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6 - 루시아 우르엘라 (9)
"루시아, 산키샌 마을의 식량이 사흘 치도 안 남았어. 그쪽은 전선도 넓고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편이..."
"아니요. 산키샌 쪽은 절대로 뚫리면 안 돼요. 최중요 지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세요. 식량은 충분히 보급해 줄 테니 비앙카가 직접 가져가세요."
"... 알겠어."
"저... 루시아님. 구호소에서도 식량이 다 떨어졌어요. 그리고 의료물자도요...."
비앙카의 요청을 해결하니 이어서 들어오는 릴리스.
"금방 처리할게요. 마르잔, 호위부대를 이끌고 릴리스와 보급품을 전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루시아님. 호위부대의 장비도 새로 보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르잔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벌써요? 보급을 받아간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지금 그다지 여유가 없는데... 남은 걸로 견딜 수는 없어요?"
"물자수송 과정에서 전투가 몇 번 일어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망자도 제법 발생했고요... 그래도 어떻게든 운영하고 있지만, 보급이 없으면 이 이상 부대를 운영하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하아, 알겠어요. 아스란에서 이번에 온 보급품을 풀게요."
"... 네, 루시아님. 그리고 비비안님께 편지가 왔습니다."
오랜만에 온 비비안의 편지.
평소라면 반가워했겠지만, 지금은 왠지 느낌이 불안했다.
"내용은요?"
"특수부대가 성공적으로 마물의 둥지를 토벌했다고 합니다."
"... 후우... 그나마 듣던 중 좋은 소식이네요."
편지의 내용이 여기까지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 또 보급인가요?"
"... 네."
내게 죄송하다는 표정을 짓는 마르잔 이었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 알겠어요. 비비안에게도 인원을 뽑아 보급 물품을 전달할게요. 다들 더 필요한 게 있나요?"
"... 없어."
"없어요."
"없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다들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철컥─
모두가 떠나고 방에 혼자 남자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하아..."
조금만 더 힘내달라는 건, 사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아...'
하나를 간신히 해결했다고 생각하면 다른 장소에서 문제가 생긴다.
쏟아져 나오는 문제들을 보면 마음 같아선 직접 뛰어다니며 해결 하고 싶지만, 망가져 버린 몸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어째서 이렇게 힘든거죠..."
설령 유진이 없더라도 재앙에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단순한 감각이 아닌 경험에서 솟아난 것이다.
'6회차 때는 분명...'
그러니까 유진이가 내가 아닌 리아나의 편에 섰을 때.
리아나가 재앙 이상으로 상대하기 어려웠졌지만, 의외로 재앙 자체는 토벌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회차는 다르다.
아스란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무너졌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
고작 내 부상 하나 때문에 벌어졌다고 하기에는 그 차이가 너무 심했다.
"... 왜 이런 차이가..."
6회 때와 지금의 차이가 생긴 이유를 알아내면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억을 천천히 되짚었다.
유진이가 내 곁에 있을 때와 없을 때.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지.
한참을 생각하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깨달았다.
9회차의 내가 어둠 속에서 그가 빛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처럼.
... 6회차의 유진은 어둠 속에서 나를 돕고 있었다.
반란 세력이 유난히 조용했던 것도, 마물의 둥지가 산사태에 휩쓸렸던 것도, 타락한 귀족들의 비밀금고가 드러났던 것도.
'...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어.'
그때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을망정 그것이 유진의 도움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 하..."
직접 경험했기에 유진이 내게 숨기고 행동을 한 이유 역시 알 수 있었다.
'... 어두운 면을 보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9회차의 내가 유진이 빛나길 바랐던 것처럼.
6회차의 유진도 내가 빛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만, 나와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결국, 유진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어 도움을 눈치채게 했던 나와는 달리.
6회차의 유진의 도움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아... 아하하하하..!!.. 아하하...!!.. 하하하하...!!"
갑작스럽게 폭소가 터져 나왔다.
유진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해서 절망했던 내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만약..!. 만약에 내가 유진이에 대한 감정이 없었더라면...!'
6회차의 유진이 계산하지 못한 유일한 오산은 내가 그에게 품고 있던 감정이었다.
만일 내가 유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더라면...
당연히 유진을 생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유진을 제압할 수 있었겠지.'
그리고 황녀와 그녀의 오른팔인 유진을 큰 피해 없이 제압한 내게 막대한 공이 돌아왔을 것이고...
앞으로는 그 누구도 내 말에 반기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런데 나는...'
유진이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내게 남겨 준 기회를 날린 거로 부족해서 자살로 도망쳐버리고, 결국 다음 회차에서는 절망해서 숨어버렸다.
'제가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뿐만인가!
말도 안 되는 오해에 빠져 절망한 채 방안에 틀어박힌 나를 꺼내준 것 역시 유진이었다.
"... 이... 바보."
뭐가 '제국의 달'이고 뭐가 '카르네아의 수석'이냐.
