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영과 일훈 –다섯- (6/7)

남영과 일훈 –다섯-

 0 

 “영아, 우리 점심은 쫄면 먹지 않을래?”

 창고 옆 쪽방에서 낮잠을 자던 사장님이 계산대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나는 계산대 의자에 앉아 유리문을 주시하던 자세 그대로 시선을 들었다.

 사장님은 자다 깬 사람 같지 않게 맑고 또렷한 눈으로 나를 보며 웃고 있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틀어 올려 쪽을 찐 머리. 아침 출근 때와 다름없는 고아한 옷차림.

 사장님은 귀례골동품점이라는 뭔가 예스러운 가게의 주인이다.

 사장님의 이름은 상호명 그대로 귀례.

 사장님은 나를 ‘영아’라고 부른다.

 귀례골동품점 맞은편 골목 어귀엔 다정분식이라는 분식집이 있다. 사장님과 나의 단골집. 싸고 맛있는 집이긴 한데 아르바이트생이 좀 싸가지가 없다. 다정분식의 싸가지 없는 아르바이트생 하정과는 이래저래 말도 트고 인사도 하며 지낸 지 이미 반년이 넘은 상태다. 지난겨울, 귀례골동품점에 면접을 보러 왔을 때부터의 인연이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나를 확인한 정이 눈썹을 들어올리며 “왔어?”했다.

 “쫄면 두 개 포장.”

 짧게 말하고 계산대 근처 자리에 앉으려는데 눈에 밟히는 것이 있다. 주방 쪽과 가까운 구석진 자리, 나와 마주보는 위치에 일훈이 앉아 있다. 일훈의 옆엔 동기로 보이는 남자가 하나. 일훈의 앞엔 굵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가 하나.

 일훈은 근처에 있는 세 개의 대학 중 가장 명문이라는 곳에 다닌다. 그렇다는 것을 다만 스치며 얻게 된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알게 됐다.

 “겨울에 쫄면을 먹냐. 따뜻한 거 먹어. 따뜻한 거. 만둣국도 있고 떡국도 있고 떡만둣국도 있는데.”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정이 선심 쓰듯 요구르트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주방에 벌써 주문 넣었잖아.”

 무심하게 대꾸하고 요구르트 뚜껑을 따는데 일훈과 눈이 마주쳤다. 1초 정도 마주쳤나.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자연스레 비껴가는 시선에, 아 마주친 게 아니구나, 하고 속으로 주억거렸다. 내가 일방적으로 본 거구나.

 지난 3월, 우연히 맞닥뜨린 일훈을 모른 척 무시한 이래, 나는 몇 차례, 몇 십 차례나 더 일훈을 무시했다. 일훈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못 들은 척하거나 ‘누구세요?’로 차갑게 응수했다. 여지를 주지 않았다. 완전히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굴었다.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일훈은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쳐도 모르는 낯선 사람인 듯 옷깃조차 스치지 않고 지나간다. 지금처럼 눈이 마주쳐도…… 아니, 마주친 게 아니지. 아무튼 지금처럼 한 공간에 있어도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무심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일훈의 테이블을,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곁눈질하고 있다.

 무심하게.

 무심한 듯 유심하게.

 일훈은 신장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런 사람은 먹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들었다. 싱겁게 먹고 음주는 삼가고 커피도 삼가고 하나뿐인 신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아무리 건강해도 미리미리 잘, 알아서.

 너는 미리미리 잘 알아서 하고 있나?

 그것이 의심스럽다.

 강박적일 정도로 불안해한다는 아주머니는 일훈을 어떻게 혼자 살게 내버려두는 걸까.

 일훈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는 모양이다.

 그것 역시 나는 알고 있다.

 “쫄면 두 개 포장.”

 정이 내미는 봉투를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끝내고 나가려는데 정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삶은 계란 두 개를 서비스로 넣었다고 눈을 찡긋거렸다.

 내게 기대다시피 붙어있는 정을 팔꿈치로 매몰차게 떼어냈다. 전봇대처럼 커다란 정이 “쳇”하고 혀를 차며 마지못해 떨어져나갔다.

 “서비스 줬다는데 고맙다고 뽀뽀는 못해줄망정.”

 투덜거리는 정에게 “너 그거 아저씨들이 하는 성희롱 단골 멘트야.” 쏘아주고 분식집을 나왔다.

 * 

 살아있는 생물의 살고자 하는 본능은 생각보다 강하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생물의 죽고자 하는 의지는 얼마나 강해야 자살에 성공할 수 있을까.

 최근에 그런 의문이 생겼다.

 출근을 하면 제일 먼저 사복을 벗고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골동품점에 웬 유니폼이냐 하겠지만 귀례골동품점엔 희한하게도 유니폼이 있다. 로코코풍의 미니드레스로 나는 이것을 춘추복 하복 동복 이렇게 계절별로 두 벌씩, 총 여섯 벌을 지급받았다.

 드레스를 입을 땐 스타킹이 필수여서 요즘엔 속옷보다 스타킹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겨울에 신을 것이 모자라 보여서 지난 주말에 백화점을 갔다. 흰색과 검은색 실크스타킹을 각각 두 개씩 산 후 갖가지 기획 상품들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잠시만요”하고, 한 여자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처음 보는 여자인데 어쩐지 낯이 익은 것도 같아 조금 묘한 느낌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를 어두운 갈색으로 염색하고 원피스에 반코트를 차분히 갖춰 입은 여자는 둥근 구두코로 바닥을 톡톡 차며 “저기……”하고 내 가슴께를 바라봤다.

 “혹시 K고등학교 다니지 않았어요?”

 긍정의 의미로 침묵했더니 여자는 “송일훈 알죠?”하고 그제야 내 눈을 쳐다봤다.

 기억이 났다.

 여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여자의 얼굴은 기억에 선명히 떠올랐다.

 영어시간, 멀리서부터 복도를 뛰어오던 일훈의 발소리. 다급하게 뛰어가는 일훈의 등에 죽은 듯이 업혀있던 여자아이. 업혀있던 당시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후, 일훈과 한 반인 그 애를 여러 번 보았었다. 수줍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일훈과 대화를 나누곤 하던 그 애를.

 그 애가 바로 이 여자.

 그런 생각으로 여자를 잠자코 마주봤다.

 “할 말이 있는데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갑자기 바뀐 말투완 다르게 여전히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여자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여자는 백화점 커피숍에 앉아 식어가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이런 말들을 했다.

 나는 김가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일훈과 한반이었다. 너도 알고 있을 이선화는 둘도 없는 내 친구로 그 사건 이후 선화는 시체처럼, 도무지 살아있는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는 몰골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선화는 우울증으로 두 번이나 입원치료를 받았고 최근엔 네 번째 자살기도를 했다.

 “선화가 그렇다는 걸, 너와 송일훈은 모르지. 알면 그렇게 멀쩡한 얼굴로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모르니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거겠지. 사과도 하지 않고. 그래도 한 번은 사과해주지 않을래. 미안하다고. 부탁이니까.”

 시종일관 차분한 목소리로 끝까지 할 말을 마친 가나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곧은 눈동자로 내 눈을 직시했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거리낌 없는 두 눈동자.

 그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너는 쓰레기야.

 네 번의 자살기도를 했지만 네 번 다 실패. 그렇다는 건 죽고자하는 의지가 겨우 그 정도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실 그 애는 죽기 싫은 게 아닐까. 죽기 싫은데도 자꾸 시도해버릇하면 실수로 성공해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잘 지켜봐. 나한테 이런 말할 시간에 네 친구나 찾아가라고.

 예전 같았으면 스스럼없이 이렇게 말해버렸을 나는 역시 쓰레기인가.

 가나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그건 좀 아니다.’하고 분해하기도 했다.

 일훈을 나와 세트로 묶어버리는 건 좀 아니잖아. 그건 그 애에게 너무 가혹하잖아, 하고.

 * 

 퇴근길, 대로변 근처의 편의점 앞에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는 일훈을 봤다. 간판 아래 아이스크림 냉동고 옆에서 일행들과 함께였다.

 일행 중 남자 하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여자 둘은 일훈을 향해 큰소리로 웃고 있었는데 일훈은 표정 없이 맥주만 마시고 있었다. 검정색 다운점퍼를 입고 머리카락이 조금 자라 눈썹을 덮고 있는 모습이었다.

 2년 전 J시로 찾아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건 생김새뿐으로 분위기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예전엔 장난기 많고 세상물정 모르는 소년이나, 바보 같고 엉뚱한 별종쯤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봐도 소년 같진 않고 남달리 별종 같지도 않다.

 어른이 되었으니까.

 너도 나도 어른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술은 안 되지.

 안 되지. 술은.

 그런 생각으로 편의점에 볼일이 있는 척 걸어가 입구 근처에 있는 일훈에게 일부러 부딪쳤다. 세게 부딪치자 일훈의 손에 들려있던 맥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캔에서 튀어나온 거품이 내 다리까지 튀었다.

 “미안해요.”

 한 번 흘깃 보고 건성으로 사과했다.

 “뭐야? 저 여자.”

 “사과하는 태도가 뭐 저러냐.”

 분개하는 일행들에게 “됐어.”하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대꾸하는 일훈의 목소리를 들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볼일이 없었으므로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껌 한 통을 사서 나왔다.

 일훈은 여전히 일행들과 함께, 그러나 더 이상 술은 마시지 않고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편의점 앞에서 일훈과 함께 있었던 여자들 중 한 명이 골동품점에 손님으로 찾아왔다.

 손님이랄까. 이것저것 묻기만 하고 물건은 사지 않았으니 손님이라고 할 수는 없나. 어쨌든.

 그 여자는 사장님의 애장품인 월리처사의 주크박스를 가리키며 얼마냐고 물었다.

 1940년대에 생산된 그 제품은 복원상태가 좋아 천만 원을 호가하는 물건으로 파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라고 대꾸했다.

 “그럼, 대여는요? 대여도 안 돼요?”

 “대여도 안 됩니다.”

 “그럼 왜 진열해둔 건데요?”

 “구경은 하시라고요.”

 내 말투가 이상했던 걸까. 여자가 불쾌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저기요, 우리 자주 마주친 것 같은데 이 근처 살아요?”

 뜬금없이 신상을 묻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과에 송일훈이라고 있는데 걔 알지 않아요?”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 나를 보던 여자는 “맞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봄에 자주 봤잖아요. 일훈이가 말 걸어도 계속 모른 척했잖아요. 그거 그쪽 맞죠?”

 재차 묻는 말에도 대꾸하지 않고 “그럼, 더 둘러보세요.”하고는 계산대로 돌아왔다. 그쯤에서 물러날 줄 알았는데 여자는 계산대까지 끈질기게 쫓아와서 “송일훈이랑 무슨 관계예요? 전여친? 아니면 배다른 남매나 그쯤?”하고 선을 넘은 질문을 계속해서 해댔다.

 ‘진상손님은 재량껏 쫓아내도 된다.’는 것은 판매 지침서에도 적혀있는 내용으로 내가 이 여자를 소금 뿌려 내쫓는다 한들 문제될 게 없는 상황이었다.

