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4 - 백소소(7)
어둠 속에 가라앉았던 의식이 수면 위로 급부상한다.
"....!!... 하아... 하아... 여... 여기... 는?"
멍한 머리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 시녀가 화들짝 놀라서 달려왔다.
"폐... 폐하! 깨... 깨어나셨습니까! 다... 다행이옵니다.! 정말 다행이옵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옵서서 곧 어의를 불러오겠습니다."
"나는... 괜찮다. 그보다 서.. 서방님은...!! 아니, 되었나. 본녀가 직접 찾으마!"
"폐... 폐하! 일어나시면 안 되옵니다! 아직 상처가...!"
"비켜라!!"
나는 가로막는 시녀의 손을 뿌리치고 방을 나섰다.
'서방님...! 서방님!!'
몸이 비록 많이 망가졌다고 한들 내가 서방님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몸을 채찍질하며 최대한 빨리 서방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병실 앞.
막상 문을 열려고 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려온다.
... 무사할까.
무사하여만 한다.
무사 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혹여나 서방님께 해가 될까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 순간.
"....."
나는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사락─ 사락─
서방님의 곁에 앉아 머리를 조심스럽게 넘겨주는 루시아의 모습이.
마치 태어날 때부터 둘은 하나였다는 것처럼 너무나도 완벽했기에.
그 사이에 소녀가 끼어들 곳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 같아서.
'아니다... 아니야... 서방님의 곁에 있는 것은 나다.'
계속해서 저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는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았기에 나는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고는 말했다.
"여기서 뭘 하는 것이냐?"
"...."
대답하지 않는 루시아.
나는 루시아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여기서 뭘 하는 것이냐 물었다!"
"... 아... 폐하... 오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때야 나는 루시아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 너."
완벽하다고 생각한 루시아의 모습은 나의 착각이었다.
루시아의 한쪽 눈에는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다른 한쪽의 눈조차 뿌옇게 물들어 제대로 앞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뿐만이던가, 오른손과 왼쪽 다리는 고목처럼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있다.
... 겉보기에도 이러할진대 과연 내장이라 멀쩡할까.
"... 너.. 그... 몸..."
"괜찮습니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파르테논에 들려서 성녀에게 치료를 받을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 괜찮아질 것입니다."
"...."
거짓말이다.
지금 루시아는 단순히 상처를 입은 게 아니다.
서방님을 살리기 위해 말 그대로 생명력을 대가로 바친 것.
루시아의 신체는 그 날 죽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성녀라 할지라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듯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단 말이다.
'... 만일.'
만일 루시아가 자신의 생명력을 사용하는 대신 내 생명력을 더 뺏어가도록 마법을 조정했다면, 저렇게까지 많은 것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러지 않았다...
".... 본녀가 네게 어찌 보답하면 되겠느냐?"
"보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께서 루멘하르크에게 지원하기로 약조하신 물건으로 충분하옵니다."
루시아의 말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 그건 황제로서 약조한 물건이다. 본녀는 지금 사랑하는 이를 구원받은 여인으로서 어찌하면 되겠느냐고 묻고 있다."
추하다.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도 추했다.
루시아의 모습을 보고도 서방님의 목숨값을 치르겠으니 그 이상 바라지 말라고 선을 긋는 자신이 너무나도 추했다.
허나...
루시아는 그 말뜻을 이해했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제가 유진님을 구한 것은 비밀로 해주십시오."
"... 어... 어째서냐... 네가..."
네가 그리 희생한 것을 알린다면 서방님은....
.... 내가 아닌 너를 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두려워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지금... 유진님의 곁에 있는 건 제가 아닙니다... 폐하지요.."
루시아의 마지막 한마디에 나는 알아버리고 말았다.
나와 루시아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서방님의 곁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는 나와는 다르게...
루시아는 설령 곁에 있지 않더라도 서방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다.
꽉 쥔 주먹 아래에 손톱이 파고든다.
서방님을 마음에 품은 이후, 누구에게도 서방님에 대한 사랑이 밀릴 것이라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허나, 루시아의 앞에서만 서면 서방님에 대한 사랑이 가짜처럼 느껴진다.
"으음..."
"아... 유진님께서 일어나는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지... 지금... 떠나는 것이냐?"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고, 그토록 많은 것을 희생했으면서 서방님이 일어난 모습조차 보지도 않고 간다고?
그러자 루시아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웃었다.
"예... 폐하께서 오셨으니까요. 그럼... 폐하. 유진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알겠.. 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병실을 나서는 루시아.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간신히 참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하아... 소소인... 거냐?"
"... 흐... 끄윽... 네에... 서... 서방님... 흑.. 흐윽.... 소녀이옵니다.."
"어찌... 울고있느냐?"
일어나자마자 자신이 몸을 추스르기는커녕 나를 위로하고 하는 서방님.
그 손길이 너무 따스하여...
나는 더는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흐끄윽... 흑... 기... 기뻐서 그런 것이옵니다... 흐윽.... 서방님이... 깨어난 것이... 흐끅...."
"... 울음이 많구나... 고맙구나... 소소야."
"하아... 흐윽... 무... 무엇이... 말이옵니까?"
"... 나를 구해 준 것이."
".... 흐윽...! 흐... 흐윽... 끄으흑... 흐아아앙... 흐끅... 흐아..."
