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2 - 백소소 (5)
'첫 번째 제자'가 된 지 몇 달이 지났을 때 쯤.
황제가 목숨을 잃었고 나는 황위에 올랐다.
황제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지루했다.
해야 할 일은 많아졌고, 서방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최근 들어서 서방님도 소녀와 잘 안 놀아주시고...'
황제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서방님을 재상의 자리에 올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반대가 심했지만, 황제가 하겠다는데 어찌할 건가.
허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신 서방님께서는 자신이 간섭하지 않는 편이 나라가 잘 돌아갈 거라면서 일과 중에는 서재에 들어가서 책만을 읽었다.
"... 무료하구나."
결국,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쓸데없이 커다란 의자에 앉아 일과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그때, 한 시녀가 쭈뼛쭈뼛하는 게 입을 여는 게 보였다.
"저... 저... 폐하..."
"... 무슨 일이냐?"
"그... 아... 아니옵니다... 잊어주십시오."
시녀의 대답을 들은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본녀에게 두 번씩이나 말하게 할 생각이냐? 무슨 일이지 답하여라."
"죄... 죄송합니다. 혀... 현재 폐하의 부친이라 주장하는 자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 부친?"
내게 아버지 같은 건 없다.
백가주가 어미에게 씨를 뿌려 태어나기는 했어도, 단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허락받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나도 그를 아비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 그... 노인은.. 자신을 백사 가문의 전 가주라고 했사옵니다..."
시녀의 말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굳이 백가주에게 복수를 하지 않은 건 그만한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뻔뻔하게도 내 앞에 다시 얼굴을 들이미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나는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알겠다. 들라 하여라."
***
"오... 오... 오오!... 소... 소소야...!"
백발의 노인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줄줄 흘렸다.
"네가 떠나고 이 애비가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그 노인의 정체는 고작 몇 개월 사이에 폭삭 늙어버린 백가주였다.
아니, 가주 자리에서 쫓겨났으니 백가주라고 불러서는 안 되겠지.
"... 백영학."
이런 상황에서도 내게 이름을 불린 것이 불편한지 순간적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우... 우리는 부모와 자식이지 않으냐. 펴... 편하게... 아... 아비라... 부르거라."
"...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말하 거라. 아니, 말할 필요 없다. 떡고물이라도 얻어먹고 싶었겠지."
"그... 그런 것이.. 아니다!"
"... 허면?"
"보... 복수를... 해다오... 백사 가문에서 이 애비에게 누명을 씌워 내쫓았다!"
멍청함도 이 정도면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황제가 된 이후, 내게 복수 당할 것을 두려워한 백사 가문은 백가주를 직접 쳐냈다.
그 과정에서 백가주를 죽이지 않은 것이 전대 가주에 대한 최대의 자비일 것인데...
그것에 감사하질 못할 망정 복수를 하려고 하다니.
"... 너... 너와... 나는... 부모와 자식 사이가 아니더냐... 부... 부디... 이 애비의 복수를... 해다오."
누구보다 나를 핍박했던 자가 뻔뻔하게 아비를 칭하니, 예상은 했지만 속에서 천불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 여봐라."
"예. 폐하."
"당장 백영학의..."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백가주의 목을 치라고 말하려던 순간.
"... 지금 감히 폐하의 용안을 보면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냐?"
"... 재상?"
단정한 재상의 복장을 차려입은 서방님께서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내게 허리를 숙인 서방님이 호위들에게 명령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 무도한 자의 무릎을 꿇게 하지 않고."
"옛!"
콰앙─ !
서방님의 명령에 호위들이 백영학의 어깨를 강제로 눌러서 무릎을 꿇게 했다.
"크윽... 누... 누... 구길래...! 이런 짓을 하는 게냐!"
"귀를 가지고도 듣지 못하니 귀가 필요 없겠구나. 데리고 나가 귀를 잘라버려라."
