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305화 (305/354)

Chapter 305 - 루시아 우르엘라 (8)

유진이 아스란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든 마음은 안도였다.

"..."

더는 그가 죽는 걸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서 솟아난 안도.

'유진아...'

지난 회차 때, 나는 당신이 어떻게 빛나는지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내가 무너졌을 때 당신이 나를 구해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당신의 역할을 대신하겠다.

***

입학식 2년 후.

마르잔, 비비안, 비앙카, 릴리스까지.

단 한 사람까지 잃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물론 얻는 게 있는 만큼 희생도 존재했다.

"루멘하르크 제국은 이제 한계에요..."

릴리스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자 비앙카가 혀를 찼다.

"쯧,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아. 한계인 거. 그래서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모인 거 아니야."

"... 결국, 제국 내부에서 해결 할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에요. 아스란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거."

"그러니까 도와주겠냐고? 우리가 멸망하면 다음은 자기들 차례인 거 알 텐데? 지금 자기들 몸보신할 군량이랑 무기 모으는데 정신 없을 텐데 지원을 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비앙카의 말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언했다.

"제가 가서 설득하겠어요."

"야... 정신 차려 우리보고 머리 없이 싸우라고? 네가 가면 여긴 누가 지휘하는데?"

나는 비앙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말했다.

"당신이요."

"뭐? 내가 지휘를 어떻게 해! 난 그냥 주먹질밖에 못 해!"

"할 수 있어요. 당신은 가장 오래 저를 지켜보았잖아요."

비앙카는 할 수 있다.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못한다고! 옆에서 좀 지켜봤다고 알 정도면..!!"

"그냥 지켜보기만 한 것도 아니잖아요? 밤마다 전술서를 읽으면서 공부하는 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지식이 부족할지 몰라도 상황판단과 전장의 흐름을 읽는 능력은 뛰어나요. 그러니까..."

"...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부탁... 할게요. 비앙카."

"씨이... 알았어! 하면 되잖아!"

비앙카의 허락에 내가 살며시 웃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비비안."

"네.. 넷... 루시아님...!!"

"비앙카를 많이 도와주세요. 저 애는 전장을 보는 눈은 있지만, 보다시피 성격이 급해서 분명 실수가 나올 거에요. 그때 말리는 건 당신의 역할이에요."

"네... 노력할게요."

"흥, 저 애는 무슨 내가 너보다 나이 많거든?"

비앙카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릴리스를 바라보았다.

"성녀님."

"네, 루시아님."

"지켜주세요."

"네, 지킬게요."

환하게 웃는 릴리스.

릴리스에게는 한 마디로 충분했다.

무엇을 지켜달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릴리스라면 분명 최선을 다해서 모두를 지킬 테니까.

"마르잔."

"네, 루시아님."

"할 일이 많겠지만 이들이 저라고 생각하고 보좌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루시아님이 돌아오실 장소를 반드시 지키고 있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모두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허리를 숙였다.

"다들 고마워요."

모두를 지키며 이곳까지 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단 한 명도 잃지 않고 와준 것을 진심으로 감사했다.

***

2개월 뒤, 아스란 제국.

"처음 뵙겠습니다."

유진이 아스란의 재상으로 있는 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떨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루멘하르크 제국의 외교대신, 루시아 우르엘라라고 합니다."

나는 유진과 아스란의 어린 황제를 향해 인사를 전했다.

***

"... 그렇다면 병장기와 군량은 아스란쪽에서 이 정도까지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원을 요청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오는 물품들.

아무리 제국이라고 한들 쉽게 준비 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아...'

그때 나는 깨달았다.

유진은 싸움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 정말 감사합니다."

그저, 루멘하르크가 아닌 아스란에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떨려오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말을 돌렸다.

"... 그런데 혹시 추우신가요? 차를 한잔 드릴까요?"

"... 어찌 아셨습니까?"

"안색이 그리해 보입니다."

"하하.. 안색이라. 폐하 이외의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입니다. 대신과 대화를 하다 보면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느낌이 듭니다."

"...."

사실은 누구보다 오래 당신을 알고 있다고 전하고 싶었다.

"후훗... 저도 대신과 대화를 하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전해서는 안 된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몸이 따듯해지는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어찌 대신께서 그런 일을 시키겠습니까. 시녀를 부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늦은 시간에 사람을 부르는 것도 못 할 짓이지요. 제가 이래 보여도 차를 내리는 게 취미이니 입에 맞으실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작고 사소한 시간이 설령 한순간의 꿈일지라도 행복했다.

"... 아니면 혹여 대신께서는 제가 내린 차는 마시기 싫으신 건가요?"

"...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알겠습니다."

유진의 웃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당신의 곁에 있는 것이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당신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만 해준다면...

나는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었다.

***

아스란에 온 지 세 달.

"... 대신. 잠깐 이야기를 나누지."

그리고 유진이가 출장을 떠나던 날.

백소소가 나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 서방님과는 무슨 관계더냐?"

황제가 아닌 질투가 가득한 여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백소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저 십여 전에 얼굴을 한 번 본 것이 다입니다."

"웃기지 마라!"

콰직─

백소소의 가는 팔에서 나온다고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목이 졸렸다.

"네 눈빛 한 번 행동 하나가 서방님을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는데!!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한다는 말이냐!"

"... 거짓이... 아니옵니다. 저는... 유진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사옵니다."

사실이었다.

이번 회차의 나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백소소가 나를 바닥에 팽개쳤다.

"목숨이 아깝다면 그 이상 서방님께 함부로 접근하지 말 거라... 그때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하아... 하아... 네...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쓰러진 나를 보며 백소소가 긴 숨을 내쉬고 말했다.