 1분만 더 참자.

 그렇게 속으로 초를 세기 시작했는데,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걘 왜 안 웃는대요?”하고 혼잣말처럼 푸념하듯 물었다.

 “원래 그랬어요? 웃는 걸 진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러게.

 송일훈이 웃는 걸 나도 본 적이 없다.

 재회 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내 적성에 가장 맞지 않는 직업을 고르라면 그건 아마 서비스직일 것이다.

 그런데 판매도 서비스직이지 않나.

 따지고 보면 서비스직이지.

 서비스직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귀례골동품점에 면접을 보러 온 이유는 구인광고에 쓰인 문구 때문이었다.

 ‘출중한 암기력. 그 외엔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벼락치기만으로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내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면접을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손님은 왕이 아니다. 그러니 왕 대접 해주지 말라는 것은 사장님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인간 대접만 해주라고. 그 이상은 필요 없다고.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내 태도를 걸고넘어지는 손님이 있을 때마다 사장님은 그렇게 말했다.

 우리 영아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나는 물건 값에 영혼까지 판다곤 한 적 없다.

 좋은 것이 좀처럼 없는 내게도 사장님의 그 말은 좋았다.

 좋다고 생각했다. 귀례라는 이름을 가진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사장님이.

 가능하면 오래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둬야 할까.

 요 며칠 그런 고민을 한다.

 일훈은 아직 대학교 1학년.

 기말고사 기간일 텐데도 학교 앞을 어슬렁거리며 동기들과 잦은 만남을 가지는 듯.

 게다가 내년이면 겨우 2학년.

 일훈이 졸업할 때까지 계속 맞닥뜨릴 생각을 하면 자신이 없다.

 무엇이 자신 없냐면, 지속해서 그 애를 무시할 자신이.

 기억을 잃은 척 혼신의 연기를 할 자신이.

 언젠가는 분명, 한 번쯤 터질 것이다.

 단지 시간문제일 뿐.

 그만둘 거면 언제. 가능한 한 빠를수록 좋나? 그런 생각들에 골몰하느라 퇴근길 마트를 지나쳤다. 하는 수없이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서 정을 만났다.

 정은 12월의 추운 날씨에도 얇은 바람막이만 걸치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지난 2월,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다. 늦겨울 무척 추운 날이었는데도 정은 맨발에 조리만 신고 있었다. 다정분식에서 우동을 시켜놓고 앉아 있다가 막 배달을 끝내고 들어온 정에게 안 춥냐고 물었다. 발가락이 앵두처럼 발갛게 얼어있었으니까. 그때 정은 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냐는 듯이 나를 봤다. ‘아 깜짝이야, 갑자기 말 걸고 지랄이야’ 빨개져서 투덜거리다가 ‘반했냐?’ 묻고는 ‘피곤하니까 고백하지 마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게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나르시시스트 증세였다는 건 시간이 꽤 흐른 뒤에 알았다.

 “우리 가게 단골 중에 진짜 멀끔하게 생긴 놈 하나 있거든. 멀끔하다고 할까…… 계집애들이 껌뻑 죽게 생긴 면상인데…… 키도 크고 암튼 존나 잘생겼어. 잠깐, 그 새끼 너도 알잖아. 지난봄에 자꾸 너한테 작업 걸던 놈. 그 새끼야, 그 새끼. 며칠 전에도 우리 가게에서 보지 않았냐? 야, 나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어떻게 그런 새끼가 대시를 하는데 너는 눈도 하나 깜빡 안 하냐. 암튼 그 새끼가 요즘 나만 보면 똥 씹은 표정을 하는데, 그게 미묘하단 말이야. 대놓고 그러는 게 아니라서 착각인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마냥 웃어넘기기엔 기분이 쎄……하고……”

 플라스틱 의자에 불량하게 기대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던 정은 오징어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그 새끼,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확 조져버릴까.”하고 허세 가득하게 중얼거렸다.

 “너 학교 다닐 때 양아치였지.”

 손에 쥐고만 있던 캔맥주를 따서 마시고는 무심히 물었다.

 “아니라곤 못하지. 양심상.”

 “양아치 짓 어디까지 해봤어?”

 “어디까지라니…… 뭐 수업 째고, 애들 삥도 조금 뜯고, 술담배 하고, 폭주도 조금 뛰고, 별 거 있냐.”

 “사람 죽여본 적은 없지?”

 “얘가 사람 뭘로 보고. 그런 짓은 안 했어. 사람이 양심이 있지 어떻게 그런 짓을 하냐. 야만적이게.”

 내 말을 농담으로 들었는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정이 “어우, 야만적인 계집애”하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걔 건드리면 내가 너 죽일 거야.”

 “어? 뭐라고 했냐.”

 웃는 걸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뜬 정에게 “걔 건드리면 내가 너 죽일 거라고.”하고 친절히 다시 말해줬다.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이게 그렇게 알아듣기 힘들어? 걔 건드리지 말라고. 말도 붙이지 말고 쳐다보지도 마. 난 야만적이라서 너 같은 건 죽인 다음에 생으로 씹어 먹을 수도 있으니까.”

 씹어 먹듯이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도 마시지 않은 맥주는 테이블에 올려두고 편의점을 나왔다. 편의점 문이 닫히기 직전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뭔 소리냐니까?”하는 정의 외침이 들렸다.

 그만둘 거라면 가능한 한 빨리.

 결심이 섰다.

 * 

 다음날인 오늘, 사장님에게 바로 말하려고 했다.

 그만두겠다고. 그러니 새로운 점원을 구할 광고를 얼른 내라고.

 그런데 사장님이 독감으로 출근을 하지 않았다. 전화로 말할까 하다가 하루 이틀쯤 늦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 없다는 생각에 관뒀다.

 오후 4시. 사장님이 일본에서 직접 구해왔다는 우키요에 화집 초판본 두 권을 판 직후였다.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단골손님에게 보내야 할 택배가 있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며 창고에 따로 보관해 둔 상자를 들고 집으로 찾아와줄 수 있겠냐는 요청이었다. 물건만 전달해주고 바로 퇴근해도 된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가 다 죽어가는 사람 같았다.

 화요일이었다. 수요일인 내일은 귀례골동품점의 정기휴일. 이대로 내일까지 쉬고 목요일에 말하면 되려나. 그런 생각으로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코트만 걸친 채 상자를 들고 퇴근했다. 정기휴일 전날은 늘 유니폼을 입고 퇴근한다. 이대로 입고 집으로 돌아가 바로 세탁소에 맡긴다. 그렇게 자주 세탁할 필요 없다고 사장님은 말하지만, 예쁜 옷은 흠집 없이 더러움 없이 입고 싶다는 소녀 같은 마음이 내게도 있다. 내게도 그런 게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결론이 쉽게 나온다.

 예쁘다고 생각되는 건 좀처럼 없다. 좀처럼 없으니까 어쩌다 가지게 된 예쁜 것들은 소중하다. 나 같은 사람이라도 소중한 건 나름대로의 소중함으로 다루고 싶다.

 소중함으로, 소중하게, 다루고 싶다.

 신발은 갈아 신을까 하다가 그대로 에나멜 플랫 슈즈를 신은 채 가게 밖을 나섰다. 드레스에 스니커즈는 아무래도 볼썽사납다. 남들 보기에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 눈에 그렇다는 거다.

 드레스에 에나멜 구두.

 나는 어째서인지 이 조합을 마음에 들어 한다.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했던 욕망이나 억눌려 왔던 욕구. 그쯤이 아닐까 싶은데, 단순히 나도 몰랐던 내 취향을 발견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억눌린 욕구 혹은 취향의 발견을 입고서 12월의 거리를 걷는다. 사람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보도블록이 깔린 언덕을 조심조심 걸어 내려간다.

 언덕 아래 삼거리를 지나면 나오는 주택 단지에 사장님의 집이 있다. 아담한 정원이 딸린 단층 주택으로 나는 그 집에 두어 번 초대받아 가본 적이 있다. 사장님은 그 집에 혼자 살고 있고, 가끔씩 지인들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보글보글 끓는 버섯전골과 담백한 동태전. 묵은지를 썰어 넣은 수제비와 바삭바삭하게 튀겨낸 새우튀김.

 나는 사장님의 집에서 그런 것들을 대접 받았다.

 맛있었다.

 맛있어서 아주 잠깐 아주머니의 요리를 떠올리기도 했다.

 아주머니의 집밥도 맛있었지, 하고.

 할머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도 맛있었지, 하고.

 그런 걸 떠올리면 아주 잠시 마음이 따뜻해졌다가 순식간에 두 배 세 배의 낙차로 차가워졌다.

 사람이 변한다 변한다 했더니 어디까지 변할래.

 있었던 사실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지 마.

 좋은 것만 떠올려 기억을 왜곡시키지 마.

 너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지금의 너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겠니…….

 예상 외로 상자가 무거워서 잠깐 멈춰 선 채 상자를 고쳐들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무슨 생각을 하긴, 하고 속으로 웃었다.

 뻔뻔하게도, 쓰레기네, 라고 생각하겠지.

 가나가 나를 그렇게 봤던 것처럼.

 언덕을 중간쯤 내려왔을 때 일훈을 발견했다. 일훈은 테이크아웃을 전문으로 하는 까페 앞에 친구들과 함께 서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낭패감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무조건 마주치는 위치에 일훈이 서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길로 돌아가기도 곤란했다. 돌아가려면 너무 멀다. 그 먼 길을 가기엔 상자가 꽤나 무거운 것이다.

 일훈이 나를 보고 ‘최남영이네.’라고 생각을 했다 한들 말을 걸어오진 않겠지. 그런 확신을 가지고 길을 따라 내려갔다. 누가 길에 물을 뿌려놨는지 고르지 않은 보도블록 사이로 물이 고여 얼어있었다.

 물의 어는점은 0도씨. 물이 얼어 있다는 건 지금 기온이 영하라는 건가. 아직 12월인데 춥구나, 생각하며 무심코 걷다가 얼어있는 보도블록을 밟았다. 미끄러웠다. 중심을 잡으려 했는데 실패, 그만 균형을 잃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미끄러지는 순간 ‘스니커즈로 갈아 신을 걸’하는 후회가 들었다.

 양손에 상자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십일 자로 뻗듯이 넘어졌다. 바닥에 턱을 찧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지만 여러 가지 상황 상 도무지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지 않았다.

 보도블록에 패대기쳐진 상자에서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와 언덕을 굴렀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물건은 크기 별로 다양한 마트료시카. 그리고 마리오네트.

 물론 새 것은 아니겠으나 새 것이 아니므로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을 물건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일훈의 주목을 끌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 이 순간, 일훈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거의 백퍼센트에 육박한다는 것.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속으로 내뱉으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 백화점에서 사온 흰색 실크스타킹에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 안으로 생채기가 생긴 무릎이 보였다. 살갗이 온통 까져서 붉게 피가 배어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일단 드레스부터 꼼꼼히 살폈다. 오물이 묻거나 찢긴 곳 없이 멀쩡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물건을 주워야지.