"..!!.. 네... 네놈이!! 내...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바로 저기 앉아있는 황제의 아비다! 소... 소소야! 도와다오!"
"... 그러느냐? 나는 폐하께서 직접 고르신 재상이다. 헌데 감히 제 한 몸 보존하겠다고. 지엄하신 폐하를 걸고 넘어가는구나. 여봐라. 귀를 자르는 김에 혓바닥도 뽑아버리거라."
"옛!"
백가주가 호위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간다.
"이.. 이리 할 수 없다!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 아무리 재상이라 할지라도 이런 게 허락될 리 없다!!"
"허락될 리 없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 말에 서방님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아스란의 재상이다. 한데 감히 네놈 따위가 허락을 논하느냐?"
"이이아아익!!! 주... 쥐새끼 주제!! 쥐새끼가..!!..."
백가주가 발악을 하면 소리쳐봤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끌려나갔다.
"...."
"...."
그리고 나니 접견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금 서방님이 한 짓은 속사정이야 어찌 됐건, 황제의 지시를 받지 않은 월권 행위였으며 내 아비를 죽인 것이었으니까.
"... 재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러가거라."
축객령을 내리고 근처에 사람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서방님에게 달려갔다.
"서... 서방님이 어째서 그런 짓을... 하신겁니까!"
지금까지 재상으로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서방님이다.
한데 첫번째 일로서 저런 짓을 하다니...
분명 서방님에 대한 악소문이 퍼질 것이다.
"미안하구나. 네게 못 볼 꼴을 보였구나."
"사과를 받고자 한 말 아닙니다! 어째서... 어째서입니까!"
"무엇이 말이냐?"
시치미를 떼는 서방님을 향해 나는 소리쳤다.
"어째서 서방님의 손을 더렵혔는지 묻는 겁니다!! 저건 소녀가 직접 죽였어야 했사옵니다! 서방님이 하실 필요는 없었사옵니다!"
"... 백영학은 저래 보여도 네 친부다. 만일 네 손으로 쳐내게 되면 분명 뒤에서 떠들어대는 자들이 나오겠지."
"그렇다면 서방님은요!"
"... 나는 너와 다르다. 지금까지 내가 얌전히 있던 건 이럴 때 위해서였다. 앞으로도 손은 내가 더럽힐 테니 너는 그저 깨끗하게 있어 다오."
서방님의 말에 내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싫사옵니다! 싫사옵니다! 더럽혀진다면 둘이서 함께이옵니다! 부디 혼자서 감당하지 마시옵소서!!"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서방님 함께라면 괜찮다.
하지만...
"... 소소야. 부탁하마."
서방님은 치사하다.
"나를 위해 해줄 수 있겠느냐?"
저런 애틋한 눈빛으로...
저렇게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
나는 입술을 꽉 깨문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백가주를 숙청 한 이후 서방님은 본격적으로 재상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순진하신 폐하를 꼬드겨서 배 속을 채우기 바쁘시잖아."
"이번에도 진상 들어온 황금과 비단을 죄다 개인 창고로 빼돌리셨다는데?"
꽈악─
꽉 쥔 주먹 사이로 피가 흘러나온다.
다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 제멋대로 떠들어 댄다.
서방님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재산을 빼돌린 적이 없었다.
비단은 군량미로 바뀌어 창고에 쌓였고, 황금은 전부 무기를 사들이는 데 사용되었다.
이걸 공표하지 않은 건 황실에 드러나지 않은 힘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폐하께서는 어째서 저런 자를 곁에 두시는 건지.. 다른 좋은 분들도 많으실 텐데."
"얼굴 하나만 보고 있는 거지. 얼굴만큼은 봐줄 만 하니까."
당장이라도 달려가 저들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
아니, 달려갈 필요도 없이 여기서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죽어버리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서방님의 노력이 전부 헛된 것이 되어버린다.
서방님이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는 건 나를 위해서였으니까.