"... 후우.... 그럼, 서방님이 돌아오기 전에 떠나세요. 서방님이 약조한 대로 충분한 해줄 테니까."

"... 알겠습니다... 폐하."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이제 짧고도 행복했던 꿈에서 깰 시간이라는 걸 자각했다.

***

며칠 뒤, 루멘하르크 제국으로 귀국하는 날.

밖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보아라! 나 청가주가 폐하의 아비를 죽인 사악한 역적을 붙잡았다!"

소리를 들어보아 하니 아무래도 권력 다툼이 일어난 듯했다.

"...."

세계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저런 헛짓거리나 하고 있다니 다들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저랑은 관계없는 일이에요...'

타국의 정치에 관련된 일이다.

끼어들어서 좋을 리가 없었고 끼어들어서도 안 된다.

신체의 안전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저들이 나를 해할 능력이 없다는 건 둘째치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지만 루멘하르크는 제국이다.

루멘하르크와 척을 지고 싶지 않다면 외교대신인 나를 건들지 않을 것이다.

'... 그래도.'

유진이가 멀리 출장을 떠난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만약 유진이 황실에 남아있었다면 나는 절대 떠나지 못했겠지.

그때, 마차를 준비하던 시녀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정말... 괜찮을까요? 지금 밖이..."

"신경 쓰지 말고 출발 준비를 하세요. 그 대신 마차에 루멘하르크 제국 문양이 달린 깃발을 걸어놓고요."

".. 네... 넷... 알겠습니다."

잠시 후 마차의 몸을 싣고서 떠나려던 찰나.

창문 밖으로 심장이 꿰뚫린 채 피를 흘리는 유진이가 보였다.

"....!"

비명을 지르거나 놀라지는 않았다.

"... 아..."

정신을 차리니 이미 나는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뒤늦게 유진을 향해 마법이 날아오는 걸 확인했다.

'제발... 제발...!'

내가 유진에게 달려가 감싸는 순간.

파아아앙─!

커다란 충격이 몸을 때렸다.

"... 다... 다행... 이에요..."

부상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유진을 구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 이번에는..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육체는 엉망이었지만 머리는 지금껏 없었을 정도로 깨어있다.

'살릴 수 있어...!!'

10번의 회귀로 머릿속에 쌓인 모든 지식이 한순간에 재조합되며 유진을 살릴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계산했다.

"...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주... 세요......"

후우우웅─!!

내 마력과 생명력이 급속도로 빠져나감과 동시에 유진의 몸에서 빠져나왔던 피가 다시 돌아가고 뚫려있던 가슴의 상처가 아물어간다.

'... 제발... 견... 뎌줘...'

하지만...

유진이를 살리기에는 부족했다.

꽈악─

이렇게 또... 눈앞에서 유진이를 잃고 마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

내가 필사적으로 생명력을 쥐어짜고 있을 때, 누군가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 내... 내것을 쓰세요!"

손을 붙잡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틈조차 없었다.

나는 다만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었다.

"....."

"... 다행..."

잠시 후, 나는 가냘픈 숨을 유진을 보며 눈을 감았다.

***

"...."

내가 살아있었다.

반신이 말라 비틀어지고, 한쪽 눈은 완전히 먼데다, 귀가 먹먹하게 들리지만 그래도 살아있었다.

"유진.. 아..."

온몸의 감각이 둔해졌건만 유진이 있는 장소만큼은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유진이 있는 장소로 찾아갔다.

"...."

스윽─

비록 제대로 보이지는 않아도 잠들어있는 유진의 모습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유진이 온전히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에게 입을 맞추려다 멈춰섰다.

"...."

착각해서는 안된다.

내게 이럴 권리는 없었다.

지금의 유진의 곁에 있는 건 내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입을 맞추는 대신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사락─ 사락─

비록 허락되지 않은 사랑이지만, 이 정도의 행복만큼은 용서해주길 바랐다.

그렇게 얼마나 유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있었을까.

"여기서 뭘 하는 것이냐 물었다!"

갑작스럽게 붙잡힌 어깨.

뒤를 돌아보니 백소소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아... 폐하... 오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 너.. 그... 몸..."

"괜찮습니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귀국하는 대로 성녀에 치료를 받을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 괜찮아질 것입니다."

단순히 다친 것이 아니라 죽어버린 신체다.

설령 릴리스에게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나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 거짓을 고했다.

내 상태가 유진에게 전해지는 것만은 안 됐으니까.

".... 본녀가 네게 어찌 보답하면 되겠느냐?"

"보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께서 루멘하르크에게 지원하기로 약조하신 물건으로 충분하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유진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그건 황제로서 약조한 물건이다. 본녀는 지금 사랑하는 이를 구원받은 여인으로서 어찌하면 되겠느냐고 묻고 있다."

"...."

눈앞의 작고 어린 황제는 내가 유진이를 앗아갈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세계 누구보다 그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나는 백소소를 향해 작게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제가 유진님을 구한 것은 비밀로 해주십시오."

"... 어... 어째서냐... 네가..."

... 유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지금... 유진님의 곁에 있는 건 제가 아닙니다... 폐하지요.."

만일 내가 그를 위해 희생한 것을 안다면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으음..."

그때, 유진이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 뜻은....

내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 유진님께서 일어나는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지... 지금... 떠나는 것이냐?"

"예... 폐하께서 오셨으니까요. 그럼... 폐하. 유진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알겠.. 다..."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걸어가 방문을 닫기 직전.

마지막으로 유진의 얼굴을 눈에 새기며 생각했다.

'... 사랑해요. 누구보다도... 당신을.'

그렇게 전할 수 없는 사랑을 고백하며...

나는 유진이를 떠나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