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08화 (108/189)

〈 108화 〉 마녀의 이름은 (2)

* * *

질과 라피아는 마당의 의자에 앉았어요.

밖에는 비가 조금씩 쏟아지기 시작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했어요.

다행히, 벤치 위로는 작은 지붕이 가리고 있어서 젖을 일은 없었지만,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 앞으로 나가면 금방 비에 젖을 날씨였죠.

질은 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라피아의 말을 듣고 있었어요.

“그래서 오후에 크리미아 씨가 여기에 올 거거든, 그때…. 질? 듣고 있어?”

그런데 어째선지 넋을 놓고 있는 질의 모습에 라피아는 질이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을 했어요.

악몽에서 깨어난 뒤로 자꾸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누가 계속 시끄럽게 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도 이야기는 제대로 듣고 있었어요. 베리아의 처리가 곤란해져서 탈리안 언니랑 크리미아 씨랑 라피아 언니랑 저까지 포함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해보자는 거잖아요.”

“맞아, 사고였다고는 하지만 마군주를 몸에 담게 되었으니까. 그대로 처리할지, 처리할 방법은 있는지, 그게 안 된다면 몸에 가둬놓을 수는 있는지. 황궁에서도 부를 테고.”

현재로서는 베리아가 몸에서 빠져나갈 힘이 없는 만큼, 다시 빠져나와 세상을 어지럽힐 위험은 없다고 봐도 되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질의 몸속에 가둬둘 수도 없는 노릇이에요.

그러니 마군주인 탈리안과 성녀 후보였던 크리미아까지 모여 해결방법을 찾아보자는 말일 거예요.

“그리고…. 이 한 달간 대대적으로 슬리브스터의 거점을 파괴해달라는 의뢰가 황궁에서 수십 차례 발행되었고, 리니아 가문에 타격이 가서 언니도 당분간 바빠질 거고, 시멜리 리니아 씨는 언니 손에….”

결국, 시멜리는 라피아의 손에 죽었나 보네요.

베리아와 라피아가 나누었던 대화를 들어보면 라피아와 싸우기 전부터 시멜리는 죽어있던 것이 되겠지만, 그걸 증명할 길이 없으니까요.

이로써 크롬웰 가문과 리니아 가문의 사이는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겠어요.

아무리 슬리브스터의 편에 서서 싸웠다고는 하나 가문의 장녀를 경쟁 중인 가문의 양녀가 죽였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조금 뼈아프지만, 어쩔 수 없었지. 그래서 이르면 내일이나 내일모레부터 아버지 부탁을 들어줘야 해서 옆에 못 있어 줄 것 같아. 대신에 마녀가 돌아왔으니까…. 괜찮지? 그래도 네가 옆에 있어 달라고 한다면 나는 남겠지만….”

예전에 나눴던 약속이 마음에 걸리는 듯, 라피아는 질의 눈치를 살피며 원한다면 떠나지 않겠다고 했어요.

마녀가 다시 옆에 있어 주는 것이 가능해진 지금 상황에 굳이 라피아가 남을 필요는 없겠지만, 약속은 중요하니까요.

라피아 스스로도 지금의 질을 보고 걱정할 수밖에 없고요.

“중요한 일인 거잖아요? 탈리안 언니를 생각하면, 라피아 언니도 보내지 않는 게 맞는데…. 말없이 사라질까 봐….”

처음에는 비교적 라피아를 생각해주는 척을 하다가도, 끝에는 약간의 불안함을 숨길 수 없었네요.

탈리안이라는 선례가 있으니 그럴 수 있어요.

의외인 건 자신의 아버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라피아가 이번에는 웬일로 바로 대답을 내놓았다는 것이었어요.

“남을까? 어차피 아버지 곁에는 나 말고도 유능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나 하나쯤 빠진다고 해도 상관없어.”

“탈리안 언니한테 부탁해서 방 하나만 만들어달라고 할게요. 여기서 같이 살아요.”

그리고 질의 대답도 의외였죠.

옆에 있어 달라는 부탁이 물리적으로 가깝게 있어 달라는 말이 되어버릴 줄은 라피아도 몰랐을 거예요.

하필이면 마녀와 같은 곳에서 생활해달라니 당황스럽겠어요.

“어…. 미안, 뭐라고?”

“역시 그건 싫죠? 그냥 해본 말이에요. 미안해요.”

“아냐, 아냐! 마녀만 허락한다면 그렇게 할게!”

“괜찮겠어요?”

질의 말에 약간은 고민하는듯한 표정을 하는 라피아에요.

아버지를 돕는 건 둘째로 쳐도 되지만, 탈리안과 같이 있는 건 고민이 필요한 정도의 문제라는 건가 봐요.

