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4 - 뱀은 정력에 좋아 (3)
"이... 이건....!"
왠지 심상치 않은 베를리오즈의 목소리에 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 느낌이 좋았다.
천재라던 백소소조차 잠깐 막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지금의 나는 전혀 막히는 느낌이 올라오지 않았다!
'설마... 내 안에 숨져진 재능이 있던건가...!'
내가 살짝 기대하며 두근거리고 있자, 베를리오즈가 등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네놈... 놀라울 정도로 반응이 없다."
".... 네?"
"그래도 범재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캬캬캬캿!! 강신에 있어서는 네놈은 둔재다! 하긴 그리도 둔하게 굴더니! 이것도 둔재일만 하구나!! 캬캬캿"
어째서인지 내가 둔재라는 것에 즐거워하는 베를리오즈에를 보니 꿀밤을 한 대 먹이고 싶었다.
"하아..."
뭐... 이런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도 어느정도 생각하고 있었다.
트리스티아의 '인챈트', 비앙카의 '강신'은 조교사로도 빌려 올 수 없는 걸 보면 둘은 스킬이 아닌 기술로 분류가 되는 듯했으니까.
결국, 지금까지 죄다 꼼수로 스킬을 얻어왔던 내가 사용하기는 어렵다는 거다.
"... 베를리오즈님. 그럼 저는 강신을 못 쓰는 거네요?"
"음, 그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여신님이 우리에게 가르쳤던 기술은 '아인족'과 '인간'에게 가르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뭐, 재능에 따라 효율의 차이는 있지만 네가 '인간'인 이상 사용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럼 저는 왜 안되는데요."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역시 네 녀석의 가장 깊은 감정은 사랑이 아닌듯하구나."
"....!"
"....!"
그 말에 나보다 비앙카와 백소소가 더 놀란 듯한 눈치다.
"서... 서방님은... 소녀가 제일이 아니옵니까!"
"뭐야! 너 나 보고 좋아죽겠다면서! 거짓말이었어!"
"둘 다 잠깐 진정해요. 그리고 비앙카도 살의잖아요. 그거랑은 관계없다니까요..."
"... 아, 그렇사옵니다."
"... 아, 그것도 그렇네."
둘 다 동시에 납득하는 비앙카와 백소소.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사랑 이외는 딱히 떠오르는 감정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인데... 베를리오즈님.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제가 여신님도 예상 못했을 정도로 재능이 부족해서 안 되는 거라면 어쩌죠..."
"쯧, 본녀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놈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래, 글씨를 쓰는 것과 같다."
제자리에 쪼그려 앉은 베를리오즈가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슥슥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책도 없고 스승도 없는 상태에서 문자를 스스로 배우고자 하면 몇 년이 걸려도 배우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네놈은 본녀가 길을 뚫어주지 않느냐? 이건 바로 옆에서 본녀 쓴 글씨를 베끼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다."
베를리오즈가 땅에 적은 글자는 유진 바보였다....
팬티를 훤하게 보이는 것도 모르면서 누구보고 바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네놈이 천하의 멍청이라도 그대로 따라 쓸 수는 있을 것이다. 뭐, 재능에 따라 악필과 명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본녀가 가르쳐주면 반드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 그렇군요."
"그렇다! 결국, 네놈의 문제다. 네놈에게는 사랑이 아닌 다른 깊은 감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거라!"
"...."
갑자기 찾아내라고 해도 진짜 생각나지 않는다.
"뭐, 당장 떠올리라고 해도 생각나지 않을게다. 그럼 오늘은 이만 끝내고 내일 보자구나."
"... 네."
내가 살짝 우울해하고 있자 비앙카가 어깨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너무 고민하지 마. 강신 좀 못 쓰면 어때. 나랑 쟤가 쓰는데."
"... 맞사옵니다. 서방님은 소녀가 지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고마워요. 둘 다."
***
그날 밤, 오랜만에 밤늦게 혼자 카르네아를 산책했다.
아무도 없는 정원에 도착한 내가 목표를 작게 속삭였다.
"... 이 세계의 해피엔딩을 보는 것."
이건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지만...
내가 세계를 지키고 싶은 건, 사랑하는 사람이 이곳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깊은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니...
바스락─
그때, 수풀에서 소음이 일었다.
예전 같았다면 예상외의 이벤트에 쫄았겠지만, 이제는 카르네아 안에서 나오는 적이라면 충분히 혼자서 제압할 수 있기에 별생각이 없었다.
"... 나와."
바스락─
내 말에 반응한 누군가 수풀을 해치며 걸어 나왔다.
"... 리아나?"
"와~아! 진짜 유진이잖아? 여기서 만나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리아나의 모습에 내가 물었다.
"상태가 엉망이잖아요. 왜 그래요?"
"아! 이거... 아핫핫♪ 샤르메스의 신상품이 나왔다고 해서 사러 갔다가 이렇게 됐네! 하하하♪!"
"... 리아나라면 굳이 직접 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황위 계승권은 잃었다지만, 리아나는 현 황제의 유일한 핏줄이다.
말 한마디면 모든 명품상들 리아나의 앞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어줄 텐데...