"어허, 서방님이 말하지 않느냐. 그만 울 거라. 네가 구한 목숨이다. 울지 말고 웃거라."
아니옵니다.
서방님을 구한 것은 제가 아니옵니다.
결코, 보답 받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희생한 여인이 당신을 구한 것이옵니다.
"흐아아... 흐윽.. 흐아아앙..."
나는 결국 전하지 못한 진실을 울음에 담아내었다.
***
루시아가 아스란을 떠나고 몇 달 후.
재앙은 본격적으로 다가왔다.
인류는 제법 열심히 발버둥 쳤다.
허나... 재앙은 그 이상으로 강대했다.
인류는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보았지만, 아무리 틀어막아도 끊임없이 적들은 쏟아져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국경과 계급 인종 따위는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저 인간의 형상이 아닌 것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게 끝났다.
***
"... 소소야..."
등에 업힌 서방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 서방님..."
"... 춥구나..."
"조... 조금만 참으십시오... 서방님.... 소녀가.. 곧... 따듯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작아지는 숨소리.
자꾸만 떨어지는 체온.
그 모든 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
"..."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목덜미에 닿는 서방님의 숨결만을 믿는 것뿐.
언제 멈출지 모르는 망가진 몸뚱이에 간절히 애원하며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소소야..."
그리고....
다시 한번 서방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끝이 다가왔다는 걸 직감했다.
"... 네, 서방님..."
"졸립... 구나... 잠시.. 눈을... 감아도... 되겠느냐..."
서방님이 안심할 수 있도록 애써 목소리를 높이며 대답했다.
"네... 자... 잠깐... 눈... 을 붙히십시오. 서방님.... 깨.. 깨어나실때면... 저.. 전부... 좋아졌을 겁니다...."
"... 미안... 하구나..."
"아니옵니다... 서방님... 소녀는... 괜찮사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옵서소..."
"미안.... 하.. 구...."
툭─
갑자기 늘어난 것 같은 서방님의 무게.
축 늘어지는 서방님의 손.
더는 느껴지지 않는 숨결.
"....."
지금 눈물을 흘리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 같았기에 나는 억지로 감정을 삼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 펴... 편히... 쉬십시오... 서방님.... 소녀도... 곧... 따라가겠나이다..."
저벅─
저벅─ 저벅─
마침내 도착한 건물.
비틀거리는 몸으로 계단을 오르자, 창밖으로는 불타오르는 세상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장소에 도착했다.
서방님을 침대에 눕히고는 나는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정말.... 정말로... 많이.... 사랑하옵니다..."
***
"하아... 하아..."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깨어났을까.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를 보니 이젠 정말 죽음이 가까웠다.
".. 하아... 과연... 언제가... 되어야.. 오는 것이냐...?"
내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맞지 않았을 뿐.
절뚝- 쩔뚝-
그때였다.
다시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끼익─
이윽고 문이 열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 하아.... 루시아 우르엘라... 오랜만이옵니다."
"... 폐하?"
"... 하... 하아... 하아... 제국이 멸망한지가 언제인데... 폐하라고 부르옵니까... 편하게... 부르시지요..."
"... 여기에 어떻게..."
나를 바라보던 루시아의 눈이 서방님을 확인하는 순간 크게 떠졌다.
"주인님...!!"
서방님의 죽음을 확인한 루시아는 순간 나를 증오에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저주를... 하려면... 하시지요... 서방님을... 지키지... 못한... 나를...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사옵니다..."
"... 어떻게... 그러겠어... 네 모습을 보고도...."
루시아의 말에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하아... 소녀에게는... 시.. 간이... 없으니... 바로... 말하겠.. 사옵니다... 루... 시아... 난.... 당신... 기억을.. 엿보았사옵니다...."
"... 내... 기억을?"
"끄읏... 예... 전부... 본... 것은... 아니지만... 크읏... 조.. 금씩... 떠오르더군요... 그.. 날... 하아... 당신이... 서방님을.... 구한.. 날... 하아... 하아.... 당신이라면... 반드시... 이곳에서... 끝을... 맞이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서방님과 루시아가 처음으로 이어진 바로 이 장소에서.
"... 사실... 기억을... 보았다... 한들... 소.. 소녀는... 아직도... 어떻게 당신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지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케흑..!! 컥!.... 케흑!!"
"... 당신...!"
입 밖으로 검붉은 핏덩이가 내장과 뒤섞여 튀어나온 걸 본 루시아가 놀라서 다가오려고 하자.
"이건 당신에게 전하는 내 선전포고입니다!! 그러니 똑똑히 들으십시오! 루시아 우르엘라!"
나는 마지막 남을 힘을 쥐어 짜 소리쳤다
"... 하아... 당신이... 서방님의 생명을 구해준 것은... 정말...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서방님과 함께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나는... 더 이상...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겠습니다..."
"...."
"... 하아... 케흑... 하... 그... 그러니!!... 하아... 하아... 루시아!! 다음에는.. 도망치지 마십시오!... 당신이... 양보하지 않아도... 나는....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반... 드시.. 서방님을 차지할테니...!"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몸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서방님의 얼굴만이 눈에 들어온다.
'서... 방님...'
너무 멀리가지는 말아옵소서...
소녀...
곧...
따라가겠...
.....
"내가 너를 품게 해다오."
"네, 기꺼이!"
내 말에 빛보다 빠르게 백소소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