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일상 속의 불청객 (8)
* * *
문을 건너, 집에 도착한 질은 고개를 숙인 채로 바로 방으로 향했어요.
기억을 공유하는 분신인 실리아에게 있어서 그런 질이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도 붙잡을 수 없었죠.
멈춰 세우려던 손을 다시 거둬들여 그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질이 방에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망설이던 실리아는 뭔가 결심한 듯이 질의 방문 앞으로 가서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어요.
“질, 괜찮으면 실리아가 하는 말을 들어볼래요? 듣겠다면 벽이나 바닥을 한 번만 ‘콩’하고 쳐주세요.”
질의 반응을 별로 기대하지 않던 실리아였지만, 의외로 방 안에서 ‘콩!’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래서인지 좋은 의미로 놀란 실리아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방 쪽을 바라보다 작은 미소를 띠고, 눈을 감고선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제르반은 말이죠? 질처럼 입양된 아이였어요. 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날 때부터 버려졌던 아이라는 점이었을까요.
그런데 어느 날 고아원에서 마나를 보고 느끼다가 원장에게 그 재능을 들켜, 마법에 재능이 없는 알렉세이 귀족 집안에 팔려나간 거예요.
그렇지만 알렉세이 가의 자제로부터 계속되던 괴롭힘으로 집에서 지내는 걸 싫어하게 되었죠.
그가 도피처로 생각한 장소는 자신을 다 쓰러져가는 고아원에서 꺼내준 양아버지와 양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재능을 살릴 아스티엘 마법학원이었던 거에요.
하지만 왜?
왜 자신을 괴롭히는 형제로부터 도망쳐온 걸까요? 힘도 있었겠다 복수하면 되었을 일을.
그건 제르반의 고아원 시절, 자기보다 어렸던 동생들을 챙기던 그의 착한 심성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어요.
험한 세상에서 얕보이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말투는 조금 거칠어졌지만….
절대로 쉽게 남을 상처입히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며,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죠.
당연히 질이 생각하는 대로, 심성이 착했다는 이유만으로 알렉세이 가의 자제에게 해를 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요. 제르반이 동생들을 두고 고아원을 나올 리가 없잖아요?
제르반은 고아원을 나올 때 이런 약속을 했어요. ‘저를 대신해 고아원에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세요.’라는 약속을요.
그 약속 때문이라도 제르반은 조용히 집을 나온 거였어요.”
제르반의 옛날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둘째치고, 실리아는 말하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문 바로 뒤에서 스르륵, 하는 소리가 났거든요.
그리고 곧바로 질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런데 제르반 오빠는 왜 저를 구한 거예요? 지켜야 할 동생들도 있으면서, 왜…. 죽으면 동생들을 보는 것도 못하게 되는데!”
“그가 보기에 질이 자신의 동생들과 모습이 겹쳐 보였던 건 아닐까요? 꼭 그렇지 않더라도…. 동생들에게 떳떳한 모습의 형과 오빠로 있고 싶었을 거예요.
만약 질을 두고 도망쳤더라면 제르반이 고아원의 동생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설 수 있었을까요? 아닐 거에요.
…질, 사람은 저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있어요. 자신의 꿈과 목표를 포기하더라도 지켜야 하는, 그에 필적하는 무언가가.
동생들에게 언제나 부끄럽지 않은 형과 오빠로서의 모습을 지켜내겠다는 것. 그게 제르반에게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자신의 신념이었던 거에요.
질을 구해낼 때의 제르반의 마음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을 거예요. 그의 마음을 무시해서는 안 돼요.”
“하지만, 이렇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거라면…. 이렇게 슬프게 할 거라면….”
더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질의 모습에 실리아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일어서서 멋대로 문을 열어버렸어요.
평소에는 안쪽으로만 열리던 문이지만, 애초에 방 하나를 순식간에 만들고 없앨 수 있는 능력자라면 밖으로 열리게 재구축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죠.
덕분에 질은 갑자기 열려버린 문 너머로 실리아를 보고선, 약간은 얼빠진 얼굴을 했어요.