“…당연히 안 괜찮죠.”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들여오는 목소리에 둘 다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어요.

거기엔 파자마에 가디건만 걸쳐 입은 탈리안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어요.

“…라고 하고 싶지만, 허락할게요. 질에게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이번만이에요.”

“으, 솔직하지 못한 거 봐. 진짜 못 봐주겠다.”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베리아에게서 도망치는 걸 도와준 것도 있으니 참는 거예요.”

“아, 그러셔. 그거참 고맙네.”

질은 둘이 대화하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어요.

답지 않게 탈리안의 틱틱거리는 말에도 짜증을 부리지 않고 작게 웃는 라피아와 그런 라피아에게 과한 짜증까지 내지는 않는 탈리안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사이가 꽤 좋아졌나 봐요.

“…탈리안 언니, 저한테 할 말 없어요?”

그러다 힘겹게 입을 떼서 한다는 말이, 탈리안에게서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말이었죠.

탈리안이 곁에 없는 동안에 쌓인 게 많았을 거예요.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자신을 떠나야 했던 이유, 감옥에서 눈을 뜨자마자 모진 말을 했던 이유 같은 것들 전부요.

이 두 가지 말고도 엄청 많을 거예요.

셀 수도 없이, 하루를 전부 쓰더라도 말할 것이 남아있을지도 몰라요.

탈리안도 그걸 알고 있는 것처럼,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 질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어요.

비에 옷이 젖는 것도 상관 않고 아주 천천히.

“…둘이 이야기해, 잠깐 빠져줄게.”

눈치 빠른 라피아는 자리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질과 탈리안만 남아버리자 주변의 공기가 확 가라앉았어요.

탈리안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는 흐릿한 빛이 돌아보는 이를 무안하게 하는 분위기가 담겨있었어요.

당장이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담기지 않았음에도 마주하기 어려운, 그런 눈을 하고 있었죠.

“질, 우선….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저 때문에, 질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했어요.”

탈리안은 제자리에서 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꺼냈어요.

옆에 앉지도 않고, 질의 가까이에 가는 것을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요.

“언니, 제가 지금부터 묻는 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왜, 왜 만나자마자 했던 말이 돌아가라는 말이었던 거에요?”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조금이라도 질이 안전한 방향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무엇보다 그때는 제가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던 때라서….”

베리아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탈리안만이 알 테지만 거짓말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는 말은 진심이겠죠.

“핑계는 대지 마세요. 정말, 그게 다예요?”

“…질이 위험하니까, 도망쳤으면 했던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모질게 말했던 게 전부예요.”

“제가 언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에요?”

하지만 질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이것밖에 없었죠.

그런데 탈리안은 계속해서 질의 안전을 생각했다느니 뭐니 하며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죠.

핑계를 대지 말라며 날이 선 대답을 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에요.

무엇보다 자신은 베리아가 보여주는 환상에 오랜 시간 휘둘리고서도 멀쩡한 정신으로 탈리안과 대화 중이니까요.

“질…. 베리아의 감옥에서도 말했었지만, 저는 마군주에요.”

“알아요. 언니한테도 들었고, 라피아 언니한테도 들었고, 베리아한테도 들었어요.”

역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걸 보면 질은 이미 탈리안이 마군주라는 것을 받아들였나 봐요.

하기야 베리아와 싸우고 뒹군 시간이 얼마인데, 이 정도 준비가 안 되어있는 것도 이상하죠.

다만 탈리안은 어딘가 불만인 것처럼 보여요.

“…그렇다면 질도 알잖아요. 저는, 저는 질의 가족을 죽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에요. 용서해달라며 빌어도 모자랄 짓을 한 거예요.”

“그럼 빌면 되잖아요. 용서를 빌고 나서, 저한테 용서받으면 되는 일이잖아요!”

질이야 쉽게 말하고 있지만, 탈리안에게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을 죽게 만든 죄를 지은 거예요.

굳이 이런 무거운 죄가 아니더라도, 죄를 저지른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죄책감에 짓눌리고 있을 테죠.

그렇기 때문이었을 거에요.

질에게 마나의 각인이며, 스태프며, 책이며, 옷부터 해서 집도 준비해주고 심지어는 마법 학원에 입학하게 해준 이유가.

모두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었을지 누가 알겠어요.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원인이 자신에게 있으니까요.

“질은 제가 밉지 않아요?! 마군주라는 사실을 숨기고, 가족을 죽인 장본인이 구세주 행세를 하며 당신을 돌본 거예요! 이런, 속이 시커멓고 죄악으로 가득 찬 몸인 제가 대체 왜 좋다는 건데요!”