"... 그리고 이번에..."
탓─ 탓─ 탓─
더 떠들어대는 걸 듣고 있다가는 정말 찢어 죽일 것 같아, 나는 최대한 서방님이 있는 서재로 달려갔다.
"... 폐하? 어쩐 일이십니까?"
"서방님..."
나는 놀란 눈을 한 서방님께 달려가 안겼다.
"폐하... 아직 집무 시간입니다.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소녀는 그런 거 모르옵니다..."
"폐하...."
밀어내려는 서방님의 품에 더 달라붙었다.
"... 서방님은 거짓말쟁이옵니다."
"... 제가 말이옵니까?"
"예, 둘이 있을 때는 소소라 불러주신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한데 왜 폐하라고 부르옵니까."
"폐하... 지금은 집무시간이지 않습니까."
끝까지 폐하라고 부르는 서방님의 태도에 내가 볼을 부풀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계속 폐하라고 부르시겠다면 황제로서 명령을 내리겠사옵니다...! 서방님께서는 당장 저를 쓰다듬으십시오."
"... 폐하..."
"어허! 지금 서방님은 황명을 거부할 생각이옵니까?"
내가 짐짓 화난 척을 하자, 서방님께서 졌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안경을 벗었다.
스윽─ 스윽─
"우리 소소가 왜 이렇게 또 어리광을 부리지?"
나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서방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소녀는 전부 밉사옵니다. 저 치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서방님을 욕합니다..."
"... 잘되었구나. 그걸 바라고 있던 거 아니더냐?"
"잘되기는 무엇이 잘되었습니까!! 소녀가 이룬 모든 것이 서방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세상천지가 소녀가 서방님께 이용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씁쓸하게 웃은 서방님이 말했다.
"... 만일 그들이 말이 사실이면 어쩌겠느냐? 내가 너를 이용하고자... 네 곁에 있는거라면..."
"흥, 그런 말로 소녀를 시험하려 하지 마시지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한들 소녀는 상관없사옵니다."
"... 내가 너를 이용했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서방님이 설령 소녀를 이용했다고 할지라도 소녀는 기쁘게 받아드릴 것이옵니다."
나는 서방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에 저에게 말씀하셨지요? 그 누구도 믿지 말라고. 그것이 설령 서방님이라 할지라도?"
"그래... 그랬었지..."
"그때는 말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대답하겠습니다. ... 소녀는 싫사옵니다. 소녀는 끝까지 서방님을 믿을 것입니다."
나는 서방님을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설령 지금까지 서방님께서 속삭인 말들이 전부 소녀를 속이기 위한 거짓일지라도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소녀가 느끼기에 그것이 진심이었으니까 말이옵니다."
"...."
"그러니 서방님께서는 소녀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취하십시오. 비록 소녀가 어리석어 서방님이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나... 서방님께서 황제의 자리를 달라고 하면 드릴 것이고, 소녀의 목숨을 바라다고 한들 드릴 것입니다. ... 그러니 그저 마지막까지 소녀가 서방님의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시옵셔서..."
나는 서방님께 내 진심이 전해지도록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것이 소녀가 바라는 유일한 것이옵니다."
"... 소소야..."
서방님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 아!"
"갑자기 왜 그러느냐?"
"... 소녀 알 것 같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나는 서방님의 귓불을 깨물며 속삭였다.
"지금 서방님께서는 소녀의 몸을 바라시는 것 같사옵니다!!"
"... 아.. 안된다! 소소야! 여긴 침실도 아니고 아직 집무시간...!"
"안되기는 무엇이 안 된단 말입니까! 몸은 이렇게 솔직한데 말이옵니다!! 어서 벗으십시옵서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이것이 나와 서방님의 관계였으니까.
그저 함께하는 이 순간이 행복했고,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믿었다.
... 그래.
그렇게 믿었었다.
루시아 우르엘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