 주워야지, 하고 생각한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하고.

 있었다. 이와 비슷했던 일이.

 끔찍해서 잘 떠올리지 않지만 꿈에서는 자주 보는 기억.

 들고 있던 봉지가 찢어져 오렌지가 언덕 아래로 굴렀다.

 저걸 주울 바엔 새로 사는 게 낫겠다고 마땅한 대상도 없이 신경질을 냈다.

 검은색의 얇은 비닐봉지가 나를 놀리듯이 붕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엔…….

 생각은 거기서 멈추고 물건을 줍기 위해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게 물건은 오렌지 따위가 아니니까.

 신경질 나고 귀찮아도 반드시 주워야만 하니까.

 내 손으로 주워야만 하니까.

 보도 옆 이차선 도로를 빠르게 질주하던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저만치 앞에 멈춰 섰다.

 “최남영, 뭐하냐? 야! 너 스타킹에 대따 큰 구멍 났어! 피도 나는데!”

 세상사람 모두 알게,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 하나도 없게, 크게 소리쳐줘서 고맙구나.

 나는 정을 향해 가던 길이나 가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하정 이 새끼는 내 뜻은 깡그리 무시하고 오토바이에서 내리더니 전봇대 근처까지 굴러간 마트료시카 인형을 주워들었다.

 “이거 너네 가게 물건 아니냐? 야! 저기도 있다! 저기랑 저기도! 뭘 이렇게 많이 떨어뜨렸냐! 너네 사장님 알면 큰일 나는 거 아냐?”

 확성기라도 갖다 주고 싶은 심정으로 정을 노려봤다. 눈치 없는 정은 내 표정은 아랑곳 않고 여기 저기 뛰어다니며 인형을 줍기 시작했다.

 아래까지 굴러간 물건은 정이 다 주울 기세여서 나는 근처에 떨어진 것만 주워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둥근 몸체를 가진 마트료시카와 달리 마리오네트는 멀리까지 굴러가지 않았다. 하나 둘 주워 담다가 까페 앞까지 왔는데 성직자 복장을 한 마리오네트 하나가 일훈의 발밑에 있었다.

 일훈 쪽으론 의식적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일훈의 발만 볼 뿐 시선을 들어 얼굴을 보진 않고 있다. 그래서 일훈이 지금 어딜 보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 모른 채 일훈의 발밑에 쪼그리고 앉아 인형을 집었다. 마리오네트의 실이 일훈의 운동화에 밟혀 있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잡아당기면 비켜 줄만도 하건만 일훈은 꿈쩍도 않고 실을 밟고만 있다. 두 번 세 번 잡아당겨도 소용이 없어 “저기요”하고 불렀다. 시선은 여전히 인형을 향한 채 “좀 비켜주세요.”하고 말했다. 못 들었을 리도 없건만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아 더 큰소리로 “좀 비키라니까요.”하고 말했다. 일훈의 일행들이 “야, 뭐해. 비키라잖아.”하고, “얘 갑자기 왜 이러냐.”하고, “송일훈, 무섭게 왜 이래.”하고, “불쌍하잖아. 울면 어떡해.”하고 너도 나도 한 마디씩 했을 때 나는 이미 일훈의 다리를 손으로 때리고 있었다.

 손으로 퍽퍽 때리며 “비켜. 좀 비키라고. 귀먹었어? 비키라는 말 안 들려?”하고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묵묵부답으로 조금의 흔들림도 없던 일훈이 갑자기 푹 주저앉듯 쪼그려 앉았다. 나와 같은 자세로 눈높이를 맞추고 내 눈을 들여다봤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깊숙이. 내 안에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깊숙이. 그렇게 깊숙이 깊숙이 들여다보다가 “왜 울어?”했다.

 울다니.

 누가 운다고.

 그런 생각으로 눈을 깜빡였는데 갑자기 물방울 하나가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무릎의 상처에 닿아 피와 섞이는 걸 의아하게 지켜보고 있으려니 또 하나가 툭, 그리고 또 툭, 그 다음엔 여러 개가 동시에 툭, 툭, 툭.

 “남영아.”

 고개를 숙이고 무릎만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일훈이 나를 불렀다.

 “남영아.”

 눈물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 이젠 무리야.”

 인형을 쥐고 있는 내 손을 가만히 잡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죽을 것 같아서…… 이제는 정말로 무리.”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죽을 만큼 상냥하게 중얼거렸다.

 “둘이 그러고 앉아서 뭐 하냐. 연애 하냐.”

 하정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지만 얼굴을 들지 않았다.

 “이거나 얼른 받아. 나 배달 가야 돼.”

 얼굴 앞으로 불쑥 들이미는 물건을 눈동자만 굴려서 봤다. 정이 늘 입고 다니는 빨간색 바람막이에 마트료시카 인형들이 싸여 있었다.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먼저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손은 바람막이에 감싸인 인형들을 상자에 옮기고 던지듯이 주인에게 옷을 돌려주었다. 내내 밟고 있던 마리오네트까지 상자에 넣고 상자를 한쪽 옆구리에 낀 일훈이 내 손을 잡아 일으키고는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송일훈, 어디가? 얌마!”

 “냅둬. 부르지 마. 넌 눈치도 없냐?”

 “저 새끼 이름이 송일훈이야?”

 “저기요, 초면에 왜 이 새끼 저 새끼 욕을 하고 그래요?”

 “새끼가 무슨 욕이라고 그래. 그리고 저 새끼랑 나랑 초면 아니거든.”

 등 뒤에서 일훈의 친구들과 정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일훈은 그런 것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성큼성큼 걸었는데 그 탓에 아무리 빨리 걸어도 일훈을 뒤따라가는 꼴이 되었다.

 눈물은 멎었는데 눈 안이 시려서 자꾸만 눈을 깜빡였다. 젖은 뺨이 마르면서 체온을 앗아가는지 끊임없이 어깨가 떨렸다.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멈추지 않아 곤란해 하는데 내 손을 꼭 쥐고 끌어당기듯 앞서 가던 일훈이 갑자기 멈춰 섰다. 멈춰 서서 상자를 내려놓고 점퍼를 벗어 내밀었다. 받지 않자 내 팔을 잡고 억지로 입히려 했다. 코트를 입고 있는데 그 위에 무리하게 껴입히려 했다. 어차피 안 들어갈 거라 짐작하고 잠자코 있었다. 애써 거부하는 것도 귀찮았고 싫다고 말하는 것조차 말씨름의 발단이 될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이 상태로 일훈과 다퉜다간 필패. 아마도 무조건 필패.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놀랍게도 일훈의 점퍼에 코트를 입고 있는 내 몸이 들어갔다. 오른팔이 들어가고 왼팔이 들어가고 지퍼까지 단단하게 올려준 일훈이 다시 상자를 들고 삼거리 쪽으로 향했다.

 나는 거의 눈사람 같은 형상이 되어 뒤따라 걸었다. 여전히 한 손은 일훈에게 잡힌 채. 이게 뭐야. 이게 무슨 꼴이야. 이게 뭐하는 짓이야. 최남영 정신 안 차리냐. 등신 같은 년 진짜 정신 안 차릴래.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으며 걸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마저도 사라지고 속이 잠잠해졌다. 다만 잠잠해져서 일훈의 등만 쳐다봤다. 백로고가 새겨진 흰색 맨투맨 티. 달랑 그거 하나 입고 있는 등. 넓고 반듯하고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등. 추울 텐데도 전혀 티내지 않는…… 예전에도 이랬나. 모르겠다. 일훈을 제대로 보지 않은 지 너무 오래 되었다. 제대로 눈에 담고 눈여겨 본 지 너무 오래 되었다.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덜컥거려서 촛농 녹듯이 마음이 흘러내려서 도저히 유심히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충 봐도 다 봤다고, 변한 것도 알겠고, 웃지 않는 것도 알겠고, 나를 무시하는 것도 알겠고, 그냥 다 알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나는 일훈을 보고 있었지만 보고 있지 않았다.

 계속 쭉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한 번 눈에 담아버리니 욕심이 났다. 전부 잊고 전부 무시하고 일훈이 이끄는 대로 뭐든 해버리고 싶었다. 하자는 대로 모조리 해주고 싶었고 하고 싶은 대로 모조리 해버리고 싶었다.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다.

 이제 와서…….

 너는 쓰레기야.

 나를 보던 가나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너 때문에 우리 애 죽는 꼴 난 못 본다.

 아주머니의 메마른 음성도 되살아났다.

 일훈의 창백한 맨발…… 그날의 편린까지 잔인하게 되살아났다.

 걸음을 멈추자 일훈이 뒤돌아봤다.

 “왜? 아직 추워?”

 걱정스런 음성으로 묻고 유심히 내 얼굴을 살폈다.

 “들를 곳이 있으니까 상자는 주고 먼저 가. 옷 벗어 줄게.”

 “들를 곳이 어딘데?”

 “일 때문에 가는 거니까 넌 몰라도 돼.”

 “같이 가.”

 “됐으니까 상자나 줘.”

 차갑게 내뱉고 목 끝까지 채워진 지퍼를 열었다. 옷에서 팔을 빼내려는데 한 발 성큼 다가선 일훈이 옷깃을 여며 다시 지퍼를 채웠다.

 “그대로 입고 있어. 어딘지 모르겠지만 같이 가.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싫다잖아.”

 “알아. 너 싫어하는 거.”

 “알면서 왜 이래, 짜증나게.”

 “말했잖아. 더 이상 무리라고.”

 “대체 뭐가 무린데.”

 “전부 다.”

 한숨을 내쉬듯 내뱉고 “전부 무리고 이미 한계야. 그러니 네가 싫다고 해도 따라갈 거고, 네가 침을 뱉어도 기다릴 거고, 네가 울어도 그냥 여기 있을 거야.”하고 빠르게 쏟아냈다.

 “사람 바보 취급해? 누가 운다고 그래. 네 눈엔 지금 내가 우는 걸로 보여?”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한 번 울었다고 울보취급이라니. 세상에 그런 계산법이 어디 있나 싶어서.

 “네가 죽어도 혼자 가겠다면 나 그냥 여기 있겠다고. 여기서 밤새도록 있을 거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여기 이대로 있겠다고.”

 그러니까 일훈의 말은, 그래도 네가 안 울고 배겨? 라는 뜻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고 앞서 걸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씨발, 어이가 없어서.

 * 

 사장님에게 상자를 건네면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오는 길에 넘어져서 쏟았다고, 물건에 흠집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만약 그렇다면 내 월급에서 물건 값을 제해도 된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깨진 내 무릎을 보고 들어와서 약이라도 바르고 가라고 했다. 물건은 망가져도 괜찮으니 심려 말라고도 했다.

 “사장님, 장사 그렇게 하면 큰일 나요.”