어리석기도 이렇게 어리석을 수 없었다.
유진이는 단 한 번도 이 세계를...
나를 버린 적이 없었다.
그걸 너무나 늦게 깨달아버린 내가 원망스러웠다.
'나... 어떻게 해...'
내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얼굴이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랐다는 것을.
이미 너무나 사랑해 이 이상으로 유진이를 사랑할 수 없었을 줄 알았는데...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는 사랑을 자각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가슴에 손을 올리자 여전히 거세게 뛰는 심장이 느껴진다.
'... 유진아...'
나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다짐했다.
사랑에 빠진 바보 같은 여자는 아직 더 힘낼 수 있었다.
***
저벅─ 저벅─
쩔뚝거리는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창문 밖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불타오른다.
실패했다.
유진이를 생각하며 정말 많이 힘을 냈지만, 최종보스는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결국, 방향을 바꿔서 최종보스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1회차의 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최대한 봉인하면서 늦춰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제가 막는 동안 도망치세요!!'
릴리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도망치지도 못했겠지.
'... 유진아... 네가 있었으면 달랐을까.'
유진이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
내 삶의 마지막 순간.
끝까지 유진이를 보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며.
나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 유진의 기숙사 방문을 열었다.
끼익─
그렇게 문을 여는 순간 예상외의 사람이 보였다.
"... 하아.... 루시아 우르엘라... 오랜만이옵니다."
"... 폐하?"
백소소.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있단 말인가?
"... 하... 하아... 하아... 제국이 멸망한지가 언제인데... 폐하라고 부르옵니까... 편하게... 부르시지요..."
"... 여기에 어떻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백소소가 여기 있다는 것은...!
방안을 살펴보자 침대에 누워있는 유진이 보였다.
"주인님...!!"
한걸음에 달려가 확인해보지만...
이미 유진의 심장은 멈춰 있었다.
까득─!
"...!!"
곁에 있으면서도 유진을 지키지 못한 백소소에게 순간 살의가 솟아올랐지만, 곧바로 집어삼켰다.
"..... 저주를... 하려면... 하시지요... 서방님을... 지키지... 못한... 나를...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사옵니다..."
"... 어떻게... 그러겠어... 네 모습을 보고도...."
나만큼은 도저히 백소소를 미워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하아... 소녀에게는... 시.. 간이... 없으니... 바로... 말하겠.. 사옵니다... 루... 시아... 난.... 당신... 기억을.. 엿보았사옵니다...."
"... 내... 기억을?"
갑작스러운 백소소의 고백에 내 눈이 크게 떠졌다.
"끄읏... 예... 전부... 본... 것은... 아니지만... 크읏... 조.. 금씩... 떠오르더군요... 그.. 날... 하아... 당신이... 서방님을.... 구한.. 날... 하아... 하아.... 당신이라면... 반드시... 이곳에서... 끝을... 맞이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사실... 기억을... 보았다... 한들... 소.. 소녀는... 아직도... 어떻게 당신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지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케흑..!! 컥!.... 케흑!!"
"... 당신...!"
백소소의 입 밖으로 검붉은 핏덩이가 내장과 뒤섞여 튀어나온 걸 보자 나도 모르게 다가갔지만.
"이건 당신에게 전하는 내 선전포고입니다!! 그러니 똑똑히 들으십시오! 루시아 우르엘라!"
찢어지는 절규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 하아... 당신이... 서방님의 생명을 구해준 것은... 정말...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서방님과 함께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나는... 더 이상...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겠습니다..."
"...."
"... 하아... 케흑... 하... 그... 그러니!!... 하아... 하아... 루시아!! 다음에는.. 양보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양보하지 않아도... 나는....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반... 드시.. 서방님을 차지할테니...!"
그 말을 끝으로 백소소가 숨을 거두었다.
"... 양보하지 말라고...?"
꽈악─
움켜쥔 주먹 사이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을 더 한다고 한들 내 사랑보다 무겁지는 않을 것이고, 지옥의 밑바닥이라 한들 내 사랑보다 깊지는 않을 것이다.
유진의 숨결 한 번, 피 한 방울, 영혼 한 조각마저 독점하고 싶은 것이 나다.
....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독점하려고 하면 할수록 유진의 죽음이 다가오니까.
그런데 감히.
내 기억을 봐놓고도....
내 사랑을 알고서도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냐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
"...."
치사하게도 백소소는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죽음이라는 안식처로 도망쳐버렸다.
"케흑...!!... 케흐으윽...!!"
그때, 기침과 함께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 나의 삶도 끝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
백소소에게서 끊어내듯 시선을 돌렸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유진이 이외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저벅─ 저벅─
"... 주인님."
나는 침대 위에 잠들어있는 듯한 유진의 곁에 다가가 손을 붙잡고.
"사랑해요..."
너무 늦어버린 사랑을 고백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