“다 언니 탓이잖아요!! 제가 얼마나 고민했다고, 얼마나 망설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족을 빼앗아간 게 어쨌는데요! 결국, 언니가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텐데!!”

“당신의 모습에서 제 과거를 엿보고, 자기만족으로 과거를 자신의 과거를 구한 것만 같은 만족감에 빠져 살았다고요! 이게 어떻게 용서받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소름이 끼치지 않나요? 자기만족도 있겠지만, 베리아가 말했던 것처럼 저는 비틀렸어요! 당신에게 비틀린 애정을 주고, 바라고 있었다고요!”

서로가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으니 대화는 점점 격해져만 갔어요.

앉아있던 질도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탈리안에게 소리치고 있으니 말 다 했죠.

이렇게 대화가 풀리지 않을 줄은 몰랐던 거에요.

탈리안은 질이 자신을 미워하기를 바랐을 테고, 머릿속에서도 그런 질이 쉽게 그려졌으니까요.

이렇게 강하게 나올 거라고는, 자신에게 소리치며 옆에 있어 달라고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만큼 탈리안이 없는 동안 질이 얼마나 외로워하고 힘들어했는가를 알 수 있기도 하지만….

“제가 괜찮다고 하잖아요! 왜 이렇게 제 마음을 몰라주는 건데요! 언니도 예전엔 저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가족이 되어달라고요!”

“저는 당신이 미워한다고 하면 욕먹을 준비도, 맞을 준비도, 목숨을 끊을 준비도! 전부 다 해놨었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좋다고 말하면…! 저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

용서받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질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으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탈리안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어요.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죠.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면 꽉 막힌듯한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오는 유형의 사람이.

물론, 탈리안에게는 이외에도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죠.

가령 심한 잘못을 했는데도 그런 잘못 따윈 상관없다며 받아주려는 질이라던가.

“그러니까 솔직하게 제 옆에 있으면…!”

“그런 문제가 아닌 걸 질도 알잖아요!! 중요한 건…. 제가, 못 버티겠다는 거예요…. 질에게 몹쓸 짓을 해서, 괴로워서…!”

“언니가, 괴롭다고요? 저한테 몹쓸 짓을 해서? 진짜로 그걸 알고 있다면, 언니는…. 저한테 이러면 안 돼요. 그냥 조용히…. 옆에 있어 달라고요. 언니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고인 눈물이 흘러내린 것은 질이 먼저였어요.

‘슬퍼서’보다는 ‘이렇게 말을 안 들어주는 거 보면 싫은 건가? 짜증 나’ 같은 화가 담긴 눈물을요.

옆에 있어 달라는 데도 몇 번이고 자신이 할 말만 하는 것을 보면, 탈리안이 자신이 하는 말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탈리안은 질이 소리 없이 우는 걸 보자마자 갑자기 태도를 바꿨어요.

“질은 이런 저라도 괜찮은 건가요…? 당신의 가족을 빼앗아간 사람을 곁에 두는 건데도 괜찮다는 거예요?”

“답답해…. 마지막에 와서도 이렇게, 망설이기만…. 내가 괜찮다고 했는데…!”

질은 이 이상 대화를 이어가는 걸 포기하고 탈리안에게 천천히 다가갔어요.

양팔을 탈리안의 목 높이까지 올려서요.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까지 더해지니 누가 봐도 화난 것을 알 수 있었죠.

“질? …흐윽!”

자신을 때리기라도 하려는 줄로 알았던 탈리안은 이상한 소리와 함께 눈을 질끈 감아버렸어요.

그렇지만 탈리안이 상상하던 폭력은 시간이 얼마가 지나든 찾아오지 않았어요.

대신,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 느낌이 들었어요.

욕을 듣는다거나, 맞는다거나, 죽여도 달게 받는다더니….

정작 질이 무섭게 다가오니까 겁먹고 눈을 감아버리네요.

“자신만만하게 말해놓고 왜 겁먹어요?”

“저, 그러니까…. 질이 조금, 무서워 보여서….”

평소라면 절대로 그렇지 않겠지만, 질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니 충분히 무섭게 보일만 했어요.

양손이 자신에게로 향하니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테고요.

그렇지만 질이 탈리안에게 한 거라고는 따뜻한 포옹이 전부였는걸요.

거짓말쟁이라며 욕먹어도 어쩔 수 없어요.

“한심해, 내가 알던 언니가 아니야, 바보 같아요. 키는 나보다 작은데 마법만 잘 쓰고….”

“질…?”