 농담인 듯 말하려고 했는데 잘 되지가 않아서 진지한 충고처럼 되어버렸다. 다행히도 사장님은 농담으로 알아듣고 웃어줬다.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섰다. 담벼락에 일훈이 기대서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담장을 넘어온 정원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다. 옷을 벗어주려 하자 일훈이 만류했다.

 “우리 집 여기서 가까워. 빨리 걸으면 금방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깐 그래도 따뜻했는데 잠깐 사이 소스라치게 차가워져 있었다. 손가락을 계속 꼼지락거리자 일훈이 손을 고쳐 잡았다. 내가 느끼기에 차가우니 일훈이 느끼기엔 따뜻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 꼼지락거리는 걸 멈췄다.

 할 말이 있다고. 한 번만,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그동안 참고 기다린 걸 생각해서라도 나 하자는 대로 한 번만 해달라고. 일훈이 간절하게 부탁했다. 사장님 집 앞에 거의 당도해서였다.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과연 잘하는 짓인지 혼란스러웠다.

 한 번은 대화를 하는 게 옳은 걸까.

 그래야 납득되는 것도 있을까.

 일훈도 나도.

 아니 일훈이.

 죽다 살아났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일훈이.

 일훈의 집은 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다. 사장님의 집에서 골목 두 개만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층짜리 주택으로 이층 전체를 빌려 쓰는 모양이었다.

 일훈을 따라 구두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멀뚱히 서있으려니 이리저리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던 일훈이 방석과 담요를 내주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일훈의 점퍼와 코트를 차례로 벗고 방석 위에 앉았다. 소파도 의자도 없는 거실에 방석이 있다는 게 웃기다고 할까 귀엽다고 할까. 왜 귀엽다는…… 그런 말랑한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커피포트 앞에 서서 물이 끓기만 기다리던 일훈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나온 일훈의 손엔 작은 상자가 들려있었는데 한눈에도 그것이 구급약통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앞에 앉아 약통에서 이것저것 꺼낸 일훈이 “무릎 내밀어 봐”하고 말했다. 실랑이하기도 피곤해서 양 다리를 보란 듯이 쭉 뻗었다. 어디 네 맘대로 해봐라. 그런 뜻으로.

 약솜에 소독약을 부은 일훈이 조심스런 손길로 무릎의 상처를 닦았다. 상처를 꼼꼼히 다 닦아내고 면봉에 연고를 짜서는 살살 펴 바르기 시작했다. 상처가 깊진 않았는데 넓긴 해서 작은 면봉으로 조심스레 연고를 바르려니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 사이 커피포트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고 일훈은 여전히 상처를 후후 불어가며 약을 바르고 있고…… 나는 왠지 이 상황이 콩트처럼 느껴졌다.

 콩트처럼 느끼면서 고개 숙인 일훈을 내려다보는데 목덜미가 자꾸 눈에 밟혔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길고 굵고 단단해 보이는 목덜미. 저 목을 조르고 싶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선화가 일훈에게 입맞춤 했을 때. 화가 나서. 무작정 화가 나고 분해서. 또 일훈의 입안에 손가락을 넣었을 때. 그때는 화가 난 게 아니었는데도 그냥 한 번 그래보고 싶었다. 지금도 그러고 싶은가 하면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예쁜 목덜미.

 예쁘다고 생각되는 건 좀처럼 없다. 좀처럼 없으니까 어쩌다 가지게 된 예쁜 것들은 소중하다. 나 같은 사람이라도 소중한 건 나름대로의 소중함으로 다루고 싶어져.

 소중함으로, 소중하게.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를 소중히 여기듯. 그러나 일훈은 왜 다를까.

 왜 다르냐면 내 것이 아니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

 빌린 유니폼도 내 것으로 여기면서 일훈은 아니라니.

 물건도 아닌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물건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기대할 텐데 그것이 과연 충족될 것인가. 그런 의심이 들어서.

 그래서 그랬지.

 그때는 그랬지.

 어느새 상처에 커다란 반창고까지 붙인 일훈이 커피포트의 전원을 끄고 있었다.

 심플한 흰색 머그에 레몬청을 넣어 레몬티를 만들어 내왔다.

 “할 말이란 게 뭐야?”

 머그를 쥐고 있다가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보일러를 틀었는지 냉랭했던 바닥이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자세가 불편해 양반다리로 고쳐 앉자 일훈이 내 무릎에 담요를 덮었다.

 “여기 대학으로 원서 넣은 거, 네가 졸업하기 전부터 이 근처 원룸을 알아보고 다닌다는 얘길 전해 들어서야.”

 손에 쥔 머그잔을 담담히 내려다보며 일훈은 마치 고해라도 하듯 말을 꺼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겨우 스토킹 고백이야?”

 “네가 다 잊은 것처럼 굴기에 가능하면 맞춰주고 싶었어. 어쩌면 네겐 괴로운 기억일 수 있겠다고, 나 때문에 괴로운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면 그건 정말 너한테 못할 짓이라고,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 잘 안 됐어. 내가 제멋대로에 이기적이라…… 널 안 보면 이젠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얼굴이나 보자고, 얼굴이나 보려고, 네 동선을 파악하고 자주 가는 가게를 알아내고 네 말대로 스토커처럼.”

 “스토킹 고백 맞네.”

 “그런데 그것조차 이젠 안 되겠어.”

 내내 쥐고 있던 머그를 바닥에 내려놓은 일훈이 내 눈을 봤다. 매끈하고 시원하게 빠진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선,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먹먹해져선, 마치 버림받은 것처럼 버림받을 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말려든다고 생각했다.

 저 눈을 계속해서 마주했다간 말려든다.

 부지불식간에 말려들고 만다.

 차갑고 모질게 튕겨내고 있던 것들이, 그렇게나 애쓰고 있던 것들이, 모조리 다 소용없어진다.

 “너는 나를 좋아해?”

 지금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질문을 일훈이 하고 있었다.

 왜 하지 않을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에 하지 않을까. 그렇게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었던 질문.

 그 단순한 질문은 하지 않고 ‘섹스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 그 따위 망상이나 지껄여대고.

 “너는 나를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하고 있어?”

 그런데 이제 와서 그걸 묻다니. 그런 눈을 하고 묻다니.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사하고 약았다는…… 치사하고 약았고 아무튼 타이밍이 나쁘다는 생각이.

 초조하게 담요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나는 조금 불안해져서 눈을 내리깔고 빠르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못된 사람이야.”

 “나를 좋아하냐고.”

 “선화 어머니한테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그거 전부 다 진심이고, 걔가 설사 죽는다고 해도, 이미 죽었다고 해도, 난 그 애한테 하나도 안 미안해. 미안하지 않으니까 사과도 안 할 거야. 선화가 그날 그 시간까지 거기 있었던 건, 온전히 그 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나를 좋아하냐니까.”

 “난 아빠가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던 애고, 피곤하고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아빠의 시신과 나흘을 같이 있었던 애고, 이상해서,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도 가끔은 너무 이상해서, 세상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말하는 걸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겠고, 그래서 아주머니도 나를 싫어하고, 아저씨는 나를 가엾게 여겨. 그리고 넌 나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 거의 죽었었잖아. 나 때문에. 내가 너한테 오렌지…… 그깟 오렌지 하나, 주워오라고 시켜서…….”

 “그건 너 때문이 아니라 교통 신호를 어긴 차량 잘못이고 내가 부주의해서야. 은숙 씨를 버려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너를 좋아하니까, 은숙 씨 얘긴 꺼낼 필요가 없고. 네가 남들과 다르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서, 너는 나를 좋아해?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것뿐이니까, 부탁이니까, 대답해줘.”

 “나와 같이 있으면 넌 망가질지도 몰라. 몸도 망가지고, 아니 이미 망가졌는데 더 망가질지도 모르고, 인생도 망가질 거야.”

 “너 못보고 살면 어차피 망가져. 네 말이 전부 맞다 쳐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어. 그래서……”

 중간에 말을 멈춘 일훈이 한동안 침묵하기에 시선을 들었다. 일훈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인 채 바닥을 짚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호흡을 고르듯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더럭 겁이 났다.

 추운 날 겉옷도 없이 너무 오래 걸어 다녔지.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지. 사고 후유증은 없다고, 건강하다고 했지만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아저씨는 상냥하니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니까, 나를 위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일훈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물었다.

 “안 좋아.”

 숨을 내쉬며 일훈이 대답했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데.”

 다급하게 물으며 담요를 펼쳐 일훈의 어깨에 둘렀다. 바닥은 이제 제법 훈기가 도는데 집안의 공기는 아직 싸늘했다.

 담요를 꼼꼼하게 여며주는 내 손을 일훈이 낚아채듯 잡았다. 손등을 덮은 일훈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열이라도 있나 싶어서 반대쪽 손으로 일훈의 이마를 짚었다. 그 손조차 낚아채듯 잡고서 일훈이 중얼거렸다.

 “심장이 안 좋아.”

 “심장? 심장이 안 좋아?”

 놀라서 손을 빼내고 심장 쪽을 살피려는데 “끝까지 대답은 안 해줄 거야?”하고 일훈이 물었다.

 “지금 그걸 물을 때야? 심장이 아프다며.”

 “그래. 너 때문에.”

 “나 때문이라니. 내가 뭘 어쨌는데.”

 걱정과 초조와 불안에 왠지 안절부절못하겠는데, 이런 상황 자체가 생소해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넌 지금 네가 어떤지 모르지.”

 “모르니까 묻고 있잖아.”

 “내가 지금 널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모르지.”

 “몰라. 그것보다 잠깐이라도 눕는 게……”

 “최남영, 나이 거꾸로 먹네.”

 “뭐?”

 베고 누울 수 있게 방석을 반으로 접던 중이었다. 돌아보자 상체를 바로 세운 일훈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삼키고 싶다. 삼키고 싶어서 미치겠다. 빌어먹게 미칠 것 같아서 씨발 이러다 진짜 죽겠다. 그러면서 너 보고 있잖아. 내가, 지금.”

 담담한 음성으로 내뱉은 말은 그러나 조금도 담담한 것이 아니라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뭔가 한 마디 해주려고 입을 벌리긴 했는데 도저히 대거리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훈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다시 물었다.

 “날 좋아해?”

 어디가 단단히 아픈 것처럼 굴더니 아픈 곳은 머리였나 보다.

 지금의 일훈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해.”

 “왜?”

 “사고당한 날 널 찾아간 것도 이걸 묻기 위해서였고, 네 대답 여하에 따라 내가 너…… 정말 어떻게 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게 정말 중요해.”

 말을 끝내고 한숨을 내쉰 일훈이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입술을 깨무는데 살짝 보였다. 왼쪽 위 송곳니 자리. 여전히 텅 빈 채 아무것도 없는. 그걸 확인하자 이마가 뜨끈해졌다. 일훈이 지금 무슨 말을 했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든, 그런 건 뒷전이 될 만큼 화가 났다.

 “너 사람 말을 왜 이렇게 안 듣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일훈이 ‘뭐?’하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치과 치료 왜 아직 안 받았냐고.”

 “이게 그렇게 꼴 보기 싫으면 네가 직접 끌고 가든가.”