실리아는 엉망이 된 얼굴을 하는 질을 힘껏 끌어안았어요.
“잠가, 잠가놨었는데…?”
“실리아는요, 제르반을 강의에서 본 기억만 있어요. 그마저도 실리아는 탈리안의 기억에 의지한 경험이지만요. 그래도, 실리아는 그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그가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질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일이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몰라요.”
“…언니? 울어요?”
분신이라고는 하나, 탈리안이라고 볼 수도 있는 실리아가 운다는 것은 질에게 있어 충분히 놀랄만한 부분이었어요.
분명히 탈리안보다 더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실리아지만, 질과 특히 더 친한 실리아라고 하지만요.
그렇다고 울기까지 할 줄은 몰랐을 거예요.
질의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의 어깨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그럴 리는 없었죠.
굳이 대답까지 듣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거예요.
“…도둑한테 훔쳤냐고 물어보면 훔쳤다고 말할 것 같나요? 어쨌든 질, 제르반의 죽음을 너무 슬프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해요.
그리고 짧은 인연이었더라도 제르반의 성격이라면 질을 지켜내기로 마음먹었을 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질이 자신의 죽음으로 슬퍼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바르게 성장하기를, 평소의 질처럼 지낼 수 있기를.”
부정 아닌 부정을 하는 실리아는 질에게서 떨어지기 전에 눈물을 닦아내고 이야기를 이어갔어요.
질은 긴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지만, 실리아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어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질을 보고 실리아는 무슨 일이냐며 물어봤죠.
“저는 제르반 오빠처럼 될 수 있을까요?”
“제르반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질의 말에 실리아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어요.
비유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물음표를 띄웠어요.
마나를 이용해서 질에게 보라는 듯이 빛나고 큼지막한 물음표를 만들어냈죠.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 같지만, 타이밍이 좋지는 않은 거 같은데.
그래도 질이 피식하며 웃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네요.
“언니도 참…. 그래서 제가 할 말이 뭐였냐면요,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예전에 제가 재앙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낸다고 했었잖아요.”
분명히 그런 말을 했었죠.
그 말을 지켜내려면 아직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만요.
그런데 갑자기 실리아의 표정이 진정되는 듯하더니 이내 평소의 탈리안과 똑같은 얼굴을 했어요.
이전에 본 적 있는 상황이죠.
“질, 잠시 실리아의 몸을 빌렸어요.”
“탈리안 언니예요?”
“네, 실리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직접 해야 할 말인 것 같아서요. 바쁘니까 본론부터 말하자면, 질은 제르반이 아니에요.”
탈리안의 말에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하는 질이에요.
뜬금없이 질은 제르반이 아니라니, 제르반처럼 될 수 있냐고 물어봐서 그런 걸까요.
그렇다면 그가 한 것처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뜻하는 것에 대한 답일 수도 있겠네요.
탈리안의 말처럼 굳이 희생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을 도울 방법이야 많으니까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에는 경중이 없어요. 제 말을 이해할 수 있겠나요?”
“꼭 제르반 오빠처럼 목숨을 걸거나 위험에 맞서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맞아요. 적어도 질이 이번에 마주친 뿔 3개짜리…. 편하게 ‘삼뿔이’라고 하죠. 적어도 삼뿔이를 상대로 혼자서 이겨 낼 수 있을 때까지는 참아달라는 거에요. 그때가 오기까지 제가 도와줄 테니까요.”
질은 탈리안의 말을 듣더니 어딘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것처럼 잠시동안 말이 없었어요.
5초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아앗!’이라며 큰 소리를 낸 뒤 탈리안에게 따지듯이 말했죠.
“그럼 언니, 제가 만약 삼뿔이를 영원히 혼자서 이기지 못하게 된다면…. 그럼 언니는 계속 제 옆에 있는거에요?”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치만, 평생 언니랑 같이 있고 싶은걸요….”
“그!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이유를 말해주는 데에 있어서 곤란한 부분이 있는지 탈리안은 급히 말을 돌렸어요.
