하고 있으니, 질이 이렇게 풀죽은 채로 말하는 것도 어쩔 수 없어요.
어쩐지 탈리안과 라피아가 말하는 동안 묘하게 조용하다 싶었죠.
특별한 능력과 힘을 가진 둘에 비하면 질은 아무런 특색도 없는 단순한 시골 소녀일 뿐이잖아요?
물론, 이 둘도 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 거에요.
“왜,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너도 특별해!”
“맞아요, 질은 지금만 봐도 상당히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처음 보는 쓸쓸해 보이는 표정의 질을 달래주기 위해 둘은 노력해야만 했어요.
“제가 도대체 어딜 봐서….”
“신의 은총을 받고 다시 태어난 뱀파이어랑 72 악마 중 하나라는 대단한 칭호를 가진 도서관의 주인한테 아낌 받고 있잖아?”
“그건, 맞아요…. 부끄럽지만, 맞아요…. 그래도! 저는 언니들처럼 강해지고 싶은 거예요! 언니들 옆에 나란히 서 있을 수 있게!”
“질, 질은 충분히 강해요. 랭크로 따지자면 안좋게 봐주더라도 [B+] 급은 되겠죠. 최소가 그 정도라는 거에요. 그것도 마법학원에 다닌 지 한 달이 조금 넘는 시점에서요. 당신의 실력 성장 속도는 경이적이라고 봐도 될 거에요.”
탈리안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어요.
보통은 몇 년이 걸리는 일을 질은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을 써서 해낸 것이니까요.
당연하지만 큰 사건을 제외하고는 의뢰는 받는 족족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실력자를 동반했다곤 하지만 슬리브스터의 거점을 몇 번이고 박살 내는 기행까지 보여주었어요.
이번에는 불완전하지만, 탈리안의 구출이라는 의뢰까지도 성공해냈죠.
자신의 몸에 마군주를 가둬놓는 일이 되어버렸지만요.
“맞아! 성장 속도만 놓고 본다면 엄청 대단한 거라고!”
“제 도움이 있었다지만 질은 혼자서 지금의 실력에 오른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질은 충분히 특별하고, 강해요.”
“그런 걸까요…?”
“욕실이 아니었다면 안아줬겠지만, 장소가 장소라서…. 다 씻고 나면 안아줄게요.”
계속되는 위로에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질에게 안아준다는 말을 했지만, 질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했어요.
이어서 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탈리안을 당황하게 했죠.
“…지금.”
“네?”
“지금 안아줘요.”
한번 씻었다고는 하지만, 알몸인 상태에서 안아달라니 이건 질의 부탁이더라도 약간 무리한 부탁이에요.
라피아라면 모를까, 탈리안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죠.
“무슨, 이 상태로 안겠다니….”
“어서요.”
“저렇게 부탁하는데 얼른 해주지? 둘이 화해 한 기념으로 지금이라면 가까이 붙어도 용서해줄게.”
양팔을 벌려 재촉하는 질과 질의 편을 들어주는 라피아 덕분에 탈리안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어요.
그리고는 머뭇거리면서도 천천히 질에게 다가가 무릎 위에 앉고는 목에 팔을 걸어 안아주었어요.
둘의 모습만 본다면 탈리안이 안긴듯한 자세를 하고 있지만요.
“으읏, 역시, 무리…! 무리, 에, 윽….”
“언니? 탈리안 언니?!”
질을 안고 있던 탈리안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그대로 뒤로 쓰러졌어요.
아무래도 욕조에 너무 오래 들어와 있던 탓이겠죠.
오늘따라 유독 탈리안에게 힘든 일이 많은 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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