 난 또 무슨 얘기라고, 하듯이 일훈이 맥없이 피식 웃었다.

 “내가 준 쪽지 안 읽었어?”

 “읽었어.”

 읽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전에도 한 번 확인한 적이 있으니까. 아니 확인을 했었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기억이 분명치 않으니 쪽지 내용까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르게 쓴 게 아닌가 지금 헷갈리거든. 혹시 아직도 가지고 있으면 꺼내 봐.”

 버리지 않았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없어.”

 “버렸어?”

 “아니.”

 “그럼 어쨌어.”

 “먹었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했다.

 “먹었어. 은숙 씨가 네 물건 다 치워서 남은 게 그것밖에 없었거든. 그거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넌 상상도 못할걸. 이러다 내가 진짜 미치지 싶어서 그냥 먹었어. 넌 네가 이상하다고 하는데 너 못지않게 나도 이상한 놈이야. 징그러운 놈이고. 괴물 같은 놈이고. 넌 모르겠지만 선화 아버지 폭행한 것도 내가 그 새끼라고 오해해서, 진짜 죽여버리려고 했거든. 지금도 그래. 그 새끼 우연히라도 만나면……”

 ‘그 새끼’라는 게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몰랐다. 몰라서, 내가 모르는 사람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하고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아무 짓도 안 당했다고 했잖아.”

 빠르게 내뱉고 보니 ‘그 새끼’는 역시 ‘그 변태새끼’여서, 나는 조금 흥분한 채 정신없이 말을 덧붙였다.

 “그날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 네가 이렇게까지 얽매일 일이 아니라고.”

 선화 아버지를 폭행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죽여버리려고 했다는 말은 정말이지 놀라워서, 새삼 내가 일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상처받길 바란 건 맞는데 내가 바란 것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일훈이 받아버렸다는 것에 나는 지금 상처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내게도 그런 양심적인 부분이, 양심적이고 무른 부분이 있다면, 이 아픔은 그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네 말은 믿어. 믿는 것과는 별개로 용서가 안 될 뿐이야.”

 “그거 내가 너 상처 주려고 일부러 그런 거야. 전부 거짓말이었고, 그러니까 그만 잊어도 돼.”

 어떻게든 그 일을 잊게 만들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 일훈은 잠시 나를 보다가 “왜 내가 상처받길 바란 건데.”하고 억양 없이 물었다. 전부 거짓말이라는 내 말은 조금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선화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일훈에겐 그다지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선화가 뭐?”

 “아니야. 아무것도.”

 “말해.”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남영아.”

 일훈의 고집은 오늘 뼈저리게 잘 알았다. 아니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따라다니지 말라고 해도 죽자고 따라다니던 놈이었으니까.

 “남영아.”

 이미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뭘 어디까지 얼마만큼 말했고, 뭘 숨겨야 하고, 대체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최남영.”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선화가 엎어져 자고 있던 너한테 키스하는 걸 봤어. 화가 나서 네가 상처받길 바랐어.”

 “선화가 나한테?”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일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래. 선화가 너한테.”

 “그래서 최남영이 화가 났다고?”

 “그래.”

 “왜.”

 “왜라니……”

 화가 나서 노려봤다. 이 녀석은 다 알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아까부터, 아까 아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답을 강요하고. 나쁜 놈이네, 제 말대로 징그러운 놈이네, 생각하며 눈이 아플 만큼 노려봤다. 무표정인 채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일훈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입술에 입을 가져다 댔다.

 충동적이었다. 아니, 충동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싶었다. 나더러 뭐 어쩌라고. 누구에게랄 것 없이 그런 원망을 했다.

 걱정하는 마음보다 갖고자하는 마음이 더 크다고, 아닌 척해봐야 역시 쓰레기라고, 내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역시 쓰레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눌러 삼키고 “좋아하니까.”라고 무심히 내뱉었다.

 아주 짧게 스치듯 입 맞추고 입김이 닿는 거리에서 좋아하니까, 라고.

 그래서, 듣고 싶던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 아주 속이 시원하냐.

 그런 의미로 박치기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일훈이 갑자기 달려들 듯 키스했다. 놀라서 벌어진 입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덮쳐오는 체중을 못 이겨 뒤로 넘어가는데 일훈이 입술을 떼지도 않고 손을 둘러 내 뒤통수를 감쌌다. 혀가 입안을 훑고 핥고 찌르고 치아가 정신없이 부닥치고 고이는 침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입술을 물고 빨고 씹고 며칠을 몇 달을 몇 년을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바닥에 누워 일훈을 받아들이며 괴롭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날만큼 괴롭다고. 괴로운데 일훈이 떨어질까 봐 겁난다고. 괴로워도 일훈이 주는 건 다 받아 주고 싶고 다 받아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훈이 넘겨주는 타액을 삼키며 목에 팔을 둘렀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목덜미. 내 것이 아니어서 차라리 손으로 조르고 싶었던. 하지만 이젠 모르겠다. 내 것이 아니어서 조르고 싶었는지 욕망 너무 커서 조르고 싶었는지.

 예쁜 건 소중함으로 소중하게. 알고 있는데도 팔에 힘이 들어가 매달리듯 일훈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체가 닿아 흥분한 일훈의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데 일훈이 갑자기 허리를 들어올렸다. 마치 피하듯 굴기에 오른쪽 다리로 일훈의 허벅지를 감고 끌어당겼다.

 입술을 핥다가 턱을 핥고 뺨을 핥고 이젠 귓바퀴를 씹고 있던 일훈이 “하지 마.”하고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왜, 하기 싫어?”

 “없어.”

 “뭐가 없는데.”

 “콘돔.”

 “괜찮아. 나중에 약 먹으면 돼.”

 “내가 싫어.”

 나더러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더니 너는 아직도 순진하네.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일훈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냄새가 나서 한참 동안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가 “삽입하지 않고도 할 수 있잖아.”하고 말했다.

 “자제할 자신 없어. 처음이라서 내가 무슨 짓까지 할지도 모르겠고.”

 내 머리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일훈이 중얼거렸다.

 “나도 처음인데. 잘됐네.”

 “그 말이 아니라…….”

 “삽입이 싫으면 그건 빼고, 그 외에 하고 싶은 건 전부 해도 돼. 그래도 안 돼?”

 “넌 애가 진짜…… 중간이 없고, 너무 극단적이야.”

 “내가 하고 싶대도 안 돼?”

 숨이 막힐 만큼 꼭 끌어안고 가만히 있기에 “섹스하고 싶을 만큼 너를 좋아하고 있는데도 안 돼?”하고 조르듯 묻고 일훈의 맨투맨 티 안으로 손을 넣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허리의 감촉에 멈칫했다가 곧 쓸어 올리듯이 만지자 일훈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점점 대담해지는 손을 등 뒤로 팔을 뻗은 일훈이 잡아챘다. 여전히 내 머리를 끌어안고 귓바퀴 부근에 입술을 묻고선 잡아챈 손에 깍지를 꼈다. 손 마디마디가 다 아플 만큼 꽉 쥐고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도망가기 없기야.”

 도망가기 없기야.

 그 말을 들었을 땐,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했고 섹스하고 싶다고도 했어. 그런데 왜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고.

 지금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한다. 납득하고 있다.

 일훈은 내 입에서 “너 괜찮아?”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나를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발기의 횟수와 지속시간과 정액의 양과 그 모든 것들이 그냥 걱정이 될 정도여서, 내 몸이 힘든 것과는 별개로 자꾸만 그게 신경이 쓰여서, 해 뜰 무렵 잠이 든 그 애 옆에서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보기까지 했다. 성인남자의 하루 평균 사정 횟수나 발기 지속 시간 같은 거. 또 신장과 남성 성기능의 연관관계 같은 거.

 결론적으로 일훈은 평균적이진 않은 것 같았다. 젊은 것을 감안해도 그랬다. 이것은 조금 더 두고 볼 일이고. 정말 신경이 쓰였던 건 무리한 성관계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 즉 신장에도 무리가 가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는데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영향이 있으니 관계 횟수를 제한하는 것이 좋다는 게시글을 읽었는데, 그건 신장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일훈은 하나를 가지고 있어도 남들 두 개 가진 것보다 튼튼한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일훈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나는 그 말을 반쯤은 믿어두기로 했다. 그 말을 완전히 불신했다간 일훈의 모든 행동에 제약을 걸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뭘 먹는지 무리하게 운동을 하는 건 아닌지 잠은 제대로 자는지 물은 적당히 마시는지 일일이 체크를 하고 잔소리를 해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흉터 때문이었다.

 일훈의 몸에 있는 흉터가 생각보다 커서 나는 충격 비슷한 것을 받아버린 게 아닌가 싶다.

 두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쾌유. 막연히 그렇게 알고 있는 것과 그 흔적과 증거를 똑똑히 목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렇다는 걸 일훈의 벗은 몸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침대 위에서 일훈이 상의를 벗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게 바로 그 흔적이자 증거였다. 배꼽 오른쪽으로 기다랗게 생긴 수술자국과 오른쪽 가슴의 작은 흉터. 나는 그 흉터를 자꾸만 손가락으로 쓸고 혀로 핥았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일훈이 곧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안 아파.”했다. “진짜 하나도 안 아파.” 그렇게 말하곤 언젠가 맞고 들어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때와 똑같이 누가 물어봤냐고 매몰차게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안 아프다고 해도 아파 보였다. 이제 다 나아서 아프지 않다고 해도 이것은 한때 일훈이 죽을 정도로 아팠던 흔적. 나 때문에 아팠던 흔적. 내가 일훈을 아프게 한 흔적.

 그렇게 생각하자 이걸 어떻게든 없애버리고 싶다는 마음과 매일 이것을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경계하자는 마음이 동시에 생겨났다.

 고양이처럼 흉터를 핥고 핥고 핥다가 단단한 아랫배에 머리를 박고 엎어졌다. 일훈의 다리 위에 사죄하듯 엎드려서 울면 안 된다고 울지 말자고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실제로 두 눈은 물기 없이 건조했지만 그래도 왠지 뜨거워서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일훈이 “야…… 최남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 힘들어…….”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힘들다고 하는지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얼굴을 묻고 있는 위치에 일훈의 성기가 있었다. 데님의 두꺼운 천 아래로 잔뜩 발기한 것이 묵직하게 얼굴을 압박해왔다. 고개를 들어 일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바지 버클을 풀고 드로어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성기를 꺼내자 그것이 튕겨 오르며 내 턱과 입술을 스쳤다. 깜짝 놀라서 웃고 말았다. 웃으면서 얘 뭐냐고, 나한테 뽀뽀했다고 나답지 않은 농담을 했다. 아마도 그게 방아쇠였다.