질은 그저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탈리안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에요.
탈리안의 차가운 피부가 약간 불그스름하게 변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요.
“달라요?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나중에, 나중에 알려줄게요. 지금은 바쁜 일이 있으니까!”
“앗, 잠깐만요! 언니!”
“…탈리안도 참, 말도 없이 실리아의 몸을 빼앗았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부끄럽다고 도망가기는….”
어느샌가 몸의 주도권을 받아버린 실리아는 투덜거리며 질을 껴안았어요.
모든 분신의 근원은 탈리안이지만 원할 때마다 주도권을 빼앗기는 부조리함을 질을 독차지하는 것으로 풀고 싶은 거겠죠.
그렇지만 예전이라면 질이 작아서 인형을 안는듯한 맛이 있었을 텐데, 몸이 성장해버린 지금은 어떤 느낌을 받기 위해 질을 안는 걸까요.
“탈리안 언니가 부끄러워했어요?”
“아~ 아, 질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마주 보고 있는 게 힘들었나 봐요.”
“탈리안 언니도, 실리아 언니도 알 수 없는 말만…. 저 실리아 언니한테 부탁이 있어요.”
사랑스럽다는 말에 꼼지락거리면서 얼굴을 아예 파묻어버리는 질이에요.
조금의 시간이 흘러 진정이 된 뒤에야 부탁이 있다며 곁에서 떨어져나왔죠.
부탁이라 봐야, 뭐든지 들어줄 텐데 상당히 비장하게 말하는 모습이에요.
그리고 예상대로 실리아는 뭐든 들어준다 답했죠.
“이 스플래시 밤을 가공해서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해주실 수 있어요? 꼭 가지고 다니고 싶어요.”
“그럼 깨끗하게 해서….”
스플래시 밤을 둘러싸고 있는 마나의 장막은 점점 효력을 잃어, 이미 질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물이 터져 나온 상태였죠.
그렇기에 승급 시험에 필요한 아이템으로서의 가치는 없었어요.
게다가 실리아가 깨끗하게 하자는 말을 한 이유가, 일단 구해오긴 했다고 억지를 부리기에도 너무 더러워져 있었거든요.
“아니에요, 약간 더럽혀졌다고 해도 이대로 쓰고 싶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실리아 언니가 어떻게 제르반 오빠의 일을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던 거에요?”
“그, 그건…. 저를 제외한 분신들이 그의 정보를 얻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오빠의 정보를요? 너무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뭐 때문에…?”
“그의 가족들에게 그가 의뢰 도중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만 했으니까요. 그 뒤에는 질에게 제르반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개인적으로 물어본 것도 있고요.”
결국은 질을 위로하고 진정시키기 위해서 분신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거네요.
하지만 기뻐해도 될만한 그 말에 질은 의문을 품은 것처럼 보였어요.
“언니는 왜 그렇게 저를 위해서….”
뭘 위해서, 왜 자신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는지에 대한 의문.
분명 질과 탈리안은 서로가 필요에 의해 같이 지내고 있었어요.
질은 자신이 있을 장소와 보살핌을 탈리안에게서 얻으려고 했었으며, 탈리안은 질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빗대어 보기에 가만 놔둘 수 없었죠.
적어도 이 둘이 처음 만났을 때는 그랬었어요.
이후에 시간이 지나며 지금에 와서는 처음과 비교해 상당히 가까워진 사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잘해주려는 탈리안의 속을 질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제가 말하게 된다면 탈리안이 싫어할 것 같은데, 그래도 듣고 싶어요?”
“그럼 나중에 직접 물어볼게요. 대신, 저…. 오늘은 저랑 같이 집에 있어 줘요, 언니.”
“질의 부탁이라면 하루 종일 옆에 있을 수도 있어요.”
숨겨진 본심과도 같은 걸 물어보기에는 상대가 잘못되긴 했어요.
그래서 질도 별말 없이 나중을 기약하며 빠른 포기를 했죠.
알려주지 않겠다고 완전히 거부당한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는 마음속에서 제르반을 기리기 위한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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