"응... 그렇겠지. 그렇지만 앞으로 나는 황녀가 아니라 리아나로서 유진이 옆에서 살아갈 테니까. 이런 거에 익숙해져야지!♪"
"... 그래도 이렇게 엉망이 될 정도로 쇼핑을 해요? 그래서 산 물건은 어디 있어요? 옮겨줄게요."
"아... 그거 결국 못 샀어! 아하하!♪ 내가 약해져서 그런가 생각보다 쉽지 않네... 뭐, 그래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신경쓰지마! 그보다 유진이는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어?"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나를 올려다보는 리아나의 붉은 눈동자가 매혹적이다.
"잠깐 고민이 있어서 산책 중이었어요."
"헤에~ 유진이의 고민이라 궁금한데? 알려줘라♪"
그렇게 말한 리아나가 내게 찰싹 달라 붙어온다.
"...."
지금이라면 혹시 리아나의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싶어서 은밀하게 숨을 들이켰지만...
코끝에 스치는 건, 달콤함 벌꿀 향기 뿐이었다.
"아, 지금은 내가 더러워서 달라붙으면 조금 그런가?... 냄새날지도."
"... 슬프지만, 벌꿀 향기만 나니까 괜찮아요."
"아하핫♪ 고마워 유진아. 그래서? 무슨 고민이었는데?"
"음... 그러니까."
큰 눈을 깜빡이는 리아나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전부 다 이야기했다.
그러자 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음! 결국 유진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제일 큰 감정이 궁금한 거구나!"
"그렇죠.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베를리오즈님은 사랑이 아니라네요."
나 자신의 감정을 아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을 줄이야.
그러자 리아나가 손을 놓고 앞으로 몇 걸을 나아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유진아! 나는 지금 태어나서 가장 행복해! 너를 만난 것도! 이렇게 같이 걷는 것도! 하나하나 전부가! 응! 매일매일이 어어어엄청~! 즐거워♪"
"리아나..."
"하지만... 유진아. 내 가장 깊은 감정은 행복도 사랑이 아닐걸?♪"
"... 그럼 뭔데요?"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고개를 숙인 리아나가 대답했다.
"증오."
"...."
"만일 누군가 너를 다치게 하면 응... 나는 절대로 용서 안 할 거야. 반드시 찾아내서 100배... 아니, 1000배로 갚아 줄거야."
"... 그건 저도 그런데요."
"후훗... 말만 들어도 기쁘네? 하지만 유진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더 무거운 여자인걸? 만일 너가 죽는다면...."
"...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에 들었을 때, 리아나 좀 찐 것 같기도."
퍼억─!
말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리아나가 주먹으로 가슴을 때렸다.
꽤 진심이 담겨 있는지 묵직한 주먹이었다.
"... 흐음... 유진이는 나를 무겁다고 생각했구나."
"아니... 어디까지나 생각했던 것보다 무겁다는 거지..."
"유진아? 더 말하면 나... 화낼꺼야?"
생긋 웃는 리아나였지만, 눈 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다.
"... 알았어요."
"후후훗...♪ 착하네. 뭐, 내가 어두운 이야기를 않도록 배려해주는 유진이의 그런 점도 사랑해!♪"
"...."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리아나에게는 죄다 읽히는 느낌이다.
"후후훗♪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야. 유진이 너가 나를... 우리를 깊게 사랑하는 건 잘 알겠어. 너무 고맙고 기뻐! 하지만 그렇다고 네 가장 깊은 감정이 사랑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는 거지! 그거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
"나도 세상에서 너를 가장 사랑하지만... 그래도 가장 깊은 감정은 역시 증오인걸?"
"...."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리아나였지만... 왠지 그 모습이 슬프게 느껴졌다.
"... 리아나, 이제 뭐 할 거예요?"
"뭐하다니? 이제 씻고 잠을.... 아? 지금 나 꼬시는 거야? 후후훗♪"
리아나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꼬시는거. 별일 없으면 저랑 같이 있어요."
"아하하핫! 너무 기쁘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같이 있고 싶지만... 미안해? 내일은 채넬의 신상 발매일이라! 유진이랑 같이 있으면... 응... 절대로 제시간에 못 일어날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리아나가 내게 다가와 귓속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다음에 잔뜩하자? 주인님♥"
리아나가 이렇게 말하는데 안 보내 줄 수도 없다.
"... 알았어요. 리아나. 아쉽지만 그럼 잘 자요"
.
"응! 유진이도 잘자! 다음에는 내가 꼬셔줄게♥"
마지막으로 내게 윙크를 날리고 리아나가 기숙사 쪽을 향해 걸어갔다.
"...."
리아나가 완전히 떠나고, 다시 혼자 남은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랑에서 비롯됐다지만 리아나는 증오를 품고 있고, 비앙카는 살의를 품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뭘 품게 될까...
'... 그보다 애초에 내 사랑은 뭐지?'
양호 마망 앞에서는 나는 아기처럼 행동하는 데 즐겁다.
하지만 마르잔 앞에서는 조금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뿐만이 아니라 루시아, 리아나, 비앙카, 비비안, 백소소.... 내가 사랑하는 여인 하나하나에 주어지는 사랑의 모습과 방향이 다르다.
"... 그렇네."
내 사랑은 모두를 담을 만큼 넓기는 해도 깊지는 않다는 뜻이다.
'... 그렇다면 내 가장 깊은 감정은.'
홀로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깨달았다.
나의 가장 깊은 감정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