 상체를 깊숙이 숙인 일훈이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내 입술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인중까지 잘근잘근 씹어대고는 입안을 아플 정도로 빨아들였다. 목구멍까지 혀를 넣었다가 입천장을 핥고 잇몸을 더듬고 혀를 감아올리고 다시 입술을 빨고, 마치 개처럼. 키스를 하는 건지 먹고 있는 건지 모를 지경으로 먹는 것과 키스, 둘의 어느 중간 지점의 행위. 그 행위를 머리카락과 손끝과 발끝과 온몸의 살갗과 귓속과 배꼽과 음모와 다리 사이의 성기, 그 구멍 속에까지 일훈은 지치지도 않고 성실하게 치밀하게 헌신적이고도 탐욕적으로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내가 말했던 대로 오직 삽입은 빼고, 그 외에 모든 것을 했다. 오직 혼자서만 했다. 내가 그것에 불만을 가지자 일훈은 “오늘만.”하고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내 팔목을 찍어 누르듯 잡으며 애원했다. 애원하는 것처럼 명령했다.

 오늘만.

 그럼 오늘, 너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과 너에게 지지 않을 만큼 너를 욕망하는 내 마음과 그것을 너에게도 한가득 알려주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은 어디로 가는 건데?

 내일, 너는 죽었어.

 아니, 죽었다는 말은 취소다.

 내일, 너는…… 아무튼 두고 봐라.

 두고 봐라, 하고 한참을 누워 있다가, 일훈의 몸 상태가 걱정되어 한바탕 인터넷 검색까지 하고 난 참이다. 커튼 틈으로 겨울의 아침 햇살이 조금씩 비쳐들었다. 밝고 시리고 어쩐지 연해 보이기도 하는 아침 햇살이 일훈의 손끝에 닿아 살랑살랑 흔들렸다.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의 웃음소리처럼 계속해서 살랑살랑.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일훈의 집. 일훈의 침대 위. 엎드린 채 내 가슴에 팔을 두르고 잠들어 있는 일훈.

 실패했다는 자각이 새삼 의식 위로 떠올랐다.

 나는 실패했구나.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실패한 건 실패한 거구나.

 벌 받아도 좋으니까 이대로 쭉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 때문에 일훈이 다치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이 애를 지키고 보호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를 바꿔서라도. 필요하면 선화를 찾아가 사과를 해서라도. 아주머니에게 애원을 해서라도. 욕을 듣든 뺨을 맞든 머리를 뜯기든 뭘 당해서라도.

 꿈에, 나는 천 번쯤 태어났다가 천 번쯤 죽은 사람이었다.

 온갖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을 경험했으나 단 한 번도 늙어 죽은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스무 해를 넘기도록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랑을 준 적도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하얀방에 서 있었다.

 온 사방이 희고 환한데 조금도 눈부시지 않은 신묘한 방.

 그 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와 대화를 나눴다.

 소리도 말도 아닌, 이해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대화.

 꿈에서 깨자 눈꼬리를 타고 뜻 모를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억도 잔상도 없이 다만 가슴이 아팠다.

 조여드는 통증에 몸을 뒤척이다가 일훈과 눈이 마주쳤다.

 엎드린 채 내내 나를 보고 있었던 듯, 잠기운도 없이 말간 눈이었다.

 곧 물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울어? 하고.

 하지만 일훈은 묻지 않고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불가사의한 것을 보듯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꿈을 꿨어. 수천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났는데 단 한 번도 너를 만나지 못하는 꿈. 젊어 죽고 늙어 죽고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그런데 단 한 번도 너를 만나지 못하는 꿈을 꿨어.”

 담담하게 사실만을 고해 오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왠지 말끝에 물기가 묻어나, 나는 “괜찮아.”하고 중얼거렸다.

 팔을 뻗어 손짓하자 일훈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처럼 이마를 비벼대는 머리를 꼭 끌어안고 다시 한 번 “괜찮아”하고 말했다.

 “이제 괜찮아”하고.

 1 

 마지막 시험이 있었다. 그깟 교양과목, 학점 하나 버려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남영은 막무가내였다.

 “너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시험 치고 와.”

 2XL사이즈 남성용 셔츠를 입고 허벅지 아래를 훤히 드러낸 채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셔츠는 물론 내 것이었고 우유는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해 신선도가 미덥지 못한 것이었다.

 “올 때 내 속옷이랑 스타킹, 콘돔도 사와. 속옷 사이즈는 이따 문자로 알려줄게. 번호 바꿨어? 그대로지?”

 마치 일주일 전에도 한 달 전에도 일 년 전에도 섹스한 사이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쩐지 시큰둥해 보이는 태도.

 그래, 저게 최남영이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남영 고유의, 본래의 모습. 내가 익히 알고 있고 사랑해마지 않는 모습.

 어제는…… 마치 딴 사람 같았지.

 현관 앞에 서서 머그를 들고 우유를 마시고 있는 남영이 사실은 속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 그 상태일 거라는 것도.

 어제 나는 영혼이 반쯤 털려버렸다. 나머지 반이라도 붙들고 있었던 것이 용했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불안 때문이었다. 이게 과연 현실일까에 대한 불안. 변심한 남영이 말을 바꿔버리진 않을까에 대한 불안.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 그런 실질적인 불안을 안고서도 반이나 넋이 나간 상태였고, 넋이 나가서 남영의 속옷을 벗기다가 그만 찢고 말았다. 그러려던 의도는 전혀 없었고, 그다지 힘을 많이 주지 않았는데도.

 포장을 뜯지도 않은 남성용 속옷을 건네었으나 진즉에 거절당했다.

 “차라리 벗고 있는 게 편해.”

 심드렁한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수류탄을 투척했다.

 시험을 치러 곧 나가야만 하는 내 머릿속과 아랫도리 사정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최남영다운 혹독하고도 잔인한 처사였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남영을 껴안고 뒹굴고 싶었다. 남영이 여기, 이곳, 내 품안에 있다는 사실을 매순간 확인하며 안심하고 싶었다.

 지난 2년간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병원에서도. 퇴원을 해 검정고시와 수능을 준비하면서도. 겨우겨우 다시 만나게 된 남영이 나를 차갑게 거부했을 때도.

 사실은 그랬다. 퇴원을 하자마자 남영을 찾아가려고 했다. 찾아가서 그날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고 남영의 대답을 듣고 내가 무사한 것을 알리고 남영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으니까. 네가 나를 많이 걱정했다는 걸. 은숙 씨로부터도 전해 들었으니까. 그녀가 너에게 모진 말을 했다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눈물로 엉망이 되어 아이처럼 일그러지던 네 얼굴. 넘어질 듯 달려오며 울고, 울면서 소리치던 네 모습. 의식이 꺼져가던 와중에도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그 아픔 때문에 다른 덴 아픈 줄도 몰랐다.

 그런 네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

 남영이 분명한데 남영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분명 최남영이었고 어제의 남영도, 최남영이었다.

 남영에 대한 건 모두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가 모르는 부분. 껍질에 싸여 감춰진 부분. 갑각류의 속살처럼 야들야들하고 물컹거리고 연약하고, 아무튼 너무나 연약해서 입술을 갖다 대기만 해도 속절없이 녹아버리는 그런 부분이 너에게도 있었다.

 남영이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아버지는 말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 애도 몹시 괴로울 거라고 했다. 네가 너무 몰아붙이는 것이 아닌지 아버지는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엄마 마음도 좀 다독여주고, 일 년만,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단 일 년 동안만이라도.

 그 후에는 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엄마는 내가 책임지마 하고. 자식 이기려 들다 자식 망치는 부모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 아이에게도 제대로 사과하는 게 좋겠다고. ‘그 아이’라고 뭉뚱그렸으나 그게 누구를 뜻하는 말인지 잘 알았다.

 분명한 가해자가 있는 사건이었다. 너무나 분명해, 그 사건의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한다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는……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사과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사과하면 남영이 나쁜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남영은 나쁘지 않으니까.

 나빴어도 나쁘지 않으니까.

 남영이 나쁘다면 나도 나빠야 정상이고, 나쁜 나는 역시나 사과 같은 건 하지 않을 작정이다.

 30분도 안 되어 시험을 끝내고 강의실을 나왔다. 뛰다시피 복도를 걷는데 같은 과 동기인 정혁에게 붙잡혔다. “어제 어떻게 된 거야? 그 여자 누군데?” 묻기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대꾸했다. “싸우는 것 같더니, 괜찮아?” 다시 묻기에 “결혼할 거야.”하고 흘리듯 내뱉고 걸음을 옮겼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등 뒤에서 정혁이 소리쳤지만 내 다리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근처 편의점에 들러 여성용 속옷과 스타킹, 콘돔을 계산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었다. 명백하게 감지되는 불량스러움. 그리고 조롱기. 돌아봤더니 다정분식의 ‘그 새끼’였다. 키는 멀대 같이 커서 185센티미터 남짓인 나보다 약 반 뼘 정도가 더 크고, 그 큰 덩치로 남영에게 온갖 친한 척을 하며 들러붙는 놈. 남영의 동네 친구. 각 잡고 봐도 대충 봐도 그냥 양아치 새끼.

 최남영에게 친구라니. 그것도 이런 생양아치 같은 이성 친구라니.

 용납할 수도 없고 용납하고 싶지도 않은데 친구가 없던 남영에게 생긴 아주 희귀한 존재라서 그냥 두고 보고 있었다. 한데, 근래 들어 인내심이 극한에 다다랐다. 수위를 넘나든다고 할까. 부쩍 엉기기 시작했다. 남영에게. 팔뚝을 잡는다든가. 어깨동무를 한다든가. 저급한 농담을 던진다든가. 이가 갈렸다. 속 시원히 한 대 쳐버리고 싶었다. 이 새끼 면상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한 대 쳐버리면 속이 시원하겠다고.

 “누구 거? 남영이? 벌써 했냐?”

 계산대 위의 물건을 슬쩍 눈짓하더니 건들거리며 물었다.

 “신경 꺼.”

 “최남영이 내 친군데 어떻게 신경을 끄냐?”

 “친구면 선 지켜.”

 “선 지키고 있잖아, 새끼야. 너 대학생이지? 우리 남영이가 그렇게 이쁘냐? 새끼가, 싫다는 애를 기어코 꼬드기네.”

 점원이 건네는 카드를 받고 녀석 쪽으로 돌아섰다. 묘하게 깔아보는 녀석을 무심하게 마주 봤다.

 “뭘 그러고 꼬라봐.”

 무심하게 본다고 봤는데도 속내가 드러나는지, 녀석이 눈에 힘을 주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우리 남영이 아니고, 최남영.”

 덤덤하게 내뱉었다.

 “뭔 개소리야.”

 “개소리는 우리 남영이라고 지껄이는 그 혓바닥이 하는 게 개소리고. 앞으로 남영이 몸에 손가락 하나 까딱했다간 죽을 줄 알아.”

 “벌써 서방 행세 하냐? 내 맘인데?”

 “보지 말라곤 안 해. 말 걸지 말라고도 안 해. 건드리지만 마. 안 그럼, 내가 너 죽여서 생으로 씹어 먹어버릴 테니까.”

 같잖다는 표정으로 시종 듣고만 있던 녀석이 갑자기 미간을 팍 찌푸렸다.

 “어서 듣던 소리다, 그거? 둘이 짰냐?”