물론…. 어느 정도 잘못한 게 있으니까 탈리안에게 바보 같다거나 키가 작다고 말해도 되겠죠.

그동안 고생한 게 있으니까 탈리안도 이해해줄 거에요.

“사람 말은 왜 이렇게 안 듣는지 모르겠어요.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연을 끊고 살았을 거라구요.”

“저, 저기, 질?”

그런데 끝날 줄을 모르네요.

탈리안도 한 번이면 모를까 계속해서 질이 비아냥거리니 당황했잖아요.

질에게 안긴 것까지는 좋은데, 그 뒤로 들려오는 말들이 하나같이 탈리안의 가슴을 후벼 파네요.

사실만 말하고 있어서 반박할 수도 없으니 더 그럴 거예요.

“그런데도, 언니가 너무 좋은 걸 어떻게 해요. 마군주인 게 뭐 어때서 그래요. 언니가 일부러 제 가족을 죽인 게 아니잖아요. 알고 있었다고는 해도, 언니한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잖아요…. 원수도 그 자리에서 갚아줬잖아요…! 언니가 저한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단 말이에요!”

“저도 질이 좋지만, 하지만 제가 지은 죄는….”

“시끄러워요! 듣기만 하란 말이야!”

탈리안은 질리지도 않고 자신이 잘못했네, 뭐네 하며 말을 이어가려 했어요.

이어가려 했지만, 벽으로 몰리다가 머리를 부딪쳐버려 그러지 못했죠.

“악?! 아프…. 지 않아…?”

“언니가 알려줬던 마나 배리어, 이제는 꽤 잘 쓰지 않아요?”

“위험하잖아요!”

질이 넘어트리는 순간에 배리어를 만들어내어 탈리안의 머리를 보호해냈네요.

한 달이라는 시간을 잠에 빠져 살았으면서, 나오자마자 마법을 사용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걸까요?

자신의 몸 상태야, 자신이 제일 잘 알겠지만, 탈리안도 걱정할 거에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거라면, 지금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마세요.”

“대답도 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읍?! 으응…!”

이번에도 탈리안은 말을 이어갈 수 없었어요.

질이 스스로 탈리안에게 입을 맞춰왔거든요.

난폭하게 자신의 입속을 헤집고 다니는 질의 혀 때문에, 탈리안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어요.

누구한테 배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혀를 섞어대던 탓이었죠.

기억에도 없을 텐데, 마치 베리아가 헤집어놨던 흔적을 모두 지우려는 것처럼요.

“하아…. 그, 마안…! 지일…! 흐읏?!”

어쩌다 한번 질이 입을 떼어놓으면 그만하라고 말하려다가도, 질이 목을 물어와서 말끝을 흐리는 탈리안이에요.

양손도 질에게 잡혀있어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하고 있으니 도망칠 수도 없었어요.

상당히 오랜 시간을 자고 일어난 사람의 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예상외로 질의 힘이 강했거든요.

베리아에게 그만큼 당하고서도 요령이 생기지 않았던 것은 단 한 번 겪어보았던 탓인가 봐요.

“그만, 그만 해요!”

“후으, 읏…. 저는…. 언니한테 이런 짓을 할 정도로 언니를 좋아해요…. 재앙을 일으킨 게 어쨌는데요?! 구해줬으면 된 거잖아요! 잘못했으니까 옆에 못 있겠다구요? 그러니까 책임을 지라구요! 제 옆에 있겠다고!”

“질….”

“…애초에 잘못했고 하지 않았고는 상관없었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옆에 있어 달라구요…. 그렇게 하겠다면, 고개만 끄덕여요. 아니라면 언니가 제 말을 들어줄 때까지 절대 놓지 않을 테니까!”

방금만 하더라도 질이 이런 과격한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이 박혀있어서 놀랐던 탈리안이었을 텐데.

절대 놓지 않는다는 말에 조용히 침을 삼키고선 고개를 끄덕였어요.

방금만 해도 놀랄만한 일을 했는데, 놓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어쩌면, 질은 탈리안이 거절하길 바랐을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좀 마음에 드네요. 우리 목욕하러 가요.”

“네? 갑자기 목욕이라니, 질, 잠시만…! 앗! 이끌지 마세요! 질!”

고개를 끄덕인 탈리안을 보자마자 질은 표정을 풀고 억지로 팔을 잡아 이끌며 욕실로 데려갔어요.

방금까지 굳은 표정으로 탈리안을 못 움직이게 해놓고 말이에요.

세게 잡아당기는 탓에 중심을 잘 잡지 못하는 탈리안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했어요.

베리아의 마기 덕분에 이상해진 질의 상태와 행동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것은 덤이었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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