 할 말 끝났으므로 더 이상의 개소리는 무시하고 계산대 위에 놓인 봉투를 들고 출입구로 향했다.

 “아니, 씨발. 둘이 말 맞췄냐고. 아니면 둘이 무슨 영혼의 쌍둥이야 뭐야? 뭘 사람을 죽여서 자꾸 씹어 먹겠대. 짐승도 아니고. 야만적인 것들이 진짜.”

 돌아가는 길에 따끈한 전복죽을 샀다. 디저트 가게에 들러 마카롱도 샀다. 남영이 요리하는 걸 본 적이 없는 나로선 그 애가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내도록 굶고 있을 것만 같아 걱정이 되었다.

 설마…….

 설마 속옷도 입지 않고 밖에 나가진 않았겠지.

 설마 속옷도 입지 않고 배달음식을 시키진 않았겠지.

 설마 싶었지만 남영은 그 설마로 여러 번 사람 잡은 전적이 있는 아이였다.

 걱정과 불안에 거의 날듯이 집에 도착하고 보니, 남영은 집에서 나오기 직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 거실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양 손등에 턱을 괴고 고개만 돌려 나를 보고는 “왔어? 빨리 왔네.”했다. 셔츠 끝자락이 아슬아슬하게 엉덩이를 덮고 있었다. 발을 까딱거릴 때마다 허리와 엉덩이의 곡선을 타고 옷자락이 흔들렸다.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죽 사왔어.”하고는 “마카롱 좋아해?”라고 물었다. 사온 것들을 식탁 위에 올리고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냉장고 안에 원래는 없던 그릇들이 정갈하게 랩에 싸여 놓여 있었다. 꺼내보니 두부조림과 콩나물무침이었다. 두부는 레토르트찌개에 첨가하려 사놓은 것이었고 콩나물은 라면에 첨가하려 사놓은 것이었다. 싱크대와 식기건조대, 인덕션을 두루 살펴보니 주방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최남영이 요리도 하는구나.

 경이로운 기분이 되어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다가온 남영이 “라면은 전부 압수야”하고 사감선생처럼 말했다.

 “어째서?”

 의아해서 묻자 “몰라 물어?”하고 톡 쏘듯이 반문했다.

 “저번에 보니까 술도 마시던데. 한 번만 더 걸리면 가만 안 둬.”

 죽을 꺼내 뚜껑을 열며 퉁명스레 덧붙였다.

 저번에 보니까. 술도 마시던데. 가만 안 둬.

 남영의 말을 곱씹다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며칠 전 편의점 앞에서 동기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부터 씩씩하게 걸어온 남영이 내 팔에 세게 부딪쳤다. 그 탓에 들고 있던 캔맥주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고의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땐 필사적이었으니까. 남영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말붙이지 않기 위해. 남영이 나를 곤란해 한다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남영에게 나는 괴로운 기억. 그래서 잊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모래알 같은 희망은 있었다.

 괴로운 기억인 것과는 별개로 아직 조금쯤은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아주 조금쯤은 나를 걱정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하고.

 고문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이제와 돌이켜보면 병신 같지만, 그만큼 소중했다. 소중한 만큼 두려웠다. 늘 차가웠기에 어떻게 해야 남영이 행복할지 알 수 없었다. 거부당한 기억. 나를 이루고 있는 8할이 그것이었으니까.

 남영의 옆에 앉아 죽 뚜껑을 열었다. 일회용 숟가락을 꺼내다 말고 남영의 턱을 잡고 키스했다. 남영이 씹고 있던 고소하고 미지근한 죽이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렇게 뺏어먹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나도 죽을 먹기 시작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죽 그릇이 반쯤 비었을 때 숟가락을 탁 내려놓은 남영이 내 턱을 잡고 키스해 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입안의 죽을 혀로 쓸어가고 빨아먹고 잠시 입술을 뗐다가 허벅지 위로 올라와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고는 다시 키스. 작고 촉촉하고 따뜻한 혀가 내 입안을 부드럽게 쓸고 다니다가 송곳니 빠진 자리를 더듬었다. 공간유지장치는 이미 예전에 제거한 상태였다. 집착적으로 그곳만 건드리는 통에 간지러웠다. 간지러워도 참았다. 이미 잔뜩 발기해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는 곳도 무시했다. 남영이 키스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것뿐. 오로지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플란트 잘하는 곳 알아놨으니까, 다음 주에 치과 가자.”

 입안에서 혀를 빼낸 남영이 아랫입술을 크게 한 번 베어 물고선 말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남영의 목소리. 그것이 낮게 뭉개져 들렸다.

 풍부한 울림은 더욱 풍부해지고 얕은 호흡까지 나른하게 섞여서 듣고 있노라니 귀와 함께 심장이 녹을 것만 같았다.

 나는 말없이 순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남영이 가자면 갈 것이고 평생 이대로 살라면 그냥 살 것이다.

 대수로울 것 없었다. 남영이 기꺼워한다면 뭔들…….

 “지금 괜찮아? 안 피곤하면 할래?”

 입술을 떼고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묻기에 남영을 그대로 안아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야,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목을 꼭 껴안고 남영이 불퉁거렸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남영이 이러면 영혼이 반쯤 털려버리는 거다. 죽을 먹다 말고 내게 키스했을 때부터 나는 이미 넋이 반이나 빠져버렸다.

 남영을 안아든 채 방으로 걷다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콘돔과 러브젤을 챙겼다. 러브젤은 날듯이 집으로 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구매했다.

 남영이 잘 젖지 않는다는 게 기억나서.

 어제, 남영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전부 삼키고 먹는 동안, 영혼이 반쯤 털리는 와중에도, 현실적인 불안감에 떨어대면서도, 내내 염려하고 있었다. 젖지 않으면 아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아프다니. 남영이 아플 뿐이라면 삽입 따윈 의미 없지 않나. 남영의 말대로 삽입하지 않고도 섹스는 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남영의 차갑고 담백한 성격이 섹스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면 나는 그에 맞출 생각이었다.

 확실히 어제는 나 혼자 제정신이 아니었지. 남영의 호흡과 체온은 평소보다 아주 약간 흐트러지고 달아오른 상태. 신음은 없이 간헐적으로 떨어댈 뿐. 단지 그뿐으로 기본적으로는 차분하고 온화했다. 남영이 온화했다는 것 자체가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인데 첫 경험은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중학생도 알 테니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발정난 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남영의 몸 전부를 샅샅이 핥고 빨고 삼키면서 스스로 문지르고 흔들어 사정했다. 그렇게 한 번 빼고 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조금도 괜찮지 않아서 결국 남영의 손길조차 거부하고 혼자 폭주했다. 괴로웠으니까. 힘들었으니까. 손끝만 스쳐도 그랬으니까. 슬플 만큼 그랬으니까.

 오늘은 어제 같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온몸이 노곤해질 정도로 해둔 상태인데다 수면도 부족하고. 피곤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제완 다르겠지. 달라야할 텐데, 생각하며 남영을 침대에 앉혔다. 무릎 꿇고 앉아 발등에 키스하고 복사뼈를 핥고 정강이를 깨물고 무릎부터 허벅지까지 입술로 쓸며 셔츠 단추를 아래에서 하나하나 풀었다. 어젯밤 내가 만들어둔 자국들이 남영의 다리 곳곳에 멍처럼 가득했다. 저건 아플까. 아프지 않을까. 지금은 아프지 않더라도 어젠 아팠을까. 근심에 잠겨서도 흥분은 가라앉지 않아 아랫배는 뻐근하고 목구멍과 눈 안은 몹시도 뜨겁다.

 “송일훈.”

 담담한 목소리로 불려 고개를 들었다.

 “올라와서 앉아.”

 잠긴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어쩐지 화가 난 듯도 하고 무언가 억누르고 있는 듯도 한.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남영이 손으로 가리키는 자리에 올라가 앉았다.

 “지금부터 게임할 거야. 나는 움직이고 너는 움직이지 않는 게임. 네가 움직이는 건 내 허락이 있을 때. 그리고 내 요청이 있을 때. 외엔 움직이면 안 돼. 벌칙은……”

 왜 그런 게임을 제안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벌칙을 정하기가 까다로운지 미간을 접은 채 한참을 골몰하던 남영이 “벌칙은 없어.”하고 포기한 것처럼 내뱉었다.

 “없지만 그래도 움직이면 안 돼. 내가 정말 화낼 거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단단하게 당부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을 귀 뒤로 넘기고 무언가 언짢은 듯이 내리뜬 눈. 소녀 시절 있었던 주근깨는 사라지고 마치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 새하얀 피부. 아니 달콤하니까 설탕인가. 설탕처럼 희고 달콤한 피부. 그 보다 더 달콤한 땀과 타액. 혀뿌리가 아릴 정도로 달콤했던 다리 사이. 떠올리자 등줄기부터 정수리까지 저릿해졌다. 갑작스레 치솟은 흥분에 허벅지와 아랫배에 힘을 주는데 남영이 “만세”하고 말했다. 마치 명사 하나를 툭 던지듯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어?”하고 묻고 말았다. 어제 내도록 빨았던 너를 상상하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 붉게 열이 오른 눈으로 남영을 보다가 아래 단추가 풀려 드러난 음모에 슬쩍 시선을 비꼈다.

 오늘은 어제 같지 않을 거라고…… 그 생각은 벌써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만세하라고.”

 남영이 손가락으로 팔을 가리켜 시키는 대로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남영이 내 셔츠를 쥐고 벗겼다. 안에 입은 반팔 셔츠도 똑같이 벗기곤 그대로 무릎 꿇고 앉아 내 가슴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작게 숨을 들이쉬고 그대로 호흡을 멈췄다. 미지근한 입술의 감촉. 그럼에도 이상하게 뜨거웠다.

 뜨거운 입술이 가슴팍 이곳저곳을 누르며 돌아다니다가 유두를 머금었다. 남성의 유두란 이름값도 못하는 쓸모없는 것. 무용하게 돋아난 작은 돌기. 평소엔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않고 살았는데 남영이 그것을 머금고 핥자 통제를 벗어난 몸이 제멋대로 떨리기 시작했다. 저체온증이라도 걸린 사람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어깨를 밀어내려하자 남영이 고개를 들었다.

 낮은 음성으로 “게임 룰 잊지 마.”하고는 내 손을 잡아 눌렀다.

 “그 게임 꼭 해야 돼?”

 잡히지 않은 손으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다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초조함 때문인지 흘러나간 말투도 거칠었다.

 “해야 돼.”

 “왜?”

 “어제 너만 만졌잖아.”

 “그런데.”

 “그런데, 라니. 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시종 담담하던 남영이 화가 난 듯 날선 눈빛으로 나를 봤다.

 “무슨 착각.”

 남영의 치켜뜬 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한동안 나와 눈을 맞추고 있던 남영이 다시 시선을 내렸다.

 “너만 만지고 싶은 거 아니야. 나도 만지고 싶어.”

 순간,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 말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말투가 마치 아이 같았기 때문에. 아이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감흥이 있다,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아이 같았기 때문에.

 삐친 아이처럼 눈을 내리뜨고 있다가 내 가슴을 콱 깨물고는 “너만 먹고 싶은 거 아니야. 나도 먹고 싶어.”하고 또 내뱉었다.

 맥박이 귓등에서 목구멍에서 정수리에서 쿵쿵 울려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거대한 거인이 꽃밭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쿵쿵쿵.

 그래, 이것도 최남영.

 감각을 진정시키려 생각을 쥐어짜냈다.

 이 모습도 최남영.

 떠올려보면 이런 모습이 아주 없진 않았던 것도 같다.

 남영은 아주 가끔 아이 같았지. 말 안 듣는 아이. 짜증내는 아이. 밥 안 먹는 아이. 게으른 아이. 겁 없는 아이. 우는 아이. 돌이켜보면 아이 같았을 때가 꽤 많았다.

 넘어질 듯 달려오는 아이와 무모하게 복수하는 아이도 있었다.

 “너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나도 좋아해.”

 아이 같은 남영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나도 좋아해”하고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다. 남영이 날 좋아한다는 걸. 이전부터 짐작하기도 했었고 억지를 쓴 끝에 직접 듣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정말 제대로 알고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계속 불안했으니까. 불안을 떨쳐내지 못했으므로 결국 나는 몰랐던 걸까. 내가 바보 같이 모르고 있다는 걸 남영은 알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사랑스러운 고백을 해오는 걸까. 사랑스러워서, 미치게 사랑스러워서 으스러질 정도로 안아버리고 싶은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임이라는 이름의 주문. 움직이지 말라는 악랄하고도 독한 주문에 걸려버렸으니까.

 “움직이면 안 돼?”

 “안 돼.”

 “네 말 무슨 뜻인지 다 아는데, 그래도 안 돼?”

 “안 돼.”

 “왜 안 돼.”

 “내가 더 많이 좋아해.”

 “그건 아니지.”

 “거봐.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뭐야, 그게.”

 “내가 더 많이 좋아해. 내가 더 좋아한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어.”

 지구가 사라져도 우주가 박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입으로는 “최남영이 송일훈을 더 좋아해.”하고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이제 움직여도 돼?”

 여전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인 남영에게 허락을 구했다. 유치하고 우스운 상황인데도 마음은 전혀 그렇지가 않고 간절해서, 조급하고 간절하고 숨쉬기가 괴로울 만큼 사랑스러워서, 뜨겁게 한숨을 흘리며 애원하듯 한 번 더 요청했다.

 “움직여도 돼?”

 자그마한 입술이 벌어져 “돼”라고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달려들었다.

 사랑은 더 이상 인내가 아니었다. 자제나 억제도 아니었고 불안이나 슬픔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괴로워서 이게 뭔가 했더니 그것은 그저 본질. 집착과 갈망의 본질. 그뿐이었다.

 전쟁 같았다.

 섹스가.

 엎치락뒤치락 악착같이 이기려 덤벼들고 급박하게 싸우듯 서로의 몸을 탐했다.

 그렇게 체력과 혼을 쏙 빼놓으니 두 번 이상은 무리였다.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많이 피로했으니까.

 오늘은 어제 같지 않을 거라는 생각의 승리.

 그리고 러브젤은 내 유두만큼이나 쓸모가 없었다.

 남영은 스스로도 놀라서 겁먹을 만큼 젖어버렸으니까.

 그래도 아파했기에 그 모습을 보는 나도 괴로웠다.

 사랑을 하는데도 괴로워.

 사랑을 받는데도 괴로워.

 잠깐, 이건 혹시 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벌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이런 게 벌이라면 죄를 짓고 사는 게 두렵지 않겠다고, 죄를 짓는 것과 다름없는 생각을 했다.

 그야 그럴밖에…….

 그런 꿈을 꾸었으니까.

 지난 새벽.

 정말로 끔찍한 꿈을, 마치 실재였던 것처럼 꾸었으니까.

 수천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났는데 단 한 번도 너를 만나지 못하는 꿈.

 그런 빌어먹을 것을 꾸었으니까.

 그것이야말로 벌이었을까.

 벌이라면 나는 얼마나 큰 죄를 지었던 걸까.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런 상념에 시달릴 정도로……

 아무튼,

 그런 꿈일 뿐인 꿈.

 * 

 남영에게 같이 살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거절의 이유는 이랬다. 남영의 원룸은 둘이 살기엔 너무 좁고 내 집은 아저씨가 얻어준 게 아니냐는 거였다. 아저씨, 즉 우리 아버지에겐 더 이상 신세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말에 동의했으므로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돈을 벌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사회로. 자본과 노동시장으로. 사회가 이십대에게 요구하는 노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역시 대학.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하고 싶은 것이 생긴 참이었다.

 지진이 있었다. 꽤 큰 지진. 대한민국은 지진 안전국가가 아니라고들 했다. 이웃나라 일본에는 곧 대지진이 닥칠 거라고도 했다. 활화산인 백두산이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인간은 지구를 잘 몰랐다. 땅바닥을 기는 개미보다 몰랐다. 교만한 것들은 늘 그렇다. 잘 모르면서 잘 안다고 착각을 하곤 한다. 그걸 모른 채 평생을 살다 죽는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죽기 전에 천재지변이 닥칠 수도 있지 않나? 그렇게 되면 남영인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질학과. 멋도 없고, 돈 냄새도 안 나고, ‘지질학과’를 다닌다고 하면 ‘아, 성적에 맞춰서 갔나 보구나.’ 그런 표정들이나 짓고. 하지만 나는 이 학문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있다.

 어쨌든 지진이나 화산폭발 따위로 남영을 죽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남들과는 달리, 누구보다 빨리, 남영을 안전지대로 대피시킬 작정이니까.

 남영은 오렌지를 먹지 않는다. 며칠 전 마트에서 대량으로 구매했다가 “너나 먹어”라는 책망을 들었다. 실수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자취하는 동기들에게 전부 나눠주었다.

 오렌지라는 과일이 남영의 트라우마.

 그런 생각을 하면 미안하고 안쓰럽고 기억을 지워주고 싶고 그러면서도 영영 지우고 싶지 않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 기쁘다.

 나의 트라우마는 흰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삼사십 대 남성.

 내가 이렇다는 걸 남영도 알고 있지만 남영은 그 사실을 조금도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 기억을 지우려, 지워주려 애를 쓴다.

 [그날 나는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어. 빠진 이는 이제 치료받도록 해.]

 그 쪽지도 내 기억을 지우기 위해 남영이 애를 쓴 결과물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거친 재생지에 연필로 휘갈겨 쓴 글씨. 성의 없이 함부로 구겨서 쥐여 주었던.

 나는 그 쪽지를 소중하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다가 어느 날 작게 접어 삼켰다.

 은숙 씨가 치우고 버린 남영의 모든 물건들이 그랬듯이 언젠가 그 쪽지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연필로 썼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지워질 것 같았다. 아니, 지워지기 전에 발각돼 은숙 씨의 손에 찢길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먹자고 생각했다. 먹으면 사라지지 않으니까. 내 몸이 죽고서야 나와 함께 사라질 테니까.

 남영이 만들어 준 캐비지롤을 먹으며 그때의 이야기를 했다. 어제, 식탁에서.

 손등에 턱을 괴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남영이 무심히 입을 열어 한 마디 했다.

 “그 종이 되게 더러운 거였어. 택배 포장지였으니까.”

 “그랬어?”하고 나는 웃었다. 잠시 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덧붙였다.

 “네가 주는 건 뭐든 먹을 수 있어. 똥을 줘도 먹을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행주가 날아왔다.

 “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닥치고 밥이나 먹어.”

 잔뜩 찌푸린 남영의 얼굴을 보며 나는 아이처럼 웃었다.

 “엄마를 왜 은숙 씨라고 불러?”

 주말, 귀례골동품점 앞에서 남영의 퇴근을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가는 길. 남영이 불쑥 물었다.

 그건 은숙 씨가 ‘어머니’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니까.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어머니만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어쩐지 공평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면 차라리 이름으로 부르겠다고 마음먹은 것.

 그렇게 대답하자 남영은 “질투했어.”하고 대꾸했다. 평소와 같이 덤덤한 말투.

 요즘 남영은 이렇게 허를 찌르듯이 솔직해진다.

 어머니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특별히 질투심을 유발할 일인가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납득해버렸다. 왜냐하면.

 “너희 사장님. 널 영아, 라고 부르잖아. 나도 그거 싫어. 질투나.”

 똑같이 덤덤히 대꾸해주자 남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수긍하는 작은 머리통이 콱 깨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못 참겠어서 허리를 숙이고 이마에 키스했다. 외까풀 눈이 무심히 나를 보고 다시 정면을 향한다. 10시간 이상 자고 일어났을 때 저 눈까풀은 부드럽게 부풀어 올라 작고 하얀 밀가루 반죽이나 그 반죽으로 구운 빵 같은 모양이 된다. 그것도 먹어버리고 싶을 만큼 귀엽지.

 즐겁게 떠올리며 “가게 유니폼도 그래. 네가 그러고 있는 거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하고 덧붙였다.

 “왜? 예쁘잖아. 난 좋은데.”

 “바보야. 예쁘니까 화가 나지.”

 누가 바보냐고 성질 낼 줄 알았는데 아무런 대꾸가 없다. 바보는 남영이 아닌 나.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남영도 알까.

 한겨울의 거리를 말없이 둘이서 손을 잡고 걷는다. 어둑어둑하고 한가로운 저녁.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고 공기는 맑고 시리다.

 삼거리를 지나 골목으로 꺾었을 때 남영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나도 화 나. 넌 예쁜데 친절하기까지 하잖아.”

 “난 징그럽지. 예쁜 건 너고. 친절한 건 페이크야.”

 “친구들이 들으면 울겠다, 너.”

 “울라고 해.”

 “나도 앞으로 친절해 볼까.”

 “됐어. 지금도 충분히 친절해.”

 “우리 가게 손님들이 들으면 울겠다.”

 “울라고 해.”

 “하정도 들으면 울겠네.”

 “그 새끼는 꺼지라고 해.”

 “배고파.”

 “응.”

 “송일훈.”

 “응?”

 “함부로 먹지 마.”

 “알았어.”

 “그냥 하는 말 아니야.”

 “안다니까.”

 “네 신장 나빠지면 내 거로 갈아 치워버릴 거니까.”

 “그럴 일 없어.”

 “그럴 일 생기면 무조건 그렇게 할 거니까.”

 “그게 막무가내로 우긴다고 되냐.”

 “무조건 그렇게 할 거니까.”

 무조건, 이라고 한 번 더 못을 박는 남영에게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도 영혼이 반쯤 털려나가는 중이기 때문에.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저녁. 공기는 맑고 시리고.

 영혼을 붙잡으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엔 달이 떠서 밝았다.

 달이 밝아서 “달이 참 밝네.”하고 중얼거렸더니 남영도 달을 봤다.

 잠시 후, “그러네.”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